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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픽 중심으로 본 기묘년의 산문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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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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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픽 중심으로 본 기묘년의 산문 문학
 
 
 

1. 상. 세대론과 신인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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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론의 구체적 대상으로서 신인이 문제가 되고 이러할 때에 해론(該論)의 입지에서 신인의 작품이 검토를 받게 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그것이 곧 신인 개개인의 역량이나 작품의 가치를 좌우하는 유일의 거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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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논의가 시단에서 시작되었고 시단의 신세대를 인정하려고 한 자가 자기의 시적 감각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고 있는 중견 시인이었다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시는 항상 시대에 선행한다. 시단에 신세대가 출현하였는데 산문 문학에서 그것은 찾을 수 없음은 산문이 시에 비하여 시대에 대한 감각이 예민하지 못하다는 하나의 증거로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였을 때 시인들은 그지없는 영광을 느꼈던 모양이나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그리 적확한 관찰이 될 수는 없었다. 조선 시단에서 중견 시인의 서있는 발판이 작단에 비해서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 중견 소설가가 아직도 사실의 시대의 앞에서 자기의 구상력에 절망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신인보다도 소설 문학을 이끌고 나갈 만한 시대적 파악력이 중견에게 더 많이 있다는 것이 자각 - 이런 것은 사실을 해명하는 반분(半分)의 자료로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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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신인 소설가들의 작품을 검토하여 보아도 그들에게 중견이나 기성의 작가들이 가질 수 없고, 또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새로운 정신적 가치란 것은 없었다. 가장 역량 있는 신인 작가, 가령 김동리 씨는 이태준 씨의 세계에서 뚜렷한 정신적 세계로써 자신을 구별할 수는 없었고, 정비석 씨는 이효석 씨에 비하여, 김영수 씨는 박태원 씨에 비하여 결코 새로울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에게 미치지 못할 만큼 손색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명익 씨의 것이나 박노갑 씨의 거시이나, 모두 의의 있는 실험이고 기도이기는 하나 구세대의 대신으로 문학을 정신적으로 이끌고 갈 만한 신세대로서의 가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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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점을 달리하여 신세대로서의 가치 기준에서 떠나서 신인의 개개의 작품을 따져 보면 그 역량이나, 또는 작품의 솜씨로서 훨씬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기의 제씨 외에도 정인택, 현덕, 이근영, 계용묵 등 제씨의 작품은 그것으로서 훨씬 높은 수준에 있고 어느 모로나 우리 문학의 재산 목록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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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분적인 차이, 기술상의 우수, 중견의 세계의 일부분 등등이 결코 신세대라고 이름 주어질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고 말할 뿐이다. 신인 제씨들이 이러한 점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하든, 치욕으로 생각하든 그것은 씨 등의 자유겠으나 이러한 상태에서 만족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이 고매한 정신 운운의 평언에 해당하지 못한 것임은 명백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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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반드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신세대란 역사적인 개념이고, 신인이란 문단적 연치(年齒)를 가지고 운위되는 관념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신세대라면 곧 생년월을 연상하거나 연령을 문제로 하는 폐단이 있으나, 그것은 결코 문단적 연치도 생물학적인 개념도 아니다. 문단적으로는 중견의 지위에 있으면서 정신적으로는 신세대일 수도 있으며 또는 연령에 20년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한 세대적 정신에 포섭될 수는 있는 것이다. 신세대라고 아니 불리우는 중견 작가들 간에는 정신적 차이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것을 전혀 말살해 버리고 세대론을 정당하게 토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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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다시 한번 명기할 것은 신인으로서 작가적 기술이나 역량이 우수하다고 하여도 결코 그것이 신세대의 자격으로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인들의 중견에 대한 전혀 핀트가 맞지 않은 반발은 이러한 착각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그럴수록 신인 제씨들이 자기의 역량과 기술을 신세대로서의 정신적 탐구에로 기울여 보려고 하지 않고, 도도히 흘러 조금도 용서 없는 사실의 파도 앞에서 하찮은 장인적 연마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스스로 증명하는 사업에 시종하려고 하는 것이 문학의 진정한 진보를 위하여 애석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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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9년 12월 19일〕
 
 
 

2. 중. 주인공 = 성격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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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간행되는 종합 잡지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이후 사상의 붕괴니 이데올로기의 불신이니 하는 등의 표제가 번거롭게 나붙고 있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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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이러한 사회 평론가들의 단견에 동의하여서가 아니라, 이제 문학은 사상이나 관념에 대하여 상당한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관념에 비하여 생활이 언제나 우위하다는 것은 진심으로 깨달아야 할 시기에 이르러 있다. 어떠한 가치 전도의 시대에 있어서든, 사실의 물결에 휩쓸려 가지 않고 문학의 진로를 곧바로 추진시킬 수 있은 것은 관념이나 사상에서가 아니라 항상 생활적 현실에서부터 출발하는 리얼리즘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진지한 태도로써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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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1년 동안 소설의 성격과 주인공을 토의한 분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주장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성격=사상’의 공식이 표시하는 일련의 전혀 편파(偏跛)한 의견이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 내지는 예술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을 적지 않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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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회의 우수한 리얼리스트들은 그의 장편 소설에 항상 적극적인 성격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할 때 논자의 생각은 지극히 타당하고 또 이러한 경우에 ‘주인공=성격=사상’의 공식을 내세우면 그것은 가장 훌륭한 진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 하나의 척도로 하여 단편, 중편, 장편의 여하한 경우에도 융통성 없이 일률적으로 적용하려 들 때에 그 곳에 나타날 사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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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인 것의 절대적 우위, 자기 검토적인 내성 문학에의 과신 - 이리하여 그것은 전기 공식이 표현하는 본래의 정신과는 정반대 되는 생활에 대한 관념의 우위라는 전혀 아이디얼리스틱한 것의 예찬에 이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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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이나 「고향」의 주인공 김희준이가 20년대 내지는 3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공의 체험적인 것이 자기 검토의 끝에 도달한 것이 「육장기」의 심경이고 하나는 상식적 교훈의 되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면으로 추궁하는 데 있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체험적인 문학 준에서 가장 우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체험을 구하려고 자기를 검토한 끝에 도달한 것은 종교였다. 그러나 발자크나 셰익스피어는 관념이나 사상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로만의 행진은 능히 그의 고루한 사상을 넘어서 자기를 완성함에 이르렀다. 사상, 관념, 이데올로기의 불신과 붕괴가 치성(熾盛)히 불리워지고 있는 지금 예술가가 의탁할 곳은 허풍선이나 유령 같은 관념이 아니라 정히 생활 그 자체임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에는 한설야 씨의 1년 간의 자기 검토는 눈물겨운 노력이지마는 금후의 행방을 저으기 우려케 하는 작품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녕」 「술집」「종두」의 주인공의 체험은 어디로 갈 것인가? 물론 춘원처럼 불교의 문을 두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기영 의 「수석(燧石)」이나 「묘목」의 주인공처럼 상식적 교훈으로 가지도 않을 것을 믿는다. 그렇다고 언제나 반발이나 조소로서 만족하려 할 것인가? 한씨의 문학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기구(企求)하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의 향촌」의 초향이나 혹은 그의 오빠들처럼 작품의 배후에서 정체 모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만족하려는가? 통틀어 이기영, 엄흥섭, 한설야, 송영 등 제씨는 리얼리즘이 관념에서가 아니라 생활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반성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운명의 개조니 어쩌니 하는 비평가의 신비색이 농후한 선동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문학을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갈 이유는 없다. 운명을 개조한다는 주관적인 도취에 빠져서 1년에 작품 하나도 쓰지 못하는 그러한 ‘성실’을 모방하여야 될 의무는 리얼리즘이 짊어질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무영 씨가 농촌으로 찾아 든 것에 기대를 느낀다. 아무 괴력(魁力)도, 힘도, 가치도 없어진 독단적인 상식에 불과한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일로(一路) 농촌의 현실적 생활에서 시작해 주기 바란다. 이것만이 사실의 시대에 사는 소설가의 가장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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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9년 12월 21일〕
 
 
 

3. 하. 세태 = 사실 =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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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인 것, 내지는 아이디얼을 생활보다 우위에 두는 문학이 가령 이광수 시에 있어서처럼 종교적인 설교나, 혹은 종교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통속적인 상식의 세계에 빠져서 산문 정신의 본래적인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든가, 한설야 씨의 경우와 같이 이씨와는 별개의 의미에서 주관적인 색조에 몸을 맡겨 자기 검토, 자기 개조, 자기 운명의 구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소설 정신을 이끌고 가는 과정에서 속세에 대한 울분이나 반발이나 조소를 경험하고 있든가,(주〔註〕하여 두거니와 필자 왕년의 자기 고발 문학은 후자와 거의 동류의 체험적 문학이었다) 이것의 어느 것에 의하여서나 사실에 대처하는 산문 문학의 무기로써 추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산문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성이라는 것을 전혀 원시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분들의 눈에 가장 사상적으로 비칠 문학은 물론 체험적인 주관 문학, 내지는 아이디얼리즘의 문학일 것이다. 필자가 누누히 말해 오는 소설 문학의 사상이나 모랄이란 것은 그러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든가, 덕목이나 도덕률로서, 도는 설교, 교훈, 연서, 선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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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기 성찰이나 혹은 체험적인 것에서 떠나서 끝까지 외부 세계의 묘사에서 자기의 문학을 끌고 나가려는 반대의 경향이 우리 문단에도 있어 왔던 것이다. 예의 세태 소설이 즉 그것의 극단의 예였다. 박태원, 채만식 양씨가 이의 대표격으로 지칭되어 왔는데 채씨는 작년부터 벌써 세태 세계에서 자기를 구출할 작업에 종사하여, 풍자, 역설로써 그것을 실험하였고, 금년에 와서는 그러한 노력에 허무주의와 부딪쳐서 그것을 극복하기에 상당한 괴로움을 겪고 있다. 한편 박씨도 이 이상 천변 세태를 외부적으로 관찰하는 것에 지쳐서 하반기에 와서는 자리를 떠 볼 의향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다. 씨 등이 세태 소설에서 자기의 문학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가장 의당(宜當)한 노력으로서 세태나 사실은 그것을 한 등 올라서서 넘어 버리지 못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생활, 다시 말하면 문학이 찾으려는 생활적 진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생활적 진실을 도외해 버리고 문학의 모랄이란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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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에서는 체험적인 것 내지는 관념적인 주관을 적당히 모랄로서 남겨 가지면서 사실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내성적인 것, 주관적인 것을 들고서 사실의 내부에 내려와서 그 곳에서 생활적 진실을 찾으려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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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초에 자신의 방향을 ‘시정에의 편력'으로써 표현한 유진오 씨, 그리고 씨보다 좀더 앞서서 ‘모랄론’, ‘풍속론’, ‘장편 소설 개조론’ 등 으로 자기의 문학의 갈 길을 탐구한 필자가 그 예로 들리울 수 있을 것이다. 유씨나 필자는 물론 적지 않은 뉘앙스의 차이는 있으나 체험적인 것을 들고 사실의 세계에서 자기의 문학의 정상한 발전을 꾀하려는 의도는 거의 같은 것이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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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채만식 양씨와 유진오 씨와 필자의 두 갈래는 소설 문학의 양극단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서로 서로 생활적 진실얼 탐구하려는 일념에서 점점 가까운 거리에서까지 접근하고 있는 것은 당사자인 필자도 흥미있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오는 1년이 각각 재미난다. 결코 가 닿는 세계가 같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같지 않고 따로 따로이 문학적 세계를 이룬다면 산문 문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이에서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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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과 같은 전환기, 또는 사실의 풍랑의 세상에서 사실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모험이 아닐 것은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 가령 유씨에 있어서는 거치른 물결과 바람 가운데서 문학을 붙들고 있는 거점이 ‘교양’과 ‘정조관’ 같은 것이었는데(전자는 「가을」후자는 「나비」의 모랄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는 시정이나 사실 속에 휩쓸려서 들고 들어갔던 것까지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 않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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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위험성은 거의 전부의 중견 작가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태준 씨의 ‘애수’나 ‘실의’, ‘고독’, 또는 안회남 씨의 심경 세계나 리리칼한 중도반단적 현실 투시, 이효석 씨의 ‘성’과 다각적인 이국 취미나 가냘픈 서구에의 동경 등, 모두가 사실의 비상한 시대를 겪어 나갈 산문 정신의 거점이나 지주가 되기에는 믿음직하지가 못하다. 여하튼 산문 문학은 어려운 한 해를 앞에 두고 새로운 용의와 각오가 필요할 것이라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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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9년 12월 22일〕
【원문】토픽 중심으로 본 기묘년의 산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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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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