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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당면 과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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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6.23~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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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의 당면 과제
 
 
 

상. 장편 소설은 방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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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모든 상태에 대하여 하등의 면밀한 과학적인 분석도 없이 혼돈이니 정체니 저조니 무기력이니 하는 등류의 술어만을 남용하려 드는 논자처럼 무의미하고 불쌍한 존재는 세상에도 드물 것이다. 문단인 이외의 사람들이 문학의 현상에 대하여 경고체(警告體)로 던지는 소위 국외자의 비평이나 또는 문단인으로 응당히 당사자가 되어야 할 지위에 앉은 자로서 요즘 성히 행하여지는 바 제 삼자적, 방관자적 비평 가운데서 특히 이러한 술어의 무사려한 남용을 보게 될 때에 그 논지의 무가치에 대하여는 새삼스럽게 이 곳에 노노(呶呶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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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자의 비평이란 자고로 합리적인 교양의 체계와 확고한 세계관의 파지자인 석학의 위치에서 행하여질 때에야 비로소 어느 전문 부분의 우수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시 당사자가 헛되이 방관자의 입장에 서서 문단의 현상에 대하여 폭언을 거듭하며 자신의 ‘침묵’을 변호하는 등사(等事)는 문화인이 가히 할 바가 아니다. 소설가나 비평가가 장시일 동안의 침묵을 깨뜨리는 수단은 역시 소설이나 비평을 들고함이 온당할 것이니 ‘침묵의 변’을 농하여 부질없이 소설 문학의 전진을 어지러이 함은 정히 침묵보다도 훨씬 무가치한 일이다. 제씨의 무익한 매언(罵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설 문학은 하나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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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헛되이 제씨들이 단정하고 비관하는 것처럼 우리의 소설 문학이 아무러한 지향이 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을 놓고 소설 문학의 금일적인 당면 과제를 논하는 것 이상 쑥스러운 행사는 없을 것이다. 목표도 없고 지향도 동향도 찾을 수 없는 회색의 운무 가운데서 당면 과제를 포착할 만큼 우리들은 천품(天稟) 있는 나침반은 아니다. 희미하나마 하나의 노선을 붙들고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에게는 항상 논의하여야 할 당면적인 구체적 과제가 생겨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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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난 해 1년을 두고 소설 문학의 제 문제가 이야기되었고 취중(就中) 최대의 소설 형식인 장편 소설에 대하여도 그 기저가 될 만한 논의가 행하여졌었다. 우리는 이 곳으로부터 다시 전진하면 그만이었다. 이 위에 설 때에만 우리의 앞에는 구체적인 문제의 성립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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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된 김오성 씨의 「장편 소설은 방황한다」는 논문은 이상에서 말한 바 국외자의 비평과는 물론 구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나 장편 소설 논의에 새로이 아무 것도 첨가함이 없었다는 것만은 이 곳에 명백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씨로서는 친절을 극한 소설 문학에의 조언이었으나 씨가 작년도에 시행된 소설론에 대하여 지나치리 만치 이해가 부족했던 탓으로 해일문(該一文)은 우리에게 별반 기여하는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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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김씨의 전기 논문의 요지는 우리의 소설 문학에게 분위기의 묘사와 타입의 창조를 권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장편 소설이 시민 사회의 상향기의 산물이라는 것, 그러므로 당시에 있어서는 성격의 문제가 중심이었다는 것 등등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논술은 이미 우리에겐 그다지 소중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장편 소설의 형식 과정이나 그의 19세기적 형태가 성격에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것이 심리로 되었다는 것쯤은 벌써 소설론의 단초(에)서 이야기되었었고 그와 비준(比準)해서 조선 소설의 발전 도정과 그 특수 성격 같은 것도 벌써 천명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임화 씨나 혹은 미급한대로 필자의 수삼 차의 개조론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성찰을 기저로 하여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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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디테일의 진실성과 전형적 정황(환경)에 있어서의 전형적 성격의 창조’와 여(如)한 명제는 리얼리즘의 초보적 상식일 뿐 아니라 장편 소설 개조론이 도달한 하나의 공식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거늘, 김씨가 ‘전형적 정황’대신에 ‘분위기의 묘사’를 끌어오고 ‘전형적 성격의 창조’대신에 ‘타입의 창조’라는 말을 가져 왔다 하여 무슨 새로운 것을 첨가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오히려 김씨가 ‘타입’이라는 것을 ‘지성인’이라고 국한하고 있을 때 씨는 ‘전형적 성격’이라는 것을 지극히 협소하게 오해하고까지 있는 것이다. 씨의 삼고(三考)를 바라 마지않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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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중. 산문성 획득의 신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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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유진오 씨는 금년 벽두에 ‘조선 문학의 진로’를 논하여 씨 자신의 행방을 ‘시정에의 편력’으로 표명하고서 처처에서 약간의 물의를 일으킨 듯싶다. 어떤 분은 주관의 상실로 말하였고, 또 어떤 분은 사실의 시대에 대한 신념의 결여라고 말하는 이조차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씨 자신의 반박이나 변명도 한두 번 본 법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찌 되었건, 「어떤 부처」, 「치정」이후 「이혼」, 「가을」을 거쳐서 유씨가 걸어 가고 있는 길은 산문성의 획득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유씨의 논문 가운데서 한두 개의 어구를 집어 내 가지고 그것에 구니(拘泥)하는 등사(等事)는 비평가의 가히 할 바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리하여 씨의 ‘시정에의 편력’을 산문성의 획득을 위한 협착한 소주관의 해방이라고 내깐으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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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씨가 ‘시정에의 편력’을 맹언(盲言)할 때에 씨는 응당 세태 소설과의 관계 여하와 씨가 생각하는 태도가 ‘고현학(考現學)’이냐 혹은 ‘문학적 관념으로 된 풍속’이냐를 명백히 할 필요는 있지 않았을까. 작년 한 해를 두고 논의하여 이러한 제 경향과 새로운 개념이 명백히 되어 있는 지금, 이런 것과의 아무러한 연관의 해명 없이 ‘시정에의 편력’을 감행하는 것은 적지 않게 무의미한 일이다. 하고(何故)냐 하면 ‘시정에의 만연한 관찰’이나 ‘산책’은 세태 소설이나 고현학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소설 정신은 무위하게 분산되고 관찰은 결국 ○○조차도 습득치 못하지는 아니할까. 요(要)는 ‘편력’이나 ‘산책’에 시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정 세계를 거쳐서 문학의 정신을 살리는 데 있어야 할 것이고 시정 세계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있어야 할 것이 아닐까. 필자가 한설야 씨의 근작 「이녕」과 유씨의 「가을」을 단평하여 창조적 문학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점을 생각하여서였다.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건드리는 계단에서 한 등 올라선 과정, 이것을 나는 사실의 재구성으로 표명하였으나 지금 나는 이것의 동의어로써 산문적 획득의 신계단이란 말을 내세워도 무방하다. 종로나 명치정의 산보인은 언제나 산보인일 따름이다. 그는 그의 이해자도 재구성자도 창조자도 아닐 것이다. 필자 역시 2년 전부터 끊임없이 시정을 배회하였다. 필자가 세태와 고현학과 구별하여 문학적 개념으로서 새로이 ‘풍속’을 토구한 것이 로만 개조론 전후다. 그리고 ‘풍속’을 ‘모랄’과 밀접히 관련시킨 까닭도 만연한 산보나 편력으로 하여 되려 소설 정신이 시정 세계 속에 몰입되어 버리거나 상실되어 버릴 것은 경계하기 위하여서였다. 어찌 오류나 일탈이 없으랴. 헛되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산문성의 새로운 획득을 앞에 두고 시사성의 소주관의 문학의 창조적 문학에의 약진을 꿈꾸면서 어찌 과오가 없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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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상과 여(如)한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작년도의 장편 소설 논의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지면 관계로 상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산문성의 획득을 위한 소설 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위하여 약간의 암시만을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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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묘사 정신의 정당한 파악이다. 이것을 제것으로 하지 않고는 문학은 헛되이 풍속의 표면을 흘러 다닐 뿐 아름답고 위대한 표상의 문학은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묘사라면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곧잘 서경(敍景) 같은 걸 연상하는 폐단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묘사론은 알랭의 「산문론」을 극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작 문장론 부근에서 배회함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묘사란 우견에 의하건대 문학을 과학과 구별하는 궁극의 것이다. 문학과 이론, 과학의 차이는 인식 수단의 차이었고 과학의 개념과 상대되는 것이 문학에 있어서는 형상 내지 표상이었다. 이 형상화, 표상화의 과정을 넘어서는 도정이 다름 아닌 묘사의 과정이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의 골자이다. 그러므로 묘사는 항상 환경과 성격의 전형적 창조를 추축(樞軸)으로 하여 퍼져 나간다. 이러한 문학의 묘사 정신은 과학에 있어서는 분석의 정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필자가 이것의 확실화의 일순간으로서 발자크의 「인간희곡」에 정열을 의탁코자 함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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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묘사론의 전개로서 필자는 관찰 문학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체에 있어서 고발 문학이나 이와 동류의 문학이 일종의 체험적인 문학이었다는 것을 반성하여 그의 대립된 내지는 양기될 새로운 계단을 표시하기 위하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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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하. 신문 소설의 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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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도에 시행하여진 장편 소설 논의 중에서 신문 소설의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여 그것에 하나의 독자적인 위치를 부여하려고 애쓴 분은 이원조씨였다. 이씨는 「신문 소설 분화론」에서 그에 대한 독특한 해결 방법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객년래(客年來) 본보 문예 좌담회 석상에서도 장편 소설론의 거취를 신문 소설의 구체적 문제에 연결시켜야 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시 인문사판 『문예 연감』의 평론계 개관에서도 신문 장편 소설의 당면 문제를 해결치 않는 한 장편 소설 논의는 추상적 토론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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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원조 씨의 입론에 대해서 필자는 본시부터 씨와는 일치하지 않는 지론을 가져 왔다. 신문 소설 문제가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고 씨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조선의 장편 소설은 여태껏 신문지에 의하여 발표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장편 소설론은 근본적으로 소설의 성격을 토구하고 기본 문제를 규명함에 본래의 의도가 있었으므로 순수 문학 작가가 점차 상업주의로 기울어지려는 신문 소설을 어떤 태도로써 쓸 것이냐 하는 문제는 확실히 지엽적이고 현상론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화 씨나 필자는 통속 소설과 순수 문학의 관계를 검토하는 마당에서 이 문제를 측면적으로 취급하였을 뿐 한번도 정면으로 의견을 말해 본 적은 없었다 . 장편 소설론은 결코 ‘신문 소설을 어떻게 쓸 것 이냐’를 해결하여 그 곳에서 토론의 궁극의 낙착점을 발견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그보다 좀더 근본적인 토구에 위치를 두고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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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최재서 씨가 『조선문학』지 속간호에 「연재 소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논의된 대지(大旨)는 전작 장편 소설과 대척적 입지에 신문 소설을 세워 놓고 이것을 구분함이 문학의 발전에 오히려 건강한 장래를 약속함이 되리라는 것이었고 다시 채만식 씨도 졸저 「대하」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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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소설은 통속 소설에 자리를 내어 주고 되도록 전작 장편을 쓰는 것이 옳겠다”고 말하여 동일한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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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원조 씨와 최재서, 채만식 양씨의 의견을 비(比)해 보면, 신문 소설을 분화해 버리자는 대지(大旨)는 같지마는, 갈라놓았으니 순문학의 중견작가들이 신문 소설을 어떤 태도로서 쓰겠느냐 하는 데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이 이씨요, 신문 소설을 쓰지 말거나, 쓰되 완전한 통속 소설로 쓰면 그만이 아니냐는 의견을 말하는 분이 최·채 양씨인 것처럼 나에게는 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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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후자에 있어서는 별반 문제가 남을 것이 없다. 그러나 전자 이씨의 의견은 그대로 하나의 문제를 남지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필자도 이에 즉하여 이야기를 진전시켜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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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씨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기 분화론에서 구체책으로 제안한 것은 비교적 기술적인 것이어서 하루하루 1회분씩 완결에 가까운 것을 써서 종합하여 하나의 장편을 만든다는 것이 입론의 대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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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씨의 의견에는 현재의 작가의 기술이나 역량으론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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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계절을 맞춘다든가 한 회 한 회에 초점을 만들라든가 뉴스를 취급하라든가 하는 비교적 형식적인 신문 소설의 요구보다도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 남아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신문 소설의 근본 사상에 관련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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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의 심문이 범연한 대로 견지하고 있는 것은 우견에 의하건대 상식 도덕의 입지라고 본다. 그것은 물론 여러 가지 내외 조건이 결정하겠지만 광범한 독자 대중의 범박한 입장이 또한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하는 때문이다. 신문 소설은 무엇보다도 이 입장을 싸고서야 전개되어 갈 것이 아닐까. 내지의 신문 소설 왕자격인 국지관(菊地寬)이가 무엇보다도 상식 도덕의 대변자라는 것은 시사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무전린태랑(武田麟太郞), 고견순(高見淳), 아부지이(阿部知二), 또는 산본유삼(山本有三) 등의 순문학파의 제씨가 자기의 개성을 잃지 않고 신문 소설을 썼다고 하여도 그들이 상식 도덕의 권내를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一陰村[일암촌]」의 석천달삼(石川達三)이가 「결혼의 생태」에서 그대로 상식 도덕의 건전한 대변자로 시종한 것도 참고로 할 만하다. 단편 소설의 작가 이태준 씨와 신문 소설가 이태준 씨와는 다수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후자에 있선 이씨는 완전히 ‘어찌하리까?’(가정란의 답변자는 상식 도덕의 대언인〔大言人〕이다)의 담당자이다. 이원조 씨의 『문장』지 5월호의 「상식 문학론」은 다분히 이러한 처지를 고려한 것이나 아닐까? 물론 씨에게 있어선 상식은 ‘상식적인 상식이 아니고 건전한 상식이라고 보아야 하겠으나 그렇게 되면 ‘상식’은 벌써 ‘양식(良識)’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여하튼 비평적 태도 같은 것을 거쳐서 상식 도덕의 굴레를 돌파할 길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으나 근본적인 문학의 변모가 실행되는 장소는 형식적, 기술적인 곳이기보다는 오히려 상식적인 도덕의 경계를 어느 정도로 넘느냐 못 넘느냐의 기점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통속 문학인가, 아닌가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토구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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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9년 6월 23∼25일)
【원문】소설의 당면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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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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