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수륙 일천리 ◈
카탈로그   본문  
1935.8
김복진
1
수륙 일천리
 
 
2
오후 10시 40분
 
3
언어가 같지 않고 풍속이 다르나마 조각의 친구인 나이 어린 M군의 전송으로 부산행의 기차를 탔다. 하루 종일 경성의 시가를 동에서 서로 허리를 굽히고 좇아 다니다가 사정이야 여하간에 여행이라고 하게 되면 10년 전 옛날에 가지고 있던 청춘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다.
 
4
가 보지 못한 지방, 알지 못하던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니 이 지방의 풍속이 어떠하며 새로 만날 사람이 어떠한 인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여진다. 아직까지 경치를 찾아 산수간에 놀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아마도 자연에 취하고 자연에 끌리어 기다란 체신(體身)을 경향으로 굴리기에는 인연이 먼 것 같으나 기실은 자연을 감상하고 승경(勝景)을 응대함에 남다른 재간은 없으나 과히 다른 사람에 뒤지지는 않으리라는 자부심만을 갖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어느 여가에 시절을 고르고 지점을 선택하여 피서나 또는 피한이라고 이름을 붙이어 여행을 할 수도 없는 것이며 관동의 팔경이나 만물상의 금강을 찾을 수 있지마는 나로서는 자연을 찾고 자연을 만나고 하는 것보다 사람을 찾아서 문명을 찾아서 기구(崎軀)한 산을 넘기도 하고 황량 한 평원에 발을 들여 놓아서 한걸음 두걸음 목적하는 지점에 가까워지고 시각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과 가까워지는 곳에 여행의 진실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한다. 더구나 알지 못하는 지방에 알지 못하는 인물을 찾을 때에는 달착지근한 청춘의 피가 소생하는 것이다.
 
5
내가 찾아가는 곳에 경치가 어떠하며 풍속이 어떠한가,내가 만나려는 사람의 외모가 어떠하게 생기었으며 성격이 어떠하며 끝으로 나를 어떠하게 대하여 줄 것인가 가슴은 공연히 띈다. 사람의 가슴 속에는 사람을 기다리 는 더운 피가 있다. 이 피가 뛰는 곳에 인류의 역사가 있고 세계의 문명이 있고 우주의 운행이 있지 않느냐. 처음 가는 지방에 커다란 기대를 갖는 것도 처음 만날 사람에게 끝없는 희망을 갖는 것도 사람으로서 가질 바 욕심을 가진 것이다.
 
6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다. 사람은 연장을 만드는 동물이다. 그리고 사람은 사람과 협동하여 문명을 창조하는 동물이다. 나도 사람이니 사람과 같이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그래서 자연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다.
 
7
기차는 지금 남으로 달아난다. 산이며 강이며 들이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창 밖에는 그저 어둠이 있을 뿐이며 차안에는 사람이 가득할 따름 이다. 기차는 그저 끝없는 암흑 속으로 달아난다. 전후와 좌우가 다 같이 어두우니 남인지 북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모를 것이나 내야 알든 말든 사람을 믿고 사람이 발명한 기계를 믿는 바이니 암흑을 돌파하는 장쾌에 사람으로서 가질 환희만 가지면 그만일 것이다.
 
8
아까 경성역에서 M군이 창 틈으로 던져준 화속(花束)을 창문 곁에 억지로 세워 놓았다. ‘차안이 너무나 쓸쓸할까 보아 꽃을 사가지고 왔노라’ 고 M군은 웃음 섞어 말하며 모자를 흔드는 품이 제법 연애를 연애하는 젊은 남녀의 작별하는 정경 비슷하여 나 역시 눈쌀이 찌붓찌붓하여졌다. 동천이 희미하게 밝아 올 때 목적지인 김천에 도착하였다. 김천고보의 정 교장의 출 영으로 우선 역전의 김천여관에 들어 밤새도록 기차에 시달린 몸을 쉬려 하였으나 기차의 동요에 장단을 맞추던 몸인지라 종시 잠은 오지 않고 쓸쓸한 새벽 하늘의 한두 개 별을 치어다 보며 자리 위에서 궁글고 있었다.
 
9
‘다꾸앙’ ‘나라쓰께’ ‘후꾸신스게’ ‘오이’ ‘열무김치’ ‘각두기’ 등속 김치 종류를 어수선하게 진열한 식탁을 대하니 그만 구미가 뚝 떨어져 버리고 만다. 대체로 어느 곳을 막론하고 여관 풍속은 근래에 매우 달라져서 아세아의 김치 전람회 비슷하게 식탁을 너저분하게들 한다. 누가 이런 버릇을 시작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나로서는 먹기 전에 불쾌하기 짝이 없으니 나의 소원대로 한다면 밥 한 그릇에 반찬 한 그릇과 냉수 한 사발이면 족하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 저것 늘어놓고 더이랴. 우리 할아버지 시대에는 구경도 못하던 ‘다꾸앙’ ‘나라쓰게’ 는 얼토당토 않게 왜 그다지 먹이려고 하는지 불가사의의 하나이다. 조반이라고 두어 술 먹고 김천의 가두로 나섰다. 산 밑으로 점점이 초가,와가 그리고 별안간 2층 집이 있어 산만하기 짝이 없으니 친할 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으레 산에는 나무가 없고 으레 논밭 의 경계는 굴곡이 심한데다가 ‘시멘트’ 높은 담이 둘러 있는 감옥이 시가 복판에 좌정하여 있으니 아담한 자연의 맛이라고는 구해 보기 어렵다.
 
10
이것도 자연의 하나이겠으나 봉우리가 묘한 산이 있고 산에는 기암이 있고 노송이 있고 산 밑으로 아늑한 촌이 있어 아침이면 추녀(春汝) 끝에 닭 이 울고 저녁이면 더벅머리 아해가 소를 타고 돌아오는 그림 속의 정경만을 자연이라고 하여 어려서부터 이런 말에 귀가 젖은 나로서 우연 말한 풍치는 그저 코웃음 치는 버릇을 과거에 가졌었다.
 
11
사람의 손이 조금도 가하지 않은 것만이 자연이 아닐 것이며 그런 자연은 세계가 넓다 하여도 양극의 빙원이나 그렇지 않으면 몇 개의 무인도에 불과 할 것이고 그외 간혹 인적이 없는 심산 밀림이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반드시 경치가 좋은 자연일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 그 자신이 이미 자연의 하 나 이니 사람이 사는 곳도 사람이 만드는 것도 통틀어 자연 아님이 없을 것이다. 세속적으로 그릇된 자연의 개념을 가지고서 자연의 풍광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4,5층 양옥이 즐비하고 수십간 도로가 종횡으로 분포되어 있는 도시의 풍경도 고산 월소(高山月小)한 전원의 경개 (景漑)도 똑 같은 자연일 것이며 또한 유다른 미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자연과 자연과의 배합이 어떠하며 균형이 어떠한가가 자연미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12
높은 산은 높은 맛이 있는 것이며 넓은 평야는 넓은 곳에 재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으나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점경 인물이 두서넛 섞이어 있고 그 위에 저녁 안개나 흐릿하게 끼어 있다면 그대로 동양화적 화폭의 하나일 것이니 이는 지금 와서는 통속화한 박력을 잃은 풍치이나 조화와 균형을 즐겨하는 인간인지라 역시 천편일률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떨어지지 못하는 바이다.
 
13
김천의 시가는 조화가 없는 곳이다. 아직 신개지이니 어찌할 수 없는 것 일 것이다. 포국(包局) 있어서나 지금까지의 시설에나 새로운 손에게 귀염 을 받기에는 좀 연이 먼 곳 같았다.
 
14
김천은 워낙 산간 벽촌인지라 새재(*조령) 넘어 조그만 골자구니이니 금 강산이나 몽금포에 놀던 안목으로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탐방하는 한가를 가져 보지 못하고 자연을 읊조려 보지도 못하였지만 그리 이런 신세를 부러 원하지 않는 나로서는 과히 섭섭지도 않았고 도리어 건조하고 몰풍경한 곳을 어떻게 하여 미화하여야 할 것인가 샅샅이 귀여운 곳으로 만들어 볼 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왕래할 뿐이었다.
 
15
김천은 산만한 마을이다. 김천은 음악을 갖지 않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김천은 앞으로 무럭무럭 커갈 곳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미래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느끼었다. 김천의 꽃다운 미래를 약속하려 황학산 밑에 검붉은 벽돌집 안에 수백 명의 젊은 사람이 모여서 진리를 배우며 문명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젊은 학도의 성실한 노력은 반드시 앞날의 김천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수천만 사람 가운데에서 이들만이 학문을 연찬하는 기회를 가졌으니 앞날의 문화를 창건하는 책무를 가진 선민일 것이다.
 
16
아침부터 학교 관계자 제씨와 학원의 제반 시설을 보고 초창 시기를 벗어난 이 학원의 장래를 마음으로 요망하였다. 이번 영남의 여행을 하게 된 바는 김천을 거쳐 이름 높은 직지사를 찾아 보려는 것도 아니며 김천서 불과 4, 50 리 떨어진 나의 제 2의 고향인 영동을 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영동에서 연골이 자라나고 영동에서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리고 영동의 땅 속에다. 스물 안팎의 요절한 누이의 백골을 부탁하였으니 나로서는 몽매간에 잊을 수 없는 곳이나 그러나 이 땅의 흙을 밟을 작정도 아니었었고 오로지 김천을 찾았으며 오로지 김천의 장래의 운명을 지고 있는 김천 고등보통학교를 왕방하였던 것이니 이 학교는 최송설당(崔松雪堂) 여사가 그의 전 축재를 기울여서 설립하였다고 한다.
 
17
지분(脂粉)을 가까이 하고 능라(綾羅)에 쌓여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 여자의 사업인 것과 같이 알고 있는 세상에 최씨의 존재는 하나의 경이일 것이니요,동안 각처에서 다시 새로 일어나는 향학열을 촉발한 선구자의 하나일 것이다.
 
18
80이 넘은 노령에 정정한 기력은 나를 놀라게 하였으나 그보다는 학원의 관계자 제씨와 일읍의 유지자들이 여사의 특지(特志)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여 동상의 건립을 계획하고 이 계획 진행에 있어 국외자인 나를 초청하였던 것이나 여사는 굳이 이를 사양(辭讓)하였던 것이다.
 
19
산수가 제법 묘하여 사람의 자취가 그치지 않는 곳이라면 돈을 들이고 힘을 들여서 제 성명을 새기는 버릇이 있고 고사찰을 찾아가서 굳이 단청한 주동(柱棟)에 이름 석자로 써 두는 버릇이 골수에 파묻힌 인간과는 그 류를 달리하는 것이다. 유방 백세(流芳百世)를 하지 못하면 유괴 만년(流塊萬年) 이나마 한다는 것이 영웅을 배우는 사람들의 흔히 입버릇으로 하는 바이다.
 
20
그러나 도리어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꾸준히 자기의 신념을 다하는 사람의 앞에 나는 영웅 이상의 경모를 갖는 것이다.
 
21
요동안 껀듯하면 비석을 세운다,동상을 만든다는 등 좋은 일인지 아닌지 간에 유행 현상을 짓고 있다. 그래서 유행에 박자를 맞추고 다시 새로운 유행의 유행을 만들고 있다. 가령 동상을 건립하더라도 세심히 그 업적을 살 피고 그 영향을 돌보아서 비로소 시작할 것이나 얄궂은 세상인지라 돈 있고 할일 없는 분들이 우연으로인지 또 주위의 관계로서인지 문화사업에 다소의 투자(유자(遊資)처분이 아니면 명예(名譽)투자로서)를 하면 그 이튿날부터 동상 건설의 계획이 진행된다.
 
22
이 통에 끼어서 같이 춤을 출 것인가 정말 생각하여야 할 문제이다. 하루 이틀 나는 학교 관계자와 여관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최송설당 여사에게 왕복을 하였다. 그래서 ‘서울서 오신 손님에게 미안합니다만 내일 아침에는 사진을 박히여 드리겠으니 여러 분이 오실 것이 아니라 사진쟁이만 보내지유’ 라는 인사가 나리어서 그러면 나는 김천에 더 체류할 것이 아니므로 오후 차로이 땅을 하직하였다.
 
23
기차는 조령을 손쉽게 넘어 황간(黃澗) 가학루(駕鶴樓)를 옆으로 스치고 서울을 향하여 일로 직진하였다. 황간의 가학루는 명승으로 높은 곳은 아니나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형제가 이 누 마루에서 참외를 먹고 앞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곳이므로 풍마 우세(風磨雨洗)하여 옛 풍정을 갖지 않은 가학 루일망정 이곳을 지나니 짐짓 감개 무량한 바 있다. 멀리서 잠깐 목례를 하고 달아나는 기차에 그대로 끌리어서 산을 넘고 강을 넘어 버리어 삼남의 요충 대전에 도착하니 어느덧 지는 해는 서산에 걸리었다. 호남선 방면에 온 손들이이 차를 바꾸어 타려고 어수선하지만은 조갈이 심한 탓으로 차나 한 잔 사먹자고 어깨를 부비고 겨우 내려서 과히 친절해 보이지 않는 차 파는 인간에게 머리를 굽혀가며 차 한 병을 구걸하였다. 워낙 갈증이 심하였 으므로 체면 불구하고 만인 총중에 서서 서너 잔을 마시고 차 안에 들어가니 묘령 여자가 내 자리에 제법 동구리고 앉았다가 머밋머밋하며 겨우 다리 하나를 들고 나보고 앉으라는 것인지 영문 모를 거동을 하므로 나 역시 벙어리 수작을 본받아 덮어놓고 자리에 앉으며 옆눈으로 슬그머니 궐녀(厥女)를 쳐다보니 머리에 백금 비녀를 꽂고 금시계줄을 늘이었으며 흰고무신 바닥에는 영어로 K자를 새긴 것이 얄궂게도 눈에 띄였다. 대체로 이 당돌한 여인네가 무엇하는 인간일까,나는 잠깐 생각하였다. 쪽을 찌었으니 남의 부인일 것이다. 쪽 찌었다고 하여 반드시 가정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니 금시계줄을 늘인 품은 염집 부인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하였다. 고무신 안에 영자를 새긴 것이 실없이 나로 하여금 궁리를 하게 한다.
 
24
천생 독기가 약간 있는 눈으로 슬금슬금 나를 쳐다보면서 호사로운 가방을 열고 권련을 한 갑 내놓더니 익숙한 솜씨로 한 개를 피어 무는 체국이 조금도 서툴어 보이지 않는다. 담배를 피다가 별안간 생각이 난듯이 수밀도를 먹기 시작한다. 식욕이 있어 먹는 것인지 자랑 삼아 먹는 것인지 알 바 없으나 권련 피우던 솜씨보다는 채 못하여 복사물이 치마에 떨어지고 K자를 새긴 고무신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25
대체로 이 당돌한 여자의 직업을 알고 싶었다. 신자에다 영어 글자를 새 긴 품이 소위 고등학교나 졸업한 신여성일 듯도 하고 동그리고 앉아서 권련을 빠는 격은 아무리 보아도 홍등루주에 묻히어 그날 그날의 생활을 보내는 야업(夜業) 부인 같기도 하나 그러나 거의 만삭이 된 듯하여 보이는 불룩한 배는 직업 부인으로서는 가상찮아 보이고 그러면 전라도 어떤 비위 좋고 도조(賭租)섬이나 하는 친구의 귀여운 첩이나 아닐까. 아까 먹던 수밀도는 운치 삼아 만들어 놓은 자기 집 과수원에서 가져 온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여 가며 서울이 가까워지는 것이 무척 기뻤다. 서울이 그리운 것 보다는 차 속에서 지리하게 앉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앞에 앉은 문제의 여 성도 차츰 싫증이 난 것 같다. 더욱 임신 중의 여자이므로 기차에 시달리면서 남보다 유심히 괴로워서 허리를 꼬고 눈쌀을 찌푸리고 좌불안석하는 모양이 나의 좌흥을 도우나 뱃속에 든 어린 생명이 안타까워서 내가 자진하여 자리를 빌려주고 편히 쉬기를 권하여 보니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던지 말 한마디 없이 누워 버린다.
 
26
나는 어서 서울이 왔으면 하고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경성 역에만 내리 면 그만이다. 이 따위 인간을 누가 다시 볼 리가 있는가. 얼굴이 조금 해바라지고 붉은 분 푸른 분을 바르고 속살이 보이는 배우 옷이나 입고 권련을 피우며 야릇한 아양을 피우는 여자를 장구한 시간을 두고 나로서는 도저히 두고 볼 비위가 없었다. 서울에 들어간대야 역시 별 수는 없는 것 이지만 눈앞에 이런 친구를 두고서는 몸이 징그러워서 견디기 어려우니 넓은 서울의 길거리가 그립기 무한하다. 밤 열 점이 넘어서 경성에 도착하였다.
 
27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가서 여행 중의 견문을 웃음섞어 이야기하고 밥을 먹은 후 자리에 들어 코를 골고 말았다. 이튿날 은 아침부터 동상 제작에 필요한 준비를 하느라고 남촌으로 북촌으로 돌아다니었다.
 
28
9년 전(*1924년) ‘모씨의 동상을 만들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이를 사절하였었다. 대체로 동상이라는 것은 작자로서의 함축이 깊지 않고 서는 손대기 어려운 것이니 ‘10여 척 높은 곳에 세워 놓는 것을 예상치 않고 화실에서 습작 비슷한 것이나 제작하던 솜씨로는 기괴한 현대 모양을 가상(街上)에 진열하는 이외에 별 도리가 없는 것임으로’ 나는 이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 후 조선의 천지에 유명무명씨의 동상이 근래로 부쩍 늘었지 만 예술적 가치를 가진 것이 몇 개나 있을는지 알기 어려운 것이다.
 
29
내가 조각을 공부한 동기는 어쨌든지 간에 지금에서는 조각과 나와는 떨어지지 못할 깊은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조각과 일생을 동행한 다면 남들이 하도들 함부로 하니 나 역시 한번 이통에 끼어 본대도 큰 망발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동상 이상의 물건은 못 된 다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이 만든 동상 이하의 것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구나 동상 건설비의 과대 현상에 놀랄 만한 바 있으니 동상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며 조각가의 제작비의 환산에 있어도 조선 사회의 실정에 비추어 맹랑한 바 있고 또 조각가 자신의 예술적 재완을 생각하여 기막힌 가격을 부르고 있다.
 
30
우선 서울 안에 있는 10여 개의 동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가까운 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균제가 있고 양감을 가진 예술적 작품다운 것이 몇이나 될 것인가. 용모가 근사하여야 하겠지만 생명을 강지 않아서 아니 될 것이다. 구리 속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조각하는 사람의 영분(領分) 일것이니 이 생명의 창조를 하지 못하면 조각가로서의 지위를 잃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망발에 가짜 제작비를 요구한다. 만일에 ‘불란서 사람이 이 동상의 무리를 본다면 품 속에서 향수병을 꺼내지나 않을까 한 다.
 
31
조각도 예술이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예술가의 태도를 가져야 할것이니 주판과 눈싸움을 하는 상고(商賈)와 그 생활을 같이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조각가가 자기의 작품을 매매한다는 것보다 자기의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자기의 작품을 갖기 희망한다면 그대로 선사할 것이라는 말을 내가 옛날에 들은 바 있었다. 이런 말을 하여 주던 사 람의 예술가적 태도는 지금까지 그 고결을 지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날의 생활을 달리 도리 없는 작가로서는 귀여운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렇다고 하여 자기의 작품을 그대로 상품화하고 그 가격을 환산하는 데 차값을 계산하고 삐-루(*맥주) 가를 계산하고 아들의 교육비와 손자의 양육비를 합계하여 굉장한 숫자를 만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볼 일이라고 한다.
 
32
나는 생각한다. 예술적 작품은 시장을 엿보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시 장에서 평정되는 가격이 반드시 예술가로서의 반가운 대접이라고 생각되어지지도 않고 또한 그럴 리도 없으리라고 생각되나니, 예술품의 가격을 운위하는 버릇보다도 예술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작가라는 사람이 얼마나 한 힘과 얼마나 한 세월이 필요로 하여지며 이 필요기간에 어떠한 생활을 하는 것 인가를 해석한다면 여기의 답안은 손쉽게 내릴 것이다. 예술가의 생활은 결코 특수한 것이 아니니 모든 사람이 하루에 밥을 세 번 먹는데도 불구하고 예술가만이 동상작가만이 네 번이나 다섯 번 먹을 이치는 결단코 없을 것이며 또 그것을 허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품은 가격을 환 산한다는 것보다 그 작자 역시 사는 인간이며 예술을 작위하는 인간이니 인간의 생활 예술가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여 준다면 고만일 것이다. 한편으로 동상열이 있고 한편으로 동상작가가 부족한 탓으로 소위 처녀 이득이라고 할는지 어수선한 통에 일확천금의 꿈은 좀 피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작품다웁게 할 것이며 제일 작품으로서의 효과가 없을 것이면 황금은 그만두고 금강석을 산같이 준다 하더라도 이를 사절할 것이며 일단 제작을 승인한 후에는 작품다운 것을 제작하여서 망발이 적은 물건을 긴 세월을 두고 자기도 보고 다른 사람도 보일 것이다.
 
33
허명(墟名)과 사실이 혼연히 일치된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는지 생 각만 하여도 아득한 일이다. 예술가가 습작으로 그 날을 종시(終是)한다면 이 천지에서는 구(求)하기 어려운 복(福) 많은 인간일 것이며 이 복을 누리는 데 값을 따지고 시장과 판매와 손자의 자비(資費)까지 머리 속에다 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소설가의 원고료,화가의 운필료,배우의 출연요금에 대비하여 과분한 ○○를 갖는 것은 ○○○이 적은 태도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 것이다.
 
34
나는 대개 제작 준비를 마치고 머리 속에 있는 가상(假想)을 정돈하기 위하여 박광진,이제창 양 형과 화구를 등에 지고 인천으로 하여 해주 용당포의 어촌을 구경하고자 다시 서울을 하직하였다. 화제를 찾는 화가들은 두 눈을 묘하게도 굴리며 거래(去來)하는 풍경을 영접(迎接)하고 있다.
 
35
황해의 붉은 파도는 장마 끝인지라 더욱 심하였고 때마침 바람이 일어서 화가 두 분은 선실 속에 엎드려 떠나보지 못하고 가지고 간 수박의 맛도 못 볼 지경이었다. 이름만이라도 갑판이라고 하는 곳에 나는 종일 앉아서 가고 오는 구름과 오고 가는 파도를 번갈아 보다가 눈을 감고 공상의 세계에 놀아도 보았다.
 
36
인천을 지나고 풍랑이 심하다는 영평을 지나 용당포에 도착하기는 오후 7시가 훨씬 넘어섰다. 인천 부두에서 이 조그만 발동선을 탈 때에 아무리 하여도 미덥지 않기로 선부 비슷한 사람에 게 물어보니 "모두 하여 7, 8시간이면 용당포에 갈 수 있다던 것이" 만 12시간이 들었었다. 양식도 하지 못 한 우리 일행은 용당포에 내리었을 때에는 패군한 무리처럼 맥없이 멍-하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사실인즉 해안에서 점심이라고 판다기에 나는 시장도 할 뿐더러 다소의 호기심도 있어서 한 상을 청하였었으나 비위 좋기로 남에게 뒤가지 않는 나도 과연 먹기에 괴로웠다. 밥 한 그릇에 새까맣게 된 새 우젓과 금시에 밭으로 기어갈 열무김치 한 그릇을 인사조차 하지도 못한 사람과 같이 먹으라고 겸상을 하여 놓고 더구나 물냄새가 나는 시꺼먼 젓가락을 놓았으니 곧 장질부사나 옮을까 봐서 차마 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찌되었든 간에 기왕 청하여 놓은 것이니 경험 삼아 두어 저 (*젓가락) 목구녁에 집어 넘기고 인단 서너 알을 차 대신 먹었던 것이나마 냉수 한 그릇 먹어 보지 않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서는 좀 생기가 있었던 것이다.
 
37
우리들은 이 밤을 숙소도 마땅치 않은 용당포에서 자려다가 무슨 봉변을 할는지 몰라서 해주읍으로 가기로 하였다. 해주에는 우리들을 기다리고 우 리들과 같이 한여름 화작을 하기로 약속한 선우담 형이 있었던 것이다. 나 의 미지의 벗 선우담 형을 찾아가는 나는 월전에 김천을 갔었을 때와 같이 많은 기대를 가졌었다. 작년과 금년 미술전람회에서 그 작품을 대하고 특이한 작풍에 머리를 숙이었으나 그 사람을 면접하지 못한 나로서는 금번 여행의 주목적으로서 선우 형을 만나고,말하고 웃고,그리고 같이 연구하여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찾을 때 같이 감정이 높이우는 때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천리에 찾을 때는 그 어떠하랴.
 
38
해주에 도착하여 우선 여사를 정하고 선우 형에게 기별을 하여 놓고서 우리들은 목욕을 대충 하고 난 후 시장한 김이라 저녁밥 한 사발을 다 먹고 나니 눈이 제절로 스르르 감겨진다. 노곤 식곤(路困食困)이 겹질린 판이라 잠이나 잘까 하였더니 의외로 천만 의외로 선우 형이 동경미술학교 재학중인 우형(禹兄)과 같이 늦은 밤에 달려왔다.
 
39
우리는 먹지도 못하는 술 한 병을 놓고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일면 여구(一面如舊)인지라 미술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밤이 깊어지고 먼동이 트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림쟁이가 만났으니 그림의 이야기로부터 그림의 이 야기로 종시할 뿐이었다. 우리들이 결론을 얻었는지 또는 이미 결론이 지어진것을 반복하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유쾌히 시간을 보내다가 촌닭이 울며 돌아가기를 재촉하므로 요정을 작별하고 귀거래를 부르며 여관에 돌아와서 꿈의 세계를 찾게 되었다.
 
40
나는 천생으로 아침 잠이 없는 편이라 전등이 꺼지면 대개는 이와 같이 눈을 뜨게 된다. 이 날도 여전하게 일어나서 편지장을 써놓고 해주의 공기 를 속깊이 마신 후 아무 비판없이 전설 그대로를 믿기로 하고서 백이숙제 (伯夷叔齊)의 옛 자취를 찾아 보았으면 하였다. 이곳서 구월산이 가깝다 하니 이 산에 올라서 이 산의 도라지를 먹었으면 곱이 낀 내 창자라도 뚫리어지 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도 시간의 여유가 없는 나로서는 오래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선우 형에게 받은 고은 초(初)인상을 가슴에 품고 그림자로서나마 백이숙제의 사당만을 구경한 기억을 갖고서 저녁차로 서울을 향하니 눈앞에는 해주의 시가도 해주의 산천도 옆에 앉은 단발 양장한 미인도 모든 것이 흐리멍덩하게 보일 뿐이고 머리 속에는 주자(朱子)가 썼다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의 비석만이 점점 똑똑하여질 뿐이었다.
 
 
41
『조선중앙일보』, 1935.8
【원문】수륙 일천리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8
- 전체 순위 : 5139 위 (4 등급)
- 분류 순위 : 1073 위 / 1794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수륙 일천리 [제목]
 
  김복진(金復鎭) [저자]
 
  # 조선중앙일보 [출처]
 
  1935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수륙 일천리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