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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제이삼(秋題二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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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0.16
채만식
1
秋題 二三[추제이삼]
 
 
2
(1) 하 늘
 
3
손을 배웅하느라고 대문 밖엘 나서다가 보니 아침나절은 다뿍 흐렸던 날씨가 씻은 듯이 들고, 맑은 햇빛이 아낌없이 가득히 내린다.
 
4
‘무슨 그다지 대단한 노릇을 한다고 가을날이 이닥 좋았는 줄도 모르고 음침한 방안에만 칩거해서……’
 
5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하늘을 우러러본다. 높다랗게 거대한 아치가 구름 한점 찾아볼래야 없고 한빛으로 푸르러만 있다. 맑고 푸르고 높고……
 
6
단지 이것뿐이다. 단조(單調)하기론 끔찍이 단조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즐겁다.
 
7
어떠한 기교나 조화를 다 부린 미술이나 지상의 천연경(天然景)이라도 미치지 못할 위대한 단조다.
 
8
위대한 단조 그는 즉 위대한 기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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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흥(興) 뒤끝에 이윽고 오는 것은 인간다운 타산이요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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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기후 알맞은 이때의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느라면 우선 그러하듯이 문득 여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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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착상류(着裳類)의 인간이었다면 혹시 저 코발트빛의 아름다운 하늘을 한폭 가위로 오려서 치마를 하나 해입고 싶은 생각이 먼저 났을는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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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방과 정처는 없어도 좋다. 구태여 풍광이 아름다운 산수가 아니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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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저 하늘이 저렇게 즐거운 그 밑에서 아무 곳이고 미지의 땅을 거뜬거뜬 밟으며 다니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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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도 데릴 필요가 없다. 혼자서 휠훨 가다가 우연히 산형(山形)이나 산색(山色)이 좋으면 바로 그가 동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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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遠 山[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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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역(筆役)에 머리가 지치면, 멀리 율림(栗林)으로 산책이 대견할 때는 낡은 등의자를 대문 밖에 내다놓고 앉아 한동안씩 피로를 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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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동향이어서 나앉으면 바로 자남산(子男山)과 송악산(松嶽山)의 동편 줄기가 미처 다 맞닿지 못한 그 사이로 멀찍이 바라다보이는 게 화장(華藏) 뒷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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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루턱 가까이 절집이 몇 채 오복하게 올라앉은 것이 아스라하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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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 머리를 쉬자는 노릇이며, 우두커니 산봉우리와 가물거리는 절터를 바라볼 뿐 되도록 생각을 아무것도 않자고 앨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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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 번연히 뜨고서 무상무념이란 범인(凡人)으로서 졸연히 어려운 재주인지 어느 겨를에 그 산과 절을 두고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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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가서 보고 싶기도 하다.
 
22
신앙이 도타운 승사(僧師)가 불상 앞에 합장을 하고 앉아서 염불을 외우는 광경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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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정반대로 속세의 고기맛과 술향기를 그리어 뚱뚱한 화상(和尙)이 한분 고의춤에 손을 찌르고는, 시방 내가 거기를 바라보듯이 화상씨도 절 마당가로 우두커니 서서 이 하계(下界)를 내려다보지나 않나 하는 공상을 하다간 혼자 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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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면 좋은 망원경 하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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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 공상이 바로 맞아 그러한‘사랑스러운’화상씨가 실재로 있어가지고 시방쯤 예의 고의춤에 한손을 찌르골랑 푸진 속미(俗味)를 그리워한다고 하고, 그러다가 혹시 저기 송도부중의 가변두리 한천동(寒泉洞) 어느 속가(俗家)에서 어떤 심술궂은 서방님 하나이 대문 밖에 나앉아서는 방금 그 화상씨의 그러한 정경을 상상해 보다가 혼자 웃으면서 망원경을 생각하는 줄을, 만일 그 화상씨가 상상을 한다면…… 한다고만 하면 족히 얼굴이 붉어지겠거니 하는 데까지 나는 상상을 하느라면 허허허 한바탕 웃고 싶을 만치 재미가 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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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장닭이란 놈이, 인간은 암이 곱게 몸치장을 하는데 닭은 쑥스럽게 사내놈이 호사를 한다고. 인간이 저를 숭을 보는 줄을, 놈이 알면 단박 얼굴(?)이 새빨개질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그만 우습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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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秋果圖[추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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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書案) 머리에 사과가 두세 알 벌써 며칠째 맛이 시고 해서 내 은고(恩顧)를 받지 못하고 저렇게 무류히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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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신 익지 않은 탓으로 맛은 아직 들지 않았다지만 색채만은 가을의 어떤 과실보다도 아름답다.
 
30
능금같이 불크레한 어린애기의 볼이라고 하지만, 과연 어린애기 볼같이 불크레하니 고운 능금이다.
 
31
하나 아름다운 것 그 이상의 일급 정서를 머금은 과실을 찾자면 청포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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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연한 녹빛 일색으로 단순한 것이 어딘지 고상하여 좋다.
 
33
고상한 그 배후에는 무엇인지 모를 이국적인 담담한 애수가 어린 것만 같아 정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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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는 볼 볼긋볼긋한 것이 이쁘기는 해도 잔망스러 못 쓰고 감은 괜히 우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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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서리를 맞아 새빨갛게 연이 앉은 높다란 장옥은 덜해도 반불겅이의 활시(活杮)는 확실히 가을 과실 중에 첫째가는 쌍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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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비하면 밤은 차라리 어줍잖은 색채를 선명히 드러내지 않으니 숫드름해서 밉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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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머루와 다래의 시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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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 헐하고 야만스런 함석지붕 ⎯ 생철문화, 양재기 문화가, 포도와 능금으로 더불어 이땅에 오늘처럼 퍼지기 전에는 가을 과실로서의 은총을 홀로 차지하던 머루와 다래다.
 
39
전설과 향수가 깃든 머루와 다래.
 
40
그들은 시방도 단풍이 붉고 골짝 물이 맑은 산중에서 공장과 을종(乙種)집 목로집 앉은술집으로 죄다 떠나가고 없는 옛동무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1
그 마음 곱던 처녀들의 손 대신 쭈글쭈글 시들어빠진 노파의 손이 와서 닿고 하면 저희도 싫고 섭섭하겠지.
 
 
42
<高麗時報[고려시보] 1939. 10. 16>
【원문】추제이삼(秋題二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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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3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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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