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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2
최서해
1
人情[인정]
 
 
2
새벽부터 음산한 일기는 눈이 내릴 듯하더니 생각하던 눈은 내리지 않고 오후부터 빗발이 듣기 시작하였다.
 
3
때아닌 비도 분수가 있지 한겨울인 음력 세밑에 비가 내리는 것은 내년에 흉년들 조짐이라고 여관집 주인은 걱정하였다.
 
4
저녁 뒤에는 일과와 같이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들어오는 승현이의 정성도 이 비에는 움츠러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가슴속이 굼실거리어서,
 
5
‘가까운 데 있는 김군이나 찾아볼까?’
 
6
하고 벽에 걸린 양산을 벗겨 쥐었다가 덧신도 없는 구두가 흙투성이될 것과 바지 아랫도리가 물망태될 것을 생각하고 그만 주저앉았다.
 
7
밤들면서 빗소리는 더욱 요란하였다.
 
8
여름 한장마 때 빗발같이 내리들이는 빗소리는 그로도 알 수 없는 불안을 그의 가슴에 슬며시 주었다. 그 엷고 가벼운 불안과 같이 옛날의 먼 길을 더듬는 듯한 그윽한 정회도 떠올랐다.
 
9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에 불리는 빗발은 서편 들창을 몹시 치었다. 빗발이 창을 두드리는 때마다 그리웁던 누가 온 것도 같고 어깨를 누르던 지근한 침묵이 몰려가는 듯이 시원하기도 하였다.
 
10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었던 승현이는 목침을 베고 뜨뜻한 아랫목에 누웠다. 일기가 풀린 까닭도 되겠지만 구들과 화롯불에서 오르는 화기에 방안은 봄날 같았다. 그는 신문을 읽으려고 들었으나 눈은 글자를 좇지 않았다. 따분한 정서는 실실 풀리어서 빗소리를 타고 끝없이 가는 것 같았다.
 
11
그는 들었던 신문을 그로도 모르게 떨어뜨리면서 잠이 들어 버리었다.
 
12
"요새 세밑이 돼서 도적놈이 다니니 들창 덧문 같은 것도 단단히 걸고 주무십시오."
 
13
하고 일전에 여관집 주인이 부탁한 뒤로부터 반드시 닫아 걸던 서편 들창 덧문 닫을 생각도 못 하고 잠이 들었다.
 
14
항상 지키던 규율을 깨뜨린 것이 ── 자리도 깔지 않고 옷 입은 채로 드러누운 것이 잠들 때 꺼림하였던지 깊은 잠을 못 들었다. 말하자면 무의식 중에 무슨 의식이 움직이고 있었다.
 
15
잠들었던 그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귓가에 들리는 무슨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방안에는 전등 불빛이 잠자던 눈에 부시도록 흐르고 있다. 창 밖에서는 그저 빗소리가 수선스럽게 들린다. 그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은 깊었는가?
 
16
‘일어나 바루 누워야…….’
 
17
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눈을 다시 스르르 감다가 눈길에 띄는 무엇에 다시 눈을 떴다. 서편 들창 미닫이가 열린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분명히 닫아 두었는데 열리었다. 잠에 취하였던 그의 눈은 커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머리를 들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시 고요히 누워 있었다.
 
18
열린 들창으로 흘러드는 바람은 음습하다. 그의 따분하던 기분은 흐트러지었다. 가슴속은 벌써부터 군성거리기 시작하였다.
 
19
이때 전깃불이 흘러나가는 들창 밖에는 유령 같은 그림자가 슬그머니 치밀었다. 그는 겁결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소리를 침으로 막아 삼키고 끝까지 그 그림자의 동정을 살피려고 하였으나 본능적으로 흠칫하는 전신의 동작은 걷잡을 수 없었다. 나타나던 그림자는 승현의 몸이 흠칫하는 때에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스러져 버리었다. 그이 가슴은 몹시 군성거렸다. 온몸의 피가 얼어드는 듯이 덜덜 떨리었다.
 
20
일 분간은 되었을 것이다.
 
21
승현이가 소리를 지를까 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 그림자는 또 나타났다. 승현이는 얼어드는 듯한 몸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누워 있었다. 책상 그림자가 그의 코까지 가려서 최활을 뻗친 듯이 깜작 않고 내다보는 눈은 저편에 띄지 않나 보다.
 
22
그 그림자는 낡아빠진 목출모(目出帽)를 내리 써서 눈과 코만 보인다. 밤송이 같은 눈썹 아래 좀 꺼져 들어간 세모눈은 서릿발같이 빛나고 아무렇게나 빚어 붙인 듯이 넓적한 코는 음흉스럽게 벌룩거린다. 전깃불에 서릿발같이 빛나는 눈으로 흐르는 시선은 승현의 발치 벽과 책상 그림자에 코까지 가리운 승현의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쏘고 있다. 그 시선이 승현의 몸을 건드릴 때마다 그의 살가죽은 예리한 칼날로 오리는 것 같았다. 자기의 눈은 어둠에 들었으니 보이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그 그림자의 시선과 맞부딪치는 때마다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더 무서웠다. 시퍼런 칼……, 반짝거리는 권총……, 무지한 몽둥이……,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그 꼬리가 그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그 모든 흉기에 참살된 시체의 그림자 ── 언제던가 교당에서 누가 칼에 찔려서 피투성이가 되어 자빠졌던 그 그림자가 다시 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23
‘옳다. 옷 도적놈이다. (양복이 걸린 발치 벽을 노리는 것을 보니!) 이 놈 혼 좀 나 보아라……. 붙잡을 필요는 없고 질겁을 하도록 맨들어야 할텐데…….’
 
24
하는 생각은 잊지 않았다. 그 생각은 그놈을 징계하려는 것보다도 그로도 알 수 없이 발작하는 호기심이 만족을 얻으려는 편에 가까왔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도적놈이 눈이 뒤집히어서 질겁을 하고 달아나는 그림자를 생각하고 속으로 웃었다. 웃음이 나면서도 겁은 겁대로 났다. 어쩐지 그놈의 흉기에 자기가 피를 흘릴 것만 같았다.
 
25
그 그림자는 머리를 돌려서 빗소리 요란한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머리를 돌이키면서 기단 작대기를 방안으로 들이민다. 그 작대기가 금방 자기 가슴에 푹 박히는 듯이 승현의 전신의 피는 왈칵 끓어올랐다. 가슴은 뭉클하면서 호흡이 막히는 듯하였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이빨을 악물고 그대로 누워서 견디었다.
 
26
그 그림자는 작대기 잡은 팔을 겨드랑이 보이도록 디밀었다. 작대기 끝에 처맨 쇠갈고리에 외투 깃이 걸릴 듯 말 듯할 때 승현의 떨리는 가슴은 조마조마하였다.
 
27
‘의복이라고는 단 한 벌이다!’
 
28
그것도 전당에 들어갔던 것을 겨우 찾아 입은 것이다. 그것이 저 갈고리에만 걸리는 날이면 쫄딱 망하는 판이다. 그놈을 놀래려다가 제가 망하는 판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갈고리가 의걸이에 걸리면서 의걸이가 삐걱하고 외투가 걸린 채 발치에 털썩 떨어졌다. 외투가 털썩 떨어지자 그 그림자는 흠칫하고 창 밑에 숨는데 모자 꼭대기가 보일락 말락 하게 드러나고 작대기 끝은 문턱에 걸놓이었다.
 
29
도적은 방안의 동정을 엿듣는가?
 
30
떨어지는 외투가 작대기에 걸리어서 나가는 듯해서 벌떡 일어나 앉는 승현의 손에는 그로도 모르게 목침(베었던 것)이 쥐어졌다. 그는 창문턱 너머 아른거리는 모자 꼭대기를 보더니 아까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구석에 세워 놓았던 양산을 목침과 바꾸어 잡고 들창 밑으로 기어갔다. 들창 밑으로 기어간 그는 한편으로 붙어서면서 바른손에 잡은 양산대 끝은 문턱 바로 밑에 대고 밖을 노리고 있다. 그 동안은 순간의 순간이었다.
 
31
"이놈!"
 
32
밖을 노리고 섰던 승현이는 창 밖의 그림자가 다시 얼른 나타나자 잡았던 양산대로 냅다 찌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33
"악!"
 
34
뼈에 사무치도록 지르는 급한 소리와 같이 철썩하고 진창에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는 빗소리 속에 처량히 울리었다. 그는 그로도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면서 내려다보려고 들창 문턱을 잡고 몸솟음을 쳤다. 먼 불빛에 어스름한 골목, 내리들이는 빗발 속에 쓰러진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이었다. 그는 그 문턱에서 떨어지면서 대청마루로 나왔다. 안방에서 자던 주인이 속옷만 입은 채 미닫이를 방긋이 열고 내다보면서,
 
35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36
하고 기운 없이 묻는다.
 
37
"도적놈 왔어요, 도적놈……. 저기 자빠졌어요……."
 
38
승현이는 황황히 마당에 내려섰다. 퍼붓는 빗발에 온몸이 으쓱한 것도 불계하고 그는 대문간을 뛰어나가서 빗장을 뽑았다. 처마 밑으로 달음질쳐서 건넌방 들창 밖으로 오니 진창에 쓰러진 그 그림자는 그저 있다.
 
39
그이 가슴은 공연히 두근거리었다.
 
40
"아이구…… 응…… 으윽…… 헤구…… 응윽……."
 
41
그 그림자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지르면서 진창에 쓰러진 대로 몸을 비비틀기도 하고 일어나려다가는 다시 쓰러지는데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42
사정없이 빗발은 그의 몸 위에 물 퍼붓듯 쏟아진다.
 
43
"웬 사람이여……."
 
44
승현의 뒤를 따라 나온 주인은 반말을 뇌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대답은 하려고도 하지 않고,
 
45
"아이구…… 응…… 윽……."
 
46
하고 이를 빡빡 갈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것을 보는 승현의 가슴은 몹시 굴렀다. 무슨 큰일이나 저질러놓은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편에서는 그것을 변명할 여지가 있는 듯이 느긋하였다.
 
47
"응, 웬 사람이여……."
 
48
주인은 뇌면서 성냥을 득 그었다.
 
49
"아이구…… 나리…… 사…… 살려……, 아이구!"
 
50
바람결에 그물거리는 성냥 불빛 속에서 신음하는 그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을 가린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51
"응!"
 
52
승현이는 스스로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 사람의 앞에 다가들었다.
 
53
성냥불은 꺼지었다. 다시 어둠이 몰리었던 주위는 빗소리에 요란하다.
 
54
"저거 웬일이여……."
 
55
다시 성냥을 그어 든 주인도 눈이 둥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을 들이어다 본다. 승현이는 일어나 앉은 그 사람의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떼었다. 왼편 눈으로 흘러내리는 피는 흙투성이 된 목출모와 의복을 질퍽히 적시었다. 승현의 가슴은 찌르르하였다. 벼락이 금방 내릴 것 같았다. 그는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람의 손을 잡은 채 멀거니 서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인도 성냥을 다시 그잡을 생각까지 잊은 듯이 침묵을 지키었다. 컴컴한 골목 쏟아지는 빗속에 들리는 것은 사람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56
"자, 집으로 들어갑시다."
 
57
승현이는 그 사람을 일으키었다.
 
58
"아이…… 응…… 나리 마님 살려줍시요……."
 
59
괴롭게 떨리는 그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 같았다.
 
60
"걱정 말고 들어갑시다. 얼마나 다쳤는지 병원에라도 가야지……."
 
61
하고 그를 끌었다. 그는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그러다가 일어서더니 저편에 자빠진 지게를 집어끌면서 마당으로 들어왔다.
 
62
대청 툇마루에 그를 앉히어 놓고 주인은 안방 전등을 마루로 내걸었다. 전등 불빛이 비추이는 그 사람의 정체는 더욱 볼 수 없었다. 흙투성이와 물투성이 된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가죽을 벗겨 놓은 짐승 같았다. 그는 마루에 엎드려서 눈을 붙잡고 괴롭게 신음하고 있다. 내다보던 주인 아씨는,
 
63
"에그머니!"
 
64
하고 머리를 끌어들이었다. 물을 떠 가지고 온 행랑 어멈도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를 돌리었다.
 
65
누구나 그 사람을 잡고 그 사람의 괴롬을 같이 괴로와하는 이는 없었다.
 
66
승현이는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주인의 헌 옷을 얻어 입히고 얼굴의 피를 말끔히 닦아서 자기 방에 눕게 하였다. 여전히 피가 흐르는 왼편 눈에 솜을 붙이고 헝겊으로 싸매었으나 흐르는 피는 솜과 헝겊을 새까맣게 물들이었다. 그는 신음을 하면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67
"나리 마님 살려줍시요……. 할 일은 없고 어린 자식들은 밥을 달라고 하고……. 살려줍시요……. 이놈의 눈깔뿐 아니라 목이 떨어져도 죽을 죽을 죄를……. 살려줍시요……."
 
68
그는 괴롬과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뇌었다. 그는 승현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저 보내지 않고 감옥으로 보내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하는 어조요, 태도였다.
 
69
승현의 가슴은 더욱 찌르르 저리었다. 그 사람의 말은 마디마디 창해같이 양양한 자기의 전정을 애는 듯하였다. 그 양산대가 남의 눈을 빼리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의 호기심 비슷한 충동이 그에게 무서운 결과를 주리라고는 뜻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70
불과 기십 환짜리의 외투로 천금 같은 눈을 잃고 대문 밖으로 나가는 그 그림자를 보는 때 그의 가슴은 더욱 묵직하였다. 그 즉석에서 자기의 몸 위에도 그보다 더한 참혹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지게를 끌고 대문 밖에 나선 그 사람을 잠깐 기다리라 하고 안으로 뛰어들어와서 외투를 들고 나갔다. 자기의 재산은 그것뿐이다. 그것은 주어 보내는 것이 어쩐지 유쾌하게 생각났다.
 
71
승현이가 다시 대문 밖에 나서니 그 그림자는 어디론지 스러지고 말았다. 그날 밤 그의 꿈은 몹시 뒤숭숭하였다.
 
 
72
승현이는 이튿날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려고 대문 밖으로 나서는데 누군지 저편으로 돌아나가면서,
 
73
"엑, 웬 피가 저런구……. 엑…… 숭해……."
 
74
하면서 침을 뱉는다.
 
75
그 소리는 그에게 청천벽력같이 들리었다. 어젯밤 그 광경이 눈앞에 올라서 그는 몸서리를 치면서 외투를 다시 보았다.
【원문】인정(人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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