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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년(壯年)의 백발(白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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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2.21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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壯年[장년]의 白髮[백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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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비로소 내 머리에서 백발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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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들여다보면 살쩍으로 앞어리로 제법 흰터럭이 희끗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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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잠이 든 사이에 옆엣사람이 혹은 이발사가 새치라고 하면서 더러 뽑아보이곤 하나 분명 새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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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아직도 검은 머리로 있는 사람이 없는 바가 아니지만, 내 나이로 보아 그러하고 또 일찌기 구경도 할 수 없던 새치가 새삼스럽게 났을 이치도 없고 백발은 적실(的實)한 백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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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삼십고개를 넘어설 양이면 귀 밑으로 흰머리가 세 개는 보인다고 한다. 그렇기로 들면 나의 ‘백발래(白髮來)’는 오히려 사오 년 늦은 셈이라고 하겠는데, 혹시 시작이 더디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어도 올 한 해로 더럭 한꺼번에 불어 그새 뽑은 놈까지 치면 아마도 백 개는 될 성부르다. 그야 백 개가 세었건 단 한 개가 세었건 많고 적은 게 무슨 상관이리. 아무렇든지 머리가 세기는 세었고, 머리가 세었으니 마침내 늙은 표적이 공공연하게 드러났으면 그만일 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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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비로소 백발을 가져다주고서 넌지시 저무는 이 무인(戊寅)의 한 해가 그것 하나만 해도 유감치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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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삼십이 훨씬 넘어 청춘이라고 일컫는 때는 다 갔고 장년기(壯年期)에 들었으니 그는 곧 늙음의 첫 관문이요, 머리야 세거나 말거나 또 나 자신 모르고 있거나 말거나 나의 생리의 조직세포는 벌써 소모하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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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직까지는 마음에 아직도 젊거니 하고 있었지, 늙느니라고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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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머리의 백발을 본 올해부터서는 완전히 내가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의식의 표면에서 혹은 그 이면(裡面)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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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 흰터럭의 암시가 그토록 반응이 현저할 줄은 아예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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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렇다고 옛 시인 누구처럼, 뭣이냐, 한 손에는 막대를 쥐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오는 백발은 막대로 쫓고 가는 청춘은 가시로 막으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더라고, 하도 애달파 발을 구르듯 그런 지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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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렇게 무위(無爲)하고 무능할 바이면 세월이 더디다고 채찍질이라도 해가면서 어서 바삐 백발이 되고 얼른 후딱 지하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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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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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괜히 앉아서 곧잘 이 소리를 하곤 해도 대체 무슨 뜻이며 왜 그러는지를 몰랐더니, 이제 비로소 그 심정을 짐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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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의 패스포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백발, 그건 확실히 궁상이요 추(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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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꾸물거리고 앉았다가 그러한 추, 그러한 궁상을 피우느니 차라리 중이 되어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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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소설이나 쓰는 일요강화(日曜講話)나 하는 그런 세기적(世紀的)인 중이 아니라 면벽삼년(面壁三年) 어깨에 먼지가 세 치 두께나 앉는 그런 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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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에 살면서 역사와 상관이 없이 호흡이나 할 바이면 혹은 사실 앞에 아첨이나 하게 될 바이면, 생리를 잊고 마음도 잊고 어께에 먼지가 쌓이도록 산간 절방에 면벽하여 앉았는 것이 얼마나 (장부답지는 못해도) 인간다우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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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구는 도는걸……”하고 앙알거릴 기력도 마저 없어지고 애꿎은 ‘쑥국새’우는 흉내나 내고서 당치도 않게 박수까지 받다니 참으로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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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가 바로 무인년(戊寅年)은 아니라도 어렸을 때 『통감(痛鑑)』초권(初卷)을 들여놓고 “무인 이십삼년이라 초 명진대부(初命晋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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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절을 처음으로 배우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 올해가 무인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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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은 채 못되고 이십사오 년 저쪽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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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을 읽기 시작했으니 나이 여남은 살에 철도 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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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이 나서부터 이십사오 년 마침 또 청춘의 고비에, 나는 한 사람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해논 것이 도무지 없다. 아닌말로 악한 짓도 투철하게 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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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오 년이 하물며 최근세 사반세기요, 이 최근세 사반세기면 역사는 다른 시대에 비해 4세기만큼이나 자란 동안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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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시대를 울타리 밖에서 물끄러미 구경만 하다가 인제 와서 답신서(答申書)는 백지로 내놀 수밖에 없는 무위와 무능. 역사가 이십사오 년 동안에 4백 년어치를 자랐으니 나도 그렇다면 사백 살을 먹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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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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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도 따지고 보면 삼백 살인데. 사백 살이라니 위대하다. 위대하게 욕된 사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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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戊寅)의 1년은 보다 더한 세기(世紀)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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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적실(的實)코 역사의 한 에어포켓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무렇든 지구는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큰 생활을 이 무인의 한 해 동안에 치르고 있다. 아마도 한 백 년어치는 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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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단꺼번에 백 년어치를 겪는데 그리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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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답신서는 백지요 배운 재주가 백지에 검은 칠을 하는 것뿐이니 ‘무위’ ‘무능’ 두 구(句)나 써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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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나갔던 문학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아예 망녕이었을는지 모른다. 각별(恪別)히 큰 1년을 가느다란 붓 한 자루를 들고 방장(方丈)에 들어박혀 밤이나 낮이나 백지에 검은 칠을 하기만 위사(爲事)하고 앉았었다. 나폴레옹이 검으로 이룬 대업을 저는 펜으로다가 이루겠다고 했다지? 문학이 역시 남아 일대의 쾌사라고 큰기침하던 자 누구든지 얼굴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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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1년 동안의 명색 작품들이라는 것을 대강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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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한 개하고 반(半), 단편 7,8개, 되지 않은 잡문에 수필토막, 이중에 정배(定配)를 간 1,2편을 빼놓고는 절반 이상이 종이가 아깝고 인쇄노동이 아까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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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달게 읽은 독자가 (혹시 있다면) 불쌍하고 받아먹을 고료가 염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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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마 그 짓을 한 덕으로 아무것도 다 그만두고 의식주 하나만이라도 족했느냐 하면 그역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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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도로 삭제(削除)된 의식주였고 하니 결국 생리에 대해서 동물적인 충실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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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서 마침내 머리에 흰터럭이 날리기 시작했더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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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도 잊고 마음도 잊고 산 채로 죽어서 어깨에 먼지가 소복히 쌓이도록 산간의 절방을 면벽해 앉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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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동아일보] 1938.12.21,23>
【원문】장년(壯年)의 백발(白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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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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