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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揷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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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7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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揷 話[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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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續篇[속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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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에 단편 「집」을 초하면서, 그 허두에다 이런 말을 쓴 것이 있었다 ─사람은 집에서 나고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집이란 가장 편리한 발명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집에서 나고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고 하게만 마련인 것은 가장 불편한 생리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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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어리석은 소견일는지 몰라도, 나는 집이라는 걸 두고 생각을 그렇게 하기는 그때나 시방이나 일반이다. 그만큼 집은 매양 나를 성가시게 하고, 마음 번거롭게 하고 하기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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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들이 조금 꺼진 자리를, 섣불리 뜯었다. 큰 덤터기를 만났다. 어떻게 된 셈인지, 손바닥만하던 구멍이, 손을 댈수록 자꾸만 커져가는 것이다. 손바닥 하나만 하던 것이 둘만 해지더니, 그 다음 셋만 해지고, 셋만 하더니 다시 넷만 해지고…… 한정이 없으려고 한다. 잘못하다 구들을 온통 다 뜯게 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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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경 한 자 둘레나 뻥하니 시꺼먼 구멍을 뚫어놓고는 그야말로 속수무책, 검댕 묻은 손을 마주잡고 앉아서, 어찌하잔 말이 나지 않는다. 웬만큼 아무렇게나 막는 시늉을 하자니 번연히 그 언저리가 한 번만 디디면 또 꺼질 것, 손을 더 대자니, 적어도 구들을 한 골은 다 헐어야 끝장이 날 모양이고, 그러니 그렇다고 이렇게 뜯어젖힌 채 내버려 두고 말 수는 차마없는 노릇, 쩝쩝 다시어지느니 입맛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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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오월, 안양 양지말(安養陽智村)이라는 동네다 이백칠십 원에 오두막집 한 채를 샀었다. 기어들고 기어나고 하는 다섯 간짜리 납작한 초가집이었다. 터는 남의 터요. 서울서는 집 한 칸에도 항용 오륙백 원 육칠백 원 하는 세상인데, 그런 서울과 고작 육십 리 상거요, 정거장(安陽驛)으로부터 십 분이 걸릴락말락한 곳이면서 명색이 은채집으로 집 값이 도통 이백칠십 원이니, 무릇 그 집 생긴 형용이 조옴 기구할 이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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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기구하거니와, 집 옆으로는 오십 보를 다 못가 상여집(喪輿幕)이 덩시렇게 좌정하고 있는가 하면, 맞은편으로는 공동묘지가 빠안히 바라다보이고 하였다. 밤마다 여우가 울고, 부엉이가 울고 하는 공동묘지였다. 집 앞은, 마당이자 바로 가지런히, 건천(乾川) 바닥이어서, 큰비가 오면 집으로 물이 곧장 달려들 위험이 넉넉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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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는 모두 해서 팔십여 호에, 그중 이백 석인가 받는다면 구장이 제일 부자요, 판무식이요, 양반이고, 나머지는 태반이 바라스라고, 자갈 깨트리는 생업이었다. 포도장수와 달구지꾼과 농사꾼과, 그 옆 방직공장의 직공이 약간 섞이어 살았다. 경우가 얼마나 밝으면, 한물때 침수한 집을 위해 부역으로 물막이를 해주고는 그 다음에 와서 품삯을 땅땅 받아내는 동네였다. 매일같이 술을 퍼먹고 들어와 아범을 멱살잡이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친구를 붙잡아다 볼기 한 대 때릴 줄 모르고 본숭만숭하는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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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맹모(孟母)는 살기를 피할 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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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이렇게 동네는 쌍패스럽고 인심 강박하고, 집은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가 누추하고도 위험한 지대에조차 위치하고 하여, 시쁘디씨쁘고, 불만을 세자면 이루 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그 집을 지니고 그 고장에 주저앉아 영주를 할 생각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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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촌이 되어서 공기는 맑고 식수(食水)가 매우 정갈하였다. 숲도 많고 짙었다. 포도를 비롯하여 온갖 과실이 흔코 또한 신선하였다. 정거장까지 십여 분, 경성역까지는 기차로 사십 분, 교통이 대단히 편리하였다. 그러고, 기구하나따나 집이 내 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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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남의 집을 빌어서 사는 셋집이 아니요, 내 소유의 내 집─ 그 내 집에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다달이 집셋돈 낼 걱정을 할 필요가 있나, 집이 팔리든지 하면 비워주고 새로이 셋집을 구해 나가야 하느리라 하는 불안과 초조가 있나, 나가라 들어가라 구차한 소리를 들을 며리가 있나, 아무 거리낄 것도 근심할 것도 없고 만날 든든하였다. 오래도록 셋집살이로 떠돌아다니면서, 고생과 설움 지지리 받다가, 겨우 집칸 마련하여, 비로소 내 집을 지니고 내 집에서 살게 된 사람이 아니고는 막상 느끼기 어려운 즐거움이요 만족이요 안심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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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도 없는 집을, 우선 들어놓고 한 가지씩 두 가지씩 손을 대었다. 정성껏 손을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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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울타리였다. 썩 운치 있이, 바자를 구해다 네 귀 번듯하게 울타리를 둘렀다. 판장문도 짜 달았다. 울타리 하나로 한결 집이 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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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에 있는 옹당우물을 더 깊이 파고 토관을 묻고 바닥을 시멘트로 굳히고 하였다. 변소도 뒤꼍에다 새로 지었다. 깨끗이 도배장판을 하고, 문짝도 고칠 것 고치고 하여 창호를 발랐다. 챙도 만들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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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고르고, 화단을 무으고, 울 바깥으로 빈 터를 널찍하게 파 일구어 채마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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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루 그렇게 손질을 해놓고 나니, 덩치야 빈약한 그 덩치 갈데없는 것이지만, 집은 제법 그래도 집꼴이 박혔다. 둘러보느라면 문득 미소가 나고 하였다. 솔깃이 정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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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달이 못하여 나의 그 내 집을 지니고 내 집에서 산다는 즐거움과 안심, 만족은 한물이 싹싹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다. 역시 나는 근천스런 오막살이 한 채나마 이름하여 내 집이라고 지니고 살 재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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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물보다도 더했다던 한물이었다. 앞 개천이 넘치고 세 번을 넘쳤다. 세 번 다 집으로 물이 달려들었다. 그러는족족 집이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떠내려갈 듯 떠내려갈 듯하였다. 번번이 세간을 치워야 하고 피난을 하고 해야 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상하침수(床下浸水) 정도에 그치고, 기적적으로 집만은 무사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색 없는 무사였다. 물이 넘칠 적마다 집 앞 빈터가 뭉떵뭉떵 몇백 평씩 패어 달아나 집이 의지하고 섰는 바닥을 결딴을 내었다. 맨처음 물이 넘쳤다 빠진 뒤에 보니, 채마밭머리까지 떨어져 나갔다. 둘쨋번에는 바짝 울타리 밑까지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세쨋번에는 울타리와 마당이 몽땅 떨어져 나가고, 개천은 주춧돌을 스치면서 흘렀다. 골라서 짓자 해도 어려울 만큼, 정히 수변누각(水邊樓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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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한 번만 더 치른다면 그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탈싹 쓰러지게 되었었다. 물이나 바람이 아니라도, 주춧돌 밑 팬 자리가 흙이 부슬부슬 무너지는 것이, 이윽고는 저절로 쓰러질 날이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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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도 하려니와, 볼썽이 흉허워 차마 그대로 들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거나마 내다버리기는 한 조각 아까운 생각도 생각이지만, 당장 달리 셋집이라도 구하여 옮아앉고 무엇하고 할 형편이 닿질 못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도 마음 찌뿌듬하고 걱정스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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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조금 돋구어 물려내고, 그 가에다 방축을 쌓고 하면, 명년 여름, 큰물이 질 때까지는 그럭저럭 견디리라는 의사를 내주는 이가 있었다. 근리하기로 그대로 해보았더니 미상불 의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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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칠십 년 만에 처음 보는 물인데, 해마다 그런 큰물이 어디 지느냐고, 인제는 안심하고 살아도 좋다고 하던 것이지만, 하늘 일을 누가 보장하리요. 임시 그런 대로 지나다가, 명년 여름이 오기 전에, 늦어도 사오월 안으로 자리를 뜨도록 달리 방도를 차려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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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었고 김장까지 해넣었는데, 그러자 사고자 하는 사람이 나섰다. 동네 달구지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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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을 묻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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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마 얼마 달란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요량해 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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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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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유! 댁으서 말씀을 허세야,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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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꾼씨는 이렇게 겸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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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에…… 애초에 이백칠십 원에 사서, 백여 원이나 들여 수리를 했소이다. 또, 한물 때 백여 원을 들여 물맥이를 한 것이 있고, 저 마당을 고쳐 쌓느라고 일백이십 원을 들였고 도합 육백 원을 들인 집인데, 집은 이 꼬락사니가 되었으니, 그런 줄이나 알고서, 노형 생각해 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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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육백 환 다아 내랏 말씀인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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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 같으면 육백 원 다아 받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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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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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보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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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칸 사십 환씩 쳐서, 이백 환 어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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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허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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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우간 팔린다는 것만 시원스러 선뜻 대답을 하고, 그러나 뒤미처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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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허시요마는, 보아허니 노형도 나만침이나 어려운 사람 같은데, 이백 원이면 큰돈 아니요? 큰돈 들여 이걸 샀다 어떡헐 심으로 그러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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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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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라니, 노형도 지나간 여름, 한물 치루던 걸 번연히 보았겠구료? 명년 여름에 물이 또 넘쳐가지고 쓰러지거나 떠내려가거나 하면, 그런 낭패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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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헌 사람네 일이 다아 그렇잖에유? 우선 값 헐헨 맛에…… 다신 큰물이 없으려니, 요행수 바라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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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려나, 노형 눈으로 보기도 했고, 또 내가 이쯤 말도 했고 그랬으니, 이 다음 혹시 무슨 일이 있드래도, 날 몹쓸 사람이라고 과히 칭원일랑 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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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 다아 알구 산걸, 무어라구 수원수구를 허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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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흘 있다, 달구지꾼씨,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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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팔십 환만 받으시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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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낙가를 시키어, 나는 두말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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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그럭허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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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다시 그 다음번에 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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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일백오십 환뿐인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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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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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껄껄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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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그럼, 거저 차지하는 게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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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씨, 제야 점직하든지, 손이 뒤통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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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오륙십 리 안짝 주변(周邊)의 촌사람들이 항용 몹시 교활하다는 것은 많이 듣기도 하고 종종 겪기도 하던 터이었지만, 이 어리숙한 듯 순박한 듯한 달구지꾼씨의 그렇듯 수작이 의뭉하고도 엉뚱함을 보고는 크게 탄복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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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오십 원에 팔고 말았다. 일백오십 원이라도 한편 생각하면 횡재를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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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오십 원을 고스란히 그대로 가져다 빚을 갚고는 손을 탈탈 털었다. 집을 사고 수리하고 물난리 치르고 하느라고 사백 원이나 빚을 졌었다. 그동안 이백 원은 갚았고 일백오십 원 한 자리와 오십 원 한 자리가 남았었다. 일백오십 원은 집을 판 걸로 갚았지만 오십 원짜리 한끝은, 삼년이 된 시방까지도 갚지 못하고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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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재롱거리였고, 물을 치른 후엔 주체거리였던 집을 그렇게 해서 팔아버리고, 때마침 첫눈이 내리던 날, 이사짐을 실리고 뒤따라 안양바닥을 떴다. 안해는 몇 번이고 그 일찍이 ‘우리 집’ 이었던 오막살이를, 가다간 돌려다보고 가다간 돌려다보고 하다가 마침낸 눈물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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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으로부터 옮아앉은 곳이, 이곳 동교(東郊)였다. 가까운 서울을 버리고 또다시 촌으로 올 멋이야 있었을까마는, 서울은 감불생심이었다. 안방 건넌방에, 마루와 부엌이나 있고 한 명색이 온채집이면, 눈도 끔적 않고 보증금은 오백 원 육백 원, 월세는 사오십 원을 부는 서울을, 맨손 진배없는 내가 어찌 들어설 생심을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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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꼬지 다리에서 이사짐을 기다리다 문득 혼자 실소하였다. 서울서 서쪽인 개성서 시작하여, 남쪽 안양으로, 안양서는 이곳 동쪽으로, 서울을 한가운데다 놓고 서 ․ 남 ․ 동 이렇게 그 변죽만 차례차례, 개미 체바퀴 돌듯 돌고 있는 양이 아니 우스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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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동교로 와서, 처음에는 저 아랫집 생철집을 빌어 들었었다. 건넌방은, 주인네가 세간을 쟁여두어서, 안방 하나만 써야 하고, 그런 방이 몹시 어두워서 낮에도 한낮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벽은 시멘트를 바르고, 지붕은 생철지붕이요 해서 몹시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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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한 고생살이로 겨울과 초봄을 나자 어느덧 집을 비워주어야 할 기한이었다. 당초에, 사월까지만 빌리기로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문앞에까지 와서 기다리다시피 하는 집 주인네를 위해 부득불 집을 비워주고 길로라도 나앉게쯤 사정이 절박한 판인데, 마침 지금 이 집이 나서, 선뜻 얻어들었다. 부엌 안방 마루 건넌방, 이런 고패집으로 시늉이나마 따로 헛간도 있고 한 초가집이었다. 과히 낡지는 않았으나 물론 가난스런 촌집이었다. 집세는 매삭 구 원, 비싼 집세는 아니었지만, 시내 들어다니는 교통비 십오 원 내지 이십 원을 생각하면 결국 그턱이 제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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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월세 구 원짜리 푸달진 셋집이, 그런데 수월찮이 나를 성가시게 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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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간이 비가 오면 처얼철 샌다. 나무와 살림 등속을 들여논 것이 번번이 젖는다. 내 피해도 피해려니와, 그대로 두었단 미구에 무너지고 말 것인데, 삼동네는 바로 이웃이라 늘 보곤 하면서도 모른 체한다. 집 소유자는 이를테면 부재가주(不在家主)로 타관에 가서 살고, 그의 생질 되는 삼동네가 관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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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채도 연 삼 년을 이엉을 해 이지 않아서, 하마 새게 되었다. 아무리 내 집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붕이 가로 세로 구렁이 패고, 썩은새가 무시로 날아 떨어지고 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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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가히 절창(絶唱)이었다. 촌집 자격을 갖추느라곤지, 이 집도 앞만 가리는 흉내를 내고 옆과 뒤꼍은 울타리가 없었다. 집을 빌리기로 말이 된 자리에서, 울타리는 어떻게 할료? 했더니, 선세 석 달치 외에 다섯 달치만 더 내면, 섶을 사서 잘 둘러 쳐주마는 대답이었다. 좋은 말이라고, 요구하는 여덟 달치를 치렀다. 그러나 막상 울타리랍시고 하고 있는 광경을 본즉 요절할 꼴이었다. 부지깽이만씩한 울지렁을 십리 가다 하나씩 꽂고는 위아래로 띄장을 대고서 새끼토막으로 숭숭 얽고 있는 것이었었다. 진소위, 보릿대로 장인 묵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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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그와 나와 사이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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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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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울타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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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아! …… 그렇지만 울타리허구는 너무 성기다! 바알이라면 모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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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을 구할래, 천생 섶이 있어얍죠? 죄외 때애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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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글어서 바람은 잘 통해, 여름 한철은 생색이 나겠구면서두……”
 
73
“시어언해 좋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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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라건, 남이 함부루 내 집엘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것두 하자는 것이지만, 남이 내 집을 함부루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두 울타린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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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만 참읍쇼! 새 섶이 나면, 자알 곤쳐 해드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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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작년 오월이었고, 지금이 팔월이니, 두어 달이 여덟 번을 지났건만, 그 알량한 울타리는 여전히 그 꼴을 그대로 하고 섰다. 덕분에 나는 식사를 마루에서 할 때면, 가난한 밥상을 일일히 남에게 구경시켜야 한다. 여름날 웃통을 벗고 마루에 누워 딩굴다, 곧잘 동네 젊은 여인들께 띄운다는 실례를 범해야 한다. 하긴, 그 동네 젊은 여인들 몸소가 웃통을 벗고 그리로 지나다니기를 예사히 하는 터이매, 실례의 진범인(眞犯人)을 판단키 어려운 혐의가 없질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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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삼동이더러
 
78
“울타리를, 어떻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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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을 비친다치면, 그럴 적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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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조금만 참읍쇼! …… 날새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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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대답이었으나, 그러고는 그 때뿐이었다. 팡져서, 요새는 조르지도 않는다.
 
82
혹시 집세 내기를 태만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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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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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어린 놈이 큰일날 뻔한 일이 있었다.
 
85
지난번 큰비가 오던 날이었다. 마루에서 안해는 어린 놈을 옆에다 재워 뉘고 바느질을 하고 앉았고, 나는 조금 떨어져 마루 뒷문 문턱을 베고 누워, 잠깐 오수(午睡)를 청하던 참이었다.
 
86
이윽고 안해의 이야기 소리가 가암감 멀어가고, 마악 잠이 솔깃이 들려고 하는데, 그때 별안간 발치에서 무엇이 꽝 하고 마루청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 어린 놈이 경풍하듯 울고, 안해가 질겁해 부르짖고, 같은 순간 나도 놀란 소리를 치면서 벌떨 일어났다. 나는 꽝 소리가 나는 순간 낙뢰(落雷)가 되었나 했었다.
 
87
일어나면서 보니, 크기 목침덩이만한 굳은 흙덩이가, 어린 놈이 누웠던 베개맡에서 한 뼘도 못 되는 곳에 굴러져 있었다. 마루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흙덩이였다. 얼마나 굳으면, 별로이 바스라지지도 않았다.
 
88
안해는 엉겁결에 어린 놈을 둘러안고 저만치 물러가서 섰고.
 
89
새삼스럽게 가슴이 서늑하였다. 요행 그렇게 한 뼘 거리를 비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정통으로 어린 놈이마나 얼굴이나 가슴 같은데가 떨어졌을 말이면, 그 연한 골격이, 사뭇! ……
 
90
마루 천장은 회로 대강 새벽을 하는 시늉만 했을 뿐 반자도 없었다. 그러나마 촌집 솜씨가 되어, 쇠손질이 서툴러서, 회새벽이 틈이 쩍쩍 가고, 가끔 심심하면 조그만씩한 조각이 떨어지고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설마 이런 사람 잡을 무지스런 흙덩이가 떨어지려니는 생각지도 못한 노릇이었다.
 
91
당장에 무슨 조처든 조처를 해놓아야 하였다. 그대로 두어두고는 어린 놈 때문에 단 한시라도 마음을 놀 수가 없었다.
 
92
집 관리인이라고서, 삼동네더러 말을 한댔자, 보나마나 울타리처럼
 
93
“네에, 조금만 참읍쇼! 날새 곧……”
 
94
하고는 잊어버릴 터.
 
95
내 손으로 즉시 반자를 바르는 것이 가장 쉽고 현명한 도리였으나, 즉시 반자를 바를 재료가 없었다.
 
96
“어떡허우?”
 
97
안해가 우두커니 천장만 올려다보고 앉았는 나를 재촉이었다.
 
98
“반자 바를 동안은, 마룰랑 데리구 나오지 마는 수밖에!”
 
99
“오온! 이 여름에, 아일 어떻게 방안에서만 길르우? 아이, 으런 모두 생으루 병나라구?”
 
100
안해는 어린 놈을 내게다 떠안겨놓고, 우르르 방으로 들어가더니, 홑이불을 우둑우둑 뜯어가지고 나온다. 그럴 듯한 의사였다.
 
101
네 귀를 노나끈으로 매어서 못을 박고 높직이 차일 치듯 쳐놓았다. 허연 홑이불이 펄럭이는 모양이, 모양은 흉해도 어린 놈 머리 깨트릴 염려는 우선 없을 수가 있어 무방하였다.
 
102
그 다음이, 시방 성화를 먹고 있는, 이 방 구들 꺼진 것이었다.
 
 
103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솨 비가 쏟아진다. 비는 오면서도 바람 한 점 없고 무덥다. 우환 중에 방은 누기가 차, 아침에 군불을 때서, 흡사 한증가마 속이다. 뚫린 구들 구멍에서 훈김이 훅훅 치닫는다. 얼굴로 등으로 온 전신에서 샘물 솟듯 땀이 솟는다.
 
104
빗줄기가 이번에는 갑자기 뚝 그치면서, 언제 비가 왔드냐는 듯이 쨍쨍 볕이 쪼인다. 요 전번의 그 호우가 있은 뒤로, 날은 줄곧 이렇게
 
105
지짐거린다. 다 늦게 장마라니 부질없다. 지지리도 가물어, 한참때 모를 못내게 해놓더니, 공연한 객수(客水)다.
 
106
날이 지짐거려 좋기는 콩뿐이다. 뒤 울안에다 화초삼아 던진 콩포기가 여간 탐진 게 아니다. 콩은 콩잎 끝에 노오 물이 댕강댕강 들어야 잘 된다는 것이다.
 
107
검푸른 콩포기에 함빡 비가 젖어 흐드러진 것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108
저 콩포기에는 한 가드락 향수(鄕愁)가 어리었다. 밤콩이라고, 맛이 밤맛같이 달고 알이 유난히 굵은 콩으로, 해마다 가을이면 고향집에서 조금씩 보내주어, 두고 별미로 먹던 것을, 한 주먹 남겼다 뿌렸더니 저렇게 무성히 자란 것이다.
 
109
콩밭에 수수가 길로 자라고, 콩포기가 저렇게 우거질 무렵이면, 고향에도 벌써 가을이다. 바람도 높고 하늘도 높고, 높은 하늘에서 밤이면 은하수 머리가 서쪽으로 넌지시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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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랗던 원두막이, 벼이삭 숙기 시작하는 논두덩으로 옮아와 새막이 된다. 우여라 워여라, 새보는 소리 곧 풍년가(豊年歌)의 한 토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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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벼(早稻)를 베어다 털어서 시루에 쪄서 오리쌀을 장만하여 밥을 짓고, 나물과 햇과실을 괴어놓고 오리식례를 지낸다. 신명과 조상께 올리는 신곡감사제(新穀感謝祭)다. 성세 따라, 잘 차리고 못 차리고는 하여도, 집집이 궐치 않고 다들 차린다. 오리쌀은 집에서 장만도 하지만, 장날 촌사람이 멱서리에다 조금씩 지고 들어와서 팔기도 한다. 오리벼를 심지 못한 집에서는 그걸 사다 오리식례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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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오리쌀을 주먹주먹이 쥐고 다니면서 날로 먹는다. 아녀자라니, 아낙네들도 먹는다. 시루에다 한번 찐 것이 되어서, 고소하고 군입감으로 마침이다. 그러나 생쌀을 먹으면 이가 상한다고 하여, 많이는 먹지 못하게 한다. 나도 어머니한테 일쑤 걱정을 듣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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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백중(百中)을 흴배자, 발꿈치종자 백종(白踵)이라고도 쓴다. 백중이면 논농사가 애벌 끝이 나, 농군들은 발을 씻고 논으로부터 일단 올라오기 때문에, 진흙투성이였던 발이 하얘진대서 생긴 말이다.
 
114
발꿈치가 하얘지고, 가을걷이까지 소한(小閑)을 얻은 농군들은 그 백중을 전후해서 ‘두레’ 마다 ‘궁굴’ 을 일어, 공동으로 돈을 번다. 두레는 소작농, 상일꾼(農業勞動者), 머슴 이런 사람을 세포로 한 자연발생적인 원시적 촌락 조직체(組織體)다. 공원(公員)이니 각총(角總)이니 등속의 몇몇 소임이 있어, 전체를 지휘 통솔하고, 가끔 징을 쳐서 전원이 모여 가지고 사발통문도 한다. 꽤 엄한 불문율이 있고, 만약 그를 범한 자는 방축(放逐), 볼기맞기, 종아리맞기 따위의 형벌을 받는다.
 
115
두레는 그러나, 소위 계급적인 성질을 띤 것은 아니다. 동헌(東軒)과 향교(鄕校)와 노소(老所)와 사정(射亭)에 대하여 절대 순종이요 겸손한다. 그 일례로는, 가령 누구네 집 머슴 순돌이가 노소의 어떤 영감님이 계신데서(설혹 모르고라도) 입에 물었던 곰방대를 얼른 뽑아 등 뒤로 감추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두레에 붙잡혀 나와, 넓죽하니 볼기를 맞는다.
 
116
두레에는 반드시 풍장(農樂)과 기(農旗)가 있다. 기는 두레를 표시하고 대표한다. 기는 두레의 수호(守護)요 존엄(尊嚴)이다. 두레와 두레 사이에 싸움이 났을 때, 기의 장목을 빼앗기면 싸움은 그 두레가 지는 것이 된다. 장수가 목을 잘린 것이나 일반인 것이다.
 
117
두레의 기란 어마어마하게 크다. 굵기 세 뼘도 넘는 통대에 높이는 전신주 갑절이나 되는 것이 있다. 이런 깃대(旗竿) 맨 꼭대기에 꿩깃으로 만든 장목이 꽂히고, 장목에는 왕방울이 한 쌍 달렸다. 그 밑으로, 동아줄 같은 붉은 관음매듭을 치렁치렁 두 줄기 늘어뜨린 여의주(如意珠) 문 쌍룡두(雙龍頭)가 박히고, 그 아래가 기폭이다. 흰 바탕에, 청 ․ 홍(靑紅)의 깃을 달고, 푸른 지네발로 가를 두른, 세 칸에 네 칸씩의 장방형 기폭이다.
 
118
두레가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기가 앞을 나아간다. 두레에서 제일 기운 센 장정이 두 손으로 꼿꼿이 기를 받치고, 다른 세 사람이 좌우와 뒤에서 줄을 잡고 하고 앞에서 나아간다. 그 뒤를, 두 동자가 한 쌍 영기(令旗)를 받치고 딸고, 그 뒤는 오색 고깔을 쓴 풍장이, 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의 순서로 딸고, 다시 그 뒤엔 수십 명의 농군이 한 자루씩의 호미를 어깨에 걸고 주욱 따른다. 큰 기폭은 바람에 펄럭이고, 풍장 소리 드높이 울리면서, 그 행진하는 광경은 한번 위풍당당하다.
 
119
이 행진 앞을, 어떤 새수빠진 촌 여편네라도 있어, 뽀르르 건너갈 말이면, 당장 끌려와서 성문을 맞든지, 그 남편이 대신하여 볼기를 맞든지 한다. 또 기잡이(旗手)가 기를 넘어뜨려도 종아리나 볼기를 맞는다.
 
120
두레에서 누구네 집 콩밭 만도리면 콩밭 만도리, 논의 피사리면 피사리를 도급으로 맡아서 하는 것이 궁굴이다. 기 내다 세우고, 고깔 쓰고 풍장치면서, 수십 명이 들어서서, 큰 밭을 순식간에 매어치운다. 그렇게 해서 며칠을 번 돈으로, 술 빚고, 소 잡아 좋은 날 ‘술멕이’ 를 한다. 기께 우선 고사드린 후, 고기 해서 술 먹으면서 풍장 치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하루를 유쾌히 논다. 농군들의 큰 명절의 하나인 것이다.
 
121
농촌진흥회를 거쳐, 다시 애국반으로, 두레는 자연해소가 되었다. 존재의 필요도 물론 없어졌다. 그러나 농촌오락이 긴히 요구되는 이때니, 정월 보름의 ‘기맞이’ (旗會)며, 추석의 ‘난장’ 과 더불어, ‘술멕이’ 같은 것은, 과히 자숙을 잃지 않을 정도에서 장려가 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122
정월 보름이면 각처의 두레가 읍내(邑內)로 모여서 기맞이를 한다.
 
123
각 두레는, 그 읍(邑 : 郡)을 단위로 일종의 연합체(聯合體)를 이루고 있다. 완전한 연합은 아니요, 연합체로서의 명칭도 없고 하지만 매년 한 차례씩 그 연합성(聯合性)이 발휘가 되는 것이 곧 기맞이다. 두레와 두레 사이에는, 즉 기와 기 사이에는 두레가 생긴 연조순(年條順)에 좇아 형제의 항렬이 깍듯이 정해져 있다. 기의 크기도 장형이 제일 크고 둘째가 그보다 조금 작되 세째보다는 조금 크고, 세째는 네째보다 조금 크고, 이렇게 차례로 적어져 내려간다. 동생은 결코 형보다 커서는 안된다.
 
124
정월 보름날 아침, 일찌감치 읍내의 장형이(대개 읍내의 두레에 장형이 있다) 너른 마당에 나와 기폭을 펄펄 날리고 섰고, 그 아래서는 새로 장만한 고깔들을 쓰고 쉴새없이 풍장을 친다. 이윽고 동구 밖에서, 혹은 옆엣 동네서, 한 기가 풍장을 울리면서 나타난다. 장형은 풍장을 한결 높이 쳐, 그에 화하면서 마중을 나간다. 중간에서 두 기가 마주 만나 멈추어선다. 동생이 공순히 절을 한다. 형이 넌지시 답례한다.
 
125
기끼리 절하기를 마치고 나면, 두 풍장이 어울려 한바탕 두들긴다. 그러다가 형이 동생을 인도하여 너른 마당으로 돌아와서 나란히 선다.
 
126
좀 있다, 다른 방향에서 또 한 기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먼저에 온 동생이 마중을 나가 아까처럼 절을 주고받고, 두 풍장이 어울려 한바탕 치고 하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너른 마당으로 향해 들어온다.
 
127
마침내, 열두 두레면 열두 두레 전부가 다 모인다.
 
128
장관이다. 장형, 둘째, 세째의 차례로, 그 육중한 기들이 열두 개가 일렬로 길게 늘어선다. 제마다 고깔을 쓴, 열두 개의 꽹과리와 열두 개의 징과 열두 개의 장고와 열두 개의 북과 스물네 개 이상의 소고와 이렇게가 한데 어우러져, 한 박자로 풍장을 치면서 기 아래를 돈다. 골 안이 온통 우꾼한다.
 
129
이 날, 군중은 수백 명으로부터 천 명, 이천 명씩 모인다. 한 두레에 오십 명, 백여 명이 따라오고, 읍내는 거진 다 풀려나오고 하는 것이다. 다 모여가지고 한바탕 그렇게 어우러져 요란히 풍장을 치고 나서는, 기끼리 정식으로 절을 나눈다. 장형은 동생들 죄다한테 절을 받는다. 둘째는 장형한테 한번 절하고, 열 동생한테 절을 받는다. 세째는 장형과 둘째한테 각각 절을 하고, 아홉 동생한테 절을 받는다. 막내동이가 그래서 제일 많이 절을 한다.
 
130
절이 끝나면 술이 나온다. 이 날 술은, 머슴을 둔 집과 지주네가 한동이씩 혹은 두어 동이씩 부조를 한다. 가양주(家釀酒) 시절이라, 두레에서 낼 만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청을 하면 각 집이 미리서 알맞추 담가 두었다 기맞잇날에 걸러서 내보내 준다.
 
131
한 차례 술을 마시고는 풍장을 치고, 치다간 또 마시고, 치고 마시고, 마시고 치고 그러는 동안에 술들이 거나히 취한다. 좋다! 소리가 처처에 일고 고깔을 벗어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132
앞으로 추석이 임박하였다. 추석은 여러가지 굿과 놀이가 있어서 더욱 즐겁다. ‘난장’ 이라고 씨름판이 벌어지고, 때로는 ‘협률사’ 나
 
133
‘남사당패’ 가 들어오고……
 
134
나는 추석날이면 가까운 산소로 성묘(省墓) 다니기도 또한 즐거움이었다. 짙은 옥색물 들인 모시 다듬 두루마기에 새로 산 ‘사포’ 쓰고 미투리 신고 행전 치고 아버지와 형님들 뒤따라 성묘 가는 소년 적의 앙징한 내 모양이 눈에 서언히 밟힌다.
 
135
산직 집 울타리로 혹은 밭두덩과 산기슭으로 주렁주렁 열린 감, 대추 그리고 밤…… 성묘보다도 나는 이런 과실이 목적이었다. 집엔들 추석에 과실이 없을 리야 있을꼬마는, 같은 과실이라도 나무에서 따서 먹는 재미는 또한 자별하였다.
 
136
성묘를 갔다 석양에 돌아오면 씨름판이 벌어져 있다.
 
137
난장─씨름판은 저자(商街))에서 설도를 한다.
 
138
“올 추석에는 난장을 트자……”
 
139
이렇게 공론이 되면 술집이랄지 가게에서 돈을 걷어 소를 비롯하여 광목, 난목, 주머니, 쌈지, 허리띠, 대님 등속으로 상품(賞品)을 많이 산다. 대목장날 황화장수들에게서 현품으로 부조를 받기도 한다.
 
140
장만한 상을 큰 깃대(農旗竿)에다 줄을 달아 울긋불긋 걸어놓고 씨름을 시작한다.
 
141
각 동네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씨름손이나 한다는 군들과 구경꾼이 꾸역꾸역 모여, 수백 명의 군중이 둘러선 가운데서 씨름은 어울린다.
 
142
씨름판은 한 사람의 ‘판장’ 이 몇 명의 ‘서두리꾼’ (場內整理員)을 데리고 통제하며 진행시킨다.
 
143
맨 처음이 애기씨름이다. 판장이 둘러보아서 칠팔 세 고 또래의 동자를 둘끌어낸다. 씨름을 붙인다. 선뜻 나서는 놈도 있지만 수줍어하면서 안 나오려고 하는 놈도 있다.
 
144
조그마한 두 놈이 골마리(고의춤)를 마주 잡고는, 안쪽 감았다, 밖쪽 감았다, 밀치락달치락 승강을 한다. 판장은 연해 앞뒤로 돌면서
 
145
“어─우─ 어─우─”
 
146
하고 소리를 친다. 마침내 한 놈이 꽁 넘어간다. 판장이 달려들면서
 
147
“넘어갔다.”
 
148
하고 이긴 놈의 팔목을 번쩍 쳐든다. 요새날 권투 심판 본새다. 그러고는 다른 놈을 끌어내다 새로 붙여놓는다. 자원하고 나오기도 한다. 자원해 나오는 데는 단순히 씨름이 하고 싶은 놈도 있지만 제 동네가 지는 것을 보고 결기에 그러는 놈도 있다. 이런 승벽은 총각씨름이나 어른씨름 때에도 일반이다. 그것이 심해지면 편씨름이 되어버린다.
 
149
계속해서 다섯 허리를 이기면 상을 준다. 애기씨름에는 대님이나 율모기허리띠가 상이다.
 
150
다섯 허리를 이기고서 상을 타고도, 그대로(지도록까지는 언제까지고) 더한다.
 
151
나는 나도 제발 좀 씨름을 했으면 싶어도 도련님이라서, 경이원지(敬遠), 끌어내어 주지를 않고, 또 했다간 이내 집에서 알고 꾸지람을 타든지 종아리를 맞는 판이라 늘 부러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152
애기씨름은 그러는 동안 차차로 돋구어져 열두어 살 열대엿 살짜리 애기상씨름으로, 애기상씨름이 총각씨름으로, 총각씨름이 다시 총각상씨름까지 큰다. 거기 따라 상도 연해 커가서 총각들한테는 주머니, 쌈지, 난목으로 감발감 따위를 준다.
 
153
총각상씨름을 한 고패로 씨름은 어른씨름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뚝 떨어진다. 마지막번 총각에게다 열두어 살박이 초립동이를 끌어내서 씨름을 붙이는 것이다. 덜머리진 총각이 조막만한 초립동이와 붙어서
 
154
“어─ 우─”
 
155
하고 씨름 흉내를 내다가 꿍 제가 넘어박힌다. 씨름판은 웃음판이 된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한 또래의 초립동이끼리 씨름이 어울린다.
 
156
조막만한 초립동이로부터 시작된 어른씨름은 애기씨름 때와 마찬가지로 차차로 돋구어서 어른상씨름까지 큰다.
 
157
애기씨름으로부터 어른상씨름까지가 한 둘레다. 그 한 둘레가 끝나면 씨름은 다시 애기씨름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마지막번 어른이 애기한테 꿍 지고 물러나간다.
 
158
이렇게를 낮과 밤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풀이하면서 닷새면 닷새, 사흘이면 사흘, 예정한 날 동안 계속한다.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날 밤에 소씨름을 한다.
 
159
소씨름은 참 무섭다. 소 같은 장정이 마주 붙어서 틀고 겯고 구르고, 땅이 마구 쿵쿵 울린다. 하마 살이 찢어지고 뼈가 아스러지는 성부르다.
 
160
소씨름이 이윽고 고조에 오르면, 씨름판은 군중과 함께 잔뜩 긴장이 된다. 판장은 전신의 신경을 눈에다 모아가지고, 요리조리 날쌔게 납뛰면서 승부를 살핀다. 소씨름이 만일 판씨름으로 어울려 갈 경우엔 씨름판에는 살기까지 떠도는 수가 있다.
 
161
여느 씨름은 다섯 허리만 이기면 한 번씩 상을 타지만 소씨름은 그와 달라, 열 허리고 몇 허리고 다시는 나서는 적수가 없을 때까지 이겨야 한다. 열 허리나 스무 허리를 이기고도 한번 지면 고만이다. 그러나 단 한 허리를 이기고도 더 응전하는 자가 없으면 곧 그가 소를 딴다.
 
162
이 최후의 한 허리를 노리고 자신 있는 소씨름꾼은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판장이 목청이 터지도록
 
163
“소 나가네에! 소 나가네에!”
 
164
하고 소리를 외쳐도 진득이 앉아서 다른 사람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린다.
 
165
마침내 다시 더 없는 줄 알고 판장이 그때 현재로 최후 승리자의 목에다 소고삐를 걸어주려고 해서야, 햄 하면서 대든다. 대들어서 지면 물러나고, 이기면 그가 새로이 그때 현재의 최후 승리자로서 씨름판 한가운데에 가, 소는 내 것일다 하는 듯이 떡 버티고 앉는다. 그러나, 마악 소가 나가려고 하면, 꾼은 여전히 또 나온다.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닭이 울어도 소는 나가지 않는 수가 종종 있다.
 
166
기운 세고 씨름 잘하는 사람으로 씨름판으로, 쫓아다니면서, 소만 따다 먹는, 이를테면 직업선수가 더러 있다. 대개는 이런 직업선수에게 소를 떼고 만다.
 
167
또, 어떤 기운 세고 씨름 잘하는 소씨름꾼이 판을 쳐, 마악 소를 따가게 된 참인데, 돌연 한 사람의 백면약골(白面弱骨)이 나타나 그를 꿍 메어다꽂았다는 이야기가 허다히 있으나, 차라리 씨름판의 일종 전설일 것이다.
 
 
168
추석을 한목 보려고 ‘남사당패’ 가 들어와서 놀 때도 있다.
 
169
열사오 세, 오륙 세의 이쁘장스런 남사당들이, 머리 곱게 빗고, 분 바르고 남갑사 쾌자를 날아갈 듯 떨쳐 입고는 횃불 밝힌 너른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가벼운 연극 같은 것도 하고 한다. 이층, 삼층씩 꽃도 받는다.
 
170
천막이 있으며, 입장권을 팔 턱이 없고, 구경꾼은 그대로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한다. 그러나 공구경은 않는다.
 
171
“돈 받아라.”
 
172
소리를 치면, 남사당은 그 앞으로 와서, 빙그르 한번 돌고 엽전을 받는다.
 
173
입에다 물고 입에다 주기도 한다.
 
174
남사당패는 나에게는 엄히 금단된 구경이었다. 그래도 부형 몰래, 두어 차례 보기는 보았다.
 
175
이슬 촉촉히 내리는 달밤, 멀리서 울려오던 남사당패, 혹은 ‘협률사’ 의 취군 소리가 방금 아스라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176
고향의 가을에 엉킨 기억이다.
 
177
불현듯이 고향이 가고 싶다.
 
178
어느 겨를에 시꺼먼 손으로 담배는 피워 물었던지, 담배가 저절로 타는 줄도 모르고 한만없이 딴 생각에 팔려 앉았다. 안해가 돌아와서야 정신이 들었다.
 
179
“휘유우! 황토(黃土) 두 번만 파러 갔다간, 사람……”
 
180
안해는 그러면서, 어린 놈은 등에 업고, 황토 파 담은 대야는 머리에 이고, 조르르 비를 맞아가지고 들어선다.
 
181
나는, 어린 놈이 감기는 또 앓아 두었고 하고 속으로 걱정을 하다가
 
182
“이거 큰 아주 학질을 만났구려!”
 
183
“왜요?”
 
184
“구멍은 깎을수록 커진다드니……”
 
185
“? ……”
 
186
안해는 마루로 올라와, 방을 들여다보더니
 
187
“아이머니 절 어쩌우?”
 
188
“이만하고 말았으면이나 좋겠는데, 자꾸만 더……”
 
189
“웬만침 돌 놓구, 흙 발라두시우……”
 
190
그러다가 안해는 생각이 나서
 
191
“참! 웬만침 해두세요! 괜헌 걸 손을 댔나 봐요!”
 
192
“왜?”
 
193
“지끔 오다, 삼동어머닐 만났는데 집이 팔리게 됐다구……”
 
194
“이 집 팔린닷 소린 작년버틈 있던 소리?”
 
195
“아녜요! 이번엘 정말 팔린대요!”
 
196
“쯧, 헐 수 없지!”
 
197
“헐 수 없어서 어떡허구요?”
 
198
“그럼? 우리 살자구 집 팔지 말랠까?”
 
199
“아 우리 말예요!”
 
200
“다시 셋집 얻어가는 거지!”
 
201
“또 셋집을요?”
 
202
“셋집 아니구, 하늘서 집이 뚝 떨어질까?”
 
203
“하두 막막해, 나온 말이죠!”
 
204
한숨 끝에 안해는 그러면서, 등의 어린 놈을 내려 안고 젖꼭지를 물린다.
 
205
나는 흙을 이겨 안해 말대로, 웬만큼이라도 구들 구멍을 막을 흥조차 와락나지 않아 덥기는 하고 마루로 나가 앉았다.
 
206
“에구 가난이 무언지!”
 
207
안해의 혼잣말로 하는 넋두리였다.
 
208
“사람사람이, 좋나 나지나 제각기 집을 지니구, 집이서 살게 마련이건만서두……”
 
209
“난 그, 집에서 살게 마련인 것이, 불편해 못하겠드라!”
 
210
“그럼 한테서 살아요?”
 
211
“조옴 좋아? 애초에 인간이 집을 발명 아녀구서, 생리가 한데서 살두룩 마련됐드라면?”
 
212
“당신은 생각허시는 게 모두 저래. 사십이 낼 모리에 집 한칸……”
 
213
“드끄러!”
 
214
머쓰려버리는데, 그러자 중문간에서
 
215
“쥔으런 깁쇼오?”
 
216
하고 삼동이가 끼웃이 고개를 들여민다. 땅이 농촌과 도시(都市) 중간의 엇촌인 만큼 사람들도 그리하여, 이 사람 삼동이 역이 엇이다. 농사일, 노동일을 하면서도 일변 ‘서방님’ 태가 어딘지 모르게 박혀 보인다.
 
217
삼동이는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내 손을 보더니
 
218
“아, 저, 웬일입쇼?”
 
219
“구들 꺼진 걸 좀 곤치느라구……”
 
220
“오온, 절더러 곤쳐달래시지!”
 
221
“한 일 년 끄을게?”
 
222
“헤헤!”
 
223
삼동이는 점직하다고 금니로 웃고 나서, 마룻전에 가 걸터앉는다.
 
224
“건데 말씀입쇼. 이거 온 민망해 어떡헙니까?”
 
225
“집이 팔리게 됐다구?”
 
226
“네에! 그래……”
 
227
“팔지 못해하던 거니, 잘됐소이다그려?”
 
228
“댁에 하두 참……”
 
229
평소에 보아도, 사람이 성미가 청처짐하고 게을러 그렇지, 노상 맘씨가 그르진 않았다. 차라리 선량한 편이었다. 집을 팔아 미안하단 말도 노상 입에 붙은 말은 아니었다.
 
230
“건데 말씀입쇼. 이걸 전 팔백오십 환을 다아 내랑커니, 저 사람은 팔백 환만 허자거니, 걸루다 말이 안직 끝장이 안 났는댑쇼…… 눈치 봐, 팔백 환이래두 팔길 팔 생각입죠…… 실상 제 외숙은 육백 환 가량해 내놓겠다는 것이거든입쇼!”
 
231
“……”
 
232
“그러니 말씀입쇼. 들어 기시던 으런을 나가시게 허기두 민망스럽구, 댁으서두 이왕 이렇게 뜨락서껀 방치장껀 잘해놓시구 사시다 벼주시기두 섭섭허실 테구…… 폐일언허구 이걸 댁으서 차지헙쇼 그려?”
 
233
“날더러?”
 
234
“제 외숙이 말헌 육백 환만 내시구……”
 
235
“육백 원이라! 날더러 사라! …… 이백 원이나 덜 받구……”
 
236
“육백 원이면 비싼 값은 아닙죠!”
 
237
“허허, 참 고마운 노릇이요!”
 
238
“그야 무슨! ……”
 
239
“육백 원이면, 어찌, 만만한 상두 부루오마는……”
 
240
“삽쇼! 구문 한푼, 일없읍니다!”
 
241
“대진(垈地) 이게 남의 선산이겠다요?”
 
242
“그렇습죠, 건물만입죠!”
 
243
“그럼 이걸 내가 사 살면, 그 사람네 산지기가 되는 심인가?”
 
244
“허허허!”
 
245
“산소에 벌초허구, 눈 쓸구 허라구나 아니 허겠나요?”
 
246
“아무련들!”
 
247
“산지기 노릇 아니헌다구, 집 헐어가지구 가라면 어떡허나?”
 
248
“아따 지가 이왕 산지기 구슬 허구 있으니, 대신 다아 해드립죠! 허허!”
 
249
“돈 형편이 어떻게 되겠는지, 알아보아 가지구, 한 사흘 후에 좌우간 확답을 해 드리지.”
 
250
삼동이를 돌려보내고 돌아앉으니, 안해의 얼굴이 빛난다.
 
251
“어떻게 무슨 가량이 있겠어요?”
 
252
“××가 삼판(三版)을 내게 됐으니깐, 그 인세가 이백사십 원……”
 
253
“벌써 그렇게 됐든가?”
 
254
“벌써가 뭐야? 재판 천 부 다아 나가기에 일 년이나 걸린걸!”
 
255
“그리구 또?”
 
256
“이번치 ××××××이 오라잖아 검열이 나올 테니깐, ××서관에 잘 말해서, 초판을 이 천만 해달래면 그게 사백 원 아뇨?”
 
257
“옳아! …… 에구 제발 그렇게라두 해서, 다시 내 집 명색이라구 지니구 살았으믄!”
 
258
“이걸 사서 예다 뿌릴 박구 산다면, 서울 내왕에 악취는 한평생 맡아야 허겠다?”
 
259
“내 집에서 사는 재미에……”
 
260
“또오 서울 내왕마다 결사적 각오를 해야 허겠다?”
 
261
“××차요? …… 차차루 개선되 갈 테죠, 머!”
 
262
“그래서 쉽사리? …… 우리 저놈 학교 다니게 될 때까지만 완전한 선로가 돼주어두 큰 생광이겠소마는! ……”
 
 
263
닷새가 지나서……
 
264
그 닷새 동안 소녀처럼 명랑했던 안해는, 아침나절 시내에 들어갔다 코가 빠져서 돌아오는 내 얼굴을 보자, 눈치를 알아차리고 그만 실심해 눈을 내려뜨린다.
 
265
일 글러진 내평이나 묻고 싶어도 차마 어려워 입을 떼지 못해하는 안해더러, 마치 보고하듯
 
266
“××××××은 불급불요한 고로 검열 취하. ××는 용지난으로 삼판 발행 당분간 무망. 이상.”
 
 
267
바람 시원한 뒤꼍으로 들어갔다. 콩포기는 그새도 더 우거졌다. 털 숭얼숭얼한 콩이 모두 맺혔다. 이 향수(鄕愁)를 입으로 맛보지 못하고 떠나기가 아마 쉬우리라. 잘 자라 부지런히 결실하고 있는 콩포기가 민망하다.
【원문】삽화(揷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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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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