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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태와 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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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2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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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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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지면 내에서 기술하는 이 단문은 소화(昭和) 15년(1940년 - 편자) 1년 동안 우리 작가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읽고 그 일반적인 동태나 성과를 묘사하는 것이 그의 임무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동태라고 하여도, 그러나 최근의 비평가들이 취미로 되어 있는 듯싶은 일종의 절망론이나 비관론에 도달코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은 아니다. 작가의 안이성이라든가, 맹목성이라든가, 또는 개괄력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일반적인 특징으로 인출해내는 것이 근래의 평자들의 지조처럼 되어 있는 것 같으나, 필자는 물론 그러한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의 하나이다. 우리는 좀더 다른 결론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가져야 하는 상태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금후의 창작계를 끌고 나갈 계기 같은 것을, 지난 한 해의 업적에서 발견해 보는 것으로 다시없는 즐거움을 삼으려 하였다. 단 한 가지 유감인 것은 원고 마감일자 관계로 1월부터 10월호 잡지까지의 성과만을 가지고 일년을 이야기하게 되는 불충분이다. 11월호까지라도 기록에 넣으려고 기다려보았으나 이 글을 쓸 때까지 나는 그것을 얻어 읽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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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편소설의 가족사 연대기적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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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계속되어 오던 장편 소설논의 속에서 구체화의 방향으로서 더듬어낸 하나의 방향은 가족사 연대기 소설로의 길이었다. 필자 같은 사람이나 자신의 타개책이 무엇보다도 급해서 이러한 방향으로 길을 잡아보았는데, 그 뒤 최재서 씨 같은 분이 주로 구라파 소설의 실례를 소개해서 이 방면에 뜻을 가진 작가에게 적지 않은 참고가 되었었다. 다시 이것과 연관시켜서 풍속론, 도덕론 같은 것까지도 운위된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바로 재작년의 일이었다. 그 때로부터 3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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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길이 어째서 장편소설의 검토나 개조로 열려졌는가, 또는 그 장편소설 개조의 방향이 어째서 연대기 가족사 소설이나 풍속론으로 열려지게 되었었는가, 하는 등의 사정은 여기서 자세히 전할 수가 없다. 작년이나 재작년의 평론계의 개관을 살펴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는 일이라 우리는 지금 그러한 논의가 하나의 경향을 실제로 낳으려고 하는 상태에 대해서 보고해 두면 그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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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이론이 있을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일 같은 시간적 문제는 각 작가의 개성적인 차이와 성질의 소치(所致)로서, 그 곳에 다른 까닭이 있을 리 없다. 필자처럼 자기고발의 궁로(窮路)에 다닥쳐서 어떻게 된 타개의 길을 발견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이 길을 택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작품세계나 문학세계의 경지에 다소간의 여유를 가졌던 분들은 천천히 덤비지 않고 순로를 밟아 자기의 문학의 낳은 문제를 정리하면서 그러한 방향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몇 사람의 작가의 생각한는 바가 일치한 경향을 낳는다는 것은 저윽이 밀도가 있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혹시 그러한 작가 중의 어떤 사람은 그러한 이론은 전혀 개의치도 않았고, 또 관심도 않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이 그 길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의 여하를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장편소설 논의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의 거취나 장래에 대해선 소설 논의 자체가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지고서 감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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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씨의 연재소설 「봄」은 확실히 이러한 각도로 보아질 성질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대지의 아들」을 가지고도 구하지 못하였던 경화된 씨의 세계를 가족사 연대기 소설에의 지향이 능히 구할 수 있었다면 이것을 얼마나 대견한 일이냐. 「봉황산」「왜가리」등 작품은 그러므로 작가의 방향으로는 「봄」이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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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씨가 연재해서 쓰고 있는 「탑」도 또한 이것임에 틀림없다.「모색」같은 작품을 가지고 아직도 한씨가 자기검토의 혼미한 세계를 갈팡질팡하고 있지마는 정신상의 안정은 「탑」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한씨에 있어 금후 필요한 것은 쓸데없는 비평가들의 선동을 뿌리쳐버릴 용단력을 가질 일이다. 여편네들을 싸고도는 잡설이나 시시펑덩한 삽화풍의 구성이 어떻게 영향하느냐는 「태양은 병들다」뿐 아니라 「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탑」을 풍속집(風俗集)에서 구하라! 삽화식 구성에서 구하라! 그러기 위하여는 자기성찰의 혼미한 세계를 우선 청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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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김사량 씨의 연재소설 「낙조」가 또한 이러한 지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주목할 일이었다. 이 작품도 전기 두 작품과 함께 일한합병 전후의 대전환기를 취급하고 있는데 성실한 작가들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한가지로 3, 4년 전의 지나간 전환기를 찾아서 인간성의 검토를 개시했다는 것은 지극히 흥미 있는 일이다. 김씨의 것은 가족사나 연대기라느니보다 오히려 윤수일이라고 하는 소년 주인공의 성격의 형성을 따라가는 것이 주목적이었는지 모르나, 역시 시대의 선택이나 배경과 환경의 설정에서 같은 지향을 발견할 수는 있는 것이다. 단지 드리고 싶은 고언(苦言)은 서울의 풍속이나 습속에 대해서 씨는 너무 어둡다. 그래서 나오는 인물의 행동이나 언행에 현실감이 따르지 않는다. 언어의 구사도 불충분하거니와 묘사도 너무 야단스럽다. 앞으로 이 방면에 좀더 착실한 연구가 있으면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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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세 작품은 모두 아직 연재 중에 있으므로 씨 등이 잡아놓은 방향은 그 단초에 있음에 불과하다. 내년 1월은 가족사 연대기 소설에 있어 좋은 성과가 이루어질 해임을 기대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럴수록 요즘 비평가들이 입을 열면 큰 자랑거리나 되듯이 소설이 통속화한다고 떠들어대는 심뽀를 더욱 알 수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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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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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한 해 동안의 6, 7인의 새 신인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쁨과 함께 보고하려 한다. 이것은 결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다. 수량으로 보아서 50도 안 되는 우리 작단에 6, 7명이라는 새 숫자는 결코 경홀(輕忽)히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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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김사량 씨를 위시하여, 오랫동안 동인지 『단층』에서 문학 수업을 해온 유항림 씨가 「부호」를 들고, 같은 그룹의 황순원 씨가 『단편집』을 들고서, 그리고 최태웅 씨가 『문장』지 신인제도를 거쳐서 「항구」와 「취미와 딸」을 들고서 새로이 등장한 외에 이석징(李石澄) 씨가 「도전」, 김영석 씨가 「월급날 일어난 일들」을 『인문평론』지를 통하여 발표하면서, 새로이 우리들의 동료가 된 것을 기쁨으로 환영하려는 것이다. 이밖에 함세덕 씨가 조선일보 당선작 「해연(海燕)」에 이어서 「낙화암」과 「무영탑」각색 등으로 극작가로서의 역량을 나타낸 것도 요요(寥寥)하던 극작 방면에 새로운 지주가 생긴 것으로 역시 경하(慶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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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신인이라면 정신적인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통론으로 되어 있는 듯한데, 작년 동아일보에서 총평을 쓰면서도 언급해 두었거니와, 역사적 개념 밑에서 신세대로 평가될 때엔 정신적인 새로움이 있어서 시대를 끌고 나갈 힘이 없으면 신인의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마는, 이것과 구별하여 아무런 정신적 새로움이 없어도 단지 문단에 새로이 나왔다는 의미로서의 신인 되기에는 역량 이외의 다른 자격이 그다지 필요치 않은 것이다. 한설야와 비슷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 더 있거나 최명익 같은 작가가 두서넛 더 있어서 안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신인의 정신적 가치의 새로움을 가장 고집한 분은 누구보다도 임화 씨인데, 임씨가 친히 신인으로 추천한 작가, 이석징 씨의 정신세계는 한설야 씨가 이미 양3년 간 헤어나가고 있는 비슷한 세계가 아닌가. 그러니까 황순원 씨나 유항림 씨가 최명익 씨와 같은 세계라고 하여도 신인 되기에는 그다지 페로울 리는 없는 것이다. 오직 씨 등이 같은 세계나 비슷한 세계에서 나와서 어떻게 자기를 구별지어서 성장시키느냐, 또는 자기의 개성을 형성시켜나가느냐를 격려하고 지도하는 것이 기성작가의 할 일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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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한두 개를 가지고 씨 등의 현재를 판단하기도 어려운 일일뿐더러, 장래를 진단한다는 것도 심히 위험한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설의 장래를 투시하여 우리 문학에 어떠한 전통을 플러스하는 작품을 쓸 수 있도록 금후의 씨 등의 노력에 기대함이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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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재소설과 농민문학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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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동안의 평단을 돌아보건대 신세대론의 뒷수습과 이어서 소설문학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 퍽 많이 논의되어 왔다. 생산소설이니 토(土)의 문학이니 해 가지고 새로운 소재에 대한 관심을 부르짖은 것은 우리 작단이 시정 세계나 도회적인 소비면에 빠져서 허덕이는 지 오래라 하여, 특히 작가의 눈을 생산 장면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평가들의 경고와 제창에 유의하였음인지 그 방면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이 조항에서 보고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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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 씨의 「전망」과 정비석 씨의「삼대」는 말하자면 신세대론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현경준 씨의 「유맹(流氓)」은 동만주의 마약(痲藥)중독자 갱생부락의 어떤 시기의 생활을 보고적으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이무영 씨의「흙의 노예」는 농민문학의 어떤 신기축(新機軸)을 보여주려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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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이무영 씨의 경우는 물론 다른 작가와 달라서 농민문학의 토론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이 작년부터 계속해오는 씨의 귀농생활의 하나의 성과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나, 때마침 그러한 의견이 많이 나오는 터에 하나의 각도를 가진 완성된 작품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역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씨는 그 동안 적지 않은 슬럼프에 빠져서 허덕여온 작가였다. 이씨의 문학의 타개의 길을 생활의 타개에서 얻을 것이라 자신하였고, 그래서 신문기자를 집어치고 시골로 돌아간 것은 이씨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혁신일 뿐만이 아니라, 문학적 갱생까지를 함께 의미하는 사건이었었다. 작년에 벌써 「제1과 제1장」같은 작품을 보여주어서 귀농작가의 의기에 일단을 피력했거니와, 「흙의 노예」는 그 방면에 있어서의 거의 절정에 도달한 하나의 성과라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씨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작단 전체로 보아서 지난해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재산의 하나로 간주될 것을 믿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절정이라는 것은, 노력이 도달한 가장 높은 수준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한 금후의 같은 세계에서의 작품이 일종의 하향선을 그어가지 않을까 하는 의구(疑懼)까지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하반기의 「안달소전(安達小傳)」은 이러한 의구를 친히 작품으로 보여준 것으로 벌써 이씨가 귀농생활에서 얻을 최고의 선물은 모두 가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앞으로 일년 간은 그러한 의미에서 이씨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년일까 한다. 「딸과 아들과」「이름 없는 사나이」「민권(閔權)」등 작품은 이씨 작품세계의 방계라고 보여지는데, 이런 작품은 없어도 있어도 무방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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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 씨의 「전망」과 정비석 씨의「삼대」는 세대 개념이나, 또는 시대나 사실의 수리(受理)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킨 작품들이었는데, 가장 큰 결함은 역시 하여금 작품의 모티프를 납득시킬만한 형상화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데 있는 것 같다. 현경준 씨의 「유맹」에도 같은 평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나, 특히 이러한 휴머니스틱한 의도를 가진 작품은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보도소장(保導所長)은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전반은 관청직원이란 각도에서, 후반만이 미적지근한 인도주의자의 입장에서 취급되어, 전혀 이 인물에 대한 작자의 태도의 불통일성을 폭로하고 말았다. 다른 인물들도 인상이 희박하고, 생활의 전락자의 고민에 대한 작자의 관념이 일체로 성숙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의도가 성과와 상부(相副)치 못한 하나의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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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前記) 작품들 외에 현씨에겐 「첫사랑」이라는 단편이 있고, 정씨에게는「고고(孤高)」와 「제3의 우정」이 있는데,「제3의 우정」은 좀더 작품의 의도를 승화시켰다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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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성작가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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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작가들 외에 우리 산문문학을 중심에 서서 추진시키고 있는 중견과 신진들의 많은 업적을 이 곳에서 보고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이분들은 개인적으로 보나 작단 전체로 보나, 질적 심화와 새로운 방면에의 이동과 개척이 없는 바 아니지마는, 눈에 띨 만한 신방향의 진출이 괄목할 정도가 아니어서, 이상 제 항에서 따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렇게 함께 몰아서 취급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마저 지면의 제한이 초과되어서 자세히 그 업적을 검토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여기에 취급되는 부대가 역시 작다느이 중심세력이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리 문학을 건실하게 향상시키고 있는 것임은 사실이어서, 이들의 활약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보고서를 필자는 다른 기회에 가져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작품 목록을 중심으로 간단한 두세 마디 식의 개괄로써 이야기를 끝막으려고 하는데, 일년간의 업적을 한두 마디의 술어로써 표현할 재품(才稟)이 없는 필자인지라, 혹여 본의 아닌 오해를 사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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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남 씨와 채만식 씨가 작년에 못지 않은 활약을 하였다. 「탁류를 헤치고」「어둠 속에서」「병원」「소년」「전원」「길」등이 안씨의 작품인데, 「탁류를 헤치고」의 중편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장편「애인」의 후일담인 듯하나 가장을 가지고 있는 청년작가와 착한 여급과의 사랑 이야기가 갈 수 있는 턱까지 가본 작품이다. 대체로 안씨에게는 그 전 세계에서의 새로운 변화는 없고 「기계」와 「그날밤에 생긴 일」의 계보에 속하는 노력이 금년도에 중단된 듯한 것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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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씨는 중편「냉동어」외에 「순공(巡公) 있는 일요일」「당랑(螳螂)의 전설」을 발표하였고 『여성』에 「젊은날의 한 구절」을 연재하고 있는데, 「냉동어」는 씨의 연래의 허무주의적 경향이 갈 턱까지 가보아서 이제 밑바닥의 불건강한 본질이 드러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역시 「순공 있는 일요일」이 허무감이 적당하여 감명이 깊었다. 그러나 씨의 금후의 방향은 「당랑의 전설」을 소설로써 실천하는 길에 열려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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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씨의 것은 「봄」과 「주붕(酒朋)」의 두 편이 있는데 금년 들어서 유씨의 작품세계는 약간의 피로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성』에 「우수의 뜰」을 연재하고 있다. 이효석 씨도 매신(每新) 연재의 「창공」을 끝내고는 저윽이 피곤한 모양이어서 「합이빈(哈爾濱)」한 편만을 발표하였다. 이태준 씨도 「청춘무성」에 정력을 소모하고 「밤길」하나만을 보여주었다. 박태원 씨는 「애경(愛經)」에서 외부묘사에 지쳐서 「음우(淫雨)」등으로 내부 세계의 편력을 시작하려는 눈치가 보인다. 이석훈 씨가 「백장미부인」을 『조광』에 연재하는 외에 「부채」「유랑」「하르빈」등 을 썼으나 질적 향상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만 씨가 오래간만에 「초종기」「별장」등을 썼는데 자리잡힌 활약은 새해에 기대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엄홍섭 씨가 「실명」을 최정희 씨가 「인맥」과 「적야(寂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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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중세서는 박노갑, 김동리, 김영수, 김정한, 정인택, 이근영 씨 등이 활약하였는데(정비석, 현경준 양씨는 위에서 보았고), 그 중에서 약간의 이동을 보인 분은 김동리 씨인가 한다. 다른 분들은 작년도의 작품세계에서 대차(大差)없는 곳에서 활약한 것 같다. 본래 김동리 씨의 세계는, 절간, 민속, 동양적 유현(幽玄), 아취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혼구」「동구 앞길」「다음 항구」「회계」등을 거쳐서 점점 속세와 항간으로 이동해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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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씨가 「월광한」「낙일홍」「추산당과 곁사람들」에서 자기의 안정된 세계를 가지려고 한 것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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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갑 씨의 작품은 「삼인행」「횡설」「먼동이 트기 전에」「무가(霧街)」「포설(飽說)」등이 있는데 그 전과 대차 없다. 정인택 씨의 「범가족」「우울증」「업고」의 세 작품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작품으로 그 전날의 씨의 세계와도 그대로 연속되는 같은 이야기들이다. 김영수 씨의 「밤」 「해면」 「풍랑」을 보면 「소복」다음에 씨를 확대하였던 「단층의」세계에서 다시 차츰 적은 가정 안으로 찾아들어 약간 속적 침범까지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근영 씨의 「최고집 선생」「고독의 변」은 좀더 앞으로의 노력에 기대를 두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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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석인해 씨가 「산마」「방황」을 썼고, 김소엽, 최인욱, 김진수, 최인준 씨 등이 한 편씩의 작품을 썼으나 언급할 지면이 없어서 그친다. 최명익, 허준 씨 등의 작품은 도무지 구경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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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40년 12월호, ‘문화 1년의 총결산’특집 ‘창작계’분야)
【원문】동태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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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40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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