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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의 문학적 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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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3.8~12
김남천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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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의 문학적 파악
2
- 과학·문학과 모랄개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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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따라 모랄론에 붓을 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유행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데서 많은 조소를 받아왔고 또한 내깐으론 그것이 결코 소홀히 취급당하여야 할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까닭에 다른 행복된 문학자와 같이 주체에 신뢰하여 곧바로 문학 세계에 영웅과 같이 군림하는 찬란하게 눈부신 재주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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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지식인 소시민의 자기 박탈의 열정이 나를 붙들 때 그러나 결코 그 때부터 문학이란 것은 주체의 객관에 대한 교섭에서 비로소 생기(生起)하는 고유의 인식 목적이라는 가라앉은 침착한 결론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나에게 있어서는 한, 두 줄의 결론보다도 그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였다. 도달한 공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체적 설정과 객체에 대한 면밀한 성찰에서 비로소 공식과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가능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실로 현실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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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러한 방향 가운데서는 우리들이 일찍이 경험한 불행의 태반, 희비극의 대부분은 제거되리라고 생각된 때문이다. 세계관의 유행가적 되풀이 속에서 기실 하나도 제것으로 된 몸에 붙는 의복도 발견할 수 없고, 빌려온 퇴색한 예복뿐이었다는 희극, 신체검사를 해보면 미어진 공식의 파편이 불쌍하게 떨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최고의 세계관 파지자(把持者)로 생각하여 의심할 줄을 모르는 비극, 저열한 합리화와 교만한 자기 위안 - 이러한 가운데서 작가가 우선 감정적으로 반역할 방향으로 주체의 박탈을 선정(選定)한 것은 착란된 자의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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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기의 자아가 도처에서 패배에 울고, 헤겔의 이른바 모든 소가 회색으로 보이는 황혼에 처하여 문학의 정신이 주체의 문제 앞에 직립(直立)한 채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결단지우려는 질식한 듯한 순간을 당할 때 용감히 칼을 들어 주체로서 스스로를 고발하라는 정열은 결코 하나의 주관적인 감상만은 아니었다. 성실을 망각한 공허한 속류(俗流)문학이 언제나 주체를 방기한 채 돌볼 줄 몰랐다. 그러나 역사는 개인과 자기의 문제가 결코 그렇게 용이하게 쉽사리 처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가. 일찍이 슈틸러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내포한 바 주아주의(主我主義)적 체계가 ‘자기’를 ‘창조자적인 허무’에 설정할 때 이것이 온전히 ‘자기’의 문제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관념적 유아독존의 소치인 것을 간파하여 이의 전면적 비판에 낮을 밤으로 바꾼 이가 있었다. 아니 우리는 교양 잇는 불란서의 전통적 모랄리스트들이 모든 문제를 자아의 위에 정착시키고 그곳에 견고한 회의적 개인주의의 성곽을 건설한 것을 알고 있지 아니한가. 『한 알의 밀알이 만약 썩지 않으면』의 저자가 혹은 좌왕했다 우왕할 때에 그를 변호하고 옹호하는 세기의 개성이 그의 모랄을 추켜올리는 것을 우리는 눈앞에 친히 목도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리하여 ‘개인’과 ‘자기’의 해결과 주체의 자기고발은 문학정신의 가슴에 비로소 위연(威然)히 솟아오르는 울분이 되어버린다. 이 문제 앞에 서지 않고 홀홀(忽忽)히 지나쳐버린 행운아가 많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행복된, 그러나 정신적으로 가장 빈곤한 라우드 스피커들이 주체의 성찰 위에 던지는 게 무엇인지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으로 해결되는 것도 또한 종말을 고하는 것도 아니다. 한 번 이 앞에 선 이상에는 이를 헛되이 회피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진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난관을 초극하고 지양하는 방향이야말로 안타까이 요망되는 때문이다. 불성실한 비판에는 그러므로 침묵을 가지고 대함이 당연한 예의다.
 
8
이렇게 해서 작가는 자기 고발의 에스프리를 들고 신 창작이론의 원리 위에 등장하여 비로소 고발정신의 시대적 문학적 파악에 도달함을 보게 된다. 주체의 자기 분열을 헛되이 도폐(塗蔽)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의 분열을 통렬히 느끼는 때문에 그것의 초극을 기도한 것이다. 객관세계의 몇 갈래의 분열과 모순과 인간성의 왜곡을 헛되이 전체주의를 가지고 덮어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문학적으로 지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체에 있어서 제출함이 유일의 길이고 이리하여 주체와 객체의 교섭을 앞두고 무엇보다 주체의 건립이 요청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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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문학은 이러한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서 하나의 초극의 단초(端初)를 붙듦에 이른다. 주체와 객체의 통일의 방향! 이것이 오랫동안 추궁하여 얻은 고발정신의 하나의 작은 성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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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8.3.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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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발의 에스프리를 제창한 이래 나의 글이 성의 있는 독자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의 도중에서 여러 번 모랄론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헛되이 회피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을지도 알 수 없다. 문학이 주체성에 있어 제출된다는 것을 말할 때, 그리고 주체가 객체와 교섭하는 국면을 인식의 공적(功績)으로 대치하여버릴 때, 그리고 다시 객관세계의 문학적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과학적 인식과의 동일과 차별을 말하려고 할 때 붓은 마땅히 모랄을 취급하여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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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에 전재(轉載)하는 기술(記述) 이상 더욱 깊이 파들어 갈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문학의 주체로서의 작가에게 있어서는 역사, 계급, 민족, 사회, 국가, 인류의 높고 깊은 문제를 얼마나 절실하게 자기 자신의 절박한 문제로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는 주체와 객체의 교섭과 통일이 이러한 국면으로서 제출되는 때문이다. 객체로서의 생활과 세계가 알게마이네 크리제의 시대에 있어서는 여하한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이 문제를 얼마나 절실하게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서의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회 전반의 문제 속에서 해결하면서 있는가가 중요하였다. 이것 없이는 주체와 객체와의 통일은커녕 터무니없는 객체에 대한 문학적 파악 예술적 인식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졸고 『유다적인 것과 문학』및 「자기 분열의 초극」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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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곳에서도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두개의 수단으로서 과학과 문학이 취급되었고 동시에 이의 특성의 구별에 대하여 불충분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하히 하여 양자는 구별되며 또한 이러한 구별을 통하여 어떻게 결합을 보게 되는지는 규명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이 가운데 모랄 개념을 설정시킬 준비 공작은 지극히 불충분하였고 조잡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과학과 문학의 인식 목적을 추궁하여 그의 구별과 동일을 명백히 하고 도덕의 문학적 파악을 수행하여 모랄 개념을 정당한 위치에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곳에 ‘문학’이란 말은 ‘문예’만을 말함이 아니고 과학이나 이론에서 구별되는 ‘예술 일반’이 갖고 있는 일종의 사상 내지는 에스프리를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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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관적 관념론의 미학은 미의 자율성을 주창하고 문학의 작용과 과학의 작용을 구분하여 그를 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방법의 과학적 방법에 대한 배반을 강조하여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월까지는 왕왕 주창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관찰한 헤겔만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들에 반대하여 양자는 현실의 본질 인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오직 그의 차이는 인식의 형식에만 존재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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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본시 일정한 생산 제관계 위에 건설되는 상층 건축의 일부인 바에는 다른 이데롤로기 제 현상과 배반되고 대립될 하등의 이론적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이며 과학과 한가지로 그의 기저를 사회적 물질적인 하부 구조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문학의 차이는 그의 인식과 표현의 형식에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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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이 과학과 한가지로 현실의 인식이라는 것을 인정한 뒤에 파악과 표현의 방법에서 양자를 구별한다고 하여서 우리는 그것에 곧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 개별적인 사상(事象)의 인식인 점에서는 과학적 입장이나 문학적 입장을 동일하다고 인정하고, 그 다음에 전자는 그것을 추상(抽象)하고 일반화하는 데 의하여 그의 목적을 수행하고, 후자는 그것을 구체적인 개물(個物)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의하여 그 목적을 수행한다는 것이 다름아닌 종래의 시민 미학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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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론이 문학과 과학의 본질을 구명치 못할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형 창조라는 단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아도 결코 문학이 개물(個物) 그대로를 표현하지 않고 일종의 개괄 내지는 추상을 통하여 보편화를 기도하는 것이 사실이며, 과학적 추상 역시 개별과 구체성을 망가하는 곳에 수행될 수 없는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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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양자의 차별과 동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성찰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20
(『조선일보』1938.3.9)
 
 

 
 

3

 
22
과학적 미학 - 다시 말하면 예술학이 도달한 이 문제에 대한 성과는 대체에 있어서 문학은 형상(표상)에 의한 인식이고 과학은 개념에 의한 인식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누시노프는 그의 『문예의 본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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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모든 세계를 사상과 감정과를 포함한 전 인간을 특히 개념의 힘에 의하여 인식하는데, 예술은 특히 형상의 힘을 빌려 세계와 인간과 그의 사상 감정을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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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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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에 있어서의 형상과 과학에 있어서의 개념이라는 것도 결코 상호 불가침으로 범주적으로 확연히 구별될 수는 없는 것이니 문학이 개념을 떠나서 정당한 형상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과학 또한 표상 없이 세계의 인식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개념과 형사(표상)은 어떠한 국면에서 구별되며 또한 결합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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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연구가의 감박석개(甘粕石介)씨가 그의 『예술론』에서 도달한 성과를 일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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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나 예술이나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기준하에 우연적인 것을 버리고 필연적인 것을 현현하려고 추상을 행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면 이 추상을 행하는 방법은 어떻게 다른가? 예술의 추상은 일반적인 것, 필연적인 것을 감성적(표상적) 개체적인 형태에 있어서 파악한다. 그러나 과학의 추상은 현실의 감성적인 개별적 현상을 논리적 일반적 형태에 있어서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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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 이르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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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구체적인 실례로 감박(甘粕)씨가 열거한 것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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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그리는 개(犬[견])는 그 종류의 개가 갖는 바 필연적인 것, 일반적인 것을 현현치 않으면 안되지만 이것이 마치 현실 속에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은 한 마리의 개, 즉 감성적인 개체적 형태에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학적 견지에 있어서는 현실의 어떤 종류의 개가 다른 종류의 개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개성적 특징을 밝히는 것인데 그것을 후각의 예도(銳度)라든가 피부의 형태라든가 각종의 습성이라든가 등등의 각 부면으로 분석하여 그의 각 면을 통하여 다른 종류와의 필연적인 구별을 명백히 하고 최후에 그의 종합적인 차이를 발달사적으로 설명한다. 이 과정을 보면 출발점은 물론 현실의 감성적인 개이지마는 그 후는 전혀 추상적인 개념에 의하여 이 개가 취급되고, 마지막에 각종의 일반적 규정의 통일로서 이 특정의 종류의 개가 재현되지만 이 재현은 결코 감상적인 재현이 아니고 논리적 개념, 즉 일반적인 것에 의한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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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씨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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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일반적인 것이나, 그대로 개별적인 것이나 모두 진리랄 수는 없다. 진리는 일반과 개별과의 통일에 있다. 객관적 진리의 표현을 한가지로 목적하는 과학과 예술은 이 일반과 개별과의 통일을 하나는 개별을 일반적인 논리적 규정에 의하여 재현하고, 하나는 일반적인 것을 감성적(표상적) 개체로서 표현한다. 이것이 양자의 구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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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문제에 대한 성과를 몽타쥬하는 마당에서 끝으로 로젠타리의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세계관과 방법」에서 특히 다음의 한 절을 인용하여 이것의 일층(一層)의 천명을 기(企)하기로 한다. 이것이 인용될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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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자나 예술가나 동일한 보편화를 행하는 것이지마는 예술적 보편화의 정도는 논리적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보다도 훨씬 적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인식의 간(間)에 개재(介在)하는 근본적인 상위는 주로 보편화의 성질과 타입과의 상위(相違)에 있다. 학자는 예술가와 한가지로 객관적 현실의 불외(不外)한다. 그러나 보편화의 성질과 이 보편화가 만들어 올리는 형식은 예술가의 경우와 학자의 것과는 판이하다. 학자의 경우의 보편화의 결과와 형식은 논리적 범주, 과학적 정식이다. 예술가의 경우에는 그곳에 본질적 진형적인 것이 나타나는 형상적 감각적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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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支離)한 성과의 점묘(點描)를 통하여 우리는 개념과 표상과의 분리 대립을 극복하였고 양자의 통일과 차별의 미묘한 관계의 해명을 얻음에 이르렀다. 이것에 의하여 최근까지도 성(盛)히 유행하는 감정이입의 미학이라든가 혹은 베르그송류의 양자의 대척(對蹠)의 이론이라든가의 미망(迷妄)이 어느 정도까지 명백히 되었으며 과학과 문학의 본질적 차이가 문학의 배리패덕(背理悖德)에 있다는 속류의 저열한 취미까지도 폭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것의 성과 위에 서서 모랄의 개입을 위하여 일층(一層)의 추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6
[『조선일보』1938. 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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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과 표상 (형상)- 이렇게 과학과 문학의 본질을 구별해 본 뒤에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자의 결합의 방식 여하는 아닐런가.
 
39
이 양자의 결합의 방식을 보기 위하여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관계가 이에 신물이 나도록 되풀이되는 것을 목도하였고 예술적 방법에의 과학적 방법의 삼투를 성찰하여 상당한 정도의 성과를 얻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여 왔다. 이것을 위한 논쟁이 수 개 성상에 이르렀었고, 이 논쟁의 위에 많은 타매(唾罵)가 던져진 것도 사실이었고, 또한 논자 자신 그것을 통하여 얼마만한 이론의 체득을 결과하였는지를 밝히지 않더라도, 의식했건 안 했건 이러한 노력이 개념과 표상의 결합방식의 탐구에 쌓여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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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들은 서슴지 않고 문학적 방법 속에 과학을 침투시켜야 한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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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표상이 과학 속에 들어가면 과학성을 훼손케 하여 과학의 시화(詩化)와 속화(俗化)를 결과하고 드디어 논리적 파악의 애매를 습득함에 불과하나 과학의 문학에의 침투는 가능할 뿐 아니라 전혀 필수적이다. 니이체, 베르그송, 세스토프, 키에르케고르 등의 일련의 문학주의적 철학가들이 논리적 개념과 범주를 중도에서 파기하고 시적 표상에 몸을 맡겨 그곳에 신용할 수 없는 망상의 체계를 건설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성실한 화가가 해부학을 연구하고 리얼리스트 작가가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그에 대한 정당한 과학적 지식을 항상 충분히 준비하였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이다. 칸트의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하며 헤겔 역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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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 필요한 것은 내적인 정신이 현실의 외적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것뿐이 아니고 현실의 본질적인 진리와 합리성이 외적 현상을 획득하는 장본(張本)이라는 데 있다. 예술가가 포착한 일정한 갖는 이 합리성은 예술가의 의식 가운데 현전(現前)하여 그를 감동시킴에 그칠 뿐 아니라 이 본지적인 것, 참된 것은 그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그에 의하여 충분히 면밀히 반성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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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우리는 문학적 형상의 핵심이 합리적이 아니면 그것은 하등 현실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파악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 과장, 상상력, 암시, 상징, 시사 등의 제 기능을 다하여 감성적, 구상적, 인상적으로 생활과 사건과 인물을 묘사하고 전형적 성격과 정황을 창조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문학의 표상이 내포한 바 특수성이고 이것이 또한 과학과 구별되는 본질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문학적 표상의 핵심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갖는 이론적 범주의 합리성과 일정한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 호판윤(戶坂潤)씨는 그의 『사상으로의 문학』이란 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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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모든 것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진실, 진리는 산 사회의 커다란 동향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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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고 있다. 이곳에 수년래의 논자들이 문학에 대하여 세계관의 우월을 되풀이하여 일보도 물러서지 않은 이론적 근거의 열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양자를 결합시키는 합리적 핵심이라는 것이 해명된 것은 아니다. 문학적 표상이 진리의 반영이 되기 위하여는 과학적 개념이 갖는 합리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러므로 이러한 국면을 통하여 양자가 불가피의 관련을 갖게 된다는 것이 판명되어 있을 뿐 아직 양자의 합리성이 구체적으로 여하한 것인가도 명백히 되지 아니하였다.
 
46
그러나 나는 전술(前述)의 모처에서, 과학의 보편화의 결과와 형식은 논리적 범주라는 것을 로젠타리의 말로써 인용한 일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개념의 결합은 정식 혹은 공식을 산출한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물론 공식이란 “소여된 일정 조건에 존재하는 곳에는 여하한 곳에라도 적용될 수 있는 정식, 보편자를 말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체적인 분석을 하기 위한 보편자이다. 만일 과학의 특수성을 이렇게 공식의 기능에서 살펴보면서 상술한 바 문학적 표상을 그의 형상에서 보고 다시 이러한 현상의 감각적 반영과 과장, 상상력, 암시 등의 성능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면 양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비비드한 차별에까지 추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과학에 있어서의 공식의 기능과 문학에 있어서의 성격의 기능 - 공식적 분석과 성격적 묘사, 그리고 문학적 표상은 공식적 분석을 경과하여서만 정당한 성격적 묘사에 도달하나, 과학적 개념은 공식에 의한 법칙 이상에까지 그의 인식 목적을 연장할 때 그것은 벌써 과학의 성능은 아니라는 것, 이리하여 과학이 이 한계를 넘는 곳으로부터 인식 목적은 문학의 권내로 연장된다는 것이다. 실로 이 과정이 다름아닌 주체화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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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8. 3.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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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주체의 문제, 작가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입장의 문제란 과학적 개념이 구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수행한 바 공식의 기능을 인계하여 이 사회적인 진리를 구유(具有)한 사상을 문학적으로 여하히 주체화할 것인가의 문제에 불외(不外)하였다. 다시 말하여 논리적 범주에 공(供)하여 구체적으로 분석된 진리는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종국적으로 감각화되고 구체적인 생기발랄한 형태로서 구현됨에 이른다.
 
50
이 주체화 과정, 쉽게 말하면 과학이 문학과 교섭하는 국면이면서 동시에 과학이 정지(停止)한 인식 목적을 문학이 받아들여서 그것을 독자의 기능에 의하여 문학적 표상에까지 고양 심화시키는 기능의 최초의 단초(端初), 과학적 진리가 작가의 주체를 통과하는 과정 - 이곳에 설정된 것이 문학적으로 파악된 도덕 모랄이었다. 이것을 바꾸어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관계에서 본다면 전자가 후자를 거쳐 문학적 표상에까지 구상화되는 중간 개념으로서 모랄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범주에 의하여 개념적으로 파악된 현물(現物) 관계가 이 모랄이란 과정을 통과하여 주체화되고 이 일신상의 프리즘 내지는 아스펙트를 지나서 일종의 직감적인 구상화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차의 졸고에서 일찍이 언급하였던 바, “문학의 주체로서의 작가에 있어서는 객체로서의 생활과 세계가 갖고 있는 높고 깊은 문제를 얼마나 절실하게 자기 자신의 문제로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였다”는 말은 결국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주체화, 다시 말하면 모랄 제기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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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도덕이 갖는 바 종류의 개념을 분석하여야 될 것은 피치 못할 일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 개념을 상기한 바와 같은 모랄로서 문학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상식적으로 운위(云謂)되는 도덕 개념으로부터 논리학적 내지는 사회과학적 개념에 이르기까지의 각종의 도덕 개념과 모랄이라고 불리워지는 애매한 개념의 각색(各色)이 이곳에 충분히 천명되고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이 지면에서는 이것을 수행할 겨를이 없이 다음 기회에 미루려니와 이곳에서는 문학의 주체의 문제를 이해함에 반드시 필요한 약간의 성찰로서 이 글을 우선 끝맺어 두기로 한다.
 
52
그것은 도덕이란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도덕은 물론 항상 사회적이다. 그러나 개인이라는 것이 생각되지 않은 곳에 도덕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사회 의식으로서의 도덕 의식도 이러한 개인 의식의 총화이든가 불연(不然)이면 개인이 사회에 대하여 갖는 도덕의 자의식에 불외(不外)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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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는 도덕이 문학의 점유물이라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과학적 개념과 그의 공식으로서도 ‘개인’의 문제는 처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기구의 일반적 제 관계를 표시하는 과학적 공식은 각 ‘개인’의 경우에까지 특수화되는 것이며, 이리하여 ‘개인’은 문제없이 공식에 의하여 처단된다. 그러나 ‘개인’과 구별되는 ‘자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은 벌써 그의 기능을 상실한다. ‘자기’는 결코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아직도 일반적이고 ‘자기’ ‘자아’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것은 최후의 특수물이 된다. 예를 들면 김모와 이모는 동일한 ‘개인’이다. 그러나 김모 ‘자신’은 결코 이모 ‘자신’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김모는 벌써 ‘개인’이 아니고 이모 ‘자신’과 구별되는 김모 ‘자신’, 다시 말하면 ‘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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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특수화하면 ‘개인’이 된다. 이곳까지는 확실히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개인’을 아무리 특수화하여도 ‘자기’로는 안 된다. 이 ‘개인’이 ‘자기’로 되는 과정, 다시 말하면 과학적 개념의 기능이라 하여 문학적 표상 앞에 자리를 물려줄 때 모랄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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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판윤(戶坂潤)씨는 그의 『도덕론』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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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개념이 문학적 표상에까지 확대 비약한다는 것은 이 과학적 개념이 모럴라이즈되고 도덕화되고 휴머니즘화된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 개념이 일신화(一身化)하여 자기의 몸에 붙고, 감능화(感能化)되고 감각화되는 것을 말함이다. 드디어 자기=모랄=문학은 하나의 연속된 개념이 된다. 사회의 문제가 몸에 붙은 형태로서 제출되고 자기 일신상의 독특한 형태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문학적 모랄을 사회과학적 이론으로부터 구별하는 소이(所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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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문학의 대상은 도덕 ‘모랄’이다. 진리의 탐구를 대상으로 한 과학의 성과를 지나서 과제를 일신상의 진리로 새롭게 한 것이 문학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모랄은 반드시 과학적 개념을 핵심으로 가져야 할 것을 절대적인 전제로 한다. 과학의 합리적 핵심은 그러나 실험과 실증과 실천을 통하여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합리적 핵심을 갖지 않은 모랄은 진정한 모랄이 아니다. 리버럴리스트나 또한 이른바 모랄리스트들의 심정, ‘모랄’, 문학주의자들의 ‘모랄’이 하등의 모랄리티도 갖지 못하는 때문이다. (2월 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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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8. 3. 12]
【원문】도덕의 문학적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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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8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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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