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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만 하더라도 긴(緊)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터에 교정(校正)같은 것쯤 그리 대단한 것은 없고, 거저 여백거리로 여기는 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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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도, 피가 밭게 앉아서 밤을 도와 원고를 써, 그놈을 다시 두 번 세 번 퇴고(推敲)를 해, 이래 보낸 것이 정작 활자로는 딴 글자 딴 소리로 인쇄가 되어 나온 것을 볼 때며는 내남없이 그다지 유쾌한 마음은 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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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친(父親[부친]의 意味[의미]) 윤장의 영감……”이라고 원고에 쓴 것이 활자로는 “그의 붙인 윤장의 영감이……”라고 박여 나온 것이며, 또 “잇대어 말하기를……”이라고 쓴 것이 활자로는 “잇대어 말하기를……”이라고 되어 나온 것까지는 ‘한글 유죄로다!’하고 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시세(期米時勢[기미시세])가 올랐다는 기별이었으면 하고 ……”란 대문이 “시세가 올랐다는 기별이 없으면 하고……”로 인쇄된 데는 가뜩이나 나 같은 소갈머리에 한참 동안 숨이 씨근버근 않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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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런 것은 문선 혹은 교정의 악의없는 실수라고 치더라도 “구누(密約[밀약])를 했다……”를 갖다가, 처억 “군호(軍號)를 했다”로, 또 “팽팽한 눈쌀로……”를 갖다가서 “평평한 눈쌀로……”라고 고쳐서까지 넣어주는 그 지겨운 친절에는 그만 무어라고 답례를 해야 할 지 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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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자간(字間)을 뗀 곳은 붙이고 붙인 곳은 떼어놓기, ‘?’와 ‘!’를 손에 집히는 대로 둘러꽂기, ‘,’이나 ‘.’을 빼먹기, 점선과 블랭크를 맘대로 혼동하기, 그래서 문의(文意)가 원고와는 얼토당토 않게 하기, 그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걷어치우는 등…… 가히 참 가관이라 상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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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던가 어느 친구더러, 시방 조선의 문학이 창피한 중 그 백분지일 가량은 책임이 교정의 무책임한 데 있느니라고 농담 비슷이 말 한 적이 있지만 그게 노상 농담만도 아니었었다.
8
원문을 못 읽으니 구미의 것은 모르겠어도 일본 내지의 신문‧잡지를 보면 얄미울 만큼 오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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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두 사람이 앉아서 하나는 읽고 하나는 잡고 하니까 교정이 정확할 수 밖에 더 있느냐고 핑계를 하겠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 집안이 가난하기로서니 교정을 다섯 사람 둘 것을 일곱 사람이나 여덟 사람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공연한 좀보 짓이요, 따라서 그 핑계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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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사람사람이 일에 등한하고 책임관념이 박약한 것과 무지한 것 때문에(가령 ‘구누’를 ‘군호’로 고치는 것 같은 것) 생기는 오자는 입이 열개라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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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서 당하는 액도 아니면서 쓰잘데없이 눈치 먹을 소리를 했나보다. 가뜩이나 천하 악필이요 오서(誤書)와 낙자(落字)가 없노라고 장담은 못할 내가 나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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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서답이 되어도 좋고 아뭏든 망발도 좋으니 제발 원고대로만 채자를 해 주고 원고대로만 교정을 보아 주었으면 아주 감지덕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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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만 주었으면 좋겠는데, 실수 외에도 가끔가다가 그 끔찍한 호의로 고쳐까지 주는 데는 질색을 안할 수가 없고, 해서 이런 뾰족한 붓질도 않지못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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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文[박문] 제2집, 193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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