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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事實)의 재인식(再認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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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8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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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實[사실]의 再認識[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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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참말로 작가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평가 들에게도 요구되는 조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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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가들에게 보내고 싶은 말을 생각하면서 머지않아서 그 말이 되려나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느끼고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무엇 무엇을 가져라 하기엔 나 자신 가운데 너무나 가진 것이 적지 않으냐?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 권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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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그라운드의 스탠드처럼 文壇[문단]의 좌석을 비평과 창작을 위하여 上下[상하]를 나눌 수는 없다. 단지 있다면 우리가 한가지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져야 할 것, 따라서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하여 친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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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로는 현재 우리의 文藝[문예] 批評[비평]에 없는 것을 작가들은 적지않게 만들어 내고 있으며 반대로 창작에 결여된 것을 비평이 만들어 내기도 한다. 먼저 나는 「本格小說論[본격소설론]」이란 조그만한 글을 草[초]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감상을 절절히 느낀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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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창작의 無力[무력]을 이야기하면서 결과로는 어느 틈에 나 자신의 무력을 피력하고 있었다는게 事態[사태]는 훨씬 진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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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의 소설이 世態小說[세태소설]과 內省小說[내성소설]로 분열되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그 통일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작가들에게 제시해야 할지 실로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소위 ‘本格小說[본격소설]’의 길을 개척함에 있다고 결론하였으나 유감인 것은 그 논리가 작가들로 하여금 창작하는 붓대에 흘러내리는 산(生[생]) 혈액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래도 부정할 수가 없다. 즉 本格小說[본격소설], 다시 말하면 대 로망의 건축을 위하여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물음에 해답이란 곧 비평이 단순한 現想[현상]의 해설 이상이 될려면, 바꿔 말하면 비평이 창작상 지도적인 기여를 하는데 필요한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평이나 이론도 또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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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솔히 어떤 비평가가 있어 작가들이 못하는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라고 쓱 손바닥에 내놓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 朝鮮文學[조선문학]의 창작을 위하여 하등 소용이 되지 않는 물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직 실용화 되지 않은 발명품의 견본 수입과 같이 외국에서 가져온 지 얼마 안되는 애송이 개념이거나 둘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의 작가들이 비평가를 믿지 않는 것은 當然[당연] 이상의 당연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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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개울 저편에, 비평가들은 개울 이편에 서로 팔짱을 끼고 서서 그 개울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은 양자가 다 일반이다. 이것이 비평가에 대한 작가의 불신을 조장하는 온당치 않은 言說[언설]이라고 나무랄른지는 모르나 최근 2,3년간에 작가들 앞에 비평가의 손으로 제출된 몇개의 제목, 이를테면 ‘휴머니즘’이라든가, ‘知性[지성]’이라던가의 여러 가지 것이 무슨 특효제처럼 효력을 발생한다고 해서는 過[과]한 鈍感[둔감]이고, 또한 그리 믿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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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것이 現下[현하]의 어떤 波潮[파조]를 막는 일시적인 무엇인 것은 사실이고, 또한 누구나 그리 생각하는 것이나 그것은 실제의 문학의 저 ─ 上層[상층] 文藝[문예]에 관계된 정치를 문제 삼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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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것이 될려면 정치에서 사상으로, 사상에서 심리로, 심리에서 생활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가운데 최상층(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제일 중요할지 모른다)을 건드리면서 그것을 곧 人生觀[인생관] 내지 世界觀上[세계관상]의 근본 문제를 요리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창조의 신비와 그 실제의 괴로움을 체험해 보지 못한 비평적 無力[무력]의 한개 관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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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거니와 작가들이 창조의 값 있는 과정에서 고심하는 것은 일개 時事的[시사적] 課目[과목]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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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所與[소여]의 시대, 所與[소여]의 환경 가운데서 자기의 창조와 생존의 확고한 방향, 틀림없는 양식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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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작가든지 그가 산 것처럼 문학했다는 것이 항상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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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기초인 사상이란 것이 기실은 생활의 정신적 엣센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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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세태 묘사와 심리 内省[내성]을 현재 朝鮮文學[조선문학]의 두개의 기초라 치고 문학의 그러한 분열이 어디서 오느냐를 생각해 본다면 먼저 제출한 우리의 이야기는 증명해지지 않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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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지혜와 정열을 아울러서 전진할 방향을 杜塞[두색]당한 현대인의 자기 성찰과 또한 격변해 가는 현실의 모든 국면을 충분히 요리하지 못하고 다만 그것들을 丹念[단념]히 관망하는데 끄치는 현대인의 실로 무력한 影像[영상]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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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므로 방패의 양면에 불과하다. 결국은 현대라는 특유한 시대를 한 인간의 존재가 문학 위에는 두개의 현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즐겨 입에 담는 말로 自己分裂[자기분열]이란 말이 생긴 것이며, 문학의 두 潮流[조류]에의 분열은 또한 인간 생존 자체의 자기 분열의 당연한 반영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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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이곳에 현재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생활의 현실이 전개되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분명히 놀라운 사실 앞에 당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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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처리에 곤혹하고 있는 문학, 그것은 곧 사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제 자신과 똑 같은 肖像[초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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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실’이란 것을 우리가 思惟[사유]의 제목으로 할 때 一考[일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발레리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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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의 견해는 어느새 대부분의 문화인의 한개 상식이 되어 지성의 패배와 지성의 고립, 반대로 사실의 승리와 사실의 跳梁[도량]을 嗟嘆[차탄]하는 소리로 化[화]하나, 우리는 발레리가 19세기에 탄생하여 19세기에 성장하고 19세기에 교육을 받아서 專[전]혀 교양과 문화와 생활에 있어 완전한 19세기人[인]인 것, 나이가 벌써 작고한 前世紀[전세기] 작가들과 동년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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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에 있어 문제는 그에게 있어 ‘토키’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끄러운 예술인 것 이상으로 20세기는 알 수 없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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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사실이 전혀 20세기란 시대의 ( )惡[( )악]한데 있다느니보다 오히려 20세기의 사실 앞에 19세기의 지성이 무력해진 증거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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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세기의 사실이 19세기의 지성으로 파악될 수 없음은 19세기의 왕자인 시민의 지배권이 20세기에 와서 근본적으로 동요되었다는 데서 증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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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위 ‘知[지]’라든가, 文化[문화]가 이러한 모순을 통하여 즉 ‘知[지]’와 사실이 조화를 상실하고 상극될 땐 사실의 새 윤리를 발견함으로 낡은 ‘知[지]’가 수정되고 揚棄[양기] 되는 데서 발전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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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우리 문단의 지성의 悲哀[비애]를 부르짖는 論策[논책]이나, 아직까지 19세기의 맨체스터가 세계 시장을 지배할 때의 문학세계를 동경하는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경향의 移植[이식]을 目睹[목도]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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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세기의 지성의 揚棄[양기]와 20세기의 지성을 역사 발전의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知的[지적] 패배는 前者[전자]와 현저히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현대의 사실과 지적인 것의 통일을 인정할 수 있으나 지금에 있어서는 단지 그것은 이론적으로 인정될 따름이고 실천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에 문제는 지성의 패퇴에 있다느니 보다 본질적으로 육체의 패배에 있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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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에게서 이상하게도 지성의 패배란 말이 똑같이 토로됨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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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곳엔 일찌기 그들이 이론이란 것의 힘을 과신했던 탓도 있으나 비근한 현상으로선 사실의 압력이 범람한데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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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실제로는 두가지 색다른 潮流[조류]의 지성적인 것이 한개의 사실 앞에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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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느 사이에 사실에 대한 공포란 知性[지성](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 자체가 실로 중대한 문제나 편의상 논리적인 것, 문화적인 것의 의미를 포함시킨다)의 공통한 심리로 化[화]하고 지성의 옹호라는 마당에서 양자는 협력할 수 있었고 공동의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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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자세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고, 또한 우리들 자체도 모두 그런 것이 일시적이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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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양자는 같은 지성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내용을 달리 하는 것이고 얼마 전까지의 경험으로만 보더라도 서로 대립하고 상극하는 것이었으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의 창조란 지성 자체의 守禦的[수어적]인 옹호에서는 궁극에 있어 불가능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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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자유롭게 요리하고 요리된 사실을 제 의도에 따라 재구성하는 데서만 문화는 비로소 찬연한 창조적 성격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 모든 문화 앞에 제출된 공통의 과제는 사실을 요리하는 방법을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스스로 推象[추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들의 지성적인 것이 그 파악의 능력을 상실한 새 사실의 구조를 그 사실에 即[즉]해서 알아내는 데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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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 자체가 가졌던 지적 재산의 총목록을 상세히 또한 신중히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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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19세기적 지성과 20세기적 사실과의 救[구]할 수 없는 모순을 인정할 뿐더러 20세기적 지성이 20세기적 사실에게 격퇴당한 또 한개의 사태가 반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를 단순히 지성의 패배라 하고 후자를 또한 육체의 패배라고 돌려버림은 皮相論[피상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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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일반적으로 지성의 공통된 약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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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지성적인 것의 옹호에 열중하는 남어지 문화의 사실로부터의 遊離[유리]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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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지적인 것의 원천이 사실에 있는 것, 또 문화의 退化[퇴화]는 새로운 사실의 논리의 발견으로 수정되고 회복된다는 것을 현재 우리는 반성의 포인트로 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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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에선 시민적 지성이나 20세기의 새 지성이나 何者[하자]를 물론하고 지나치게 諸論理[제논리]의 자율성 속에 蟄居[칩거]함을 경계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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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은 부질없이 뭇 사실의 氾濫[범람]과 同化[동화]되지 않는 데선 논리의 장점인 동시에 또한 논리에의 고집을 통하여 사실에서 遊離[유리]함은 논리의 약점이다. 나는 이점에서 기정 사실의 인정이란 정치상 용어를 별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의 작가와 더불어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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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정 사실의 승인이란 것이 이태리의 이디오피아 점령으로 대영제국의 주권의 양보 내지 포기로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의 굴복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정의 사태는 이미 확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나머지 그 나라의 외교 정책이 모순에 빠지고 무능에 끝난다면 이것은 벌써 能[능]한 의미의 정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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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 사실의 인정은 그 사태를 기초로 하여 자기 발전의 확고한 현실적 노선을 발견함에 이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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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학이 두려운 사실을 어찌할 수 없어서 현실 표면의 세태와, 풍속의 묘사에 끄치거나, 헤어날 길 없는 內省[내성] 속을 방황함에 머무르고 있는 根幹[근간]인 문화의 정신을 사실의 승인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 활동의 방향을 일체로 사실 가운데로 돌려 그 사실의 탐색 가운데서 진실한 문화의 정신을 발견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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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하여는 우리가 실천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사실과의 拮抗[길항]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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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強昧[강매]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을 시험하는 것도 이것이며, 또한 새로운 사실의 논리, 새로운 사실 가운데 있는 새로운 문화 정신의 발견으로 낡은 우리의 문화를 수정하고 신선하게 고쳐가는 길도 또한 이 길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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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새로운 사실 앞에 우리의 온갖 것을 시련의 행위로서 성질을 밝혀 두는 것이다. 시련의 정신! 이것이 비로소 우리의 지성에겐 결여된 정열을 부여하고, 육체의 內省[내성]에겐 부족한 理智[이지]의 힘을 또한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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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8)
【원문】사실(事實)의 재인식(再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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