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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적 창작평과 자기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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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7 ~ 8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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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화적 창작평과 자기비판
 
 
 

1. 임화적 창작평과 자기비판

 
3
「6월중의 창작」이란 동지 임화의 창작평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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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그것은 여태껏의 창작평에 비하여 고도의 정치적 예술적 안식(眼識)에 의하여 가장 예리한 분석의 맛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형식과 내용에 대한 마짜적 분리 내지는 “내용은 글렀으나 기술은 좋다” 식의 비속된 형식론으로부터 최후까지 그의 논조를 방위(防衛)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어서, 끝으로 그리고 유행적 평론가들의 창작평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수준에 비하면 비상히 저하된 수준에 속하는 것을 불면(不免)할 것이다. 어쨌든 금년중의 쾌작(快作)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식의 평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은 지극히 우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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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동반자작가의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을 천명하며 그의 방향에 대하여 친절한 계급적 지시를 시험한 점이라든가 나 자신으로 보면 가장 우열한 작품에 대하여 상세한 동지적 비판을 내리는 점이라든가 작품 「서화(鼠火)」에 관하여서도 창작논쟁적 제의를 의도한 점이라든가 이러한 모든 점은 길지 않은 창작평 속에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6
원래 작가는 평론가에 의하여 비평을 기대하는 것만을 한 개의 도덕으로 알고 그 작품에 인각(印刻)된 평가에 관하여 왈시왈비(曰是曰非)를 논하면 헛된 변명으로 대하는 좋지 못한 경향이 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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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창작논쟁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양식의 집단적 완성의 학교’가 되어야 하며 이 창작논쟁의 와중에 작가가 몸소 참가하는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논쟁 속에는 호평을 받은 이기영도 또한 청수(淸水)같은 작품「물」을 쓴 김남천도 참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임화 혹은 기외(其外)의 비평가에게 호평을 받기 위하여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며 악평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며 오직 창작논쟁의 강화에 의하여 대중의 문학에 대한 요구는 고양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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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물」의 작자 김남천도 임화적 창작평이 일으킨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발표하는 것이 정당하리라고 생각한다. 임화적 창작평에 대한 나의 느낀 바와 나의 작품상 우익적 편향에 대하여 자기비판을 볼 기회를 여기서 만들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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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적 창작평은 수많은 좋은 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당연히 가져야 할 냉정을 잃었다는 점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창작평을 작가의 실천과 유리하여 시행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다투어야 할 여러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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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지 임화는 그가 쓰는 아름다운 철학적 내지는 문학적 술어(述語)의 계열 속에 분마(奔馬)와 같은 열정을 숨기고 있으며 이것은 거의 정도를 넘쳐서 비평가로서 삼가야 할 악(惡)한 흥분에까지 이르고 있다. 위선(爲先) 그것은 「서화」에 관한 지극히 부당한 찬평(讚評)에서 그의 고도의 흥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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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그는 창작평을 단지 작품 위에서만 관찰하는 데 시종하고 작품과 부절(不絶)한 관계 속에 있는 작가의 실천에 대하여 침묵을 지켜왔다는 점에 있어서 여태까지의 군소비평가의 전철을 밟았으며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으로 의연히 이론과 실천의 분리에 의한 데보린적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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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이 “우리들이 문화의 최대의 위험인 우익적 일화견주의(日和見主義) -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문화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 의 명백한 현현(顯現)”의 하나인 경향에 흘러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작품 「물」을 썼다고 하는 것을 단지 철학적으로 혹은 문학적으로 ‘지적’할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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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3. 7. 29]
 
 
 
 

2. 임화에게 주는 나의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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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남천을 그러한 니토(泥土) 속에서 구출하기 위하여는 창작평을 그의 실천과 분리하여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김남천의 작품상의 우익적 편향을 지적함에도 동지 유인(唯人)의 이론상의그것과 일맥 통하였다든가, 또는 그의 영향에 의한 것 같이 간찰(看察)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작가를 과오로부터 구출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상의 우익적 편향의 원인의 해명을 전혀 그 작가의 실천 속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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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평가 창작가들이 이론과 실천의 분리에 대한 사상과 실천의 우위성을 거부하는 철학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마치 그것이 더럽고 무서운 모충(毛蟲)이나처럼 양손을 내흔들면서 사실상의 창작평의 마당에서는 작가의 실천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없음은 나로서는 그 진의를 의아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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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작가를 지도함에는 작품 속에 나타난 동반자적 세계관을 지적한다든가 철학적으로 설교한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다. 동반자작가의 ‘일반’에 관하여서 첩첩(喋喋한다든가 ‘개성 무시’에 의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작가의 개개인을 그의 실천과 결부시켜 논평하는 창작평이 나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김남천의 우익적 경향에 대한 원인의 해명은 김남천이 장구한 시일간의 옥중생활에 의하여 실제적인 실천과 창작 생활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사실과 및 김남천의 과거의 단시일간의 조직적 훈련 때문에 그의 세계관이 불(不)확고하다는 사실과 또한 출옥 후에도 노력대중과 하등의 관련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등등의 실천상의 일체를 문제하지 않고는 불완전한 성과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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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이며 작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혹자의 이론보다도 그 당자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논평하는 기준은 그의 실천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무이해한 비평가는 그가 변증법적 유물론을 백만 번 운운하여도 진실한 맑스주의 평가(評家)는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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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3. 8. 11]
 
 
 
 

3. 임화에게 주는 나의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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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작품 「물」이 한 개의 예술문학이 아니며 진실한 프롤레타리아 작품이 아니며 그것은 가장 위험한 경향에 합류하여 있다는 임군의 비평을 조금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끊임없는 투쟁의 포화’속에서 정화되어야 할 것을 천 번도 만 번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투쟁의 포화’는 임화적 창작평과는 인연 먼 그것이며 창작 평을 작가의 실천과 분리하여 논술하는 일체의 경향과 다투는 것과 관련한 것임을 나는 또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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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는「물」속의 인물을 일면적 인간, 생물학적 인간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그리고 「물」속에는 또 한 면(面)의 적극적인 것이 그려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도 또한 지극히 정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소위 ××의 눈을 피하여 나오는 작품이라는 선입견 없이 작가가 이것을 썼다고 보는 것은 아무러한 정당한 이해도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대중』에 꼭 발표되도록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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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이나 이것을 발표하여서 독자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이로우리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실로 그것이 임화에게 호평을 받는다든가 악평을 받지 않는다든가를 목표로 하여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물」의 작가가 단순한 비속한 소극적인 리얼리스트로 시종하였다는 과오를 지적함에는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관계를 생각했다는 과오를 적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팔봉, 유진오의 ‘연장을 수그려라’류에 김남천이 합류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김남천이 스스로 유진오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이러한 과오를 범한다는 것의 해명은 의연(依然) 김남천의 세계관의 불확고, 김남천의 실천생활에 의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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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에 대한 비평에 있어서는 임군이 다분히 흥분을 느끼며 써나간 것도 사실인 듯싶다. 그것은 「물」의 첫 머두리에 쓴 말에 대한 부당한 이해뿐 아니라 인물 ‘물담당’에 대한 옳지 못한 이해에서 발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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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머두리의 말은 「물」에 대한 생물학적 요구를 강조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물」이라는 언구(言句)를 들을 때에 누구나 연상할 수 있는 한 폭의 일루션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은 우리들과 특별히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듯싶다”라는 구절에서 비평가 임화는 과연 인간의 물에 대한 동물적 욕망만을 이해하는가? 이 구(句)는 단연(斷然)히 임군도 인용한 “이렇게 물이 마를 줄 알드면 수통을 드러대일 때 좀 실컨 먹을걸…”을 중심으로 한 한 면과 절대적인 관련 밑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비평가는 정당히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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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담당’을 죄악적 인간으로 전화(轉化)하였다고 지적한 것은 정당한 이해일까? 아니다. 그릇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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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는 말한다. “대체 왜 선출된 그는 물먹는 것을 제한시킬까?”임화는 전혀 상식 이하의 질문을 발하고 있다. 어떤 집단에서 어떤 조직에서 선출된 책임 있는 역원(役員)이 자기의 맡은 바 일에 충실하고자 하여 행동하는 것이 임화에게는 의문으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물담당’은 그 방안의 ××에서 물을 조절하여 쓸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물먹는 것을 제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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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임화는 다시 질문할 것이다 “왜 그 방안의 ×××들의 ××은 물을 요구하지 않고 물을 조절하여 쓰도록”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활을 그들이 당하고 있는 ××제도에 적응시키려”고 하는가? 그러나 이것도 비상히 상식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작품 속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의 역량은 비상히 약하였으며 또한 어떤 시기에 이르기까지는 반항하는 대신에 ‘적응’을 가지고 물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문이다.
 
29
비평가 임화가 자본을 거부하며 부인하는 사상의 소유자이면서 그가 그의 주머니 속의 돈을 거부하지 못하며 카프가 당연히 취하여 할 문제를 앞두고 이리저리 망설이고 있는 것은 실로 ‘역량’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만일 카프의 일원이 돌현(突現)하여 전혀 개인적인 아나적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이 현제도에 대한 ××에서 나왔다는 이유에 의하여 서기장인 임화는 그를 방간(傍看)할 것인가? 또 서기장이 그것을 막았다고 그는 현제도에 적응시키려는 사상의 소유자라고 하여 그를 죄악적 인간으로 몰을 것인가? ‘물담당’을 중요한 인물의 하나로서 설정하고 ‘외교’를 맡아본 동무 등의 인물을 한가지로 등장시킨 것을 ××범의 생활의 계급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달란다면 그것은 작자의 엉터리없는 요구일까? 이것은 ‘아마’작자도 의도하지 않은 무서운 결과(林[임])가 아니라 ‘물담당’을 죄악적 인간으로 몰려는 비평가의 의도한 선량(!)한 결과일 것이다.
 
 
30
[『조선일보』1933. 8. 2]
 
 
 
 

4. 임화에게 항의:「서화」에 대한 그의 과중평가

 
32
나의 작품에 관하여 더 이상 논술한다면 그것은 창작적 논평의 권내를 벗어나 비열한 자기변명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은 「서화」평에 관한 나의 감상으로 붓을 옮길 시기이다.
 
33
작품「서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대단히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동지 임화와 같이 흥분한 태도로 격칭(激稱)할 종류의 좋은 작품이 아니고 보다 냉정한 태도로 비판을 받아야 할 종류의 좋은 작품이다. 어째서 그런가? 임화는 이 작품에 대하여 흥분한 나머지에 그가 여태껏 배웠던 모든 수사를 여기에 집중시켰으며 그것은 마치 장편소설에 대한 편벽(偏僻)된 연애같이 보여진다. 그래서 「서화」의 작자나 또는 독자에게 선량하지 못한 영향을 살포(撒布)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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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는 평한다. “이 소설이 여태까지의 우리들의 문학과 구별되는 기본적인 특징은 현실의 지극히 국한된 일 단면(斷面)을 예술화하는 단소(短少)한 형식의 문학이 아니고 일시대의 ××××의 역사적 전모를 역사적으로(임군이여! 군은 흥분하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시대의 객관적 현상을 역사적으로 개괄하는 기록적‘로맨’(훌륭하고 향기높은 언구(言句)임에 틀림없다)의 형식을 가지고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35
임화의 여사(如斯)한 평은 정당한가? 임화의 말에 의하면 「서화」의 기본적 특징은 한 시대의 객관적 파악을 기도한 장편소설이라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면 대체 「서화」는 여하한 시대의 객관적 현상을 역사적으로 개괄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작품 속에는 과연 일시대의 ××××의 역사적 경험의 전모가 그려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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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슬로건이 없다든가 격렬한 문자가 없다고 해서 그 속에 ××××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보는 자는 아니다. 그러나 대저 어느 곳에 어느 모퉁이에 이른바 ××××의 전모가 숨어있는가? 빈민과 지주의 주인공의 대화를 통한 대립이 ××××인가? 또는 인습적인 가족제도 결혼제도의 모순을 유부녀 간통으로 묘사한 것이 계급투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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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것을 ××××이라 해서 이 소설이 ××경험의 전모를 그린 최초의 장편이라 할진대 김팔봉의 『약혼』은 어떠하며 또 『해조음』은 어떠한가?
 
38
그러나 임화는 다시 말한다. “농민의 사회성의 그 중요성. 농민의 프롤레타리아적 개조의 모순성 복잡성의 사상이 강조되어 있어 여태까지 본 바는 농민이 갖는 바의 ‘두개의 혼’가운데의 소유자적 특성이 고도의 예술적 묘사를 긍(亘)하여 표현되어 있다”고.
 
39
물론 이기영이가 농민을 복잡성에 있어서 취급하였으며 소유자적 특성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곧 농민문제에 있어서의 레닌적 설정을 예술상으로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레닌은 사실에 있어서 농민의 소유자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40
[『조선일보』1933. 8. 3]
 
 
 
 

5. 임화에게 항의 : 「서화」에 대한 과중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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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문학자에게 그것을 도박이라든가 투전을 가지고 묘사하기를 희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농민을 일면으로만 관찰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43
「서화」는 농민의 소유심을 생생한 생산관계를 통하여 묘사하지 못하고 ‘도박’이라는 비생산적 유희적 수단을 통하여 도박의 긍정이란 결과를 낳으면서 묘사되어 있으며 당연히 있어야 할 생산관계 속에 있어서의 두개의 혼의 모순과 복잡을 그리는 대신 전혀 또 한 개의 적극적 일면을 망각한 추상적 농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4
농민의 복잡성을 ‘도박’과 ‘간통’(아름다운 술어를 쓰면 자유연애라고 한다)의 긍정에서 묘사하는 것은 과연 레닌적 파악이며 원칙적으로 정당한 예술적 방법인가?
 
45
도대체 농민을 중심으로 한 어떤 시대의 객관적 파악을 생산관계와 전혀 유리된 농민생활의 묘사에서 시행하는 방법은 과연 우리의 창작의 금후의 등대불이 될 방법인가? 도박과 간통에 대한 계급적 비판을 거부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흥미 중심의 소설은 과연 우리의 예술적 달성의 최고수준의 고처(高處)를 걸어가는 것일까?
 
46
동지 임화는 우리들이 3년 전에 여하히 우리 문학의 당파성과 및 우리 문학의 대중화에 관하여 논의하였던 지를 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저 「서화」를 노력군중에게 가지고 가면 여하한 이해가 생길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47
「서화」는 대중을 도박과 간통으로밖에 지시할 길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부르스키의 위대한 것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그가 콜호즈를 정당히 귀급한 까닭이며 그 속에서 ××××건설에 정진하는 농민들을 정당히 지시한 데 있는 것이다. 농민을 부랑적(浮浪的) 조장(助長)에로 이끌고 비계급적 성문제의 설정에로 이끌고 추상적인 언어의 투쟁에로 이끌려는 소설은 부르스키와 마찬가지로 논의될 수는 없다.
 
48
그러므로 「서화」의 금후의 나아갈 방향도 형식상 구성 운운보다도 농민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또한 어떤 시대의 객관적 파악을 생산 관계에 의거하여 써나가려 하는 근본적 방법의 개조에 있어야 한다.
 
49
비평가는 진정제를 먹어야 한다. 작가는 실천 속에서 사색하여야 한다.
 
50
소작쟁의가 하나도 없는 도박만 하는 농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도 다시금 생각하여야 하며 이러한 농촌을 구체적 농촌이라고 칭찬하는 비평가도 진정하여야만 한다.
 
51
이기영은 침착하게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흥분된 비평가의 선동에 의하여 그의 창작과정에 해를 입지 않게 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목표는 딴 곳에 있다. 실천 그리고 조선의 노력대중의 당면한 과제의 속에다 그의 전 몸뚱이를 두라!
 
52
그리하여서만 카프작가의 전진은 가능할 것이다.(1933. 7. 20)
 
 
53
[(완) 『조선일보』1933. 8. 4]
【원문】임화적 창작평과 자기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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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3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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