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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신(魯迅) 선생(先生)의 부인(夫人) 허경송(許景宋) 여사(女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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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이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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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迅[노신] 先生[선생]의 夫人[부인] 許景宋[허경송] 女史[여사]
 
2
本書[본서]는 魯迅[노신] 先生[선생]의 夫人[부인] 許景宋[허경송] 女史[여사]가 日帝[일제]의 侵略戰爭[침략전쟁]인 소위 所謂[소위] 大東亞戰爭[대동아전쟁]이 沒發[몰발]한 后[후] 筆舌[필설]로 表現[표현]하기 어려운 遭難[조난]을 當[당]하게 되었든 그 前後[전후]의 이야기를 自敍[자서]한 것으로 本書[본서]는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 政策[정책]이 中國[중국] 革命家[혁명가]들에게 加[가]한 慘酷[참혹]하고도 野蠻的[야만적]이었든 罪惡[죄악]의 皮相的[피상적]인 暴露[폭로]이다. 中華民國[중화민국] 三十六年[삼십육년] 二月[이월] 七日[칠일]에 鄭振鐸[정진탁]은 序文[서문]에 말하기를
 
3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人間[인간]으로서 想像[상상]하기 어려운 고문[拷問]과 毆打[구타]를 當[당]하였으매도 不拘[불구]하고 最后[최후]까지 勇敢[용감]하게 ▣들에게 反抗[반항]하였고, 出獄[출옥][후] 他人[타인]들이 얼마나 苦痛[고통][당]한가를 물은즉 그는 다만 沒有甚麽[몰유심마], 沒有甚麽[몰유심마]라 할 뿐, 對答[대답]함을 拒絶[거절]하였다 함. 우리들은 本書[본서]를 읽음무로서 그가 敵人[적인]들에게 勇敢[용감]스럽게 對抗[대항]하였고 마 - 는 試鍊[시련]과 苦痛[고통]을 봐덨으며 이어야 말로 中國[중국] 女性[여성]의 偉大[위대]한 模範[모범]이 되었으며, 千百年[천백년][후]의 사람까지도 誦讀[송독]할 價値[가치]가 有[유]하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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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人民[인민]의 立場[입장]으로서의 나(人民立場的我[인민입장적아])
 
5
날로 甚[심]하여가는 外敵[외적] 侵略[침략]의 毒舌[독설]은 積極化[적극화]되어 上海[상해]는 거히 그들 손에 드러가게 되었다.
 
6
한 中國[중국]의 人民[인민]으로서의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中國人民[중국인민]의 現當面問題[현당면문제]에 있어서 一種[일종]의 恐怖心[공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엇찌하면 이들의 包圍[포위]속에서 自由[자유]의 天地[천지]로 脫逃[탈도]할 수 잇는가 하는 不安定[불안정]한 情緖下[정서하]에서 동무들과 만나 意見[의견]을 交換[교환]한 后[후] 結局[결국] 當身[당신](景宋[경송])은 逃亡[도망]할 必要[필요]가 없다. 則[즉] 景宋[경송]은 아직끋 아모 것도 한 일이 없고 日本人[일본인]이 魯迅先生[노신선생]에 對[대]하여서도 매우 尊意[존의]를 表[표]함으로 絶對[절대] 아모 遠慮[원려]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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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景宋[경송] 女史[여사] 自身[자신] 집을 버리고 逃走[도주] 못할 理由[이유]는 아이들의 體質[체질]도 健康[건강]치 못하고 只今[지금] 若干[약간] 조워저 가는대 먼 길을 到底[도저]히 거러갈 수 없었고, 또 집에 잇는 一草[일초] 一木 [일목] 一槕[일탁] 一椅 [일의] 一書[일서] 一物[일물]은 모다 魯迅先生[노신선생]이 남게둔 겄이무로 잘 保管[보관]하여 완 것이다. 이것들은 景宋[경송] 個人[개인]의 財産[재산]이 아니며, 全國[전국] 人民[인민]의 겄이다. 이 藏書[장서]는 매우 貧弱[빈약]하고 이 貧瘠[빈척]의 土地[토지]나마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고 生命[생명]을 供給[공급]한 糧半[양반]임으로 었찌 이를 景宋[경송] 個人[개인]의 所有物[소유물]처럼 할 수 있으리…….
 
8
이러한 生覺[생각]이 왈컨 올라와 이겄을 지케야 할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늣기여 이를 他人[타인]에게 附託[부탁]함은 千萬不當[천만부당]하여 人民[인민]의 立場[입장]에 잇는 景宋[경송]으로서 이 땅 上海[상해]를 한 발짜기도 떠나지 않으무러서 逝去[서거]하신 魯迅先生[노신선생]에 對[대]하야 尊意[존의]를 表[표]하리라 여기었으며, 景宋[경송] 女史[여사]가 中國[중국] 人民[인민]의 立場[입장]으로서의 一員[일원]으러서 魯迅先生[노신선생]이 남겨놓은 모 - 든 겄을 責任[책임]과 義務感[의무감]으로서 永遠[영원]히 保存固守[보존고수]하겟다 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의 發現[발현]이며, 이겄으로서도 魯迅[노신]의 藏書[장서]가 一時代[일시대]의 文化[문화]와 社會[사회]에 미친 影響[영향]이 얼마나 至大[지대]하였으며 將來[장래]의 中國[중국]에 있어서 얼마만큼 尊重視[존중시]되어야 할 겄인가를 諒知[양지]할 수 잇는 바이다.
 
 
9
[이]. 遭難[조난]의 開始[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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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민국] 三十年[삼십년] 十二月[십이월] 八日[팔일]. 日本[일본]이 英美[영미]에 對[대]하여 宣戰布告[선전포고]를 하야 珍珠灣[진주만]을 奇襲[기습]한 事件[사건]을 이르킨 그 이튼날 日軍[일군]은 上海[상해] 租界[조계] 않으로 進入[진입]하여 왔다. 景宋[경송]은 동무들과 함게 이것저것 相議[상의]한 結果[결과] 結論[결론]은 前[전]과 같이 “爾可以不走[이가이부주] 因爲爾回來就沒有做甚麽事[인위이회래취몰유주심마사] 而且日本人對魯迅先生也限尊敬[이차일본인대노신선생야한존경] 絶不會對守怎爾的[절불회대수즘이적]”라 하였다. 景宋[경송] 自身[자신] 充分[충분]히 檢討[검토]한 后[후] 結局[결국] 逃亡[도망]치 않키로 하었다. 그러나 그는 萬一[만일]의 境遇[경우]를 生覺[생각]하엿다. 仝[동] 十二月[십이월] 十一日[십일일] 그 날 上海[상해][각] 新聞[신문]에 日本[일본] 責任者[책임자] 發表[발표]에 依[의]하면, “這次是向英美作戰[저차시향영미작전] 對中國人是優▣的[대중국인시우▣적] 就是抗日分子也予以寬容云云[취시항일분자야여이관용운운]” 라는 記事[기사]가 一齊[일제]히 揭載[게재]되였다. 그리고 英美人[영미인]이 타고 가든 人力車[인력거]를 불으러 끌고가든 中國人[중국인]을 타게 하고, 타고가든 英美人[영미인]이 끌게 하는 等[등] 여러 가지 點[점]을 보아 어느 程度[정도] 더 安心[안심]하였다.
 
11
意外[의외]에도 日軍[일군] 租界[조계]에 侵入[침입]하자 一週日[일주일][후]인 十二月[십이월] 十五日[십오일] 早朝[조조] 五時[오시]. 날도 아직 캄캄할 때 二三十名[이삼십명]의 발소리와 사람 소리가 먼대서부터 점점 가갑게 들려오자 門[문]을 뚜드렷다. 景宋[경송]은 急[급]하게 이러나 狀門[상문]을 열은즉 十餘名[십여명]의 變裝[변장]한 者[자]들이 들어왔다. 其中[기중]의 한 조고만하고 眼鏡[안경]을 쓴 者[자]가 中國語[중국어]로서 景宋[경송] 女史[여사]와 問答[문답]함을 보면 다음과 같음.
 
12
爾姓甚麽[이성심마] 姓許[성허] 叫甚麽名字 [규심마명자] 我一想租屋時用的戶名是逸塵二字[아일상조옥시용적호명시일진이자] 就是‘逸塵 ’[취시일진] 還有甚麽名字[환유심마명자]? ‘廣平’[광평] 別外還有沒有?[별외환유몰유] 我想不必遮瞞的[아상불필차만적] 馬上回答‘景宋’[마상회답경송] 還有沒有?[환유몰유] 沒有了[몰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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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은 許景宋[허경송]이라는 겄을 確實[확실]히 把握[파악]한 后[후] 滿足[만족]한 듯시 말하기를 “對了”[대료] 하고 房[방] 안으로 搜索[수색]하기 始作[시작]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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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目標[목표]는 노푼 書柵[서책]에 있었으며, 이리저리 新出版[신출판]된 書[서][급] 동무들의 譯書[역서]로서 親[친]히 題字[제자]를 한 書籍[서적] 其他[기타] 魯迅[노신] 三十年集[삼십년집] 一部[일부]와 魯迅先生[노신선생] 親筆寫[친필사]의 日記[일기] 一包[일포]를 둘첫다.
 
15
그것은 民國[민국] 元年[원년]부터 十四年[십사년]까지의 겄이다. 眼鏡[안경]을 쓴 者[자]는 이 日期[일기]를 가저갈려고 할 때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事情事情[사정사정] 이겄은 내가 쓴 겄이 아니고 魯迅先生[노신선생]의 日記[일기]이며, 子息[자식]들을 爲[위]하야 그의 父[부]가 난겨노은 겄이니 가저가지 말라고 附託[부탁]하였다. 그 者[자]는 말하기를 “不要緊[불요긴] 看過會還給爾的[간과회환급이적]”라 하며 其他[기타] 書籍[서적]과 함게 가저감. 아직 열 멧개의 圖章[도장]이 그 속에 있어 크다랏케 두 봇따라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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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遭難[조난]은 開始[개시]되였다. 날이 발거지자 그들은 景宋[경송] 女史[여사]를 함게 다리고 갓다. 女史[여사]는 親友[친우]들에게 如何[여하]한 근심도 끼치지 않을려고 하였으며 아이들도 놀라게 할려하지 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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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護送[호송]된 后[후](被押解後[피압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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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郵便局[중앙우편국]에서 얼마 안 가면 卽[즉] 上海人[상해인]이 모다 떠는 人類虐殺屠場日本憲兵隊總本部[인류학살도장일본헌병대총본부]가 있다. 景宋 [경송]은 조고만하고 침침한 냄새 나는 房[방]으로 끌려가 景宋[경송]을 다리고 온 조고만한 倭[왜]놈으로부터 이것저것 訊問[신문]을 當[당]한 后[후], 手套[수투] 時計[시계] 所持[소지]하고 있던 一百數十元[일백수십원][급] 其他[기타] 所持品[소지품]을 꺼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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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宋[경송]은 집을 떠날 때 一百數十員[일백수십원]이 있었으나 普通[보통] 外出時[외출시]에 늣코 다니는 程度[정도]임으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린아히들이나 쓰게 두고 가라고 警告[경고]함을 들지 않고 집에 또 있다고 하여 가지고 왔다. 景宋[경송]은 獄中[옥중]에서 돈이 必要[필요]할지도 몰으고 或間[혹간] 金錢[금전]으로써 適當[적당]히 倭[왜]놈을 買受[매수]할 수 엇는 境遇[경우]가 있을 지 몰라 돈을 가지고 왔으나 想像外[상상외]에도 全部[전부] 터러내놓케 되었으무로 아모 겄도 되지 않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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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鏡[안경] 쓴 倭[왜]놈은 모 - 든 手續[수속]을 끈낸 后[후] 끝에다 左左木德正[좌좌목덕정]라고 署名[서명]함으로 이 때 처음무로 景宋[경송]을 잡아온 者[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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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囚徒生活[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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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부터 景宋[경송] 女史[여사]의 囚徒生活[수도생활]이 始作[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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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約[약] 九時頃[구시경]. 綠色[녹색] 軍裝[군장]을 하고 肩上[견상]에는 별과 金箔[금박]이 몃 게 잇는 커다라고 大端[대단]히 印象[인상]이 낫뿐 中國[중국]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을 쥐기고도 눈도 꼼적 않아는 惡毒[악독]한 者[자]가 엽푸로 노여잇는 椅子[의자]에 안지고 깽파랜 飜譯生[번역생]이 景宋[경송] 옆에 안젓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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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于先[우선] 如前[여전]히 姓名[성명] 籍貫[적관] 學歷[학력] 結婚年時[결혼년시][등] 매우 仔細[자세]히 飜譯[번역]하는 者[자]를 通[통]하여 訊問[신문]하면서 記錄[기록]하였다. 그리하더니 거히 午后[오후] 一時[일시]가 되었다. 倭[왜]놈들은 犯人[범인]이 絶食[절식]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엿다. 景宋[경송]도 自己自身[자기자신]의 生命[생명]을 維持[유지]함으로 鬪爭[투쟁]을 繼續[계속]하여야 하고, 그 놈들 손에 無慘[무참]하게 죽엄을 當[당]하기 실어하여 自己[자기]는 胃[위]가 낫뿌다. 그러니까 麵類[면류]를 달라고 要求[요구]하엿다. 同時[동시]에 그 印象[인상] 낫뿐 惡毒[악독]한 者[자]와 飜譯生[번역생]도 거기서 먹고 休息[휴식]하기 始作[시작]하엿다. 惡毒[악독]한 者[자]는 冊上[책상] 우에서 낫잠을 자고 잇엇고, 차춤차춤 코를 골고 있었으며, 飜譯生[번역생]은 이리저리 걸고 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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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宋[경송] 女史[여사]는 안저서 自己[자기]의 思緖[사서]를 整理[정리]하고 있었다. 景宋[경송]은 自己自身[자기자신]이 如何[여하]한 理由[이유]로서 日本[일본] 憲兵隊[헌병대]에 왔으며 魯迅[노신] 三十年集[삼신년집], 魯迅日記[노신일기], 동무가 보내준 文學[문학] 譯書[역서], 其他[기타] 社會[사회]에서 恒常[항상] 볼 수 잇는 刊行物[간행물]들이 景宋[경송]의 마음을 大端[대단]히 쓰리게 하는 理由[이유]가 那邊[나변]에 잇는가를 景宋[경송]은 理解[이해]하기 困難[곤란]하였다 함.
 
26
그 惡毒[악독]한 者[자]의 꿈. 그 新鮮[신선]하든 꿈. 사라 잇는 靈魂[영혼]을 손안에 늣코 가진 方式[방식]으로 弄樂[농락]하는 卽[즉] 自己[자기]가 拷問[고문]하는 美夢[미몽]도 깨버린 模樣[모양]이다. 그는 다시 審問[심문]을 開始[개시]햇다. 그 審問[심문]은 저역까지 繼續[계속]되었다. 景宋[경송]도 매우 疲困[피곤]을 늣끼게 되었다. 그 때는 午后[오후] 九時[구시]였엇으며 그 者[자]들도 疲困[피곤]한 지 審問[심문]을 中止[중지]하고 各各[각각] 署名捺印[서명날인]하고 景宋[경송]의 捺印[날인]을 要求[요구]하여 書類[서류]를 提示[제시]할 때 景宋[경송]은 그 者[자]가 奧名[오명]임을 앓엇다.
 
27
奧名[오명]에게 護送[호송]을 받어 景宋[경송]은 階段[계단]을 나려와 도야지 우리간에도 比[비]할 수 없는 놀날만하게 냄새나는 조고만한 鐵門[철문] 안房[방]으로 들어가게 되엇다. 그러한 房[방]으로 들어가지만 景宋[경송]은 마치 虎口[호구]에서 그럭저럭 하로를 살어나완 같은 氣分[기분]이였엇다 함. 이 章[장]을 볼 때 景宋[경송]이 얼마마한 拷問[고문]을 當[당]하였으며 監房[감방]의 實相[실상]은 如何[여하]하었으며 또 重要[중요]한 事件[사건]을 取調[취조]하다가 잠들어 꿈끼는 日人[일인] 憲兵[헌병]의 隨落性[수락성]을 諷刺[풍자] 또는 暴露[폭로]하었다.
 
 
28
[오]. 囚室[수실] 一瞥[일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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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간 罪囚室[죄수실]이라는 곳은 普通[보통] 一間[일간] 客室[객실] 程度[정도]의 大端[대단]히 狹小[협소]한 房[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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窒息致死[질식치사]할 듣한 囚室[수실]에서도 便所[변소]와 通路[통로]를 除外[제외]한 比較的[비교적] 淸潔[청결]하다고 할 만한 곧은 罪囚[죄수][중]에서도 좀 特權階級[특권계급]의 犯罪者[범죄자], 곧 日本人韓國人[일본인한국인]과 같은 그들과 直接[직접] 通話[통화]되는 犯人[범인]들이 占有[점유]하는 겄이 이 곧의 通例[통례]로 되어 있었다.
 
31
이런 特權階級[특권계급]의 人物[인물]들은 거히 每室[매실] 二三人[이삼인]은 들어 있으며 中國人[중국인]이나 一般[일반] 遭難民[조난민]에게 조곰마한 잘못만 있으면 이들은 곧 大聲報告[대성보고]하며 瞬間[순간] 監視者[감시자]로부터 懲罰[징벌]의 매가 닥처왓다 함. 이러서 一般[일반] 遭難民[조난민]은 그 거만하고 言語道斷[언어도단]인 日本[일본]놈 憲兵[헌병][외]에도 이러한 ‘스파이’라고까지 疑心[의심]을 받고 있는 特權階級[특권계급]의 人物[인물]들에게까지 相當[상당]한 敵意警戒[적의경계]를 表[표]하지 않으면 안되엇다 함.
 
32
이러한 意外[의외]의 監視者[감시자](스파이)가 잇는 以上[이상] 自由[자유]로운 交談[교담]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은 詳論[상론]할 餘地[여지]도 없다. 이와같은 愁憂[수우]한 속에서 하로 해를 보낸 다음은 그들 遭難民[조난민]에게도 疲勞[피로]를 回復[회복]하는 睡眠[수면]의 時間[시간]은 닥차오는 겄이다. 밤 九時頃[구시경]이면 커다란 이불 볻따리가 들어온다.
 
33
얄풋한 담요(毛布[모포])와 같은 덮을 것 읍는 이불이나마 너 나 하면서 서로 앞을 다투어 이불 빼앗끼 騷動[소동]이 잃어나게 되는 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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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斯[여사]한 現象[현상]도 無理[무리] 안인 겄은 體面[체면] 云云[운운]을 論[논]하다가는 겹이불 같은 이불이나마 數爻[수효] 關係[관계]로서 半[반]쪼각도 차지하지 못하는 例[예]가 없지안는 까닭이라 함. 이러한 騷動[소동][중]에 한 마디 큰소리라도 나온다면 이가 또한 棍棒[곤봉]으로 함부로 얻어맛는 動機[동기]가 되는 겄이라 함.
 
35
景宋[경송]은 이 一場面[일장면]의 生動的[생동적] 活劇[활극]에 놀래 氣絶[기절]하고 말엇다. 마치 바보와 같이 우득허니 서 있는 나(景宋[경송])는 어느 사람의 손으로부터인지 더럽게 짝이 없는 다 - 떨어진 담요(毛布[모포]) 한 쪼각을 얻어서 一年餘[일년여]를 拘禁[구금][당]하고 榮養不良症[영양불량증]을 이르키어 마치 물소(水牛[수우])와 같이 퉁퉁 뿌러올른 참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죽엄의 動物[동물]을 비롯하여 하아 - 하아 - 죽엄의 直前[직전] 마디 숨을 쉬고 잇는 者[자], 다시 長期[장기] 설사에 시달리는 者[자] 等等[등등][외]의 四十六[사십육], 七人[칠인]이 통조림(缶語[관어])처럼 빕짜고 있는 四方[사방] 六尺[육척]의 單間房[단간방]에서 밤이 다 - 가도록 잠 한 잠 못 이루면서 精神異常[정신이상]의 白系[백계] 露國人[로국인] 女子[여자]의 亂舞[난무]를 琓賞[완상]하는 等[등]이 景宋[경송] 女史[여사]의 遭難[조난][중]에서도 가장 特記[특기]할 만한 쓰라림이엿든 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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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千萬年[천만년] 사라지지 못할 이 感慨[감개]의 하로밤. 통조림에 쟁에진 고기와 같이 착착 싸인 이 속의 難民[난민]들. 苦中[고중]에도 較爲安居[교위안거]를 爭執[쟁집]하다가 無滋味[무자미]한 棍棒[곤봉]에 휩쓸이며 참지 못해 터저나는 엄마! 엄마!들 부르는 아우성 소리……. 如斯[여사]한 속에서 었찌 못할 밤은 지나가고 다음날 새벽 全囚室[전수실]을 震動[진동]하여 들려오는 “起床”[기상] 의 呼令[호령]과 함게 커 - 다란 味嚕樽[미로준]에 四十餘人[사십여인]의 洗手[세수] 물이 들어오면 難民[난민]은 우굴우굴 양추하여 다시 桶[통] 안에 뱃타놋는 等[등], 或[혹]은 꿀꺽 생키여 버리는 等[등] 요란한 洗手[세수]가 끝나면 다시 이 덜어운 물에 걸래를 축이여 바닥을 淸潔[청결]하기에까지 使用[사용]하게 되는 形便[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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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不淸潔[불청결] 難眠[난면]에 基根[기근]하여 모 - 든 傳染病[전염병]은 連發生[연발생]하며 이가 뒤끌른 속에서 景宋[경송]의 煩憂[번우]는 되푸리되는 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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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이상] 이 景宋[경송] 女史[여사]가 自敍[자서]한 囚室[수실] 一瞥[일별]이다.
 
 
39
[육]. 難友[난우] (함게 囚室[수실]에서 遭難[조난][당]하고 잇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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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이상]의 記述[기술]한 바 景宋[경송] 女史[여사] 밑 모 - 든 難友[난우]가 얼만한 苦難[고난]을 겍그고 있었나 하는 겄을 推測[추측]할 수 잇는 봐이나 特[특]히 被動的[피동적]인 아츰 體操時[체조시]의 口號[구호]에 내품어진 “過了一天又一天[과료일천우일천] ‧‧‧ 心中好比滾油煎[심중호비곤유전]” 云云[운운]의 一節[일절]로써 더욱 明確[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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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前記[전기] 水牛[수우]의 慘酷[참혹]한 죽엄을 보았다. 至極[지극] 簡單[간단]한 消毒[소독]을 마친 后[후] 흘리고 죽언 피(血[혈])도 말르기 前[전]에 그 자리에는 四五人[사오인]의 英美人[영미인]이 代身[대신] 쟆여들어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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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은 慘酷[참혹]한 中[중]에서도 믿음직한 中國同胞[중국동포]의 偉行[위행]에는 佩服[패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間或[간혹] 보여지는 것이였으니 곧 어느날 눈에 띄인 二十[이십] 前後[전후]의 熱熱[열열]한 靑年[청년](憲兵[헌병]을 暗殺[암살]하고 被檢[피검]됨)으로부터 들은 말의 “我爲什麽[아위십마] … 最要緊是前后口供一致[최요긴시전후구공일치]…” 이라는 萬難[만난]을 突破[돌파]하고 오는 經檢[경검]으로부터의 懇切[간절]한 一句[일구]의 指示[지시]는 나로 하여 百折不屈[백절불굴]의 참다운 中國人的[중국인적] 精神[정신]의 勇敢[용감]을 주어 最后[최후]의 一幕[일막] 勝利[승리]를 얻게 한 例[예]가 곧 佩服[패복]할 一例[일례]인 外[외]에 永久不變[영구불변]하는 堅强[견강]한 中國人[중국인]의 一貫[일관]된 精神[정신]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업는 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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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四天[사천] (拘禁[구금][당]한지 四日[사일] 되든 날)
 
44
每日[매일] 아츰 九時[구시] 前后[전후]는 苦難[고난][중]에서도 가장 不安[불안]한 一瞬間[일순간]인 겄이다. 곧 낫설은 구두(靴[화]) 소리와 함게 밀려들어오는 許多[허다]한 新難友群[신난우군]을 비롯하여 낯 익은 구두(靴[화])소리와 함게 사람으로서는 견델 수 없는 죽엄 같은 拷問[고문] 場面[장면]으로 있끌려 가는 舊難友 [구난우]의 恐怖[공포]인 겄이다.
 
45
이와같은 塗炭[도탄]에서 呻吟[신음]하는 罪[죄]없는 難友[난우]들은 차라리 自殺[자살]이라도…. 自殺[자살]…. 아니다. 歁[감][혁][홍][유][등]의 모 - 든 壓迫[압박] 밑 非人的[비인적]인 拷問[고문]을 거듭하고 있는 겄이다.
 
46
普通[보통]의 難友[난우]가 모다 當[당]하는 以上[이상]의 四階段[사계단]의 拷問方法[고문방법]은 景宋[경송] 女史[여사]도 逮捕[체포]된지 四日[사일]되는 날로서 모다 施行[시행][당]햇든 겄이다. 다 - 만 以上[이상]의 四日間[사일간]은 그래도 相當[상당]히 思讓[사양]하든 便[편]이여서 그다지 過激[과격]하지 않은 訊問[신문] 곧 엇떠한 朋友[붕우]가 있느냐? 或[혹]은 往來[왕래]하는 사람들은? 이 무슨 엇떻게 生活[생활]을 잇느니 等等[등등]으로 點心[점심]에 국수 한 그릇을 멕이는 外[외]에 午后[오후] 九時頃[구시경]이면 또다시 한間房[간방] 囚室[수실]에 몰아 가두는 形便[형편]으로써 繼續[계속] 되었든 것이다.
 
 
47
[팔]. 凌辱的[능욕적] 試鍊[시련]
 
48
被檢[피검]된 지 第五日[제오일]날. 如前[여전]히 아츰 九時頃[구시경]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二層[이층] 訊問室[신문실]로 引率[인솔]되였다. 이가 곧 참지 못할 凌辱[능욕]의 첫거름이였다.
 
49
上海[상해]에 日本人[일본인]의 知人[지인]은?
 
50
“內山[내산]
 
51
서슴지 않고 對答[대답]하였다.
 
52
“또 누구?”
 
53
“增田[증전].”
 
54
또 對答[대답]하였다.
 
55
“또 누구?”
 
56
“없오.”
 
57
이재는 別[별]로 없었다.
 
58
“거짓말.”
 
59
忽然[홀연][양] 볼에 함부로 닥처오는 無慈悲[무자비]한 ……. 瞬間[순간] 두 귀(耳[이])는 웅웅거리였다. 또 누가 있어?
 
60
“…….”
 
61
如前[여전]히 없다.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또 함부로 마젔다. 빨리 말해! 빨리 말하면 곧 집으로 보내줄테야! 이와같은 形便[형편]으로 誘惑[유혹] 亂打[난타]로서 한참 지나니 얼골은 성한 곳이 없고 두 귀의 싸이렝 소리는 더욱 擾亂[요란]하였다. “빨리 말해!”
 
62
또다시 달콤한 音聲[음성]으로….
 
63
이번에는 그 무지막한 가죽 長靴[장화]의 발길이 나의 허벅다리로 或[혹]은 腹部[복부]로 함부로 차기 始作[시작]하였다. 나는 다 - 만 心房[심방]을 緊閉[긴폐]하고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앉어 있는 外[외]에는 아 - 모런 表情[표정]도 必要[필요]치 않었다.
 
64
반드시 監獄生活[감옥생활]의 쓰라림을 體驗[체험]하지 못하고는 到底[도저]히 想像[상상]조차 할 수 업는 이 험악한 人間地獄[인간지옥]에서 萬般[만반]의 苦難[고난]을 突破[돌파]하고 잇는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犧牲自己[희생자기] 保全他人[보전타인] 犧牲個人[희생개인] 保全團體[보전단체]”의 굳은 意志[의지]로써 죽엄의 길을 되푸리되푸리 繼續[계속]하고 있었든 겄이다.
 
65
한동안이 지난 后[후]
 
66
“옷을 벗어라.”
 
67
그 惡毒[악독]한 놈의 音聲[음성]은 울려왔다.
 
68
中國人[중국인] 通譯[통역]을 爲始[위시]하고 七八人[칠팔인]의 日本人[일본인]이 둘러싼 이 地獄[지옥]이지만 反抗[반항]치 못할 이 吩咐[분부]인지라, 道理[도리] 없이 하나하나 뻐서 ‘빤스’ 바람으로 裸體[나체]의 몸이 되어버렷다.
 
69
이를 본 倭[왜]놈의 “告白[고백]치 않으니까 軍法處[군법처]로 보내겠다”는 威嚇[위혁] 한마듸를 남기로 이 날의 慘酷[참혹]하든 拷問[고문]도 一段落[일단락]을 보았다.
 
 
70
[구]. 稍息[초식]
 
71
가진 凌辱[능욕]을 다 - 當[당]하여 함부로 打撲[타박]을 當[당]하든 다음 날 그는 三層醫療室[삼층의료실]에 끌어여 診療[진료]을 받게 되었다. 忽然[홀연] 女史[여사]는 “음…. 차라리 한입에 물어 죽어려무나! 물엇다가는 노아주고, 노았다가는 또 물고, 흔드는 이 惡毒[악독]한 놈들의 手中[수중]에서 弄洛[농락][당]하는 겄보다도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겄이…….”의 한 토막의 生覺[생각]이 머리를 쓰처가매 그의 憤激[분격]은 더욱더욱 가슴 깊이 매저지는 겄이였다.
 
 
72
[십]. 再練[재련]
 
73
身體[신체]의 不調[부조]로 因[인]하와 第六[제육]과 第七日[제칠일]은 訊問[신문]을 避免[피면]하고 第八日[제팔일]이 되는 날이였다.
 
74
如前[여전]히 나는 訊問室[신문실]에 불어고 只今[지금]에 이르끼까지 말로만 들엇든 ‘麻電’[마전]의 施用[시용]이 始作[시작]되였든 겄이다. 이 沒人情[몰인정]한 電流[전류]…. 肉身[육신]과 腦神經[뇌신경]을 거처 다시 血管[혈관] 骨髓[골수]에 이르기까지 全體[전체]이 곧곧에 底觸[저촉]하며 劇烈[극렬]한 變化[변화]를 發起[발기]하니 內藏[내장] 四肢[사지] 五官[오관] 百骸[백해]에 이르기까지 그외 反映[반영]은 미치지 않어하는 곳이 업스며 그의 苦痛[고통]이란 겄은 참으로 筆舌[필설]로서 形容[형용]할 수 없는 겄이였다. 이와같이 終日[종일]을 繼續[계속]하고 午后[오후]엔 自身[자신]의 肉體[육체]도 持續[지속]하지 못할 程度[정도]에 이르러매 다시 例[예]의 囚室[수실]에 밀여백이게 되었든 겄이다.
 
 
75
十一[십일]. 受刑之後[수형지후]
 
76
全顔[전안]은 打撲[타박] 發腫[발종]하고 全體[전체]엔 피(血[혈])가 뭉치여 한 곧도 성한 곳이 없게 되었을지나 이는 다만 皮外傷[피외상]에 不過[불과]한 것이라 그다지 痛感[통감]을 늣끼게까지는 못되였든 겄이다. 다- 만 電形[전형]을 밧고난 后[후]로는 胃[위]와 밑 內藏[내장]에까지 影響[영향]을 얻어 胸部[흉부]는 뛰놀고 頭腦[두뇌]는 自恍[자황]하며 消化[소화]의 不進等[부진등][실]로 盡筆難言[진필난언]의 大映[대영]을 입게되었다.
 
 
77
十二[십이]. 一號內室[일호내실]
 
78
被逮捕[피체포][후] 第十日[제십일] 나는 露國女人[노국여인]과 함게 第一號室[제일호실]로 옮기여 왔다. 三十名[삼십명] 內外[내외]가 收容[수용]되여 있는 前[전]보다도 比較的[비교적] 寬㓉[관활]하다고 할 수 있는 곧이였다.
 
79
이 곳으로 옴겨오매 多少[다소] 從前[종전]의 內室[내실]보다는 나아진 便[편]인 外[외]에 더욱 가슴 깊이 刺戟[자극]을 봐든 겄은 끈을 풀로써 頭頸部[두경부]를 함부로 燙壤[턍양]하며 竹棒[죽봉]으로써 亂打[난타]하여 血肉[혈육]을 뒤석에까지 當[당]하엿다는 中國人[중국인] 難友[난우]를 비롯하여 兩肢[양지]의 關節[관절]을 被傷[피상][당]하여 半[반]안즌뱅이가 되어버린 難友[난우](憲兵[헌병]을 暗殺[암살]하고 告白[고백]치 않은 鬪士[투사]) 等[등]의 抗戰[항전] 英雄[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새로운 勇氣[용기]와 밑 抗爭力[항쟁력]을 얻게된 겄이였다.
 
 
80
十三[십삼]. 撒謊[살황](거짓말)
 
81
電形[전형]을 받은지 이미 數日[수일]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內傷[내상]은 如前[여전]히 回服[회복]되지 않았을뿐더러 咽喉[인후] 痛症[통증]은 날로 激甚[격심]하여 갈 뿐이였다.
 
82
忽然[홀연] 女史[여사]는 內室[내실]의 門[문]살에 기대여 曾日[증일]의 阿[아]Q를 追憶[추억]하기에까지 이드니 한 卷[권]의 冊[책], 한 사람의 벗(友[우]), 此後[차후] 꼬치꼬치 캐여뭇는 廣泛不當[광범부당]한 訊問[신문]에 激憤[격분]한 남어지 - 破裂[파열]되는 듯한 頭痛[두통]을 禁[금]할 수 없는 境地[경지]에 到達[도달]하고 말았다.
 
83
곧 그의 難關[난관]은 全書冊[전서책]의 數爻[수효]대로 또는 知之[지지]한 朋友[붕우]의 數爻[수효]대로 一一[일일]히 거치는 것이였든 겄이라 記憶[기억]에 없는 諸事[제사]를 自說[자설]의 謊言[황언]으로써 前後[전후] 一致[일치]하게 묻어나가는 捷敏[첩민]한 思索[사색] 亦是[역시] 極難[극난]의 하나가 않일수 없었든 바이다.
 
 
84
十四[십사]. 我的感想[아적감상]
 
85
몇일이 지난 어느 날이였다. 나는 또다시 二層[이층]에 불려 올리고 其[기] 惡漢[악한]의 槕上[탁상]에는 依然[의연] 電形器[전형기]가 널려 있든 것이였다.
 
86
今日[금일]은 더욱 加重[가중]할 것이 안인가?
 
87
景宋[경송]은 恐怖[공포]에 사로잪이여 마침내 憤恨[분한]의 우룸으로 變[변]하고 當場[당장]에 죽어버리는 겄이 도리여 얼마나 平安[평안]한 겄이냐…. 이러한 生覺[생각]이 치밀어 참지 못해 大聲痛哭[대성통곡]하며 “나는 强盜[강도]가 아니다. 나를 强盜[강도]의 手段[수단]으로써 對[대]하지 말어라! 不可能[불가능]한 範圍[범위]의 訊問[신문]이라면 너이가 나를 죽이지 않아 別手段[별수단]을 다 - 한 대도 나는 말할 수 없는 바이다. 빨이 죽이고 말어라! 어서 죽이여라! 나는 더 - 참을 수 없다.” 憤慨[분개]에 넘치는 景宋[경송] 女史[여사]의 마음 속은 드이어 爆發[폭발]하고 말었다.
 
88
이 最後的[최후적]인 爆發[폭발]이 그 非人的[비인적] 惡漢[악한]에게 反映[반영]되였음인지 그는 나의 感想[감상]을 쓰라고 命[명]하였다.
 
89
드디어 相當[상당]의 懇請[간청]에 應[응]하여 “到這裏已經十二天子[도저리이경십이천자] 只望快快回服自由[지망쾌쾌회복자유]…….”의 몃 字[자]를 적어노았다. 이 날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그 者[자]의 勸誘[권유]로써 沐浴[목욕]을 하게됨에 비로소 兩便[양편] 무릅 關係[관계]에 밤톨만한 燒燃[소연]된 痕跡[흔적]을 發見[발견]하였다.
 
90
곧 그겄은 電形[전형]의 膳物[선물]인 겄이며 그는 只今[지금]껐 影響[영향]이 있어 單只[단지] 六七百▣[육칠백]의 거리도 걸어가지 못하는 外[외]에 새다리(梯[제]) 같은 곳도 到底[도저]히 올르지 못하는 終生[종생] 잊을 수 없는 遺跡[유적]이 되어 있는 겄이다.
 
 
91
十五[십오]. 新房子[신방자]
 
92
被捕[피포]된지 거의 二週日[이주일]이 되는 어느날 아츰 景宋[경송]과 女難友[여난우] 三名[삼명]은 看守[간수]에 있끌이어 新築[신축]된 한間[간] 囚室[수실]을 掃除[소제]하고 몃몃 難友[난우]와 함깨 房[방]을 옮기였다.
 
93
其中[기중] 새로 會面[회면]한 難友[난우][중]에는 英美[영미]의 女人[여인]도 섞여 있으며 비로서 女難友別[여난우별] 留置[유치]의 새로운 待遇[대우]를 받게 됨을 따라 우굴우굴하는 이(蝨[슬])를 잡기에도 좀 便利[편리]하여젔을 뿐 도로 醬桶[장통] 汚水[오수]에 合同洗手[합동세수]를 免[면]할수 있는 等[등] 多少[다소] 優待[우대]를 받게 된 便[편]이였으며 또한 每日[매일] 連續的[연속적]으로 行[행]하여지는 拷問[고문]도 이제는 거의 避免[피면]하고 다 - 만 五六日[오륙일]만에 一次式二層[일차식이층] 訊問室[신문실]에 불이여 其看[기간]들의 恣行[자행]을 傍觀[방관]하는 程度[정도]로써 寂莫[적막]한 罪囚生活[죄수생활]을 繼續[계속]하게 되었든 것이다.
 
 
94
十六[십육]. 我的抗議[아적항의]
 
95
以上[이상]과 같은 生活[생활] 形式[형식]으로써 벌서 一月[일월] 十九日[십구일]이 되든 어느날 나(景宋[경송])는 如前[여전]히 訊問室[신문실]에 黙黙[묵묵] 定座[정좌]하고 그들의 蠻行[만행]을 傍觀[방관]하고 있었다.
 
96
이 때이였다. 景宋[경송]은 憤激[분격]한 남어지 가슴에 치밀어오는 ‘抗議’[항의]를 感覺[감각]하였다.
 
97
곧 日本[일본]놈 憲兵[헌병]의 無慘[무참]한 打撲[타박]으로 因[인]하야 힘없이 늘어저있는 一中國靑年[일중국청년]을 日憲[일헌]의 暴行[폭행]보다 다 一層[일층] 加重[가중]한 拷問[고문] 訊問[신문]으로써 亂打[난타] 亂弄[난롱]을 加[가]하고 잇는 華人[화인]인지 韓人[한인]인지 未分明[미분명]한 通譯者[통역자]의 蠻行[만행]이였든 겄이다.
 
98
이 惡毒[악독] 無慈悲[무자비]한 通譯[통역]! 나(景宋[경송])의 神經[신경]은 興奮[흥분]하고 불꾼 쥐인 두주먹 當場[당장]에 터저나올 듣한 抗議[항의]의 마음이였으나 다 - 만 景宋[경송] 亦是[역시] 그 虐待[학대]와 侮辱[모욕]을 같이 밧고완 사람이 않인가? 黙黙[묵묵]히 苦忍[고인]하는 外[외]에는 아 - 무런 方策[방책]도 없었든 겄이라 한 情思[정사]로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드디어 울고 말았다.
 
 
99
十七[십칠]. 又一次搬遷[우일차반천]
 
100
[기] 날 午后[오후]에 囚室[수실]로 도라온 後[후]로는 從前[종전]의 四五日[사오일]만에 한 번식 불여가든 例[예]도 消滅[소멸]되고 長期[장기]의 拘留[구류]가 展開[전개]되였다.
 
101
어느 날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또다시 새로운 囚室[수실]로 옴기였다. 이 곳은 難友 八九人[난우 팔구인]을 收容[수용]할 뿐인 比較的[비교적] 寬㓉[관활]한 留置場[유치장]이었으며, 比較的[비교적] 永久性[영구성]이 있는 政治犯[정치범][등]에 類似[유사]한 難友[난우]를 收容[수용]하는 곳이였다.
 
102
이 곳에서는 外部[외부]의 私食[사식]도 差入[차입]할 수 있는 關係[관계][등] 多少[다소] 融通性[융통성]있는 곧이여서 嚴密[엄밀]한 監視網[감시망]을 打破[타파]한 間或[간혹]의 機會[기회]에서 若干[약간]의 外部[외부] 새로운 消息[소식]도 들을 수 있었든 곳이였다.
 
 
103
十八[십팔]. 朝鮮姑娘[조선고낭]
 
104
이 새로운 房[방]으로 옴게온 지 數日[수일]이 지난 어느 날. 前記[전기]의 囚室[수실] 쓰파이의 嫌疑[혐의]가 濃厚[농후]한 一日本姑娘[일일본고낭]이 入室[입실]하여 同留[동류]하게 되었다.
 
105
諸難友[제난우]는 이가 틀림없이 間諜[간첩]이라 警戒[경계]를 要[요]한다 하여 接近[접근]을 忌避[기피]하였든 겄이나 次次[차차] 알고보니 그는 九人結因[구인결인]하여 密輸出入[밀수출입]을 하고 있었든 朝鮮人[조선인] 婦人[부인]으로써 今番[금번] 滿洲僞券[만주위권]을 藏携[장휴]하려든 겄이 發露[발로]되여 被檢[피검]되고 七八件[칠팔건]의 짐짝(荷物[하물])도 同時[동시]에 押收[압수][당]한 겄이라 하였다. 그 惡毒[악독]한 日本[일본] 놈에게 亡[망]하여 長久[장구]한 奴隸生活[노예생활]을 繼續[계속]하고 있었든 被壓迫民族[피압박민족] 朝鮮姑娘[조선고낭]은 生命[생명]보다고 貴重[귀중]한 짐짝(荷物[하물])과 僞幣[위폐]의 損失[손실]을 憂慮哀痛[우려애통]한 남어지 氣絶[기절]하기에까지에 이르럿든 程度[정도]이라고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朝鮮姑娘[조선고낭]이라는 一節[일절]에서 말하였다.
 
106
이는 무엇을 暗示[암시]하는가?
 
 
107
十九[십구]. 我不知道[아부지도]
 
108
二月[이월] 二十七日[이십칠일]이다. 近來[근래]는 釋放[석방]되는 難友[난우]가 차츰 많어저서 十餘人[십여인]이 收容[수용]되어 있었든 한間[간] 囚室[수실]은 只今[지금]에 있어서는 三四人[삼사인] 많이 남어있을 뿐인 程度[정도]이였다. 濕氣[습기] 가득찬 囚室[수실]에서 格別[격별]한 性心[성심]을 要[요]하는 月經時[월경시]에도 依然[의연] 冷食[냉식]으로써 朝夕[조석]을 의이매 身體不調[신체부조]의 憂慮[우려]가 日[일]로 濃厚[농후]하여가든 어느날 나(景宋[경송])는 囚室[수실]에서 불려나왔다. 同時[동시]에 懹中品[양중품] 書籍一切[서적일체] 寢具[침구][등]도 返還[반환]되였다. 어데로 보내려나?
 
109
[실]로 窮今[궁금]하였다. 이 때 “許[허]! 어데를 가나?” 하는 日憲[일헌]의 嘲弄[조롱]에 景宋[경송]의 怒火[노화]는 暴發[폭발]하여 “都底[도저] 어디로 보내는 거요?” 하고 反問[반문]하였다.
 
110
日憲[일헌]은“몰…라….”고 對答[대답]하였다. 暫時[잠시][후] 좀 高官[고관]인 듣한 한 日憲[일헌]이 나타나 너 - 무도 薄待[박대]하였오! 大端[대단]히 未安[미안]한 터이요!!
 
111
“過去事[과거사]를 모다 이저버리고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시오! 새로운 사람이 되시오!”
 
112
云云[운운]의 한 마듸를 들었을 뿐 如前[여전]한 憲兵[헌병]의 監視下[감시하]에 一行[일행]은 向方[향방]도 모르고 貨物自動車[화물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113
二十[이십]. 在七十六號[제칠십육호]
 
114
難友[난우] 十餘人[십여인]을 실은 貨車[화차]는 兩便[양편]에 中國[중국] 僞軍[위군]의 守衛[수위]가 서 있는 門[문]을 들어서 커다란 中國式[중국식] 建物[건물] 앞에 일으렀다. 景宋[경송]은 七十六號[칠십육호]라는 一間[일간]에 投入[투입]되고 中國人僞兵[중국인위병]의 監視下[감시하]에 座[좌]를 定[정]하였다. 漸次[점차][후] 一中國人[일중국인]에게 領率[영솔]되여 一間[일간] 事務室[사무실]에 이르러 手印[수인]을 남긴 后[후] 옷(衣服[의복]) 가슴에 番號[번호]를 붗인 다음 다시 房[방]으로 도라왔다.
 
115
얼마를 지나 例[예]의 中國人[중국인]은 다시 이르러 保證人[보증인]을 세우고 집으로 도라가라는 宣言[선언]을 하였다.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곧 日本人[일본인] 內山[내산]에게 電話[전화]를 걸어 請[청]하였다. 日本人[일본인]으로부터 有罪者[유죄자]라는 陋名[누명]을 받은 이 몸을 亦是[역시] 日本人[일본인]으로써 無罪[무죄]의 證明[증명]을 하게 하기 爲[위]해서이였다.
 
116
二十七日[이십칠일] 終日[종일]을 苦待[고대]하였으나 內山[내산]은 보이지 않었다. 다음날 아츰 다시 再促[재촉]의 電話[전화]를 請[청]하여 午后[오후] 三時頃[삼시경]에 비로서 內山先生[내산선생]이 찾아 왔다.
 
117
七十五日[칠십오일]만에 처음으로 만나보는 社會[사회]의 朋友[붕우]이였다.
 
118
忽然[홀연] 두 눈에서는 悲哀[비애]의 눈물이 넘처왔다. 內山先生[내산선생]과 氏[씨]의 店員王先生[점원왕선생] 亦是[역시] 同情[동정]의 눈물을 흘려주었고, 一切[일체] 手續[수속]은 終了[종료]되였으나, 三月[삼월] 三日[삼일]에 蘇州[소주]로부터 도라올 上官[상관]의 認准[인준]을 얻어서야만 한다는 口實[구실]로써 다시 머무르게 되었다.
 
119
다시 하로밤을 지난 다음날 三月[삼월] 一日[일일] 午后[오후][예]의 中國人[중국인]은 一切[일체] 手續[수속]이 完了[완료]되였으니 다시 上官[상관]을 기대릴 必要[필요]가 없겟다는 要旨[요지]로써 懷中品[회중품]은 返還[반환]되였다.
 
120
부슬비 나리는 그 날 景宋[경송]은 人力車[인력거]에 몸을 실고 그 魔窟[마굴]을 나와 집으로 도라왔다.
 
121
被檢[피검]된 지 七十六日[칠십육일]되는 날 舊正月[구정월] 十五日[십오일][대]보름날이였다.
 
 
122
二十一[이십일]. 無可補償的損失[무가보상적손실]
 
123
무서운 함정에서 빠저나와 집에 도라와보니 內[내]은 잠기여있고, 女婢[여비]와 兒孩[아해]도 모다 찾아볼 수 없었다.
 
124
多幸[다행]이도 이웃 老人[노인]의 好意[호의]로써 오랜만에 더운 물도 마실 수 있었고 沐浴[목욕]을 하며 衣服[의복]을 바꾸어 잆고 이(蝨[슬])꾸럭이든 머리를 감아빠는 等[등] 맟이 한 가죽을 버서버리는 듯한 輕快[경쾌]한 몸이 되었다. 날뜯한 몸이 되었으무로 거리를 한바탕 뛰고도 십고 크게 의여처 보고도 싶었으나 다 - 만 나의 이 自由[자유]는 아직도 永久[영구]한 겄이 아니무로 萬一[만일] 暗暗裡[암암리]에 뒤를 쫏는 者[자]에게 들키여 다른 友人[우인]에까지 影響[영향]이 미처가게 된다면 그 었지 難堪[난감]의 萬功[만공]을 棄權[기권]함이 아니려요? 그럼으로 景宋[경송]은 밤이 되기를 기다리여 몸을 감추어 建人先生[건인선생]의 집을 찾았고 同時[동시]에 一切 友人[일절 우인]의 往來[왕래]를 禁[금]하여 달라는 一言[일언] 咐託[부탁]만을 남긴 后[후] 곧 집으로 도라왔다.
 
125
여기서 敢[감]히 特記[특기]할 만한 點[점]은 景宋[경송]의 여러 友人[우인]에게 對[대]하는 感謝[감사]와 밑 ▣滅[멸]의 謝罪[사죄]이다. 景宋[경송] 女史[여사]가 逮捕[체포]되는 날 나(景宋[경송])는 兒孩[아해]를 가까히 있는 友人[우인]에게 一任[일임]하고 같은 겄이다.
 
126
그 理由[이유]는 景宋[경송]의 友人[우인]인 그는 大部分[대부분]의 文人[문인]과 相識[상식]하는 緣故[연고]로써 諸[제] 文人[문인]의 連遭[연조]를 免[면]하기 爲[위]해서이였다. 然而[연이]나 意外[의외]에도 未安[미안]하엿든 일은 그 友人[우인]의 居住[거주]하는 家屋[가옥]의 中間[중간] 管理人[관리인]은 自身[자신]에까기 連禍[연화]가 미칠 겄을 遠慮[원려]한 남어지 友人[우인]과 兒孩[아해]를 한 번에 모라내고 말았든 바이라 그는 하는 수 없서 故鄕[고향]으로 도라가게 되었든 겄이니 이로서도 可[가]히 豫測[예측]할 수 있는 諸友[제우]의 辛苦[신고]이였다.
 
127
집에 도라와 安定[안정]한 后[후] 返還[반환]된 書籍[서적]을 삺이여보니 民國[민국] 十一年[십일년]의 魯迅先生[노신선생] 日記[일기] 一冊[일책]을 遺失[유실]되였든 겄이다. 犯罪證件[범죄증건]의 役割[역할]을 하다가 紛失[분실]된 겄인지, 或[혹]은 日憲[일헌]의 휴지(塵紙[진지])로서 찌저버려진 겄인지 알수 없는 겄이다.
 
128
다음 집에 도라온 第一數的[제일수적]인 行事[행사]는 곧 書籍[서적]의 燒棄[소기]이였다. 卽[즉] 下女[하녀]의 辨明[변명]으로써 잘 감추어지고 景宋[경송]의 많은 曖昧[애매]한 苦痛[고통]을 減少[감소]케 하여쥬든 殘餘[잔여]의 書冊[서책][중]에서 被嫌疑[피혐의] 念慮[염려]가 잇는 겄이면 모조리 태워 없애였다.
 
129
그의 요란 불 꼿은 마치 親人[친인]을 生火葬[생화장]이나 하는 듯한 쓰라림이였으나 “驚弓之鳥[경궁지조] 見影心動[견영심동]”의 格[격]이라 不得已[부득이]한 勇敢的[용감적] 敏感[민감]이였든 겄이다.
 
130
其後[기후] 第二次[제이차]의 文字却[문자각]라 이를 바는 곧 淸鄕[청향](地方[지방] 共産黨員[공산당원]의 掃蕩行事[소탕행사]) 工作[공작]의 謠言[요언]이 紛紛[분분]하였을 때이였다. 卽[즉] 抗日[항일][혹]은 反汪[반왕][등]의 文字[문자]가 잇는 書籍[서적] 文件[문건]은 一齊[일제]히 納交[납교]하라는 報道[보도]에 納交[납교]를 忌避[기피]함으로써 大大的[대대적] 燒去[소거]를 行[행]한 겄이 곧 第二次[제이차]인 겄이며 敢[감]하 景宋[경송]은 友人[우인]들의 諒承[양승]을 請[청]하지 않은 겄도 있어 이가 곧 無可補償的損失[무가보상적손실]이 되는 겄이다.
 
131
出獄[출옥][후] 두 달째인 四月[사월] 十九日[십구일] 忽然[홀연] 調査統計部[조사통계부] 駐滬辨事處[주호판사처]에서 本月[본월] 二十日[이십일] 午后[오후] 三時[삼시]까지 必頭[필두]하라는 書信[서신]을 받고 憂慮[우려]에 미친 마음으로 出頭[출두]한 즉 그들은 다만 出獄[출옥][후] 一二個月間[일이개월간] 무었을 하여 완가를 問[문]하무로 景宋[경송]은 心底[심저]의 治療[치료]를 하고 있었다고 말한즉 洋服[양복]을 입은 者[자]는 親切[친절]히 몃 마디의 甘言[감언]을 하고난 后[후] 도라가도록 말하였다.
 
 

 
132
理想[이상] 略述[약술]한 바와 如[여]히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全二十一節[전이십일절]로서 遭難[조난] 前後[전후]의 이야기를 網羅[망라]하였다. 그가 끝節[절] 無可補償的損失[무가보상적손실]에서 敍述[서술]한 바와 如[여]히 이겄(出獄[출옥])으로 말미아마 비록 그는 自由[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마는 만나고 싶은 親戚[친척] 朋友[붕우]의 往來[왕래]도 不斷[부단]의 拘束[구속]을 밨지 않으면 않이되고 諸種[제종]의 嫌疑[혐의]와 災禍[재화]를 未然[미연]히 防止[방지]하기 爲[위]하야 魯迅先生[노신선생] 親筆[친필]의 書籍[서적] 其他[기타] 그의 在世時[재세시]에 恒常[항상] 사랑하여오든 書籍[서적] 日記[일기][등]을 燒却[소각]하고 或[혹]은 倭[왜]놈에게 沒收[몰수][당]하여 그들의 塵紙[진지]밖게 되지 못한 겄은 참으로 補償[보상]할 수 없는 損失[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133
이들의 書籍[서적]은 앞서 말한 봐와 如[여]히 貧弱[빈약]하고 貧瘠[빈척]한 土地[토지](國土[국토])에나마 아름다운 꼿을 피게 하고 새로운 生命[생명]을 供給[공급]한 糧米[양미]와 같은 겄이며 魯迅先生[노신선생]이 남게 노었다 하여 이가 景宋[경송] 個人[개인]의 所有物[소유물]이 아니고 一時代[일시대]의 文化[문화]와 社會[사회]에 미친 影響[영향]으로 보아 이들은 中國[중국] 全人民[전인민]의 겄이라 아니할 수 없다.
 
134
各節[각절]에 있어서 짤분 글이나마 景宋[경송] 女史[여사]는 그가 말하고저함을 充分[충분]히 表現[표현]하였으며 이 글도 魯迅[노신]의 글과 如[여]히 마 - 는 諷刺[풍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135
全體的[전체적]으로 飜譯[번역]을 한 后[후] 그 內容[내용]을 檢討[검토]하여 보고 싶었으나 如意[여의]치 못하와 大槪[대개] 每節[매절]의 槪要[개요]를 紹介[소개]한 程度[정도]에 不過[불과]함니다.
 
 
136
[미발표 원고]
【원문】노신(魯迅) 선생(先生)의 부인(夫人) 허경송(許景宋) 여사(女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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