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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철(朴龍喆)과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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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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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龍喆[박용철]과 나
 
 
 

1. 朴龍喆[박용철] 全集[전집] 1권 後記[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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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철(龍喆)이, 용철이 다정한 이름이다. 스무 해를 두고 내 입에서 그만큼 많이 불려진 이름도 둘을 더 꼽아 셀 수 없을 것 같다. 20년 후 처음으로 벗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여 나는 여태껏 가장 허물없고 다정하고 친근하고 미더운 이름으로 용철(龍喆)이, 용철이, 불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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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가 영영 가 버리고 만 오늘 나는 그대로 그 이름을 자꾸 불러 보아 오히려 더 친근하고 다정하여 혓바닥에 이상한 미각(味覺)까지 생겨나는 것을 깨닫나니 아마 내 평생을 두고도 그러 아니치 못하리로다. 용철이, 용철이, 서로 이역(異域) 하늘 밑에 서툰 옷들을 입고 손을 잡아 아는 체하던 바로 그때부터 가장 가깝고 친한 사람이 되었었고 한솥에 밥을 먹고 한이불속에 잠을 자고 한책을 둘이 펴던 시절이 무던히 길었었나니 실상 벗은 그때 아직 문학(文學)이니 시(詩)니 생각도 않던 때 내 공연히 벗을 끌어들여서 글을 맛붙이게 하고 글재주를 찾아내려 하였던 것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일생에 큰 죄를 지어논 듯싶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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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 학원(學園)의 수재(秀才)로 이름이 높고 특히 수리(數理)의 천재로 교사의 칭찬이 자자하던 때 나는 작은 악마와도 같이 그를 꼬여내어서는 들판으로 산길로 끝없이 헤매이었던 것이다. 친한 벗이 끌어당기면 하는 수도 없었던가, 강남(江南)도 가지 않았느냐? 언덕에 송아지는 어미 팔아서 동무 사달라 한다지마는 내 벗 용철(龍喆)이가 수학(數學)을 팔아서 동무를 사놓고 보니 아무짝에도 못쓸 놈이었던 것이다.“윤식(允植)이가 나를 오입(誤入)을 시켰다”는 말버릇을 최근까지 장난삼아 한 적이 있으니 과연이냐, 벗아 문학은 벗의 제2의적(第二義的)인 인생 부문(人生部門)으로 누리어도 좋았던 것일까? 더구나 벗이 이리도 일찍이 가버리시니 긴 평생을 두고 걸어서 대성을 꿈꾸던 그대와 나의 한(恨) 중의 한이 아닐 수 없도다. 벗과 서로 시골살이를 하여 백여 리 길을 새에 두고 가고 오고 하던 시절, 벗은 시(詩)를 비로소 씹어 맛보시더니 불과 몇 날에 천균명편(千鈞名篇)을 툭툭 쏟아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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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문학은 그 다음이라 치더라도 벗의 시(詩)는 완전히 그 고향살이 30년새에 이룬 것이다. 일가(一家)를 이루어 세상에 나서기까지 벗의 유일한 글벗이었던 나는 벗의 시업 수련(詩業修練)의 도정(道程)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백여 통의 편지 뭉치를 ── 연서(戀書)같이 보배같이 아끼고 간직해 온 뭉치 ── 벗이 살아 계실 때나 가신 오늘도 가끔 풀어서 읽어 보아 아기자기한 기쁨을 맛보는 버릇이 있지마는 실로 한 시인이 커날 제 그이만큼 부지런하고 애쓰신 이도 있는가 하여 새삼스레 놀라는 것이다. 스스로 내놓으신 명편 가작(名篇佳作)을 그는 매양 사양하고 부족히 여기던가 하면 남의 시(詩) 한 편을 붙들고 그렇게 샅샅이 고비고비 뒤집고 파들어가서 완전히 알아버리고 맛보아 버리던 천재형(天才型) 머리속에는 이 세상의 이른바 명시(名詩)가 거의 다 한번에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던 것이요, 그리하여 그의 시의 수준은 속에서 크고 남이 알 바 아니었으니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웅편(雄篇)이 쏟아져 나옴도 괴이치 않은 노릇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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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시원(詩苑)의 명화(明花)요, 또 유일한 시론가(詩論家)로의 지위를 점(占)하여 그만한 담당(擔當)을 쾌히 해내려 온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옛날의 수학(數學)을 아주 팔아 없앴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내 속죄도 좀은 되었다 할까. 20전에 어느 자리에서 문학을 경멸해 버린 일이 있었던 그 때가 바로 얼마 전 10년을 더 살자, 시를 위해 10년을 더 살자, 하지 않았던가. 음향에 귀가 어둡다고 못마땅해 하던 벗이 넉넉히 시구(詩句)의 음향적 연락(連絡)을 한번 캐어 보고 다 알지 않았던가. 자신 비정서적(非情緖的)임을 한탄하시면서 어쩌면 그리도 넉넉히 지용(芝溶)의 「유리창」을 샅샅이 캐고 해석할 수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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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벗이 가신 뒤 또 그만한 일을 우리를 위해 해 주실 이 어디 있단 말이냐. 오늘 우리의 시원(詩苑)은 한 시인의 죽음으로 두 가지의 크나큰 손실을 입은 바 되니 어찌 통탄 아니하랴. 혹은 모른다. 벗은 그 특이한 천재가 오히려 그의 창작을 괴로웁게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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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그의「떠나가는 배」와「밤 기차(汽車)」두 편만 읽을 수 있더라도 그런 재앙은 애당초에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어느 시 한 편이고 이른바 단명적(短命的)인 구(句)가 아닌 것이 없었지마는 그리하여 오히려 시로서 아름다웠던가! 이 두 편 시는 시인 용철을 말할 때뿐 아니라 통틀어 우리 서정시를 말할 때 반드시 논의되고 최고의 찬사를 바쳐야 될 걸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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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의 전기(傳記)를 쓰는 바 아니매 이 두 편이 나오던 시절 시인이 겪은 고민이며 내지 생리까지를 말하기에는 나로서는 첫째 눈물이 앞서 못할 일이니 그만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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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 일이로다. 우리는 서울로 지용(芝溶)을 만나러 왔었다. 그렇다, 순전히 지용을 만나러 왔었다. 지용을 만나서 셋이서 일어서면 우리 서정시(叙情詩)의 앞길도 찬란한 꽃을 피게 되리라는 대망(大望)! 썩 가상(嘉賞)치 않았느뇨. 그때의 지용은 벗 용철과 같이 살도 변변히 찌질 못하고 한방에 앉아 있으면 그 마른 품으로 보든지 재조(才操)가 넘쳐 뵈는 점으로 보든지 과연 천하의 호적수(好敵手)로 여겨지던 때이다.(그 뒤 지용은 뚱뚱해지고 용철 벗은 더 야위어만 갔다.) 물론 지용과는 둘이 다 초면(初面), 그 초면이 하루에 1년, 열흘에 10년의 의(誼)는 생겼던 것이다. 그 뒤의 양우(兩友)가 얼마나 우리 시를 위하여 애쓰신 것은 다른 벗들이 다 아시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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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역(莫逆) 용철을 생각할 때 그 천생(天生) 포류(蒲柳)의 질(質)임을 이기고 어쩌면 그렇게도 굳세게 시(詩)에의 신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 부러워하며 진실한 시의 사도(使徒)이니라 여겨 왔었다. 내 가끔 자기(自己) 시(詩)에 실망하여 지치려 할 때 벗은 과한 격려로 붙들어 주고 내 자유시의 이상(理想)으로 한 시는 한 시형(詩形)을 가질 뿐이라는 엄연한 제약을 세우고 안 씌어진 시형(詩形)을 이루기 전의 시, 오직 꿈인 양 서리는 시를 꿈꾸고 진정 시인은 시를 쓸 수 없어도 좋으리라고까지 떠들지 않았던가. 벗은 내 허망된 소리에 열 번 지지를 표명하여 주셨으니 그리함이 나를 건져 주는 좋은 방법도 되었던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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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한솥밥, 한글방 친구가 나이 먹어 가며 가장 가까운 시우(詩友)가 되고 보니 나는 이에서 더 행복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완전히 박행(薄幸)한 사람이로다. 아! 이 한(恨)이 크도다. 그 아침에 춘장(椿丈)을 뵈옵고 기쓰고 침착하려던 것이 끝내 흐느껴져서 울음이 터지고 벗을 땅 속에 깊이 묻고 밤중에 산길을 쳐서 내려오던 때 몹시 쏟아지는 눈물에 발을 헛딛던 일을 생각하면 벗이 가신 지 겨우 한철이 지난 오늘 이러니저러니 차분한 소리를 쓰고 있는 것이 내 자신 무척 우습고 지극히 천(賤)한 노릇같이 여겨진다. 일찍 처(妻)를 여의어 보고 아들도 놓쳐 보고 엄마도 마저 보낸 본 나로서는 중(重)한 사람의 죽음을 거의 겪어 본 셈이지마는 내가 가장 힘으로 믿던 벗의 죽음이라 아무리 운명이라 치더라도 너무 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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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永訣式)이 끝난 뒤 지용과 단둘이 나중에 남았을 때의 호젓함. 남은 둘의 심사(心思)야 누구나 알 법도 하지마는“이번은 거꾸로 가지 말고 내 먼저 갈걸, 처음부터 거꾸로니 내 먼저 가지”이런 문답(問答)을 한 일이 있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다. 벗을 불렀자, 대답 없는 세상 아니냐. 온갖 다 그릇된 세상 아니냐. 벗이 이제 시왕(詩王)이 아니시니 또 누가“훈공(勳功)에 의하여 너를 원로(元老)를 봉(封)하리”요. 슬픈 노릇이다. 아들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어버이가 계시고 그 밑에 현부인(賢夫人)이 계시도다. 벗아, 눈을 감으라. 세 아들은 삼태성(三太星)같이 빛나고 있나니 생전에 지용과 내 그다지도 권하여도 종시 거절하던 그대의 작품집이 이제는 유고집(遺稿集)으로 누구의 거절도 없이 우리의 손으로 째여나오도다. 그대 그 몸 해가지고 무던히 많이 써 놓았던 것을 누가 알았으랴. 가장 가까운 부인도 놀라시지 않느냐. 캘린더 종이조각에 끄적여 둔 것을 주워 모아도 일품(逸品)이요, 휴지통에서 건져낸 것도 명편이로다. 태서명시(泰西名詩)의 역출(譯出)한 분량을 보고 누가 안 놀랄 것이냐. 아무튼 그대는 너무도 몸을 학대 혹사하여 아낄 줄을 몰랐느니라. 너무도 일밖에 몰랐느니라. 아! 그대의 가심을 서러워하고 통곡하고 말 것인가? 나는 그대 가심을 원망까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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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무인] 10월 벗의 전집(全集)이 나는 날 영랑(永郞) 씀)
 
 
 

2. 朴龍喆[박용철] 全集[전집] 2권 後記[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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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大正) 12년 용아(龍兒)의 동경(東京) 생활이 진재(震災)로 하여 중단케 됨에 그는 자랑스럽던 외어(外語)의 멋진 휘장도 떼어 버리고 서울도 벽촌(僻村) 냉동여사(冷洞旅舍)에 몸을 붙였었다. 연전(延專)을 다니는데 그 때 용아의 말로 하면 위당(爲堂)과 일성(一星) 고(故) 이관용(李灌鎔) 선생의 시간이 좀 재미난다고 시골 있는 나에게 더러 글월이 있곤 했었다. 위당께 시조(時調)를, 일성께 독일어를 자택에 가서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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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요 친우인 고(故) 염형우(廉亨雨)의 소개로 고(故) 윤심덕(尹心悳) 여사를 알게 되고 피아노의 김영환(金永換) 씨도 알게 되었는데 더러 내가 만나려고 냉동 가면 김씨댁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때가 많았다. 윤씨와의 우의(友誼)가 상당히 깊었던 것은 윤씨가 그리 된 뒤로 가끔 윤씨의 가족들을 찾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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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延傳)의 학우로는 염군(廉君) 외에 허연(許然) 씨, 노진박(盧鎭璞) 씨들도 기억이 된다. 이듬해 대정(大正) 13년부터는 학교래야 별로 가는 것 같지 않았고 내가 동경(東京)서 방랑하고 있던 터이라 나의 감상주의(感傷主義)와 문약(文弱)을 비난하는 강경한 글월과 금강산(金剛山) 여행을 처음하고는 그 풍화(風化)된 산석(山石)을 자기는 무슨 미화(美化)나 시화(詩化)하는 사람이 아니요, 헤겔이 별 총총한 밤하늘을 외려 더럽게 보던 것같이 금강산도 냉정히 보고 왔노라고 길게 써 보내온 일이 있었다. 나로서는 용아가 문학을 읽어 시, 시조까지 어느 정도를 이해하는 처지임을 아는지라 그가 헤겔의 후생(後生)이 되는 것은 모르되 단순한 이과계통(理科系統)의 학도가 되어 버리기를 원치 않았었다. 더구나 그의 재조(才操)가 아무것이나 하면 되는 사람임에서랴. 연말에 서울 와서 같이 하향하였는데 어쩐 일인지 용아는 나만 만나면 문학에로 문학에로 물들어 간다고 이놈아 나를 오입(誤入)시키지 말라고 그때부터 하던 말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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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大正) 14년 봄, 일찍 상경하여서는 물론 학교는 집어치웠는데 이 사람 냉동 집에서 참으로 독학(獨學)을 시작하였다. 문학서(文學書)의 사독영어학독일어(肆讀英語學獨逸語) 공부. 실로 무서운 근공(勤工)이다. 여름까지 유경(留京)코는 하향하였지마는 벌서 단기간이라고는 하나 그때 초잡은 공부가 익(翌) 십오 년 또 다음해 봄까지 집에서 그대로 계속하였고 얻은 것이 위병(胃病)이었다. 그래서 삼방(三防)을 갔다. 삼방서 화전(和田)이라는 미인을 만났는데 만일 그가 일찍 단념치 않았던들 우리 용아는 과연 무슨 방책이 있었을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미소를 금치 못한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畫伯)도 삼방서 알아진 이요, 그 뒤로 여러 해 친교가 있었다. 그 해 가을에 영랑과 금강산에 갔는데 위병(胃病)이 재발하여 급거 귀경(急遽歸京)해 버렸지마는 그 위병 그놈이 용아를 요절(夭折)케 한 원인임에 틀림없다. 서울 와서 평동여사(平洞旅舍)에서 영랑과 한방살이를 했었는데 매일같이 본정 이견옥(本町二見屋)이라는 다점(茶店)에 다니기와 가끔 술마시고 종로 대로를 떠들고 다녀도 거리낄 것 없었던 시대인데 한편 주의자(主義者)의 접촉이 심하기도 했지마는 용아의 문청(文靑) 시대는 확실히 그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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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하향하여 그대로 꼭 들어박혀 1년 반 용아의 시낭(詩囊)은 충실하여졌었다. 그 동안에 산홍(山紅)이란 기생과 제명(除名)을 날린 일이 있었지마는 대단치 않았었고 오히려 용아의 대표작인 시품(詩品)은 전부 쏟아져 나왔었다. 프로 시(詩)니 무산문학(無產文學)이니 세상은 시끄럽고 하던 그때 말하자면 조선시의 정통을 찾고 발전을 바라야 신흥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까지에라는 이상(理想)이 순수시지(純粹詩誌)를 계획케 하였던 것이니 소화(昭和) 4년 추(秋)에 상경하여 지용(芝溶)과 합작하고 창간호 나올 임시에 조선적 대사건(大事件)이 폭발하여 중지하고 익춘(翌春)에 창간호는 나왔었다. 옥천동(玉川洞)에 자취집을 정하고 현(現) 미망인(未亡人) 매(妹) 봉자(鳳子) 씨 등이 지어 주는 밥에 몸소 찬물을 달고 아궁에 불을 넣고 단순히 생활 그것만도 유쾌하였을 것이다. 양심적인 시우(詩友)는 찬동(贊同)하여 모이고《시문학(詩文學)》은 지금까지의 어느 책보다 깨끗이 무게 있게 만들어져 나오고 용아는 평생 처음 부딪치는 격정에 자기 스스로 축복됨을 느꼈을 것이다. 옥천동 시대는 짧은 용아 일대(一代)에 특기해야 될 시대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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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친우 염군이 작고(作故)하여 용아는 크게 슬퍼하였다. 가을에 견지동(堅志洞)으로 옮겼는데《시문학》은 그때에 2호밖에 못냈었다. 원고난(原稿難)이었다. 12인 왕성히 시작(詩作)을 발표한단 개인지(個人誌)를 바랐을 바 아니고 의미도 없는 노릇이다. 도시 그때 정세의 탓도 있지마는 동인(同人)들이 편집의 수준을 너무 높여 놓은 잘못도 있다 할 수 있는 동인의 누구나 다 아직 순진한 처녀들이었음이 죄라 하면 죄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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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永郞記[영랑기])
【원문】박용철(朴龍喆)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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