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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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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4
계용묵
1
시(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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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어 웃었다. 수염이 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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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천자(川)로 그어진 이마에 주름살이 인제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거니 하는 정도에서밖에 더 자기의 늙음이 내다보여지지 않던 근호는 오늘 아침의 면도에서 뜻도 않았던 수염이 턱밑에 세임을 찾았다. 그리고는 벌써! 하는 놀라운 마음에 아내의 경대 속에다 유심히 턱을 비추어보다가 턱밑의 그 한 곳에만 수염은 세인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심심찮게 히뜻히뜻 찾김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마다의 면도날에 자라 보지도 못하는 수염이기에 그렇지 그대로 버려두는 수염이었더라면 서릿발 같은 수염이 인젠 제법 츠렁츠렁 옷깃에까지 허여니 드리워졌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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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 수염이 센다! 마흔다섯, 수염이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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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어 다시 한 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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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그어진 주름살이 그렇지 않아도 일에 능률을 못 낸다. 애숭이들 판에 말썽이 많은데 턱밑에 수염까지 세인 것을 본다면 더욱 그러한 인식이 그들에게 무젖어들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하면 이 잡지사에서의 자기의 운명도 인젠 정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금시 우울하여짐이 전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펄펄 뛰는 청춘과 불 같은 정열을 가지고도 제 갈 길을 걷지 못해 근 십 년을 하루같이 잡지 편집에 목을 매고 늘어져 허리를 굽혀오는 몸이 수염에 흰 물을 드린 이제 무엇으로 어떻게 앞길을 타개해 나갈 것인고? 생각하면 아득하기 짝이 없는 앞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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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를 놓고 부엌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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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집게 거, 어디 있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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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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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집게 말야 쪽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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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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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아득한 채 아내는 물 묻은 손을 건성 쥐어 뿌리며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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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시가 드르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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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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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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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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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 놓은 세인 수염 오리를 놓지 않으려는 듯이 거기에 대인 손을 떼지 못하고 턱만 흔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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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아내는 경대 속에 비치는 남편의 턱만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이 할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알 길이 없다.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섰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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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러먹을 어느새 수염이 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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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마땅한 듯이 남편은 머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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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적에야 아내는 영문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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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아이구 무어라구. 당신 수염 센 지가 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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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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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야 아르세요? 수염 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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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신은 알구두 잠자코 있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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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수염 셀 나이에 수염 세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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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을 몰라주는 아내의 말이 안타깝다. 넌지시 그것을 일러라도 주었다면 그에 대한 방비책이라도 벌써 써 보았을 걸 인젠 사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이 다 알 것 같아 마음이 심히 마땅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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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집게 어디 있느냐구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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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는 역정이 별안간 튀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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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역정이다. 원인 모를 역정에 아내는 순간, 감정이 좋지 않았으나, 역정과 동시에 변하는 남편의 이상한 낯갗은 다시 더 대꾸가 긴치 않음을 깨닫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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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알 수 없는 족집게다. 젊었을 때 경대 설합에 넣어두고 아침마다 잊을 길이 없이 써 오던 것이었으나 애들이 주롱주롱 달리게 되자부터는 한번도 손에 대어 본 일이 없다. 어디 들었는지 창졸간 생각이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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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집겔 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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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우선 장롱 설합을 열었다. 핸드백 속을 뒤졌다. 없다. 어디 들었을꼬? 옹색한 생각을 다시 더듬어 보는 동안 ‘땡’하고 뒷벽에서 시계가 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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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일곱 개를 쳤으니 보지 않아도 이번엔 여덟 개임이 틀림없을게다. 여덟시면 면도가 끝나고 밥을 한 절반은 넘어 먹었어야 출근시간에 알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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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상 드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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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같이 근호는 놓았던 면도를 다시 들어 경대 속에 턱밑을 비추고 깎던 짬에다 새파란 날을 되대였다. 습포를 했던 수염이 어느새 말라서 칼을 놀릴 때마다 따금따금 아프다. 그러나, 고쳐 습포를 할 시간의 그대로 우기자니 거센 수염이 칼날과 뻣뻣 마주서며 따끔거릴 때마다 눈물까지 쏙쏙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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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으- 아니, 족집게가 핸드백에두 없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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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다 아내는 불현듯 생각이 나는 듯이 치마를 들치고 새빨간 주머니 속에 손가락을 넣더니 조고마한 개발 족집게를 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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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두 참, 주머니에다 넣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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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듯이, 그러나 미소로 남편의 앞에 내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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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젠 그러나, 수염을 한가로이 골라 뽑을 시간의 여유도 없거니와, 수염은 벌써 이미 다 깎이어져 있다. 이제 와선 다만 먹어야 할 밥이 그저 시급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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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대로 두 공기를 퍼 넣었다. 출근시간까지에 꼭 십오 분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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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정류장까지 5분, 전차를 타고 15분, 또 내려서 걷고…… 아무리 해도 시간이 빳빳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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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내려서 보니 부민관의 이마빼기에 시계 침은 벌써 기역자로 꺾이었다. 아홉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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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다시피 걸음을 놓다 보니 자기의 꼴이 못 견디게 우습다. 수염에 흰 물을 드리고 출근부에 제재를 받아, 먹은 밥이 부꾸여 오르도록 뛰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자신에의 모욕인 것이다. 그러나 출근부에 빨간 도장이 나란히 찍히지 못하는 때 말썽은 일어난다. 아니 뛸 수 없다. 이러한 속살을 아는 벗이 뒤에서 자기의 꼴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코웃음을 치는 것 같아 아니아니한 마음을 주려 잡고 뛰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여질 만한 정도의 걸음으로 씨걸씨걸 내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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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시간은 늦었다. 벌써 출근부는 정리가 되어 있다. 정리를 표시한 자줏빛 스탬프의 ‘整[정]’자 인이 또렷이 찍히운 위에다 곤호는 멋쩍게 도장을 꾹 누르고 제 자리로 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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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저 할 일에 바쁜 사무원들은 여전히 머리를 수굿하고 펜을 놀릴 뿐,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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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호의 책상 위에도 교정은 수두룩이 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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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가지 끝내야 될 교정임을 깨닫고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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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쩐지 일이 손에 붙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대한 사원들의 태도가 예전보다 더 한층 심해지는 것만 같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의 손은 저도 모르게 턱으로 가서 쓸었다. 습포를 아니 하고 깎은 수염은 거칠게도 깔궁깔궁 손 끝에 마친다. 그러나, 세인 오리가 척 보이게 그렇게 늦깎인 것은 아니겠지 마음을 놓자 해도 개운치 않다. 다시 손을 대었다. 목 가까운 턱 아래서 그대로 깎이지 않은 두 푼은 자랐을 것 같은 한 대의 수염 오리를 붙들고 놀랐다. 이놈이 공교히 세인 것은 아닐까 안심찮아 벌떡 일어서 세면대로 갔다. 한숨이 나갔다. 요행 그것이 세인 오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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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체경 속에 비치는 얼굴은 아침 집에서 볼 때보다 주름살이 더 간 것 같게 청춘의 윤택이 아주 부족해 보였다. 광대뼈 위에 돋은 검버섯은 그것이 확실히 청춘의 피부를 좀집으며 있는 증거가 아닐까.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쭉 쓸어 보았다. 뻐정뻐정한 것이 정떨린다. 손이 가면 착 달라붙든 청춘, 그 청춘이 한없이 그립다. 청춘과 같이 그럼 인젠 자기의 모든 능력도 줄어만 들 것인가. 마치 그 역정이나 풀으려는 듯이 근호는 깎이지 않은 그 수염 오리를 다시 더듬어 잡고 힘차게 나꾸채었다. 쪽 하고 소리가 나는 것처럼 뽑히어나온 수염 끝에 하이얀 살이 쌀눈같이 뭉틀하게 묻어 나왔다. 근호는 어쩐지 그것이 아깝게만 여겨져 버리지를 못하고 물끄러미 눈 앞에 대고 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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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근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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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는 소리에 놀랐다. 돌아다보니 체소하기 짝이 없는 주간의 체구가 바로 어깨 뒤에 와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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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까진 교정이 다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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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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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한다고 할 수가 없어 제결에 대답은 하였으나 벌써 시계는 열 시 반에 가까웁다. 시간 반 동안에 40여 매의 교정을 깨끗이 보아내는 재주는 없다. 여느 때 같으면 하루쯤 좀 늦더라도 괜찮을 것이 연말 관계로 오늘 검열을 넣지 못하면 잡지가 제 기일에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그 책임이 큼을 깨닫게 되니 별안간 정신이 무거워진다. 그러지 않아도 제 흠을 못 잡아 하는 사원들이다. 잡지가 늦어지구만 보면 어떠한 영향이 자기의 신변에 미칠른지 모른다. 그러니 아무래도 다 보아 내지 못할 교정을 불벼락으로 보고 앉았느니보다는 차라리 책이 늦어지는 데서 돌아올 책임 문제의 불을 재워 놓음으로써 신변의 보호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 뭣보다 먼저 하여야 할 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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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들었던 펜을 다시 놓고 사장실로 내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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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편지를 쓰는 모양, 수굿이 머리를 두루마리 위에 떨구고 붓방아를 찧기에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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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실 하고 허리를 굽혔으나 받는 인사가 아니멩 근호는 낯을 붉히며 문안에 그대로 우뚝 읍을 하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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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용건을 물으려니 한 것이었으나, 사장은 그저 저 할 일만이 할 일인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두루마리 위에서 드는 머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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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문 안에 들어와 서 있는 줄을 알면 아무리 바빠도 우선 인사는 받고 볼 성싶은데 생각에 열중하여 필시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자기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을 알리고저 나오지 않는 기침을 한 번 허엄하고 기쳐 보았다. 그러나, 그저 여전히 감았다 떴다 하는 눈이요, 그 붓방아에 조금도 변하는 동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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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대로 일단 나갔다 편지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들어올까 돌아서려는 즈음, 사장은 방아질하던 붓대를 제꺽 소리가 나게 내어다 던지다시피 놓고 머리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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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버썩 한 발걸음 내어 디디며 허리를 굽혀 다시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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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머리를 들자 일어선 사장은 생각이 옹색하였던 모양,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바라보이는 북악산 허리에 이미 눈은 가 있는 때였다. 사장의 뒷통수에 인사는 갔다. 더한층 멋쩍음에 후끈 하고 다시 얼굴이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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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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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것이 실례는 아닐까? 그러나, 언제까지고 섰기도 뭣해서 망설이다 망설이다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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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북악산 허리에 눈을 쏘은 그대로 여전히 귀는 먹은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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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내었다가 대답을 받지 못하는 때처럼 무안한 노릇은 없다. 사장이야 댓구를 하건 아니 하건 일단 내어놓은 말이라 할 이야기는 하고 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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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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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 아까부터 와 섰어. 말은 못 하구 그래. 또 월급 마에가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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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픽 돌아서며 근호에게로 눈을 쓴다. 알기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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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저 - 이번 신년호에 사장님의 신년사를 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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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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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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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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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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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그래서 멀 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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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두 신년호니만치 사장님의 정중한 권두사가 있어야 잡지의 권위가 한층 더 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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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 그리 잘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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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시 우에단 잇승마루로 사진을 넣구 두 페이지로 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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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두 넣어?”
 
82
“네 넣엽죠. 사진두.”
 
83
“내 그 잘난 상판을 왜, 그리들 광골 시키려구 야단인구. 접댄 신문에서 사진을 자꾸 졸라대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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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곤 여덟 장 가량 써 주시면 두 페이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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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장이구 아홉 장이구 난 이즘 그런 걸 쓸 겨를이 없네. 정 내 권두사를 넣어야 잡지 꼴이 창피치 않겠다면 자네 하나 써 넣게나.”
 
86
결코 명예를 싫어하지 않는 사장이었다. 말만 내이면 못 견디는 체 오히려 반갑게 승낙을 할 것이 아닐까 미리부터 짐작은 하였던 것이나 이제 그 계획의 결정적 성공을 보게 되니 이젠 책이 늦어져도 충분히 대답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근호는 졸아들었던 사지가 늘어나 나는 것처럼 마음이 시원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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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제가 글은 최선껏 쓰겠습니다만은 그러지 않아도 책이 늦어졌는데 사진은 미리 동판을 만들게 한 장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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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두 머 넣어야 돼?”
 
89
마음이 달갑게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반문이면서도 사장의 손은 이야기와 동시에 뺄함 속으로 들어가 한 장의 사진을 더듬어 내었다.
 
 
90
그것은 절대한 효력이 있었다.
 
91
늦어도 그 전달 20일까지에는 못 나와 본 적이 없는 잡지가 새해가 넘어 나왔어도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다.
 
92
직접 편집은 근호가 맡아 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통솔해 나가는 주간에게도 늦어진 책에 대한 책임이 없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주간도 사장의 책망을 각오하고 은근히 염려를 마지않아 왔으나 다음부터는 꼭 기일을 지키기에 힘쓰라는 훈시가 있을 뿐, 웬일인지 전에같이 심혹한 벼락이 내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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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주간의 골을 올려야 순서대로 주간이 또 편집자를 골림으로 골이 풀리게 되고, 그리하여 편집자는 아래로는 더 돌릴 데 없는 책임을 뒤집어 씀으로 전 사원의 미움을 한몸에 받게 될 것인데, 이번엔 도무지 사장이 주간의 골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다 언제나 근호를 옹호해 오는 주간이었다. 가끔 가다가 근호에게 쓴소리를 하게 되는 것도 그 실은 주간으로서의 주간 된 그 책임상 피할 수 없는 그러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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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호는 문단적으로 십여 년의 선배요, 이러한 선배가 나이 오십대에 수염에다 흰 물을 들이고 한낱 잡지사의 평사원으로 자기의 밑에서 머리를 숙여가며 겨우 가난한 가정을 붙들어 가는 그 가엾은 처지, 그 처지에 동정하여 사로서의 그에 대한 태도에 은근한 근심까지 가지고 신변을 지켜 오던 것이다. 사장이 말이 없는 한, 더는 밀려나려갈데 없는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 씌움으로 그에 대한 사내의 공기를 악화 시킬 필요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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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책이 늦어진 책임을 당당히 지므로 한낱 말썽거리가 근호를 위협하여야 사원들의 마음은 시원할 것인데, 침 먹은 지네처럼 사장의 태도가 부드러운데 권리가 없는 사원들은 저희들끼리만 그저 수군거리며 혼자 배들만 앓았다.
 
96
행여나 말썽이 일어날까 판매계에서는 오늘이야 나오는 잡지를 광고는 열흘이나 전에 내어놓아서 그동안은 독자의 주문이 산적하였는데도 수응치 못하여 신용상 이러한 타격이 어디 있느냐고 짬짬이 볼을 붙이는 것이었으나, 주간은 도시 그것이 인쇄의 책임이라고 말끝마다 근호에게로 몰리는 책임을 덮어막곤 했다.
 
97
근호도 이 사내의 공기에 주간의 동정을 모르지 않는다. 아는데 가슴이 아팠다.
 
98
자기를 이렇게 옹호하는 주간이기는 하나 길러낸 후배로부터 받아야 하는 옹호에 차마 자존심이 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허하지 않는 자존심은 도리어 그 옹호가 미움으로 변하여 논의를 하면 얼마든지 자기의 뜻을 받아 줄 줄은 알면서도 차마 그러기가 싫었다.
 
99
이번도 그 예를 벗어나지 못하여 주간의 눈을 속이고 사장을 이용하여 자기의 능률 부족에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을 써 보았던 것이다.
 
100
이 비루한 행동, 이 부끄러운 행동! 자기를 올려다나 보는 듯이 펄쳐놓은 신년호 권두사 위에 놓인 동골한 사장의 얼굴, 제가 쓴 듯이 신년사의 제목 아래 뚜렷이 박힌 사장의 성명, 자기의 이름과 사진을 사장은 지금 자기와 같이 들여다보며 결코 싫어하지 않을 것을, 아니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은 아닐까? 미루어 보니, 그것은 어떻게도 무서운 농락 같게 사장과 주간에게 다 같이 미안함을 참을 길이 없다. 왜 뻐젓이 마음을 버치고 양심이 허하는 밥을 먹을 직업을 자기는 이미 가지지 못하였을까? 시(時)를 써 온 지 20년 그것을 생명으로 지켜 온 것이 밥을 위한 사회적 지위는 한 개 잡지사의 사원으로 문단적 경험으로는 길러 내다시피 한 실로 10년은 연치가 어린 주간에게 머리를 숙여 가면서도 밥에 구차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시에 생명을 걸은 죄이다.
 
101
애초에 시에다 생명을 걸은 것이 밥을 위한 수단은 너무도 아니었다. 자기 일신은 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도 오히려 그것이 본의인 것이다.
 
102
그러나, 자식을 키울 의무를 가진 한 사람의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시인임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얼마나 슬픈 시인지 모른다. 자기도 아버지로서의 의무에 자식을 볼 낯이 과연 앞날에 있을까? 이러한 시인, 이런 시인이 되는 시를 지금 중학 3년 자식은 마치 아버지의 업이나 이으려는 듯이 밤낮을 파고 들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만 오면 읽는 것이 시다. 바로 꽂혀 있어야 할 책장에 책이 지긋둥모로 빗설만치 성그러져 있기에 조사를 해 보았더니 뚜르게네프를 자기의 책상 위에다 옮겨놓았다. 하이네를, 발레리를 솔금솔금 뽑아낸다. 이것으로서 자기의 신세를 뛰어넘어 장래 사람의 아버지로서의 의 무 이행에 군색만 없을 것이라면 재기나 바라고 격려라도 해 주어 볼 일일까. 가장 높은 정신을 가져야 할 시인으로서 무서운 농락을 능히 꾸며 내어야 하는 이 시의 길, 이 길을 또 밟으려는 자식, 자식의 그 길을 그대로 걷게 버려두었던 것이 마치 제 발등을 찍으려 갈고 있는 도끼를 보고도 빼앗지 못하였던 것처럼 이제조차 절실히 가슴속에 뉘우쳐 진다.
 
103
필시 지금도 자식은 교과서 대신에 발레리를 들고 앉았는 것은 아닐까, 자식에 대한 염려가 진종일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104
“정선아!”
 
105
집으로 돌아오기가 바쁘게 근호는 아들을 불렀다.
 
106
그러나. 마주 받는 대답은 정선이가 아니라 아내였다.
 
107
“아이, 오늘은 퍽두 이르시네, 걘 도서관에 갔에요.”
 
108
아궁이에 넣으려던 장작을 한 손에 든 채 아내는 부엌문을 드르릉 밀고 머리를 넌지시 내민다.
 
109
“도서관?”
 
110
“이에. 제 동생이 공부를 못 하게 아침 한겻 지부렁시니께 그마 도서관에나 간다구 점심 먹군 달아났네요. 걘 이즘 밤낮 무엔지 그저 쓰구, 읽구, 아주 공부가 열심인데요.”
 
111
이러한 정선이의 근면을 아버지도 알고 있을까? 저만 아는 사실인 것 같아서 덧붙이는 말인 것 같다.
 
112
“읽구 쓰구 건 공부가 아니야.”
 
113
무뚝뚝하게 건너오는 까닭 모를 남편의 대답. 아내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4
“이에?”
 
115
캐어 물었으나.
 
116
“어서 저녁이나 지어요.”
 
117
더한층 엉뚱한 대답이다.
 
118
오늘은 전에 없이 들어오는손 정선이를 찾고. 말투가 역겹게 나오고 - 이 애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시 한 번 더 재쳐 물었다.
 
119
“이에?”
 
120
그러나, 근호는 아내의 물음에도 귀가 먹은 듯 저 할 말만 그대로 계속한다.
 
121
“나는 밤낮 집에 붙어 있지를 못하니 정선이가 어떤 경향으로 기우러지는지 알 수 없군요. 금후론 당신이 집에서 그 애 공부하는 것 좀 주의해 지도하도록 하우.”
 
122
그 애가 학교 성적이 나빠 학교 선생한테 혹 무슨 주의를 받은 것이 나 아닌가? 그러나, 정선의 공부에 있어서만은 더 주의가 필요 없다는 듯이 너그러운 대답이다.
 
123
“보나 안 보나 정선인 글쎄 책으로 밤을 밝혀서 걱정인데 그러세요?”
 
124
“글쎄 건 공부가 아니라니깐.”
 
125
툭 튀어나오는 남편의 역정.
 
126
“아이 난 어떻게 하시는 말씀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밤을 밝히며 책을 보는 건 공부가 아니구…….”
 
127
영문 모를 역정에 아내도 역겨웠다. 말끝을 할퀴며 머리를 들이민다.
 
128
“걔가 시집을 늘 보죠?”
 
129
아내야 어쩌건 남편은 물을 대로 묻는다.
 
130
“시집도 보나 봅디다.”
 
131
“글쎄, 그러기 말야. 그게 탈이거든, 당초에 그런 책은 인젠 못 보게 하란 말야. 그리구. 과학 방면으루 치를 돌리게 늘 일러요. 참, 걔 일생에 아주 중대한 문제일 거요.”
 
132
“갑자기 건 무슨 말씀이에요? 제 장끼대로 어떠한 방면으로든지간 보아서 시켜야 할 게 아냐요?”
 
133
“장끼구 수꿩이구 글쎄 장래를 생각해야 하는 게야.”
 
134
“걘 지금 아버지의 시를 천편일률 격으로 밤낮 같은 소리만 되읊는다구 아주 통렬한 비판까지 내리우며 대시인의 꿈을 꾸고 있는데, 이제 그 치를 졸연히 돌려질까요.”
 
135
근호는 몸이 흔들릴 만치 놀랐다. 시의 뿌리는 벌써 정선에게 이렇게 깊이 박혀진 것일까? 한참 시에 미쳤던 자기의 그 옛날적 정열이 어제런 듯 생각 키우며 뿌리가 깊어갈수록 그것은 제 장래의 불행일 것만 같데 자식이 가엾어 보였다.
 
136
졸연히 돌리기 어려운 시의 치, 이것을 돌릴 방법은? 생각이 아득한 채 근호는 방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끌렀다.
 
137
저온 생활엔 졸업을 했다고 아는 근호이건만 밥만을 익혀내는 것밖에 군장작 맛을 힘입어 보지 못한 구들은 불과 영하12도의 추위인데도 어지간히 몸에 마친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으스스한 맛이 대뜸 등골을 엄습한다.
 
138
‘이게 다 시의 벌인데!’
 
139
생각을 하며 근호는 외투를 다시 떼어쓰고 책상 앞으로 마주앉았다.
 
140
아침 면도 전에 쓰던 시가 던져둔 그대로 책상 위에서 어서 끝을 나쳐 주기를 기다리는 듯이 마주 올려다본다. 생각해 넣었던 상이 쓰다 놓을 자리를 본 듯이 밀려나온다. 버릇대로 근호는 펜을 들어 원고지 위에 대어다놓았다. 원수의 시, 자기는 그 원수의 붓을 다시 들었던 것이다. 자식에게서 시의 뿌리를 뽑아 주려 한맘을 먹고 돌아왔던 자기가 다시 그 시에 붓을 대다니…… 생각이 미치는 순간. 근호는 반이나 넘어 쓰여진 시고(詩稿)를 한 주먹에 쓸어웅켰다. 그리고 사정없이 국적국적 구기어 쥐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것이 차마 쓰레기통 속으로는 던지어지지 않는다. 내일까지는 써 주겠노라고 한 약속의 시고다. 한참 앉아 끝을 맺었으면 장작 30관의 마련은 넉넉히 된다. 손안에서 갈피갈피 꾸겨진 시고를 그는 다시 펴서 책상 위에 놓고 손대림으로 주름을 펴기 시작했다. 쿵 하고 마루에 책보 던지는 소리가 난다. 정선이가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것인가 보다. 자식에게 무슨 못 할 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새삼스럽게 그를 대하기가 무서워진다. 금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만 같아 얼른 시고를 밀어넣고 책상 앞을 물러나 비스듬히 벽을 지고 기대었다.
 
141
“아버지 오늘은 일찍 오셨네. 날이 굉장이 치워요.”
 
142
새빨갛게 언 볼을 한 손으로 쓸며 정선이가 문을 연다.
 
143
정선이가 돌아만 오면 당장 시에서 손을 떼라 이르고 시집을 빼앗으려던 아버지의 입은 인사조차 받기에 무거웠다.
 
144
“차 참 칩드라 날이.”
 
145
그리군 더 말을 못했다. 제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 오히려 앞날에의 행복이 아닐까. 정선을 대하고 보니 엉뚱한 생각이 자꾸만 입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146
이게 다 아직 시에 대한 미련이다. 그것은 자기 도취에의 아름다운 꿈이요. 현실은 조그도 여기서 용납지 않는다. 빤한 결론이 다시 돌아와 맺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야붓야붓 말은 나오다 들어가고 들어가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147
저녁이 끝나자 정선이는 책상으로 들러앉는다. 가만히 보니 뽑아드는 것이 또 시집이다. 그것이 눈앞에 바라보여지던 순간, 근호는 저도 모르게 불렀다.
 
148
“정선아!”
 
149
“네?”
 
150
“마루 책장에서 하이네 시집을 네가 빼냈니?”
 
151
“네?”
 
152
“그 책을 머 네가 보니?”
 
153
“보죠.”
 
154
보는 것이 장한 듯한 대답이다.
 
155
“보아?”
 
156
“그럼요.”
 
157
“못쓴다.”
 
158
까닭을 몰라 정선이는 순간 눈이 둥글해진다.
 
159
“그런 책을 보아선 안 돼.”
 
160
“왜요?”
 
161
“넌 그런 문학류의 책에서 일체 손을 떼어야 한다. 그리구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 열심히 공부할 차비를 해야 한다. 혹 과외로 무슨 책이 보구 싶건 과학 잡지나 그런 걸 사 보도록 해라.”
 
162
“시는 왜 못 쓰세요?”
 
163
“글쎄 시를 배워선 안 된다.”
 
164
“아버진 시인이 시는 왜 그리 벽색이세요?”
 
165
기가 막히는 질문이다. 대답할 말이 없어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음으로 부자연한 표정을 감추려 했다.
 
166
“아버진 그럼 인제 시 안 쓰세요?”
 
167
“아니, 그건 내가 시인이니까 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말해야 너는 아직 그것까지는 모른다. 덮어놓구 과학 방면으로 전공을 하도록 미리부터 마음을 꽉 정하는 것이 너의 장래를 위해서 차라리 행복일 것만은 지금이라도 장담이 될 줄 안다. 그러니깐 시에선 뿌리가 백히기 전에 아여 결심하고 손을 떼야 한다. 알아들었지?”
 
168
오늘 별안간 아버지의 이 태도는 무슨 까닭인지 정선이는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내심으로는 은근히 단테나, 괴테 같은 대시인이 되리라 잔뜩 마음을 먹어 왔다.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겠다고도 그렇다고 버리라는 걸 버리지 못하겠다고도 할 수가 없어 대답할 바를 몰라 머리만 숙였다.
 
169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시에선 아무리 해도 손을 떼어야 할 것을 지금 나는 네 귀를 불고 이르는 줄 알어라.”
 
170
“그럼 전 장래 무엇을 전공해야 할까요?”
 
171
“글쎄 과학 방면이래두? 공과나 이과나 해야지.”
 
172
“…….”
 
173
“왜 대답이 없어?”
 
174
“…….”
 
175
“응?”
 
176
“정선아!”
 
177
답답한 듯이 주먹으로 책상을 울렸다.
 
178
“그럼 문학은 그만두겠어요.”
 
179
장히 꺼리다 힘들게 나오는 대답이다. 헐히 나오는 것보다 오히려 미덥게 들렸다.
 
180
그만했으면 저 스스로도 생각함이 있으리라 근호는 마음을 놓았다.
 
181
그러나. 정선이의 손은 한결같이 교과서보다는 시집을 뽑는 편이 많음을 또 보았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 근호는 심혹한 책망과 같이 그의 책상위에서 하이네를 발레리를 모조리 골라 빼내었다.
 
182
그 후부터 정선이는 완전히 시에서 손을 뗀 듯이 아무런 눈치에도 채이는 것이 없기에 아주 마음을 놓고 지나던 근호는 얼마 뒤 자식의 책상 설합 속에서 뜻도 않았던 보들레르의 국역본 한 권을 또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장서에는 없었던 것으로 손수 제가 사다 넣어 두었음이 틀림없었다.
 
183
제타하고 근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들어내었다. 어디다 또 가져다 감추거니 바라보고 있던 정선이는 뜻도 않았던 실로 뜻도 않았던 아버지의 그 대담한 행동에 놀람을 마지못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한복판을 되는 대로 섬적 갈라 쥐드니 사정도 없이 쭉쭉 찢어선 고깔처럼 이마를 맞대어 땅 위에다 마주 세워놓고 성냥을 그어대는 것이다.
 
184
“아버지!”
 
185
그러나, 아버지는 듣는지 못 듣는지 불을 사르기에만 일심이다.
 
186
보들레르는 차마 불벌을 받을 신세는 아니라는 뜻이 마치 몸부림이나 하는 것처럼 넘어지며 넘어지며 대항을 하는 것이었으나. 성냥개비의 힘이란 그렇게도 위대한 것일까. 세 개비만에는 오금을 못 쓰고 사로잡히고 만다. 불길은 새빨간 혀끝을 조각마다의 틈틈으로 날름거리며 우석우석 기어오른다.
 
187
“아버지!”
 
188
무슨 말을 하렴인지 정선의 표정은 극히 긴장되어 있었으나, 아버지는 여전히 귀먹은 대로 그저 흰 줄기 검은 줄기 구불구불 엇갈리며 끝없이 허공으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만 정신없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189
〔발표지〕《조광》(1942. 4.)
190
〔수록단행본〕*『병풍에 그린 닭이』(조선출판사, 1944)
【원문】시(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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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용묵(桂鎔默)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42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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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