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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문학소론 (발자크 연구 노트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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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4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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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문학소론(발자크 연구 노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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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에 대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대체로 장편소설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나 자신의 문학적 경험에 의하면 리얼리즘이 현대를 관철하는 길은 언제나 장편소설을 통하여서였다. 기계적인 분업사상에서 나는 이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에 대한 나의 이해의 단초(端初)는 ‘장르’의 사적 고찰에서부터였다. 만일 산문정신이란 것이 현대에 살아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묘사의 정신을 말함이고,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장편소설에 있어서 문제될 것이다. 나는 많은 단편소설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것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또한 단편소설에 대하여 수없이 많이 리얼리즘을 지껄이었다. 그러나 몇 개의 문예학적 술어(述語)나 추상적 공식을 버리고, 단편소설과 사회(시대)를 정면으로 대질시킬 때 나의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였다. 단편소설(특히 내지(內地) 문단의 「창작」의 이입품(移入品))은 산문정신을 현대에서 살리는 데 적합한 문학형식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최근의 우리 비평가들이 리얼리즘을 운위(云謂)하면서 단편창작을 검토할 때, 리얼리즘이란 말이 공허한 채 자의적으로 쓰여지던가,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2, 3개의 문예학적 술어(述語)의 되풀이에 그쳤다. 리얼리즘은 씨 등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술어(述語)인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치 못하는 술어(述語)였다. 앞으로 나는 단편소설을 전혀 별개의 실험에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소설문학에 관해서 말하는 한, 그것은 리얼리즘과 장편소설을 언제나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 단문은 물론 소설문학에 관한 최근의 나의 단상(斷想)을 발자크 연구노트로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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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관념론적 사변(思辨)에 있어서 세계와 역사의 중심개념은 ‘정신’이다. 만약, 우리들이 이것과 상응하는 불란서적 형식을 구한다면 그것은 ‘지성’이다. 한가지로 양자는 우주적 종합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정신은 현실을 구성하는데 의하여 그것을 달성하려 하고, 지성은 사실의 해부에 의하려고 한다. 정신은 상으로부터 하로 길을 잡으나 지성은 사실로부터 이념에로 소재로부터 정식에로 상승한다. 정신은 유출이고, 지성은 발전이다. 발자크가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의 유희를 비난하여 ‘사실에 기초를 둔 분석’을 창도(唱導)할 때 그는 불란서적 지성인임에 틀림없는데,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지성의 시대라고 간주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지성인의 일(一) 형식인 저술가, 작가의 당해시대(當該時代)에 있어서의 사명이란 것이 중대관심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원격(遠隔)한 제관계를 포착하는 것’ ― 즉 실재의 일견(一見),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다양성을 무수한 결합의 통일로서 제시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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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독일인 에른스트·로버트·쿨티우스의 「발자크론」에서 발초(拔抄)해온 글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나에게 별반(別般) 필요치 않은 용건이다. 쿨티우스의 이른바 불란서적 지성과 발자크와 그리고 리얼리즘의 상호 관련만이 주목(注目)에 해당한다. 이것과 다음의 일절(一節)을 상호 보전(補塡)시켜서 우리는 리얼리즘에 대한 근본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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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또한 독일인의 서간(書簡)의 일절(一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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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순 사회적 소설을, 즉 작자의 사회적·정치적 견해가 전면에 나타나 있는 것 같은, 우리 독일 사람의 소위 ‘경향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하여서, 당신을 나무랄 생각은 조금치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전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작자의 견해가 노출되어 있지 않으면 않은 만큼 예술작품은 훌륭한 것이 됩니다. 나의 생각하고 있는 리얼리즘은 작자의 견해 여하에 불구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례(一例)를 들면 발자크올시다. 그를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떠한 졸라보다도 위대한 리얼리스트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인간희곡」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불란서의 ‘사회’의 가장 훌륭한 리얼리스틱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1816년으로부터 1848년까지의 해를 따라 변하는 풍속의 연대기라는 형식으로 귀족사회에 대한 신흥시민의 점차로 강하여 가는 압박을 묘파(描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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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서간(書簡)의 필자는 문학에 있어서의 경향성 자체난 또는 작자의 견해 자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과 생활을 최대한 도로 왜곡하는 주관주의적 이상화의 방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는 다시 이 문제를 문학에 있어서의 ‘체험적인 것’과 ‘관찰적인 것’을 성찰하는 대목에서, ‘실러적 방법’과 ‘세익스피어적 방법’과 연관시켜서 재론(再論)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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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죽기 얼마 전에 결혼한 앙스카 부인이 아직 그의 연인이던 시절에,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서간(書簡) 중의 일절(一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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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연구는 하나의 인생의 입장이나, 하나의 남녀의 용모나 성격이나, 하나의 직업이나, 하나의 처세법이나 하나의 사회층이나, 하나의 불란서 국가나, 혹은 유년, 노년, 정치, 법률, 전쟁의 여하(如何)한 것이나 하나로 생략됨이 없이, 일체의 사회적 현상을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축차적(逐次的)으로 펼쳐지는 인간의 마음의 역사의 모든 부분을 포함하는 사회의 역사, 그것이 우선 근저(根底)를 이룰 것입니다. 이런 것은 가공의 사실이 아니고, 각처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제2단의 층은 철학적 연구올시다. 하고(何故)냐 하면 현상의 뒤에는 원인인 오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풍속연구에 있어서는 감정과 그 동태(動態), 생활과 그 양태(樣態)를 묘사하고, 철학적 연구에 있어서는 그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유래되고, 생활이 무엇에 의거하는가, 인간과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 궁극의 범위는 어데 있으며, 그 조건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회를 일별(一瞥)할 작정입니다. 이리하여 풍속연구의 가운데는 유형화된 개인이 있고, 철학적 연구에는 개별화된 유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유형에는 그것을 개별화하고, 개인에는 그것을 유형화하는데 의하여 쌍방에 생명을 주입할 수 있을까 합니다. 또한 동양(同樣)한 방법으로 단편에 사상을, 사상에 개인의 생명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현상과 원인의 뒤에 결혼생리학이 그 일부를 형성하게 될 분석적 연구가 올 것입니다. 하고(何故)냐 하면 현상과 원인의 뒤에는 원리가 탐구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풍속이 광경이고, 원인이 준비실 혹은 기관이라면 원리는 창시자올시다. 그러나 작품이 사상의 고처(高處)에까지 기어올라감에 따라 그것은 압축되고 침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속연구를 위하여 20권을 필요로 한다면 철학적 연구에는 15권, 분석적 연구에는 9권이면 족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람과 사회와 인간성이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 판단되고 분석되어 그것은 서양의 천일야화(千一夜話)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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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발자크의 논술한 바는 다른 논문, 예컨대 그이 「스탕달론」이나 「총서문(總序文)」의 선언적 대언장어(大言壯語)와 함께 우리에게 지극히 불명료(不明瞭)하다. 그러나 물론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서 비판할 필요는 있지 아니하다. 우리는 발자크가 소설의 정신, 다시 말하면 산문정신을 어디에다 두었는가를 이해하면은 그만이다. 인간의 사회를 전체성과 연관성에 있어서 묘파(描破)하려는 정신, 사회 전체를 산문정신과 직접 대면시키려는 태도, 그것만을 이해하면 그만이다. 풍속연구라 말하고, 철학적 연구라 말하고, 또는 분석적 연구라고 말한 것이 당시의 문학적 환경(발자크 이전의 소설이란 어떠한 것이었는가? ― 그리고 그와 동시대인인 귀족적 낭만파의 소설이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것을 조금치라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발자크의 문학태도의 초시기적(超時期的)인데 다시금 경탄을 마지않을 것이다)으로 보아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축차(逐次) 그것을 따라가 볼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전게(前揭) 언구(言句)나 언표(言表)에 나타난 것에 헛되이 구애됨은 아무러한 이득도 우리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인간희곡」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문학적 사회적 환경 가운데서,(그의 논술한 바 언어나 어구가 아니라) 그의 본의만을 펼쳐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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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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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축도(縮圖)’라던가 ‘인간사회와의 상사(相似)’라고 하면 누구나 그것이 소설의 하나의 상식임을 부인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소설의 하나의 근원적인 본질적인 요소로서 정착하고, 이것에 의하여 소설의 가치판단에 새로운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문학에게 부여한 자는 발자크와 그의 「인간희곡」이 최초였다. 이것은 낭만주의나 혹은 그때까지의 소설과 발자크를 대비해 보면 명백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조르주 상드를 비평하여, 그에게근 구상력도, 입안(立案)의 천품(天稟)도, 진실에 육박하는 재능(才能)도, 감동의 기술도 없으나 문체만은 있다고 말하였다. 문체만이 있다고 말하였을 때, 발자크는 그것을 소설의 하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을까. 논증할 필요조차 없이 그 반대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설을 문체에 종속시키는 일체(一切)의 낭만주의적 가치기준에 대한 맹렬한 반대의 표명이었다. 그의 관심의 향방의 중심은 인간사회의 표현에 있었지, 미의 실현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까지의 소설이 미(美)를 실현하기 위하여 부절(不絶)히 탐구하여 마지않았던, 기이한 것, 이상한 것, 평상(平常)되지 않은 것의 표현에 몸을 바치지는 아니하였다. 오히려 발자크의 위대성은 그가 평범한 진실의 권리를 문학○내에 부활시켰다는 데 놓여있다. 그것은 그의 전대(前代), 혹은 동시대인(同時代人)의 문학과 귀족적 취미가 야비하고 비속한 것이라고 예술의 세계로부터 축출하였던 것을 용감히 그의 문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놓여있다. 이러한 심미적 가치의 새로운 기준설정은 그의 문학적 방법이 리얼리즘이라는 데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고, 그가 조르주 상드, 위고, 뮷세, 뷔니의 세기에 살고 있으면서 끝까지 낭만주의자가 되지 않은 것도 그의 예술적 방법에 유래되는 바 태반이다. 낭만주의가 특히 작자의 ‘자아’의 과시 가운데, 어떤 광대한 세계의 광경을 시인 소설가의 개인적인 시야에까지 환원시키는 데 의하여 성립된 것이라면 발자크의 작품은 개인적인 협착(狹窄)한 주관을 그의 밖(외부)에 있는 현실의 지배에 종속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에 의하여 산출된 것으로, 이것 역시 리얼리즘이 소설의 기초를 건설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하나의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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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분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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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륀티에르의 「오노레·드·발자크」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을 우리는 읽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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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다양성이라고 말해도 오늘날의 우리들은 하등(何等) 신기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의 문학을 생각하면 이것이 기여한 바 산문문학의 혁신은 획기적이었다. 조르주 상드와 메리메의 인물의 ‘신분’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그런 것까지도 만약 ‘신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단지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외에 하등(何等)의 신분도 갖지 않았었다. ‘문학적 생애’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전에, 아니 끌어들이기 위하여, 작자는 그들을 실생활로부터 ‘분리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아돌프의, 오베르망의, 루네의 ‘신분’이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무엇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그들이 어느 때나 ‘계산하는’일 없이 제공되는 그들의 생활의 자(資)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소설은 발자크 이전에는 단순한 연애담이었고, 예술은 그들에게 ‘신분’이나 ‘위치’를 주어야 할 일체(一切)의 요소를 고의로 박탈하였다. 그러므로 소설의 본체가 되어야 할 인간의 일상생활의 중축(中軸)을 구성하는 제요소의 표현은 인생사회의 충실한 모사(模寫)를 주목적으로 하는 「인간희곡」의 공적을 기다려서 비로소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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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금전,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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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이 여하(如何)히 하여 획득되며,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유통되는가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발자크였다. 자본주의의 법칙이 앞섰던 것은 아니다. 현실을 주시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는 그의 리얼리즘이, 화폐의 위력을 귀족계급의 비가(悲歌)의 뒤에 배치함에 이른 것이다. 하나의 직업과 신분 혹은 하나의 기술과 발명을 상호연관성에 있어서 충실히 관찰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경제적 디테일의 의미에서도, 당시의 모든 전문적인 역사가, 경제학자, 통계학자들이 쓴 것을 통틀어 합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만한’ 그러한 성과를 가능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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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환경의 세부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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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혹은 사물의 윤곽, 장소와 의복과 세간 등 광범위의 환경의 묘사는 요즘에 있어서는 소설의 하나의 기본적 상식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 역시 「인간희곡」의 작자를 기다려서 비로소 소설의 정의의 가운데 채용되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실고 상세한 그의 세부관찰을 비난하기 전에, 당시의 귀족 취미 가운데서 이것을 감행한 발자크의 대담성에 탄복함이 온당할 것이다. 이야기에 명확성을 가하고, 비속한 때문에 여태껏의 문학에게 거부를 당하였던 무수(無數)한 각층(各層)의 인간, 사회의 풍부하고 치밀한 세목(細目)이 새로이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음을 우리는 생각지 않으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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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몰아성(沒我性), 객관성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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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중심의 신변소설, 심경소설, 정치(情痴)문학, 또는 낭만주의적 개성문학 등이 개인적인 기호나 주관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자아문학(自我文學)’이랄 수가 있다면, 이것은 리얼리즘이나 혹은 장편소설과는 무연(無緣)이다. 하고(何故)냐 하면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의 문학이 위에서 살핀 것과 같이 ‘인생의 축도(縮圖)’라던가 ‘인간사회와의 상사(相似)’를 의욕하는 것으로 그의 주목적을 삼았다면, 협착(狹窄)한 주관에 의한 자아과시의 태도를 가지고는 여하(如何)한 의미에 있어서이던 장편소설은 창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如何)한 계급이나 신분의 인물도 성격도 창조할 수 있는 문학, 어떠한 사회와 인간의 생활과 마음의 세계에도 자유자재로 들어가고 나오고 할 수 있는 문학, 그것은 작자의 몰아성(沒我性)과 객관성의 보지(保持)가 없이는 전연 불가능한 일이다. 세익스피어를 가리켜 개성멸각(個性滅却)이라 말하고, 키츠의 이른바 ‘소극적 능력’이란 것도 이러한 작자의 몰아성(沒我性)을 말함이다. 정신의 입장에 서지 않는 성격창조는 진정한 성격이 아니라던가, 외부적 입장에서 그려진 인물은 성격이 아니라던가 하는 그럴듯한 비평가의 단견(短見)은, 기실(其實)은 거대한 인간사회의 역사적 축도(縮圖)를 기도(企圖)하는 리얼리스트의 앞에 작디작은 자아검토의 소품정신, 엄연한 현실을 작자의 회색적인 취미와 주관으로 덮던가, 문학의 정신을 사회와 인간의 거대한 영역으로부터, 좀먹은 일(一)개인의 폐엽 (肺葉)속으로 끌어들이려던가 하는 현실왜곡의 권면장(勸勉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몰아성(沒我性)은 끝까지 자기과신을 경계한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자기주관과 개인취미를 경계한다. 관찰자의(작자의 주관의) 관찰의 대상(현실세계)에 대한 종속 ― 그러나 이러한 명제 가운데서 작자의 사상이나 세계관이 몰각(沒却)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우매한 이해력이다. 영웅이나 천재만이 작중(作中)의 주인공이 된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역사소설에 대신하여 처음으로 평민을 등장시킨 스코트의 공적에 대하여는 「역사문학론」의 저자 게오르그 루카치에게 들어보는 것이 첩경(捷徑)일 것이다. 나는 나파륜(奈巴崙)의 열광적인 숭배자요, 그 자신을 문학상의 나파륜(奈巴崙)으로 자처하던 발자크가 그의 「인간희곡」에는 은행가와 야심가와 편집광과 악당을 등장시켰다는 것을 지적합에 그칠 것이다. 여하(如何)한 의미에서든간 「인간희곡」은 발자크의 개인 생활의 심경독백이나 신변고백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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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에서 주로 발자크에 관련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적의 전부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소설문학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모든 편향에 상응시켜서, 장편소설의 최초의 완성자가 어떠한 태도로써 산문정신을 수립하였는가를, 우리 자신의 반성자료로서 돌아본 데 불과하다. 확실히 우리는 20세기에 살고 있다. 그러나 20세기가 산출한 모든 정신적 고질(痼疾)을 아무런 차별감이나 차이의식 없이 공동으로 나누고 입을 같이하여 지껄이고 가슴을 함께 하여 공감할 필요는 있지 아니하다. 20세기에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구라파에 살고 있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서구적 20세기적 실험에 대하여 맹종하고 있는 문학과 그의 작가는 하루바삐 미망에서 깨어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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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절(不絶)한 관심과 연구를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의 실험한 바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어느 때에나 필요한, 시간과 정신의 절약이다. 그들은 이 이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헨리·제임스는 흥미가 있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나 헉슬리에게도 관심이 미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필생의 업으로 하여 따라갈 지도원리는 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부세계와의 길항(拮抗)에서 패배한 산문정신이 어디로 향하여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당해(當該)사회(社會)의 물질적 정신적 정세 속에서 조사해 보는 데서 우리의 흥미는 머물러야 한다. 우리의 문학은 좀 더 건강하게 키워나갈 수가 있다. 산문정신은 이런 의미에서만 환기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 소설이 특별히 고려하고 반성의 자료로 삼을 것을 19세기 이후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최근의 아미리가(亞美利加) 소설일 것이다. 나는 산문정신이 특히 이 방면에 대하여 심심(甚深)한 배려를 아끼지 말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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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평론』제7호, 1940년 4월)
【원문】관찰문학소론 (발자크 연구 노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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