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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언(遺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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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1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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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 言
 
 
2
“남아여든 모름지기 말복날 동복을 떨쳐 입고서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 가 버티고 섰어 볼지니……외상 진 싸전가게 앞을 활보해 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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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상스런 문구는 본지 전전월호에 발표한 졸작 단편소설 「소망(少 妄)」의 서두에다가 적어넣은 일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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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것이 바로 이즈음 답답한 나의 심정의(삐뚫어져 토로된) 일단이요, 동시에 나더러 시방 당장 유언장을 쓰란다면 역시 그러한 말밖에는 달리 할 소리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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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지면의 몇십행 더 여유가 있기에 실없는 변명이나 조금 늘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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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늙도 젊도 못한 나더러 유언장을 벌써 쓰라니 어떻기 생각하면 너는 왜 여태 죽지 않았느냐고, 어서 갈 데로 가라고 조르는 독촉장을 받은 것같이 저으기 민망하기도 하고 하면서 일변, 나도 가진 지하로 물러갈 나이가 된 게 아닌가 싶어 새삼스럽기 내 연치가 헤아려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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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볼 기저귀에 싸인 채 인간 세상을 떠나는 생명이 허구많거늘, 내 이미 30년을 훨씬 더 살았으니 그만했으면 무던하고 그 30유여 년이라는 동안이 인생으로는 가장 좋고 뜻있는 시절이니 또한 섭섭할 것이 없고(좋고 뜻있는 시절을 좋고 뜻있이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야 더 산댔자 천년 만년일 배 없고 아직 2,30 년, 그 2,30년지간이라는 것이 어떠하냐 하면, 허리는 굽어 삼족동물(三足動物)이요, 귀는 먹어 절벽상산이요, 이빨은 빠져 합죽합죽, 기침을 콜록콜록, 콧물은 졸졸, 눈곱은 지척지척, 살가죽은 오글쪼글…… 이 꼴을 해가디고서 손자새끼한테 수염이나 끄들리고 젊은 사람들한테 저 늙은이는 왜 죽지도 않는다냐고 눈치나 먹고……하릴없이 인생의 주체거리가 되어 이 구석 저 구석 비껴앉기나 하고…… 소설을 쓰면 늙은이가 음큼스럽네 속도 야숙이 목 챙기네 조롱이나 받고……했지 그 밖에는 별 수 없을 2,3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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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이 숨이 막히는 ‘세기의 일산화탄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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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그렇듯 추한 행색을 해가지고 궁상과 추접을 떨면서 더구나 상가지구(喪家之狗)로 잔명을 이끌어갈 일을 생각하면 아닌게아니라 마침 인생 퇴거의 독촉장까지 받고 한 길에, 썩 철로길이라도 베개삼아 인간을 하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럭 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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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자면 편집자의 명도 있고 또 남들도 하는 짓이니 덩달아 장에 가더란 푼수로 나도 그 유언장이라는 것을 한 조각 만들어 두어놓고 볼 일인데, 하나 막상 쓰자고 하고 본즉 만만히 쓸 거리가 있지를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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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게 후손이나 세상에 물러줄 재산이 없으 유산 처분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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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판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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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게 마음 편하겠다. 불행중 다행이기는 여태 출 판을 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니, 계제에 임종에 가서 작품 전부를 불에 태워버리고 말 생각이 더럭더럭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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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후인을 경계하는 유훈(遺勳)으로서의 유언인데, 그 역 나라는 사람이 대문호나 대현이나 걸물(傑物)이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범인이고 보니 무엇을 가지고 후인에게 이로울 유훈을 남길 거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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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이나 걸물이 못됐으니 적이나 거악(巨惡)이라도 되었다면 오히려 참회를 하는 양으로 적잖이 남길 말이 있었을 게 아니더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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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보니 결국 유언 하나도 남겨두고 갈 잡이가 못되는 게 나라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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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하나도 할 잡이가 못되는 인간! 그를 30유여 년이나 붙여 두고서 밥을 먹여 준 인간세상이 어쩌면 인심도 후하기는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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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감지덕지해서라도 억지로 써가면서 문두(文頭)에 쓴 대로 “남아여든 모름지기 말복날 동복을 떨쳐 입고서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 가 버티고 섰어 볼지니…… 외상 진 싸전가게 앞을 활보해 볼지니……” 라는 졸작 소설 중 일절을 베껴다가 명색 유언을 삼는다.
【원문】유언(遺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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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언 [제목]
 
  채만식(蔡萬植)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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