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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3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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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8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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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름 3제
 
 
2
고향을 잊은 지 오래다. 삼년 살면 고향인 셈이니, 사는 고향의 여름을 적음이 과제에 어그러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1. 일 번지의 감기(感起)

 
 
4
일껏 뜰을 다스려 놓고 집을 옮기니 일 번지이다. 양철 지붕 회벽일망정 교회집같이 뾰족한 문턱 지붕 꼭대기에 바람개비를 꽂은 것은 당을 세운 교부(敎父)의 독창이리라. 향나무, 단풍나무, 장미포기가 뜰 앞에 조촐하게 우거졌고 그늘 밑으로 딸기밭이 퍽 넓다. 능금밭 속을 버리고 딸기밭 속으로 온 셈이다.
 
5
북쪽에서는 딸기는 봄의 것이 아니오, 여름의 것이다. 화단은 여름의 것이 아니오, 가을의 것이다. 화단 없는 여름 아침에 이슬에 젖은 잎새틈에 불긋불긋 엿보이는 딸기는 신선한 색체다.
 
6
교부의 식구들은 딸기를 먹고 찬송가를 불렀을까. 나는 딸기를 먹으며 가지가지의 궁리에 잠긴다. 다음에 오는 사람들은 딸기를 먹곤 무엇을 할까. 딸기에 매어달려 흘러가는 인생의 그림이 차례차례로 회벽에 때묻어 전설의 이끼가 낄 날을 생각한다.
 
7
도서관에 간직한 만 권의 책은 만 가지의 생활을 전하여 주어 그 뒤에 다시 생활이 덕지덕지 덮쳐 무한히 괴로울 것을 생각하면 무한선 위에 한 점을 점찍고 들어붙어 사는 일생이라는 것이 짧기 짝이 없다. 기록으로서 과거를 아는 우리는 미래가 심히 궁금하다. 우리의 흥미는 온전히 미래에 걸려 있을 뿐이다. 국경의 경계선이 어떻게 변하며 여자의 복색이 어떠며 연애관이 어떻게 빗나갈까.
 
8
이것을 맞춰 말하는 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 예언자일까. 나아가 미래를 의지대로 창조하는 이 있다면 그는 다시 얼마나 위대한 창조가일까.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바는 예언자가 아니라 이러한 창작가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여름에는 무덥다. 나는 딸기를 먹으며 향나무 그늘에 앉으며 내 멋대로의 생각에 잠기면 그만이다. 그림 속의 인물을 생각하고 작품 속의 생활을 환시하며 마음의 세계를 창조하여 보면 족하다. 원컨대 이 그림, 작품, 마음속의 인물들이 모두 뛰어나와 뜰에서 같이 놀 수 있다면 여름이 얼마나 즐거울까.
 
 
 

2. 바다

 
 
10
자전거 ─ 자동차가 아니라 ─ 와 바다는 여름의 쾌미이다. 새 자전거는 새 구두와도 같이 마음에 든다. 모멸하던 자전거에서 미리(美理)를 발견하게 된 것은 하기는 생활의 공리의 사연인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것을 세라면 책, 악기, 석유등, 파이프, 꽃, 자전거, 구두……
 
11
자전거로 벌판을 달리면 바다까지 15분. 바다에서는 수평선 멀리 기선의 기적이 들린다. 뽀오오오 ─ 모양은 안보이고 소리만이 아리숭하다. 쌍안경을 대면 붉은 흘수선이 보이련만 그러는 것보다는 아지랑이 같은 소리만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다. 뽀오 ─
 
12
해수욕장은 반드시 색채의 진열장만이 아니다. 여인 없는 해변은 화려하지는 못할망정 조촐하다.
 
13
바다를 그리는 화가 부처가 있다. 제전(帝展)을 목표로 하든 말든, 살롱에 야심이 있든 말든, 나의 알 바 아니지만 물에 헤엄치다 그림의 붓을 들었다하며 여름을 즐기는 그들의 양이 귀엽다. 해가 그늘면 어린것과 캔버스를 수레 속에 싣고 아내가 밀면 남편은 큰 아이를 어깨에 올려 목말을 태우고 긴 모래펄을 나란히 걸어간다. 편편치 못한 말을 탄 아이는 아버지의 고수머리를 아파라 붙들고 아내의 맨발에 걸친 하이힐 속으로 모래가 솔솔 스며든다.
 
14
나는 이 풍경을 지극히 사랑한다.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른다. 내가 화가라면 이 한 폭을 재료로 고를 것이다. 가난한 글로는 이밖에 못 전함을 슬퍼한다. 그렇다고 화가 자신은 거울 속에 그 풍경을 비쳐보기 전에는 그 자화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짐작 못하리라.
 
 
 

3. 리어카를 탄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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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이를 소학교에 보내는 주부도 노란 해수욕복을 입고 붉은 해수욕모를 쓰니 스물 안의 소녀로밖에 안 보인다. 주부는 다리를 모래 속에 묻으면서 눈초리를 가늘게 뜨고 걷는다. 허벅지, 팔다리, 기름덩이 같은 가슴을 나는 보아서는 안 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치는 나의 몸 초리는 새 다리같이 가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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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용감하다 하여도 여자란 소극적이어서 먼저 나서는 법 없고 대수(對手)의 적극성을 기다릴 뿐이라는 주부의 연애관을 들은 일이 있는 나는 모래 속에 다리를 묻는 주부의 거동을 여자의 소극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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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소설의 선택과 강독을 나에게 청하는 그요, 책을 빌려 가곤 언제까지든지 돌려오지 않는 그다. 밤에 찾아와서는 진한 차를 마신 후에도 독한 노주(露酒)를 두 잔쯤은 늠실하며 기어이 남편의 분부가 있을 때까지 별일 없으면서 놀고 있음이 항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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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회화란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같다. 문학담을 즐겨하는 주부로도 모래밭의 화제는 산만하다.
 
20
주부는 자전거를 못 타니 오리의 길도 멀다. 더구나 욕 후의 피곤한 몸을 휘둘휘둘 저으며 두틈바리같이 걷기란 보기에도 우울한 꽃일 것이다.
 
21
주부의 독창에 나는 놀랐다. 가게의 머슴이 타는 리어카는 야채를 싣는 것이요, 과실을 나르는 것이요 ─ 상품을 배달하는 것인 줄 밖엔 모른 나의 지혜가 좁다면 좁을까. 궐녀는 그 자신의 제안으로 동행의 소년의 리어카에 오르는 것이다. 다리를 드러내논 채 웅크리고 앉아 앞잡이를 쥐고 꽤 긴 길 동안 뭇사람의 시선 속을 뚫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흔들리며 달아나는 꼴 ─ 나는 그의 독창에 놀라고 아울러 그의 용기에 탄복하였다. 방안에서는 여자의 소극성을 말하였으나 벌판에서는 더없이 용감스러움을 나는 발견하였다.
 
22
나는 그의 노골적 구애를 아직껏 듣지 않았음을 행복으로 여기고 앞으로는 몸을 든든히 무장하여야 할 것을 느꼈다.
 
 
23
❋ 중앙 1935. 8
【원문】여름 3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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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중앙(中央) [출처]
 
  1935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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