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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반역자(叛逆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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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5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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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반역자(叛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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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한 일이었다. 오늘부터 시험을 보러 가야 할 작은 놈이 간밤에 어디를 가서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느 학기시험이 아니다. 옛날 과거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는 입학시험을 보아야 할 날에 이 꼬락서니다. 그나마 간밤에만 알았더라도 어디 찾아라도 보았을 것을 아침에서야 떡 그런 소리다. 인수가 안 들어왔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가 간밤 술이 채 깨지도 않은 준의 귀에 들려왔을 때도 그는 꿈을 꾸고 있거니 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말소리가 현숙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현숙이가 지금 이 집안에 있을 리가 만무한 노릇이었다. 현숙은 지금쯤 저의 소원대로 평양에서 여판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현숙이가 아이들의 입학시험 걱정을 하고 있을 제는 필시 꿈이리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다만 개랑개랑하는 식모의 음성이 현숙이의 음성으로 착각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이 깨달아지자 그의 의식은 그 무슨 쇠망치 같은 것한테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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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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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속에서 외마디소리를 치고 이불을 걷어찼다. 그러나 준은 한동안 찬 벽에 이마를 대고 식히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어릴 때 맴을 돌고 난 때처럼 패앵하니 돌았던 것이다. 찬 벽에 머리가 식었는지 정신이 돈다. 준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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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무슨 소리야? 인수가 안 들어오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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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올십니다요. 작은 애기가 엊저녁에 나가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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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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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는 동짓달 거지처럼 옹송거리고 섰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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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두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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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죄인처럼 식모 뒤에 숨듯이 하고 섰는 큰놈한테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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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두 암말두 않구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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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에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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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구서니까 일곱시나 됐을깝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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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의 대답이었다. 준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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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아이가 ─ 그것도 이튿날은 입학시험을 볼 아이가 집을 나간 채 들어오지도 않는 것을 보고 잠을 자다니 될 말이 아니다. 그렇거든 진작 그런 말이나 했더면 통행시간이 지났더라도 어디 수소문이나 해보았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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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두 인수가 들어오건 자겠다던 것이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고 식모는 무표정한 얼굴로 떠듬떠듬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준은 돌부처처럼 무표정한 식모의 볼치를 후려치고 싶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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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따지고 보면 나무람을 받을 사람은 식모도 큰놈도 아니다. 준 자신이었다. 열일곱 살에 난 첫아들을 추울세라 싸구 싸구해서 들쳐업고서 절구질을 다하고 나니 아이가 질식을 해서 죽었더라는 식모다. 그래도 송아지와 바꾼 계집이라서 쫓지도 못하고 데리고 사는데 이웃집 머슴 녀석이 조른다고 몸까지 내어주었다는 천치이기도 한 식모였다. 그 식모를 붙들고 시야 비야 해보았자 도리가 나설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도 준 자신 날구장천 술만 먹고 다니느라고 어미 없는 아들을 돌보아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어젯밤만 해도 그렇다. 물론 인수와 정수 두 형제가 입학을 하려는 S중학 선생을 만났다는 구실이 있기는 했다. 마침 대학 동창이기도 한 터라 부탁을 한댔자 별효과는 없을 줄 알면서도 이런 때 붙들려고 드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기도 한 것이다. 값싼 양주에 콩조각이었다. 기름기 없는 창자에다 단둘이서 세 병을 들이부었고 보니 곤죽이 될밖에는 없다. 술만 취하면 우는 버릇이 있는 준이었다. 울지를 않으면 식도에 그 무엇이 걸리기나 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울 수 있는 자료를 찾는 것이었다. 아내한테 버림을 받은 울분이 언제나 그의 울분을 부채질해주고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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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날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린것들이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는데 어미가 없다는 이 단 한 가지만으로써 족했던 것이다. 슬픈 정도가 아니다. 뼈가 저리었다. 그러나 그날은 준은 울지 않았다. 아비가 어미의 분까지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취중에도 들었었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었다. 그러나 그것이 되레 일을 저지른 것이다. 취하면 큰소리를 치고 대문을 흔들어대던 준이가 그날만은 밖에서 열게 된 노끈을 당기어 살짝이 빗장을 빼고 들어왔었다. 늘 밤을 패어 다니는 준을 위해서 현숙이가 고안해낸 노끈이었다. 준은 살짝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문짝을 바짝 들면서 빗장을 질렀었고 어미를 잃은 후로는 자는 얼굴이라도 한 번씩 들여다보던 준이가 그날만은 발소리를 죽이어 자기 방으로 들어가 쓰러진 것이다. 내일 시험칠 아이들의 숙면을 위해서였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공교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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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걔들이 깰까봐 그랬다지만 그래 나이 오십을 바라본다면서 웬 잠이 그렇게두 많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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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준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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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딱한 노릇이었다. 시험은 아홉시라지만 여덟시 반까지는 등교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벌써 일곱시 반이었다. 그렇건만 인수는 아직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이쯤 되고 보면 입학시험 문제가 아니다. 준은 지난 십 년간 먹은 술이 일시에 깨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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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통한 아이도 아니었다. 말은 형이요 동생이지만 정수와 인수와는 불과 삼십분 차이밖에 없었다. 외모고 음성이며는 남은 고사하고 제 부모들도 분간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면서도 제 형 정수가 살가운 데 비하여 인수는 미련할 만큼 딴기 적은 데가 있기는 하다지만 이면은 멀쩡했다. 어릴 때 싸우는 것도 그랬다. 정수는 재치가 있었다. 삵이 닭을 채가듯 눈 꿈적할 새도 없이 먹을 것을 채가지고 달아났다. 때릴 때도 그랬다. 그럴라치면 인수는 재치는 법도 없이 뒤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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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날 때리는 거야. 왜 때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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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같은 말만 되뇌었다. 방으로 들어오면 방으로 따라 왔다. 덤비는 법도 없이 인수는 같은 말만 되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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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왜 때리는 거야. 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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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으로 따라갔고 변소로 가면 변소 문밖에서 똑같은 말을 마치 주문처럼 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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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왜 때리는 거야. 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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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끝이 없다. 아침에 시작했으면 점심때까지도 계속이 된다. 옆에서 보는 준이 내외가 진이 쪽쪽 내리도록 찌통을 피워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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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야, 인제 그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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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왜 때리느냐 말여. 왜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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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야, 빌어라 빌어! 잘못했다고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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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수를 달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정수가 빌면 그제서야 슬며시 물러나는 인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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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수 당할 사람은 장개석밖에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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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이런 소리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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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두 중경밖에 더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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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앉기 전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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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격의 일면이 인수한테는 있었다. 무슨 장난을 해도 그랬고 공부를 해도 그랬다. 정수는 책보 운전사라는 별명까지 있듯이 책보만 갖다 내던지면 그만이었다. 인수는 안 그랬다. 들고팠다. 그래서 겨우 제 형의 성적을 따라간다. 수학은 언제나 백점이었었다. 국민학교 일학년부터 졸업까지에 형제가 다 셋째 밑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S중학이라고는 하지마는 평균 94점이고 보니 시험은 치르기만 한다면 합격될 자신도 있던 것이다. 그 인수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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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의 불안은 절정에 다다르고 말았다. 인제는 그까짓 입학 문제가 아니다. 아이의 생사 문제였다. 불길한 생각이 버쩍 든다. 나이도 나이지만 요새 많은 깡패 학생들 패에 섭쓸렸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괴거나 교통사고밖에 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유괴라도 그랬다. 교통사고라도 그랬다. 조춤병이 들려서 자위도 못 뜨는데 여덟시를 뗑뗑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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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더 지체할 수도 없다. 준은 정수만을 끌고 집을 나왔다. 혹시 인수가 들어가거든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오도록 일러놓고 거리로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작은놈은 작은놈이고 집에 있는 큰놈만이라도 우선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영등포에를 가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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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만 달리면 아홉시까진 댈지두 모르니 허허실수루 내 영등포까지 갔다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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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의 이 말을 듣고서야 정수가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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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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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다. 어쩌면 영등포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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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란 저희들 외갓집이다. 상처를 한 것도 아니요, 구수하니 합의를 보고 헤어진 아내도 아닌지라 현숙이가 9·28을 계기로 집을 뛰쳐나간 뒤로는 준은 물론 아이들까지한테도 통 발걸음을 못하게 해온 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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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뭐 그런 소릴 한 적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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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허지만 거기 갔을지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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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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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때 외할머닐 종로서 만났대. 그때 도나스를 사주시며 우시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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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필시 그랬는지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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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한테 말도 없이 갔다면 괘씸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준으로서는 그러기를 비는 마음뿐이었다. 거기서 시간이 늦으니까 학교로 직접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그러기나 했으면 오죽 좋겠느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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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은 벌써 출근을 하고 없다. 철도국의 무슨 과장 책임자일 것이다. 현숙이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화물 책임자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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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조낭두 인제 늙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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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이 삼십대에 늙는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준은 독주에 곯기도 했었다. 만 사년 만이라건만 장모는 옛날 그대로였다. 되레 살결이 뽀송뽀송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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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놈이 어제 여기서 자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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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자시고에 귀를 기울일 경황이 없는 준이었다. 장모의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추녀 끝에 선 채 따지듯 하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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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왜 아침에 안 들어갔던가? 오늘 시험 친다구 새벽같이 나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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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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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로 족했었다. 준은 그 대답만을 듣고는 그대로 돌쳐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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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그래, 여꺼정 왔다가 들어오지두 않구 간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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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서울 사람인데 야릇한 사투리를 쓰고 붙잡는 것을 준은 성난 사람처럼 뿌리치고 나왔다. 그럴 생각은 아니면서도 준은 대문 밖에까지 따라나와서 붙드는 장모한테다 인사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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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아이들 집에 꼬여들이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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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쑥 이런 한마디를 획 던지고 와버리었다. 말을 하고 나서야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싶어졌다. 골목을 빠져나오기까지에 장모의 무엇이라고인지 뇌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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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를 듣고 나니 이번에는 또 한마디 잘했느니라는 생각도 드는 준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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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를 일이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에 외갓집을 나왔다는 인수는 학교에도 안 와 있었다. 집으로 달려가 보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준은 다시 학교로 달려갔다. 역시 인수는 시험을 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준은 부근 파출소로 달려갔다. 오늘 아침 영등포와 학교 사이에서 교통사고가 난 일이 있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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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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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시험 보러 나온 아이가 없어져서 그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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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까 안에서 누가 소릴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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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순경… 있었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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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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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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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디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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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순경! 어디야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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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 로터리를 돌다가 지엠씨와 충돌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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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예의도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김 순경이란 사람은 마침 면도를 하고 있었다. 온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서 오늘 사고의 경과를 자세히 일러준다. 시간은 일곱시 십분경, 다행히 사망자는 없으나 중상자가 십오 명, 경상자가 이십여 명이요, 대부분이 철도병원에 수용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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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예, 그건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철도병원으로 한번 가보시지요. 거기 가시면 명단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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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장소도 그랬다. 시간도 꼭 그 시간이었다. 더 의심할 여지조차도 없었다. 인제는 오직 중상이 아니고 경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말 착잡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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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의 대부분이 학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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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의 심정을 모르지도 않으련만 순경은 이런 짓궂은 소리까지 귀띔해주고 있었다. 준은 또 차를 잡았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야 할 형편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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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병원에는 어떻게 알고들 왔는지 벌써 십여 명의 가족들이 현관 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아직 명단이 판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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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명단 할 것 있소? 우릴 보여주면 아무리 얼굴이 응껴졌기루니 제 자식 몰라보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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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토막 같은 체구의 중년 부인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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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지만, 아주머니 한 분뿐입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오면 어떻게 치료합니까? 급한 환자 치료가 바쁩니까? 일분 일초를 다투는 판에 이름만 알면 뭘 합니까? 자, 다 나가주십시오. 여러분과 이렇게 악다구니를 하는 동안에 여러분의 자제들을 응급치료할 시기를 놓쳐버립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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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에 맞는 이야기였다. 준은 가족들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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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이 발표된 것은 오정이나 거의 되어서였다. 입학시험 발표도 아니건만 기들을 쓰고 명단 든 사람을 에워싼다. 있기를 바라는 명단이 아니라 없기를 비는 명단이었다. 그렇건만 준도 그런 것을 구별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그도 머리를 싸매고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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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준은 거기에 꼭 인수의 이름이 있기를 바라기나 하는 사람처럼 또 보고 또 보고 했었다. 그러나 정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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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맥이 탁 풀렸다. 일부러 빼기나 한 것 같다.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 미진한 사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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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행이다! 난 어떻게 놀랐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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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의 이런 말을 듣고서야 준은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었다. 그러나 다행한 이상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분명히 영등포에서 일곱시 전에 떠났다면 집에 와 있든지, 학교에 와 있든지 했어야만 할 인수다. 그 인수가 간데온데 없는 것이다. 준은 또 학교로 와보았다. 인제는 택시값도 없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학교에 오니 벌써 한시가 다 되었다. 정수는 점심도 굶고 초올초올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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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를 요기시키어 들여보내고서도 준은 초조해하는 학부형들 틈에 끼여서 문 쪽만 눈여겨보고 있었다. 모두가 미끈하니 차린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초조해 보였다. 날씨도 신산하기는 했지만 잔소름이 얼굴에 다닥다닥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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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노릇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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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이런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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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만 시험을 보이는 게 아니라 어른들 시험까지 보이는 세상이 됐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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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빙긋이 웃는다. 동감인 모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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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떨어져노면 일년을 놀릴 수도 없구, 이차 학교엔 죽어도 안 가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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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앤 이차엔 지원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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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도 그랬답니다. 저 그래두 어디 한 군데 해둘 것을 갖다 그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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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탈야, 꼭 돼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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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지지궁상이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설마 내 자식은 ─ 하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실력을 믿을 게고, 또 혹은 배경을 믿을 게고, 또 혹은 ‘체조’한 덕을 믿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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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그만큼 말했으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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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도 들린다. 모두 다 걱정은 하면서도 모두 다 믿는 구석이 있는 표정이었다. 준이 믿는 것은 오직 아이들의 실력뿐이었다. 그의 친구도 그만 성적이면 당연히 된다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초조했다. 거기에 준은 또 한 가지의 초조가 있었다. 인수의 행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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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이래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그날 오후였다. 준은 갈팡질팡하면서도 S중학을 떠나지 못했다. 혹시 인수가 오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인수는 잃은 자식이나 진배없이 생각이 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우선 눈앞에 있는 자식이나마 지키고 있어야 하겠다는 심정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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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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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헤어진 지 만 사 년이 되도록 일찍이 입에 대본 적이 없는 욕을 현숙이한테 했다. 자식의 입학을 위해서 달달 떨고 있는 수많은 어머니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반이 여자였다. 모두가 울상이었다. 먼저 시험을 치고 나오는 아들을 보고는 곤두박질을 해서 달려간다. 곤두박질을 하면서까지 아들을 찾는 어미와 매달리는 어린것들을 뿌리치고서 달아난 현숙이가 오늘처럼 뼈에 사무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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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 흥, 이름처럼 현숙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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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이런 푸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인수가 정문 쪽에서 자기를 보고는 뛰어오던 것이다. 준도 마주 뛰어갔다. 뛰어가서는 죽었던 아이인 양 품에 덥석 안았다. 시험을 안 쳤어도 좋았다. 어디 가 놀다 왔어도 좋았다. 그저 나타난 것만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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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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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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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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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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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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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아직 멀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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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곧 나올 게다. 허지만 우리 인순 어떡한다지. 시험을 못 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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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두 시험 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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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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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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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어디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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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K중학 가서 쳤어. 아주 굉장히 어려웠어요. 허지만 다 해서 삼백 칠십점 이상은 될 거야. 아냐. 좀더 될지도 몰라. 산수는 한 개두 안 틀렸어! 몽고 있잖우! 몽고란 나라! 그 몽자가 틀렸지. 난 꼭 불화 둘 밑인 것처럼 생각했었거든. 그랬더니 나와보니까 아니야. 약이 올랐어.”
 
122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인수는 어째서 S를 안 치고 K로 갔던지에는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K라면 S중학과 겨루는 학교다. K가 더 경쟁률이 높기도 했었다. 준도 둘다 K로 보내려다가 불안해서 S로 옮겼더니 금년 입학률은 가 더 좋았대서 S 잘 했느니라 하고 있던 터였었다. 정수도 이내 나왔다. 정수가 시험 안 치고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을 때도 인수는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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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K중학 가서 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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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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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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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도 그 이상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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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도 기분이 좋아하는 품이 잡치지 않은 눈치여서 준은 두 아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버스로 을지로까지 나와서 명동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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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에 가면 삽화료 받을 것이 몇 천환 있던 터라 처음으로 청요리라도 먹이자 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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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가 수수께끼를 푼 것은 중국집에 가서다. 뭐든지 먹으라고 준이 음식 내용을 설명해주려니까 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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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간짜장이란 거 먹겠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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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니까 인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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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우루멘 ─ 이랬지 아빠? 그것 먹을 테야. 그리구 닭고기 덴뿌라하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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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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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두 그 우루멘 먹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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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선 것이다. 준은 대견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준은 그 웃음기를 싹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은놈이 분연히 이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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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간짜장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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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으면서도 큰놈 정수는 그 뜻을 모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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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두 간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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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따라가려니까 인수가 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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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되루 우루멘이다! 또 따라오면 난 안 먹구 집으루 간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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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같이 먹으면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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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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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이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했다. 인수가 아무도 몰래 S를 버리고 K에 가서 시험을 친 까닭을 안 것 같았다. 가슴이 다 서먹해졌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삼각형 새에다 사각형 물체를 집어 넣는 것과 같은 과오라 했다. 현숙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실은 이 과오 때문이었더니라고 준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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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과 정수, 자기와 인수, 이 네 사람의 선 위치가 빚어낸 과오였고 또 비극이었던 지도 모른다 싶어진 것이다. 이 위치를 측정치 않고서는 준은 이 두 아들을 교육시킬 자격도 능력도 없느니라 했다. 현숙이란 한 여성의 남편 될 자격이 없듯이 아이들의 아버지 될 자격도 없느니라 했다. 오늘의 정수와 인수 사이에 그어진 평행선은 결혼 전의 준과 현숙 사이에 그어져 있던 평행선과 똑같은 것이었고, 준과 현숙이가 그랬듯이 정수와 인수도 실로 십 년간 모순된 관념 속에서 피비린내나는 암투를 해왔었고, 그것이 나중에 현숙과 준의 작별이 되었고 인수의 K교 사건으로 발전했느니라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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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몰랐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을 따름이라 했다. 정수와 인수가 어릴 때만 해도 그랬었다. 쌍둥이는 옷의 빛깔은 물론 모양까지도 똑같이 입히는 풍습이었다. 그것이 작은놈한테는 불만인 모양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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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똑같은 거야.”
 
147
언제나 불평을 말하는 것은 작은놈이었다.
 
148
“쟨 별난 애라니까. 똑같으면 오죽 보기 좋냐?”
 
149
“난 싫어, 똑같은 것!”
 
150
“쟤 좀 봐. 쌍둥인 그렇게 입는 법이야. 장가두 한날 들구.”
 
151
“그럼 죽기두 한날 죽어야 하나? 쟤가 죽으면 난 병두 없구 앓지두 않구 죽어야 하나?”
 
152
“죽는 건 따루 죽어두 괜찮아. 같이 죽으랄까봐 쟤가 겁인가베나.”
 
153
학교 가기 전이었으니까 대여섯 살 났을 때였을 것이다. 정월이었다. 보라 바지, 분홍 저고리에 남 조끼 남 대님 ─ 이렇게 똑같이 일습을 내어주려니까 인수란 놈이 앙파드기 입지 않겠다던 것이다. 준의 어머니가 큰 변이나 난 듯이 야단해서 겨우 하루를 입더니만 작은놈이 조끼를 뒤집어 입고 다니었다.
 
154
“어른들은 모두 바본가봐. 날보구서 정수라잖아? 정수보군 또 인수라구! 보는 사람마다 아 요놈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 네가 선동이냐 후동이냐… 내 참 속이 상해 죽겠어!”
 
155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면 하루는 징징 울면서 들어오는 길로 옷을 홀홀 벗어부치고 다시는 안 입겠다던 것이다. 울며 하는 사설이 이러했다.
 
156
“요 골목 안 과자 가게 있잖아? 글쎄, 내가 그 앞에 나가니까 그 자식이 날 붙들더니 유리값 물어내라구 막 야단야. 유린 아까 정수가 깼는데 자꾸 날더러 깼다는 거야. 그래 아니라구 그래두, 요눔의 새끼 아니긴 뭐 아니냐구 막 손을 비틀구 지랄야. 난 죽어두 저 옷 안 입을 테야!”
 
157
이런 인수의 불평이 정말 폭발한 것은 국민학교 입학한 때였다. 죽어도 한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었다. 준 내외가 달래고 어르고 별소리를 다해서 같은 학교에 넣기는 했었지만 인수의 불평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준의 어머니는 쌍둥이가 다른 복색을 하면 그중 하나가 죽는다는 미신을 굳게 믿고 있었다.
 
158
“네 요녀석, 입지 못하냐. 그러면 죽는 법이야. 네가 죽든지 형이 죽든지. 또 그러면 아빠나 엄마나 죽는 거다. 그래두 좋으냐? 어서 입어, 냉큼!”
 
159
원근 닦달이 호될라치면 인수는 징징 울어가며 입고는 했었다.
 
160
이와 똑같은 알력이 6·25를 계기로 하고 준과 현숙 사이에 벌어졌었다.
 
 
161
5
 
 
162
6·25 남침이 종래의 ‘상투적인 신경전’이 아니라 본격적인 침략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준은 느닷없이,
 
163
“올 것이 왔구나!”
 
164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아이들 동화에 삽화나 그려먹고 사는 준한테 그 무슨 정치적인 주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갑자기 김삼용, 이주하 같은 공산당의 거물과 조만식 선생과 교환을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는 수작이 수상스럽기도 하여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준이가 올 것이 왔다고 한 말 이면에는 그런 정치적인 면보다도 그 자신의 신상에 관한 예감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결혼 때부터도 현숙이는 공산주의에 공명하던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공산주의가 이 민족과 생리를 같이하던 때였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기 두 달 전 일이다. 준은 미술학교를 중퇴한 덕분으로 학병을 면하고 비행기 회사 도안부에 현원 징용이 되어 있었다. 현숙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회사원이었었다. 반년 남짓 연애를 했고 둘은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현숙이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준이 아니다. 곽태호라는 제작부에 있던 청년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결혼한 지 석 달이나 지나서였다. 그 곽태호가 공산주의자였다. 후회를 해보았자 도리가 없었다. 또 그때 이미 곽태호는 비행기 회사의 기밀 서류를 가지고 자취를 감춘 후이기도 한지라, 그가 없어진 것만을 다행으로 알았었다. 거기에 8·15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165
8·15와 함께 죽었으리라고 믿었던 곽태호가 하루는 표연히 그들 부부 앞에 나타났었다. 공산주의 노래가 서울 골목대장들 입에서도 자유롭게 불리어지던 시절이었다. 고삐 없는 말처럼 일본으로 만주로 방랑생활을 하며 살아온 준의 생리에는 공산주의란 맞지가 않는 철학이었다. 현숙과의 과거 이야기도 이야기려니와 준은 그 곽이라는 작자가 집에 출입하는 것이 비위에 안 맞았고 현숙의 입에서 툭하면 ‘진보적’이니 ‘반동’이니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었다. 준은 그 무렵부터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었다. 준이가 그리는 잡지가 반동이라는 것이었다. 준은 이 ‘반동’이라는 언사와 싸우기에만도 지쳤었다. 밖에 나가도 ‘반동’이었고 ‘진보적’이었고, 또 ‘혁명적’이었다. 진저리가 나게 그런 명사를 듣다가 집이라고 찾아 들어오면 역시 ‘반동’이고 ‘진보적’이다. 준은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니까 직접적인 투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나가나 들어오나 들려오는 ‘반동’소리에만도 나약한 그의 신경은 무서운 피로를 느꼈던 것이다. 한증을 하고 난 때와 같은 피로였다.
 
166
“여보! 거 반동 소리 좀 인젠 작작 하오. 인젠 정말 피로를 느끼오.”
 
167
“그런 생각부터가 벌써 반동이지요. 역사의 치차는 핑핑 돌아가고 있는데 당신만이 반동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림만 그려준다고 해결될 것 같으시우.”
 
168
“역사가 치차를 타구 구르는지 물레방아를 타고 도는지 모르겠소만 그럼 당신이 반동 소리만 하구 앉았다구 모든 것이 해결될 성싶소.”
 
169
“그러니까 싸우는 게죠, 전진하구요.”
 
170
“인류의 문화는 희랍시대루 후퇴한답니다. 제발 내 귀엔 다시 그런 소릴랑 들려주지 마우, 곽 군하구나 하구 ─”
 
171
눈엣가시만큼이나 여기면서두 곽태호를 이렇게밖에 끌어내지 못하도록 마음이 약한 준이었다. 그러면서도 곽태호가 배가 고파서 찾아오면 밥도 내고 술도 사주는 준이었다.
 
172
이렇게 만 일년을 지났다. 일년이 지나서야 준은 털어놓고 곽태호의 출입을 금할 구실을 가질 수 있었다. 곽이 지명수배를 받았고 곽으로 해서 준 부부가 일주일이나 유치장 생활을 하고 나온 것이었다. 준은 다시 곽이 나타나기만 하면 당국에 연락하겠다는 약속도 했고 또 그럴 생각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이 사회의 위협을 제거하는 일인 동시에 그 자신의 가정을 수호한다는 절박한 감정에서였다. 곽도 그런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물론 현숙이가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후 곽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어 공산당이 불법화되어 준은 겨우 불길하던 꿈에서 깨었었다 ─ 거기에 6·25가 터진 것이다.
 
173
“어떡하시겠어요?”
 
174
‘상투적 신경전’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현숙은 이렇게 준한테 물었었다. 다지는 말투였다.
 
175
“뭘 어떻게?”
 
176
그때 준의 각오는 이미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할머니한테 맡기고 자기만은 정부를 따라서 어디고 가겠다는 결심이었다.
 
177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써 현숙은 2신 1체의 부부가 아니었다.
 
178
“나야 어떻겠소. 내가 그렸다는 그림이 큰 죄가 될 것도 없을 게구 또 당신이 있잖소. 저사람네가 들어오면 당신은 신이 나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오.”
 
179
“신이 안 날 것도 없지 않아요! 제이 해방이 되는데 ─ 이번이 진짜 해방이어요.”
 
180
“그러기에 말야. 내가 뭐 그리 반동을 했다구 잡아죽이기야 하겠소.”
 
181
“일만 하면 돼요, 일만.”
 
182
“내가 할 일이라는 거야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 정도지 뭐.”
 
183
그러고 하루 지나서 준은 아이들을 영등포 외갓집에다 갖다 맡기고 들어왔다가 다리가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184
“어떡하시겠어요? 이런 순간엔 아이들의 처리 문제보다두 어른의 처리 문제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185
“당신의 어른들이란 누구누구를 의미하는 말이오? 어른이라야 나 하나밖에 더 있소! 당신은 원래가 진보적이요 혁명적인 여성이니까 고기가 물을 찾은 셈이겠고, 나야 당신의 의사 여하로 처리할 수 있지 않소. 당신네 세계에선 중간파란 존재도 시인치 않는다니까 날 중간파로 고발을 하든 회색자로 고발을 하든 반동으로 몰든 당신의 할 탓이 아니겠소?”
 
186
준의 이 말에는 현숙이도 좀 짐즛해지는 눈치였다. 6·25 남침이 ‘상투적인 신경전’이 아님을 단정한 순간 준은 이미 모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때의 현숙은 이미 증오의 대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187
“뭐 내게 관한 처리 문제도 거 곽태호란 사람과 합의를 보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소?”
 
188
“이런 땔수록에 사람은 냉정해야 합니다. 감정은 이성이 아니니까요. 당신은 지금 감정에 휘갑이 되어 있어요. 한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란 커다란 진리 앞에서는 아무런 맥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사소한 감정이 역사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 당신 같은 인텔리가 가장 두려운 존재야요. 당신은 너무 많이 알려고 하고 있구 또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하나만 알도록 하세요. 더 알 필요두 없구 조금이라두 덜 알아서두 안 되구. 전체 앞에는 개인이란 아무런 값도 없는 게죠. 자유 자유 하지만 뭘 위한 자유입니까?”
 
189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자유고.”
 
190
“계급 없는 인간이 존재할까요?”
 
191
“인간성이 무시되는 계급은 존재하구?”
 
192
“그렇기에 당신은 틀렸어요. 마치 인수가 아니예요? 인수가 당신을 닮아서 어릴 때부터 그런 고집통이에요.”
 
193
“그래서 당신이 인술 그렇게 미워했구려? 반동분자라구? 반역자라구?”
 
194
“인술 미워한 기억은 없어요.”
 
195
“눈총은 줬어두? 조게 커선 뭣이 될랴고 그런다우? 이렇게 말하는 소릴 내가 한두번 들은 줄 아오?”
 
196
“그럼 내가 아이들한테 공산주의 선전을 했단 말씀예요!”
 
197
“선전을 했다는 거요 어디. 당신의 사고방식이 그랬단 말이지.”
 
198
준과 현숙 사이에는 이런 대질이 이십사 시간 계속되었었다. 괴뢰군이 들어오자 현숙은 기다렸던 듯이 여성동맹에 뛰쳐나갔고 준은 다락 속에 숨듯이 해버렸던 것이다.
 
199
“나 아직 고발은 않았나보구려?”
 
200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준은 현숙이가 들어올 때마다 이 눈치부터 먼저 보았었다. 현숙도 인간이었다. 몹시 괴로운 눈치다.
 
201
거기에 곽태호가 나타난 것이다.
 
202
곽태호의 출현을 계기로 준과 현숙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해 갔다. 곽과 현숙은 완전히 합작을 했었고, 그들은 또 생리로서도 통하는 사이다. 일찍이 나누었던 애정의 실마리도 아주 끊어진 것이 아니기도 했었다. 준은 결심을 했다. 집도 아내도 곽한테 내어주고 탈출을 했던 것이다. 그가 몸에 지니고 나온 것은 ‘문화공작대원’이라는 증명서 한 장뿐이었었다. 칠월 십일이었다.
 
203
9·28수복이 되었다. 준은 보름이나 지나서 집에 들어와 보니 구들장만이 남아 있었다.
 
204
“아빠가 조금만 일찍 왔으면 엄마두 안 갔을 거야. 아빠 올 때까지 가지 말라구 막 매달리니까 홱 뿌리치면서 아저씨하구 가버렸다우.”
 
205
아이들을 찾아 영등포로 갔을 때 아이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벌써 사년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준은 끝끝내 제 형과 동인시되기에 항거하는 어린 인수를 앞에 놓고 나니 기실 자기 부부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면서 어쩐지 인수가 다시 치어다보이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엄격히 따진다면 .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기를 쓰고 자기의 세계를 가지려고 바둥대는 어린 인수의 고집이 현숙적인 사고방식에의 항거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준은 갑자기 인수가 어른처럼 보여졌다.
 
206
“인순 인제 참 좋겠다.”
 
207
준은 흐뭇해서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벌써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는지 우루멘 속의 해삼쪽을 건지다 말고 해죽이 웃어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두 아들을 바라다보며 준은 어른들이란 늙은이한테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한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었다.
 
208
아이들 국수 먹는 소리거니만 여겼더니 제법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고 있다.
 
209
“정수야!”
 
210
“네.”
 
211
“인수야!”
 
212
“네?”
 
213
“인제 아빠두 술 안 먹구 일찍 들어갈 테니 부지런히 공부들 해. 입학되면 아빠가 기념으로 시계 하나씩 사주지.”
 
214
“또 똑같은 거?”
 
215
인수놈이다.
 
216
“아아니, 다른 것. 그 대신 인순 값싼 거다.”
 
217
“그래두 좋아, 난.”
 
218
인수는 만족인 듯이 행 하고 웃는다. 이제야 겨우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준 어른이 대견해졌던지도 모른다 싶어 준도 속으로 고소를 하는 것이었다.
 
 
219
〈「사상계」34호, 1956년 5월〉
【원문】작은 반역자(叛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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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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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