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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선의 문학예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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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2월
오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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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의 문학예술
 
 
 

1. 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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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현재 세계 반동제국주의의 아성인 미국이 그 군정을 펴고 있는 남조선은 민주 과업 발전에 찬란한 이곳 북조선에 비하면 그 너무나 생지옥과 같은 데에 분격한 마음을 그칠 수 없다. 일황 히로히토(格仁)가 무조건 항복을 방송한 그 다음날 서울에서는 소련 군대가 입경한다는 소문이 커져 모든 시민이 환호에 넘치며 소련군을 맞으려고 역으로 나갔다. 며칠을 오늘인가 오늘인가 하고 나갔다. 그때 남조선 일대에는 미국 비행기가 상공에 나타나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성명서를 뿌렸다. 미군이 상륙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치안이 일본인에게 있으며 일본인은 이것을 잘 맡아서 하고 또 조선 인민은 미군이 올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본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그 성명의 요지였다.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쪽지를 줍는 남조선 우리 인민들은 이때까지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삼팔선이리는 것을 알았다. 그들 미 군대는 이러한 쪽지를 뿌리고도 근 한 달이나 지나서야 우리 땅에 상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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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일본이 항복한 후 3주일 만에야 조선으로 와서 일본 관헌들에게 행정기구를 인계받았으나 이전 행정기관의 거의 전부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해방 직후 조선 방방독곡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발생하였고 또 얼마 후에는 중앙인민위원회까지 설립되었다. 남조선에서 미국인들은 이 인민위원회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탄압하였다고 그들의 나라의 문사인 루이스 스트롱 여사도 남조선 실상을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여기에서 급한 숨을 돌린 것은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살 수 없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였고 또 북조선에서 목숨만 달고 도망쳐온 이 간악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남조선을 저희들의 성지로 알았다. 사실 새로 온 미군정은 이것들이 일본놈들에게서 얻어 갔던 개패를 다시 자기네의 패로 갈아 채우기에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오늘 남조선에 있어서의 프로그램을 볼 때 그들이 우리 인민의 창발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민위원회에 얼굴을 찌그리고 이것을 저희들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서 강력히 탄압한 본의도 지나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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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어저께 남조선에서 가장 쓰라린 날을 보냈다. 우리들은 서울서 어떤 섬유 공장(이것은 김성수 일문에서 경영하는 경성방적이다)을 방문하였을 때 파시스트의 참악한 행동을 보았다. 우리들 앞에서 우리들의 바로 목전에서 국제직련이 온다는 삐라를 뿌리는 어떤 노동자 통무에게 경관은 포악하게도 함부로 때린 후 그들을 체포하였다. 그 순간에 우리들은 자유스럽고 안전한 지대에 있지 않다는 것과 우리 자신의 생명도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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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불국인 루이 사이앙 씨는 1946년도 국제직맹에서 조선의 노동 실정을 조사하러 왔을 때 서울을 떠나면서 신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의 동행이던 월 씨도 전 세계에서 남조선과 같이 지유가 없는 나라는 오직 희랍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미군정이 남조선에 군정을 펼쳐 얼마 안 되어 될 수 있으면 조선 인민의 감정을 사지 않고 어물어물하려던 초기의 일이다. 히물며 그들이 식민지적인 모든 현안을 노골적으로 내놓고 텀비는 오늘의 남조선 사정이야 어떻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잠시 이 땅을 지나간 외국인들도 이와 같이 남조선 실상을 말한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 남조선의 문학예술인들은 우리 민주 진영의 다른 부면과 함께 자기네의 위치에서 과감히 투쟁하며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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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의 문학예술인들은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곳에는 문학 예술 부면 이외에도 교육 체육 산업 의학 과학 자연과학 급 사회과학 법률 신문 등에 종사하는 문화인들이 개별적인 동맹이 있어 이 산하에는 전부 24개의 동맹이 있다) 산하에 굳게 뭉치어 활발한 보조를 띠우고 있다. 모든 문화를 인민에게! 모든 문화는 인민에 복무하는 문화라야 한다! 이것은 남조선 문학예술인들이 내걸고 싸우는 슬로건이다. 남조선의 문학예술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언론의 최전선에서 일간 신문의 기관지 주간 월간의 각종 잡지와 여러 단행본 출판물을 통하여 꾸준히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현재의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 각 동맹의 총 맹원수는 무려 15만 8천여 명이었다. 처음 각 동맹이 창립할 때에는 한낱 전문기들만의 그룹이 이제에 와서는 반동 미군정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문화에 대한 인민대중의 절실한 욕구와 또 문회를 모든 인민 속에 가져가겠다는 그들의 열망과 활동은 이와 같이 문화를 애호하고 또 그 지도 부변에 종사하겠다는 결의를 가진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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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는 지금 이 수기를 적으려 하면서도 이곳 북조선과는 판이한 남조선의 정세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한다. 돌아보건대 현재의 남조선 문학예술이 오늘을 가져오게 된 것은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상에 큰 금을 그은 먼젓번 10월항쟁에서 오는 성과이다. 인민을 기초로 한 우리의 새로운 문화를 남조선에서는‘10월’을 통하여 더욱 절실히 처음으로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남조선 문학예술의 투쟁기는 여기에서 시작하여도 그 전모를 이해함에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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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수기는 필자가 과거에 남조선에서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 남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으로서 남조선문화운동에 실제 가담하고 견문한 비를 기록하는 것이다.(194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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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수기를 1947년 5 ․ 1 절이 지난 며칠 후 남산 미군 사격장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을 한 시인 배인철 동지에게 주노라.
 
 
 

2. 인민항쟁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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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23일 남조선 전 철도 노동자의 파업에서 발단한 전 남조선 인민의 항쟁은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남조선 문화 부면에서는‘예술은 인민에게 복무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강령은 세우면서도 미처 서재나 회질을 나오지 못한 예술인까지 우리의 당면한 임무와 그 구체적인 방향을 깨달은 것은 참으로 의의 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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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조선 문학가동맹에서는 용산 기관구에서 농성 중에 있는 3천 종업원들에게 격려히는 성명서와 시 작품을 들고 가 직접 현지에서 낭독을 하고 다시 여러 맹원들의 따뜻한 성원인 구원 기금을 놓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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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동맹과 음악동맹 미술동맹 영화동맹 사진동맹에서도 각각 우리와 같은 일을 하였다. 이 중에도 특기할 것은 미술동맹의 박문원 동지가 용산 기관구 안에서 철도노조의 동무들과 함께 농성 중에 체포된 일이며 건강치 못한 그의 몸으로 경찰에서 2개월 가까운 심고를 당하고 자유의 붐이 되어서는 곧〈감방〉이라는 해방 이후 남조선 화단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는 걸작을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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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투사를 주제로 한 것인데 화면은 남조선의 실상을 그대로 말하듯 억누르는 공기 속에 쇠창살이 둘려 있고 이 안에서 세 사람의 젊은 투사들은 서로서로 무엇을 논의하고 계획을 한다. 질식할 것 같은 억압 속에서도 자신과 희망에 넘치며 능히 명일을 계획하는 이 면모는 확실히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 것이며 크나큰 자랑을 보태인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스스로 항쟁을 구가(謳歌)한 시인만도 그 수효가 50명이 넘었다. 이 중에도 유진오의 시「10월」은 발군의 것으로 우리의 가슴에 크나큰 흥분과 감동의 피문을 던졌다. 유진오 동지는 이때 옥중에 있었다. 1946년 9월 1일 국제청년데이 훈련원 대회장에서「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라는 시를 읽어 수만의 군중을 열광시킨 것이 그의 죄명이었다. 미군정 재판에서는 그를 오직 시한 편 읽은 것만으로 10개월 징역이라는 세계에서도 진무류(珍無類)한 판결을 내렸다. 옥중에서도 강렬한 옥내 투쟁을 전개하며 간혹 출옥 동지의 편으로 보내는 그의 시는 한 편 한 편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의 시「10월」은 마디마디 인민의 원수들에게 가슴이 서늘한 표현을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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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칼스런 눈깔처럼 반짝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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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부리에 앙가슴을 디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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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발라 곱게 빗은 하이칼라 뒤통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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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매로 보석을 박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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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피 선지피가 엉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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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밟고 미끌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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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둘러메고 앞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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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남조선 인민들의 북받치는 감정과 또 10월항쟁이 일어난 직접 동기인 반동경찰의 대구학살사건을 여실히 그려 우리 인민의 굳센 투쟁의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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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창을 열고 오래비를 꺼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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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을 몰아넣고 철창문을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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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창은 너의 것이다. 저승까지 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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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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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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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정강이에 삽자루가 날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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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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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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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목숨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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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10월은 앞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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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10월은 비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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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격월(激越)한 해조(諸調)와 웅건한 투지 그리고 대상의 포착이 직접적인 이 수법으로 그는 조선 시에서 건전한 면만을 들고 나온 시인이었다. 이 같은 박문원 유진오 두 동지는 모두가 20대의 청년이요 해방 직후는 학병동맹을 거쳐온 전사이며 그전에는 학창에 있던 뭄으로 일제의 강제 징병을 완강허 거부하여 징용에까지 끌려갔던 굳세인 동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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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조선 인민의 항쟁이 날로 성할 때 서울의 번화한 길목 종로 구리개 진고개 등의 마구리, 국제극장(전 명치좌)앞, 정거장 이러한 요소요소에는 각 지방 반동경찰의 주구들이 그들을 치고 있을 때 우리는 듣기에도 가장 시원하고 가슴이 터지며 용기가 저절로 샘솟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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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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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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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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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에 전사를 맹서한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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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는 임화 씨의 노래를 김순남 동지가 작곡한 것으로 이것은 며칠을 가지 않아 전 남조선에 퍼지고 세 살 먹은 아이까지도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해방의 노래〉를 작곡하여 남조선 인민으로 하여금〈애국가〉보다 더 사랑하여 부르게 하고 모든 민주 진영의 대열에서 그들의 노래를 만들어주어 많은 공헌을 한 이 동지는 다시 우리 인민에게 잊을 수 없는 곡조와 투지를 심어주었다. 어느 예술보다도 그 양식의 잔재를 청산하기 힘드는 음악 부면에서 내용과 형식을 통하여 제일 먼저 왜후(俊興)를 몰아내인 훌륭한 공로자이다. 비근한 예지만 미군정에서 육성시키는 반동적인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또는 경찰원들이 행군을 할 때면 그들이 먼 곳에서 부르며 오는 노랫소리가 반드시 일본 군가같이 들린다. 그러다가 가까워지면 노래는 조선 노래인데 웬일인지 일본 것으로 들린다. 이것은 순전히 리듬과 멜로디의 작용이다. 그런 것을 우리 민주 진영에서는 김순남 기타 음악동맹 여러 동지의 힘으로 완전히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그 곡조가 우리의 생활 감정 호흡에 일치하여 스스로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우리의 용기로 되어진 것은 참으로 이들에게 감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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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동맹의 결정과 성명에서보다도 이러한 실천에서 더 큰 위명(威銘)과 분기(舊氣)를 얻은 것이나 그 시(時) 그 시(時) 통맹의 성명과 결정은 시의를 얻은 것으로 여러 맹원들을 옳은 노선과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었다. 예술이 인민과 굳게 결부되고 또 ‘모든 문화는 인민에게’ 라는 구호가 이때서부터처럼 절실하게 요구된 것은 무엇보다도 영웅적인 인민의 항쟁이 쥐어준 피의 대가였다. 이러한 기운 속에서 11월 8일 문학가동맹이 ‘문학운동의 대중화와 창조적 활동의 전개에 관한 결정서’ 를 내었다. 뒤이어 12월 초에는 동맹 안에 농민문학위원회가 새로이 생기었다”11월 8일의 결정서는 그때 정세의 필연적 요구이며 또 문학인들이 조직의 거점을 통하여 대중을 육성시키며 문학 활동의 실천적 전개를 하려는 남조선 문학예술인들 자신의 구체적인 표현이었고 농민문학위원회의 성립도 여상(如上)의 기운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농민을 노동자계급과의 공고한 동맹의 정신 아래서 계몽 육성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이 여기의 근본적인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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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 산하의 각 예술 단체를 총동원시켜 그 역량을 집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1947년 1월 8일서부터 동 15일까지에 가지려 한 종합예술제부터이다. 처음부터 한 사람의 변변한 예술가도 갖지 못한 반동 진영에서는 문련의 이러한 계획이 발표되자 그들은 비열하게도 이 행사의 파괴 공작을 도모하였다. 테러단을 동원하여 우선 시내의 각 극장 관리인을 위협한다 별에 별짓을 다 하였으나 연극동맹 영화동맹 음악동맹 무용예술협회 문학가동맹이 통합하여 하는 이 행사는 예정의 날짜인 1월 8일부터 시내 중앙극장에서 개최를 보게 되었다. 이 첫 축전은 공연 시간상의 제약으로 많은 인원을 등장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계의 예술가들이 총망라된 것은 성사였고 또 이것은 이 땅의 우수한 예술가들이 어떤 정치적 노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가를 인민대중 앞에 표시하는 산 증거이기도 하였다. 대한민청의 검두한(이자는 일제 시대부터 서울에 이름난 쌍패로 왜경의 끄나풀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테러의 중진으로 현재는 살인범으로 옥중에 있다)과 그의 도당들이 저희들 상사의 사족을 받고 폼이 달아 뻔질나게 무대 뒤 분장실에까지 와서는 개인 위협을 하였다. 그들은 이 모든 방해공작이 실패에 돌아가자 초만원을 이룬 관객석으로 나가서 미리부터 준비하였던 수류탄을 무대 위에 던졌다. 세인이 다 아는 이 흉한이 무대 위에 수류탄을 던지며 “폭탄이다! 모두들 달아나거라” 소리를 지르고 앞서 달아나니 장내는 발각 뒤집히었다. 폭탄이 터지던 무대가 날아갈 것은 물론 또 사람이 얼마가 상할지 예측할 수도 없다. 배우들은 뛰어 달아났다. 이 순간에 무대로 달려나와 수류탄을 맨손으로 집어들어 가슴 안에 묻으며 소리를 지른 사람이 있었다. “동무들 조용합시다. 폭탄은 아무 일 없다!” 하고 외친 동무는 음악동맹의 성악가 강장일 동지였다. 해방 이래로 언제나 인민의 선두에서 노래 부르고 또 그 노래를 힘차게 지도한 이 동지의 영웅적인 행동은 이 예술제를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이 동지의 생명을 걸고 집은 폭탄은 다행히도 불발물이었다. 그러나 영회동맹의 문예봉 여사는 임화 씨의 시를 낭독하고 경찰에 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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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도 김두한의 도당들이 왔다. 그들은 또 공연 도중에 무대를 향하여 연습용 소이탄을 던졌다. 그들의 음모는 시민들을 놀래키어 다시는 이 공연에 오지 않도록 함이었으나 효과는 그들의 생각과는 반대방향으로 났다. 작지 않은 이 극장은 쇄도(殺到)한 군중으로 인하여 겹겹이 싸였다. 경찰은 이러한 대성황에 눈살을 찌푸리었다. 군중에게 위험한 행동을 감행한 무리가 번연히 어떤 자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시침을 떼던 경찰은 이 예술의 축전을 중지시키려 함에는 손이 빨랐다. 그들은 이 예술제를 보려고 운집한 군중을 멸시하는 눈으로 보며 그들 앞에서 경찰은 공안을 소란케 하는 이 축전을 중지시킨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것은 예술제가 열린 지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9일이었다. 공안을 소란케 히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연극동맹 함세덕 동지의 희곡「하곡」전 1막이 문제가 되었다.「하곡」은 일정 시대 공출이 심할 때의 농촌 참경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어쩌면 현 미군정하의 남조선 현실과 틀림이 없는지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뇌물에 칙갈맞은 장면은 임석한 경관까지도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밖으로 나가버리게 하였다. 부당한 중지를 당한 이 예술제는 가혹한 조건 밑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그들의 의지와 투쟁의 보람으로 장소를 바꾸어 이번에는 거리가 도심 지대에서 좀 떨어진 제일극장에서 1월 14일부터 동 18일까지 시민들의 절대적인 성원 기운데 대체로는 무사히 끝을 맺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음악동맹의 김순남 동지는 애국가를 지휘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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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장택상의 악법령이란 이러한 속에서 나왔다. 그 내용이란 연극이 하나의 오락물인 줄 알았더니 요새에는 이것을 정치 선전에 이용하는 지들이 많다. 내(장택상)가 일찍이 툴스토이의 예술도 보아왔지만 그런 일은 없다. 이러므로 앞으로의 연극에서는 절대로 그 내용 속에 정치나 사상이 들어서는 용서 없이 탄압을 가할 것이며 또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고의 단호한 검열이 있어야겠다는 것이 그 주지였다. 이것은 처음 포고문의 형식으로 가로상의 요소요소에 붙여 있었다. 이 무도하고 뻔뻔한 간섭은 새로이 싹트려는 우리의 민족 문화를 직접 잘라버리려는 매족적 행위임은 틀림이 없다. 정치와 사상이 없는 흥행을 하라. 즉 이무런 내용이 없는 연극을 하라.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러한 주문은 나날이 성장하는 우리 민주 문화의 역량에 대한 적측의 숨길 수 없는 발악이다. 그러나 그 언사의 유치하고 치졸함은 저희 진영의 식자들에게도 웃음을 사고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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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서는 그때 임박한 3 ․ 1캄파를 향하여 더 큰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포고문에 분연히 일어섰다. 전 남조선의 문화인들은 언론 지상을 통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물론 개개인이 여기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는 논평을 하고 또 각 단체에서는 항의문을 작성하여 장택상에게 수교를 하고 나아가서는 소위 민정장관 안재홍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까지 담판을 하였으나 그들은 이 포고문을 취소시키기는커녕 더욱 강화시킬 목적으로 서로 책임만을 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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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남조선문화옹호총궐기대회는 시청 당국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개회를 하였다. 시청에서는 시장이 부재라는 명목으로 그의 사인을 안해 주려 하고 경찰에서는 정보과장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계출서(屆出書)를 접수하지 않아 어떻게든지 시일과 시간을 연장시키고 이날도 군중들에게는 불허가가 된 듯한 인상을 주어 군중이 일단 흩어졌을 듯한 시간을 기다린 다음 허가한다. 이러고도 그들은 군중이 많으면 집회 계출시의 정원(이것은 회장의 좌석 수용 인원이다) 이상이 입장하지 못하도록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간업을 시킨다. 그러나 이날의 대회는 어느 때보다도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대회는 개회를 하자 선열에 대한 묵상이 있을 때 남궁요설(南宮堯卨)의 장중한 베이스로〈남조선 형제를 잊지 말라〉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장내는 모두 다 숙연한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이 노래는 인민항쟁에서 피 흘린 동무들에게 드리는 조가였다. 회의 순서는 남조선 현실 문화 정세에 대한 보고에서 시작하여 각 동맹과 단체에서 문화 파괴자와 이것을 방조하는 반동경찰에 대한 개별적인 폭로와 호소를 하였다. 각계의 대의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룻장을 구르며 호소하였다. 이 중에도 더욱 애처로운 것은 부당히 학원을 쫓겨나온 나어린 생도들이 학원의 민주화와 학생의 자유를 달라는 제의를 한 것이다. 회의는 끝으로 북조선의 혁혁한 건설도상에 있는 문화정세의 보고를 하고 남조선도 하루바삐 이와 같이 되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시련이나 악랄한 적 측의 음모라도 이것을 단호히 분쇄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는 결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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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회의는 다섯 시간에 걸쳐 진행되고 경찰측에서는 여덟 명의 속기생들을 동원시켜 하나도 빠짐이 없이 우리들의 언사를 기록해 갔다. 회의 도중에는 격하여 연시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적진에게 도전적인 언사와 통렬한 공격을 던졌다. 그러나 이날은 회의 도중에 연사를 체포하거나 또는 폐회 후에도 경찰에 연행시킨 일은 없었다. 벌써 그들도 전법이 좀 진보한 것이다. 대회에는 많은 문화인들이 모였으나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러한 폭로와 공격이 없더라도 이미 경찰의 비행은 잘 이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여기서 섣불리 손을 내어 말썽 많은 이들에게 문제를 더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어 소문이나 더 나지 않게 하자는 것이 이날 그들의 전술의 착안점이다. 반동경찰이 제 집 안굿으로 돌린 이 대회는 그러나 남조선 문화예술인에게는 오랫동안 울적하였던 가슴을 풀고 또 새로운 예기(錫氣)를 돋우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3월 1일 기념 행사에는 연극동맹만도 두 극장을 차지하여 공연히는 성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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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행사에는 여닮 개의 극단이 둘로 합하여 하니는 함세덕 작「태백산맥」5막과 또 하나는 조영출 작「위대한 사랑」4막 5장을 각각 상연하였다. 1월 30일 장태상의 포고는 여기서도 발동하여 상연 극본은 만신창을 입었다. 예를 들면 사또가 무고한 농민을 잡아다 놓고 때리는 장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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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 허 그놈 그놈 그저 황소마냥 농사나 지어먹고 사는 놈으로 알았더러니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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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 흥 황소도 뿔이 있다 뿔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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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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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농민이 견디다 못하여 대꾸하는 말까지도 삭제를 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악질 관헌에게 반항하는 말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작품은 동학란을 배경으로 하고 탐관오리를 묘사한 작품인데도 그들은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현재의 저희들의 죄상과 결부한다. 그리고는 저희들의 모든 비행을 숨기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군정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둘러씌우려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남조선에서는 연극 작품 속에 현대가 배경으로 니올 수 없다「위대한 사랑」과「태백산맥」도 그들의 검열망을 빠지기 위하여 시대를 동학민란과 일제 말기로 하였으나 이것도 그들에게는 비수를 목구멍에 받는 것만큼 아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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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동맹 사진동맹에서는 각각 전람회를 가졌다. 회화나 사진의 내용은 점차 지난날의 소시민적 감정과 개인 도취의 경지에서 멀어지고 씩씩한 표현으로 나와 모든 것이 인민과 굳게 결부되어지는 것이 역력하였다. 문학가동맹 이것이야말로 반동경찰이 체머리를 흔드는 단체이다. 문학가동맹에서는 기회 있는 대로 강연회나 시의 밤을 위하여 집회계(集會屆)를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학가동맹의 집회에 한하여서는 각 연사들의 사진과 주소 성명을 명기해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책임자 한 명을 내세워가지고 그 사람 주소는 정회(町會)의 주거증명까지 첨부하여 어떠한 불상사가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이 전적인 책임을 지라는 등의 별별 어거지 트집을 꾸미어 방해를 논다. 이것은 어떠한 단체와 어떠한 집회에도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3월 1일 시민대회를 앞두고 인쇄 중에 있던 문학가동맹의『인민항쟁시집』은 종로경찰서의 불의 습격을 받아 제본 도중에 있던 것을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모든 출판물은 공보부에서 관할하는 것인데 경찰이 이 시집의 압수를 한 것은 언론 자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고 항의를 하니까 그들은 이것을 출판물이 아니라 3 ․ 1기념시민대회를 기회로 폭동을 일으키려는 폭동인쇄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번번이 꽁무니를 빼는 자들이기는 하지만 다시 군정의 각 기관으로 항의를 하러 갔다. 소위 민정장관 안재홍과의 면담은 김영건 동지와 필자여서 그의 말은 필자도 직접 면담하여 들였다. 그는 말하기를 다른 것은 다 좋으나 인민항쟁의 인민이란 말이 가장 경찰의 귀에 거슬리는 점인데 당신네들은 어쩌자고 이 ‘인민’ 이란 말을 썼느냐는 것이 그의 비난이었다. 민정장관의 말로는 분반(嘴飯)할 진담이지만 그의 말은 확실히 스스로의 입을 통하여 군정청과 경찰들이 얼마나 인민을 떠나 있으며 또 싫어하고 있는가를 표시한 것이었다. 시집『인민항쟁』은 끝끝내 나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반향은 컸다. 동맹에는 매일같이 각 지방에서 온 동무들로 갔으며 그 동무들은 입을 같이하여 이 시집을 찾았다. 반동경찰이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문화 부면을 간섭하면 할수록 역효과를 내어 인민들은 저마다 여기에 관심을 갖고 또 자기네의 문화를 열화와 같이 희구하였다. 민주 역량의 모든 조직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힘인 거와 같이 문화 부면에도 각 분야에서 이러한 기운이 농숙하게 되었다. 이것도 오히려 늦은 감이 있으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각 도연맹은 이러한 요구와 중앙의 기민한 활동으로 전 남조선에 걸치어 조직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여기에 호응하여 매일 12~13시간의 노동을 강제당하는 각 직장의 노동자 동무들이 반동 고용주와 악랄한 관리인의 의혹하는 눈을 무릅쓰고 동무들의 얼마 없는 귀중한 시간을 문화 부면 각 서클에 가담한 것은 특기할 일이고 또 모든 학원에서 옳은 선생을 잃어버린 민주 학생과 생도들이 그들의 불타오르는 진리에의 욕구와 향상심을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지도에서 직접 찾으려 한 것도 의의 갚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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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들은 여기에 비로소 진실로 무거운 책임을 자진하여 갖게 되었다. ‘모든 문화는 인민에게’ 라는 슬로건은 단지 구호가 아니었다. 광범하게 눈뜨기 시작하는 인민들은 서투른 우리의 문화 활동에도 뜨거운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다. 모든 정력을 기울여 진정한 우리 민족 문화의 수립에 매진하자! 모든 예술은 인민의 복지와 그 생활 향상에 전력을 기울이자! 이것은 구호가 아니다. 문화 부면에 종사하는 우리 예술인의 한 사람 한 사람이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소위 경무부장 조병옥이는 10월 인민항쟁을 3 ․ 1폭동 이후에 처음 보는 불상사라 하였다. 이들 반동 매족자의 눈에는 우리 근대사의 위대한 3 ․1운동까지도 일정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조선에 주둔한 미국 군대 중에서도 진보적인 인사들은 고급 장교와 사졸에 이르기까지 4백 명이나 모이어 미군의 조선 주둔을 반대하여 전군의 즉시 귀환을 요구하고 남조선의 인민항쟁을 동정하는 데모를 한 일이다. 이 행렬은 1946년 10월 서울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훈련원 앞에서 을지로(구 황금정)로 행진하는 도중 같은 미군의 무장한 헌병대에게 저지되었다. 여기에 관련한 현준섭 소좌(씨는 뉴욕 극계에서 연극 연출을 보는 예술인으로 조선계 미국인이다)와 그 매씨(현역 중좌)는 미군정에 의하여 즉시로 남조선에서 본국 추방을 당하였다. 모든 반동배들이 경악하고 저주하는 10월 인민항쟁은 그러나 남조선 인민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였고 또 우리 민족 문화에는 이 정신에서 새로운 원천을 길러내도록 하였다.
 
 
 

3. 문화공작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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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원 2백여 명의 예술가를 동원하여 전 남조선의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문화에 굶주린 우리 인민대중에게 그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문화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문화공작단 파견 운동의 실현은 우리 문회운동사상에 처음 보는 큰 사업이었다. 2백 명의 예술가는 4대로 나뉘어 각각 자기의 맡은 지역을 분담하고 1947년 6월 하순에서부터 동년 7월 하순의 기간에 그 공작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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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도 달라 여자 동무 중에는 젖먹이 어린애를 떼어놓고 우천(雨天)에도 노숙할지 모르는 이 공작대에 흔연히 참가한 동지도 있었다. 옥에서 나온 지 며칠이 안 되어 아직 건강이 염려되는 동지,가족 부양의 전 책임이 있는 여러 동지 그 중에는 직장을 떼어놓고도 참가한 인원이 문화공작단의 대부분의 성원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단체는 연극동맹 음악동맹 영회동맹 무용예술협회 문학가동맹 미술동맹 사진동맹 등의 여덟 단체였다. 다행히 필자도 여기에 참가하여 일생을 두고도 영영 잊을 수 없는 행복된 기억을 얻었고 또 예술가 됨이 얼마나 영예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절실히 느꼈다. 이 공작을 통하여 대다수의 문화인들은 그들의 미숙한 문화공작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민대중은 얼마나 따뜻한 애정과 뜨거운 공감으로 자기네의 문화에 대한 갈망을 표시하였으며 또 우리 문화인들은 각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며 우리의 인민대중이 반동과 얼마나 피투성이로 싸우고 있는기를 그 눈으로 역력히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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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는 공작 지대가 경남 일원으로 대원의 부서는 대장 유현(柳玄) 부대장 문예봉(文藝峰) 오장환(吳章煥) 기록 및 연락 유진오(兪鎭五)로 전원이 50명이 넘었다. 연예의 프로는 무용에 장추화(張秋華) 박용호(朴勇虎), 시 낭독에 오장환 유진오 문예봉,음악은 테너에 강장일(姜長一) 이경팔(李璟八) 소프라노에 한평숙(韓平淑) 반주에 정종길(鄭鐘吉)(작곡가),연극은 조영출(趙靈出) 작의「위대한사랑」전 3막- 본시 4막 5장 이것을 시간 관계상 3막으로 줄였다- 을 이서향(李購鄕) 연출로 예술극단 전원이 출연히는 성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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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6월 30일 우리의 제1대가 경성역을 출발할 때는 서울에 있는 예술가들의 거의 전부가 다 역 안의 홈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전송하였다. 이날 밤 부산역에 닿았을 때는 문련 산하의 예술가들과 맹원은 물론 민주여성동맹원과 민전의 의장단이 일제히 환영을 하여 천여 명 동무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의 환영 속으로 공작대의 전원은 첫날을 축복받았다. 지방 민전에서는 대원들의 숙박에까지 심려를 하여 일일이 알선을 하였으며 민애청 동무들은 자진하여 밤을 새워가며 경호의 임무를 담당하여 주었다. 부산에서 발간되는 7, 8개의 일간 신문은 단지 2개의 반동 신문을 제하고는 일제히 신문의 전면을 차지하는 환영과 소개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 인민대중과 또 인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측의 일이고 그 반면에 이럴수록 독아를 내밀어가지고 공작대를 노리는 것은 미군정하의 행정 관청과 반동경찰들이요 테러단의 준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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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소미공동위원회의 속개에서 더욱이 비등된 민주 역량과 이를 축하하는 명의하에 움직이는 우리 공작대를 이자들은 정면으로 누르지는 못하였으나 7월 1일 동 2일 부산에서 동 3일 동래 울산에서 이처럼 신속하게 그리고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게 되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공작대는 가는 곳마다 주야 공연을 위하여 그 어려운 교통 속에서 기차를 오전 3시 혹은 4시에 타기도 하고 취침을 일상 거진 11시가 넘어야 하는 단련을 받으며 왔다. 이 공작대에 참가한 사진동맹의 동지는 도중의 중요한 사실을 촬영하는 것은 물론 서울서 가지고 온 남산 메이데이의 사진, 속개된 소미공동위원회의 그리고 우리 민주 진영 지도자들의 여러 가지 귀중한 사진을 가는 곳 민전회관에마다 진열하여 모든 일에 궁금한 지방 동지들의 마음을 풀게 하였고 미술동맹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부산 마산 진주 같은 대도시에서 장기간 이동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전평 부산평의회에서는 각 직장의 노동자 동무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하여 하루에 한 공연씩을 더 하라는 요청이 왔다. 우리 대원은 이리하여 아침 10시부터 시작하여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 공연을 갖게 됨으로써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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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서도 우리 공작대의 임무는 각자의 출연이 끝나는 틈새 틈새에 자기들의 소속한 동맹 지부 동무들과 회합을 갖는 것이요 서클원들과 공작을 하는 일이 있다. 그리하여 대원들은 명실공히 자유 시간이란 잠시도 있을 수 없는 활동을 가졌다. 아침 10시 공연은 순전히 노동자 동무들과 그의 가족만을 받기로 되어 우리는 하나의 통일된 군중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시간이 남을 때면 틈틈이 무대의 막 뒤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오후와 밤 공연에 오는 유한분자 소시민들과 달리 극을 보는 감성도 다르다. 예를 들면 도시상인 소시민층은 관극 대상이 위로와 향락인데 이들은 전연 그러한 점이 없다. 그리하여 빅수 치는 장면도 다른 것이다. 노동자 동무들과 그의 가족들은 확실히 자기의 생활과 합치되고 부닥치며 여기에서 반발하는 장면이 있을 때에야 아우성을 치며 좋아한다. 막 뒤에서 구멍 뚫어진 사이로 객석을 내려다보던 필지는 이런 때이면 가슴을 쥐어짜게 울음이 나왔다. 그러나 또한 이 새로운 발견은 기쁜 것이었다. 다분히 소시민층의 감성을 벗지 못한 필자는 자기 자신의 위치에 놀라고 부끄러웠지만 이것이다 이것이다 하고 소리치고 싶게 느끼어졌다. 조그만 관극 태도에 있어서도 새로운 역사를 영도할 이 계급은 확연히 진취적이요 창조적인 면이 보인다. 발전하는 역사는 소비가 아니고 창조와 건설인 것이다. 이것을 논리가 아니고 감정으로 느끼었을 때의 필자의 충격과 감동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열광적인 인민의 모습을 그들이 볼 때에 이자들은 당황하고 전율하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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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즉 재차 부산 공연의 둘째 날 밤 무대에서는 연극이 한참 벌어졌을 때 반동테러단은 우리 무대를 향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던졌다. 이 춘사(權事)에 우리 대원은 여섯 명이 중경상을 입고 관객석에서는 어린이를 안은 부인 한 분이 중상을 당하여 이튿날에는 이 두 생명이 죽었다. 폭발된 연기가 삭기도 전에 미군 헌병과 C.I.C.와 반동경찰은 여러 대의 트럭으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게 한 후 경찰은 50여 명을 트럭에 싣고 갔다. 그러나 이 50여 명이란 것은 범인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우리 공작대원들이었다. 이날 밤 경찰서에서는 이 밤 사건과는 이무런 상관도 없는 대원들의 본적과 현주소 직장 연령 이런 것을 필기하고 폭발되는 현장에서 목도한 이야기를 형사들이 무려 20여 명이나 모여들어서 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대원의 본적 현주소 직장 연령은 이미 우리들이 오래전에 벌써 그들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그들은 범인을 찾는 것보다는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밤 새로 1시나 되어서 대원들을 숙소로 돌려보냈다. 대원들이 숙소로 돌아올 때에는 통행금지 시간이요 밖에는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40 분이나 넘는 길을 호위하여 주는 경찰도 없이 도보로 쫓아내었다. 그리하여 몹시도 피곤한 폼으로 더욱이 언어도단인 것은 부상당한 동무들까지 끌려갔다가 돌아와 보니 숙소에는 벌써 피스톨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사복 경관이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무도한 경찰은 부상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대신에 핑계만 있으면 유치장으로 넣으려 하였고 또 피해당한 대원들의 신변은 조금치도 생각지 않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뻔뻔스럽게도 숙소를 호위해 준다고 보기에도 몸서리치는 단총을 들고 오지 않았는가. 이 형사놈은 제가 인민항쟁 때에도 그 단총으로 수많은 사람을 쏘아 백발백중을 하였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우리 대원은 바로 우리 앞에 사뭇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가 우리를 보호한다는 가면하에 감시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튿날은 도 공보과에서 원고의 재검열을 하자고 하였다. 경찰에서는 공연을 보장할 수 없다고 흥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리고 우리 대원이 공연하는 ‘부산극장’ 은 도에서 직영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장 나가리는 것이었다. 구실은 산더미 같다. 우리는 여기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 민전의 의장단이 항의를 하러 갈 때 필지는 공작대를 대신하여 함께 갔었다. 공보과에서는 검열관이란 자가 소미공동위원회 축하의 노래를 삭제하자는 것이다. 의장단의 한 분이 성을 내어 테이블을 치는 바람에 잉크병이 푹삭 엎어졌다. “아니 미군정 장관 하지 중장도 좋다고 하는 소미공동이요 또 이것을 축하하는 노래인데 어느 놈이 반대하는가. 이것은 우리나라 독립을 바라지 않는 민족반역자밖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분은 소리를 질렀다. 공보과장은 당황하여 답변을 못하면서도 이 노래를 삭제하기 전에는 전체의 공연을 허가할 수 없다고 버렸다. 의장단에서는 그러면 그따위 공연은 그만 중지하자는 것이다. “당신들은 여론을 존중하지 않는가. 만일 이 사실을 즉시 서울로 타전하면 당신들은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래도 좋으냐’ 고 필자도 달래어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말로는 요지부동이었다. 20여 년을 일정하의 도청 고원으로 끌려다니다가 새로 출세하였다는 이 친구는 과장 자리가 무척 애착이 가는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무슨 모욕을 당하더라도 과장 자리만은 떠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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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지들과 싸우며 다시 경찰청장을 방문하였다. 그는 표면 번드르르한 언사로 응대하나 이 친구도 될 수 있는 대로 책임은 회피하려는 눈치였다. 의장단의 요구는 작야(昨夜)의 테러를 즉시 체포하고 그 단체를 해산시킬 것,공연중에 극장에서 우리 진영의 자위 수단을 인정할 것,그렇지 않으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경찰이 그 보호에 만전을 다할 것,작야 경찰측의 무례한 행동에 진사(陳謝)를 할 것,금후는 도내 각 지방을 순회할 때 말단 관청에서 일제 부당한 간섭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 중에서 한 조건이라도 관철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 행동으로 나가겠다는 엄중한 항의다. 소위 경찰청장은 모든 조건을 응락하는 듯이 하며 실상은 연극 문제로 우리를 배제하려는 눈치였다. 문화공작단의 방해 공작의 선봉은 경남도 조선인 지사 김철수(모든 중요한 부서에는 반드시 미국인과 조선인 둘이 있다)였다. 이자는 한민당의 지방 간부이다. 극장을 몰아내어 공연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일차 전법인 모양이었다. 50여 명의 인원이 남조선같이 고물가의 곳에서는 하루의 식비만도 만여 원이 넘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좋게 해결지어야겠는데 김철수란 자는 진주에 출장 갔다는 핑계로 나오지를 않는다. 이 문제로 인하여 우리가 현재 공연 중인 부산극장 관리위원의 한 사람인 경찰청장을 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장단의 놀라울 만큼 확고한 태도와 씩씩한 언동은 필자가 아무리 폼을 사리려도 용감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경찰청장을 보고 만일 극장의 장소 문제가 부당하게 취소된다면 우리는 40만 부산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극장 안에서 농성으로써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흥 총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여” 의장단의 한 분이 그들을 야유하자 “총입니까 총을 맞은 것이 우리가 이제 한두 번이요 이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한 말은 아닙니다” 하고 필자는 말끝을 다졌다. “청장 이것 보시오 지금 서울서 온 동무가 결의를 저렇게 굳게 하니 우리 경남도 민전 산하의 백만 동지들이 그냥 앉아 있을 수야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도 함께 나서서 동일한 행동을 할밖에 없습니다” 하고 의장단의 다른 한 분이 굳은 결의를 보인다. “아니 여러분은 어쩌자고 자꾸 극단의 예를 취하십니까” 경찰청장이 당황하여 화제를 돌리려 한다. 산하의 많은 동지들을 인솔하고 아무 때나 힘차게 또 굳세게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뚜렷한 의장단의 이 미덥고도 굳굳한 태도는 그들과 처음으로 부닥치는 필자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용기와 감동을 그리고 또 거대한 우리의 힘을 느끼게 하였다. 전장으로 치면 확실히 이곳은 일선이다. 인민항쟁의 발상지인 만큼 이곳의 동지들은 감때가 사납다. 우리는 이러한 싸움 끝에 다시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민전 산하의 모든 우리 진영에서는 각 기관의 대표들이 그칠 사이 없이 공작대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영도 공장 지대에서는 일부러 노동자 동무들의 각 공장노조 대표와 해원동맹의 동무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격려를 하였다. 이 동무들은 살림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공임을 위하여 매일매일 열 시간 열한 시간 고된 일을 하는 동무들이다. 이들이 구차한 주머니를 털어 부상한 대원에게 과실을 선사해 온 것이다. 극장 앞에는 시민들이 운집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공연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환성을 올리며 입장하였다. 대원도 중상을 입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을 제하고 그 나머지 부상자는 몸에 붕대를 감은 채 출연하였다. 경찰에서는 청장의 지시에 의하여 극장 앞을 무장 경관이 지키고 입장하는 관객 중의 남자 시민은 남자 경관이 부인들은 여자 경관이 각각 분담하여 신체를 일제히 수색하였다. 이것은 흉기 가진 사람의 입장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이나 그 조사 방법에 있어서는 일반 시민의 불쾌감을 사게 하여 다시는 이 공연에 오지 않도록 하려는 그들의 내심을 적지 않이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일이나 부산만 하여도 7,8개의 일간 신문이 있는데 도무지 중앙 소식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완전히 국내 통신은 두절 상태이다. 이러고도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은 연락과 요금 기타 관계로 개인은 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밤이 되자 서울 문련 중앙에서 김동석,박찬모 두 동지가 대원 일동을 위문 겸 격려차로 이곳에 닿았다. 문련 중앙의 메시지와 민전 중앙시무국장 홍증식 선생의 격려문도 대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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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측에서는 그들의 의도가 무참한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계속하여 음모를 그치지 않았다. 디음에는 미군 C.I.C.까지도 간업하였으나 아무런 구실이 없어서 물러갔다. 또 그다음에는 미국인 지사의 명의로 무조건 중지 명령이 내렸다. 갑자기 변을 당한 우리는 무대 화장을 채 지울 틈도 없이 남녀 배우 동무 10여 명을 동반하여 가지고 이 미인(美人) 지사를 방문하였다. 도청으로 관사로 잘 가르쳐주지도 않는 것을 가까스로 찾아 그의 집 앞에까지 닿았을 때 우리는 그의 조선인 비서 서 박사란 자를 만났다. 이자는 조금 전 도청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 이 지사의 집을 모른다고 하던 자이다. 이자가 슬며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오래지 않아 미국인 장교가 권총을 빼어들고 고함을 질렀다.“어서 가거라 가지 않으면 쏠 테다”하던 그는 화려한 남녀 배우의 모습과 동작을 보고 주춤하였다. 서가 놈은 미인 장교를 보고 지금 문 밖에 폭도들이 왔다는 흉악한 모략을 세웠던 것이다. 우둔한 소견에는 네까짓 것들이 무슨 영어를 하겠느냐는 건방진 생각이었으나 우리 대에는 일찍부터 영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김동석 동지가 있다. 김동석 동지의 유창한 영어에 시질을 안 장교는 도리어 사과를 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자기 체면을 지키려고 공연 허가의 취소는 전연 모르는 일이라고 딴소리를 하였다. 그렇다면 다시 공연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사인을 하라고 하여 그들은 자기네의 말에 발목을 잡히어 입맛을 다시면서도 하는 수 없이 사인을 하였다. 두번째 부산 공연에서는 필자가 시 낭독을 하다가 경관에게 승강이를 당하였다. 시구에 10월항쟁과 24시간 파업 (1947년 3월 24일 민주 역량을 적 진영에 보이기 위한 전 남조선 일제히 1일간 파업함을 말함)이 말썽이 된 것이다. 이것이 공보과 검열에도 허가된 것이다. 이것이 트집으로 유진오 동지의 시도 또한 말썽이 되어 유진오 시는 전체가 불허개 필자의 것은「승리의 날」이 다시 불허가로 되었으나 이 중에는「공위여!」하는 작품도 끼었다. 공보과장이 마침 극장에 와 있다가 이 꼴을 당하고 일개의 형사에게 굽실거리는 모양은 가관이었다. 공보과 재검열에서「위대한 사랑」의 한 장면이 깎인 것은 웃지 못할 희극이다. 극중의 여주인공이 동헌 마당을 쳐들어오다가 총을 맞고 죽는 남주인공을 보고 “내 사랑 내 낭군이 가는 길을 내 어이 못 가겠소 나에게도 죽창을 주시오” 하는 장면인데 그의 말을 들으면 죽창은 10월항쟁서 인민들이 많이 사용한 것이므로 기억이 너무 생생하니 이 말을 빼라는 것이다. 죽창이 안되면 맨손으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러면 칼을 달라고 하라는 공보과장의 명답(?)으로 죽창은 그 후 칼로 출세를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도 9일까지의 부산 예정을 완전히 마치고 10, 11일 밀양, 12일 김해,13일 진영,14일 진해,15,16일 마산, 17,18일 삼천포,21,22일 진주,23,24일 통영 이렇게 다시 전 경남 일대를 끝까지 돈 것은 참으로 즐거운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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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의 세례는 더욱이 우리 인민대중에게 공작대가 오기 전부터 자기네와 한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원수들에게 함께 노림을 받는 동무들 그리고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방방곡곡이 자기네를 찾아주는 동무들 이러한 감정은 우리 인민대중을 도처에서 물 끓듯 하게 하였다. 밀양서는 미리부터 관객의 조사가 심하여 사고는 안 났다. 그러나 우리 공작대의 공연 중 반동청년단에 있는 놈이 잘못하여 제집에 꿈쳐두었던 화약덩이를 제 발로 밟아 폭발된 일이 있다. 이 속에서도 공작대는 하루 공연을 조선모직에 있는 노동자 동무와 그 가족들에게만 바치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공연이 끝나고는 조선모직회사 공장을 전원이 견학하고 환영회를 받았다. 이 공장은 모직기만 80대가 넘는 우수한 곳이나 현재 움직이는 대수는 겨우 20대도 못 된다고 한다. 공임이 너무 헐하여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으나 모두 다 그만두면 아까운 기계를 버리게 되니 그것이 애처롭다는 것이다. “앞으로 건국이 되면 이게 다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 조선 사람의 것이 아닙니까” 하고 기계 옆에 서서 일하는 동무가 이렇게 말한다. 직접 노동자들은 기계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 잘하면 일인의 소유를 적은 밑천으로 거저 먹겠다는 조선인 기업가들은 그 목적이 뜻대로 안 되면 공장이야 흐너지거나 썩어지거나 개의치 않는다. 이것과 비교하여 볼 때 여기서도 인간의 우월은 확연하다. 테러들이 도처에서 신경전으로 나왔다. 어느 날 아무 시 어느 곳에서 습격을 한다. 목표 인물은 누구와 누구다. 이렇게 하여 대원들을 놀래키고자 하였으나 우리 대원들은 규율 있는 단체 행동만을 하고 자중하여 종시 그들의 계책을 일축하였다. 진주에서 통영을 가는 행정에서는 광복청년단과 독촉 테러들이 우리 공작대가 경남 일대를 다 돌도록 그냥 두는 것은 저희들의 체모가 깎이는 것이라고 어떻게든지 일전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진주경찰서에서는 이것을 이유로 통영을 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것을 미연에 막는 것이 그대들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중지를 권고함은 희극이 아니냐,우리는 이러한 사태쯤은 미리 각오하고 출발한 것이니 절대로 이 행정을 철향할 수는 없다” 하는 것이 우리 공작대 전원의 결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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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지를 순회하는 동안에 반동 경찰의 특질 속에서 중세기 용병과 같은 그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 미물과 같은 무리들은 그저 저희들이 있는 곳에서 무슨 사고이고 나는 것을 꺼리었다. 주는 총을 받아들고 있으나 인민대중이 한없이 무서운 것이 말단 반동 경리들의 갖고 있는 솔직한 심경인 것이다. 공작단이 도처에서 인민대중의 뜨거운 환영을 받은 것을 일일이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대원들이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을 인상을 받은 곳은 김해에서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서였다. 김해 공연을 마친 우리는 궂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을 불구하고 다음의 예정지인 진영을 향하여 뚜껑도 없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대원들은 모조리 비에 젖어 하는 수 없이 포장을 뒤집어쓰고 물에 채인 짐짝처럼 뭉기어가는 중이었다. 차가 김해를 떠나 15리쯤 왔을까 그때부터 신작로 가에는 5,6명 혹은 10여 명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떼를 지어 가는 사람들이 있더니 그들이 우리들의 치를 향하여 무엇인가를 던졌다. 이것은 테이프 대신에 신문지로 된 문풍지 같은 것을 국수가락처럼 가늘게 오려서 이것을 색종이 대신으로 우리에게 뿌려주는 것 이었다. ‘문화공작단 만세’ 이러한 친구는 이처럼 소리를 친다. 우리들이 탄 트럭이 산 밑에 있는 다리목에 왔을 때 우리는 그곳에 10여 명의 건장한 친구들이 팽이와 쇠스랑과 삽자루를 제각각 들고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운전석 옆에 앉았던 여자 동무들은 테러들인가 하여 질겁을 하였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은 질겁을 하는 그들을 보자 도리어 환성을 높이어 삽자루와 팽이와 쇠스랑에 말린 깃발을 풀었다. 삽자루에서는 붉은 기가 휘날리었다. 팽이자루에서는 민청기! 아 무도하게도 반동경찰에게 해산을 당하여 이제는 있지도 않은 민청의 기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낯익은 이 깃발이 날리는 것이다. 쇠스랑에서는 전평의 깃발 그 다음은 농민조합의 깃발 그 다음은 여맹의 깃발 하나하나가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우리의 깃발들이 우리를 향하여 퍼덕이고 있지 않은가 전원은 몸부림을 치고 싶은 마음으로 여기에 호응하여 인민항쟁가를 불렀다. 해방의 노래를소리 높여 불렀다. 그 동무들도 목메어 만세를 부르며 우리와 함께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예서부터 비를 맞으며 기는 밍명 혹은 1 백 명의 인원이 우리에게 수제(手製)의 신문지 색종이를 뿌리기도 하고 만세를 불러주었고 밭에서 호미로 밭을 매던 농민이나 랭이질을 하던 사람까지 공작대를 향하여 환성을 높이었다. 이곳에서 더욱이 가슴이 찔린 것은 김 매는 할아버지가 역시 그 마나님인 듯한 호호백발 할머니의 허리를 쭉푹 질러 우리를 가리킨 다음 이 두 양주분이 우리를 향하여 마치 치성 드리는 사람 모양 두 손으로 빌며 흙바닥에서 큰절을 하시는 것이었다. 트럭이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단박에 뛰어 내려가 흙바닥에 가슴을 부비며 울었을 것이다.“우리는 의지가 약하던 문화인들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도 당신들이 원하시는 일을 원하여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북조선에서는소련군의 적극적 원조와 김일성 장군의 올바른 지도로써 우리들이 소망하는 민주 개혁이 착착 실시되고 있습니다. 남조선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싸워서 하루라도 빨리 당신의 눈으로 이것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북받치는 감정을 외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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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비 속에서 50리 길을 우리는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진영에서는 비를 맞으며 환영하는 동무들이 천여 명이다. 그들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즉시로 공연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신작로에서 줄을 지어 오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 공작대를 불러오기 위하여 떠난 사람인 것도 이곳에서 알았다. 감격 속에 젖은 전원은 누구 하나 괴롭다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이 없었다. 극장은 생긴 이래에 처음 보는 대만원이라고 한다. 대만원이 아니라 워낙이 많은 사람이 들어차니까 무대 위로 더운 김이 확 끼치어 숨이 막힌다. 필지는 먼저 부산극장과 밀양의 하루 공연에서 노동자 동무와 그 가족들만의 군중에게 크나큰 감동을 느끼었으나 이곳에서는 그보다도 순박한 우리 농민을 만났다. 그들은 아마도 평생에 처음으로 연극을 구경하는 모양이었다「위대한 사랑」이 시작되면서부터 흥분한 군중은 어쩔 줄을 몰랐다. 무대에서는 50여 년 전 봉건 특권계급에게 무고히 죽어나가는 농민들이 그려졌으나 관중석의 농민들은 확실히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이무런 거리도 없는 착각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농민대중에게는 시간과 장소도 관계가 없었다. 억울한 사실 원통한 이 사실이 그들의 생활에 부합되는 데 놀라서 중병 들린 사람이 거울을 보고 놀라듯 그들은 뼈가 아픈 모양이었다.「위대한 사랑」은「춘향전」과 유사점이 많다. 여기에서 춘향 어미 비슷한 역을 하는 퇴기가 그 딸인 여주인공을 보고 기안에 창명하지 않는다고 야료하며 어서 냉큼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가라고 하니 관중석에 있는 농민의 부녀자들이 “이년아 네나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거라” 소리를 지르며 조용하지를 않는다. 3막에는 변학도식의 사또가 무고한 농민을 잡아다 놓고 행형(行刑)하는 장면이 있는데 “저놈 집아내라” 고 관중들이 어찌 소리를 지르는지 연극이 진행되지 않았다. 좀 조용해야 연극을 계속하지 않겠느냐고 청하나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또 놈을 잡아내어야 떠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또를 잡아내면 어떻게 연극이 되겠는가. 그러나 이 순박한 그리고 몇 천 년을 짓눌리기만 하다 처음으로 눈뜬 이 인민들이 이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연극은 사뭇 이렇게 나갔다. 끝 장면에는 동학의 지도자인 청년 주인공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다. 이 주인공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객석에 있는 한 젊은 친구가 별안간 가슴을 치며 “아이구 어떤 놈이 총을 쏘았능기오” 하고 외치는 소리는 그대로 천근의 무게였다. 필자는 어느 책에서 중국 공산군이 벽지로 다니며 공작하는 대목이 생각났다. 그 글을 읽을 때에는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가능하게 느껴질 때는 설마 어느 먼 나라에 있는 일이거니 생각하려던 마음에,지금 이 순진하고 때 없는 농민들이 몇천 년을 두고 한 번도 고개를 들어보지 못하던 이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안타깝게도 그들의 공감하는 바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토지는 농민에게로’ 하는 플래카드를 들었다고도 3개월이 넘는 징역을 하는 남조선이다. 태만하지 않느냐. ‘모든 문화를 인민에게’ 라고 외치면서도 우리가 우리 인민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어두운 것은! 진영은 인구가 불과 칠천의 소읍인데 이날 하루 세 번 공연에서 총 입장 인원이 4천 명이 넘었다. 인근 농촌에서도 많은 농민들이 왔다고는 하나 이러한 숫자는 어느 곳에도 그 예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우리 대원이 구두징을 박거나 이발을 하거나 도무지 값을 받지 않았다. 돈 낼 생각보다는 연극을 더 잘하여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진영에서 진해까지의 행정은 기차였다. 차가 이 중간 창원(이곳은 1947년 9월에도 경찰을 불사르고 항전한 곳이다)역에 닿았을 때 이곳에서는 2백여 명의 청년들이 승차하는 것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 공작대를 쫓아 일부러 진해까지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차 중에서 만세를 높이 부르고 인민항쟁가를 부르고 하여 우리의 원기를 고무하여 주었다. 진영과 이 근방 일대의 농촌은 경남에서도 유수한 민주부락이라 경관들이 무슨 볼 일이 있어 올 때면 동네 앞까지 다 들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동네 어귀에서 메가폰을 대고 만날 사람의 이름이나 혹은 용건을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 못지않은 곳을 우리는 공작단 순회 중에서 여러 차례나 지났다. 삼천포 같은 곳에서는 경찰서장이 우리에게 특청을 하여 왔다. 이것은 유진오 동지가 시 낭독을 못 하게 되므로 필자가 여기에 대한 설명 겸 아지를 하고 유 군이 여러분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 인시를 드리겠다는 순서로 다시 유 군의 아지프로가 나오는 장면인데 이 서장의 말은 우리가 말하는 ‘당국의 부당한 간섭’ 이란 말이 자기 지방으로 오해받기가 쉬웠다. 그러니 반드시 그 당국이란 꼭대기에는 도라는 말을 넣어 ‘도당국’ 이라고 하여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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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로 경찰이 인민을 두려워함은 당연하다. 그들의 죄상은 너무 크다. 이무리 저희들이 무기가 있다고 하나 인민대중 앞에는 창해에 일속이다. 군중들도 무슨 기회든지 모일 때마다 이러한 힘을 느낀다. 또 진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작대를 환영하는 군중이 플래카드를 들고 나오고 차에서 내린 사람도 창원에서 오는 동무들 때문에 인원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숙소를 민전회관에 정하고 짐을 풀어도 군중들은 가지않고 연설을 한번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필자가 반가운 인사를 하였다. 하도 감격하여 소리소리 질렀다. 미군 헌병이 와서 10분 안에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하였으나 연설은 그냥 계속되고 군중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당지 경찰서에 불리어 갔다. 그러나 경찰에서 문제로 하는 집회 허가가 없어 많은 사람이 모인 것 불온한 연설을 한 것 등에 대하여서는 당지의 민전 의장단이 나서서 이것은 역전에 환영을 나갔던 사람이니 환영객을 벌줄 수는 없는 일이요 연설이라는 것은 백주에 환영에 대한 답변인데 누가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항의를 하여 사후 책임은 민전 의장단이 맡기로 하고 필자는 우선 석방이 되었다. 짧은 기간에 여러 곳을 돌려는 행정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좀더 차근차근히 우리 인민의 생활 상황과 그 동향을 적확히 느끼었을 것이다. 각 지방을 도는 중에 우리는 수많은 청년들의 문학 작품을 받았다. 그 중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부산 철도기관구에 있는 조용린(趙容璘) 소년의 시와 진영 농촌에 있는 중학생 안성수(安聖洙) 군의 시였다. 이 두 소년은 모두 열여덟의 소년으로 그 시도 각각 출신 성분에 따라 다른 점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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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막집 극장 대생좌(大生座)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꽃다발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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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온 누구를 맞이하는 꽃다발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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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주머니에 돈이 안 모여 일 년 내 가도 굿(경상도에서는 극을 굿이라 한다-필자 주) 구경 한번 못 가는 노동자 동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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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엔 머리에 기름칠하고 농 안에 깊이 들었던 새옷 한 벌을 내어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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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골연(남조선에서 제일 싼 담배-필자 주)을 입에 물고 대생좌 앞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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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조 동무의 작품이다. 불행히 이 원고는 필자가 경남 지방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도중에서 이동 경찰에게 빼앗긴 바 그 뒤의 문의는 이러하다. 우리가 대생좌에 즐거운 마음으로 돈이 없는 동무들은 돈을 꾸어서까지 간 것은 이 모임이 남조선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왔대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네들이 우리 땅의 누질린 인민들을 위하고 또 그 편을 들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뭄으로써 항전을 하지만 그대들은 예술로써 인민항쟁을 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무대에서 쓰러질 때까지 싸워라. 우리는 기름과 연기에 절은 전장에서 쓰러질 때까지 일하며 싸우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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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필자가 해방 이후 두번째로 보는 놀라운 시였다. 이 작품의 특질은 작품의 대상과 작자와의 거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놀랍게 본 유진오 동지의「l0월」과 같은 계열에 서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과거에 문학 수업을 한 사람들은 대개가 작자와 작품 사이엔 일단 거리가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이것이 없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은 유형화된 감정이 아니라 적나라한 실감이 그대로 작품인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진영에서 본 마산중학생 안성수 군의 작품은 형식적으로 대단히 세련되었다. 감정도 우수하다. 그러나 전자에 비하여 판이한 대조는 내면 정신조차 형식화한 점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을 재래의 예술 편중에서 학습한 폐단의 좋은 예이다. 필자의 기쁨은 구김 없는 싹 새로 눈뜨는 우수한 싹들을 도처에서 본 점이다. 우리 조선의 모든 정세는 그들을 우수한 위치에 놓아준다. 조금이라도 태만하면 도리어 공작하는 사람들이 그 좋은 싹을 오도할 염려가 다분히 있다. 새로운 정신은 스스로 새로운 형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비판 없이 낡은 형식의 의장을 답습하여 오히려 깨끗한 정신을 때 묻혀서는 안 된다. 남조선 예술인들은 이 문화공작단을 통하여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일찍이 보지 못하던 점을 많이 깨달았다. 문화를 인민 속으로 직접 가져감으로 인하여 예술인들은 서재나 무대에서밖에 모르던 인민을 이제는 몸으로 부닥치고 한덩어리로 굳게 뭉치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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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공작단에 참가한 도중에 남조선에서 유수한 도시 부산 진주 마산을 돌며 이곳의 상가와 공설시장을 보았고 영남의 거읍(巨邑)과 벽지의 적은 촌락을 지나며 장이 서는 날은 장구경도 하였다. 그리고 한없이 비분을 느낀 것은 남조선 우리 인민의 일상 생활의 필수용품이 모조리 외국 상품인 것이다. 하루하루 장을 보는 장돌뱅이의 속에까지 모든 물건은 미국 상품인 것이다. 그저 한미한 수공 생산품인 무명과 베같은 것을 제하면 과물과 해산물 이것이 이 땅에서 나오는 전부이고 비누 양말 세수수건 심지어 과자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외국 군수물자 잉여품이다. 남조선의 모든 공장문은 닫히고 우리의 쌀이 이런 것들을 들여오기 위하여 외국으로 나가며 그 대신으로는 썩은 강냉이와 말 먹이의 밀 포대가 들어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일상 생활용품은 얼마나 고가(高價)한 외국의 쓰레기인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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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는 대장 심영 부대장 김기림으로 이 대의 순회 예정지는 경북 일대였다. 여기에도 50여 명의 대원이 동원되어 대구에까지 갔다. 제2대의 첫 공작지인 대구에서는 반동경찰의 여러 가지 실랑이를 물리치며 우리 공작대가 이틀을 공연하였다. 이곳에서도 테러들이 무대 뒤에 침입하여 연출자를 구타하는 등의 불상사를 내고 경찰은 이런 것을 방관하며 그 익일 오히려 대장과 부대장을 호출하였다. 그들의 용건은 경북 지방의 여러 우익 청년 단체들이 불상사를 일으킬 염려가 있으니 공연을 중지하고 즉시 귀경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공작대의 두 동무가 호출되었을 때 다른 대원이 통행하는 것을 준열히 거절해 놓고 이 두 동무가 경찰 문에서 나기는 시각을 테러단에 연락하여 섬영 동지는 그들에게 인시불성이 되게 구타를 당하고 들것에 얹히어 숙소로 왔다. 경찰은 범인을 숨기며 도리어 이런 것을 저의 말의 입증으로 사용하려 들었다. 여기에 대하여 “이것은 예를 든다면 마치 경찰의 입으로 전치를 타면 쓰리가 있으니 전차를 타지 말라는 격이 아니냐” 고 조소의 항의를 던진 김동석 동지의 말이 생각난다. 경찰에서는 이 중지령을 어쩌면 선처할 듯이 꼬여 50여 명의 대원을 10여 일이나 여관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경비를 말리어 공작대로 하여금 그냥 돌아가도록 하려는 그들의 전술이다. 그러나 우리측이 원체 끄떡 없으니까 이자들은 초조하여 그 허가 문제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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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는 대장 황철 부대장 이용악으로 이 대의 공작 지역은 강원도 일대였다. 춘천서는 공연 도중 테러단들이 극장 밖에서 전선을 끊어 극장 안을 암흑화한 다음 돌팔매질을 쉴 새 없이 하여 대원들은 기운을 내자는 뜻으로 인민항쟁가를 불렀다. 경찰에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공작대가 군중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대원을 한 사람 한 사람 구타한 후 서울로 쫓아보냈다. 우리는 일방 여기에 엄중한 항의를 하여 제3대를 다시 강릉 지방으로 보냈다. 제3대가 강릉으로 가던 날은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들은 서울서부터 폭우를 맞으며 강릉까지 밤 새로 1시쯤 하여 닿았다. 대원들이 모두 초행이므로 전에 한 번 왔던 사람이 일본 여관 자리를 찾아가 그곳이 그저 여관인 줄 알고 문을 두드리었다. 그 집에서는 트럭 소리가 나고 자기네를 찾으니까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이 일행이 어디서 온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이지들은 뒷구멍으로 비상 소집을 하였다. 그곳은 독촉 테러 강릉 총본부였다. 이래서 우익 테러들은 서울서 온 좌익단체에게 저희들의 소굴을 찔리었다고 밤사이에 총동원을 하여 이 집을 겹겹이 둘러썼다. 또 이러한 사실을 안 그곳 민주 진영에서도 동원을 하여 저자들의 주위를 또다시 포위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사흘 밤 사흘 낮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독촉 총본부 안에서 포위되었던 공작대원들은 한 모금의 물조차도 마시지를 못하였다. 제3대는 춘천과 강릉에서 이러한 사태로 공연을 계속하지 못하고 경찰과는 마찰이 생기어 그 장도는 중도에 그만 좌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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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는 대장 서일성 부대장 조허림으로 이 대가 맡은 지역은 충남북의 2도였다. 이 대는 처음 대전서부터 대성공을 하였다. 대전에서는 2만의 시민이 그들을 맞아가지고 환영 행렬을 하였다. 일방 미술동맹과 사진동맹에서 하는 이동 전람회는 이 대와 보조를 맞추어 공작단이 오는 날은 벌써 개최되고 있었다. 반동테러단들은 시민들이 환영 행렬 하는 틈을 타 전람회장을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이자들이 그림을 면도칼로 찢고 몽둥이로 그 틈을 바수는 등 무수한 낭지를 하고 갔다. 전람회에서 그림을 찢은 소동은 이것이 남조선에서 두번째의 일이다. 한 번은 미술동맹 3 ․ 1 절 기념전 때인데 그때는 정복 정모를 한 학생 놈들이 학련(學聯)의 완장을 두르고 와서 찢은 일이다. 이 학련은 이승만이의 직계 졸도들로서 학교에 나가는 목적은 학문보다도 학교 테러와 민주 학생을 고발하여 경찰에 넘기는 것이 더 중한 짓으로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식들이다. 이러한 속에서 제4대는 논산 강경 청주 등 각지를 돌아 큰 성괴를 이루었다. 비록 예정 목적은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성공에 가치운 편이다. 강경서는 반동경찰이 심한 간섭을 하고 부당하게도 대장 서일성 동지를 이유 없이 유치시킨 일이 있었다. 문화공작단 각 대의 성괴를 종합하여 보면 대체로는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전남북의 2도가 너무 테러단이 발호하고 경찰들이 한층 악질이어서 이 지방을 순회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순회로 말미암아 남조선 문화단체총연맹의 산하 각 단체의 맹원이 총수 15만에서 일약 30만으로 오른 것은 스스로 놀라운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문화를 인민에게 달라고 목마르게 외치는 전 인민 속에서 그 문화를 인민 속으로 끌어가기 위하여 힘쓰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날로 느는 것은 우리의 민족 문화를 위하여 크게 축하할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문화공작단이 문화를 직접 인민에게 결부시키는 데에 큰 공을 가져오게 한 함세덕 동지의 희곡「하곡」과「태백산맥」,조영출 동지의「미스터 방」과「위대한 사랑」그리고 연극동맹의 여러 맹원들의 전투는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4. 총검거 총탄압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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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2주년 기념 행사를 뜻깊게 하기 위하여 연일 골몰하던 남조선 문화예술인들은 1947년 8월 12일 미명에 생각지 못하던 선풍을 만났다.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무용 각계를 통하여 중요한 예술인들은 거의 검거 선풍과 가택 수색을 당하였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반동경찰은 민주 진영의 각 예술 단체의 회관에 그들을 늘이어놓고 어느 누구이고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트럭에 실어 각각 관할 경찰서에 실어가는 큰 사건을 일으키었다. 심지어 그들은 문학예술인들이 많이 온다는 명동의 한 다방에까지 트럭을 갖다 대이고 그 안에서 차를 사 마시던 사람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잡아갔다. 그러나 매사에 경각성을 높이는 민주 진영의 문학예술인들은 그들의 거의 무차별 무조건 검거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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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월 12일 미명에서부터 통 9월 하순경에 이르기까지 늦추지 않고 계속된 전 남조선 민주 진영에 대한 총검거와 총탄압은 역시 남조선 반동측의 전 능력을 기울인 야만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참가한 것은 미국인 신문 기자를 비롯하여 반동경찰과 및 모든 테러 단체들의 질서 없는 도량(跳梁)이었다. 8월 12일 미명에는 미 군용 트럭(현재는 경찰용)이 온 서울 시내의 중요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이것은 피출소마다 들리어 이미 체포된 헤일 수 없는 시민들을 무한정 본서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 체포의 범위는 서울시만 하여도 각 구 민전 지부의 동내 말단 책임자까지 이르렀다. 이른 아침에는 벌써 민전 남로당의 중앙본부 인민공화국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중앙본부 및 민주 진영에 속하는 모든 사회 단체와 언론기관은 일절이 그 회관과 사옥을 경찰에게 습격받았다. 첫날 서울 시내 요소에는 특보대마다 남조선노동당의 음모미연에 발각 민전의 최고 간부 전부 체포라 하고 대서특필한 반동 제 신문과 우익청년단들의 전단이 붙었다. 그리고는 이것을 떼어버리는 사람이나 저희들을 욕핸 사람이 있으면 잡ó}가려고 경관과 테러들이 먼발에서 지키었다. 이것은 미명에서부터 검거 선풍이 분 것과 연결하여 시민의 눈을 놀래키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오후가 채 못 되어 이것은 모두 허보이고 중앙민전의 의장단에서는 민주여성동맹의 위원장 유영준 선생 한 분만이 체포된 사정을 알았다. 시민들은 반동경찰의 일상적인 만행에 비추어 그때 경찰의 이 조치를 다만 임박한해방 2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민주 진영측의 준비를 금지시키며 반동측의 일방적 주최로 되는 관제 행사를 강행하려는 예비 수단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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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월 15일이 지나도 이 선풍은 그치기는커녕 도리어 테러단이 각처에서 횡행하며 또 경찰이 그들과 손을 맞잡는 것이 공공연한 주지의 사실로 되자 시민들의 의혹은 점차 커갔다. 남조선의 민주 역량은 그동안 10월 인민항쟁과 24시간 파업 그리고 소미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하여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47년 7월 27일 전 남조선에 걸친 소미공위 축하 인민대회에서는 민주 역량이 그 실력을 양국 대표 앞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때 서울의 남산대회에 모인 인민들은 무려 50만이 넘었다. 어떤 사람은 %만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의 전 인구가 1백20만인 것을 생각할 때 이날 시민 가운데 참석치 못한 인원이라면 집을 지키는 아주 극한 노유(老幼)와 병자를 제하고는 악질 반통과 빈집을 기웃거리려는 좀도적뿐이었을 것이다. 부산에서는 20만의 시민이 대회에 모였다. 부산시의 전 언구가 40만이 다 못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더욱 놀라운 일이다. 필자는 당시 문화공작단에 참가하여 제1대가 마침내 경남 공작의 일정을 마친 때이므로 부산에서 이 놀라운 시실을 목도하였다. 전 남조선이 이러했다. 이것은 우리 인민이 무엇을 요구하고 또 지지하는가를 표시하는 훌륭한 증거이다. 여기에 조금 앞서 7월 19일 우리 민주 진영의 지도자의 한 분인 몽양 여운형 선생이 테러 흉탄에 쓰러지자 민심은 물 끓듯 하였고 테러의 도량에 대한 민족적 분노도 극도에 달하였다. 민전에서는 시기를 잃지 않고‘테러를 박멸하여 진정한 민주 국기를 세우자’ 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여기에는 한민당과 한독당만을 제외한 모든 우익 및 소위 중간정당까지도 일절이 호응하여 비상구국대책협의회의 결성을 크게 하였다. 인민의 적인 매국노의 무리와 국제 반동 세력이 여기에 전율을 느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국제 및 국내 반동파들은 즉시 그들의 충견 조병옥을 시키어 이 거국적인 사업에 해산령을 내리었다. 연달아 미국인 신문 기자 유피 통신원이 지금 남조선에서는 좌익 진영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장의일과 8월 15일을 기하여 일대 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데마를 전 세계에 퍼뜨리었고 남조선의 반동 제 신문들은 또 이 미국 통신원의 보도에 근거하여 마치 벌써 다 증명된 사실인 것같이 특호 활자로 제목을 걸어 이 데마를 전파하였다. 미국인 신문 기자의 비열한 흉계와 데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데마에 그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사실들은 이번 데마는 순전한 데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대한 음모와 간악한 흉계가 숨기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낭설을 세계 반동파에 전파시키었으며 경찰을 동원시키어 민주 진영의 지도자를 총검거하고 전반적 테러에 대한 인민대중의 반발을 예기하여 이 재료를 가지고 먼젓번 정 판사 사건보다 몇십 배 더한 남조선 좌익 진영 폭동계획설을 날조하여 남조선 인민의 전위당이요 민전의 충주 세력인 남조선노동당을 송두리째 뽑으려는 의도였다. 미 반동파의 주구와 또 국내의 그 앞잡이들이 이처럼 간악한 흉계를 꾸며 이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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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민주 진영과 인민대중은 심심한 지중을 하여 그들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았다.8월 15일 그들이 예기하였던 관제 기념 행사의 ‘성황’ 은 비참하게도 그들의 소망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악질 동회의 구장과 반장을 동원시키어 시민들의 강제 행렬 참가를 요구하고 직장에 있는 노동자 동무들을 참가하지 않으면 해산하겠다는 위협으로 대회장에 몰아넣으려 하였으나 이렇게 강제로 대회에 모인 사람은 전 인원을 털어 만여 명도 안 되는 가련한 모임이었다. 이날부터 서울 시내에는 온 장안에 난데없는 야경꾼이 퍼져 서투른 날방망이질을 하였다. 딱딱이를 치는 소리는 귀가 솔았다. 이자들은 모두가 테러단으로 야간 통행 시간이 지난 후의 집집을 뒤져 민주 진영의 주요 인물을 튀기어 경찰에 방조하고 이들을 무수히 난타하기 위하여 특주의 배급을 받아가며 움직이는 무리였다. 차츰 지방에서는 불의의 변을 알리기 위하여 중앙에 올라온 동무들 속에는 많은 예술인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동무들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는 각지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지방에 있어서도 검거 범위는 예술인에게까지 미치어 문련의 각 도연맹과 그 산하의 모든 예술 단체인 각 동맹 지부의 책임 부서에 있는 맹원들은 거의 모조리 체포되어 그 전원은 대략 쳐도 3백 명을 불하하였을 것이다. 낙원동에서는 테러들이 백주대로상에서 사람을 치는데 몇 번만 더 치면 그 맞은 사람이 절명할 지경이었다. 그것을 지나가던 정복 경관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자들은 당신이 알 것이 아니라고 도리어 경관을 쫓아보내는 사실을 시인 김광균 씨가 목도하였다. 테러들은 저마다 살인자의 살벌한 얼굴들을 하고 팔목에는 제가끔 이름만 들어도 당장에 구역이 나는 사설 청년단체의 완장을 두르고 떼를 지어 대로상에서 활보하여 그 거리에 통행하는 시민들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 듯이 서슬이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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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에 벌써 인민공화당과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회관은 이들 경찰이 폐쇄하고 무법하게도 이승만 직계의 대한독립청년단에게 넘겨주었다. 이자들은 즉일로 동단 중구특별별동대란 간판을 내걸며 야만적 사형(私刑)의 집행장으로 만들었으며 잇대어 민전회관은 곤봉을 든 테러들이 연일 회관에 침입하여 감시하였다. 8월 18일 즉 검거 선풍이 분 지 일 주일이 지나도 장택상이는 신문 기자단에게 그 검거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고 대답을 흐리었다. 이때부터 테러단의 준동은 극에 달하였다. 경찰은 저희들의 전력을 기울여도 찾지 못한 민주 진영의 지도자들을 테러단에 찾도록 조력을 구하였다. 그리고 남조선문화단체 총연맹의 기관지 일간 신문『문화일보』는 8월 12일 폭풍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사내의 대량 검거가 생기어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문화일보』는 1947년 4월 『예술통신』을 인계하여 개제한 신문으로 그동안 이곳에는 계속하여 진정한 외국 문화의 소개와 모든 동맹의 당면 문제를 제기하고 가장 전투적인 예술 작품을 게재하였으며 전면적으로는 광범한 문학예술 애호층의 정신적인 지도와 정치 부면으로의 적극적인 관심을 일으켜주는 역할을 맡아온 꾸준한 신문이었다. 민주 진영의 언론기관을 탄압하기 위하여 남조선 반동경찰은 처음엔 검거로 그다음엔 테러로 쉴 새 없이 갖은 몰염치한 방법을 다하였다. 이 틈에『광명일보냉(인민공화당 기관지)『우리신문』(진보적 인텔리 신문)이 쓰러지고『독립신보』(지난날 신민당 기관지)는 사장과 주필까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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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사람이 고대하는『노력인민』은 암야의 광명처럼 남조선 인민의 앞길을 밝혔고 적측의 갖은 음모와 비행을 폭로하는 선봉으로 매일 시민들의 수하에 쥐어졌다. 반동측에서는 눈을 뒤집어쓰고『노력인민』을 인쇄하던 출판노조 소속의 인쇄 직공 20여 명은 대한노총 강도들에게 납치되어 꼬박 사흘을 물 한 모금도 못 먹고 경전 지하실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간신히 구출되었다. 그들은 민주 진영의 신문을 탄압하기 위하여 육상에서 신문 파는 이들을 위협하고 이른 새벽 길목마다 지켜 섰다가 배달하는 사람까지 잡아서 죽도록 두드리고 신문은 가져오는 곳과 배달하는 매호를 알으켜 내라고 하였다.『노력인민』을 배달하는 동무들은 심지어 한민당의 기관지『동아일보』속에『노력인민』을 숨겨 가지고 배달하였으나 테러들은 이것까지 조사하여 씨를 말리려 하였다. 경운동에 있는 보성사 인쇄소는 민주주의 서적과 신문을 인쇄하였다는 이유로 테런단에게 강제 접수를 당하였다. 이 반동경찰의 묵인을 받는 강도단은 보성사의 경영자를 잡아놓고 생명과 공장과 둘 중에 어느 것을 취하겠느냐고 협박하였다. 경영자는 당장 곤봉 세례와 공장 파괴가 두려워 좀 생각을 하여보자고 하였더니 이자들은 즉시로 대서인을 불러다가 인쇄 공장을 저희들에게 기부하는 형식으로 문건을 꾸미게 하였다. 이것은 초기 히틀러의 도배가 국제 전쟁 방화자와 독점 자본가들의 후원 아래 시가와 은행을 점령하던 것과 동궤의 것이다. 남조선의 일대에는 현재 이와 같은 일이 백주 공공연하게 행하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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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들의 잔학한 행동은 소련 영화의 독일 범죄자 재판기를 연상시킨다. 20세기의 식인종은 우리 조선의 일부 남조선에도 있다. 장구한 시일을 두고 일제에 충실하던 자 새로이 민족을 팔아먹으려는 자 이것들을 남조선에서는 미군정이 고이 양육하니 이자들은 뻐젓이 머리를 들고 동족을 살해하는 식인종으로 화한 것이다. 그들은 2개월이나 걸쳐 쉴 새 없이 민주 진영의 동지들을 체포하고 테러단을 동원하여 갖은 만행을 자행하게 하였으나 그 결괴는 이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들의 흉계를 뒤집어씌울 만한 대상의 지도자들도 체포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기약하였던 테러에 대한 인민의 전면적 반발도 인민의 자중으로 전혀 없었다. 경찰에 체포된 수많은 민주 진영의 동지들은 이리하여 미군정과 국내 반동 진영의 낙심과 초조한 가운데 경찰서 내에 출장 나와 있는 치안관의 약식 판결로 대체는 반 개월 내지 일 개월간의 구류와 최저 5천 원에서 1만 원에 달하는 벌금형을 받았다. 무고한 인민을 잡아다 실컷 두드리고 굶긴 다음 저희들은 이러한 인민에 대한 갖은 폭악한 행동을 함에 힘을 돋우기 위하여 술에 고기에 특주를 받아 처먹고 이 비용은 다시 고초받은 그 인민에게서 부당한 벌금과 명목상은 기부금이나 실제는 그 재산을 강탈하여 여기에 충당한다. 반동경찰은 8, 9월만 해도 서울에서 수천, 전 남조선에 걸치면 만여 명도 넘는 민주 진영의 인사들을 무조건 체포하며 이런 중에도 질서 없는 테러단의 도량은 점차 강도적 성격을 노골화하여 그 명령 계통은 더욱 문란하여만 졌다. 전 시내의 상가는 모조리 문을 닫힐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끄뎅이로 엉클어진 테러단들은 저마다 상기를 뒤지며 기부금을 강요하였다.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민주 진영 사람이라고 납치 고문 구타를 일삼는다. 심지어 말단의 테러는 금품을 약취(抗取)하려고 일부러 누구이든 납치하였다가 돈을 뺏으며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면 좌익이라고 죽도록 두드려 인심은 날로 이 무리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 가까운 예로 필자의 이웃에 사는 양곡 소매상인이 테러들에게 납치된 일이다. 그는 이자들의 의도하는 바를 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에 그동안에 벌써 가마니때기로 전신을 뒤집어씌어 몽둥이찜질을 당하였고 또 열 손가락의 한 손톱 한 손톱을 철사 끊는 지께로 마치워온 손톱이 모두 바스러지는 참상을 이룬 다음 화해한다는 명목으로 장사 밑천의 거의 절반을 떨리었다. 테러단의 계속되는 행동은 저희들을 길러주는 이 토대인 모리 간상배에게까지 커다란 위협을 주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맛살을 찌푸린 장택상이는 황망히 테러단에게 포고를 내리어 수습할 수 없이 민심과 유리(遊離)한 저희들 앞잡이와 경찰을 분리시키고 이것을 도리어 저희들 경찰의 반인민성을 은폐하는 데 이용하려 들었다. 경찰 당국은 2개월에 긍하여 일부 시절 청년 단체에게 음으로 양으로 군력과 법을 남용하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것은 너무나 지나쳤으니 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자기가 사랑하는 우익이라도 잘못하면 이렇게 탄압한다는 제스처를 보이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쌓여온 인민의 증오를 경찰로부터 테러단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포고문이 나온 후에도 테러는 계속하여 횡행하였고 이것들은 앞문으로 불러다가 뒷문으로 내보내는 식의 외면상의 검거가 있었을 뿐 아니라 아무러한 경찰의 조치도 볼 수 없었다. 시민들은 그들의 이 낯간지러운 수작에 더욱 구역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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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장간이나 걸린 이 사건을 이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속셈만으로만 위조 사건을 씌우려던 경찰과 그 배후 세력들은 이 사태에 대하여 아무리 뻔뻔한 그들일지라도 어떠한 대답이든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그들은 좁은 머리를 다 쥐어짜 소위 방송국 사건이라는 것을 꾸며 불행히 검거된 남로당의 부위원장 이기석 선생을 무서운 고문으로 억지로 이 사건에 연관시키어 트집의 꼬투리를 조작하였으나 이것으로는 민주 진영의 총검거와 총탄압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군색한 나머지 새로이 수도청 발표라 하여 이 일이 있기 전 미국인 통신 기자가 날조 시사한 남조선 좌익 폭동 음모의 ‘풍설’ 을 진상으로 개조하였다. 이 발표는 그 내용이 너무나 허망하기 때문에 웬만한 통신사는 물론 우익에 쏠린 소위『자유신문』까지도 처음에는 묵살하고 이 기사를 게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통신과 신문들의 태도는 이 논문(그들은 진상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은 연구 논문은 될지언정 사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내용이 없으니 우리에게 생생한 사실만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그들에게 이 대답보다는 우선 위협으로 그 전문을 게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매국적들은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과 민주 건설을 보장하는 소미공동위원회를 파괴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 하였다. 소미공동위원회의 속개 도중에도 이자들은 반동경찰의 후원 아래 반탁 데모를 하고 공동위원회장으로 가는 소련측 대표단에게 돌맹이와 흙덩이를 던졌다. 경찰은 이것을 방관하여 암암리에 그들을 고무한 것은 물론 심지어 이 역도들은 장택상을 시키어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에 대하여 허위 중상의 독설을 토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선사한 유일한 우방과 우리 인민과의 이간을 꾀하는 등 갖은 행동을 다 하였다. 이러한 행동의 하나하나만으로도 당연히 국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을 참고 다만 조선 인민의 장래와 그 행복을 염려하여 하루라도 빨리 소미공동위원회의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사양치 않은 스티코프 대장의 열성과 홍대(鴻大)한 도량은 오늘날 비록 국제 국내 반동 세력의 최후 발악으로 이 사업이 휴회되었다 하더라도 길이길이 조선 인민들의 뼈에 사무치는 감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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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8, 9월 남조선 반동경찰이 이와 같은 남조선 민주 진영에 대한 총검거와 총탄압의 진상은 대략 이러한 것이 그 윤곽이다. 이러한 폭풍을 통하여 또 한 가지 뚜렷이 그 존재가 나타난 것은 문학예술 부면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었다. 이것은 남조선의 문학예술이 반동 진영에게 점차로 그만큼 큰 위협을 주는 대상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일면 인민을 토대로 하는 진정한 우리 민족 문학과 예술이 모든 가혹한 조건뿐인 남조선에서도 날로 성장하여 감을 의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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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2주년 기념 행사를 당하여 남조선 문학예술인들은 우리의 문화와 민주 역량을 성대히 피로하기 위한 이 준비에 당시 그 전력을 기울였던 만큼 더욱이 많은 타격을 받았다. 연극동맹에서는 그때 산하의 모든 극단을 총동원하여 둘로 합하고 하나는 국제극장에서 조영출 동지의 신작을 그리고 또 하나는 국도극조에서 함세덕 동지의 희곡「혹」(「고목」의 개제)을 각각 공연키로 되었다. 이런 것을 경찰에서는 혈안으로 탐색하여 그 연극 장소를 습격하여 전원을 체포하는 춘새(橋事)로 모든 공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반동경찰이 저희들에게 검열 허가까지 맡아놓고 연습하는 이 동맹의 연극 활동을 그냥은 중지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이지들은 비루하게도 공연 일자가 박두한 때 여기서 중요한 역을 맡은 배우와 또 그 대행을 할 만한 동지들을 8월의 선풍 속으로 쓸어넣었다. 더욱이 8월 12일 미명에 극계의 중진과 책임 위치에 있는 10여 명의 동지들은 각기 사택에서 경찰의 습격을 받았으나 요행 체포는 면한 동지들도 그 뒤로는 매일 찾으러 다니고 그 집에는 테러들이 연일 지켜서 기다림으로 얼마 동안은 부득이 지하로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연극동맹 산하의 각 극단이 무슨 공연이든 할 때이면 연일 만원을 이루고 또 관중들 앞에서 저희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연극을 하여 아우성치는 관중들의 환성을 들을 때 반동측에서는 뼈아프게 안타까워하며 저희들도 연극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남조선에서 옛날부터 유명하던 사람은 물론 모든 유능한 신인까지 한 사람도 저희들의 수족이 되어주는 연극인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무런 인기가 없는 타락 분자만을 모은 이 반동 극단은 8월 15일이 되어도 기념 공연 하나 못 하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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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동맹에서는 해방 2주년 기념 대전람회를 개최하고자 기일과 장소까지 벌써 한 달 전에 계약하여 놓았으나 이 계약한 장소와 기일을 군정청에서 불법 횡령하고 그다음은 이무 데서도 장소를 빌려주지 못하도록 협박하여 이 동지들의 사업을 빙해하였다. 사진동맹도 이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술계에도 연극계와 같이 반동측의 어용 작가들이 몇몇 있으나 이지들은 독립하여 전람회를 가질 만한 역량도 없고 또 실제로 현재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과거의 경력을 개뼈다귀 울겨먹듯 히는 무리이기 때문에 아무런 행사도 갖지 못했다. 여류 화가 정온녀 여사는 9월 28일 그의 첫 개인전을 화신화랑에서 가졌으나 씨가 미술 동맹원임을 알고 화신 기획부에서는 단지 이 이유 하나만으로 전람회가 개장한 지 불과 두 시간에 강압적으로 문을 닫았으며 관람하는 손님을 함부로 쫓아내는 폭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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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음악건설동맹에서는 8월 15일을 기하여 모든 악독은 우리 동맹원의 작품만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일대 호화 음악의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리하여 가독은 전부 우리 시인들의 시 작품을 우리의 작곡가들이 만든 독으로 노래 부르기로 되었고 더욱이 인민의 보배로 이름 높은 김순남 동지의 신작 교향곡 발표는 만도(滿都)의 기대와 주목을 끌었으나 이 역시 테러단의 암약과 극장 관리인에 대한 협박으로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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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가동맹에서 이 통에 또 여러 동지들의 체포령이 내렸다. 서울만 하여도 자택에서 회관에서 노상에서 체포된 작가와 시인과 평론가가 십수 인이 넘었다. 테러단에게 납치된 문학예술인들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한둘의 예를 들면 먼젓번 인민항쟁에 향리 제일선에서 활약한 시인 S 동지는 밤에 자다가 이놈들에게 쫓기어 아래셔츠 바람으로 길거리에서 밤을 새운 일이다. 미술동맹 P 동지는 월간 잡지『민성』에 북조선 기행문을 사실대로 기술하였다는 이유로 서북청년회에 납치되어 3일간을 인사불성이 되게 고문당하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그놈들에게 맞아 죽느니 차라리 빠져나갈 길을 뚫어야겠다고 분신(舊身)하여 그자들의 높은 벽돌집 3층 유리창에서 그냥 뛰어내리어 빈사의 상태에 이르렀다. 테러가 경찰에게 비호를 받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이것은 다른 예이지만 돈암동에서는 테러들이 민주 진영 통지의 집을 습격하였다. 불의 습격을 당한 이 동지는 대문을 닫아걸고 화를 피하려 하였으나 테러들은 문짝을 깨뜨리고 들어오므로 할 수 없이 몽둥이를 들어 짓쳐 들어오는 테러들을 문 앞에서 내리쳤다. 그리하여 테러 놈이 그만 절명을 하였는데 경찰에서는 즉시 이 동지를 잡아다 살인죄로 기소하였다. 아닌 밤중에 남의 집 대문을 뻐개고 짓쳐 들어오는 야수를 막기 위하여 정당히 취한 태도를 살인죄라고 하며 매일같이 횡행하며 대로상에서도 무행한 인민을 병신이 되도록 구타하는 테러들을 그들은 한 번도 취체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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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이러한 소문이 돌았다. 테러들은 백백교보다도 한술을 더 뜬다고. 그리고 이자들은 무행한 인민을 때려죽여 가지고 거적때기 속에 넣어서 자전거에 싣고 종로바닥을 대낮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좀더 큰 트럭에 싣고 곧장 한강으로 내버린다는 풍설이다. 이것은 풍설이기보다는 수긍할 수 있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속에서도 남조선의 문학예술인들은 쉬지 않고 각자의 사업을 계속하였다. 시인 K 동지는 경찰과 테러 쌍방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그가 같은 주간 신문『건설』-문학동맹의 문화대중화를 위한 기관지 -의 편집과 출판의 임무를 계속하였고 다시 문학가동맹 시울시지부의 기관지『우리문학』5호가 또한 그들에게 추격당하는 여러 동지들의 손으로 간행되었다. 문화 부면의 장택상이란 칭호를 듣는 공보부의 함대훈은 남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기관지『문화일보』가 그동안 내용을 다시 정비하여 재간한 것을 다시 정간시킴에 적극적인 역할을 놀고 다시 민주 진영의 언론을 완전히 봉쇄하기 위한 신문지 법안을 작성하여 미 군정장관에게 제출하는 등 갖은 악독한 죄악을 꾸렸다. 미 제국주의와 그 밑에서 국내 반동파들이 최후 발악을 쓰는 남조선에서 진정한 문화예술 부면은 미증유의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통하여 우리 민주 진영에서는 가장 약한 성원을 가진 문학예술 부면이 한 사람의 탈락자도 내지 않은 것은 스스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또 다난한 전도를 위하여서도 미더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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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내 반동 세력과 그들의 충견인 남조선 미군정청 반동경찰은 이번 8월 9월 총검거와 총탄압을 통하여 이 이전까지 취하여 오던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면조차 떼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라는 가면을 내걸고 저희들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야젓잖게 행사하면서도 또 그 가면 때문에 일 분이라도 민주 진영에게 전취당하는 것은 눈을 까뒤집고 방해하기에 전력을 다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여 선전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현재 남조선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97
언론 자유의 이 미명은 남조선 전체 인민의 구역과 분노를 사는 말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저희들에게 불리한 점을 막기 위하여 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이란 넓은 그물을 늘여놓고 저희들의 비행을 폭로하는 모든 정당한 언론은 미군정 실시상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얽는다. 이 예는 남조선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박헌영 선생의 체포령을 위시하여 민주 진영 각 부면의 지도자와 투사를 투옥한 일이다. 그리고 인민이 좀더 널리 자기네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라디오 영화 출판물 및 여러 가지 도구를 그들의 수중에 넣었으며 또 넣으려고 갖은 통제를 다 하는 것이다. 집회 자유는 공안을 문란시킬 우려가 있다,불상사가 생길 염려가 있다, 또는 집회 책임자를 신임할 수 없으니 현주지(現住地) 구역 파출소의 거주증명을 받아오라는 등 온갖 구실로 이것을 미룬다. 출판 자유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레닌 선생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부르주아 사회에 있어서의 출판물 자유라는 것은 신문들을 발간하여 언론기관들을 매수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만을 위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자본가가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출판 자유라는 것은 신문들을 발간하여 언론기관들을 매수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들만을 위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자본가가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출판 자유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하여 신문을 매수하며 작가를 매수하며 여론을 매수 또는 위조하는 자유이다. 이는 사실이다. 누구나 언제든가 이를 논박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더구나 독점자본주의 또 제국주의의 총 본산인 미국의 주둔군이 자의사를 강행하는 미군정하의 남조선에서 이런 식의 자유가 무엇을 말한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그들은 남조선에 온 지 불과 반 년도 안 되는 1946년 5월에 벌써 위폐 사건을 꾸미어 조선에서 가장 충실한 설비를 가진 조선공산당 경영의 정판사 인쇄 공장을 접수하고 그 기관지인 일간 신문『해방일보』를 강제로 폐간시키며 이것을 바로 반동측에 넘기어『경호신문』을 발간하게 하며 이 인쇄소에는 절대로 민주주의 출판물의 인쇄를 받지 않는 해괴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다시 47년 봄에 문학동맹 발간의『인민항쟁시집』과 같이 중뿔난 경찰의 간섭과 그렇지 않으면 테러단을 시키어 인쇄소를 협박 강탈 내지는 습격의 방법으로 억압하는 등 이 예로 부지기수이다. 끝으로 결사의 자유라는 것도 남조선 전반 정당 사회 단체에게 일제히 회원 명부와 주소록을 제출케 하여 그들이 자기와의 반대 진영을 임의로 탄압하기에 편리한 방편은 빈틈없이 꾸며놓는 등이다. 돌아보건대 남조선 문학예술인들은 우리 민주 진영의 다른 부면들과 같이 이러한 속에서 자아의 위치를 깨닫고 이 간악하고 비열무쌍한 국제 국내 반동배와 매족자들의 죄악을 폭로하며 우리의 진정한 문화를 인민 가운데에 가져가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남조선의 문학예술인들은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우리 인민의 다방면에 긍한 전체적인 회합이 있을 때마다 음악인은 그들이 만든 인민의 노래를 발표하며 또 모든 인민의 용감한 행진독이 되도록 가창을 지도하였으며 또 시인들은 가슴에 북받치는 우리 인민의 감정을 호소하여 한자리에 모였던 30만 혹은 50만 헤일 수 있는 인민 앞에 만세의 환호를 받았다. 이것은 일찍이 시문학이 만인의 사랑을 받던 아테네의 영광으로도 비할 수 없는 성사다 아니할 수 없다.
 
98
반동매국적의 진영에서도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남조선 미군정의 전적인 찬사와 축하 밑에 그들은 신문사의 운동부 기자와 매명 선전에 눈이 빨개서 혹간 잡지 한구석의 설문 가운데 투고하는 칼잡이 의사까지 긁어모아 만든 조선문필가협회와 그 축소 단체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 등은 저마다 간판을 내걸고 저희들 힘만 있으면 외국 종이와 모든 경비의 원조도 받을 터인데 그 간판에 먼지만 켜로 쌓이도록 그자들은 단 한번의 명토 박은 기관지 한 권을 내지 못하였다. 이 모든 가련한 미물들은 그저 뒤에서 불어주는 월가의 피를 부르는 피리 소리에 발을 맞추어 불 속에 뛰어드는 하루살이처럼 거의 제정신도 없이 펄럭거린다. 조선의 극악한 반동배들은 남조선 우리 민주 역량이 날로날로 성장하고 인민과 굳게굳게 결부되는 데에 놀라 이것을 사력으로 막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신성시하여 마지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도금한 가면조차도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닫자 국제 신의와 모든 체면까지도 죄다 팽개치고 그들의 야수적인 알몸뚱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남조선의 진정한 문학예술인들은 최후의 승리를 전취할 때까지 부단히 투쟁하는 길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길은 과거에서부터 우리 민주 진영의 열렬한 투사들이 우심한 폭풍 속에서 모두 다 지내온 길이다. 해방 이후의 적지 않은 시일을 통하여 남조선 우리 인민은 그들과의 투쟁 속에서 타협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문화를 인민 속에 가지고 들어가는 길은 현재의 남조선 같은 곳에서는 더욱 가열한 투쟁이 요구된다. “북조선 인민이 걸어가고 있는 자주 독립과 민주 개혁 실시와 인민공화국 건설의 인민적 민주주의 노선이 주는 정치적 영향은 남조선으로 하여금 영웅적 항쟁으로 대담히 진출하는 데 커다란 자신과 용감성을 준 것이다” 하신 이정(而丁) 선생의 말씀은 남조선의 모든 정세를 설명함에 가장 적절한 글이다. 현재의 남조선에서 그 역량이 일층 공고하여 가고 있는 우리 문화예술 부면이 오늘의 성괴를 이룬 것은 모두 여상의 근원에서 해명해야 옳을 것이다. 필지는 이와 같은 역경과 고난 속에도 오히려 더욱 굳세어지고 늠름하여 가는 헤아릴 수 없는 동지들을 생각할 때 스스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든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5. 북조선에서

 
 
100
남조선에서는 무고한 인민이 테러단에게 모진 매를 맞고 팔다리를 분질러도 이 매맞은 사람은 병원에 누워 편안히 그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다. 악독한 경찰과 테러는 저희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이 사람들을 잠시라도 그냥 놓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탈을 쓴 흡혈귀들은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입원실 문까지도 열어제치고 그들의 흙발을 들이민다. “입원실 속에 민주 진영 치들이 숨어 있다” “문병히는 척하며 모든 연락을 한다.” 이러한 구실이 그들의 내세우는 말투다. 이지-들이 미친개와 같이 큰 거리로 싸다니는 남조선에서 해방 전부터 앓던 필자는 신병을 치료할 대책조차 갖지 못한 채 1947년 8,9월 선풍 속에서 다시 모진 테러단의 밥이 되었다. 몇 해째 끄는 병중의 몸에 다시 온몸이 매에 맞아 먹구렁이같이 부풀어올랐다. 그래도 마음먹고 약 한번을 바르기는커녕 하루하루의 잠자리를 애써 구하던 필자는 그 후 북조선에 와서 비로소 아무런 근심이 없는 입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필지에게 있어서 무한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북조선에서의 입원생활은 필자에게 몸에 있는 병만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그 찬란하고 혁혁한 환경이 다시 필자의 마음속에 아직도 다 버리지 못하였던 석일(音日)의 잔재(殘滓)까지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101
건설의 쇠망치 소리는
102
우리의 노래
103
용광로 끓는 가마에
104
새로 되는 강철이 합창을 한다.
 
105
애타게 바라는
106
우리 조선 우리 인민의
107
진정한 자유를 향하여
108
발굽이 떨어지게 달리던
109
나의 젊음아!
110
너의 노래는
111
오늘 여기에서
112
무진장의 원천을 얻었다.
 
113
북조선이여!
114
너의 벅찬 숨결은
115
얼음장이 터지는 큰 강물
116
새봄을 맞이하려
117
움트는
118
미더운 생명력!
 
119
여기엔
120
구김 없는 생활과
121
가리워지지 않은 언론이 있다.
 
122
완전한 언론의 자유!
123
이것은 맑은 거울이다.
124
이곳에
125
티 없는 인민의 의사는 비치고
126
구김 없는 생활
127
그는 우리 앞에
128
주마등으로 달린다.
 
129
날카로운 쇠스랑으로
130
살진 흙을 일구는 동무여!
131
억세인 손으로
132
보일러를 울리는 동무여!
133
그대들
134
넘쳐흐르는 가슴엔
135
일하는 즐거움이
136
샘솟고 있을 때,
 
137
무연한 산과 들이여!
138
끝없는 논과 밭이여!
139
지평에 달리는
140
기관차와
141
도시에 수없는 공장들
142
이거 하나하나가
143
어느 것이고
144
인민의 것이 아닌 것이 있느냐
 
145
보아라!
146
살진 땅과 착한도랑을
147
이 나라 우리의 땅을
148
우리는 길이 후손으로 하여금
149
옛날에는 어찌하여
150
그것이 놀고먹는 개인의 것이었는가를
151
이해하기 어렵도록 하여주리라.
 
152
아 나는
153
이 땅의 임자인
154
노동자,농민이 그려진
155
우리의 화폐를
156
내 손에 쥐일 때
157
우리 앞에 놓여진
158
민주 북조선 자립경제의 확립을 보고
159
나는 맹서할 사이도 없이
160
그저 앞으로만 달리고 싶다.
 
161
북조선이여!
162
우리 인민의 영원한 보람을
163
키워주고 있는
164
나의 굳세인 품이여!
 
165
날아가리라!
166
천마와 같이
167
우리의 자랑은
168
찬란하다 북조선이여!
169
너는 삼천만 우리의 발판
170
우리의 깃을 솟구는 어머니 당이여!
 
 
171
이 시는 필자가 북조선에 와서 이곳을 노래한 최초의 작품이다. 처음으로 북조선에 온 필자는 남조선과는 달리 민주 건설에 빛나는 이곳의 반가운 모습을 찾아 몇 번이나 국영의 공장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또 지나는 길에서 농촌의 실정을 보기도 하였다. 일찍이는 우리가 상상조차 못한 크나큰 공장을 이제는 우리 인민의 손으로 더욱이 노동자 동무들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필지는 이곳에서 수많은 노동자 동무들이 그들은 전날과 같이 자기가 고용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공장이 스스로 자기네의 것이라는 무한한 기쁨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남조선에서 동무가 왔다. 아 얼마나 고생을 하시었나. 남조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노동자 동무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전하여 달라. 그리고 우리는 그대들을 잊지 않는다고 말하여 달라.” 노동자 동무들은 필자가 전하는 남조선 동무들의 소식을 듣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이 원수를 증산으로 갚겠다. 빛나는 우리의 건설로써 갚겠다”고 몇 번이나 힘차게 맹세를 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공장들의 도서실에서 일하는 동무들이 틈틈이 그 휴식하는 시간에 독서에 열중하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책장에는 수많은 책이 꽂히고 또 그것을 임의로 꺼내어 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 중에도 많이 읽히는 값 있는 책들은 10여 권 혹은 20여 권씩 꽂아놓아서 한 사람이 읽을 때 다른 사람들은 기다려야 되는 그러한 불편을 덜고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필자는 이곳에서 도서실 외에도 또 휴게실에서 훌륭한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남조선과 같은 식민지적 탄압과 착취의 조건에 짓눌린 노동자 동무들은 잠시의 휴식은커녕 잘못하면 피대에 감기어 원통한 목숨조차 빼앗길지 모르는 악조건의 시설 속에서 나날이 공포에 떨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곳 노동자 동무들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휴게실에는 이것뿐 아니라 라디오와 전축의 설비도 있고 심지어는 장기 바둑 고누판의 차림도 있었다. 안내하는 노동자 동무의 말을 들으니 거의 전 종업원으로 조직된 각 문화 서클이 있어 자립 극단이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지고 있으며 악대는 건전한 인민가요를 일상적으로 지도하며 또한 소설 시 등의 감상회 낭독회 등도 활발히 전개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른 조건 밑에서는 이와 같은 성과의 하나하나만 하여도 몇십 년 몇백 년 끌어서 될 것을 이곳 북조선에서는 불과 1. 2년에 깨끗이 해결하고 있다.
 
172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소연방이 이곳에서 우리 인민을 해방하였고 또 그들의 우애 깊은 방조와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의 올바른 영도 아래 우리 인민이 국가의 모든 주권을 잡은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이다.
 
173
여기에 따라서 이곳의 문학예술이 남조선에서 억압된 그것과는 달리 자유롭고 활달한 견지에서 발전한 것은 물론이요 또 이곳의 모든 민주 개혁에서 오는 찬란한 개화와 함께 스스로의 꽃을 피운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필자가 이곳 북조선에 와 이곳의 문학예술계를 보고 처음 놀란 것은 8.15 해방기념예술축전에서 문학예술총동맹이 그 산하의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무용사진 등의 각 부문 예술 작품에서 각각 1년 중그 우수한 것을 추리어 총합 백여 명이 넘는 문학예술인들에게 포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인의 족출은 눈부신 일이었다. 어느 예술 부면을 보아도 구면보다는 새로운 사람뿐인데 약관인 그들이 새로 자라는 우리의 문화를 두 어깨에 젊어지고 과감히 뛰쳐나가는 것도 민주의 크나큰 성괴를 확인함이다. 그리고 다량의 출판물이 팔R 주는 문화 활동의 번성! 다시 금년 초두에는 1947년도 인민 경제 부흥 발전 예정 숫자 달성에 있어서의 모범 일꾼 포상 우리 문학예술가들이 북조선 민주 건설에 확고한 민주주의 사상과 애국적 정신으로 열렬히 참가하여 발군의 성적을 올린 노동자 기술자 지배인 사무원 보안원 농민 교육자 의사 등 모든 인민의 모범이 될 일꾼 속에 1급이 4명 2급이 7명이나 가입되어 국가적으로 포상을 받은 것은 더할 수 없는 영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에서 신임을 받고 인민에게 사랑을 받는 문학예술자 이것이 얼마나 우리들의 바라는 바이며 또 지향하는 길인가 북조선은 이것을 보장하고 있다.
 
174
문학예술인들이여! 어서 나오라! 그리하여 인민을 위하여 싸우라! 필자는 외치고 싶다. 남조선에서 진정한 우리의 문학예술을 하는 동지들이여! 동지들이 바라고 싸워나가는 길이 이곳 북조선에서는 날로 성장하고 반석같이 튼튼하여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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