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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문학(平民文學)을 부흥한 장혼(張混)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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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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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民文學[평민문학]을 부흥한 張混[장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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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사 이래에 평등주의를 부르짖고 평민문학(平民文學)을 건설한 이는 장혼(張混) 씨이다. 선생이 작고한 지가 작년(1928) 9월 13일이 벌써 만 100년이 되었으되, 후인의 추감(追感)은 이루 승언(勝言)치 못할 것이니, 우리들은 반드시 경모(敬慕)의 성의를 다하여 그의 공업(功業)을 기념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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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학계에서 선생의 공적과 은혜를 아는지 모르거니와 그래도 문사(文士)는 선생을 기억하는 자가 있어 혹시 신문·잡지에라도 탄한 기사가 있으려니 하고 나는 일년간을 고대하여도 선생에 대한 설명은 일언반구가 보이지 아니하매 냉낙(冷落) 무정한 조선사회를 아껴 탄식하였다. 마지 못하여 어리석은 말이나마 몇줄의 글을 얽어서 세상에 발표코자 하였더니, 불행히 상사(喪事)를 당하여 근신 중에 있었으므로 즉시 표시를 못하고 이제야 뒤늦게 조금 말하게 되매 불초의 게으름과 잘못을 스스로 후회하거니와 사회의 냉정은 또한 심상치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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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혼 선생의 호는 이이엄(而已广)이니, 아따 인왕산(仁旺山) 아래의 만리장성댁(萬里長城宅) 주인이 그다. 그 주택을 만리장성가(萬里長城家)라 함은 당시 문사 천여 명이 집회하는 곳, 그 광대한 정원을 차지하게 됨은 정조대왕의 사패지(賜牌地)로서 크고 넓은 장원(墻垣)을 쌓은 것인바 그 주택부터 이상한 별명을 얻었더니, 역사가 흘러 그 유지(遺址)는 지금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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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가정은 본래 교목대족(喬木大族)이 아니나 14대 문장으로서 조선유사 이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문한가(文翰家)다. 그 누대 문학은 비록 벼슬길과 시단(詩壇)에서 그렇게 들레지는 아니했으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유배 생활을 했던 노은(蘆隱) 장효충(張孝忠)으로부터 선생의 증손 옥천(玉泉) 장효무(張孝懋)까지 14대를 내려오면서 은일문장(隱逸文章)으로 남이 알까 모를까 한 무명씨의 문장 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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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이전의 대대는 불평가로서 그 문장이 모두 충동적 사상이 넘쳐흘러 현로(現露)되던바 그 쌓이고 쌓여 내려오는 불평이 선생으로 하여금 평등문학을 창설케 한 것이니, 더욱 선생의 사업을 이루게 한 근인(近因)은 그 부친 죽헌(竹軒) 장우벽(張友璧) 씨가 선각적 기초를 쌓아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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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평등사상을 양성한 그의 부친 우벽 씨는 누구냐 하면, 조선 시가법(詩歌法)을 건설한바 조선 민족적으로의 대은인이다. 조선 문사는 본래 수천년 생활이 자국의 정신을 몰각하고 ‘소중화(小中華)’ 3자에 혹취(惑醉)하여 한문·한시를 숭상하고 의식주 또는 풍속까지도 모두 중국 것만 모방하고 정작 조선의 순수함은 자포자기하여 노예성을 스스로 지은 것이다. 그런 참담한 역사를 빚어온 문학계에서 만고의 혼탁한 물결을 청산하고 근본 정신을 구제한 자는 장우벽씨 1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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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가 일찍이 말하되, 조선인은 조선 시가를 주로 삼지 않고 한시가(漢詩歌)만을 숭상함은 크게 옳지 않다 하였다. 그런 각오, 그런 훈계를 보여서는 고래의 시조(時調)를 취집(聚集)하며, 각 곡조의 가락을 정리하여 귀족적 문학을 배척하고 평등·민중적인 시가를 건설함에 이르니, 근래 『가곡원류(歌曲源流)』라 하는 책자는 대원군(大院君)이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 2인을 데리고 수정한 것이나 그 원본은 우벽 씨의 수집(修集)으로써 장혼 씨가 완성하여 전한 것이다. 그런즉 조선문학이라고는 우벽 씨의 업적이 아니었다면 씨도 없이 망할 뻔하니, 그 어찌 조선민족의 큰 은인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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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법(歌法)에 있어서는 씨가 특히 음악의 이치와 법칙을 강구하여 구래(舊來)의 불규칙한 가락을 교정(較正)하여 매화점법(梅花點法)을 창설하였다. 매화점법은 무엇인가 하면, 4박자·5박절로 노래의 보조(步調)를 재정(裁正)하여 창음(唱音)의 계기적(繼起的) 결합을 통일한 것이다. 이 매화점설(梅花點說)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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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외사(壺山外史)』『우봉집(又峰集)』『장씨가장(張氏家狀)』등의 책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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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곡의 장단에 있어서 언제나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통달하지 못해서, 배우는 사람들도 밝게 깨닫지 못했다. 장우벽(張友璧)이 매화점법(梅花點法)을 창안해 만들었는데, 대체로 그 점법이 장단에 들어맞았고, 장단을 비교하면 점수에 들어맞았다. 두루 원래대로 복구하니,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해보면 곡조가 두루 통해서 사람들이 분명하고 쉽게 알 수 있어서 세상의 가객들이 모두 준수하여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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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가법(歌法)은 세종대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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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豐亨)」 3법을 고려초의 「황풍악(皇風樂)」에 의하여 정리해 주신 것이 있더니 그것이 다 없어져버리고, 혹시 대궐 안에서 문학사(文學士)를 초청하여 시조를 짓게 하고 또 노래부르게 하였으나 (『自菴集[자암집]』 참조) 시조 자수가 각기 다르고 창법(唱法)이 즉흥적으로 법도가 없던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배울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었더니, 장우벽 씨가 이를 창제한 후에는 시조 자수도 규정되고 가법(歌法 : 3調[조] 34편 ― 원주)도 건설하여 조선인도 근본문학을 가진 민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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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돌아다니는 시조집(時調集)에는 책을 펼친 처음 면에 매화점이라고 5점의 성형(星形)이 있으니, 그것이 곧 알고 보면 장우벽씨의 창제이다. 그 점법(點法)을 세상 사람은 무심히 보고 또는 아는 이도 없으나 그것이 강약(强弱) 2양(樣)의 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긴장히 이완(弛緩)에 옮겨질 때 만족의 쾌감을 낳게 한 것, 음향적 심리상엔 평정 안이한 감정을 주는 것이니, 이 법이 나온 뒤로는 시조 또는 가법이 창설될 뿐 아니라 장악원(掌樂院) 궁중악 또는 전국 민요까지도 다 매화점을 좇아 일신공풍(一新工風)의 법칙으로 변성(變成)한 것이다. 이 매화점법의 이치와 음악계의 변천된 것은 별문제다. 그러므로 고사하고라도 우벽 씨의 은공이 그같이 크며, 장혼 선생은 그런 국민에게 큰 공훈을 세운 부친 슬하에서 착실한 교양을 받았고 겸하여 그의 모친은 여자 문장으로서 장혼 씨의 문학은 그 모친에게 학습하니, 그 모친은 현풍 곽씨, 그 성격이 현철(賢哲)할 뿐 아니라 한문학(漢文學)이 대단하고 불해 여공(不害女工)엔 필수 학문이라 하여 여자 교육을 부르짖은 이니, 그 유지(遺址)에 오늘날 배화여학교가 설립된 것도 우연치 않은 일이다. 장혼 선생은 실상 인격도 천자(天資)가 비상하거니와 그런 현부현모(賢父賢母)의 교양에서 치어난 때문에 그의 성격은 더욱 비범한 유래가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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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영조 기묘년(1759) 8월 4일 인왕산(仁旺山) 서벽정(棲碧亭)에서 출생하니, 그 처음 고고(呱呱)의 소리를 부르짖을 때 만강(滿腔)의 불평이 적신(赤身)으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듯하였다. 점차 자라서 9세에 이르니, 개가 물어뜯음으로 인하여 오른쪽 다리를 다쳐서 그만 절뚝발이가 땅을 불평하는 병신이 되니, 이 또한 불평객(不平客)의 상징이었다. 신체부터 남과 달라 한쪽 다리가 길게 됨은 불평(不平)을 체험하여 평등(平等)의 진리를 깨닫게 한 신의 조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에는 절뚝발이 걸인도객(乞人道客)의 철승선(銕僧仙)이 있다더니, 조선에는 평등문학의 창도자 이이엄(而已广)이 있으니, 피차의 자유사상가는 같으나 저는 우객(羽客)으로서 독선(獨善)을 즐기고 선생은 지사(志士)로서 민족을 위해 노력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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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처음 입학한 때는 9세인데 그 모친이 문학을 교수할새, 천재(天才)가 어떻게 표이(表異)하든지 몇달이 못되어 자해자독(自解自讀)하여 고문(古文)을 밝게 꿰뚫어 깨닫고 20세가 못되어 패설 잡서(稗說雜書)까지 주목하여 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 문예의 좋은 점은 시에 있어서 한번 제영(題詠)을 내어놓으면 문단에서는 다투어 서로 전하여 위로는 조정과 아래로는 여항(閭巷)까지 그의 명성이 전파되고 드러나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영예를 드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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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그의 한시(漢詩)의 아름다운 가락은 당시 문단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치던 것이다. 선생이 일제(一題)를 읊으면 먼저 다투어 전송(傳誦)하여 비록 재상(宰相)이라도 먼저 얻어본 것을 자랑으로 치니, 남공철(南公轍)이 이용수(李龍秀)와 주고받은 편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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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張某)는 시(詩)로써 세상에 이름이 드날린 사람이다. 당신이 어찌 그것을 아느냐 하면, 나는 그의 시를 아끼고 그의 일을 도우려 하는데, 홀로 당신만의 말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남공철과 이용수 두 분은 문장 재상으로서 그의 시가 능히 풍우(風雨)를 통하였다 하나 선생의 시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자리를 양보하고 그의 시를 부러워하기를 오직 그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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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섭(洪起燮)도 당시의 문장 재상으로 선생을 흠모하여 한번 보기를 바랐으나 관품(官品)이 차이가 커서 먼저 방문함을 주저하다가 하루는 길에서 서로 만나 내친 김에 선생댁에 함께 가서 스승으로 공대하고 평생동안 의(誼)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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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돌아간 뒤에 그 문집을 수리(修理)함에 있어서 김노경(金魯敬)·홍석주(洪奭周) 두 분이 서로 교정권(校正權)을 다투어 그 문집에 자기 성명을 쓰기를 막대한 영광으로 알았으니, 이는 저 두 사람의 왕복한 서간에서 발견한 것인바, 이 사실만 가지고도 선생의 시명(詩名)이 당시에 있어서 해와 달같이 빛나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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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구(李書九)· 김이양(金履陽)은 선생의 시를 평하되 공산독왕(空山獨往)에 고화표춘(孤花縹春)이라 하니, 이는 왕엄주(王弇州)가 고숙사(高叔嗣)의 시를 평한 것을 적용한 것이나, 나는 오직 그렇게만 칭찬할 것이 아니라, 그의 문집 8책을 펼쳐 읽어보면 선생의 시는 1천년 이래에 다시 없는 봉전(鳳篆)으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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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운(詞韻)을 수식함에는 선생보다도 나은 이도 많다. 신묘미(神妙味)가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 부섬혼후(富贍渾厚)한 오세재(吳世才)· 진화(陳澕)의 시, 웅위호연(雄偉浩然)한 목은 이색(李穡)의 시, 이조인(李朝人)으로 말하여도 『고담유고(孤潭遺稿)』에 평한 8대가(八大家)의 시,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문예적인 시로서 순예술(純藝術)의 시라 형색(形色)의 미려를 주로 한 것이거니와 선생의 시는 가슴속에서 약비(躍飛)하는 사상이 말 밖에 넘쳐서 인생의 감정을 솔직히 묘사한 것이니, 그의 가치는 형(形)보다 상(想)을 주로 한 것이다. 물론 사상시(思想詩)로 보아도 고려 때의 우국개세(憂國慨世)의 회포를 토해낸 안축(安軸)도 있고, 이조 초의 도덕·경술로 유주(流凑)한 윤철(尹哲)의 시도 있으나 저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면 종교적 연취(軟臭)로 나온 것이다. 선생의 문집 중에도 즉흥적 감회를 묘출한 것, 또 도리적 철리(哲理)로 조성(雕成)한 것도 있되 그 대의(大義)를 통해서는 인간 감정의 밑바닥을 건드려 무한한 자유· 평등을 천진적(天眞的)으로 토해 내니 그 생명은 스스로 영원히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평범한 안목으로 선생의 문집을 보아넘기면 무미(無味)하다 할 것이나 유심자가 맛들여 보면 참정기(情氣)가 넘치고 묘경(妙境)이 열리어 천년의 미혹(迷惑)을 도파(道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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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선생의 시의 품격을 논하는 취지가 아니므로 그의 시를 하나하나 예를 들어 증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표리(表裡)를 엿보고자 하는 이는 그 문집을 일람함에 미루거니와 선생의 사업, 정작 후세 사람에게 끼친 정신을 말함이 본뜻으로 될새, 다음에는 선생의 진면목을 기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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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규장각(奎章閣)을 신설하고 미증유의 르네상스를 일으키고자 할새 거기 상당한 인재를 널리 구함에 있어 4년이 되도록 적임자가 없어 한탄하고 있던 터에 마침 선생의 문명(文名)을 아는 재상이 있어 대임(大任)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평민주의(平民主義)가 있으므로 관로(官路)에는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아니할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몸소 출세(出世)를 허락치 않고 4검서(四檢書)를 추천하여 그 임무에 당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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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검서도 특별히 재주 있는 인물이나 사업이 워낙 헤아릴 일이라 기재(奇才)인 4검서도 어릿거리고 착수를 못하여 3년간을 헛되이 보낼 뿐일새 조정에 가득찬 문사들은 실마리를 찾지 못하여 다시 대인(大人)을 구하더니, 제학(提學) 오재순(吳載純)의 힘써 권함으로 인하여 선생이 규장각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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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부득이 각료(閣僚)에 참석할새 비록 가장 미관(微官)인 사용(司勇)의 직함을 띠었으나 임무는 내각(內閣)의 일을 전장(專掌)하였다. 사무를 시작해서는 저술(著述)이 신기하고 교정(校正)은 파죽(破竹)과 같다 하여 관각(館閣)의 제공이 혀를 차고 놀람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년에 거질(巨秩)의 책을 끝마치니, 당시 교정 인쇄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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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경(三經)·사서(四書)·『오경백편(五經百篇)』『경서정문(經書正文)』『좌전(左傳)』『사기영선(史記英選)』『팔자백선(八子百選)』『육주약선(陸奏約選)』『주서백선(朱書百選)』『아송(雅誦)』『사부수권(四部手圈)』『두륙천선(杜陸千選)』『두륙분운(杜陸分韻)』『오륜행실(五倫行實)』『규장전운(奎章全韻)』『규화명선(奎華名選)』『태학은배시집(太學銀杯詩集)』『갱재록(賡載錄)』『풍패실록(豐沛實錄)』『인서록(人瑞錄)』『정종어제(正宗御製)』『옥편(玉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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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문집·잡서를 수교 인간(修校印刊)한 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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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전서(栗谷全書)』『도암집(陶菴集)』『역천집(櫟泉集)』『병곡집(屛谷集)』『정암집(貞菴集)』『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수산집(修山集)』 『문공연보(文公年譜)』『금금집(錦衾集)』『창곡집(蒼谷集)』『근재집(近齋集)』『박씨사세유고(朴氏四世遺稿)』『금석집(錦石集)』『퇴헌집(退軒集)』『정헌집(靜軒集)』『반포유집(伴圃遺集)』『창암집(蒼岩集)』『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관서창의록(關西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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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로 유명한 서적은 거의 다 선생의 수정을 받아 발행되었다. 그런즉 어느 때엔 저술, 어느 때엔 교정, 또 어느 때엔 감인(監印)하였는지, 실상 선생의 천재(天才)는 귀신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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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을 이룬 뒤에는 정조대왕이 일반 근무자의 공을 통촉하여 수령 또는 다른 관청으로 승차(昇差)시켰으나 오직 선생은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허명(虛名)의 가자(加資)를 제수하였으나 이 또한 굳이 겸양하고 백백공신(白白空身)으로 퇴직하고 말았으니, 그의 개결(介潔)한 심청(心淸)은 창랑(滄浪)의 맑음보다도 오히려 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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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선생의 성명(聲名)이 더욱 널리 전하니, 천하의 식자는 운해(雲海)같이 그 문하에 모여들었는데「배연상초(裴然廂抄)」에는 선생의 문인을 말하되 “시골의 준수한 사람들이 감발되어 선생을 좇아 노닌 자가 거의 천여 명에 가깝다”고 했으나 실은 천 명도 더 되는 것같이 생각되니, 위로는 국구(國舅)로 김조순(金祖淳)· 조만영(趙萬永)과 정승·판서의 이름이 있는 자만 20여 명이 그 문에 출입하여 스승이나 연장자로 대접하고, 아래로는 천수경(千壽慶)·왕태(王太) 등 무명씨의 좆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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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당대 문인(門人)이 1천 명만 된다 하여도 고려 이래 학자·명사들 쳐놓고 1천명의 문도가 있는 자는 오직 장혼 선생뿐이니, 이것만 가지고도 족히 공전(空前)의 대선생이라 할 것이다. 더욱 근세에는 사색(四色)의 파쟁이 혹심하여 학자는 자기 당색에 한하여 그 범위가 극히 편협하였으나 선생에 이르러서는 사색을 물론하고 하류·평민을 불고하고 공동의 추종으로 거국일치(擧國一致)의 추앙을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전무후무한 인격자의 성적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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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선생의 꽃다운 이름이 당대 일세의 추앙됨을 만족으로 칭예(稱譽)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의 업적이 후세 민족에 끼쳐져 영원히 기념됨을 못내 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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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민중에 대하여 큰 은공을 이룬 것은 무엇인가. 선생이 인간 진리의 평등을 자각하여 평민문학을 일으킴에 노력한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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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내각의 사업을 마친 뒤에는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20여 종의 책을 저술하니 그 가운데 『대동고식(大東故寔)』『금민수지(金民須知)』 2책은 조선인도 다른 민족에 대한 민족적 평등을 고취한바 조선인의 역사·지리·풍속·경제 등을 말한 것이다. 예로부터 조선인은 중국의 역사·지리·풍속 등을 배워 얻음에 열심이었고 정작 조선 자기 민족의 정신은 자비(自卑)에 놓아두니, 이것이 노예성이다. 이제 이후 우리는 아무쪼록 조선 대동(大東)의 정신을 배양하여 국제 평등을 실행치 않을 수 없다 한 취지로써 지은바 민족독본이다. 이 책을 우리들이 읽을 때에는 살이 떨리고 이가 갈리는 동시에 선생의 금언대훈(金言大訓)은 만고 성경(聖經)으로 아는 동시 선생은 천년 지옥에서 방황하는 민족을 광명세계에 인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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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우리들이 노예성을 개조함에는 노인·장년은 어떡할 수 없으니, 이 방침은 어린 아이들의 기초 교육을 완전히 하여 제2대 국민을 양성함이 가장 필요하다 하여 아동 초학(初學)의 교과서를 새로 지음에 마음을 다하여 『아희원람(兒戱原覽)』『동습수방도(童習數方圖)』『계몽편(啓蒙篇)』『몽유편(蒙喩篇)』『초학자휘(初學字彙)』『근취편(近取篇)』6책을 저술하니, 이것이 평등문학의 근본이다. 고대 석학의 저술이라도 조선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소중화(小中華)라 하여 차별적으로 입론(立論)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아희원람』에는 조선의 제왕·영걸을 다 중국 제왕·영걸과 동렬(同列)에 세워 어려서부터 민족적 평등을 무위이화(無爲以化)로 알게 하였다. 이것부터 선생의 염량(炎凉)이 옛사람보다 매우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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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주장은 비교도 아니요 발명(發明)할 것도 없이 동등(同等)으로 열거만 하여 부지중 피아(彼我)의 평등사상을 긋게 한 것이니, 이 어찌 감탄 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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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편』은 국민독본이다. 재래의 초학(初學)은 매우 어렵고 범박한 백수문(白首文 : 千字文[천자문])을 가르쳤으나 선생은 간단하고 쉽게 문학·도덕·박물(博物) 등을 종합하여 초등의 상식을 주로 하고 언문(諺文)으로 풀어서 조선의 어문을 먼저 배우게 한 것이니, 이것이 개신공풍(改新工風)의 일이다. 서양서도 종합적 독본을 저술함이 겨울 50년 전 일이나 선생의 『계몽편』은 벌써 백수십년 전에 창설하여 이를 국민독본에 쓰니, 아아 선생의 선견(先見)은 감히 찬양하지 아니치 못하겠거니와 그 열어젖힌 계몽의 업적은 영세불망(永世不忘)의 덕택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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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국민교육에 대하여 제일 징계(懲戒)는 벼슬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게 한 것이다. 대개 관리는 노예성이 있기 쉬운 일이다. 곧 관리는 인순고식(因循姑息), 절대 복종, 무조건 압박, 이 세 근성의 노예심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재래 아동이 입학을 『천자문』에 시작하는데 『천자문』 속에는 ‘학우등사(學優登仕)’ 4자가 있어 연골(軟骨) 적부터 학문을 사환(仕宦)의 목적으로 배우고 인생의 구경(究竟) 목적이 벼슬길에 있게 되었으니, 그 민족이 어찌 노예성이 없을까. 이제 평등사상을 취함에는 그런 사환열(仕宦熱)을 타파하여야 된다는 것이 그 취지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저술인 아동 교과서에는 학문을 상식의 계발과 인간의 본분을 깨닫게 함을 목적하고 치국(治國)이니, 평천하(平天下)니, 등사(登仕)니 하는 문구는 국민교육의 큰 악마로 여긴다. 자기부터 벼슬길은 끊어버린 것이요, 사교(社交)에 있어서도 관리 사상을 크게 배척하니, 판서 박주수(朴周壽)가 처음 급제(及第)를 하니, 선생이 친히 방문하여 사대부의 조년 등과(早年登科)는 한 불행이라 책망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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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언론의 자유가 없는 때였다. 그러므로 선생도 평등의 사상을 고취함에 있어서는 대서특필의 쾌담(快談)을 토해내지 못하나 시(詩)든지 문(文)이든지 혹은 풍자 혹은 비유 또 혹은 암시 등 여러 가지 수사(修辭)로써 간접적 표시를 다하였다. 그 가운데 『허생전(許生傳)』『춘향전』 2편의 걸작이 있으니, 이는 선생의 근본 사상을 소설로 묘사한 것인바 오늘날 우리들이 일상으로 애독하여 찬탄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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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그것을 단편으로 묘사하였으나, 선생은 자기 평등사상으로서 윤색하여 장편으로 만든 것이 있으니, 연암의 글에는 얼마만큼 인격 본위를 삼은 것이나 선생의 글에는 평등 본위를 주로 하니, 인생의 생활 문제는 국가 대정(大政)의 본령이거늘 양반(兩班)은 경제를 무시하고 혹은 인민의 기름을 빨아먹으니, 이는 불평의 뿌리요 인도(人道)의 큰 적이다. 이로써 양반이라도 직접 나서서 상업도 하고 천업(賤業)도 하여 상인(常人)과 평등히 서지 아니하면 진리상 평등을 손상함은 물론이요, 국가 경제와 가정 보존의 큰 문제를 참혹케 한다는 취지로써 묘사한 것이니, 이것이 연암의 사상과 다른 것인 동시에 선생의 평생 주의(主義)를 이 책에 사출(寫出)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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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은 그 작자를 아는 자가 없어 문단의 유감을 빚어온 것이나 나의 고증한 바에 의하면, 『동산집(桐山集)』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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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108첩(疊)의 주(註)에 장이이엄(張而已广)의 소견필(消遣筆)이라 한 것으로써 선생의 저자(著者) 됨을 짐작한 것이다. 물론 일단(一端)만의 전적에 의하여 논하는 사람이 선생의 사적을 공포함은 오히려 선생 자기에게 있어서는 황천혼(荒泉魂)을 부끄럽게 한다 할 것이나 백년 후 그 은혜에 목욕한 우리들의 책임이야 은혜를 잊는 허물을 스스로 지을 수 없어 이에 몇마디를 표한다. 앞에 쓴 것 외에도 선생의 일화(逸話) 및 모범의 행적에 대하여 들어 말할 것이 끝이 없으나 도리어 논의를 위하여 글을 씀과 같고 또는 선생 본지(本旨)에 대하여 훼손될까 두려워하여 이만 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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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선생은 문예부흥· 평민문학 창설 이 두 가지 사업을 이룬 은사라 후인이 된 우리들은 그의 화우(化雨)에 목욕한 것이 실로 행복이다. 그러나 불초 후인은 조선(祖先)의 혜택도 깨닫지 못하여 장혼(張混)이 어떤 사람인지 그 성명도 모르는 자가 있다 하면 그 어찌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까. 단군(檀君)을 팔아서 벼슬을 구하는 문사는 족히 더불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친 시(詩)를 내걸고 자기의 영명(令名)만 낚는 자가 가득한 오늘날에 앉아서는 선생의 사업이 유야무야에 장사지낼 지경이니, “관문투본성(官門偸本性) 학해균방명(學海鈞芳名)”이란 선생의 시는 정히 오늘날 인심에 비유 할 것이다. 아아, 오늘날 사회에 앉아서는 더욱 선생을 추모함이 배나 더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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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29. 3. 3 ∼ 9, 5회 연재>
【원문】평민문학(平民文學)을 부흥한 장혼(張混)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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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확(安廓)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2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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