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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金剛山) 정조(情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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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0.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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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정조[金剛山情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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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樹州) 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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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를 쓰라시는 명령이 지중하온지라 붓을 들기는 들었사외다마는 하로하고 또 반나절 동안을 꿈속같이 다녀왔으니 무슨 두고두고 우려낼 건덕지가 있사오리까. 휘둥대둥 색책 삼아 몇 줄 끄적거리는 것을 눌러보아 주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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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금강산이란 쉽게 말하면 암석세계(岩石世界)라 할까요. 곧 돌로 이룩한 조그마한 우주입디다. 이 돌이 큰 놈은 어마어마하게 하늘을 떠받드는 헌헌장부도 되고 아름다운 놈은 흰 치맛자락을 거듬거듬 춤추는 미인도 됩니다. 의젓한 부처님, 동탕한 신선, 흉물스러운 짐승들이 왼통 돌로 깎고 그리고 새기고 저며진 것이외다. 여기 맑고 맑은 물이 갖은 재롱과 아양을 떨며 흐릅니다. 물은 비록 물일망정 여느 물이 아니요, 여기 아니고는 도저히 구경할 수가 없는 물이외다. 그 물빛이란! 희다 할까 푸르다 할까. 쪽을 풀어낸 듯하다면 너무 진할 것 같고 옥색이라 하기엔 너무 심심합니다. 초록빛이라면 연연한 것은 그럴싸하지만 그양 초록도 아닙니다. 맑다고 하였지만 그냥 맑은 것은 아니외다. 아모런 세상의 보통 물로는 저으기 상상하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차라리 깨끗한 공기에 견주는 것이 근사할 듯. 공기가 엉키고 서리었다는 것이 상상이라도 방불할 것 같습니다. 맑고 맑게 개인 가을 빛에나 비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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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물은 여느 물이 아니요, 이 돌 세계의 공기인 상도 싶습니다. 숨결인지도 모릅니다. 이렇듯이 맑고 이렇듯이 깨끗한 것은 한줌의 티끌도 섞이지 않은 탓일까, 돌의 생김생김과 앉음앉음을 따라 이 물은 눈보라로 휘날리고 구슬같이 구을며 폭포가 되고 시내가 되고 못도 되고 늪(沼)도 되었지만 그 담긴 그릇이 돌인 것은 물론입니다. 물에서 스며나는 이 물이니 이 돌 세계의 숨결일시 분명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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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돌 세계라 하였다고 아주 흙 한 줌이 없고 울창한 수풀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그러나 그것은 고명이요, 양념일 따름이외다. 낙락장송이 뻗디디고 선 데도 또한 반반한 바위외다. 공중에 매어 달린 듯한 새둥우리같은 암자들도 의지간은 역시 위태위태한 돌이외다. 만폭동을 끼고 비로봉을 넘고 구룡연, 옥류동을 돌아 만물상밖에 둘러보지 못한 짧은 행정일망정 엄청난 돌의 재조에 놀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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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예까지 와서 새삼스럽게 애절하게 느낀 것은 향수(鄕愁)이외다. 하로 반이란 짧은 날짜요, 그 좋은 산과 경을 보면서 향수를 느끼다니 속물이란 할 수 없다고 웃을 이는 웃으리다. 그러나 이 향수란 좀 더 넓고 막연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꼭 집어 말하기는 거북하외다마는 어쩐지 아득한 내 마음의 고장이 그리워집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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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수는 어데서 오는 것인가. 첫째로 우리네 유산객을 만날 수 없는 일이외다. 내외 금강 백 수십리를 휘둘러 다녔지만 우리 흰 옷 입은 친구란 새벽 하늘의 별보담도 더 드물고 귀하였습니다. 치성 드리러 온 아낙네 몇 분과 한두엇 마주쳤을까. 이와 반대로 동경·대판서 온 학생들과 구경꾼들은 거의 길에 널렸습디다. 빼어난 코에 푸른 눈자위를 굴리는 축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등으로 맨든 들것에 담겨 건들건들하는 꼴도 장관이려니와 안가슴패기와 부르걷은 팔뚝의 누런 털이 숭숭한 흰 살이 볕에 달아 이글이글 불같이 타오르는 것은 정말 싱싱해 보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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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전에 한번 보셨다니 잘 아시려니와 금강산 명물로 외나무다리가 한 몫을 볼 것이외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맑은 흐름을 꿰뚫고 척척 걸쳐진 장목 다리. 자연 그대로 별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이 다리야말로 순박한 조선의 풍치와 심산미를 돋울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다리는 지금도 더러는 남았습니다마는 사람 발자최가 잦은 곳에는 대개는 야살스러운 화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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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 들어도 구수한 숭늉 한 대접을 얻어먹을 수 없습니다. 길목에 찻집이 늘어섰지마는 깍쟁이 찻잔에 미적지근한 노랑 물은 억지로 권하되,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떠다 주는 이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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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조선의 금강산이 세계적으로 출세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외다. 그러나 조선 독특한 문화와 향기와 풍치를 잃지 않는 곳에 그 세계적 가치가 더욱 클 것이 아닐까요. 한심한 일이외다. 그러나 할 수 없는 노릇이외다. 이러고야 향수를 느끼는 이, 나 하나뿐이겠습니까. 그래도 조선의 정취가 남았다면 무수한 고찰을 들겠지요마는 그도 벌써 유난스러운 펭키(페인트) 단청에 보는 눈이 쓰라릴 지경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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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못해 우리네에 끼친 자최라고는 그 좋은 암석에 굼벵이 기어간 자욱같은 그 성명과 초라한 여관이 있을 따름이외다. 다른 나라 사람이 이렇게 쏘다녀야 그들의 성명을 새긴 한 조각 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기념으로 비를 세우고 나무를 심을지언정, 자연물을 깎고 저미는 천착하고 각박한 짓들은 하지 않은 모양이외다. 참으로 제도할 수 없는 인간들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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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대형! 되지도 않은 글이 길기만 했습니다. 끝으로 한마디 할 것은 우리 부인네도 등산열이 좀 있었으면 하는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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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만물상을 올라가는데 현해탄을 건너온 부인네 두 분과 동행이 되었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비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사치한 옷이 비의 세례에 말 못되게 되었습니다마는 그들은 기어이 가는 길을 돌쳐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종에 빗물에 젖은 옷이 무거워지니까 그대로 웃옷을 벗어버리고 갈 길을 재촉합니다. 삼십 전후의 아직 젊은 여성들이었건만 속옷 바람을 조금도 부끄러이 알지도 않거니와 그 값많은 옷이 버려지는 것도 돌아보지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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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까지 온담에야 끝까지 가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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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싯방싯 웃어가며 미끄러운 돌을 그대로 타올라서 마츰내 귀면암 꼭대기까지 오르고 맙디다. 나는 그 씩씩한 의기에 놀래었습니다. 마지막엔 속옷까지 비에 젖어 사족을 놀릴 수 없게 되고 볼상도 매우 사나웠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조금도 괘념도 않고 운소에 빼어난 칼날 같은 봉우리에 감탄과 호기의 눈을 번쩍이었습니다. 우리의 부인네도 이만한 용기와 의기가 있었으면 하였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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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가정』, 1935. 10.)
【원문】금강산(金剛山) 정조(情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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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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