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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정승 관(寬)은 고려 말년에 과거하고 이조(李朝) 태종(太宗) 때에 대신이 되었으나 공공하고 청빈하여 동대문 밖에 두어간 집을 짓되 울타리와 대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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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께서는 대신의 집이 그럴 수 있느냐 하시고 선공감(繕工監)에 영을 내 리사 밤 사이에 그 집 울타리를 하여 주고 알리지 말라 하셨으니 이는 유공이 알면 굳이 사양할까 꺼리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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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은 세종 때 정승이 되었고 나중에 봉조하(奉朝賀)까지 하였으며 집에 있는데 누가 와서 찾으면 겨울에도 맨발로 짚신을 신고 나가 맞았다. 어떤 때는 손수 호미를 들고 채마밭을 매기도 하였다. 또는 친절한 벗이 오면 반드시 탁주 한 자배기를 섬돌 위에 놓고 분원(汾院) 상사발로 술잔을 삼아 각각 두어 사발씩 마시고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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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산업(産業)을 소홀히 하므로 두어 간 초가집도 제때에 이지 않아서 하늘이 군데군데 뵈고 비만 오면 아니 새는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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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우스운 일은 오뉴월 장마통에 유 정승 내외는 할 수 없이 우산을 쓰고 방안에서 비를 걷고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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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리는 우산이나 있거니와 만일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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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도 딱하시우. 우산 없는 집에서는 집을 안 새도록 미리 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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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핀잔을 주고 웃으니 정승도 역시 웃었다 한다. 유 정승이 후진을 가르치는 데는 열심해서 배우는 사람이 문(門)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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