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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보장(保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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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2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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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保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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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날 쑨 팥죽이 여태 식었을까말까 한데(라는 내 엄살도 지독하지만) 편집자는 벌써 봄의 전주곡을 쓰라니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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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12월 28일 소한, 대한이 아직 월여가 남았고, 적이나 입춘이자면 40일은 더 있어야 하니, 이 동안이 오히려 한겨울인 것을 도대체 시방 어서 가서 봄을 사생(寫生)하란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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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왕상(王祥)과 맹종(孟宗)의 효성같이 정성이 있다면 얼음을 뚜드리고 통곡을 하여 잉어(鯉魚)를 얻어, 참대 포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을 쳐 죽순(竹筍)을 얻듯이 나도 조광지(朝光誌)의 독자를 위해 언 땅을 파고 쌓인 눈을 헤쳐가면서 봄을 발견해다가 생색을 한바탕 내도록 할 일이겠지만, 내 본시 끔찍이 나태한 위인이라 도저히 그만한 성의는 나지를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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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부득불 이 구들장이 쩌얼쩔 끓고 앞뒤 문엔 겹겹이 방장을 둘러친 심동(深冬)의 난방 속에 들어앉아 원고지와 몽당 만년필로 봄을 인조해야만 하게 되었으니, 읽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고 생각하면 피차간 못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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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돌연한 소간이 있어 호남 방면을 간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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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서 밤에 떠난 경목선(京木線) 직통열차가 장성(長城) 갈재를 넘을 무렵 해서야 차창 밖으로 부유끄름하니 날이 밝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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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장관의 눈먼 퉁수쟁이 입담마따나) 열아홉 살 먹은 과수가 스물한 살 먹은 딸을 데리고, 아이고 내 신세야 울며 넘었다는 장성 갈재를 차는 세차게 씨근거리면서 달려오르다가 이윽고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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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南水)에 분수령이어서 차가 마악 터널 밖을 나서자 조그마한 개천이 선로를 따라 맑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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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강이 백 년도 꿈쩍 안할 듯이 얼어붙은 것을 보았는데 준령 위의 작은 시내가 얼지 않고 흐르고 있고 어쩌면 해동하는 봄인 듯 반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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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은 시골 나그네더러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건새레 시방 목포를 가면 짐장이 한참이요, 또 제주도에서는 겨우내 채전(菜田)의 배추가 푸르러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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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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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시절에 고 이중화(李重華) 선생께 지리를 배우면서 듣던 이야긴데 “추풍령으로 말하면…… 잘들 들어!……” 하시면서 교탁을 똑또옥 예의 자상스럽고도 재미있는 구변으로 설명을 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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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만 유명할 뿐이 아니라 기상적(氣象的)으로도 조선을 갖다가 남북 두 동강에 잘라놓는 경계선이란 말야. ……턴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편짝 영동(永同)과 저편짝 황간(黃潤)이 판연히 달라! …… 서울서 정월을 갖 쇠고 나서 북악산 바람이 씽씽 불고 한강에서는 한참 제군이 스케팅을 하는데, 처억 경부선을 잡아타고 내려가다가 영동을 지나 추풍령 턴넬을 쑥 빠져나간다 치면 차창에 얼었던 성에가 주울줄 녹아내리고 마을에서는 촌 노파가 무롯을 이고 팔라 다닌단 말야! 응? 벌써 봄이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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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나 선생님의 입담이 구수하고 표현이 리얼하든지 우리는 설명을 듣는 동안 눈앞에 선연히 그 얼어붙은 성에가 흥건하게 녹아내리는 차장 밖 저 마을로 무릇 시루를 인 할머니가 지나고 있는 환영이 보이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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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뒤 실지로 내가 정초에 추풍령을 넘어본 결과는 적시 터널 하나를 사이에 둔 남북의 기온의 차가 현저히 다름을 알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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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독자가 이 글을 대할 무렵해서는 경성등지는 영점하10도니 15도니 하는 혹한일 테건만 바로 건너다보이는 추풍령 저짝에는 벌써 봄이 와서 있을 테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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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제주도쯤이면 언덕의 불탄 잔디에 새 속잎이 엄트기는 세안 일이요, 하마 장다리밭에서 꼬끼오 연계(軟鷄)가 울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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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만약 내가 저 아라비아의 마호멧과 같은 두두룩한 뱃심이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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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아! 일러루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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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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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저편짝의 봄아 얼른 일러루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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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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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봄아 당장에 서울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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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를 것이고, 불러서 오지 않게 되면 역시 마호멧째로 내가 그리로 가고 할 것이지만, 해서 아뭏든지 독자에게 통조림한 봄이라도 구해다가 선사를 하겠지만, 내 영웅이 아니어서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니 무가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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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행 독자 중에 혹시 그 거만한 봄을 불러 대령시킬 영걸이 있다면 어디 좋을 대로 한바탕 권위를 행사해보는 것도 무방하겠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고즈너기 나와 더불어 저기 마당 가로 앙상한 개나리 덩굴에 쉬이 인제 오기는 올 봄을 기다리기나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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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우거의 바로 동편 이웃이 어떤 관청의 청사요, 그 좌우와 앞뒤로 개나리나무가 빙 둘러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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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언 그동안 네 번째 이 개나리 덩굴에서 한적한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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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열흘께 아직껏 물러가다가 처진 찬바람이 훈훈한 봄바람으로 더불어 간간 넘나들던 것도 어느덧 다 가시고 만 그 어림하여 신문들은 다투어 2주일이 남았네 보름이 남았네 춘당지(春塘池)의 네온은 여흥은 무엇무엇이네 해싸면서 이식된 봄의 호화판 창경원의 야앵(夜櫻) 소식을 성급히 타진할 무렵이면 나의 개나리덩굴에는 벌써 노오란 꽃이 만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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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기로는 산의 할미꽃에 따르지 못할 것이고 번화한 품으로는 사꾸라나 복사꽃에 미치지 못할 거야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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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에게는 가까이 그밖엔 화원이 없으니 그걸로써 즐겁고, 한 둘레를 빙 둘러싼 울타리가 노오란 한빛으로 어우러져 핀 개나리가 조촐하나마 노상이 아름다운 축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근천스러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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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와 거진 동시에 집 뒤 용수산(龍峀山) 골짝에는 또한 진달래가 곱게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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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가 온화한지라 온 겨울을 방안에만 칩거하던 준동면(準冬眠)으로부터 해방을 입은 것이 우선 무엇보다도 즐거워 거진 날마다 막대를 이끌고 율림(栗林)으로 용수산의 송림 사이로 소요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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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때로는 진달래를 한 가지 두 가지 꺾어 쥐고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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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꺾음이 야박스런 소행인 줄 모르는 바 아니나 반갑다 못해 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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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을 꺾어 쥐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개나리를 또 탐진 놈으로 한 가지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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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어서 같이 쥐면 노오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가 저절로 순박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풍속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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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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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부터 우리네 할머니의 그 이전부터 봄이면 봄마다 처녀와 새색시네들은 개나리꽃 같은 노랑 저고리에 진달래꽃 같은 연분홍 치마를 입고 새봄을 맞이하여 핀 개나리꽃과 진달래로 더불어 곱게 곱게 봄을 단장해 왔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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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시방은 저어 깊은 촌이나 가야만 볼 수 있는 한낱 옛 풍속이요 겸하여 스러져가는 풍속일 따름이다. 그 스러져가는 그 순박한 봄맞이를 추억 속에서 잠깐 즐김도 노상이 싫지 않은 홍이어서 꺾어 쥔 개나리와 진달래를 정성껏 안두(案頭)의 화병에 꽂아두곤 바라다보기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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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을 뿐이니 소한 · 대한 · 입춘이 지나고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 · 경칩 이렇게 석 달은 있어야 정통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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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봄이 즐겁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추위가 무섭고 걱정스러 어느 겨를에 올 봄을 미리서 즐길 경황이 없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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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변 추위가 무섭고 겨울이 아득할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간절한 법이니 역시 기다리지 않는대서야 거짓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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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뭏든지 이 겨울이 가고 나면 갈데없이 봄이 오기는 오고라야 말겠지 하고서 느긋이 마음을 돌려먹고 기다리는 도리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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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아! 어서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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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너를 맞이하기 위하여 닷 말어치의 술과 일곱 말어치의 떡과 두마리의 도야지와 한 마리의 소와 그리고 오색 과실을 마련해놓고 손꼽아 너를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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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끌어댔었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어서 산이나 봄을 불러오는 요술은 할 줄을 모르는 범인이라 다만 이상의 제물로 커미션을 써가면서 독자를 위해 봄을 유치하기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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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게는 공업용수가 질이 좋고 풍부하니 대공장을 가지고 와서 번영케 하여 주오 하는 시골 읍장님이며 군수영감이며 번영회 회장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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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겨울이 다 가고 첫 90일, 90일이면 시간으로 2천 1백 6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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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눈을 질끈 감고서 그 2천 1백 60시간의 90일 동안만 그동안은 양서류처럼 동면을 하든지 실례지만 곰처럼 굴속에 들어가 어디가를 어쩌든지 또는 스키나 스케이트나 또 혹은 온천여행이나 무엇이고 좋을 대로 택하여 그동안을 보내고 나면 봄은 반드시 제가 오고라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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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기만 오는 날이면 굽 낮은 구두에 멀끔한 노오 스타킹의 다리에 짧은 스커트와 엷은 블라우스에 룩작을 멘 궐녀씨와 어깨를 나란히 북한산으로 혹은 연주대로 하이킹도 즐거울 것이고 속되나마 우이동의 드라이브도 좋을 것이고 잔디 언덕에 퍼근히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가 재미도 있을 것이고 하니 안심코 기다려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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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또 송도엘 쌍지어 찾아온다면 내 집 앞의 개나리와 용수산의 진달래를 꺾어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의 고풍스런 봄을 프레젠트하기를 사양치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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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되 그때에 가서 만약 봄이 오지 않게 되면 세 켤레의 버선 대신 세 대의 뺨을 맞아도 군소리를 않기로 장담과 다짐을 여기에 두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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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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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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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