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모더니즘의 감상 ◈
카탈로그   본문  
1957.8
고석규
1
「모더니즘」의 감상
2
― 김규동씨의「우리 시와 현대의식」을 읽고
 
 
3
최근에 나는 제목이 주는 바와같이「모더니즘」에 깃들인 감상의 문제를 이모저모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사뭇「모더니즘」을 남다른 이기처럼 내세우는 것이 매우 가소롭게 되고보니 이제 어떤 사랑의 편견을 시정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절충하는 것도 무심치 않겠다.
 
4
일전에 본보를 통하여 김규동씨는「우리 시와 현대의식」이란 2회분 논문을 내었는데 그의 목적은“사회와 문명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자”는 일종의 계몽작업이었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전히 실패였다는 것을 나는 먼저 지적할 수가 있다.
 
5
그것은 씨의 요즘 발표된 몇몇 시편에 뵈인「센티멘탈」한 기색이 그대로 이 비평속에서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휘지비지한 문장을 더듬어 가면서 씨가 무엇때문에 이런 것을 가지고 그다지 거추장스런 논제로 삼았는가에 대하여 나는 불가사의를 느꼈다. 더욱이나 그 계몽의 대상이 누군가를 분별하기 어려웠고, 다음으론 씨의 엇갈린 논조에서 하등의 내용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하기야 인상 비평이라는 것도 없는 바는 아니로되 쾌속하는 Z기가 무턱대고 현대의 성격을 상징해 주는 것 같다는 씨의 지나친 경악감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상적 허망이라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6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감상」이란 어떤 것일까. 소급하면 실르렐이「소박의 문학과 감상의 문학」을 적었을 때의「소박」대「감상」은「자연」대 「낭만」으로써 그는 온건한 이념의 절박한 요구를 감상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의 감상을 반발한 소위 「모더니즘」의 합리정신에는 어딘가 더 혹심한 감상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대개는 몰랐으리라. 가뜩이나 주지라는 허울을 쓴 고전주의「마스크」를 지나치게 미신하던 그들에게 있어서야….
 
7
하진만 우리들의 경우는 또 다른 것이어서 감상주의 아닌「감상」의 어의는 편석촌의 이른 바「감상에의 번역」에서 시도된「감상」정도로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
 
8
그것은「필요 이상으로 슬픈 표정을 하는 것」이 편석촌의 반역하려던 감상이라고 한다면「필요 이상으로 기쁜 표정을 하는 것」이 내가 통박하려는 오늘의 감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필요」라는 가치규준이 문제가 되겠다. 어째든 나는 두 가지의 감상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현대의식」이라는 곧장 은폐된 감상이 실은 음풍영월하던 개방된 감상에 못지 않게 감상적이라는 이유를 저버릴 수 없는 까닭이다. 모지에서 이봉래씨가「한국의 모더니즘」이란 제하에 역사의식이 핍절한 시인의「에고이스틱」한 약점을 탄핵함으로써 그 감상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와 달리 과학 물질에 대한 맹목적 경악이 시인의 비평의식 내지는 존재방식에 이르기까지 아주 치명적인 감상을 동반하고 만다는「메카니스틱」한 흡수(吸收)를 경계하려는 것이다. 시인의 실천적 과제보다 시작태도에 대한 검토를 새로이 하자는 것이다.
 
9
「슬픈 표정」에 대항하는「기쁜 표정」인 명랑성을 위하여 쾌속하는 Z기가 동원되야 하고 그밖에「라디오」「텔레비젼」「로케트」니 하는 것들이 나열된다는 것은 김씨의 소견이었으나 이것으로써 최신 발달의 과학기명이 총망라 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 아닌가.
 
10
구태여 씨는「과학문명의 발달」을 극구 예찬하는 백서가 현대시의 전부여도 가하다는 과장된 결론을 서슴치 않고 내린 것이다. 다시 씨는「과학문명의 발달」에 대립하는「문학문명의 발달」이라는 괴이한 말을 적었는데 그 복선은 여간에 드러나질 않는 것이었다. 아무튼「메카닉」에 대한 「스필리트」의 우위까지는 못 되어도 상호간의 협약같은 것을 어느 정도 희망하려 한 이론의 전개도 볼 수 없이 다만 오리무중이 된 씨의 「문학문명의 발달」이란 무엇을 말해 보려는 것인지 통이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씨의 방법화 운운이라도 좀더 치밀하게 익어졌다면 얼마나 우리 시사운동에 도움이 되었겠는가를 상상하다 못해 적이 유감되기도 하였다. 씨는 방법화 문제를 고스란히 탈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논리가 모순되었다는 것은 논리 속에 깃들인 고질에 어쩔 수 없었다는 표본이 된다.
 
11
그러나 문제는 “오늘 시는 바로 과학에 가까웁게 따라서야만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씨의 최종적 회의실에서 발생된다고 보는데 무릇 회의하라는 방법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김씨 처럼 Z기나 라디오와 같은 기계물질에 대한 경악만으로써 과학은 처리될 수 없다, 그것은 고학이 어느 정도 인간과 친밀해져 있으며 또한 인간을 과학에 어느 정도의 신뢰감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 상식으로나마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과학이 전쟁을 지탱한다는 사실은 기억할만 하다.
 
12
과학의 명랑성(?)이라 하여 과학에 대한 인간의 무참한 예속 감정을 탄압한다는 것은 사뭇 과학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충실히 포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포기양식엔 표현파가 있었고 다시 즉물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정신의 포기양식인 즉물주의를 애써 표방하려 한 김씨의 태도란 바로 외재하는 물질에 대하여 하등의「스폰타니티」를 반성함도 없이 거기 집착되고 다시 해이되는 비교적 불건강한 소극성에서 유래되는 것임을 두루 한 마디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13
김씨의 태도는 곧 리챠아즈의 다음과 같은 글에 의하여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14
과학은 이것이 무엇이며 저것은 무어냐 하는 따위의 질문엔 답할 수가 없고 다만 어찌하여 이리저리 되었는가를 말해 볼 따름이다.(시와 과학)
 
 
15
사실상 리챠아즈의 견해는 철학 및 종교에 있어서와 같이 과학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절망을 감추지 못한 것이 아닌가.
 
 
16
과학은 단지 사물을 조직적으로 지시하는 구체적 수단에 불과 할 뿐 구경적 의미에 있어서의 사물의 본질을 알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앞과 같은 책)
 
 
17
리챠아즈는 시와 과학과를 동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시적 신념」이란 어디까지나 목적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방법으로서의 과학을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같은 무렵의 베르그송 철학에도 똑같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물질과 기억)
 
18
그런데 목적으로서의 과학은 방법으로서의 과학기능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시의 제작적 의미(주체성)가 소재적 의미(객체성)를 압살하기가 일쑤다. 즉 김씨의 경우가 그것인데 씨에 있어서의 과학(물질적)은 보다 소재적인 것으로서 미시되었다. 기계물질에 대한 시간적 반성을 회피할 때 그것들은 정지된 사물에 지나지 않고 다만 베르그송의 이른바「지속력이라는 자유」까지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시간과 자유) 참으로 물질의 존재를 평균화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니 비판(부정)이 가하여지지 못한 물질자체를 있는 대로 향수(공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물질을 창조한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모조리 지워버릴려는 오프리티즘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19
그러나 깊이가 없는 오프티미즘, 즉 오프티미즘이 오프티미즘 만으로 그칠 때 그것은 명증할 수 없는 논리와 같다는 E.용거의 역설이 있다.(논문이 선 넘어서)다시 말하면 오프티미즘엔 반오프티미즘이 내재될 것이라는 주장인데 아마도 나의 생각으론 알베레스가 명명한「불가능한 감상」에 있어서의「불가능성」다시 말하면 부조리의 발견이 전혀 김씨에게선 체험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충실히 오프티미즘을 고수하지 못할 때 옆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바로 센티멘탈이즘이다.
 
20
여기서 나는 포위상황에 대한 반항과 모험으로 시종하는 전후 실존주의의 행동사상을 재언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러한 행동사상이 물질의 외재성 심지어는 기계 제도 집단 등속의 외재성(이것들을 통털어 메카니즘이라고 부른다면)에 반항할 때 숨길 수 없는 부조리감을 느끼고 다시 거기 대한 자유의 선택으로 나간다는 현대인 공유성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경악에는 다분히 실존적인 반성이 결여되었노라고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21
대개 물질의 외재성을 합리화하는 것으로선 실증주의가 있는데 이 사상은 본시 관념론에 대항하면서 발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존재간의 반문을 재개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기탄없이 조상(俎上)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극히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22
야스파아스의「철학적 세계정위」에는 이 문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23
세계가 나에게 대하여 완전히 투시되기 위하여 내가 세계를 그 자체 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세계로서, 즉 하나의 유한한 체계로서 사유하여야만 한다. 세계를 조직된 기계류와 같이 사유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에 빠지리라. 과학은 출발 시에 선망되었던 것처럼 세계관이며 가치결정이며 지식도 주어주지 않았다. 과학은 자체가 주장하는 이상의 것을 주장하면서도 과학 자체를 배신하고 다만 자체를 존재에 관한 한갖 교양정도로 낙오시킴으로써 모든 책임을 기피한 것이다.
 
 
24
야스파아스의 경우 실증주의는 범인식적 관념론과 동등하게 비판되었다.
 
25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지양된 마당에서 실존의 가능성은 얻어질 것이라고 그는 포부하였다. 개방된 감상에 기저하였던 관념론과 은폐된 감상의 기저가 되는 실증주의와의 두 가지가 함께 지양되는 마당같은 데서 우리는「필요」라는 가치규준을 새로이 말해볼 것이 아니었던가.
 
26
신학자인 R.니이버에 있어서도 합리적인 오프티미즘은 악의 문제를 엄폐하는 이유에서 가장 극적인 현대인의 감상에 지나지 않다고 역설하였다.(인간의 본성과 숙명)
 
27
마땅히 명랑성은 비극성에 대해 눈을 떠야 한다. 우리 시에 있어선 비록 그 심도가 희박하다 할지라도 현대와 대결하는 시인의 태도엔 변함이 없다. 이상의 것들을 종합하면서 나는 김씨더러 기계물질의 외재성에 대한 탄(憚)으로만 이루워진 오프티미즘적 방관이야말로 은폐된 것 같으면서도 가장 두드러진 감상이라는 것을 재차 환기하고 싶다.
 
28
무원칙한 시의 변호나 문명의식의 창도가 반드시 시인들의 존재관과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역리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과학문명에 대한 모호한 설법일랑 안으로 감추는 것이 감상에 직면한 시인으로서의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29
《1957. 8. 국제신보》
【원문】모더니즘의 감상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1
- 전체 순위 : 4100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742 위 / 1794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모더니즘의 감상 [제목]
 
  고석규(高錫圭) [저자]
 
  # 국제신보 [출처]
 
  1957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시(詩)
 
  # 김규동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모더니즘의 감상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