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백안 ◈
카탈로그   본문  
미상
백신애
1
백안
 
 
2
꼭 어른 같다는 어린이들, 꼭 늙은이 같다는 젊은이들, 꼭 여자 같다는 남자들은 모두 내 눈에는 좋게 보이는 편이 아니다. 어린이는 철없고 어린이답고 젊은이는 용감(勇敢)해야 젊은이답고 남자는 또 좀 남자다워야…… 일년사시절(一年四時節)도 봄은 봄답게 따뜻하고 여름은 여름답고 가을은 가을답고 겨울 또한 겨울답게 추워야 다 각각 그 달려가는 데 재미가 있는 것이라고 위에 잔소리 같으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외로 금년 겨울은 겨울답게 냉혹하게 추운 날 없이 봄날 같아 따뜻한 날이 많은 것도 별로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사람도 간혹 어린이 같은 어른이나 젊은이 같은 늙은이나 남자 같은 여자가 있는 것과 같이…… 장승의 입에 떡가루 칠해두고 떡값 내라고 시비하는 깍쟁이 같은 세상 판에서 부끄럼 당하고 얼굴이 빨개지며 입에 손가락을 비비 틀어넣는 철없는 어린이 같은 어른을 볼 때나 공자(孔子)님의 도(道)를 본받아 중용(中庸)을 지키느라고 살살 피해 다니며 남만 앞장을 세워놓고 저는 저대로 점잔만 하려는 젊은이가 많은 판에 두 팔 휘젓고 앞장을 맡고 나오는 용감(勇敢)한 늙은이를 볼 때 나는 무조건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기뻐서 속고(俗苦)를 잊어버릴 때조차 있다. 모이면 옷 자랑 음식 자랑 남의 흉내보기에 힘쓰는 여인들 가운데서 간혹 이들과 전연 반대되는 훌륭한 여인을 볼 때야 말하면 무엇 하리마는 얼마나 유쾌하랴…… 겨울은 겨울답게 추운데 재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봄같이 따뜻한 것도 또한 버리지 못할 재미가 있다. 우리 집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있어서 제일 가까운 인가(人家)라도 이삼분(二三分) 걸려야 가게 되나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은 많다. 모두가 무지(無知)하고 가난한 촌농부(村農婦)들이기는 하나 이들은 지극히 순박(純朴)하여 마치 어린이 같은 어른들이다.
 
3
“아이고, 금년 겨울은 따뜻해서 참 좋습니다.”
 
4
하고 나는 첫 인사를 하면 이들은 누구나 다 같이
 
5
“아이고, 새댁이야 바깥일 할 게 있나, 추우면 무슨 걱정 있겠는지요.”
 
6
한다. 나는 얼른
 
7
“옷 입고 밥 그리는 사람들에게야 오직 고맙겠어요. 나야 춥든 덥든 상관없지마는…….”하고 대답하면 그들이 오직 나를 칭찬하며 마음이 어질다고 존경하려마는 불행히도 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씨라고는 그림자만치도 가지지 못한 인간이었다.
 
8
“금년 겨울은 따뜻하여 참 좋습니다.”
 
9
라고 말한 내 속 이유는 이들 촌부(村婦)들에게 이해(理解) 못할 이유(理由)가 있는 것으로 그저 덮어놓고 저편 사람들 인사채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10
“바깥일 할 게 있나 추우면 무슨 걱정이요.”
 
11
라는 대답을 듣고 더 입을 떼기가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른대로 나오는 대로 무사(無邪)한 어린이 같았으면
 
12
“추워도 좋지만은 바람이 불면 건너 못지(池)에 기러기가 날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하고 말할 것이로되 나는 이미 깍쟁이가 거의 다 되어가는 판인지라, 말머리만 슬쩍 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당장에 속으로
 
13
‘그까짓 기러기가 날아오면 무슨 이익이 있나. 할 걱정이 없으니 별 말을 다 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촌부(村婦)들에게서야 비웃음을 받을망정 혹독하게 추워지면 건너 못에 기러기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 날 오후(午後)는 날이 개이며 훈훈하여 봄 눈이 온 뒤가 텄으므로 집 안에 사람들도 없고 심심하여 밖을 나오니 건너 못에서 요란하게 기러기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허둥지둥 못 둑에 올라가 보았다. 기러기들은 못 한편 얼음 녹은 물 위에 고요히 떠 있었다. 마치 구전궁궐(九電宮闕)안 정원롱수(庭園瀧水) 위에 수없이 떠 있는 호화로운 유선(遊船) 같이 둥실둥실 떠 이리저리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나는 본척만척 한다. 그래도 나는 행여나 그들의 놀음에 방해될까 하여 못 둑 위에 가만히 웅크린 채 무릎 위에 팔을 세워 턱을 고이고 마음을 즐거움 속에 잠가놓고 남안(南眼)을 반개(半開)하여 때 가는 줄을 잊고 있었다. 이때
 
14
“보시소, 왜 여기 있는거요.”
 
15
하는 사나이 목소리가 바로 내 곁에서 들려왔으므로 나는 졸도(卒倒)할 뻔 기겁을 하였다. 겨우 진정을 하여 돌아보니 남의 집 머슴살이인 듯한 헐벗고 때 묻은 사나이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나의 즐거움을 깨뜨리고, 그 위에 놀라게까지 한 이 낯 모를 무례(無禮)한 사나이에게 순간 단단히 골이나 벌떡 일어서며,
 
16
“왜 물어요?”
 
17
하고 격한 어조로 반문하였다.
 
18
“아니요. 누구를 기다리시는가 해서…….”
 
19
“무엇을 하든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요, 실없이!”
 
20
나는 저편의 태도 여하에 따라 큰 소리라도 낼 듯이 벌컥 성을 내었다.
 
21
“아니 그저.”
 
22
사나이의 얼굴은 무척 낭패하여 우물우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태도를 한번 바라본 후 갑자기 픽 웃고 말았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건네게 된 마음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23
“쓸데없는 말 묻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오.”
 
24
하고 다시 아까처럼 웅크리고 앉았더니 사나이는 그래도 빽빽이 가지 않고 서 있었다.
 
25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니 당신 눈에 어떻게 보이시오.”
 
26
하고 나는 웃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사나이는 내가 얘기한 대답은 하지 않고
 
27
“아니요. 댁이 어디십니까?”
 
28
하고 묻는다.
 
29
“우리 집은 바로 저 곳이니 안심하시지요. 내가 물에 빠져 죽을까봐 그러시는 것 같소마는 안심하시고 가십시오.”
 
30
하고 나는 여자답지 못하게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하였다. 사나이도 그제야 뒤통수를 긁으며 무색한 얼굴로
 
31
“추운데 인적 없는 못가에 혼자 있기에 저 행여나 누구신가…… 해서”.
 
32
하며 부끄러운 듯이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이 못 위에 기러기가 저렇게 놀고 있어도 구경하러 온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고소(苦笑)한 후
 
33
“기러기 너 내 여기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34
하는 맘으로 다시 바라보고 있었으나 아까처럼 즐거워지지도 않고 기러기 역시 나를 본 체 만 체
 
35
“네가 아무리 우리를 바라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36
이라고나 하듯이 저희들끼리만 놀고 있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37
“이 추운데 못가에는 무슨 청승으로 갔다 오시는지요. 나는 누가 빠져 죽으러 가 있는가 했구마.”
 
38
하고 촌부(村婦) 하나가 길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이없어 또 한번 더 웃고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창문으로 동리의 오막살이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원문】백안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수필〕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2
- 전체 순위 : 3665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632 위 / 1794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1) 봄봄
• (1) 소낙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백안 [제목]
 
  백신애(白信愛) [저자]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백안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