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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人間) 박용철(朴龍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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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2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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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인간] 朴龍喆[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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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龍兒)가 작고(作故)한 지도 이미 일년유반(一年有半) 햇수로 날짜도 얼마 오래 되었다고야 하겠느냐마는 봄철 가을철 철따라 서울을 올라가서 마음껏 몇날씩 즐기고 돌아오던 일을 생각하면 벌써 작년 봄을 최후로 그의 음성을 못 듣고 그의 모습을 못 대한 지가 퍽이나 오랜 옛날같이 여겨진다. 옛사람일수록 길어지는 가을! 작년 가을만 해도 바로 벗이 거거(居據)하던 두간방을 내가 혼자 쓰면서 그의 손때묻은 종이 조각을 주무르며 유고(遺 稿)를 정리하노라 하였으니 오히려 벗은 내 곁에 있는 성싶었고 유아(遺兒) 들을 어루만지며 벗의 모습도 대하는 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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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들면서부터 울적 생각히는 것이 벗이요, 귀에 앵 ─ 도는 것이 그의 음성인데야 뭣할 때 참으로 못 견딜 만큼 세상이 허무해지고 고적(孤寂) 해진다. 가는 마음이 없고 오는 마음이 없으니 허무하고 고적할 밖에 없다. 벗과 사귀어 20년 서로 거슬림 없었던 사이 이젠 때때로 떠오르는 면영(面 影)을 행여 사라지지 않게 생각을 모두어 명상에 잠기곤 한다. 용아(龍兒)가 아직 중학생 때 동반(同班) 우리 학생들의 시회(詩會)?가 열렸던 석상(席上) 어느 동무 하나이 즉흥(卽興)으로 <푸른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린 다> 하였을 때 벗은 그 동무를 바르 보고 <눈이 내리는데 하늘이 어찌 푸르 오> 하자 좌중은 웃음이 터진 일이 있었다. 시구(詩句)가 되었든 안 되었든 그것을 캐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 하늘에서 눈이 내릴 리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한 것뿐이다. 4년 때에 일고(一高)에 실패하고 5년 마치고 외어독어부 (外語獨語部)에 무난히 들었는데 5년 때 괴테, 하이네를 처음 읽은 탓으로 괴테 때문에 외어독어부(外語獨語部)를 들었노라고 나에게 뽐낼 때는 제법 문청(文靑)같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장해 보였다. 딱한 가정 사정으로 외어(外語)는 그만두고 서울 와서 연전 문과(延專文科)에 적(籍)을 두고 1년간이나 지내는 동안 그의 문학도 본격적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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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희곡(戱曲)을 쓰고 소품(小品)을 해 보고 하였다. 윤 ○○양과 피아노 건반 위에서 얼크러진 상사(相思)?도 그 때였고 위당(爲堂)댁에서 수주(樹州)에게 절을 받은 것도 그 때였다. 「개」라는 소품(小品)이 수주(樹州) 맘에 퍽 좋았던 것이라. 그 기벽(奇癖)이 절을 나뿐히 했던 것이 다. 수주(樹州)는 그 때 바로 명시집(名詩集) 『조선(朝鮮)의 마음』을 세상에 묻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하던 시절, 절도 그럴 듯이 나온 셈이다. 학교에서는 위당(爲堂)의 총애(寵愛)를 받은 것이 사실이니 학생 박군(朴君) 집에 자주 들려서는 고사고문학(古史古文學) 이야기를 잘 들려 주셨음을 나도 잘 안다. 나중에 벗이 《시문학(詩文學)》을 창간할 때에도 그러한 관계로 위당(爲堂), 수주(樹州)가 동인(同人)으로 도와주었던 것이다. 냉동 여사(冷洞旅舍) 시대는 내지(內地)서나 마찬가지로 몸이 대단히 좋았고 장래를 염려할 일은 도무지 없었으나 몸이 비교적 좋았던 벗에게는 그보다도 한두 가지 딱한 가정 사정이 항상 그를 불안 초조하게 하였었고 우울침통(憂 鬱沈痛)케 하였었다. 집에 꼭 가 있게 되었고 집에 있는 동안 완전히 소식 (消食)을 못 하게 되고 약수장(藥水場)을 찾아 헤매게 되고 그러느라니 세상이 넓어지고 아는 사람도 많아져서 심심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동안 마음에도 없는 어느 여성에게 무던히 졸린 일이 있었는데 저편이 대단한 공세를 취하는 통해 용아(龍兒)가 방어력이 있을 리 없고 무척 애를 쓰다가 결국은 저편에서 퇴진을 하였지마는 밖에 있어서는 크게 불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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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장(藥水場) 시대에 벗은 시조(時調)를 쓰기 시작했고 그 중 몇 편은 유작집(遺作集)에도 들었다. 용아(龍兒)의 문학의 영향으로 인하여서도 벗은 시조와 시를 한 시대에 같이 하여 왔었는데 나는 그것을 볼 때 속이 상해서 못 견디었다. 좋게 충고를 해 왔었다. 시조를 쓰고 그 격조(格調)를 익혀 놓으면 우리가 이상(理想)하는 자유시(自由詩)·서정시(抒情詩)는 완성할 수 없다고 요새 모(某) 시조 선생이 어느 책에 시조와 시를 동일한 것같이 쓰시었지마는 그럴 수가 없다. 배구(俳句)도 시와는 물론 같질 않고 더구나 시조는 셋 중에 가장 시와 멀다고 할 것이다. 시조 말장(時調末章) 의 격조(格調)를 모르고는 시조를 못 쓸 것이요, 시조로서의 말장(末章)의 존재는 항상 <시(詩)>를 재앙할 수 있으니까 시를 힘쓰는 동안은 결코 시조는 손대지 말 것이다. 말이 딴 길로 흘렀다. 그러나 벗 용아(龍兒)는 시조와 시를 같이 완성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치밀한 그 두뇌의 힘이 두 가지를 혼동시키지 않고 잘 섭취하고 배설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좌익 전성(左 翼全盛) 시대가 닥쳐왔었으니 식체(食滯)로 약수장 신세를 진 벗으로 보면 좌익 전성은 또한 큰 식체가 아닐 수 없었다. 무럭무럭 커나가는 그 정치 그룹에까지 접근하질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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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예맹(藝盟)이면 외려 말할 나위나 있었다. 그의 서가(書架)에는 문학 서(文學書)보다는 경제과학서(經濟科學書)가 더 많이 끼워지고 그 이론을 마스터함으로써 우리 같은 문청류(文靑類)는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여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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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위하여 무척 애를 피웠었다. 하다못해 좌익 문예(左翼文藝)와 평론(評論)쯤 맛보는 정도로 발을 멈추라고 에렌부르그의 명편(名篇) 『컴미날의 연관(煙管)』을 나는 그에게 권하여 읽게 하였었다. 실상(實相) 그러한 좋은 작품, 그 때 우리 예맹원(藝盟員)의 손으로 씌어지기를 우리의 문학을 위하여 얼마나 바랐던가. 유점사(楡帖寺[유첩사])에서 시작된 토론이 개잔령(開殘嶺)을 넘고 고성 삼일포(三日浦)에 이르도록 정치주의(政治主義) 가부(可否)를 가지고 골을 붉히고 싸우고 말았었다. 결국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라는 결론뿐이다. 그 때 세계를 풍미(風靡)하던 사조(思潮)에 벗도 사로잡혔었다. 문학은 그의 도구(道具)라고 여기던 시대이었다. 한번은 좌익(左翼)의 화형(花形)한 분이 용아(龍兒)에게 왔었다가「판대웅」을 만지작거리면서 문학! 문학이 무엇을 한단 말이요 하는 것을 문학이 문학을 했지 별다른 것 하는 것인 줄 아오 하였으니 벗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결국 문학은 아무것도 아니겠다는 자신있는 표정을 하지 않는가. 그 뒤 그 화형(花形)은 12차 서문별장(西門別莊)을 가더니만 정치는 밥보다 더 재미있는지 요새는 또 무슨 회의 중역을 하여 광화문통(光化門通) 왕래 (往來)를 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들의 정치심(政治心)도 가상(嘉賞)타 하겠다. 용아(龍兒)가 어떻게 그 곳에서 전락(轉落)했을까? 역시 딱한 가정 사정이 시골살이를 강제(强制)하였음이다. 거기서 시낭(詩囊)을 배불리 할 수 있었고 상당히 긴 시일을 두고 한아(閑雅)한 향제(鄕第)에서 훌륭한 시인이 되어 버렸다. 본시 지극한 정열의 인(人)은 아니요, 응당 혈형(血型) B를 가졌을 침착한 용아가 동서 전적(東西典籍)을 풀어헤치고 천균(千鈞) 뇌장을 짜놓았으니 명편가습(名篇佳什[명편가십]) 쏟아져 나올 밖에 없다. 벗이 남긴 근 백 편(百篇)의 시(詩) 대부분 좋은 시가 모두 그 때의 소산이 다. 자신만만하여 가지고 상경하여 지용(芝溶)을 만나서 《시문학(詩文學)》을 만들던 시절의 벗의 의기는 충천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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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詩文學)》은 나온 뒤 어느 한 분의 비평문도 얻어 본 일이 없는 것도 기이하였지마는 그러한 순수 시지(純粹 詩誌)가 그만한 내용과 체재 (體裁)를 가지고 나왔던 것도 당시 시단의 한 경이(驚異)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세평(世評)대로 너무 고답적(高踏的)인 편집 방침이 해지(該誌)의 수명을 짧게 한 것은 유감이랄 밖에 없다. 뒤이어 《문예월간(文藝月刊)》·《문학》등에서 용아(龍兒)는 명편집인(名篇輯人)이었고 특히《문학》은 벗의 특이한 편집 취미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할 수 있었다. 《문예월 간(文藝月刊)》전후하여 당시 세칭(世稱)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의 제우(諸友)와 긴밀한 교의(交誼)가 생겼고 말년(末年)까지도 진섭(晋燮) · 헌구(軒求) · 기제(起悌) 대훈(大勳) · 광섭(珖燮) 제형(諸兄)과는 특별한 사이였었다. 여기에 《시문학(詩文學)》때부터의 결우(結友)로 《문예월간 (文藝月刊)》에는 전책임(全責任)을 가지고 계셨을 이 하윤(異河潤)형은 용아(龍兒)의 말년에 가까운 몇 해 어찌 그리도 멀어졌던고. 암만해도 이유를알 수 없었다. 하윤 형을 여러 번 만났어도 내 용기로는 툭 터놓고 물어 볼수도 없었다. 하기야 누구보다도 가까운 지용(芝溶) 형과도 《시문학(詩文 學)》 3호 편집을 싸들고 약간 내심 충돌이 있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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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편의 심경을 내가 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좀 그러나 말게끔 되었 었다. 말년(末年) 삼사 년 그 두 벗의 교분이 누구보다도 두터웁던 것을 아는 이는 안다. 그리고 맨나중으로 사귀인 이양하(李敭河) 씨, 씨의 「실행기(失幸記)」를 읽고 나는 벗의 말년도 행복스러웠음을 알 수 있었다. 벗의 이형(異兄)과 《문예월간(文藝月刊)》을 시작하여 그 첫호가 나왔을 제 나는 벗을 어찌나 공격 하였든고. 2, 3호 이렇게 나올 때마다 실로 내 공격 때문에 벗은 딱한 듯하였었다. 순정과 양심으로 시작한 《시문학》 바로 뒤에 영합(迎合)과 타협(妥協)이 보이는 편집 방침, 세상을 모르는 내가 벗을 공격하였음도 지당한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온 문학은 그래도 깨끗하고 당차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문예월간》은 문예지로서 2류 이하의 편집밖에 더 될 게 없다. 벗이 시조를 쓰시던 버릇과《문예월간》을 하던 것을 나는 참으로 좋이 여기지 않았었다. 가정 생활에 터가 잡힌 뒤 얼마 안 있어 경(輕)한 티푸스를 앓고 그 다음해 봄에는 참으로 올 것이 왔었다. 급보로 상경하니 감기로 누워 있는 것만 밖에 더 안 보이었으나 그 병(病) 의 선고를 받고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 벗이 병을 다스리는 태도는 무던히 침착하였었다. 원체 침착한 선비여서 침통은 할지언정 눈물은 흘리지를 않았었다. 내가 그의 눈물을 본 바 없고 다른 벗이 또한 본 바 없으리라. 중학생 때에 불란서 혁명을 그린 영화를 보고 자칭 로베스피엘을 뽐내고 고개짓을 야릇하게 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며 <단통>을 깔보던 <로베스피엘> 그 몸의 병은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다. 벗이 간신히 일어나서 늦은 봄 모시 다듬이 겹옷을 입고 경회루 못가에 떠도는 오리를 보면서 한나절을 즐기던 일이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하나이다. 경회루 밑에 앉은 순수 조선색(朝 鮮色)을 사진 찍느라고 저편 학생 단체서 야단들이었다. 집이나 옷이나 연당(蓮塘)이 무던히 어울리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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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 봄인가 지용(芝溶)과 셋이서 탑(塔)골 승방(僧房)에를 나갔다가 병석(病席)의 임 화(林和)를 찾은 일이 있다. 좌익(左翼)의 효장(曉將) 임 화를 우리 셋이서 찾았다니 좀 기이한 감이 없지도 않지마는 비록 우리가 시인 임 화(林和)를 손꼽는다 하더라도 그가 앓지 않고 있다면 찾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임 화(林和)가 우리의 시를 의식 문제(意識問題)로 경멸했 더라도 임 화(林和)의 시를 우리가 경멸할 아무 이유는 없었다. 《시문학》에 싣더라도 상극(相剋)될 아무 건더기도 없는 것이었다. 그 재인(才人) 임 화(林和)가 제3기를 앓는다 하지 않느냐. 생전에 만나 보자는 긴장된 마음! 그도 태연하였었다. 용아(龍兒)에 못지않게 태연하였었다. 폐(肺)를 앓는 사람은 다 그런 성싶었다. 그러나 지용(芝溶)과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더구나 임화(林和)가 초면(初面)이다. 처음이요 마지막인가 생각되어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 말들은 재기한다지만 그 형편에 곧이들리질 않았었 다. 박은 임 화(林和)가 재기할 것을 믿고 있었다. 자기도 일어났으니까, 그도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삼선평(三仙坪) 나오면서 시인은 모두 폐를 앓으니 지용(芝溶)도 그럴 생각 없느냐고 했더니 아직 시집(詩集) 한 권도 못 내놓았는데 가면 되느냐고 대답하여 당장에 그러면 시집부터 셋이서 다한 시기에 내기로 하고 산질(散秩)된 원고를 주워 모으자고 의논이 결정되 었었다. 그리하여 지용(芝溶), 영랑(永郞) 두 시집(詩集)이 먼저 용아(龍兒)의 손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었다. 그 중 『지용시집(芝溶詩集)』은 인기가 비등(沸騰)하였었고 그 시집 난 뒤의 조선시(朝鮮詩)는 획기적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영랑시집(永郞詩集)』이야 용아(龍兒)의 수고만 아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벗이 자기 시집 간행을 웬일로 그렇게 좀더 있다낸다는 것으로 고사(固辭)했던고,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벗이 본래 침통시편(沈痛詩篇)은 자꾸 써내시면서도 무슨 대자연(大自 然)에 끌리운다든지 취미에 기운다든지 그런 점은 조금도 볼 수 없었고 내가 너무 정적(情的)인 점을 벗은 오히려 경계(警戒)하였을 것이요, 여자에 담백(淡白)한 점은 특기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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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이던가 창경원 박물관 앞 늙은 모란이 활짝 피었을 즈음, 때마침 늦은 봄비가 내려서 넓죽넓죽한 모란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이 과연 비장 (悲壯)한 바 있으리라 하고 벗을 끌고 비를 무릅쓰고 쫓아갔었더니 벗은 그런 것쯤 대단찮이 여겼었다. 겨울의 고련근 열매〔旋檀[선단]〕가 담황색으로 대단히 깨끗하고 고담(枯淡)한 바 있어 벗을 끌고 내려왔더니 온종일 방안에서 책만 만지고 이튿날 집으로 돌아가 버렸었다. 그러니 벗과 앉아 이야기하면서는 풍경이 그리 필요하질 않았다. 방문을 닫고 앉았어도 기분은 수시로 만들어지곤 하였었다. 시(詩)를 위한 독서, 그 외에 로네클렐의 사진과 디트리히의 연기를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취미였으리라. 한사코 시집을안 내고 만 것도 한번 그의 성미로 미루어 보아 있음직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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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건강은 차차 좋아졌고 한번 그렇게 잘 이겨낸 뒤이고 보니 자타(自 他)가 꽤 방심도 했을법하다. 나 역시 박(朴)이 또 앓는다 하더라도 이젠 그리 대단치는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술도 조금씩 먹어 보고 긴 여행도 좀 하였고 실상 병의 시근(始根)이 몸에 남아 있었을 셈을 잡으면 좀 무리 타 할 만큼 2, 3년간 조신(操身)을 못 한 셈이었다. 그렇기 로발병(發病)을 자각한 지 겨우 3, 4일에 목이 그렇게 잠긴다는 것이 무슨 일이냐. 슬픈 일이 었다. 집에서 앓다가 세전병실(世專病室)로, 그 곳서 성모 병실(聖母病室)로 옮기었을 즈음 나는 올라왔었다. 목이 잠겨서 눈으로 맞이할 뿐 손을 쥐어 보니 얼음장이다. 내 차마 입이 벌어지질 않았었다. 필담(筆談)으로 의사를 통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가슴을 앓아도 치료만 잘 하면 상당한 수명을 잇는 것이 현대 의술(醫術) 아니던가. 벗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기도 모르고 곁에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불치권(不治圈)을 들어서 버리지 않았는 가. 그도 천명(天命)인가. 병(病)에 태연하던 벗이기로 모 박사(某 博士)가 전년 동기(前年 冬期)에 약간 경고(警告)를 하였다 하지 않는가. 병에 너무 태연한 벗의 기질도 원망스러웁다. 벗은 절망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우리는 그 점에 힘을 얻어 지구전(持久戰)을 할 셈으로 병실을 자택으로 옮겨 보았다. 그러나, 오! 그러나 옮긴 지 10여일 되던 날 오후 벗은 난 후 처음 약한 소리를 토하쟎는가. 잠긴 목소리로 「암만해도 도리가 없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었다. 정말 별도리가 없는 것 같아서 벗의 오랜 투병사(鬪病 史)에 일찍 토하지 않던 그 약한 소리는 확실히 불길한 예감을 아니 줄 수 없었다. 친우들께의 영결(永訣)의 글을 부인(夫人)께 대필(代筆)시키고 나에겐 바로 벗이 손수 좀 자세히 쓸 말이 있노라고 하여 날을 미루고 있다가 이루지 못하였었다니 더 안타까왔다. 40만 넘기면 우리가 수명(壽命)에 불평은 할 것이 없다고 하였거니 나머지 5년을 왜 더 못 채우고 가 버리었느 냐? 운명(殞命) 5분전까지 의식이 명료하셨다는 벗이 부모와 처자는 어찌 잊고 갔을까, 시는 또 어찌 잊고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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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조광]》 5권 13호 1939년 12월)
【원문】인간(人間) 박용철(朴龍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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