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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조와 영복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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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2~5
채만식
1
병조와 영복이
 
 
2
천정에 바투 매어달린 전등은 방 주인 병조와 한가지로 잠잠히 방안을 밝히고 있다.
 
3
대청마루에 걸린 낡은 괘종이 뚝떡 뚝떡 하며 달아나는 시간을 한 초씩 한 초씩 놓치지 않고 세었다.
 
4
큰방에서는 돌아올 시간이 아직도 먼 아들을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영복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이따금 콜록콜록 들려나왔다.
 
5
바로 집 뒤에 약현(藥峴)마루를 내노라고 왕자(王者)답게 차지하고 있는 천주교당에서는 벌떼 소리 같은 찬송가 소리가 울려나왔다.
 
6
자정이 지나지 아니하면 그칠 줄을 모르는 경성역의 요란한 기차 소리들은 여전히 어수선하게 야단을 내떨었다.
 
7
그러나 병조는 잠잠히 앉아 철필대만 놀렸다.
 
8
그는 벽에다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거침새없이 내뻗고 앉아서 책상-양탄자를 씌웠으면 값 헐한 중국요리집의 요리상으로 쓰기에 꼭 알맞은 형용만 갖춘 책상-위에 얼른 보기에는 흰 테이블 크로스를 덮은 것 같으나 알고 보면 영복이가 기계과에 있는 덕에 가끔 몇장씩 가져오는 널따란 양지―를 펼쳐놓고 철필을 든 손으로 무심하게 글자를 끄적거렸다.
 
9
내리긋고 건너서 내리긋고 건너긋고 다시 건너그은 날일(日)변에 내리 삐치고 건너서 내리삐친 밑에 입구(口)를 해서 밝을소(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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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으로 내리긋다가 중간을 꺾어서 바른편으로 잡아 긋고 왼편으로 내리삐치고 올라가서 건너삐친 계집녀(女)변에 건너긋고 내리긋고 건너서 내리긋고 건너긋고 또 건너그은 클거(巨)를 해서 계집희(姬)……
 
11
밝은소 계집희 소희 소희 소희……
 
12
그는 소희 두 자만 자꾸만 썼다.
 
13
여기다도 쓰고 저기다도 쓰고 굵게도 쓰고 잘게도 쓰고 왼편으로 비껴도 쓰고 바른편으로 틀어도 쓰고 어여쁘게도 쓰고 투박스럽게도 쓰고 또 모로도 쓰고 하였다―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심하게 철필을 놀렸다.
 
14
이렇게 ‘소희’를 수없이 쓰는 동안에 병조의 얼굴은 표정 연습을 하는 배우의 얼굴같이 각가지로 변하였다.
 
15
황홀도 하여지고 미소도 하고 추렷이 가라앉기도 하고 쌀쌀도 하여지고 침울한 빛도 떠오르고 돌에 새긴 듯한 고민도 보이고 그러다가는 앞서 것들을 되풀이를 하고 하였다.
 
16
네 번을 겹쳐 접어야 사륙판 열여섯 장이 되는 전지 한 장에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이 새까맣게 써놓았다.
 
17
새까만 위에다 그래도 또 쓰고 또 쓰고 하였다.
 
18
실컷 쓰다가는 어찌 주의가 끌렸든지 종이를 뒤집어놓고 ‘소희’라 큼직하게 두 자를 써놓았다.
 
19
그는 흰 바탕에 크고 뚜렷이 나타나는 ‘소희’를 보고 붓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20
“소희…… 소희.” 하고 그는 중얼중얼 혼자서 중얼거렸다.
 
21
“소희…… 일흠은 밝고 쾌활한데 어쩌면 그렇게 사람이……”
 
22
그는 한숨을 후 내어쉬고 재털이에서 마코갑을 집어 한 개 붙여 물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써놓은 ‘소희’만 바라보았다.
 
23
바라보다가 그는 짜증이 나는 듯이 종이를 박박 찢어 싹싹 비벼서 책상머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24
여는 문으로 밀려드는 바깥바람은 으쓱하게 찼다.
 
25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책상서랍 속에서 목탄지와 연필을 꺼내가지고 인물 스케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26
벌써 석 달 동안을 두고 백 번을 그렸는지 이백 번을 그렸는지 모르는 소희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었다.
 
27
인물화 스케치에 특이한 재주가 있고 또 공부도 있는만큼 그는 잘 그릴 줄을 알았다.
 
28
그는 언제인가 점심 시간에 종이쪽에다 ‘골난 곰보주임’이라는 스케치를 하였다가 제본부 구십 명 직공을 허리가 부러지게 웃기고 그 본인인 곰보주임에게는 꾸중을 톡톡히 들은 일이 있었다.
 
29
사각사각 소리가 나며 하얀 목탄지 위에 익단 솜씨의 소희의 얼굴―사진보다도 더 정확하고 섬세한 표정까지 나타난―소희의 얼굴이 도렴직하게 드러났다.
 
30
소곳한 얼굴, 금시 감으려는 듯한 갸름한 눈과 살폿 아래로 처진 눈초리, 얼굴 균형에 꼭 알맞은 코, 보이는 듯 마는 듯한 입모습을 스치는 미소, 그리고 공간이 동그랗고 예쁘장스러운 조그마한 아래턱……
 
31
그려놓고는 옆에다 ‘수줍은 처녀’라고 썼다. 그 옆에다가는 ‘수줍은 소희’라고 썼다.
 
32
그는 다시 낙서(落書)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33
‘소희’라고도 물론 많이 썼지만 그것보다도 체증 있는 사람이 가슴에 막힌 트림을 토해내려고 애를 쓰듯이 그의 마음속에 무겁게 쌓인 답답한 생각을 한 마디 한 마디 써놓았다.
 
34
“어릿광대 어릿광대 나는 어릿광대…… 꿀먹은 벙어리 내종 든 황소 앓듯이 꿍꿍 앓으면서…… 소희 소희 소희 관음보살. 눈을 아래로 내려감고 말없이 앉은 관음보살 소희. 스무 살 먹은 어린애기……인조인간……
 
35
울어야 할 것을 웃어야 할 어릿광대 자존심……
 
36
단념은 하고 잊지는 못하는 마음의 애달픔……
 
37
소희 소희 소희 소희…………
 
38
소희 소희 스핑스 스핑스 속이 멫길? 얼마나 깊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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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시집이나 가지……
 
40
탄다라스 탄다라스 나는 탄다라스 머리 위에 달아맨 고운 과실. 보고도 못 먹는 손을 때려면 달아나는 고운 과실……
 
41
호수(湖水)에 갇힌 탄다라스 탄다라스.”
 
42
병조는 울화가 복받쳐 쓰던 연필로 종이를 싹싹 긋고 벌떡 일어서며
 
43
“탄다라스 탄다라스 내가 왜 미치잖나!?” 하고 부르짖었다.
 
 
44
두 달 전 가을이 아직 얕은 구월 하순 소희가 병조의 생활권내에 들어와 그의 평화롭던 마음을 잡아 흔들어놓은 지 한 달쯤 되는 어느 날이었었다.
 
45
C인쇄소의 삼층 제본실에서는 구십 명 직공의 일백여든 개의 손 구백 개의 손가락이 일푼의 틈과 한초의 사이도 두지 않고 돌아가는 큰 기계의 하구루마의 하나하나처럼 규율 있게 움직였다.
 
46
이층에서 올라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기차의 객차같이 기다랗고 천정이 아치로 된 방이 바른편으로 쭉 뻗쳐 있다.
 
47
가운데는 겨울을 기다리는 스팀 장치가 있고―이 스팀 장치는 겨울에 직공들이 벤또를 데워먹게 하느라고 선반식으로 되었다―그것을 경계로 양편에 널빤지로 아무렇게나 만든 높직한 테이블이 죽 놓여 있다.
 
48
테이블 앞에는 양편으로 설렁탕집 걸상 같은 기다란 널빤지 걸상이 놓여 있다.
 
49
왼편 거리로 향한 창 아래에 와 전부 벽으로 된 바른편 벽 밑으로는 이 인쇄소에서 일을 맡아 하는 여러 가지 잡지와 인쇄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써붙인 문갑 모양으로 생긴 궤짝이 죽 놓여 있고 그리고 바른편 그 벽 위에는 직공들의 가지각색 옷과 모자와 넝마전과 같이 어수선하게 걸려 있다.
 
50
저편 끝으로는 키가 큰 시메기까이(壓縮機[압축기])가 우뚝 서 있고 테이블이 사이사이 떨어진 곳에는 재봉침같이 생겼으면서도 아닌 쓰쓰리기까이(鐵絲綴冊機[철사철책기])와 가가리기까이(裁縫綴冊機 [재봉철책기])가 서너 대쯤 놓여 있다.
 
51
직공들은 왼편 줄에는 전부 남자 직공이 두 줄로 마주대고 앉아서 대개는 소로이(장수고르기)와 도지(책매기)를 하고 있고 바른편 줄에는 남녀 직공이 뒤섞여 두 줄로 마주대고 앉아서 손에 자도막 같은 헤라를 들고, 기계에서 박여 넘어온 인쇄지를 쪽쪽 훑어 접고 있다.
 
52
아침 전기불이 나가기 전 여덟시에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하면 오정 점심시간에 삼십 분을 쉬고 다시 전기불이 켜지는 여섯시까지 꼭 아홉시간 반을 곱다시 방안에서 단조한 일로 보내는 그들의 얼굴은 누구 할 것 없이 그늘에서 자란 풀잎같이 누릇누릇하고 온몸에서는 권태가 흘러넘쳤다.
 
53
그렇다고 조금만 손이 게으르게 움직이면 저편 끝에 앉은 부감독의 지천 소리가 들려오고 들어오는 문 저편에 수령같이 버티고 있는 곰보 감독의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54
오후 다섯시가 되자 불이 켜졌다.
 
55
사분사분한 종이 소리 외에는 별로이 이야기 같은 것을 하는 사람도 없고 바른편 줄에서 누구인가 콧노래로 개성난봉가를 심란스레 불렀다.
 
56
병조는 왼편 줄 여자들 틈에 끼여 앉아 천편일률로 변화로 없고 접어도 또 생기고 또 생기고 하는 인쇄지를 접었다.
 
57
그의 옆에는 좌우로 견습하는 이십전짜리 어린애 둘이 골똘히 헤라질을 하고 있고 맞은편으로는 일상 집에 두고 온 어린것이 배가 고파 울겠다고 팅팅 불은 젖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는 젊은 여직공 그 다음에가 아무리 보아도 뚜쟁이임을 못 속이게 말이며 하는 짓이 천연덕스러운 사십쯤 되어 보이는 여직공 그 다음에가 열대여섯 된 처녀 색시 그 다음에 소희가 앉아 있었다.
 
58
병조는 어젯밤에 써가지고 온 편지를 소희에게 주려고 아무리 아침부터 틈을 엿보았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59
옆에 앉은 어린애를 시켜 밖으로 불러내다가 전하라고 하고도 싶었으나 역시 말이 퍼지면 자기에게야 관계치 않지만 갓 시집온 새색시같이 부끄럼을 타는 소희에게 미안할까 봐서 여섯시에 일이 파할 때를 기다렸다.
 
60
죄수에게 만기 석방의 선고를 하는 듯한 벨소리가 짜르르 길게 울리자 구백 개의 손가락은 일제히 종이에서 떨어지고 구십 개의 입에서는 폐(肺)의 밑바닥에 잠겼던 숨이 일제히 쏟아져나왔다. 남녀 직공들은 다 각기 일어나서 일하던 앞을 대강 치우고 옷에 먼지도 털고 벤또 그릇도 집어들고 두루마기도 입고 하느라고 잠깐 어수선하였다.
 
61
어수선한 이 틈을 얻어 병조는 소희의 옆으로 가까이 가 아무도 보지않게 편지를 주었다.
 
62
소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멈칫하다가 얼핏 편지를 받아 벤또 보자기에다 같이 꾸렸다.
 
 
63
병조는 소희에게 관하여 별로이 아는 것이 없었다.
 
64
다만 그가 원산 태생이라는 것과 몇해 전에 서울로 와서 어느 여학교에 삼년급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영락되어 공부를 계속치 못하고 인쇄소의 여직공으로 들어왔다는 것과 나이는 스무 살, 지금 머물러 있기는 같은 여직공의 집 건넌방, 받기는 일급 육십 전 한 달 평균 십팔 원에서 밥값 십일 원을 주고 나면 칠 원 남는 것을 그래도 공부를 더 하여 보겠다고 사오 원씩 저금을 하려 한다는 것―이 밖에는 더 아는 것이 없었다.
 
65
그러나 병조는 처음 소희를 보는 날부터 어디선지 만난 적이 있고 만났을 뿐이 아니라 퍽 가까이 사귀던 여자인 것같이만 생각이 들었다.
 
66
그는 전에 혹시나 만난 적이 있었나 하고 옛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그렇지는 아니하였다.
 
67
소희는 한 개의 황홀한 존재로서 병조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았다.
 
68
그중에도 제일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귀여운 누이동생을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쁨이었었다.
 
69
그러나 누이동생을 사랑하는 것 같은 기쁨은 다만 기쁨에서 머물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그에게 무긋한 근심을 주었다.
 
70
흔들리기 쉬운 젊은 여자로서 극단으로 생활이 어려울 때에 그의 마음은 자연히 허영을 흠망하게 되며 이 허영을 낚아들이는 전문업자가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발끝에 걷어차이도록 구석구석에서 미끼를 놓고 기다리는 것을 병조는 잘 알고 있었다.
 
71
더구나 병조가 보기에는 소희쯤은 가장 그 낚시에 걸릴 가능성이 많은 여자로만 보였다.
 
72
그는 그의 앞에 앉은 뚜장이를 볼 때에, 매초롬한 사무원이 슬금슬금 제본실에 드나드는 것을 볼 때에 한 달에 이십 원을 넘겨 받지 못하는 몇몇 여직공이 곱게 호사를 하는 것을 볼 때에 소희를 큼직한 손으로 덥석 움켜쥐고 사람이 아니 사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조였다.
 
73
그는 영복이가 일상 묻는 현재 조선의 직업부인과 정조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74
“그것은 지금의 과도기에 있어서는 성적 곽청(性的郭淸)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어느 점으로 보면 밥을 구하러 나선 여자들이 성적으로 많이 유린도 당하고 참담한 저 밑에 떨어져서 그 속에서 피를 품고 내달아오르는 것이 도리어 유리하다”고까지 말하였다.
 
75
그러나 그는 소희만은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지 아니하였다.
 
76
그는 소희를 자기의 다정한 안해로 삼고 싶었다.
 
77
안해를 삼아 그를 사랑하고 그의 정을 받고 싶었다.
 
78
단조하고도 지리한 제본부의 아홉 시간 반이 도리어 그에게는 즐거운 동안이 되었다.
 
79
어서 한바탕 일을 꾸미어 그것으로 인하여 소희가 한푼이라도 더 받아가지고 좀더 생활의 여유가 있도록 하고 싶었다.
 
80
마주 앉아 인쇄지를 접는 소희를 바라보느라면 곧 그저 옆으로 가서 만져도 보고 싶고 이야기도 도란도란 하고 싶고 그리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눈도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희가 자기에게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든가 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편지를 써서 갖다 주었던 것이었었다.
 
81
편지는 이러하였다.
 
 
82
“소희씨
83
나는 이 마음을 억제하려고도 무한 애를 써보았읍니다.
84
그러나 그것은 헛일에 지나지 못하였읍니다.”
 
 
85
(병조가 자기의 마음을―소희에게로 쏠려가는 사랑을 억제하려고 애를 쓴 것은 사실이었었다.)
 
 
86
“이지로써 일단 움돋은 감정을 눌러 없앤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것을 비판을 하고 맹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조종을 할 수는 있으나 절대로 짓밟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87
소희씨
88
나의 마음은 평화로왔읍니다. 소희씨를 보기 전의 나의 마음은 오로지 한 군데 있었읍니다.
89
그러하던 것이 지금은 다른 일에 정신이 없을 만큼 어지러워졌읍니다.
90
사랑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굳세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인 줄이야 과연 생각 밖의 일입니다.
91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너무 오래 끌 수가 없읍니다. 좌우간 소희씨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이대로 더 끌고 나가다가는 ‘싸우려는 의식’ 까지도 마비가 되고 나는 그냥 노라꾸라모노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읍니다.”
 
92
(미상불 병조의 마음은 풀기가 없어지고 그동안 침착하고도 열의있게하며 나오던 ‘일’에 대하여 범연하여진 눈치가 가끔 보이고 하였다.)
 
93
“소희씨
94
나는 소희씨를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환영(幻影)을 봅니다.
95
그것은 소희씨가 컴컴한 길을 더듬어가다가 발을 헛디디어 더러운 진구렁에 빠져 온몸에 숭어운 흙칠을 하여가지고 어쩔 줄을 몰라 두 손을 휘저으며 부르짖고 있는 광경입니다.
96
나는 한걸음 앞서 걸은 만큼 소희씨를 안내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97
그러나 결코 이것을 미끼로 사랑을 얻으려는 야틈한 생각은 아닙니다. 그것은 딴 문제입니다. 소희씨가 ‘노’라고 대답하더라도 나는 소희씨의 안내역만은 충실히 하여 드리겠읍니다.
 
98
소희씨
99
또 나는 결코 내가 소희씨를 사랑한다고 소희씨도 나를 ‘억지로’ 사랑하여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100
사랑이라 하는 것은 결코 하고 싶어하고 하기 싫어 아니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101
그렇게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 같으면야 세상에 사랑의 갈등이 있을 리가 있겠읍니까.
102
나는 다만 소희씨에게 물읍니다. ‘예스’인지 ‘노’인지.
103
세상에는 저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매어달려 사랑을 구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없는 사랑이 생길 리도 없겠지만 저편이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겠지요. 동정은 사랑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104
소희씨
105
더 길게 쓰지 아니하겠읍니다. ‘예스’라고 대답하시면 우리는 그 다음 문제를 생각하겠고 ‘노’라고 대답하시면 나는 아싸리하게 단념하겠읍니다.
106
좌우간 나는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107
여기까지 끝을 마치고 병조는 추기로
 
108
“오늘 여덟시쯤 해서 계신 곳까지 찾아가서 말씀을 듣겠읍니다. 어쩐 일인지 편지 답장보다 말로써 듣는 것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혹 내가 소희씨를 방문하는 것이 불쾌하시다면 저녁 후에 잠깐 다른 데 놀러가시고 아니 계시면 그만일까 합니다.” 라고 써두었다.
 
109
이 말은 무슨 생각으로 썼던지 병조 자신도 그후 이내 알지를 못하였다.
 
 
110
일곱시 반이 되는 것을 보고 병조는 하숙을 나섰다.
 
111
약현 천주교당을 뒤로 두고 컴컴한 골목길을 지벅지벅 빠져 봉래정 큰 길로 나섰다.
 
112
그는 왼편으로 해서 봉래교를 건너 전차길을 따라서 서대문 편으로 향하여 가다가 서소문정 파출소 앞에서 불란서 영사관 가는 길로 꼬부라져 들어갔다.
 
113
그는 정신없이 분잡한 거리를 지나오면서도 아무것에도 주의를 할 틈이 없이 생각만 골똘하였다.
 
114
‘대관절 소희가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
 
115
‘노?’
 
116
‘예스?’
 
117
‘예스겠지…… 아니 노일지도 몰라…… 그러나.’
 
118
집은 찾기가 쉬었다.
 
119
컴컴하여 잘 보이지 아니하나 오래 된 오막살이 초가집이었었다.
 
120
그는 지친 문을 밀치고 들어서서
 
121
“여보세요” 하고 불렀다. 소희가 나오나 하여 가슴이 두근두근하여졌다.
 
122
“누구요?” 하고 안방에서 안노인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인쇄소에 같이 다니는 여직공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123
“여기 저 인쇄소에 다니는 소희라구 있어요?”
 
124
“네, 나갔소.”
 
125
병조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126
그는 한심한 희망을 가지고
 
127
“아직 아니 왔어요? 저녁을 먹구 나갔어요?” 하고 물어보았다. 아직 아니 왔다면 편지도 아직 보지 아니하였을 터이니까…… 하는 생각이었었다.
 
128
그러나 대답 소리는 너무도 똑똑하게 들려나왔다.
 
129
“와서 저녁 먹구 우리애허구 나갑디다.”
 
130
병조는 쫓겨나는 것처럼 허둥지둥 그 집을 달아나왔다.
 
131
그의 머리속에는 다른 생각은 없고 편지 끝에 “만일 내가 찾아가는 것이 불쾌하시다면 저녁 후에 잠깐 다른 데로 놀러가시고 아니 계시면 그만일까 합니다”라는 구절만이 뚜렷이 떠올랐다.
 
 
132
병조는 마치 파렴치죄의 폭로를 당한 사람이 많은 군중의 조소와 손가락질을 뒤통수에 받으며 쫓기어가는 것같이 얼굴이 화틋거렸다.
 
133
편지 끝에 써둔 그 말만 아니었더라도 그다지 무렴하고 노엽지는 아니하였을 것이었었다.
 
134
도대체 편지를 하는 사람이 자청하여서 “불쾌하면…… 피하고 만나지 말라……”고까지 한 것을 설사 불쾌하여서 만나지 아니할 생각이 났다고도 차마 못할 일인데 그야말로 동냥도 아니 주면서 바가지조차 깨어쳐버린 셈이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는 그저 얼굴을 덤쑥 싸고 땅속으로 푹 들어가 파묻혀 버리고 싶었다.
 
135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소희와 그리고 자기의 머리속에서 이날 밤의 그 불쾌하고 부끄러운 기억을 없었던 것과 같이 싹싹 씻어 없애버렸으면 금시로 코가 우뚝 솟아오를 것 같았다.
 
136
그는 소희를 한껏 미워하고 또 방금 그 옆에 소희가 있다 하면
 
137
“모욕으로 사랑을 거절하지 아니하면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침통하게 부르짖어 주고 싶었다.
 
138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불쾌한 일을 당하였고 또 미워를 하고 싶으면서도 문득 소희의 얼굴이 머리속에 뚜렷이 떠오르자 도리어 그리운 생각이 나며 뼈에 사무치게 마음이 적막하였다.
 
139
“못생긴 바보녀석!”
 
140
병조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비웃고 저주하였다.
 
141
그는 바른편 뺨을 맞고 왼편 뺨을 내어미는 ‘못생긴 짓’이 자기 손으로 자기의 볼퉁이를 쿡 쥐어지르고 싶게 밉살머리스럽고 짜증이 났다.
 
142
“오냐 버젓하게 단념을 한다.”
 
143
이렇게 그는 소리쳐 부르짖고 걸음을 빨리하여 집―하숙집―으로 돌아갔다.
 
 
144
이튿날 아침.
 
145
병조는 천근이나 무거운 손으로 삼층 제본실 문을 열었다.
 
146
그는 소희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147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다른 직업을 구하여 편하게 살아가든지 또 다른 공장으로만이라도 자리를 옮겨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것은 눌리고 눌리면서도 앙탈을 부리는 ‘방자한 감정’이요 필연의 힘은 그를 몰아 아침 여섯시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벤또 꾸러미를 옆에 끼고 영복이와 같이 인쇄소를 향하여 가게 하고 삼층 제본실의 문을 열게 하고 헤라를 들고 인쇄지를 접게 하고 기회를 만들어서 이층 기계실과 문선으로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게 하였으며 소희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심한 위안을 얻었다. 병조가 마침 문 안에 들어서면서 벨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쟁그럽게 울렸다.
 
148
그는 자리에 앉아 위선 소희 먼저 보았다.
 
149
평소에도 고개를 잘 들지 아니하는 그라 다른 사람들이야 몰랐겠지만 병조가 보기에는 확실히 머리를 거북하게 숙이고 있고 상기된 얼굴빛도 안날 밤에 그와 같은 냉랭한 소조를 하였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줍은 흥분이 보였다.
 
150
병조는 그것을 보매 무엇인지 모를 잔인한 장난이나 한 것같이 민망하였 다.
 
151
그러나 소희가 맘에는 한편으로 자기를 비웃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금시로 어깨가 오므려지고 얼굴이 마주치지 아니한 것만 다행으로 얼핏 고개를 숙여버렸다.
 
152
점심때에 소희는 다른 직공들의 눈을 피하여 겉봉을 쓰지 아니한 편지를 병조의 옆에 놓았다.
 
153
편지? 병조는 놀랐다.
 
154
소희가 새삼스럽게 편지―답장―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요 병조로서는 그 편지의 내용을 보지 않고도 잘 알 만한 것이었었다.
 
155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뜯어보려고도 아니하고 그냥 집어두었다.
 
156
오후가 되어 병조는 그래도 궁금한 생각에 혹시 어젯밤의 일에 대한 변명이나 있을까 하고 한편 구석으로 가서 편지를 뜯어보았다.
 
157
그러나 그러한 말은 싹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158
“별로 말씀으로써 대답을 할 것까지도 없을까 합니다. 그저 간단하게 저는 ‘무관심’합니다.”
 
159
병조는 여기까지 읽고 나서 갑자기 부는 찬바람에 치인 것같이 몸을 으쓱하였다.
 
160
편지의 글자 획에서는 겨울날 나뭇가지를 스치는 찬바람과 같은 쌀쌀한 기운이 떠돌았다.
 
161
“그러고 저의 앞길에 대하여 그만큼 근심을 하여 주시니 감사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기우일 것 같습니다.
 
162
저는 편협한 소견에 도리어 모욕을 느낍니다.”
 
163
병조는 깜짝 놀랐다.
 
164
모욕?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는 그동안 자기가 소희에게 대하여 온 일 중에 얕보아서 모욕을 하거나 또 자기가 한 편지의 문구를 되풀이하여 생각하여 보아도 그렇게 한 기억은 나지 아니하였다.
 
165
그러나 병조는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166
병조가 소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병조 자기에게만 그친 일이었었지 소희는 그야말로 길을 걸어가다가 마주치는 사람을 무심히 보고 지나듯이 ‘무관심’한 터이었었다.
 
167
그러므로 혼자서 속을 태우고 남의 근심을 하여 타락이 되느니 어쩌느니 한 것이 소희로서는 모욕을 느낀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었었다.
 
168
그날 밤에 병조는 또다시 소희에게 줄 편지를 썼다.
 
169
단념하겠다고 결심을 하였으니까 문제는 낙착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소희가 모욕을 받았다고 분개―문투에 분하다고 씌어있지는 아니하였으나―하여 하는 것을 변명치 아니하여서는 아니 될 것같이 여겼던 것이었었다.
 
170
그는 여러 가지 말을 편지에 쓰고 싶었다―무엇보다도 모욕이라는데 대하여 자기가 소희를 모욕하였다는 것보다 소희가 자기를 모욕한 것이라고 쓰고 싶었다.
 
171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추근추근한 것 같아서 다만 간단하게 썼다.
 
172
“고맙습니다.
 
173
나도 ‘앗사리’하게 단념하겠읍니다.
 
174
그러고 내가 소희씨를 모욕하였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신가 합니다. 추호라도 소희씨를 업수이 여기거나 한 생각은 없었읍니다.
 
175
그랬건만 나타난 결과가 소희씨로 하여금 모욕을 느끼게 하였다면 얼마든지 사과를 합니다.
 
176
다만 나의 본심만은 그렇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177
대저 자기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을 모욕할 수도 있을까요?
 
178
그리고 나는 이 일이 있음으로 해서 소희씨에게 조금치라도 섭섭한 생각을 가진다거나 반감을 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179
소희씨는 평탄한 마음으로 이제부터라도 대하여 주십시오.
 
180
피차에 거북한 생각을 가지고 매일 서로 낯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읍니까.
 
181
나는 지금까지 가졌던 감정과는 다른 감정―소희씨가 여자라는 관념을 초월하여 다만 가까운 친구로서 나아가서는 동지로서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182
따라서 자주 방문도 갈지 모르겠읍니다.
 
183
소희씨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4
이튿날 소희가 또 답장을 써가지고 와서 병조에게 주었다.
 
185
그 내용은 자기가 하필 명백하게 모욕을 느끼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러한 기분이었다는 것과 물론 자기도 병조와 같은 평탄한 마음으로 병조를 선진으로 여겨 그 지도를 받으며 동지로서 친하게 지내가겠다는 의미의 것이었었다.
 
186
그야말로 병조의 편지나 소희의 답장이나 의젓하고 엄전스러운 것이었었다.
 
187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가면―가면이라면 의미가 무겁고 연극이었었다. 연극의 시초이었었다.
 
188
미상불 병조는 소희를 단념은 하였다.
 
189
그러나 단념한 것만으로는 문제는 표면뿐이지 내용에 가서는 사라지지 아니하는 실마리가 뒤엉클어져 끌리어나갔다.
 
190
병조는 전과 같이 쾌활하였다. 도리어 그는 전 이상으로 쾌활하여졌다.
 
191
그것은 침울하여지는 자기의 감정을 소희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보인다면 자존심이 또다시 소희에게 짓밟힐 터이므로) 애써 애써 과거를 잊은 것같이 가장하고 쾌활하게 지내었다.
 
192
이 연극이 병조에게는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한 일이었었다.
 
193
더구나 소희의 태도가 매우 이상하였다.
 
194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다소간 병조의 선입감도 있기 때문이겠지만) 소희가 자기를 꺼리어하는 것같이만 보였다.
 
195
병조가 하는 말에는 각별히 조심을 더하고 마주칠 때나 지나칠 때면 마치 마음속에 자기를 해하려는 사람의 눈치를 짐작한 사람이 저편을 경계하며 몸을 사리는 것같이도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몹시 불쾌한 반감을 가지고 마지 못하여 흔연히 대어를 하는 것같이도 보였다.
 
196
이것이 병조에게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요 견디기 어려운 침묵의 고통이었다.
 
197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오던 연극을 그만두고 실연의 호소를 하여 버리자니 어리석기가 짝이 없을 터이고 또 소희더러 왜 그러느냐고 따지어 묻는 것도 쑥스러운 노릇이고……
 
198
제일 좋은 방책은 소희를 보지 아니하는 것밖에는 딴 도리가 없는데 그러자면 인쇄소를 나가 버려야 하겠고 나가자니 입때껏 하여 오던 일이 수포에 돌아가고 동지에게 대한 반역이니 설령 소희로 인하여 미치는 한이 있다더라도 아직 공장을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었다.
 
199
이것이 병조와 소희 사이에 생긴 지난 이야기요 현재의 감정상태의 간단한 설명이다.
 
 
200
병조는 소희의 얼굴 그린 종이를 박박 찢어 싹싹 비벼서 문 밖으로 내던지고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서성하였다.
 
201
소희에게 관한 생각이 머리속을 차지하고 들어앉았기 때문에 다른 일에는
 
202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였다―팜플렛도 조직도 계획도―
 
203
끝을 모를 듯이 기나긴 가을밤도 깊어가기 시작하였다.
 
204
남대문역에서 열시에 떠나는 남행 급행차가 우렁찬 소리로 사납게 울었다.
 
205
병조는 마루로 나가서서 성냥불을 그어대고 낡은 괘종을 비춰보았다.
 
206
언제 열시를 쳤는지 벌써 삼십 분이 지나갔다.
 
207
“이 영감 또 망녕이 났군.”
 
208
병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시간을 맞추어 놓으려다가 내키지 아니하여서 속으로 삼십 분이 더 가느니라고 유념만 하여 두었다.
 
209
이 집 사람과 열세 해째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이 낡은 괘종이 요즈음 와서는 망녕이 났는지 며칠에 한번씩은 정해놓고 병조와 영복이로 하여금 인쇄소의 출근기록표에 지각을 달게 하지 않으면 미처 시간도 되기 전에 혀가 빠지게 쫓아가도록 심술을 부렸다.
 
210
병조가 도로 방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에 안방에서 영복의 어머니가 꼬부러진 허리로 기엄기엄 기어나왔다.
 
211
“박서방이요? …… 이애는 웬일이요? 열시 친 지가 까만디.” 하고 그래도 시계를 보기나 할 듯이 컴컴한 대청 구석을 굽어다보았다.
 
212
인쇄소에서 밤일을 하는 줄만―병조가 먼저 돌아와서 그렇게 말을 하였으니까―알고 열시 되기를 고대고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었다.
 
213
병조는 퍽도 마음에 민망하였다.
 
214
실상 말하면 자기도 영복이와 한가지로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여야 할 것인데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를 하고 집안에 들박혀 앉아서 동지가 찾아오면 겨우 말대꾸나 하여 주고 비라 문구나 가르쳐 주곤 하였다.
 
215
소희와의 알력이(?) 생긴 뒤로는 그는 완연히 ‘전날의 병조’가 되어버린 느낌이 없지 아니하였다.
 
216
그것이 병조에게서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한 묵은 피를 활활 토해버리고 싶게 자기 증오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었다.
 
217
사실 그것은 피였었다.
 
218
그리고 모태(母胎) 적에 받은 피요 본능이 되다시피한 ‘현재의 병조’ 이전 이십여 년간 걷고 쌓아온 습관이었었다.
 
219
이 피와 이 본능은 기회가 있는 때마다 성적 방면으로 명예욕으로 안락으로 병조의 굳세게 움켜쥔 이데올로기를 잠식하려 하였다.
 
220
그것이 최근에 이르러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었다.
 
221
“네, 인제 오라잖애서 돌아오겠지요. 나오지 마시구…… 치운데 방으로 들어가세요.” 하고 병조는 노인을 부축하여 큰방으로 들어갔다.
 
222
아랫목에는 노인의 이부자리가 도닥도닥 펴놓였고 웃목에는 유지로 덮은 영복의 저녁상과 화로에 놓인 된장찌개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223
영복의 어머니가 시집올 때에 가지고 왔다는 투박하게 생긴 장롱은 매일 닦이는 덕으로 이 방안의 생김새와 달리 말쑥하였다.
 
224
앞 밀창문으로는 새까맣게 그은 네폭 반병(半屛)이 돌려 쳐 있고 그 앞에 큼직한 사기요강, 담배 서랍, 나무 재털이, 수수깡으로 만든 등긁기, 대통에 노랗게 진이 밴 담뱃대가 놓여 있었다.
 
225
“날이 갑자기 치워졌구려……” 하고 노인은 이부자리를 조금만 걷고 팔찌를 끼고 쪼그려 앉았다.
 
226
병조도 방바닥에 가 퍼근히 앉았다.
 
227
“네…… 원체 그새 춥질 안했으니까요…… 동지가 얼마 안 남었는데두……”
 
228
“허긴 그래…… 나무가 없어서 불을 많이 넣지 못해서…… 방이 과히 차지나 안허우?”
 
229
“웬걸요 따뜻해요.”
 
230
“그러나저러나 날이 이렇게 치워오는디 겨울날 일이 태산 같구려……”
 
231
“글쎄올시다 큰일입니다.”
 
232
노인과 병조는 다같이 한숨을 내어쉬었다.
 
233
나이는 인제 갓쉰이라는데 칠십이 넘은 것같이 머리가 희고 얼굴에 고생의 갈기갈기를 새긴 듯이 온통 주름살이 잡힌 이 노인을 유심히 보는 때마다 병조는 한숨이 저절로 흘러져 나왔다.
 
234
겨우 쉰 살에 허리가 꼬부라지도록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건만 다섯을 다 잃어버리고(이 자식을 잃은 것이 그로 하여금 훨씬 더 겉늙게 한 원인도 되었다.) 겨우 영복이 하나만 데리고 가난에 끌려 하루 이틀을 목숨을 부지하여 나가는 정상은 이 세상의 가장 골똘한 가난을 표증하는 표본이라고 보기에 마침 알맞았다.
 
235
더구나 영감의 앞에서 죽는 것이 늙은 여인에게는 좋은 팔자의 하나라고 치는데 영감조차 그의 앞에서 죽었으니 이 노인의 험한 팔자는 기구할 대로 기구한 편이었었다.
 
236
노인은 담뱃대에 한 대 꼭꼭 눌러넣어서 웃목 화로불에다 뻑뻑 붙여물고 다시 자리로 와 앉으며 탄식을 하였다.
 
237
“세상에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가난허게만 쌀라는 팔잔지……”
 
238
병조는 무어라고 말대답을 할 말이 없었다.
 
239
“석탄두 좀 사야지…… 이애나 내나 통 겨울옷(冬衣[동의])이 한 벌두 없으니……”
 
240
“옷이 그렇게 통히 없어요?”
 
241
“없지.”
 
242
“작년 겨울엔?”
 
243
“작년 겨울에야 웬 입을 걸 입었나……남 같으면 발써 누데기 장사가 가져갔을 건디……”
 
244
병조는 속으로 이 집안의 예산을 따져보았다.
 
245
‘쌀값이 팥과 양쌀까지 합해서 십 원이 좀 넘을 것이고 집세가 십일 원 함흥탄을 반 돈만 들여온다면―잘해야 두 아궁이에 두 달도 못 땔 것―십 원 치고……하면 삼십 원이 넘는데 수입은 영복이가 받는 것이 이십칠 원쯤 하고 내가 내는 것이 십삼 원 해서 사십 원…… 삼십 원을 제하고 나면 십 원이 다 못 남는데 전기불값 반찬값 무엇무엇……하고 나면 겨울옷은 통 어림이 없는데……’
 
246
노인은 한참 동안 담배만 입을 합족거리며 뽁뽁 빨다가
 
247
“여보 박서방.” 하고 긴하게 불렀다.
 
248
“네?”
 
249
“공장에…… 박서방 있는 방에 말이요 그 처녀 색시들이 많다지?”
 
250
“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병조는 노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251
“웨 물으세요?”
 
252
“많이 있다니 그중에 얌전헌 색시 하나 없소?”
 
253
“글쎄올시다…… 웨 그러세요?”
 
254
병조는 눈치를 벌써 짐작은 하였으나 나오는 말끝에 물어보았다.
 
255
“있으면 우리 영복이……”
 
256
“허허허허……”
 
257
병조는 과연 우스웠다. 우습다는 것이 가소로와서 우스운 것이 아니라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것처럼 노인의 허황된 희망이 우스웠다.
 
258
방금 겨울 날 옷이 없고 그나마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흉내를 내는 것이지 결코 사는 맛으로 살아가는 터이 아니면서 그래도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는 노인의 한심한 희망이 우습다 못하여 나중에는 피가 나게 애처로왔다.
 
259
“며느리를 보시구 싶으신갑습니다그려?”
 
260
“보구 싶은 것두 보구 싶은 것이지만 그애가 지금 나히 발써 스물둘인디
 
261
그래두 이 어미 생전에 장가나 들어놓아야지…… 그러다가 총각으로 늙기나 허면 어떻게 허우?”
 
262
“그것두 그렇습니다마는……”
 
263
병조의 눈치를 알아챈 노인은
 
264
“허기야 지금 이 형편에 규수가 있은들 무슨 수루 혼인을 지낼 수가 있겠소만……” 하고 변명을 하였다.
 
265
“그러면 지금 규수를 골라본들 무엇헙니까?”
 
266
“그두 그렇지만…… 우리라구 영영 이렇게 못살란 법이야 있겠소? 인제 한때는……”
 
267
병조는 이제 앞으로 몇해 후가 될지 모르는 ‘한때’를 속도 모르고 믿는 노인의 마음이 한심하였다.
 
268
물론 노인의 믿는 ‘한때’는 운명에 맡겨 다행히 수가 터져가지고 잘살게 된다는 그 ‘한때’였었다.
 
269
그러나 그들에게 그 ‘한때’가 오기에는 너무나 뻔한 사정이 병조의 앞에 내어다보였다.
 
270
그렇다고 병조는 노인에게
 
271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는 ‘한때’가 오기 어렵고 ‘한때’가 올 세상이 뒤집히자면 아직 멀었읍니다”고 할 수는 없었다.
 
272
‘한때’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은 이 노인의 다시 없는 크나큰 희망이요 즐거움이었던 까닭이다.
 
273
“글쎄 눈익혀 보기는 허겠읍니다마는 별로이 마땅헌 자리두……” 하면서 병조는 소희를 생각하여 보았다.
 
274
자기는 이미 소희에게서 절망을 당하였으나 영복이는 관계치 아니할 듯도 하였다.
 
275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매 한편으로는 갑자기 마음이 섭섭하였다.
 
276
소희가 멀지 아니한 장래에 여자로서의, 아니 사람으로서의 한번 밟을 길을 응당 밟게 될 것이요, 또 차라리 어서 바삐 그렇게 되어서 누구일지는 모르나 그들 둘이서 나란히 짝을 지어가지고 정다운 보금자리를 만들기를 마음 한편으로 바라고 있는 터이었으며, 그렇게 되고 나면 자기의 마음도 도리어 가라앉으리라고 생각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면서도 소희와 영영 남이 되는 경계선에 이르른다는 생각에는 깊은 비애를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277
열한시를 치는 소리가 막 떨어지자 지쳐둔 판자문 삐그덕 열리며
 
278
“어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279
언제나 집에 돌아올 때면 들리는 영복이의 쾌활한 목소리였었다.
 
280
노인은 귀가 번쩍 띄어
 
281
“오냐 인제 오니!” 하고 허둥지둥 마루로 나갔다.
 
282
그 말 그 태도는 마치 품 안에 든 어린아이를 가축하는 듯이 알뜰하였다. 병조도 밖으로 나왔다.
 
283
“인제 오우? 애썼소.”
 
284
“천만에…… 자, 이건 못 전했어.”
 
285
영복이는 가지고 온 신문지에 꾸린 것을 병조에게 주고 마루에 걸어앉아 신발을 벗었다.
 
286
“어서 들어가서 밥 먹어라. 오직이나 시장했겠니……”
 
287
“밥이요? 먹었어요…… 저……”
 
288
“먹었어? …… 잘했다 시장헌디…… 암 먹어야지.”
 
289
“밥상 치우세요.”
 
290
“오냐…… 저, 찌개두 따뜻헌디 더 먹어라.”
 
291
“웬요, 생각없어요.”
 
292
“좀 먹지……?” 하고 병조가 권하였다.
 
293
“아니, 생각 없어요.”
 
294
병조와 영복이는 건넌방으로 들어가고 노인은 큰방으로 들어갔다.
 
295
노인은 찌개 그릇을 화로에서 내려놓느라고 따그락따그락하면서
 
296
“이애야 원, 날마다 일이 그렇게 고돼서 어떻게 허니 원!” 하고 걱정을 하였다.
 
297
“허허 어머니는 별걱정을 다 허십니다. 일이 많으면 돈을 많이 벌으니까 좋지 안해요.” 하고 영복이는 속을 모르는 어머니를 보라는 듯이 병조에게 눈을 찌끗하였다.
 
298
병조는 따라서 웃기는 하나 속으로는 민망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299
“허기는 그렇다만…… 이애야 너무 그러다가 또 병이나……”
 
300
“원 참…… 가만히 기십시요 어머니…… 인제…… 내가 돈을…… 네 어머니.”
 
301
“오냐, 어서 부즈런히 많이 벌어라.”
 
302
“벌구말구요…… 허허허허……”
 
303
병조도 유쾌하게 따라 웃었다.
 
 
304
(此間[차간] 16行略[행략]-原註[원주])
 
 
305
영복이는 무엇 짐작한 것이 있는 것같이 그러고 근심이 되는 것같이 다정하게 물었다.
 
306
병조는 모든 이야기를 하고도 싶었으나 내내 속여온 것이 부끄러워서 차마 입이 열리지 아니하여 시치미를 떼었다.
 
307
“아니……”
 
308
“글쎄……? 내가 잘못 생각인지는 몰라두 이렇게 저…… 쾌활허게 웃구 그러면서 그래두 어떻게 ‘봉야리’허니 무엇을 생각하는 것두 같구…… 그러구 저…… 혼자 있는 때를 가만히 보면 코가 숙 빠진 것같이……”
 
309
병조는 영복이에게 속을 달칵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오는 것을 웃음으로 흐려버렸다.
 
310
“허허허허.”
 
311
이 웃는 것을 보고 영복이는 병조가 항복하는 뜻으로 알고 더욱 따져 물었다.
 
312
“거봐요. 내가 옳게 짐작했지?”
 
313
“무어이 옳게 짐작했다구 그래? 괜히……”
 
314
“하하하하…… 그렇지만 여보, 나는 아무리 생각해두 ‘우리’한테는 비관이란 건 없다구 생각허는디……? 언젠가 박서방이 헌 말이 아니요? 염세증이나 비관 같은 것은 일부 개인주의자가 받는 벌(罰)이라구…… 우리의 앞길에는 필연이 있으니까 우리 노력할 뿐이라구……”
 
315
병조는 속마음으로 ‘사람의 정(情)도?’ 라고 부르짖고 싶었으나 그저 태연히
 
316
“그렇지.” 하고 대답하였다.
 
317
“그런디 내가 경험헌 것을 보아두 꼭 그렇거던요…… 내가 열팔구세 스물한둘 그때는 그저 생각이라는 게 나 하나밖에 더 있었나 어디…… 아무것두 모르는 무식허구 돈 없구 그저 날마다 공장에 가서 고된 일이나 허구…… 이렇게 생긴 나를 가만히 생각헐 때 말이지 응. 이거 원 나두 사람인가? 무얼 바라구 세상을 사누? 이 짓을 한평생 헌들 한때 배부른 밥을 먹을 수가 있을 텐가? 남처럼 계집을 얻어 살음살이를 허구 자식새끼를 낳구 살어를 갈 텐가? …… 이렇게 생각을 허면 한숨이 절루 나구 정신이 아득허지…… 명색두 없구 그저 길바닥에 흘린 돌뗑이처럼…… 그래서 자살까지두 허랴구 했지…… 언젠가 왜 이야기 아니헙디까? 네꼬이라쓰까지 사다가 놓군 어머니를 생각해서 차마 못 먹었다구……”
 
318
“응응…… 그래서……”
 
319
“그러다가 박서방을 만나서 차차 생각이 달러져 가지군…… 이것 봐요, 무엇보담두 ‘하하 인제 보니까 너이들 덕에 우리가 사는 게 아니라 우리들 덕에 너이가 사는구나…… 너이는 없어두 우리만 있으면 세상은 되여가는구나…… 그러니까 인젠 우리가 주인이 될 차례로구나……’ 이것을 깨달으면서부터는 그전에 가졌든 생각은 아주 뭣 싹두 없어…… 마음이 아주아주……”
 
320
“턱 뇌이구 보는 것이 희망이 차 보이구……?”
 
321
“그래그래…… 지금은 좀 고생해두 괜찮다. 자, 이걸 봐라, 지금은 가을이니까 날이 그래도 따듯허지만 겨울이 오면 싫여두 헐 수 없이 눈이 오구 날이 칩고 허는 법이다…… 이렇게 배가 쑥 나오구…… 또 가다가 어려운 일에 닥뜰리더래두 물론 우리의 활동하는 일 말이야, 닥치는 거기가 아주 꽉 맥힌 데가 아니라 우리가 뚫으면 뚫어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니까 걱정쯤은 되지만 비관은 없어…… 그렇지? 아니 그러우?”
 
322
병조는 머리를 몇번이나 끄덕거리며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323
그의 마음은 죽도록 부끄러웠다.
 
324
자리를 펴고 누워 영복이는 신문을 보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잠이 들었다.
 
325
그러나 병조는 밤을 온꼿 새웠다. 밤을 새우며 생각을 하였으나 아무 이렇다는 해답은 얻지 못하였다.
 
326
어떻게라도 귀결을 지어버리고 싶은 소희에게 대한 문제는 결국 어찌할 수 없이 ‘때’에 맡겨 미련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시는 도리가 없었다.
 
 
327
이튿날 새벽.
 
328
시계가 일간다고 유념하였던 것을 잊어버리고 병조와 영복이가 인쇄소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아직 일곱시 반도 채 못되었었다.
 
329
이층에서 영복이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병조는 삼층으로 올라갔다.
 
330
제본실에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아니하였었다.
 
331
병조는 스팀에 기대어 오늘은 소희를 보고도 마음을 편안히 먹으려니 단단히 단단히 가슴을 가다듬고 있는데 마침 문이 드르르 열리며 소희가 쑥 들어섰다.
 
332
소희는 열고 들어온 문을 닫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병조와 눈이 마주치자 나풋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333
병조는 얼결에
 
334
“어서 오십시요 칩습니다.” 하고 두어 걸음 소희에게로 걸어왔다.
 
335
“저, 아직 아무두 안 왔구면요?”
 
336
“네.”
 
337
소희는 머뭇머뭇하다가 문을 도로 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338
병조는 얼굴이 화끈 달았다.
 
339
그의 눈에는 소희가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
 
340
그는 소희의 앞을 가로막아 서서
 
341
“대관절 여보!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호랭이요?” 하고 침통하게 부르짖어 보고도 싶었다.
 
342
그러나 그는 돌이켜 생각하였다.
 
343
남이 수상히 여길까 봐서 그러는 것이겠지……라고.
 
344
이렇게 그는 자기를 속임으로써라도 터질 듯한 가슴을 겨우겨우 가라앉히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345
오정이 거의 되도록 병조는 마음을 다뿍 토라뜨려 가지고 옆을 바라보지 않다가 어찌해서 주의가 누그러진 사이에 소희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346
그는 깜짝 놀랐다.
 
347
소희는 분을 바르고 왔었다.
 
348
아니 바른 것같이 바르느라고 살풋 헤치기만 하였으나 그래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었다.
 
349
‘자연이 시킨 것이냐? 어느 한 사람 때문이냐?’
 
350
이 의문에 병조는 해답을 얻지 못하고 애만 태웠다.
 
351
점심 시간에 저편 구석으로 가서 여러 사람과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까 평소에 몹시 까부는 직공 하나가
 
352
“소희가 오늘 분을 바르구 왔더라 히히.” 하고 웃었다.
 
353
그 말을 따라 여러 소리가 뒤를 이어 나왔다.
 
354
“숩내낸 게지……”
 
355
“젠들 어느 장사놈의 계집애든가……”
 
356
“못쓸걸……”
 
357
“못쓰긴 왜? 좋지……”
 
358
“진작 시집이나 가지……”
 
359
“생각이 다른 모양이로구나……”
 
360
“아서라 우리 방 꽃이다.”
 
361
“중매허게……”
 
362
“쑬쑬해…… 하룻밤 친구로는……”
 
363
만일 비유를 한다 하면, 소희는 예루살렘, 여러 직공은 마호멧교도, 먹으려던 점심을 덮어치우고 이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병조의 감정은 십자군……
 
364
공장 저편 기계부에는 영복이가 부리는 다까다이(高臺[고대] : 인쇄기계의 큰 놈) 옆에 여럿이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365
이 자리에는 언제든지 같은 얼굴이 모였다.
 
366
그 얼굴들은 영복이와 병조의 ‘이야기’로 얻어진 이 공장 안에서 가장 정예한 ××××들이었었다.
 
367
따라서 이 자리는 ××××의 격이 되어 있었다.
 
368
병조가 안색이 좋지 아니하여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은 ― 더우기 영복이는 무엇을 찾아보려는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369
“발써 먹었소?” 하고 한옆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370
“응.”
 
371
“앉으시요.”
 
372
병조는 낡아빠진 골덴 바지에 손을 넣고 몸을 흔들흔들하다가 비켜주는 곳에 가 내키지 않게 펄씬 앉아서 마코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373
“오분도 못된걸……? 꽤 속식이로군.” 하고 영복이와 같은 기계를 부리는 S가 말을 거들었다.
 
374
양초를 부스러뜨려 놓은 것 같은 퍼슬퍼슬한 양쌀밥알이 말을 하는 입으로 솔솔 흘러져 나왔다.
 
375
“허기는 밥두 빨리 먹기를 연습해 둘 거야.” 하고 영복이는 누르불그스름한 사곡밥―쌀 양쌀 좁쌀 팥의 혼합밥―을 저깔로 한 덩이 떼어다가 입에 넣고 염생이똥 같은 콩자반을 한 개 두 개 세 개 계속해서 여남은 개나 집어먹었다.
 
376
“그래…… 다급헌 때는 그것두 편찮을 테야……” 하고 S가 영복이의 말에 동의하였다.
 
377
일 분 동안에 열 걸음 이상을 걸어본 적이 없다고 일상 자랑하는 채자(採字)의 M은 고릿새한 새우젓에 백%의 좁쌀밥을 뜨먹뜨먹 먹고 앉았다가
 
378
“암만 그래두 나는 밥만은 천천히 먹구 싶더라.” 하고 한마디 거들었다.
 
379
“흥…… 그러구 보니까 다른 것은 빨리 허는데 밥만 더디 먹는 것 같으이그려……?” 하고 역시 채자에 있는 K가 조롱을 하였다.
 
380
“밥을 먹나……? 한 알씩 세여넣구 있지.” 이것은 M의 말.
 
381
“좁쌀은 세이기가 좀 불편헐걸……? 웬만허면 바꾸려나?” 하고 K가 자기의 벤또를 내밀었다.
 
382
“그래두 인제 보아라…… 나설 때는 내가 맨 앞장을 설 테다.” 이것이 한 삼 분이나 걸려서 나오는 M의 대답.
 
383
“아무렴…… 나섰다가 돌아 우편 앞으로옷 허면 자네가 제일 앞이 될걸세…… 그렇지?” 이것은 K의 조롱.
 
384
“망헐 녀석…… 누가 그러게 말이니?”
 
385
“망헌단 말 말어라…… 망허면 이 우에 더 망허겠니? 인제는 망헐래야 더 망헐 건 없구 더 나간다면 도리어 흥허게 된다…… 그렇지요? 박서방… …?” 하고 K는 병조를 바라보다가
 
386
“그렇잖소? ……왜 지금 코가 대자 오치나 빠져가지구 이러구 있어?”
 
387
병조는 아무 말도 않고 영복이가
 
388
“그래…… 꺼꾸로 섰다가 다시 꺼꾸루 서면 도루 일어서게 되는 것처럼……”
 
389
하고 말대껄을 하였다.
 
390
“그게 말이야.” 하고 S가 말을 내었다.
 
391
“그게 말이야…… 한번 꺼꾸루 서놓은 것이 다시 한번 뒤집히기가 쉬어야 말이지……”
 
392
“그건 응당 그렇게 될 건데 뭘.” 이것은 K의 반대.
 
393
“그렇지.” 하고 영복이가 K의 말을 이어받았다.
 
394
“응당 그렇구말구…… 꺼꾸루 선 놈이 꺼꾸루 선 채 가만히 있자니 피가 모다 대가리로 몰려내리구 오장육부가 쏫쳐 내려오는데야 가만 있을 장수놈이 있나……?”
 
395
“발을 내리구 허리를 굽히구 땅에서 손을 띄구 허리를 다시 쭉 펴면 일어나겠지.” 이것은 황소 걸음 같은 M의 의견.
 
396
“대단 거북스럽다. 일어나기……” 이것은 S의 조롱.
 
397
“하하하하.” 하고 여러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398
마침 제본부에서 여직공 아이들이 내려와 변소에를 가느라고 공장을 가로 건너 그 앞으로 해쪽해쪽 웃으면서 허리를 구부리고 살살 달아났다.
 
399
그것을 본 K는 혀를 끌끌 차며
 
400
“참…… 제본부는 왜 모다들 그 모양이요?” 하고 병조에게 책임을 다지는 듯이 물었다.
 
401
“제본부? 저애들 말이요?” 하고 병조는 겨우 말대꾸를 하였다.
 
402
“아니, 저애들이야 문제삼을 것두 없지만 다른 사람들 말이야…… 통 정신이 없어…… 아무리 ‘이야기’를 해야 알어듣지를 못허구 기껏 헌다는 소리가 ‘그러면 소용이 있나? 이대루 이렇게 살어가면서 굶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가만 있게…… 나두 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사장은 미쟁이루 지금 와서 이렇게 되였다구 그리데……’ ‘공연히 쓸데없이 그래…… 이런 것두 제 복이요 저런 것두 제 복이니까 다 각기 제가 타구난 복대루만 살어가면 그만이지.’ 이 따위 수작들이야.”
 
403
“아마 이 안에서 제일 빠가들은 제본부에 가 모였을걸……?” 이것은 M의 말.
 
404
“우리가 도리어 저이를 해치려는 사람인 줄 알구 있으니……” 이것은 S 의 탄식.
 
405
“흥…… 그래두 언젠가는 사보타지까지 허섰으니……” 이것은 영복이의 말.
 
406
“뭣?” 하고 병조가 당기는 듯이 물었다.
 
407
누구를 다 젖혀놓고 하필 제본부에서 사보타지를 하였다는 것은 병조에게는 믿지 못할 말이었었다.
 
408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내용을 서로 알고 있기 때문에 유쾌하게 웃었다.
 
409
“허기야 그때쯤은 우리두 푸로 소설을 충분히 이해를 못했으니까……”
 
410
이것은 영복이의 말.
 
411
“허기는 그래……” 이것은 K의 동의.
 
412
병조는 속이 답답하였다.
 
413
“대관절 무어야?”
 
414
“다른 게 아니라” 하고 영복이가 설명을 하였다.
 
415
“바로 박서방이 여기 들어오기 얼마 전이요…… 여기서 인쇄허는 잡지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잡지에 푸로 소설 하나가 실렸더라우…… 계속해서 실리는 것인데 그 제일회 가운데 배경이 이 인쇄소의 제본실로 되고 또 제본부의 어느 남녀 직공이 연애편지를 허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것을 샌님들은 저이를 모욕허는 것이요, 인쇄소 안에는 그런 ‘추잡’헌 짓이 없는데 그것을 남이 알면 저이가 욕을 먹겠다구…… 그러니까 이런 책은 제본을 아니허겠다구…… 그래서 사보타지를 한 여남은 시간이나 했다나……”
 
416
“그렇다면 그것은 그 소설의 작자의 잘못이지…… 푸로 소설을 푸로의 반감을 사게 쓰다니……?”
 
417
“푸로면 다 푸로요?” 이것은 영복이의 항의.
 
418
“글쎄…… 그렇게 본다면 문제가 없지만…… 대관절 사보타지의 결과는 어찌 되였소?”
 
419
“어떻게 되기는 무얼…… 그대루 제본을 허구 말었지…… 샌님들이 별 뾰족헌 수 있나……” 하고 영복이는 K를 보고
 
420
“아마 그때 ×××××이 ××을 시켰지? …… 나는 아무래두 그런 것 같애……” 하고 고개를 꺄웃거렸다.
 
421
“그랬단 말두 있어…… 욕을 좀 먹었으니까.” 하고 K도 고개를 꺄웃거렸다.
 
422
“그러면 자기네의 의사로 그랬다는 것보담 ××을 받었다는 편이 근사허군.” 이것은 병조의 의견.
 
423
“사실이야…… 만일 다른 일을 가지구 직공들이 그랬다면 대번 모다 목을 잘르던지 호령을 허던지 했을 건데 직공들이 그런다는 핑계를 허구 그 잡지사를 쫓아가느니 전화질을 허느니…… 생 야단법석이를 내든 것을 보면……” 하고 K가 단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424
세면소에서 병조는 영복이가 벤또 그릇에 더운물을 따라 훌훌 들여마시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425
“영복이.” 하고 긴히 불렀다.
 
426
“응?”
 
427
병조는 불러는 놓고 말이 아니 나와서 주저를 하다가
 
428
“장가…… 아니 가려우.” 하고 근처 사람이 들리지 않게 조용히 물었다.
 
429
영복이는 피쓱 웃고 병조를 바라보며
 
430
“그건 웬 소리요?”
 
431
“글쎄 장가 가구 싶잖어.”
 
432
“왜 물어요 왜?”
 
433
“왜가 아니라……”
 
434
“괜히 지금……” 하고 영복이는 농으로 씻어넘기려 들었다.
 
435
그러나 병조는 내내 참한 낯빛으로
 
436
“그리지 말구 대답을 해봐요.” 하고 다시 재우쳤다.
 
437
“아니…… 가구 싶다면……? 어째? 중매 들을 테요?”
 
438
“응.”
 
439
“누구?”
 
440
“소……희.”
 
441
“소희?”
 
442
“저, 제본부.”
 
443
“응, 알었어 알었어…… 잘 알어…… 그러나 못써 못써.”
 
444
영복이의 이 못써 못써 하며 고개를 쌀쌀 내두르는 말소리며 먹던 물을 벌컥 들이마셔 버리는 태도는 퍽도 쌀쌀하고 범연하였다.
 
445
병조는 영복이가 그렇게까지 ‘못쓴다’고 무관심한 태도를 가질 줄은 몰랐다.
 
446
병조는 아까 제본실에서 뛰어내려오면서 어서 바삐 소희로 하여금 남의 안해가 되도록 하고 싶었다.
 
447
그 후보자로는 자기의 아는 한도 안에서 여러 계급의 여러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머리속에 현신을 하고 나타났으나 ‘저게 소희의 남편?’ 이라고 생각하면 모두 다 볼때기를 쿡쿡 쥐어 질러주고 싶게 미웠다.
 
448
그중에 영복이만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449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생으로 미칠 듯한 거북한 연극의 카타스트로프를 짓고 따라서 여름날의 소낙비 오기 전 같은 무거운 기분을 맑고 가볍게 하고 싶었다.
 
450
물론 거기도 고통이 일시는 따르지 아니할 것도 아니나 연극의 종막이 오고 피차에 나누어 선 자리가 확실하여지면 자기의 소희를 보는 눈도 달라져서 다만 한 사람의 친한 동무로서 뜬 사이가 없이 지낼 수가 있으리라고, 또 소희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괴로운 침묵이나 불쾌한 태도는 가지지 아니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희가 비웃던 소위 ‘기우’라는 것도 싹싹 씻기어 내려가리라고 병조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었다.
 
451
그러나 영복이의 그러한 범연한 태도에는 실망(?)을 하였다.
 
452
그는 영복이의 참속을 알고 싶었다.
 
453
“아니 그래…… 못쓰다니?”
 
454
“허허…… 왜 그렇게 구소마지메가 되야가지구 그러우? …… 글쎄 여보 내가 지금 장가를 갈 형편이요?”
 
455
“형편이 못되야서 그런단 말이지?”
 
456
이렇게 묻기는 하였으나 병조는 어젯밤에 자기가 영복 어머니의 한심한 희망을 웃던 일을 생각하매 얼굴이 속으로 부끄러웠다.
 
457
“형편두 형편이구 또…… 아직 장가 같은 것은 아니 가두 괜찮지 않소? …… 그 에널기를 우리는 다른 데 쓸 데가 많잖허우? ……”
 
458
영복이는 병조가 ‘왜 소희가 못쓰겠다’ 고 하는 그 속을 알려고 묻는 것인데 딴 대답만 하여쌌다.
 
459
“그것은 딴 문제고…… 그러면…… 그래서 소희가 못쓴단 말이요?”
 
460
“아니 그건 달러.”
 
461
“그러면?”
 
462
“소흰가 허는 그 색시는 우리 같은 놈의 여편네가 되기는 너무 때가 벗었어…… 내가 하필 어떤 욕망을 가지구 그런 것이 아니구 하여간 여러 여직공 가운데서 눈에 선뜻 띄는 만큼 그런 기회마다 유심히 보기는 했는데…… 오조오상이야. 오조오상이 잘못 미끄러져서 이 인쇄소에 임시 머물러 있지만 오래지 않어서 갈 데루 갈걸……? 오조오상한테는 단나상이 필요허지. 기름때 묻은 납바후꾸(作業服[작업복])를 입은 요따위 명색 없는 직공놈은 일이 없어요…… 현저동 백일번지에다 거주계를 오늘 헐지 내일 헐지 모르는 놈허구는 짝이 너무 기울어…… 그렇다구 소흰가 허는 색시가 뭣 나뿌다는 게 아니라……”
 
463
“소희가 동지가 되여두? ……”
 
464
“글렀어…… 나는 실재인물은 못 보구 소설에서만 여성을 구경했으니까 혹 판단이 극단으로 기울을지 모르지만 소희 같은 여자는 차라리 시골집 맏며누리가 되여서 팔자 좋은 살림이나 헐 감이지 싸우러 나서기에는 너무 여성적으로 되얐어…… 그렇지? 안 그렇습디까?”
 
465
“그렇지 않은 것두 아니지만 성격이란 도야를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니까……”
 
466
“그렇더래두 그저 책상머리에 앉어서 이론으로나 싸워나가는 인텔리겐차의 온순한 안해감이지 우리한테는 때가 너무 벗었어.”
 
467
“그러면 가령 지금 영복이가 소희를 사랑헌다면?”
 
468
“사랑? 우리한테 지금 사랑 따위가 문제나 되우…… 그것은 제이차 문젠데……”
 
469
병조는 속마음으로 코를 떼어놓고 더 말을 하지 못하였다.
 
 
470
열두시 반에서 일 초도 틀리지 아니하고 짜르르 벨 소리가 징그럽게 울렸다.
 
471
그것은 오백 명의 장정을 용서 없이 혹은 기계 앞으로 혹은 식자(植字)대 앞으로 혹은 제본실로 이끌어가는 착취자의 명령을 복창하는 크나큰 힘이었었다.
 
472
기계는 돌기 시작하였다.
 
473
일이 한참 밀린 때라 다끼다이 히라다이(平臺[평대]) 저편 간에 붉은 로울러를 치들고 있는 옵셋(石版印刷機[석판인쇄기])까지 스물여섯 대의 기계가 거의 다 돌고 있었다.
 
474
웅 하는 우렁찬 소리에 섞여 우르락우르락 쿵쿵 착착착착 와그락 철그덕 철그덕 찰싹 찰싹, 이러한 여러 가지 소리가 한데 모여가지고 모터로부터 조그마한 하구루마의 한 개 한 개까지도 일호의 차착과 군것이 없이 꾸준히 돌고 있는 기계 자체의 규율적 율동을 따라 역시 꾸준하고 착오가 없는 교향악이 반주하고 있었다.
 
475
그것은 아득히 어지러운 듯하나 결코 어지러움이 없고 웅장한 가운데 미묘한 리듬을 머금은 힘찬 행진곡이었었다.
 
476
기계에는 저마다 직공이―얼굴도 손도 의복도 기름과 인쇄잉크가 새까맣게 묻은 직공이―둘씩 붙어서서 한 사람은 앞에서 종이를 밀어넣고 그것이 로울러에 감기어 연판에서 박혀가지고 다시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가 아오리에 올라앉아 이편으로 나와 쌓이는 것을 다른 한 사람이 받아 모으고 있었다.
 
477
요란스럽고 복잡한 기계 속으로 빠져 넘어오는 하얀 종이에 곱게곱게 글자가 박혀지는 것은 속이 시원스러운 대조를 이루었다.
 
478
병조는 영복이의 기계 옆에 우두커니 서서 기계 소리의 하나하나를 해부하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479
그러나 사람의 귀로써 도저히 그 소리의 하나하나를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었었다.
 
480
“기계 같은 조직과 활동.”
 
481
병조는 거의 슬로건과 같이 일상 하는 이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저편 채자부로 걸어갔다.
 
482
그는 제본실로는 가고가 싶지 아니하였다.
 
483
힘차게 블레이크를 젖히며 크나큰 기계를 돌리고 싶었다.
 
484
산같이 쌓인 종이축을 경계로 저편이 채자부요 다시 저편으로 있는 딴방이 정판부였었다.
 
485
공장 한가운데 단을 모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있는 늙은이 일본 공장장은 여전히 동상처럼 올라앉아서 강도(强度)의 도수 안경을 코허리에 걸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종이쪽을 뒤적거렸다.
 
486
이 영감장이도 이 공장 안의 특종품의 하나였었다.
 
487
반신불수도 아니건만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살은 설삶아놓은 도야지 고기 같은 게 얼굴은 더구나 중풍에 걸린 것처럼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생겨먹었다.
 
488
채자부 첫 꼭대기에는 병조가 이 인쇄소로 와서 지금까지 한번도 웃는 낯을 본 적이 없는 채자부 주임―카이제르 수염―이 역연 지르퉁한 얼굴로 입에는 빨쭈리에 낀 담배를 비껴 물고 원고를 뒤적거리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489
성이 나서 일상 얼굴이 그렇다기는 성날 조건이 너무 적고 병조에게는 그것이 한 궁금거리였었다.
 
490
병조는 그가 역시 웃지 아니하나 보려고 그 옆으로 가서
 
491
“저놈의 영감쟁이(공장장) 지금두 딸년을 때리랴구 허믄 그년이 발개벗구 나서면서 이것 보라구 허나?” 하고 물어보았다.
 
492
이 말을 꺼내면 이 공장 안에서는 별로이 아니 웃는 사람이 없었다.
 
493
그 영감장이 딸이라는 게 열일곱인가 여덟인가 먹었고 역시 이 공장의 석판인쇄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비가 골이 나서 때려주려고 하면 옷을 활씬 벗고는 이것 보라고 하며 떠벌리고 나선다는 이야기가 어찌 해서 이 공장 안에 퍼지게 되었던 것이었었다.
 
494
병조의 시험은 실패를 하였다.
 
495
그는 역시 웃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496
“모르지.” 하고는 자기 할 일만 하였다.
 
497
병조는 속으로
 
498
‘아이구 싱거워…… 마누라하고 자다가 꺼두었던 전등이 확 켜져도 아니 웃을 텐가……?’ 하고 발길을 홱 돌려버렸다.
 
499
피라밋의 반면같이 삼각형으로 죽 늘어선 활자(活字)대에서는 보기만 하여도 납(鉛)내가 사람의 살에 스며드는 듯하였다.
 
500
채자 직공들은 전신의 신경을 두 눈과 바른편 손끝에 모아가지고 이 잡듯이 잡아내는 잔망스러운 활자들을 왼손에 든 게라에 모으고 있었다.
 
501
해판(解版)하는 어린애들은 소꿉질을 하듯이 활자를 추려다가 제자리에 집어넣고 있었다.
 
502
그것은 사실 소꿉질 같은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하는 그애들은 결코 소꿉질 답게 하지도 못하였다.
 
503
느리차분하게 열손가락을 맥없이 놀리는 모양은 딱지나 여남은 장씩 주어서 나가 놀라면 뛰고 날고 할 듯하였다.
 
504
동편으로 딴 방을 차지하고 있는 정판과 사시까에에서는 퍽도 분잡하였다.
 
505
핀셋으로 활자를 집어내는 사람, 인테르를 가져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 짠 판을 무겁게 들고 게라스리를 하러 오는 사람―모두들 분주한 품이 이 공장 안에서 제일이었었다.
 
506
모노타이프의 조그마하고 암상스러운 기계에서 활자가 제물로 만들어져 가지고는 뾰족뾰족 비어져 나오는 교묘한 작용을 병조는 한참이나 보고 섰다가 다시 저편 끝에 있는 단재기(斷裁機) 옆으로 갔다.
 
507
이 단재기는 언제든지 병조의 신경을 자극시키고 아찔한 쾌감을 주었다.
 
508
발로 블레이크를 누르면 웅 소리가 나면서―그 소리는 퍽도 웅장하고 영악스러웠다―소댕같이 넓은 칼날이 슬며시 내려와서 열 권씩 다섯 무더기를 가지런히 놓은 책의 서두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썩둑 잘라버리고는 다시 슬며시 올라가곤 하였다.
 
509
칼날이 올라가면 하얗고 곱게 베어진 쉰 권의 책머리가 가지런히 내어다보이고.
 
510
병조는 단재기를 보는족족 불란서 혁명시대에 길로틴(斷頭臺[단두대])을 맡아보던 사람은 얼마나 통쾌하고 자릿자릿하였으리 싶어 ‘한번……’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치달았다.
 
511
그는 한참 동안이나 서서 오르내리는 칼날을 구경하다가 내키지 아니하는 걸음걸이로 제본실로 올라갔다.
 
512
우렁찬 기계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긴장미 있게 일을 하는 공장과는 딴판으로 단조하고도 염증이 나는 헤라질을 하며 소희 얼굴을 우두커니 보기만 할 일을 생각하매 늦게 오는 병조를 보고 찌푸려지는 ××××의 이맛살과 한가지로 병조의 이맛살도 찌푸려졌다.
 
513
그는 자리에 앉아 소희를 건너다보았다.
 
514
여전히 고개를 소곳하고 앉아서 사분사분 헤라질을 하였다.
 
515
그는 다른 데도 많이 있건만 일부러 소희의 옆으로 가 인쇄지를 집으면서
 
516
“좀 가져갑니다.” 하여 보았다.
 
517
“네, 가져가세요.”
 
518
그저 단지 순탄한 것밖에는 더 없는 태도.
 
519
병조에게는 차라리 독살스럽게 톡톡 쏘아나 주었으면 도리어 가슴이 시원할 것 같았다.
 
520
그는 천정에 닿도록 훌훌 뛰어보거나 유리창을 부시고 삼층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고 싶게 답답증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521
자리에 앉기는 하였으나 일은 하려고 아니하고 연필을 꺼내어 종이쪽에다 찌적찌적 낙서질을 하였다.
 
522
“남을 울리는 몹쓸 사람……
 
523
사람을 울리려 세상에 났나?
 
524
요부도 아니면서 독부도 아니면서
 
525
가시(莿[자])도 없는 좋은 사람……”
 
526
“사랑하여 주는 사람을 사랑하여 주지 못하는 인정의 모순(人情의 矛盾)!”
 
527
이렇게 썼다가 옆에서 누가 보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얼핏 종이조각을 찢어 내던져 버렸다.
 
 
528
오후 여섯시가 지나서……
 
529
병조는 영복이와 같이 나가는 직공들의 맨 꽁무니에 섰다가 인쇄소 문앞 거리로 나섰다.
 
530
소희와 그 주인집 여직공이 바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531
전등은 벌써 켜지고 거리에는 황혼이 퍼져 내려왔다.
 
532
간장회사의 오토바이가 길을 휩쓸고 지나가고 상점의 어린애가 자전거를 타고 그 뒤를 따라가보려고 애써 발을 저어갔다.
 
533
쓰레기 실은 마차가 지나가고 빈 구루마도 지나가고 나무를 부린 빈 쇠바리도 지나갔다.
 
534
집을 찾아 돌아가는 사람은 저마다 종종걸음을 쳤다.
 
535
사람의 떼는 쉴새없이 오고가고 하나 옷맵시가 반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536
그것은 때가 이미 넉넉한 사람은 길로 분주히 지나갈 때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정이라는 거리는 그러한 사람들과는 인연이 먼 거리였었다.
 
537
노동자의 거리, 공덕리 빈민들의 거리, 얼굴에 핏기가 없는 사람, 공장에서 경성역의 일터에서 몸이 지친 사람들의 맡아놓고 다니는 거리였었다.
 
538
이 거리로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 하나 한가히 한눈을 팔며 지나는 사람은 찾아도 볼 수가 없는 거리였었다.
 
539
병조와 영복이는 파출소 앞 네거리까지 다다랐다.
 
540
길은 한층 더 분잡하였다.
 
541
영복이는 신문지에 꾸린 꾸러미를 가리키며
 
542
“나는 거기 다녀갈 테니까 먼점 가시요.” 하고 벤또 그릇을 내어맡겼다.
 
543
병조는 영복이가 너무도 밥을 먹기까지 잊어버리고 애쓰며 다니는 것이―응당 그리하여야 할 것인 줄은 알지만―부끄럽기도 하며 민망도스러워서
 
544
“저녁이나 먹구 가구려……?” 하고 만류하였다.
 
545
그러나 영복이는 듣지 아니하였다.
 
546
“웬걸…… 일곱시에 꼭 전해주마구 했으니까 지금 가야지……”
 
547
“그래두 시장허잖어우?”
 
548
“괜찮어…… 거기 가서 먹게 되면 먹지.”
 
549
“그렇지만……”
 
550
“괜찮어요 글쎄…… 어서 가서 저녁이나 먹구…… 그리구 어제 저녁에 이야기허든 것이나 만들어놓구.”
 
551
“그거야 가서 곧 해놓겠지만……”
 
552
“그러면 다녀오리다.” 하고 영복이도 돌아서다가 다시
 
553
“그리구 어머니더러는 야업헌다구…… 응.” 하고 부탁을 하였다.
 
554
병조는 한번 더 만류하여 보았다.
 
555
“뭣허면 저녁이나 먹구 가오.”
 
556
“못써…… 늦으면 못만나.”
 
557
“내일 가지?”
 
558
“내일? 왜 그래? 왜 공연히 하루를 미루워요?”
 
559
“그렇지만……”
 
560
“그렇지만이 아니야…… 오늘 하루를 미루는 것이 다음에 가서 일을 일 년을 더디게 헐지 십 년을 더디게 헐지 모르는데 왜 공연히 하루를 미루어요? …… 자, 곧 다녀오리다.”
 
561
병조가 보기에는 영복이의 말과 몸 태도가 나날이 열과 자신에 넘쳐가는 것 같았다.
 
562
그는 고요한 황혼이 내려덮이는 분잡한 거리에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처음에는 영복이의 기운차게 걸어가는 것을,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차차 멀리 사라져가는 소희의 먼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어쉬었다.
 
563
소희의 그림자가 아주 보이지 아니할 때에 비로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뚜벅뚜벅 발을 옮겨놓으면서 혼잣말로
 
564
“영복이는 그리로 갔다 전취(戰取)하겠지…… 그러나 소희는 저리로 간다…… 문제(問題)를 남겨놓고……” 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565
+ (1930. 2. 21.)
 
 
566
<別乾坤[별건곤] 1930년 2·3·5월호>
【원문】병조와 영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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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조와 영복이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별건곤(別乾坤) [출처]
 
  1930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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