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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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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백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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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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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줄기 한 가닥이 미끄러지듯 쓰다듬어 내린 듯, 소롯하게 내려와 앉은 고요하고 얌전스런 하나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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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이 오른편으로 모시고 있는 높은 산에 자욱한 솔 잎사귀빛은 젖혀졌고 때때로 바람이 불어오면 파도 소리같이 쏴 - 아 - 운다. 언덕 뒤 동편 기슭에는 저녁 짓는 가난한 연기가 소릇소릇이 반공중으로 사라져가며 몇 개 안 되는 초가지붕들은 모조리 박 넝쿨이 기어올라 새 하얀 박꽃이 되었다. 언덕 왼편 남쪽 벌판은 아물아물한 저 - 산 밑까지 열려 있어 이제 벼모는 한껏 자라 검푸른 비단보를 펴 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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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앞 서쪽에는 바로 기슭에 넓은 못이 푸른 물결을 가득 담아 말 없는거울같이 맑다. 이 언덕, 푸른 잔디 덮히고, 이름 없는 작은 꽃들이 잔디속에 피어 있고 꼭 한 포기 늙은 소나무는 언덕의 등줄기 한가운데 서 있어 아마도 석양에 날아오는 까마귀를 쉬어 주는 나무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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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 이 소나무가 비바람 많은 세월 그 동안에 남모를 이야기도 수없이 겪었으려니와 아직 사람들이 전해 오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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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만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이 언덕을 넘어 마을에 양과 돼지를 잡아 먹으러 늑대들이 넘어온다는 이야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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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이 언덕 위, 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하나 아름답고 애끓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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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슬프다기보다 애달팠다. 이 언덕 이 소나무 역시 많은 풍상의 세월 속에서 겪어온 하고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내가 지금 듣는 이야기만치 딱한 이야기는 듣지도 못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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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그 어느 때 여름의 석양이었다.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언덕과 못을 찬란하게 물들이고 시원한 바람결이 간간이 불어오는 고요한 석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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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두 개의 영혼이 불꽃같이 타 버리고 말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 푸른 언덕 위 구부러진 소나무 아래서 핏빛같이 붉은 노을에 젖으며 나는 들었다. 그리고 울었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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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만일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이 연소(燃燒) 했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앙드레 지드가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타려고 해도 탈 수도 없는 가장 애끓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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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옥색의 긴 치마에 흰 ○○은 흰 은조사께끼 겹저고리를 발여 입었고 머리는 되는대로 넘겨 쪽졌으나 그리 보기 흉하지 않았다. 아니 이 여인은 서글서글한 두 눈이나 입이며 후릿한 키며가 잠깐 보면 몹시도 루즈 하게 인상되지마는 다시 한 번 거듭 보면 흐트러진 듯한 그의 전체가 모두 다정 연하고 단정하게 제격대로 맞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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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크고 맑은 눈을 위하여 그의 입도 조화되었고, 둥글고 넓은 이마는 그 얼굴에 조화되어 함부로 넘겨 쪽진 머리단장도 그 얼굴에 어울리고 그 호릿한 키에 아무렇게나 있는 치마맵시 역시 어울려 하나도 고칠 것이 없었다. 그 여인의 걷는 태도나 말 소리며 동작 역시 그 얼굴과 체격에 어그러지지 않아 가을밤 밝은 달빛 아래 잘게 잘게 주름 잡혀서 혹은 떨어지고, 혹은 감돌고, 혹은 출렁거리는 은은한 계곡물 흐름과도 같고, 맑은 호수같이 고요하고 청신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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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두 발을 되는대로 뻗고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잠든 얼굴을 들어 붉은 노을 하늘이 잠기어 있는 못물을 내려다보고 난 후 후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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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금방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내려 뜨 리며 좌우로 두어번 머리를 흔들고 손으로 잔디 잎을 두세 잎새 뿍뿍 뽑아 발 아래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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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그 여인의 두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짐을 보았다. 나는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인의 뻗친 발을 가만히 어루만지듯 흔들며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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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순희! 순희!" 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애수에 잠긴 그 큰 눈이 눈물에 가득 잠겨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금방 나에게 쓰러질듯 애원하 듯 입술을 깨물 따름이었다. 그는 입을 떼기를 무서워하고 스스로 무엇을 억제 하려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급한 성질에 더구나 실없이 남에게 동정 하기 좋아하는 타입이다. 바로 그의 곁에 다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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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희,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끝없는 괴로움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나와 당신이 비록 오랜 지기는 아닐지라도 피차 이름만은 서 로안 지 오래이니 무슨 상관이 있나요. 내 힘으로 위로 드릴만한 일이면 나는 웬만한 일은 희생해 가면서라도 당신의 그 괴로움을 덜게 해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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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내가 그때 이렇게 정답게 말을 건네지만 않았던들 오늘까지 그 여인의 괴로운 사정에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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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나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동정에 가득 찬 물음에 그만 앞으로 푹 고꾸라지며 흑흑 느껴 울었다. 나는 참지 못하여 그의 들먹이는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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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아요. 사람의 삶이란 괴로움이란 것이에요. 괴로움이 죽음이란 말이지요." 라고 되지 못한 위로의 말을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여인은 벌떡 얼굴을 치켜들며 눈물이 윗얼굴을 적셔 닦으려고도 않고 나를 바라보며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윽한 음성으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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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당신은 소설가이시지요? 당신이 쓰신 소설을 아직까지 읽어 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얼굴을 처음 만났을 아까의 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올랐어요. 우리가 다 - 같이 예술에 몸을 던진 사람이니 처음 만났으나, 오랜 친구였음이나 다름없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짐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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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겨우 한 손으로 눈물을 씻고, 또 다시 노을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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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소설가라고 할 인물은 못됩니다. 아직까지는 일개 문학 소녀 때를 못 벗었어요." 하고 나는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을 한다고 이런 되지 못한 변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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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여인은 나의 대답을 못들은 척 하고 잠잠이 앉은 채 다시 말을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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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답니다. 내 가슴속이 마치 붉은 노을같이 타고 있어요. 아니 이 노을보다 더 안타깝게 더디게 붉게 타고 있어요." 라고 그 여인은 한숨과 함께 내뿜듯 속삭이듯 말하였다.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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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오륙 년 전 미술전문 양화과를 나온 규수 화가이므로 나 같은 무지래기 소설줄이나 쓰는 인간보다 그 보고 느끼는 바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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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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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그만 두팔로 머리를 휩싸안고 소나무 둥치에 기대인 채 눈을 감았다. 나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 잠잠이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그가 진정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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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그는 다시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잠잠이 그대로 앉은 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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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한답니다." 라고 외치듯 한마디 부르짖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 여인의 슬픔이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과 그 여인의 괴로워하는 모양에 잔뜩 동정하여 그 괴로운 이야기를 듣기에 가슴을 졸이고 있던 판이었는데, 이 한마디 부르짖는 말에 갑자기 쓴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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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 에, 그까짓 사랑? 연애 관계로 이러는 것이로군……. 그까짓 남의 연애 이야기를 들어 무엇하며, 그까짓 문제로 이렇게 괴로워하다니!’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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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 훌륭한 스타일과 애화적 포 ─ 즈를 가진 여인에게서 나는 무슨 신비스런, 그리고 아주 감상적인 아름다운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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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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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여인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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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인이 사람에 미쳤나 보다. 무슨 말을 묻는 거야?’라고 반감 비슷한 생각이 들어 힐끔 여인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놀나무 둥치에 눈을 감고 기대어 앉은 채 혼자 명상에 잠겨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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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에요. 당신을 어떻게 보다니? 지금 내 눈이 당신과 같은 화가의 눈이라면, 그렇게 앉은 모양을 한번 그려보았으면 싶을 따름이지요." 라고 느껴지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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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같은 젊은 미망인이란 몸이요. 더구나 단 하나이지마는 아이까지 있는 몸으로서 사랑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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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의 이 말에 나는 놀랐다. 나는 이 여인의 남편이 죽고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아들까지 하나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러나 설령 그가 과부요, 자식이 있는 몸이라 하더라도 사랑하고 싶으면 그만이지……. 남편이 뚜렷이 있으면서 그런다면 생각할 문제가 되지마는 그까짓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므로 나는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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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별 말씀을 다- 하시네. 사랑하고 싶으신 분이 있거든 얼마든지 하시구려. 아드님이 방해된다면 내가 지금 아이를 낳지 못해 애쓰는 중이니 그만 나에게 양아들로 맡겨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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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몇 해 위인 듯한 그에게 나의 이 대답이 조금 당돌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에 나는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관심치 않고 그냥 그대로 움직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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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말을 끄집어내서 실례했습니다. 이제 차근차근 이야기 하지요. 나는 저 - 열일곱 살에 여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해 가을에 결혼하여 열여덟 살 되는 겨울에 아이를 낳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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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하는 말에 놀랐다. 아들이 있으면 이제 겨우 열 살 안 되는 어린아이였는 줄 알았던 터이라 조금 전에 나에게 양자로 달라고 하던 망발 이 새 삼 스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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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드님이 올해 몇 살이세요?" 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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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내 열여덟에 낳았으니까 올해 열여섯 살이에요. 중학교 이학년이나 됐어요. 내 나이 올해 서른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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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머니……그렇게 큰 아드님이 있어요? 그러면 미술 전문은 어느 때 나오셨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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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아까 그 포 - 즈대로 소나무 둥치에 기대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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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제가 스무 살 때 그 애 아버지가 죽었어요. 그래서 스물셋 때에 아이는 친정에 맡겨두고 저 혼자 동경으로 가서 이런저런 공부하는 척 하다가 스물여덟에 비로소 미술 전문을 나오게 됐어요. 제가 미술전문에 다닐 때 아주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고, 또 직접 구혼하는 사람도 무척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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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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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태까지 그대로 계셨던가요. 진작 재혼하실 일이지……." 나는 무뚝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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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제 사정으로도 꼭 재혼을 해야 될 처지랍니다. 첫째 이유는 제 죽은 남편은 단 형제뿐이었는데, 그의 형 되는 분이 스물둘에 죽었으므로 그 형수가 수절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아우되는 제 남편이 자식이 나면 제일 맏아들은 그 형수의 양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 아들은 나면서부터 그 수절하는 큰어머니의 아들이 됐지요. 나는 장차 또 아이를 많이 낳을 줄 알았던 것이 제 남편 역시 다음 아이가 들기 전에 죽었으니까 저는 아들이 있기는 하나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둘째로는 제 친정에는 제가 단 하나 외딸이에요. 제 어머니는 저 하나밖에 낳지 않으셨고, 아버지 역시 남의 친자식을 양자하는 것보다 딸이라도 자기의 친자식이 낫다 하시며 기어이 가독을 나에게 상속시키려는 거랍니다. 그런데 제 친정이 종가요, 또 아버지 형제가 없으시니 제가 만일 이대로 죽고 만다 면제 친정의 뒤가 끊어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제 아들은 남편의 집의 뒤를 이어야 되는 터이니까, 부득이 저는 재혼을 해야 될 처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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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길게 길게 한숨 쉬었다. 나는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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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신데 왜 그대로 계세요. 얼른 시집가세요." 라고 나는 철없는 듯 조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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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 하겠어요. 제가 지금까지 이대로 있게 된 이유는 저에게 구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입니다. 모두 일장일단이 있어 누구를 골라 잡아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런데도 그 중에는 몹시 싫은 사람이 거의 였으니 뒤에 남은 사람들 중에서 택하면 좋았겠지마는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조리 친정 부모님이 반대였으니 우스울 일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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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까지 그대로 계신 게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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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제가 제일 제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부모님은 기어이 시집가라는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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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 딱하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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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이만한 일쯤은 저 역시 예사입니다. 당신도 소설 스토리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많이 쓰시겠지요. 가장 평범하고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니까 요. 그런데 제 부모님이 기어이 그 사람을 고른 것은 그이가 직업이 의사 이랍니다. 제 남편이 폐를 앓아 죽었으므로, 저도 앓아 폐가 약한가 봐요. 몸이 몹시 약하니까 저는 의사에게 시집가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는 것 이 랍니 다. 그래도 저는 그이가 싫은 것을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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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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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인이 처음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그락망에서 점점 다시 귀가 기울여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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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세요. 우스운 일입니다. 어느 날이었어요. 전람회에 출품 할 그림을 판입한 후 산보 겸해 한강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본정통 어느 찻집에를 들어갔었지요. 그랬더니 공교롭게 그이가 저 - 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다가 나에게 달려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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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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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싫다는 의사 말이에요! 저에게 구혼 중인 그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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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벌떡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그 많던 눈물 줄기도 거의 마른 창백한 얼굴이 노을의 탓인지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긴장을 바라보면서 적이 놀라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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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윽히 나를 바라본 후 힘없이 두 팔로 잔디를 집에 몸을 지탱하며 두 눈의 찬란하던 광채는 사라지고 공허한 시선으로 변하며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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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 그 학생을 처음 본 때랍니다. 그이가 나를 끌고 자기 테이블로 가자 나는 그 테이블에 한 소년을 발견했던 거랍니다. 나는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들어온 찻집에서 그이를 만난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터이라,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이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으며 무심코 마주 앉은 한 소년에게 시선이 갔던 거랍니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랄만치 기뻤어요. 아니 내 가슴이 전광을 만진 듯 기쁨에 일순간 마비된 듯 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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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잠깐 입을 다물고 그때 그 소년의 얼굴을 눈앞에 그리듯 공허한 눈 그대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몸에 소름이 끼칠 듯 정신이 바짝 차려져 그의 조그마한 얼굴의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고 살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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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은 내가 그림을 붓을 든 후 오늘까지 머리 속에 그리고 그리고 해오던 나의 이상의 얼굴이었어요. 나는 항상 머리 속에 그리기를 지극히 온순하고, 지극히 아름다우며, 끝없이 침착하고 점잖으며 그리고 맑고 순결하고 화기를 띄운 그리고 용감하고 고귀하며 단정한 얼굴을 단 한 폭 내 전생을 통하여 그려보려고 욕망하여 왔던 거랍니다. 나의 이상의 남성의 얼굴이라고 할까요. 그런 얼굴을 많이 많이 구상해 보았으나 그때까지 머리 속에 그려내지 못했어요. 나의 그 욕망은 나에게 구혼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높아가며, 이제 그 의사란 사람과의 약혼이 부모님들에게는 거의 결정적으로 진행 중에 있음에 따라 더 간절해져만 갔습니다. 단 한 장이라도 그려 보았으면…… 그러한 얼굴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기쁘랴…… 그러한 얼굴이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보기만 하면 그려 낼수 있으리라…… 하고 나는 생각했었을거다. 그리하여 나는 여가만 있으면 정거장에를 나가서 내리고 오르고 하는 많은 남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었고, 길을 갈 때나, 전차를 탈 때나 나는 사람들의 얼굴만 유심히 살펴 왔던거랍니다. 그때에 그 욕망은 단지 내 그림을 위하여서의 욕망이었어요. 다른 아 - 무 생각도 없었어요. 단지 그러한 얼굴을 꼭 한번 그려보리라 하는 그 결심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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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시겠지요. 저도 간혹 소설에 등장할 인물의 타입을 찾으려고 해보는 때가 있으니까요…… " 라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동감함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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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 그때 나의 눈앞에 고개를 단정히 가지고 눈을 내리뜨고 찻잔을 바라보고 있는 중학교 제복을 입은 그 소년의 얼굴…… 나는 모 - 든 것을 잊고 그 소년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더랍니다. 소년은 이따금 부끄러운듯 나를 건너다보다가는 나의 맹렬한 시선에 마주쳐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띄우고는 고개를 내려뜨리곤 하였어요. 그이는 나에게 차를 받아주고 이야기를 건네며 그 소년은 자기의 단 하나 아우라고 소개하였어요. 나는 그 의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겨우 대답을 하면서도 소년에게 너무 민망하여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내 시선은 소년의 얼굴을 떠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전등이 켜지며 소년은 무엇을 느꼈음인지 조용히 일어서며 형님 저 먼저 가겠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찻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눈앞에 캔버스를 벌리고 이제 본 그 소년의 얼굴을 스케치하듯 눈을 감고 그려보았어요. 나는 날개가 돋힌 듯 온몸이 으쓱해지며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 길로 집으로 달려와 밤을 새우든 몇 날을 지우든 간에 한숨에 그려버리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이도 내 뜻은 모르나 나의 그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자기도 기뻤던 모양입니다. 나를 집까지 자동차로 바래다 주었어요. 나는 그때까지 어느 남자하고라도 단 둘이서 어디를 가는 것도 한 방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했고 한사코 거절하였던 터였으니까 그 날 밤에 그이는 자기와 단 둘이서 우리 집 문앞까지 자동차를 타게 된 것을 내가 그의 청혼에 반 이상 허락이나 한 줄로나 알았을 것 입니다. 아! 아!"
 
71
나는 그대로 저녁밥도 먹지 않겠다고 돌아보지도 않고 집 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을 여가 없이 캔버스 앞에 섰지요. 그 밤이 깊기도 전에 나는 벌써 윤곽을 다 - 잡았어요. 너무나 기뻐 화필을 든 채 캔버스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끌어안았는지요. 한번 그리고 기뻐하고 또 한번 붓대고 웃고, 두 눈에 들여박힌 그 소년의 얼굴, 나는 즐거웠어요. 그 즐거움……! 나는 참다못해 그리는 것까지 아까워서 소년의 얼굴을 눈 속에 집어넣은 채 눈을 꽉 감고 그대로 침상에 뒹굴며 미친 듯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솜 뭉치같이 피로하여 아침도 먹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오후 두 시였어요. 나는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식사를 마친 후집을 뛰어 나왔습니다. 내가 깜짝 정신이 났을 때는 벌써 그이의 병원 진찰 실 안에서 그이와 마주 서 있었어요. 그가 왜 그 병원에 갔는지 지금 생각 해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이에게 인사말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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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아우님이 어디 계신가요?" 라는 물음이었어요. 그이는 웃으며 내가 자기를 찾아온 구실로 그 아우를 찾는 줄 알았던 모양인지 그 대답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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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약하신데 바다로나 산으로 가시지 않으시겠냐." 고 도로 엉뚱한 말을 건네는 것이었어요. 나는 뭉클 성이 났으나 꾹 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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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이 어디 있어요, 선생님은 어서 일 보세요. 저는 그 동안 아우님과 이야기하고 놀 터입니다. 오늘 저녁에 또 찻집에 가시지 않으시겠어요?" 라고 나는 나대로 들어대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앞을 서서 나를 인도 하여 이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층은 그이의 서재인 듯 팔조와 육조의 넓은 다다미방 이었어요. 나는 그이보다 앞서 실례되는 것도 잊고 방 안에 먼저 들어서서 육조방 한 옆에 책상 앞에 그 소년이 턱을 고이고 물끄러미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보고 놀라 일어서서 일순간 몸을 감추려는 듯 사방을 살피며 머뭇거리더니 내가 너무나 그의 앞에 가까이 가서 있음을 보고 마지못하여 새 빨개진 얼굴로 약간 고개를 굽혀 인사를 한 후 휙 몸을 날려 층층대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은 채 소년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이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내 곁으로 가까이오면서 내 두 어깨에 두 손을 걸었어요. 나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 버렸어요. 그리고 나는 그이에게'저녁때가 되거든 함께 어디로 식사를 하러가든지, 찻집을 가든지 하자’고 말하고'어서 내려가 환자(患者) 치료 나하시면 그 동안 여기서 기다리겠노라’고 했었지요. 그러니 그이는 아주 기뻐하며 층층대로 내려가겠지요. 나는 그의 뒤통수를 향하여 당신의 아우님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이는 싱긋 웃으며 그대로 내려가 버렸어요. 나는 이윽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며 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그는 얼른 놀란듯 고개를 돌리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는 그를 바라보고 그는 무료 하게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그동안 다 - 같이 말 한마디 없습니다. 얼마나 한 시간이 흘러갔어요. 그리고 있는 동안 나는 커다란 환희에 가득 차 있었던 거랍니다. 그의 얼굴, 소년답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고상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 얼굴, 그리고 어디인 소년다운 선을 가진 순결한 그 입과 눈…… 나는 나를 잊고 도취되어 있었던 거랍니다. 그때까지 아무리 유명한 동 서양의 명화(名畵)를 대하여도 이만치 내 스스로 도취되어 바라보고 바라보아도 끊이지 않고 신비로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이윽고 무료함을 못 이겼음인지 대담하게 나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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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형님은 퍽이나 착하신 사람이랍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섬뜩하여 휙 눈을 돌이키며
 
76
"네-." 하고 대답했지요. 그때 나는 "당신 형님보다 나는 당신의 그 얼굴이 더 착하고, 아름답습니다." 라고 대답하려 했습니다마는 이상하게도 그때 제 귀에
 
77
"어머니!" 하고 부르는 내 아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여 얼른 한다는 대답이 소년이 그 형을 자랑하는데 동감임을 표하고 말았어요. 그의 형 되는 그이는 그때 나보다 한 살 위였으니까요. 그때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들어보지 못 했고, 아니 않았고, 이성을 사랑해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이의 사람 된 인품이 얼마나 이지적이며 고지식했던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에게 들으면 자기는 부모도 없고 다른 친척도 없고, 단지 하나 아우인 그 소년 하나가 유일한 육친이었으니까 그 소년을 두고 자기가 장가들기 민망하여, 소년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나 대학으로 가게 되어 집을 떠나면 그때는 장가들겠다는 것이었어요. 자기가 장가를 들어서 만일 아내나 아우에게 불순하다든지, 또는 아우에게 자기가 아내를 더 사랑함을 보이게 될까 하는 여러 가지 염려가 있었던 까닭이었겠지요. 좌우간 보기 드문 사람 이었어요.
 
78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길게 한숨지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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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라, 그이? 음, 음." 하고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즉 그 이라는 의사 김성규(金性圭)는 바로 나와 고향이 같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하나, 두어 번 진찰까지 받아 본 적이 있었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나는 그 여인의 이야기에 온통 정신이 쏠리고 말았다. 그 소년이란 성규의 아우 정규(貞圭) 임도 잘 알겠고, 또 정규의 얼굴이 과연 범연하게 생기지 않았음도 내 이미 알고있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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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그러면 김성규 씨 형제분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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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그 여인의 말을 가로질러 입을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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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요. 당신을 그이가 성규 씨가 잘 안다고 말하더군요. 바로 말하면 제가 당신을 찾아서 이곳가지 오게 된 것도 당신이 성규 씨를 잘 아시는 까닭입니다." 하고 여인은 또 한숨지었다. 그 여인의 한숨소리는 웬일인지 내 가슴에 바늘같이 파고드는 듯 하며, 그 여인의 한숨소리는 정말 인상적이라고 느꼈었다. 그때 어디서 석양마을을 향하여 길게 음매 - 하고 새끼를 찾는 암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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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에 이윽고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말을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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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 씨가 나에게 구혼하게 된 것은 그가 동경 ××의과대학에 다닐 때로 내가 미술전문에 다닐 때부터랍니다. 그러나 나는 그이의 고지식한 성품이 싫었고 또 아이까지 있는 나로서 총각인 그에게 시집가기가 어색했어요. 그래서 아주 딱 거절했었는데 그이는 제 부모님에게 직접 운동을 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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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라도 재혼을 하거든 그때는 자기에게…….’ 라고 아주 나의 부모님에게 단단히 간청을 했던가 봐요. 그러니까 나의 부모님은 총각이요, 더구나 의사요 돈도 있고 사람이 굳건하고 어디 흠이라곤 없는 자리이니까 아주 단단히 그에게 약속했던 모양입니다. 그이의 청혼에는 정말 우리 부모가 황감하고 과분하고 아주 영우 녹았던 모양입니다.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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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정말 기가 막히게 어려운 실마리들의 맺음이에요. 부모님이 그만큼 기뻐하는 터이거든 나 역시 그만큼 기뻐해야 술술 다 평온 무사하게 될 일인데 나는 왜 그다지 그이가 싫은지…… 아이 참…… 그뿐이라도 좋을 텐데 하필 또 무슨 까닭에 그이의 어린 아우가 그리도 나에게 잊히지 않게 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운명의 장난이 너무나 까탈스러움이 원망스럽습니다. 그 날! 소년과 처음 말을 나누어 보던 그 날 석양에 그이와 셋이서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송월이라는 찻집에를 갔었지요. 성규 씨는 아직까지나 를 단순히 친구로만 소개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이에 소년과도 무관하게 친해져서 소년은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에게 붙이기도 하였어요. 그 날은 무척 즐거웠어요. 나는 그를 위해 이야기도 하고 또 성규 씨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머리 속에 그려오던 얼굴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무척 기쁘다고까지 말했지요. 그러니까 성규 씨는 자랑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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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규의 얼굴보다 더 훌륭한 모델은 없을거요." 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소년은 짬짬이 나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돌리며 혼자 미소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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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도 들여다 본 것이로군!" 하는 표정이었어요. 나는 소년의 영리함을 그 순간 발견했던 거랍니다. 그날 밤은 그 형제분에게 전송을 받아 저의 집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 집 대문간에서 소년은 그 형이 내 곁에서 떨어진 틈을 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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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집을 알았으니까 놀러 와도 좋아요?" 라고 속삭였어요. 나는 가슴이 몹시 괴로워지며 소년을 바라보려 두 손을 내밀었지요. 소년은 와락 내 손을 잡으며 놀러 올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다짐 했어요. 나는 경쾌하게 대답하려 애쓰며 형님에게 허락 받아서 놀러 오라고 대답 했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내 손을 흔들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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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케이." 라고 말한 후 휙 돌아서 그 형과 가버렸어요. 나는 대문에 들어서며 왼 편으로 있는 사랑인 내 방으로 들어가 얼른 캔버스 앞에 섰습니다. 지난 밤에 그려 둔 소년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윽고 그림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또 하나 훌륭한 상(想)이 생겨났어요. 내가 전날 금강산 구경 갔을 때 비로봉 위에 올라가 사방경계를 이윽고 둘러보며 내 혼이 대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듯하여 명목하고 섰으려니까 마음과 몸이 다- 함께 인간세상을 떠나 지극히 청정된 미의 세계로 간 듯 하였어요. 그래서 문득 그때 생각이 나며 그 소년을 비로봉 위에 세워두는 생각을 했던가 합니다. 제 생각에는 비로봉을 정복한 그 소년을 그려서 자연에서 받은 나의 감명보다 더 큰 감격을 그 소년에게서 받았음을 표상하려는 뜻이었어요.자연에의 극치를 인간에게의 극치가 정복하고 남음이 있음을 그리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밤부터 그림제작을 시작했던 거지요. 먼저 세수를 하고 어머니 앞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신 후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잠시 눈을 감고 이윽고 구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림 그릴 준비를 개시했지요. 먼저 비로봉을 박을 사진을 죄다 들추어보고 그때 눈에 박힌 인상을 되풀이해 보며 인물을 배치할 화면도 대강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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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중에 그 밤도 꼬박이 새우고 그 이튿날은 정오가 넘게 몸을 쉰 후 또다시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나는 두 다리가 붓고 머리에 현기가 나고 손이 떨려도 모르고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 날 해도 지고 밤도 깊었으나 잠잘 줄도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화필을 놓을 줄 몰랐어요. 그림은 화필의 움직임을 따라 깎아지른 바위산의 절벽 위에 크고 작은 바위가 놓여 있고 이름 모를 풀과 넝쿨이 엉키었으며 그 사이에 인물을 세울 자리를 두고 원 경으로 산줄기와 흰 구름을 배치하여 내가 보기에 우선 훌륭한 게임이었어요. 뒤에 남은 인물만 내 의도한 바에 맞게 그려질 지가 문제였을 따름이었지요. 그러나 그 소년의 얼굴은 이미 내 눈에 박혀 있으니까 문제 없으나 그의 포즈를 어떻게 할까…… 를 다시 생간에 잠기게 되었더랍니다. 자연스럽게 극치의 미를 두 발로 힘 있게 눌러 디디고선 씩씩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스스로 정화된 위풍이 늠름한 포즈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더랍니다. 생각 에지치고 주림에 못 이겨 어느 때든지 소년에게 한 포즈를 청해서 잠시 모델이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한 후 비로소 자리에 들게 되었더랍니다. 그러나 내 머리는 혼돈하여 눈은 더욱 새롭게 떠져 좀처럼 잠들지 못 하는데시계는 새로 한 시를 쳤습니다. 나는 억지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수없이 걸은 후 그림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시계는 어느덧 두 시를 치고 또 세 시를 치고 짧은 여름밤이 거의 다 - 새 어가는 네 시가 울렸어요. 그 사이에 나는 방 안을 몇 백 차례 왕래하였고 머리 속과 눈앞에는 그 소년의 가지가지의 포즈가 산란하게 반복되고 있었 더랍니다. 일순간도 끊임없이 그의 얼굴과 동작을 떠나 다른 생각은 해보지못 했지요.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방 안에 꽉 차고 동편 하늘이 조금씩 말쑥해져 가자 와야 될 잠은 영영 달아나고 정신은 더욱 새로워졌습니다. 나는 인물의 포즈가 결정되기 전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겠음을 깨닫고 잘것을 단념해 버린 후 어서 아침이 되면 소년을 찾아가서 또 한 시간 동안이나마 포즈를 지어 모델을 청하겠다고 결심한 후 자리에 가 누웠지요. 비로소 그때야 내 머리에서 소년의 그림자가 사라지며 어서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에 잠겨 있게 되었는데 어느덧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급히 눈을 뜨고 휘 둘러보니 벌써 정오가 넘었고 머리맡에 보지 못하던 종이가 놓여 있었으므로 얼른 들고 보니 만년필로 얌전히 쓴 두어줄 글이 쓰여 있음으로 놀라 들여다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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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숙면하십니다 그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렸더랍니다. 또 놀러와도 좋은가요? 정규" 라고 쓰여 있지 않겠어요. 나는 와락 일어나 계집아이를 불러 나 없는 사이에 누가 오지 않았던가 물어봤으나 전혀 모른다는 대답 이었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손님이라고는 오지 않았다는 대답이었어요. 나는 휭하니 내둘리는 머리를 겨우 진정하여, 그 소년이 나 잠든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내 방에 들어왔다가 얼마간 지체한 후 그대로 가 버린 것을 깨 달았어요. 가슴이 화끈해지며 나도 모르게 경대 앞으로 달려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봤던 거랍니다. 얼마나 흉측한 얼굴로 잠을 잤을까 그 소년이 나의 그 모양 없이 자는 꼴을 들여다 보았을 터이라고 생각된 까닭이었어요. 거울에 비치는 파리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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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잠이 들기 전에 세수를 할 것을……." 하고 후회했어요. 정말 당신에게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심리입니다. 다음 순간에 나는 부끄러움을 참을 길 없었어요. 내 아들이 다녀갔다면 그렇게 당황스럽게 거울 앞에 달려갔을 리가 없었을 것일 터인데 라고 생각이 든 까닭 입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꾸짖으며 천천히 세수를 하고 밥을 먹은 후집을 나섰지요. 부리나케 내 발은 걸어지며 성규 씨의 병원을 향해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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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앞에 이르게 되자 나는 발길을 탁 멈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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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느냐! 네가 그림을 그리려는 정열만으로 이 집을 오는 것이냐. 갑자기 그림에 그다지도 열이 났느냐. 만일 이 길로 소년을 대하면 어떠한 표정으로 대할 것인가. 그리고 성규 씨에게 어떠한 느낌을 줄 것인가. 내가 왜 이다지 무괴도한 감정에 끌려 광기에 가까운 생각과 행동을 감행하는고. 무슨 까닭에 몇 날이나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그림에 도취되었던가. 아 아! 단순히 나는 단순히 그림에 열이 났다고만 할 수 있을까……." 하고 누군가 내 귀에다 속삭이는 듯 하였어요. 나는 흰 발을 돌려 얼른 병원 앞을 떠나 전찻길로 나섰지요. 그때 돌아서는 가슴속이 왜 그다지 괴로웠을까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이 며칠간 나의 모든 정열을 들끓게 한 그 원인이 되는 소년에 대한 생각을 무시하려고 시댁이요, 나의 아들이 있는 집을 향해 갔습니다. 그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집안에서 내 아들 석주(石柱)가 무어라 크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또다시 두 발이 땅에 딱 들어붙는 듯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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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미냐! 네 아들이 지금 열여섯 살이나 되었다." 라고 외치는 듯하여 나는 깜짝 놀란 듯 홱 돌아서서 달아나듯 골목쟁이를 뛰어나오고 말았어요. 내 아들에게 대할 때 지극히 청정한 어머니로서 아니면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고 내 스스로가 느꼈던 탓입니다. 비록 사정에 못 이겨 내가 재혼을 한다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나 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것 같기도 하지마는 그 날 소년 정규가 더구나 내 아들보다 단 세 살밖에 차이가 없는 소년 정규, 아니 그보다도 그의 형과 약혼설이 진행 중에 있는 사이에 그에게 나의 자는 얼굴이 행여 더러웠을까 염려되어 거울 앞에 부리나케 달려가던 그 마음을 가지고 내 어떻게 아들 석주의 앞에 나갈 수 있으리. 설령 이 순간부터 다 잊어버린다 한들 조금 전까지 이름 없이 가슴이 괴로워 그 병원 앞까지 가던 그 마음을 가렸던 몸이 어떻게 석주를 보랴! 하는 괴로움에 내 눈은 어두워졌어요. 허둥지둥 어디인지 건너가다가 지나는 택시에 올라앉아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답니다. 먼저 안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천연스럽게 세상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내 마음은 지극히 평온하여졌으므로 과실을 먹고 집안일에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 내일은 석주를 불러다 모델을 하여 그림을 완성하리라 생각한 후 내 방으로 들어왔었지요. 방안에 들어서자 내 눈은 그리던 화폭으로 끌려가고 대강 얼굴 윤곽만 날아난 그 얼굴은 소년 정규의 모습이 완연함에 내 마음은 전선줄에 부딪힌 듯 부르르 떨었습니다. 무의식간에 내 몸은 화폭 앞에 가 서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또 경대 앞에 가 있는 것을 깨달았어요. 행여나 소년 정규가 다시 오지나 않을까 하는 영감이 있는 듯 하였음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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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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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나는 손에 쥐었던 분첩을 힘껏 경대 속에 비춘 내 얼굴을 향해 때려 부순 후 와락 그림에 달려가 캔버스째 울러매어 산산이 부수고 찢고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라서 가위를 찾아 화폭을 되는대로 막 베고 뚫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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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야!" 하고 한 번 불러보았어요. 그러나 내 눈앞에 나타난 얼굴은 내 사랑하는 아들 석주가 아니고 그 소년 정규의 침착하고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 이었어요. 나는 휘 한번 방 안을 살펴보고 손에 쥐인 가위를 치켜들어 보고 찢어진 화폭을 바라봤지요. 공교롭게도 다 찢어진 화폭에서 소년의 얼굴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어요. 나는 와락 화폭을 안고 한껏 울었답니다. 슬픔이 자꾸 자꾸 샘같이 솟아올랐어요. 무슨 슬픔인지 나는 알지도 모르면서…… 그 미친 듯한 내 행동을 웃으시리라. 그러나 나는 화폭을 그 찢어지고 뚫린 화폭에 그대로 한 조각 남아 있는 소년의 얼굴 위에다 내 뺨을 포개어 온 몸이 타는 듯 괴로웠어요. 그리하여 그 날 저녁도 어머니 염려 하실까 먹는 척만 하고 그대로 더운 방문을 끌어 닫은 채 다 잊고 잠이 들려고 뒹굴고 누웠지요. 누워 있으니 똑바로 천장만 쳐다보이고 그 천장에는 소년의 얼굴이 있었어요. 나는 베개가 하묵이 젖는 줄도 모르고 가슴 이타는 듯 하여 턱없이 울었답니다. 철 없는 첫사랑에 깨진 어린 소녀같이……! 그때 미닫이가 가볍게 흔들리는 듯하여 가늘게 들리는 인기척이 있 음으로 나는 온 몸이 으쓱하여지며 깨어지는 듯 크게 한 번 뛰었어요. 벌떡 몸을 일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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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누가 있어요?" 하고 귀를 기울였지요. 그러나 창 밖은 잠잠하였으므로 나는 신경이 너무나 날카로워졌는가 하여 다시 누으려 하니 문득 내 몸은 작은 새같이 날쌔게 또다시 경대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어요. 분첩을 때려부쉈던 자리가 달을 그린 듯 주위에 분가루로 윤곽이 되어 있는 것을 얼른 한 손으로 문지르고 그 아래 떨어진 분첩을 주워 얼굴을 대강 누른 후 벌떡 일어서 두 어번 방안을 휘 돌아보며 찢어진 화폭을 걷어치우려고 캔버스에 손이 가자 방 미닫이가 소리 없이 열렸고 그 소년 정규의 전체가 나타나 있음을 보았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멀뚱이 서 있었어요.
 
101
"실례이지요. 노하십니까!" 라고 소년은 나를 바라보며 사죄하듯 서 있습니다. 나는 당황하게 내가 가져야 할 표정과 동작을 생각해 내서 얼른 내 몸을 돌아보며 비로소 파자마만 입고 있음을 인식하고
 
102
"아니 내가 도로 실례입니다. 잠깐 눈감아요. 내 얼른 옷 입을께……." 라고 어색은 하나 아이를 대하는 어른답게 말했지요.
 
103
"그러면 돌아서지요."
 
104
소년은 웃으면서 새빨개진 얼굴로 휙 돌아섰어요. 나는 파자마 위에다가 치마 적삼을 꿰어 입고
 
105
"자 다 됐어요. 이리 와요. 형님은 오시지 않았나?" 라고 어디까지든지 내 아들 석주의 동무로 또는 나와 결혼할지 모르는 성규씨의 어린 동생으로 대접하려 말을 낮추어가며 소년의 곁에 가 그의 손을 끌고 방 가운데에 앉힌 후 방문을 죄다 열어젖히며 어색하게 웃고 어색하게 명랑했으며 서툴게 어른다우려 전 신경을 동원시켰더랍니다. 소년은 나의 말에 실수 없이 응대하며 같이 웃고 같이 명랑한 음성을 내면서도 간간이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나이든 사람같이 아니 그보다 더 침착하고 심각한 눈이었어요. 나는 소년의 그 눈을 바라보며 내 가슴속이 환히 다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아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나 역시 그가 일부러 어린 척 하려고 노력을 느끼지 않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106
"안 될 말이다. 이대로 이 시간을 더 연장해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아아!"
 
107
나는 몸이 떨렸어요. 너무나 무서웠어요. 나는 서른이 넘은 여인, 더구나 소년보다 단 세 살 떨어지는 아들이 있는 사람, 소년은 그의 형이 청춘을 희생하며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철 없는 소년이다. 아! 여보세요.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무섭고 얼굴이 찡그려지며 불쾌했어요. 그러므로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묵묵한 태도로 잠잠히 방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소년은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으며,
 
108
"왜 이랬어요. 막 찢었네! 제 얼굴이 미워서 찢었어요?" 라고 하며 우습다는 듯이 화폭 앞으로 벌떡 일어나 옮겨 갔지요. 나는 그 소리에 번쩍 귀가 열리며 질겁을 하고 일어서며 화폭을 막아섰습니다.
 
109
"아니야 당신의 얼굴이 아니야. 아무리 그려도 잘 그려지지 않아서 속이 상해 찢은 거야. 금강산을 그리려는 거야……." 라고 변명했습니다. 소년은 물러서며 그대로 웃으며
 
110
"다 알아. 나를 아주 멍청이로 아세요?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다 봤는데…… 아주 이상적 얼굴을 발견하셨다고 하시기에 저는 속으로 무척 코가 높아졌는데 웬걸 이렇게 막 찢은 걸 보니 나를 아주 미워지게 여기시는 거지요. 요즘 이삼 일 간 오시지 않으시기에 나는 무얼 하시는가 했더니 절 미워서 오시지 않으신 것이었습니다요." 라고 웃으면서도 원망같이 말하며 물러가 앉았던 자리로 가서 도로 앉는 것 이었어요. 나는 변명하지 않았더랍니다. 변명한다면…… 아 - 나는 웃음을 지으며 "어디 당신을 두고 그런 것이라고!" 하며 태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리하기가 어른들보다 더 영리한 소년이 나의 마음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잠잠히
 
111
"흐응 - 흐응 - 그래요. 네……." 라고 단순하게 내 말을 긍정하면서도 그의 음성과 두 눈은 내 괴로움을 알아 차리고도 남음이 있고 위로하여 주고 싶은 어른다운 생각에까지 미쳐 있음 이 환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꼭지로부터 그를 무지하려고만 애쓰며 소년답지 않은 그의 침착한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무서워 자꾸 외면만 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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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선생님. 뭐라고 불러요. 저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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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얼른 화제를 돌렸습니다. 나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 급히 세 번 네 번 고개만 크게 끄덕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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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주머니다. 아주머니! 날마다 놀러와도 좋아요? 사랑대문이 큰대 문과 한 대 잇대어 있고 안채가 둘러 앉았으니까 아무리 놀러 와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요. 낮에 왔을 때는 처음이라 겁도 났지만 이제는 예사랍니다." 라고 말하는 소년의 얼굴을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지요. 그 말이 너무나 무서워서요. 이 영리한 소년이 행여나 잘못된 길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이러한 생각과 소년은 나쁜 소년들이 갖는 것이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 그 얼굴은 청정무구하여 조금도 불량성이 없고 자연스럽고 세련된 완전한 하나의 자아를 가진 밀어 던져도 나쁜 길에 떨어질리 만무한 얼굴이었어요. 나는 놀람을 마지 않았더랍니다. 다만 소년의 너무나 조숙함에 놀랐던 것입니다.
 
115
"아주머니, 염려 말아요. 제가 불량소년 같다고 여기십니까! 염려 없어요."
 
116
소년은 휘 한숨을 지으며 어느새 나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 합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어요.
 
117
"그렇게 나를 자꾸 무서운 눈으로 꾸짖지만 마시고 좋은 이야기나 들려주세요." 라고 어리광같이 말했어요. 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자꾸 빤히 바라보았어요.
 
118
"아주머니, 제 아주머니, 제가 자꾸 무관하게 실례되는 것도 돌보지 않고 막 마음대로 굴어도 용서하세요. 상관 없으시겠지요?" 라고 나의 팔을 잡아 흔들며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119
"그럼! 아무래도 좋아!"
 
120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121
"아이, 벌써 열 시네……! 형님이 염려하시겠군. 어서 가자!"
 
122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내가 누웠던 자리를 잠깐 유심히 바라보는 듯 하더니,
 
123
"아주머니 저기 누워 주무세요? 아주 심심하시겠네."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툇마루에 나섰습니다. 나는 압박되었던 공기에서 해방되려는 듯 가뿐하기도 하고 끝없이 서운하기도 하여 그의 뒤를 따라 툇마루로 나갔지요.
 
124
"아주머니 ─."
 
125
소년은 구두를 신으며 걸터 앉으려다가 나를 휙 돌아보며 할 말도 없이 불러 보며 선 듯 내 어깨 위에 한 뺨을 기대고 정답게 부비려는 듯 하더니 얼른 그대로 건너 앉아 버리며
 
126
"갑니다. 잘 주무세요. 그렇지만 심심하시겠어요." 라고 잠깐 돌아서 방 안을 들여다보며 팔짱을 끼고 한번 고개를 기웃해 보더니 휙 나가버렸어요.
 
127
"잘 가요……."
 
128
나는 겨우 그의 발자취 소리가 사라지자 방 안으로 들어왔답니다. 그 방이 그 처럼 그 순간처럼 넓고 텅 빈 줄은 그때만큼 깊이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나는 잠깐 가슴이 언 듯 울 듯 울 듯 애처로워 어린아이 달래듯 방 안을 걸어보다 가 참을 수 없어 뜰로 내려갔었지요. 하늘도 쳐다보고 꽃냄새도 마셔 보며,
 
129
"어서 자자…… 내 신경이 피로했구나." 하고 자꾸 잠이 오게 애를 쓰다가 방으로 들어왔지요. 겨우 겨우 잠이 든 때는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나는 누구에게 흔들리워 잠이 깼어요.
 
130
"어머니!"
 
131
내 눈앞에 아들 석주가 앉아 있었어요. 나는 부끄러움과 죄송함과 반가움에 떨리는 음성을 진정시켜,
 
132
"석주냐…… 너 왜 왔니……." 라고 물었지요.
 
133
"그대로 왔지."
 
134
이 대답은 나를 보고 싶어 왔다는 뜻임을 아는 터이라 나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요.
 
135
"어머니……."
 
136
석주는 어리광을 피우며 일어나려는 내 가슴에 머리를 부비며 내 팔을 베고 나를 안고 누웠어요. 그리고는 어느 때나 다름없이 바쁘게 젖을 찾아 쥐며 빨 듯이 대들었어요. 그전 같으면 때려 주던지 밀어 던지든지 하여 버릴것이었으나 그 날은 잠잠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재우듯 하였지요. 이윽고 그러고 있는 사이에 내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져 석주의 어깨 위에 떨어졌습니다.
 
137
"어머니! 왜 울어, 울지 말어."
 
138
석주는 내가 우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아온 터이라 얼른 일어나 앉아 나를 일으켜주며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와락 얼싸안고말았답니다.
 
139
"엄마 나 이제 다 컸어. 그러니 엄마도 시집가야지…… 응! 어서 가. 그러면 나 엄마 행복하게 사는 집에 날마다 갈테야. 내가! 응 응 엄마, 아주 훌륭하게 되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지금 당장 있다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마는 아직 나는 나이가 어리니까 아직 틀렸지 뭐야. 아직 차례차례 멀어지며 그러니까 그때까지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이러고있는 건 잘못이야. 바보지 뭐 응? 응 그렇지…… 그러니까 어머니 나 염려말고 얼른 시집가…… 그러면 그이 보고 나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지!" 라고 하지 않겠어요? 아비 없는 자식! 물론 석주는 벌써 나이가 그만하니까 나를 위로하려고 그러는 말이기는 하지마는 일생을 두고 아버지라는 것을 가져 보지 못한 이 자식의 쓸쓸함을 생각할 때 내 가슴은 서리를 맞은 듯 따갑고 오뇌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140
"엄마! 울지 말아요."
 
141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애타하는 석주를 앞에 앉히고 겨우 진정한 후 아침밥을 먹고 안방에서 어머니와 석주와 셋이서 재미있게 놀다가 사랑방인 내 방으로 내려왔지요. 석주에게 여러 가지 포즈를 시켜보려는 생각이 났던 까닭 입니다. 둘이서 막 방 안에 들어서니 소년 정규가 찢어진 화폭 앞에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요동치는듯 하며 그 팔짱을 끼었다가 천천히 팔을 풀어 한 손은 뒤 허리에 재껴 부치고 한 팔은 반을 걷어 붙인 채 화폭을 잡고 서 있는 그 포즈에 나는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더랍니다. 소년은 나와 석주에게는 무관심하고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양 묵묵히 화폭만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어요. 석주는 방에 들어가다 말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었어요.
 
142
"들어가! 손님이야. 아니 네가 형님이라고 불러. 아주 좋은 학생이란다." 라고 횡설수설하게 주어 대었지요. 석주는 그저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므로 나는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 서서 그만 보고
 
143
"이 애는 내 아이니까 무엇이든 좋은 것 많이 가르쳐 주어요." 라고 말했지요. 그제야 소년은 석주를 돌아보며,
 
144
"네 그러세요. 전들 뭐 압니까? 우리 동무 됩시다." 라고 석주에게 말을 건넨 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석주는 그대로 둔 채 나를 향 하여,
 
145
"아주머니 이 그림을 도로 그리세요. 다시 붙일 수가 없을까 하고 지난날 새도록 연구해 보았어요. 그러나 안 되는군요. 그러니 다시 그리시는 수밖에 다시 그리세요."
 
146
반은 명령하듯한 음성이었어요. 나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답니다. 그리고 석주 곁에 가 앉으며,
 
147
"당신도 이리 와요." 하고 소년을 불렀습니다. 소년은 돌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잠깐 몹시도 답답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고 내 곁에 선뜻 걸어와서 싱긋 웃으며 퍼질러 앉았습니다. 나는 먼저 손을 들어 소년의 어깨에 얹고 또 한 손으로는 석주의 손을 잡고 무엇이라 할 말이 있을 듯 하였어요.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무거운 침묵만이 계속되었어요. 여보세요. 당신은 소설을 쓰시는 분이니까 그때의 내 가슴속을 얼마만큼이라도 이해 하실수 있으신가요? 정말 그때 내 마음 가운데 불순한 점이 있었다고 단정하시지는 말아 주세요. 가령 내가 그 소년을 동경하고 연모하여 내 나이 소년에게 비하여 너무나 늙었다든가 또는 아무래도 그 연정을 만족시킬 수가 없으니까…… 라고는 부디 상상도 말으세요. 나는 그러한 생각은 일순간의 그림자만치라도 염두에 두기가 불쾌했고 또 내 스스로 혹 내가 소년을 연모 하는것이나 아닌가 이만한 나이로서…… 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기가 불쾌했어요. 나의 이 심정을 아시겠어요. 그러한 얼토당토 않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나는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보세요. 웬일일까요. 내 가슴은 무슨 까닭에 뛰는 것이고 왜 그다지 갑갑하고 괴로운가요. 아마도 가슴이 괴롭다는 것은 그런 건가 봐요. 숨이 꽉 막힐 것 같고 갑갑해 못 견디겠고 눈물이 꽉 차 용솟음을 치는대로 한 방울 흩어지지도 않는 아무 까닭을 따져 볼 수도 없는 그러한 가슴이었어요.
 
148
"아주머니, 저는 그림은 전혀 문외한이랍니다. 아주 몰라요. 그래도 시(詩) 나 시조 같은 것이나 소설 같은 건 조금 읽기도 했어요." 하고 소년은 그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내 손을 들어다 제 무릎 위에 놓고 쓰다듬으며 말을 끄집어 냈습니다. 나는 자다가 깨인 것처럼 어리둥절하며 석주에게,
 
149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하고 물었지요.
 
150
"나? 나는 엄마의 아들이니까 그림이 좋다고 할까?……."
 
151
석주는 아주 어리광을 피우며 웃어대는 것이었어요. 나는 잠잠히 앉았다가 소년에게 민망하여,
 
152
"그러면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어요?" 하고 물어봤습니다.
 
153
"좋은 건 하도 많으니까…… 그래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罪)와 벌(罰)의 타스코리니코프만큼 감명 깊은 주인공은 없었어요. 그리고 시조로는 누구보다 로산의 것이 제일이었어요." 라고 그는 제법 나이 든 사나이같이 이야기하는 것이었어요.
 
154
"아주머니,제가 하나 외울 테니 들어 보세요. 석주도 들어요."
 
155
"윗가지 꽃봉오리 아랫가지 낙화(洛花)로다. 한날에 붙은 것이 성표(盛表) 어이 이러하니 꽃 아래 섞인 노유(老幼)야 일러 무엇 하리요. 어떠십니까."
 
156
소년은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나는 하마터면 눈물이 떨어질 뻔한 것을 꿀꺽 삼키며
 
157
"석주야 너 그 뜻 아느냐." 고 괜히 필요 이상의 큰 소리를 질렀어요.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앉은 채 로나를 바라보며 묵묵히 앉았지요. 석주는 벌떡 일어나 종이와 연필을 찾아가지고 와서
 
158
"여기 써 주세요." 라고 졸랐습니다. 소년은 선뜻 연필을 들고 엎드렸다가 한 팔을 내 무릎에 걸치며 내 팔은 제 가슴아래 깔며 종이에다가 쓰기 시작하였어요. 나는 연필 끝이 굴러가는 자리를 쫓고 있었지요. 그 시조를 다 쓰고 나더니 또 하나 쓴다고 하며 제목은
 
159
"할미꽃이에요." 라고 전제를 두고 난 후
 
160
"겉 보고 늙다 마소. 속으로 붉은 것이 해마다 봄바람에 타는 한 끄지 못 해 수심에 숙이신 고개 알이 없어 하노라." 라고 쓰고 나더니 연필을 잡은 채 그대로 종이를 덮어 이마를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지었어요. 나는 잠잠히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무심한 듯,
 
161
"어디 봅시다." 하고 그의 이마 밑에서 그 종이를 뺏으려 했지요. 그랬더니 그는 제 가슴에 깔리운 내 무릎을 꼭 껴안으며,
 
162
"용서하세요." 라고 하였어요. 나는 무엇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나는 바보인양 하하 웃었답니다. 그리고 얼른 석주에게,
 
163
"자 - 너 그 종이 빼앗아라. 내 거들어 줄 테니!"하고 소년의 양편 목으로 손을 넣어 그의 상체를 껴안듯 일으켰지요. 석주는 재미있는 듯 깔깔 웃으며 얼른 종이를 빼들고 바쁘게 읽기 시작하고 소년은 또 한번 긴 한숨을 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어요.
 
164
"어디 나 좀 읽어보자."
 
165
나는 석주와 머리를 한 데 대고 다시 그 노래를 읽습니다. 소년은 잠깐 바라보더니 나의 어깨에다 머리를 얹어 놓으며,
 
166
"이건 어떻습니까! 어젯밤에 외운 것이랍니다." 하며 종이를 치켜 들었어요.
 
167
"이름 잊자 취한다니 못 믿을 말이로다. 잊으려 잊을진데 님 여읜다고 슬플 것인가. 낙엽(落葉)이 어지러운 밤은 더 못 잊어 하노라."
 
168
나는 소리를 내어 읽었어요. 그리고 잠잠히 우리 셋은 나를 가운데 두 고서로 말을 늘어대고 다시 읽고 또 한번 바라고 하였답니다. 어느덧 내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석주는 종이를 펴서 들고 저 혼자 엎드려 읽고 있으며 소년은 내 손을 힘껏 쥐며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제 뺨에 받으며,
 
169
"울면 싫어! 용서하세요." 라고 무엇을 사죄하는지 초조함을 못 참는 듯 하였습니다. 나는 얼른 눈물을 씻고,
 
170
"벌써 저런 시조의 뜻을 알아?" 하고 생도를 꾸중하려는 늙은 선생님같이 물었어요.
 
171
"모릅니다. 몰라요. 그저 좋은 것 같았을 뿐입니다. 공연히 썼지! 다시는 쓰지 않을 터입니다.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172
소년은 또 용서하라고 사죄합니다.
 
173
"무엇을 용서하랴! 소년아 네가 나를 용서해라. 내 마음이 죄에 가득하였다." 라고 나는 혼자 가슴속으로 되씹어 보았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더 죄된 생각이 들기 전에 오늘에라도 성규 씨를 찾아가 약혼을 허락해 버려야겠고도 생각했어요. 물론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그리고 소년은 그 시조를 무슨 의미로서 보임일까? 단순히 좋은 시조이니까 써 보았음이라 하자. 그리고 그는 감격하면 내 뺨에 기대고 내 무릎을 앉고…… 모다가 소년은 어머니도 누나도 없는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러니 나를 어머니에게 만족하여 보지 못한 사랑을 찾는 것이다. 나 역시 무슨 별다른 의미가 있었으랴! 공연히 경계하고 공연히 소년의 감정에 내 스스로 감격하고 이유 없이 눈물이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가슴속을 예리한 메스로 해부하고 싶지 않다. 얼토당토않은 연정(戀情)으로 이렇듯 감격하여 지는 건 아니다, 아니다! 라고 나는 이를 갈 듯 입을 꼭 다물었답니다. 그리고 나는 벌떡 일어서며 소관이 있다고 핑계를 댄 후 외출할 준비를 하였답니다. 두 소년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174
"어딜 가세요. 우리도 따라가요!" 라고 합니다. 나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175
"안 돼! 멀리 간단다." 라고 딱 거절을 했지요. 그리고
 
176
"둘이서 놀아요!" 하고 방을 나와 버렸지요. 그랬더니 두 소년은 서로 눈으로 무엇이라 의논하는 것 같더니 "어서 다녀오세요. 오실 때 맛있는 것 사 가지고 오세요."라고 합니다.
 
177
나는 무서운 가슴을 안고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갈 길이 없어 잠깐 망설인 후 어딘지 막 걸어갔습니다. 얼마를 걸었는지 내 몸은 본정통 거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발끝으로 보도를 힘껏 차 던지고 휙 돌아서 남편이 살았을 때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라는 정결한 레스토랑을 생각하고 그리고 발을 옮겨 갔습니다. 벌써 점심시간이 지난 때이기는 하나 식당 안은 반 이상 사람이 차 있었으므로 나는 한 옆에 가 힘없이 주저앉았지요. 그리고 두어 가지 요리를 시킨 후 가만히 머리를 두 팔에 의지하여 하염없이 앉아 있었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남편과 그 곳에 왔던 때를 생각해 보려고 했습니다. 웬일일까요. 그대 내 눈앞에는 천진스런 석주의 웃는 얼굴과 함께 나에게 애원하듯 호소하듯 원망하듯 애틋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이 나를 괴롭게 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고 소년의 환영을 털어버리려 애썼답니다. 내 앞에 갖다 놓은 요리그릇 소리에 바짝 정신이 나므로 간신히 포크를 잡았으나 하나도 입으로 가져가기가 싫었습니다. 두 소년은 점심을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 염려에 잠시도 그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벌떡 일어섰지요.
 
178
"아하하!"
 
179
바로 내 등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나는 두 자루의 총에 맞은 듯 하여 얼른 돌아보지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180
"어머니!"
 
181
"아주머니!"
 
182
아! 아! 두 소년이 그 자리에 나타날 줄 내 어떻게 알았겠어요. 나는 천천히 그들을 바라봤어요. 애원하듯 원망하듯 호소하듯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는 그 소년의 얼굴!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천신만고로 금강산 비로봉 위에 올라서던 그 순간에 마음과 몸이 함께 무한한 청정(淸淨) 앞에 무릎을 꿇던 그 순간과도 같은 감격이랄까요! 아니 그 비로봉 상상봉 위에서 자연의 극치의 미를 두 발 아래 내려 누르고 서 있는 하나의 인물!
 
183
그것을 그리려던 나! 오오! 나는 그 소년의 그때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얼굴! 그 얼굴! 내 오래오래 이상하여 오던 찾아 헤매던 그 얼굴 보세요! 나는 가슴이 떨리고 음성이 벙어리같이 나오지 않았답니다.
 
184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방해되면 우리는 갈게요."
 
185
이윽고 소년은 입을 열며 나에게 다가서서 내 한 팔을 잡아 금방 쓰러질듯한 내 몸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186
"…………."
 
187
나는 머리를 간신히 흔들었지요.
 
188
"누구를 기다리시면 상관 있어요. 오거든 우리는 가버리지…… 어머니 그렇지? 우리는 어머니 뒤를 이제껏 쫓아다니며 벌써부터 어머니 뒤에 서 있었지 뭐……."
 
189
석주는 걸터앉으며 떠들어 댔지요. 나는 잠잠히 다시 앉으며 소년에게도 앉으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다시 요리를 명하였더랍니다.
 
190
"흐흥!"
 
191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수많은 철학자와 같이 많이 한 많은 시인과도 같이 혼자 잠잠히 고개를 끄덕이며,
 
192
"흐응 - 흐 -." 하는 탄성(歎聲)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 태도는 너무나 소년답지 않았습니다. 그는 벌써 내 가슴속을 훤히 다 들어다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193
"흐음 - " 하는 그 탄성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가 때때로 스스로 긍정하는 그러한 종류 입니다. 나는 소년의 그 탄성을 들을 수가 없었답니다. 너무나 내 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겨우 식사를 마치고 그 집을 나서자 소년은 발을 멈추고 지나는 택시를 세운 후 "타세요." 하고 명령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와 석주는 로봇같이 아무 말 없이 올라 앉았습니다. 그는 내 옆에 앉으며
 
194
"한강으로 - ." 라고 명합니다. 석주는 좋아라고 손뼉을 쳤으나 나는 이 뜻하지 않은 소년의 태도에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움직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양 팔짱을 끼고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195
"자동차를 돌려주세요. ××동으로." 라고 나는 참다못하여 운전수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잠잠히 그대로 앉아있었어요. 그 길로 우리 집까지 셋이 함께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려는 듯이 서둘기도 하고 안방으로도 건너가고 석주에게 쓸데없이 설교도 하고 점잖은 어머니답게 서둘렀지요. 석양이 되어 석주와 함께 소년은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금방 뛰어나가 소년의 뒤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내 방에 들어가니 넓은 사막에나 간 것 같이 공허하고 애끓었어요. 나는 내 마음을 꾸중하며 손가방에 행장을 수습하여 어머니께 허락을 받은 후 그 자리에서 집을 떠났습니다. 떠날 때는 금강산이나 바다로 멀리멀리 가보려고 생각 했던 거랍니다. 그러나 내 손에 쥐인 차표는 불과 서울을 백리 남짓 떠난 ××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 밤에 ××역에서 ×× 산꼭지에 있는 조그마한 절을 찾아 험한 산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그 조그마한 암자에 당도하였을 때는 벌써 열 시가 넘었으나 단 혼자 있는 늙은여 승은 반갑게 맞아주고 따뜻한 저녁까지 지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밤을 꼬박 여승 앞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벽부터 그 산꼭지를 헤매기 시작 했습니다. 육체의 피로로 말미암아 정신의 괴로움을 잊으려는 뜻 이었어요.
 
196
"돌길이 좁고 험해 홀몸도 어려워 늘 무거운 세상시름 지고 안고 무삼 일고." 하는 시조 생각이 문득 나며 내 가슴은 아팠습니다. 보세요. 이상합니다. 내가 그때까지 그렇게 괴로워해 본 적이라곤 없었답니다. 공연히 이유도 없는 그 괴로움. 다만 소년의 그 얼굴 그 얼굴이 내 눈에 떠오르면 내 가슴은 괴롭습니다. 답답하고 서럽고, 기쁜 듯 애끓는 듯 합니다. 이게 웬 일일 까요. 소년을 그리는 연정(戀情)이라고는 부디 생각지 마세요. 나는 연정이라는 머리 속에 잠시라도 생각해보기 불쾌합니다. 그 얼굴 눈앞에 그리며 가슴 괴로움 그것뿐입니다. 그 심리를 예리한 메스로는 부디 해부하려 마세요. 나는 그 날 해가지고 어둡게 저물어들 적에 그만 가슴에 애가 똑똑 끊어지는 듯 했습니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도 했어요. 산꼭지 바위에 기대 섰다가 나는 발을 탁탁 굴렀어요. 아! 못 견딜 일이었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무엇을 못 견뎠으며 무엇을 못 참아 그다지 애끓는지 난 모릅니다.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고 또 다른 의미로 소년과 한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마음도 아니었어요. 다만 눈앞에서나 를 바라보는 그 소년의 환영을 바라보며 나는 발을 구르고 가슴을 쥐어 뜯고 머리를 부딪치고 못 견뎌해야만 되는 것 같았어요. 왜 웃으십니까? 당신은 내가 오랜 독신생활을 계속 해 온 까닭에……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아니꼬워!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됩니다. 나는 소년을 머리에 그린 채 이성적 무슨 흥분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얼굴을 내 눈앞에 그리며 내 가슴이 괴로울 따름입니다. 아니 괴로움이란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는 단순히 괴롭다고만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마음의 동요입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답니다. 잔인한 악마같이 나는 내 마음의 그 안타까워 못 견뎌 하는 양을 꾹 누르고 있었던 거랍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나는 그 산중에서 내 몸과 혼이 고갈되어 티끌같이 흩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가슴이 평온해지기 전에는 세상밖에 나가지 않을 결심이었습니다. 산채를 반찬삼아 점심을 먹은 후 나는 또다시 육체의 피로를 씻기기 위하여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리저리 계곡을 끼고 돌뿌리에 쉬어가서 새소리도 듣고 바람결에 위로도 받으며 작고 그늘진 바위 위에 걸터앉아 계곡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결같이 소년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벌써 이 산중에 온지가 사흘이나 되었고 그만치 종일 헤매고 돌아다녔으니 몸의 피로는 비할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피로하면 생각할 틈이 없으리라 고 연상하였던 것은 틀린 생각이었나 봐요. 내 가슴은 조금도 변함 없이 안타깝고 내 마음의 안심은 까마득하게 얻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혀를 차고 고달픈 몸을 일으켜 차라리 절에 돌아가 편히 누워보려고 생각 했습니다. 두어 걸음 암자를 향해 들어오는 내 눈에 그 커다란 참나무가지 사이 에그 소년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하며 걸어갔습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그 환영에 나는 한걸음 한 걸음 가까이 가는 것이었어요. 그랬더니 아!
 
197
"아주머니!"
 
198
그 참나무 가지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소년의 환영이 나에게 달려오며 소리치지 않았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내 정신의 착각에 두 귀가 꽉 막히는 듯 하였어요. 나는 내가 정신 이상에 걸렸구나! 하고 가슴속으로 외쳤답니다.
 
199
"아주머니 왜 여기 오셨어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
 
200
소년은 내 어깨를 휩싸 안으며 내 뺨에 무수히 입맞추었습니다.
 
201
"나는 아주머니가 어디로 가신다 하여 미친 듯이 매었지요. 그랬더니 오늘 아침 석주 군이 아주머니가 이리로 가 계신다는 엽서를 보여주었지요."
 
202
소년은 나를 어린아이 만지듯 이리저리 돌려보며 흔들어보고, 따로 세워 보고 안아도 보고 입 맞추어도 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산으로 올 때 이 산 앞 정거장에서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한 후 그곳에 와있다는 간단한 엽서를 집으로 보냈더니 석주가 그 엽서를 가져다 그 소년을 보여준 것인 줄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의 가슴속을 좌우할 수 없어 묵묵히 서 있었답니다.
 
203
"나는 다 알아 글쎄, 아주머니. 나는 다 안다니까요! 내가 미워서 이리로 숨으셨지 뭐 내가 미워서……."
 
204
소년은 그러면서도 그 두 눈에 기쁜 빛이 가득해 있었답니다. 나는 무엇이라고 하나요? 잠잠하고서 있었지요! 그 소년의 머리를 내 가슴에 한껏 껴안아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답니다. 장승같이 멀거니 참았답니다.
 
205
"아이 저것 보세요. 아주머니 저것 봐요."
 
206
소년은 내 얼굴을 두 손 사이에 넣어 치켜들어 나무 위를 보여줍니다. 나뭇가지에 이름 없는 두 마리 새가 정답게 지저귀며 가지런히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꼭 껴안았답니다. 서로 뺨을 한데 대고……. 그리고 우리는 그대로 얼마를 서 있었는지 해님은 숨어 버리고 석양의 붉은 노을이 아! 석양의 붉은 노을이 나뭇가지 사이로 찬란하게 우리를 비춰 주었어요. 꼭 지금 저 노을과 같이 몹시도 아름다웠답니다. 우리는 감격에 떨리는 가슴을 제각각 부여안고 마주 손을 잡은 후 암 자로 돌아왔답니다.
 
207
"나는 가야 되요. 형님이 기다리세요."
 
208
소년은 애처로운 얼굴로 일어섰습니다. 정거장까지 십리가 넘는데 어떻게 돌아갈까…… 나는 가슴이 어두워졌답니다. 그러나 그를 붙들 수가 없었답니다. 그는 어두운 산길을 쾌활하게 웃어보이며 내려가 버렸어요……. 나는 참을 수 없어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습니다. 얼마를 서 있었는지 내 눈에서 눈물이 얼마나 흘러내렸는지 나는 소리도 없이 울었답니다. 무엇을 위해 울었는지 모릅니다. 묻지 말으세요. 그 밤은 어떻게 세웠는지 그 이튿날 아침이 되었어요. 나는 산으로 헤맬 것도 잊어버리고 여승의 염려하는 얼굴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오정(午正) 가까이 그러고 앉아있었답니다.
 
209
"아주머니……."
 
210
아! 소년은 또 왔던 거랍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211
"아주머니 나는 곧 가야 되요. 오후에 형님과 할 일이 있답니다. 한 시 오 분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 한답니다."
 
212
소년의 얼굴은 밝은 태양같이 빛났습니다.
 
213
"아 - 아!"
 
214
그는 기쁨을 못 참아 하였습니다.
 
215
"아주머니 손 한번 쥐어주세요. 곧 갈테니."
 
216
소년은 창턱으로 두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나는 몹시 노한 얼굴을 지었습니다.
 
217
"왜 왔어? 이 먼 데 산길을 십리 밖에서 왔어. 곧 돌아갈 것왜 왔어요?" 라고 꾸짖었답니다. 그때 내 마음속을 이해하십니까?
 
218
"그래도! 그래도 왔지 뭐. 곧 갈테니 노하시지 말으세요."
 
219
소년은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봅니다. 나는 와락 그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얼싸 안았답니다.
 
220
"노한 것이 아니야. 공연히 어제 오고 오늘 또 왔어. 또 급히 돌아가고하면 병날 것이니까…… 응? 앞으로는 절대로 오지 말아요, 오면 안돼." 라고 달래듯 타일렀지요.
 
221
"응! 안 올테야. 정거장에서 삼십 분 걸었답니다. 막 달음박질 쳤지요. 형님은 어디 가느냐고 야단이었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튀어나왔어요."
 
222
소년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223
"아이 시간도! 가야 되겠네!"
 
224
한번 발길로 땅바닥을 차고 난 후
 
225
"아주머니 나는 참을 수 없어요. 내일 또 올지 모른답니다." 하는 말을 남기고 휙 돌아섰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내달으며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막 달음질을 쳐 내려갑니다. 험한 산길을 날쌘 맹호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몸을 날려 잠시간에 산모퉁이 저쪽으로 사라져가고 말았습니다. 나는 꿈 같았습니다. 그러나내 몸에는 소름이 끼쳐요. 지금까지 그처럼 온순하고 정직하던 소년이 행여나 제 형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생각해 내지 않을까? 하는 여러 가지의 소년에게 좋지 못한 영향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나는 깊이 생각하였더랍니다.
 
226
그 이튿날 나는 행여나 또 소년이 올까 두려워 아니, 그가 옴으로 말미암아 내 감정이 무패도로 좇을까 두려워 아침을 먹은 후 얼른 방 안을 치워놓고 여승에게 소년이 오거든 지난밤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말하도록 부탁한 후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더랍니다. 아! 나는 여승, 부처님께 몸을 바친 그 성스런 일생을 가진 여승에게 거짓말을 가르쳤더랍니다. 나는 괴로운 가슴을 안고 깊숙한 바위 틈에 끼어 앉아 해지기를 기다렸답니다. 새들은 나를 나무 둥치로 알았는지 내 곁으로 날아가며 몹시도 울부짖었어요. 나는 수도 하는 성자같이 그대로 앉아 있었답니다. 하루 동안이란 길기도 하고 지나고 보니 짧기도 하여 어느 덧 선뜻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보아 석양이 가까웠 음을 알았습니다.
 
227
"아주머니……."
 
228
"아주머니……."
 
229
산곡을 울리려 날 부르는 소리가 화살같이 내 두 귀에 날아와 꽂힙니다. 나는 내 스스로 참는 그 중에 참았다는 승리감에 잠겨 있었던 터입니다. 나는 대답 대신 몸을 굽혀 바위 그림자에 숨어버렸습니다.
 
230
"아주머니……."
 
231
그 부르는 소리에 내 뼈는 자르륵 자르륵 무너지는 듯 하였답니다. 그러나 입술을 꼭 깨물고 두 귀를 꼭 막았습니다.
 
232
"아주머니……."
 
233
"아주머니 왜 이러고 계세요?"
 
234
소년의 음성이 내 귓결에 닿았습니다.
 
235
"아주머니……."
 
236
소년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는지 와락 내 어깨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237
"아주머니……."
 
238
한없이 흘러내린 내 눈물을 소년은 내려다보며 고함쳐 불렀습니다. 나는 숨을 쉬지 않고 그대로 질식하여 숨을 끊어버릴 결심이었답니다.
 
239
"아주머니 싫어. 난 다 알아요. 내 말을 아주머니께 꼭 할 말이 있어요. 내 말을 들으세요. 네!"
 
240
안타깝게 내 가슴을 뒤흔들었답니다. 나는 그의 두 팔을 뿌리치고 일어섰습니다.
 
241
"왜 왔어! 나는 고요히 생각할 일이 있어 이러고 있는 거야!" 하고 몹시 성을 내며 눈물을 되는대로 훔쳤습니다.
 
242
"아주머니 맘대로 하시지 말아요. 나는 어립니다. 아직 어린아이에요. 그러나 남자랍니다. 사나이에요."
 
243
소년의 음성은 떨렸습니다. 나는 참을 수가 정말 없었답니다.
 
244
"정규! 내 말 들어요. 나를 괴롭게 말아. 이러고 나를 찾아다니면 당신의 장래가 어떻게 되는 거에요. 나를 찾아와도 좋은 건 배울 것 없고 나쁜 것만 알게 되는 거니까 다시는 나를 찾지 말아……." 라고 겨우 이렇게 타이르듯 했지요.
 
245
"아주머니, 내 나이는 어린애지만 나도 사나이에요. 내가 해서 좋고 그른것을 모를 내가 아니랍니다. 아무리 남을 나쁜 구렁으로 밀어 넣어도 나는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께 좋지 못한 것을 배운다고 하시지마는 나는 세상에 악한 것이나 선한 것이나 모조리 있는대로 다 알고다 배우겠어요. 내 나이 어려서 악한 영향이 될까는 두려워 마세요. 나도 어느 때까지 어린애로만 있을게 아닙니다. 어느 때 누구에게서든지 배우고야 말 것이니까 형님이 나를 불량해질까 염려하실지 모르나 나는 우스워요. 모든 것은 내가 착한 사람이 되고 안 되는데 있으니까 아주머니 까닭에 착하게 될 내가 악하게 될 리 없습니다."
 
246
소년은 어른 같은 어조였습니다. 나는 잠잠하고 들었어요. 과연 소년은 제 말과 같이 한 개의 자아를 파악한 성인(成人)이었어요.
 
247
"여승님이 아주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지마는 나의 이 육감이 번쩍 하여 그는 노력 분투할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오정 때쯤 하여 그는 또 왔습니다."
 
248
그의 얼굴은 수척하고 전신에 기운이 빠진 듯 하였습니다. 내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달려와 기쁘게 웃고 즐거운 새소리를 들으면 내 손을 잡아 흔들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내 뺨에 기대이며 철없는 듯 우리는 웃고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무척 즐거웠습니다. 괴로워할 것도 염려 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무엇을 그다지 괴로워했는지 알 수 없었답니다. 우리는 다만 그러고 있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 외에 다른 아무 욕망이 없었어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되려고 애쓰고 왜 나는 늙은 어른같이 보이려 애쓰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잊고 함께 감격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는 서로 뺨을 기대이고 하였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나이 많은 것을 잊고 그가 어린애처럼 보이려 애쓰지 않는 그런 순간이 올 것만 같아 나는 가슴을 괴롭게 하기 아무래도 이 산 속에 계실 것만 같아서요. 오정 때부터 지금까지 이 산 속을 모조리 헤맸답니다. 소년은 제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나를 이끌어 암자로 돌아왔습니다. 벌써 시계는 여섯 시입니다. 일곱 시에 떠나는 기차를 타야 될 소년입니다. 소년은 잠깐 몸을 쉰 후 일어섰습니다.
 
249
"아주머니…… 정말 울지 말고 계세요. 내일 또 올 것입니다. 나 때문에……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250
소년은 표연히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는 점심도 굶고 온 산을 헤매이다가 이제도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괴로운 빛이 없었어요. 몇 분 동안이나마 나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면 어떠한 고초와 장애라도 걷어차겠으며 얼마나 한 오랜 괴로움이라도 우리 둘이 함께할 단 일 분간을 위하여 하였으나 그 각생마저 즐거운 것이었어요. 이렇게 우리는 또 하루를 보내고 난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돌아오던 그 이튿날 성규 씨 에게서 엽서가 왔습니다. 그 엽서에 정규 소년이 앓는 중이니 미안하나 한번 오셔주시기 바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마음에 동요를 억제하며 병원에가 보았습니다. 성규 씨는 반갑게 나를 맞아 이층으로 올라갔어요. 과연 소년은 얼음베개에 누워 앓고 있었습니다. 내 두 다리는 떨리고 가슴은 불덩어리를 먹은 듯 하였습니다.
 
251
"아주머니! 아주머니!"
 
252
소년은 나를 부릅니다.
 
253
"왜 이러오!"
 
254
나는 간신히 그의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손을 쥐었지요.
 
255
"아주머니 염려 마세요. 곧 낫습니다. 형님도 염려마세요. 그저 열이 좀 났을 뿐인데……."
 
256
소년은 열심히 그의 형과 나를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257
"아주머니 미안하지만 내 곁에 있어주세요. 나는 아주머니가 곁에 있으면 곧 나아요." 하고 어리광같이 애원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성규 씨는 나에게 죄송한 듯
 
258
"너 그렇게 고집부리지 마라. 아주머니도 몸이 약하신데 어떻게 네 간호를 하시니." 하고 소년을 꾸중합니다. 나는 성규 씨에게 염려 말라고 한 후 소년의 베개도 묻혀주고 이불도 다시 덮어주고 했지요. 소년은 가끔 내 손을 더듬어 쥐고 감격에 찬 한숨을 내쉬며 열 띤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날 밤입니다. 해열제를 먹인 후 주사를 하여 겨우 잠이든 소년의 곁에 앉아 있는 나를 성규 씨는 손짓으로 밖으로 나가기를 청 했습니다. 나도 피로하여 잠든 그를 홀로 누워둔 채 성규 씨와 아래 층으로 내려왔습니다. 기막힐 일입니다. 성규 씨는 정규가 나를 그리워하는 것을 단순히 자기를 위하여 다시 말씀하면 성규 씨와 결혼하게 하려고 하는 어린 수단으로 여기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와 결혼할 것을 허락했던 거랍니다. 내가 성규 씨와 결혼 하게 되는 날 나와 소년은 완전히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 까닭입니다. 나와 소년은 어느 때라도 한 집에 살 수 있고 서로 사랑할 수 있고 그러면 양심에 죄 있는 생각이나 잡념이 없이 순수한 육친적 사랑에 잠길 수 있으 리라고 나는 생각했던 거랍니다. 소년도 얼마나 기뻐하랴! 언제든지 나와 한 집에 있게 될 터이니까.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 물론 성규 씨도 기뻐 했어요. 소년은 그 이튿날 오후부터 열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흘째 되는 아침에는 완전히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날 점심을 두 형제와 함께 먹 고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 돌아와서 막 옷을 벗으려는데 소년이 뒤쫓아 와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259
"아주머니 꼭 제가 드릴 말이 있어요." 라 하였습니다.
 
260
"무슨 말?"
 
261
나는 태연하게 반문했지요.
 
262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
 
263
소년은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습니다.
 
264
"말해야 알지 나는 당신만큼 영리하지 못해서 모르겠어요." 라고 하였습니다.
 
265
"싫어요. 아시겠지 뭐! 알아주셔야 해요."
 
266
소년은 부끄러운 듯 내 어깨에다 이마를 문질렀습니다.
 
267
"할 말은 무슨 할 말이야. 다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누워 계세요. 또 앓으면 안 돼!"
 
268
나는 웃어 보였답니다. 소년은 이윽고 내 방에 뒹굴며 즐거운 듯 책들을 펼쳐 보며 놀다가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날 밤 가슴이 갑갑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풀어도 풀 수 없는 산술문제와도 같이 성규 씨와 나의 결혼이 이 갑갑한 가슴의 열쇠가 되지 못하는 것만 같았어요. 그러나 나는 무리 로라도 하나에 하나를 보탠 것이 셋이라는 답이 나와도 그것을 그대로 옳다고만 하려고 애쓰며 그 날과 또 이튿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 날 성규씨가 찾아왔습니다. 결혼 청첩을 인쇄해 가지고 온 것이었어요. 나에게 백여 장 갈라놓은 후
 
269
"아는 분에게 보내세요. 나는 제일 먼저 정규에게 한 장 보낼 터 입니다." 라고 하였어요. 그는 아우에게 자기의 결혼을 알리기 부끄러워 그대로 숨긴 채 였던가 봐요. 그는 기쁜 듯 여러 가지 결혼에 대해서와 결혼 후에 대하여 이야기한 후 돌아갔습니다. 나는 몹시 슬펐습니다. 기뻐야 할 결혼을 앞에 두고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긍정하려느냐! 하는 괴로움에 가슴은 찢어졌답니다. 아!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성규 씨가 두고 간 그 청첩장을 온 방 안에 힘껏 내뿌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엎드려서 실컷 울었지요. 울다가 일어나니 아아! 그 소년이 창백한 얼굴로 손에 그 청첩장 한 장을 구겨 쥐고 벌벌 떨면서 있지 않습니까!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바쁘게 웃는 얼굴을 지었답니다. 그리고
 
270
"기뻐해 주겠지요? 이제는 실컷! 아니 한 집에 살 수 있지 않아?" 하고 말했습니다. 내 가슴은……아니 당신께서도 상상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모순이라고 비웃으십니까? 결국 소년에게 아니 우리는 연애를 하였던것이라고 보십니까? 아! 아! 아니랍니다. 나는 소년과 결혼한다고 치더라도 기뻐 할 리 없습니다. 나는 일후라도 그런 꿈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슬펐던 거랍니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더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어요. 그리고는 힘없이 주저앉더니 후! 한숨을 내쉰 후
 
271
"흐응 - 흐응!" 하고 그의 버릇인 그 탄성을 내며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습니다.
 
272
"아주머니…… 용서하세요."
 
273
"흐음 - !"
 
274
그는 이윽고 고개를 내려뜨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275
"아주머니, 나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형님과 결혼하시렵니까? 나는 잘알겠어요. 나는 아주머니를 잘 압니다." 라고 부르짖듯 외쳤습니다. 나는 그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꼭 서 있었습니다.
 
276
"아주머니……."
 
277
소년은 두 번 더 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나는 멍하니 선 채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괴롭지도 서럽지도 답답하지도 않은 무상무념의 상태였습니다. 그 후 소년의 자취는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대로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결혼식 날이 다가왔어요. 그 전날 밤을 꼬박이 방 가운데 선 채 새우고 난 나는 날이 새자 대문 밖으로 나오고 싶은 충동에 못이겨 대문을 나섰습니다. 바로 대문 밖은 좁은 길이었고 그 길에 평행하게 개천이 흐릅니다. 그 개천을 나는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 못에 물이 깊다면 나는 금방 뛰어들고 싶었어요. 그러나 높기만 하고 물은 조금씩 흐르고 있을 뿐이었어요. 나는 이윽고 개천 둑에 서 있었습니다. 가슴이 지극히 평온한 것 같았습니다.
 
278
"아주머니……"
 
279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지요. 아 - 나를 부르는 그 음성…… 나는 개천 저편 둑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소년을 바라보자
 
280
"아 - ."
 
281
소리를 치고 앞으로 내달렸어요. 소년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내 달렸어요. 우리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다 잊었고 다 초월했답니다. 아!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우리 두 몸은 개천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던 거랍니다. 그와 나는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있는 그 개천을 잊어버리고 그 개천 위를 내 달렸던 것이었던가 봐요. 우리는 다 함께 까무러쳐서 인사불성에 빠졌던거랍니다. 그리하여 둘이 함께 구원을 받아 응급치료를 했으나 나는 늑골한 개를 부러뜨렸고 소년은 가슴에 타박상을 입었으나 별로 상한 데는 없었답니다."
 
282
나는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 찬란하던 노을도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어 두 움이 우리를 감싸오고 있었다. 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려 깔은 채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283
"아 - 하 -."
 
284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여인을 위로하려 했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음으로 내 가슴은 더욱 갑갑하였다.
 
285
"보세요. 이것은 얼마간 간수해서 주세요. 필요를 느낄 때가 있을 것 입니다." 하며 그는 단단히 봉한 봉투 한 개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말없이 받아 들며
 
286
"집으로 갑시다. 가서 더 이야기 하세요." 하고 먼저 일어섰다. 여인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단념한 듯 일어서 내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날 밤에 달은 몹시 밝고 서늘하기도 하여 나는 그 여인과 더불어 뜰 가운데 평상을 내놓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287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개천에 떨어진 후 그 길로 병원으로 실려가 삼 개월 간이나 입원하여 겨우 기동하게 되자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병원에서도 망하여 나왔던 것이었다. 물론 병원은 성규의 병원이 아니었다. 정규 소년은 제 몸이 나은 후는 날마다 남의 눈을 피하여 찾아왔으나 여인은 그의 찾아오는 것이 괴로워 달아났던 것이라 하였다. 여인과 나는 그 밤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그가 병원에서 빠져 나온 후 오늘까지 몸을 숨겨 깊은 산골과 인적 없는 벌판을 헤매며 그래도 씻지 못할 괴로움을 씻으려 괴로움과 싸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잠이 들어 버렸었다. 얼마를 자다가나는 문득 잠이 깼다. 달그림자에 베개에 턱을 얹고 하염없이 눈물 짓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288
"주무세요." 하고 나는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289
"네……."
 
290
여인은 조용히 눈물을 씻고 누웠다.
 
291
"보세요. 당신은 왜 그다지 그 귀한 일생을 눈물 속에서 썩혀 버리시렵니까?"
 
292
나는 가슴에 가득한 말을 어떻게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어 이렇게 말 해보았다.
 
293
"네 - 저 역시 내 삶이 귀한 줄 압니다. 그러기에 자살을 하지 않은 거랍니다. 나는 항상 내손가락 하나를 희생하여 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하더라도 선뜻 내어주지 못할 만치 내 몸을 중히 여겼어요. 나는 기어이 재혼을 해야 될 처지였고 그 많은 사나이들의 간절한 구혼이 있어도 그대로 내 고집대로 살아왔어요. 내 스스로가 결혼이 필요할 때까지 나는 누가 뭐라고 말해도 끄떡도 하지 않은 성질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이제는 내 그 귀한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 소년을 위하려는 거랍니다. 내 마음이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는 날부터 행복했고 위로 받을 수가 있고 해결이 되는것이었어요. 나는 이유 없는 슬픔에 잠겨 산 속을 헤매다가 문득 느낀 바가 즉 나는 그 소년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리라는 것이었어요. 내 괴로움의 실마리는 이 결심으로써 풀어진 거랍니다. 이제는 흐르는 눈물도 행복한 것 같고 괴로운 환영도 나에게 즐거운 듯 합니다. 위로가 되어요."
 
294
여인은 길게 한숨을 지었다. 어디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며 내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름을 깨달았다.
【원문】아름다운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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