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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上海) 이일 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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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2.1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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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상해] 이일 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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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縣[안동현] 奇遇[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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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世界一週[세계일주] 無錢族行[무전족행]을 할 생각으로 四年間[사년간] 人生[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時期[시기]를 바친 五山學校[오산학교]를 떠나서 安東縣[안동현]에를 갔다. 五山學校[오산학교]를 떠날 때에 여러 어린 學生[학생]들이 二十里[이십리] 三十里[삼십리]를 따라 오며 눈물로써 惜別[석별]해 준 情境[정경]은 내 一生[일생]에 가장 잊히지 못할 重大性[중대성] 있는 事件[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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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나이 二十三[이십삼], 胸中[흉중]에는 勃勃[발발]한 雄心[웅심]과 空想的[공상적] 放浪性[방랑성]으로 찼었다. 그때 뜻 있다는 사람들온 많이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悲歌[비가]를 부르며 海外[해외]로 放浪[방랑]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申采浩[신채호] 尹琦燮[윤기섭] 같은 이들이 다 그때에 五山[오산]을 거쳐서 떠났다. 나도 그 潮流[조류]에 휩쓸린 것이라고 하겠지마는, 내게는 獨特[독특]한 나 自身[자신]의 理由[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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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縣[안동현]서 한밤을 자고 나니 囊中[낭중]에 所存[소존]한 七十[칠십] 몇錢[전], 이것을 가지고 奉天[봉천]을 向[향]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가지고는 乞食旅行[걸식여행]으로, 直接[직접] 河南等地[하남등지]를 지나 南京[남경]으로, 上海[상해]로, 杭州[항주]로, 福建[복건]으로, 廣東[광동]으로, 安南[안남]으로, 印度[인도]로, 波斯[파사]로 ─ 끝 없는 放浪[방랑]을 繼續[계속]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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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客主門[객주문]을 나서는데 千萬意外[천만의외]에 爲堂[위당] 鄭寅普君[정인보군]을 만났다. 君[군]은 數年前[수년전] 京城[경성]서 一面識[일면식]이 있었을 뿐이요, 아직 親[친]하다고 할 만한 處地[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도 爲堂[위당]의 文名[문명]을 欽慕[흠모]하던 터이므로 반갑게 그의 명주 고름같이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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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웬 일이요? 그런데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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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그가 내게 하는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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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路傍[노방]에 선 채로 내 意圖[의도]를 대강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던 爲堂[위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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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나. 이 치운 때에……대관절, 上海[상해]로 가시오. 上海[상해]에는 可人[가인](當時[당시] 洪命熹君[홍명희군]의 號[호])도 있고, 湖岩[호암] (文一平君[문일평군]의 號[호])도 있어. 나도 집에 다녀서는 곧 도로 上海[상해]로 나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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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를 强勸[강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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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몇 마디 固執[고집]을 부렸으나 마침내 爲堂[위당]의 好意[호의]를 받았다. 爲堂[위당]은 自己[자기] 路需中[노수중]에서 中國[중국] 紙幣[지폐] 十圓[십원]박이 두 장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는 停車場[정거장]을 나아기 서울로 向[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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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爲堂[위당]이 준 中貨[중화] 二十圓[이십원]을 가지고 上海[상해]까지 船票[선표]를 十四圓[십사원]에 사고 퍼런 淸服[청복] 한 벌을 사입고 岳州[악주]라는 英船[영선]에 船客[선객]이 되었다. 그때 同行[동행]이 三人[삼인]인데, 하나는 벌써 故人[고인]이 된 鄭又影君[정우영군]이요, 하나는 車寬鎬君[차관호군]이요, 또 하나는 閔忠植君[민충식군]이었다. 이 三人[삼인]은 서울서부터 同行[동행]인 모양이지마는 나하고는 安東縣[안동현] 주막에서 처음 만난 同行[동행]이다. 그래서 船室[선실]도 그들 三人[삼인]이 同室[동실]에 들고 나는 혼자 한 방을 차지하였다.
 
14
때는 十一月[십일월], 龍巖浦[용암포] 連山[연산]에 하얗게 눈이 덮이고 甲板[갑판]에 얼음판이 생길 지경이니, 暖房裝置[난방장치] 없는 船室[선실]의 추위는 말할 것이 없어서, 出帆[출범]하기 前[전]날 밤, 한 밤을 담요로 몸을 꽁꽁 싸매고 한 간 통도 못되는 船室[선실] 안으로 왔다갔다 하기로 새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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營口[영구]에서 困境[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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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大連[대련]을 잠깐 들러서 營口[영구]에 왔다. 그런데 岳州號[악주호]는 무슨 일인지 營口[영구]에 머물러 버리고 우리 一行[일행]을 營口市街[영구시가]에 내어 던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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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市中[시중]의 어떤 中國[중국] 旅舘[여관]에 들어서 다음 배가 떠나기를 기다리느라고, 分明[분명]히 記憶[기억]은 못하나 三[삼], 四日[사일]을 거기서 留連[유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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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걱정이 일어났다. 그것은 내 路費[노비]가 떨어진 것이었다. 모두 二十圓[이십원]에서 船票[선표]가 十四圓[십사원], 淸服[청복]이 아무리 싸도 三圓[삼원] 얼만가 四圓[사원]은 되었고, 安東縣[안동현]서 三大浪頭[삼대낭두] 本船[본선]까지 오는 쌈판費[비]가 또 不少[불소]하였으니, 囊中[낭중]에는 一圓[일원]도 餘在[여재]가 없었던 판이다. 上海[상해]로 直航[직항]만 하면 배에서 밥은 얻어 먹으니 걱정이 없으련마는, 中路[중로]에서 旅舘[여관]에 들게 되니 一泊料金[일박요금]도 내일 힘이 없었다. 그때에 나는 참으로 죽고 싶었다. 進退維谷[진퇴유곡]이라니 이런 困境[곤경]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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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困境[곤경]의 눈치를 먼저 챈 이가 車寬鎬君[차관호군]이었다. 君[군]은 營口[영구] 留宿費[유숙비]는 염려 말라고 나를 慰勞[위로]하였다. 그렇지마는 上海[상해]에 간대야 돈 나올 구멍 없는 내가 客地[객지]에 난 남의 돈을 얻어 쓴다는 것이 염치 없는 일이지마는, 迫不得已[박부득기]하니 無可奈何[무가내하]였다. 나는 車寬鎬君[차관호군]의 好意[호의]를 받아서 이 困境[곤경]을 免[면]하였거니와, 아직 그 厚誼[후의]를 到底[도저]히 千圓萬圓[천원만원]으로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鄭又影君[정우영군]도 車君[차군]의 도움으로 旅行[여행]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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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상해]에 가는 船中[선중]에서 일어난 事件[사건] 하나를 더 붙여 말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내 帽子[모자]가 너무 낡았다 하여 閔忠植君[민충식군]이 美國[미국] 軍隊式[군대식] 帽子[모자] 하나를 내게 寄附[기부]한 것이다. 속에는 때묻은 西洋木[서양목] 바지 저고리를 입고, 겉에는 퍼런 무명 淸服[청복]을 입고, 이 美國[미국] 軍帽[군모]를 쓴 내 꼴을 想像[상상]하면 只今[지금]도 失笑[실소]를 不禁[불금]한다. 게다가 그 淸服[청복]이 染色[염색]이 安定[안정]되지 아니하여서 손과 모가지에는 아청물이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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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 衾[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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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상해]에서는 白爾部路[백이부로] 二十二號[이십이호]인가, 洪命熹[홍명희]·文一平[문일평]·趙鏞殷君等[조용은군등]이 同居[동거]하는 집에 갔다. 내게도 돈이 한푼도 없지마는 그 양반들도 강목을 츠는 판인데, 鄭寅普君[정인보군]이 本國[본국]서 돈을 얻어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침을 삼키고 앉았는 꼴이라고 한다. 그렇게 궁한 판에 내라는 食客[식객]이 하나 늘었으니 걱정이다. 침대를 장만할 돈이 있나, 衾枕[금침] 장만할 것도 없거니와, 나는 洪命熹君[홍명희군]과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침대란 게 지질한가. 棕梠[종려] 노로 얽은 것 위에다가 얄딴 돗자리 하나를 깔았으니, 무거운 궁둥이를 맞대고 낯을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자던 것이었다.
 
23
가끔 양식이 떨어져서는 이제는 故人[고인]이 된 睨觀[예관] 申檉氏[신정씨]한테 얻어다가 먹은 일도 있다고 記憶[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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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睨觀[예관]은 우리가 있던 집보다 좀 큰 집을 얻어 가지고 七[칠], 八人[팔인] 學生[학생]을 留宿[유숙]시켰고, 또 英語講習所[영어강습소]도 經營[경영]하였다. 申采浩[신채호]와 金奎植氏[김규식씨]도 睨觀宅[예관댁]에 寓居[우거]하였다. 이를테면 이때, 一九一三年頃[일구일삼년경] 睨觀宅[예관댁]은 上海[상해]뿐만 아니라 江南一帶[강남일대] 朝鮮人[조선인] 亡命客[망명객]의 本據[본거]였다. 同濟社[동제사]라는 結社[결사]에 睨觀[예관]이 指導者[지도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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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朝鮮[조선] 사람 가는 곳에 궁이 따른다. 法[법](佛[불])租界[조계] 一隅[일우]에 모여 있는 朝鮮人[조선인] 亡命客[망명객]들에게는 가끔 絶糧[절량]의 厄[액]이 왔다. 우리는 하루 終日[종일] 즐기는 담배를 굶다가 밥지어 주는 中國人[중국인] 下人[하인]의 好意[호의]로 自轉車票[자전거표] 한 갑을 얻어 甦生[소생]의 기쁨을 찬양한 것이든지, 趙鏞殷君[조용은군]이 帽子[모자]와 구두가 없어서 맨머리, 슬리퍼와 바랑으로 프랑스公園[공원]에 볕쪼이러 다닌 것 밖에 出入[출입]을 못한 것이라든지, 다 그때 生活[생활]을 代表[대표]할 材料[재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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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 어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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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毒感[독감]이 들었다. 相當[상당]한 高熱[고열]이다. 이런 작자와 한 침대에서 궁둥이를 마주대고 자지 아니치 못하게 된 洪命熹君[홍명희군]이야말로 가엾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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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불러 올 形勢[형세]가 되나 申澈君[신철군]이 醫藥[의약]의 知識[지식]이 있어서 내 主治醫[주치의]가 되었고, 나중에는 어디서 붕어를 한 놈씩 사다가 손수 고아서 주기를 三[삼], 四日[사일]이나 하였다. 그 精誠[정성]된 愛護[애호]의 感激[감격]은 實[실]로 뼈에 사무쳤다. 내가 <어린 벗에게>라는 글에 쓴 것이 이 일이다.
 
29
『내 그저. 되지 못하게 웬 冷水浴[냉수욕]은 하노라고.』
 
30
하고 快癒後[쾌유후]에 洪命熹君[홍명희군]에게 실컷 嘲弄[조롱]을 받았다. 나는 그때부터 아침 冷水浴[냉수욕]을 廢[폐]하여 버렸다.
 
 
31
(一九三○年[일구삼공년] 十一月[십일월] 一日[일일] 《三千里[삼천리]》 十號 所載[십호 소재])
【원문】상해(上海) 이일 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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