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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환기와 작가 - 문단과 신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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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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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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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과 신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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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곳 저곳서 전환기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대체 전환기란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현대에 대해서 말해지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가령 이원조 씨는 「문학의 영원성과 시사성」가운데서 “전환기란 현대에서 생각할 때는 현대의 종언이지마는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박치우 씨는 「동아협동체론의 일 성찰」에서 “새로 세워져야 할 신질서는 그것이 글자 그대로의 신질서 일 한, 당연히 구질서와는 질적으로 달라야 할 것이며, 또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질서는 모름지기 구질서인 시민사회에 대한 어떤 의미의 변혁 내지 수정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다면 종래와 같은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는 부득이 어떤 종류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받아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여 신질서와 구질서 간에서 전환기를 이해하고 있다. 일찍이는 소화(昭和) 14년(1939) 2월, 조선일보 지상에서 서인식 씨가 지나사변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 일본의 세계적 사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현대의 과제」라는 논문 중에서 그것을 동양의 서양에서의 해방과 캐피탈리즘의 지양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던 것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남아 있다. 서씨는 다시 요즘에 발표한 「문학과 윤리」의 논고 중에서도 현대를 ‘짓테’와 ‘게뮤트’의 분리상극의 시대로 논증하면서 전환기 작가의 부재의식의 극복에 대해서 시사를 던지려 하였다. 요컨대 씨 등은 씨 등의 배후와 안전에 각각 하나씩의 시대를 두고, 이 두 개의 시대에 끼어 있는 시기를 전환기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씨 등은 일직이 오귀스트 콩트가 하나를 부정적 시기라 보고, 또 하나를 긍정적 시기라고 보면서, 부정되어야 할 시기로부터 긍정되어야 할 시기로 전환이 수행되는 시기를 전환기라고 이름한 것과 결코 딴 방도에 의하여 현대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질서니 신질서니, 부정이니 긍정이니, 파괴니 건설이니 하는 것이 모두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현대의 과도기적 성격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이해하기에 곤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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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환기의 선박은 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싣고 흘러가는 것일까. 그리고 전환기의 극복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전환기를 가운데로 하여 우리가 서 있는 차안은 여러 사람들의 분석에 틀림없다 하여도, 차안으로부터 건너 뛰어갈 피안의 구상이란 어떠한 것일까. - 이러한 모든 것은 오래 동안 많은 사람에 의하여 기도되었으나 모두 명확성을 띤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명백히 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전환기가 가지고 있는 몇 개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가장 중심적인 한두 가지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해 보고, 이러한 약간의 분석으로부터 이 시기에 처할 작가의 임무를 약술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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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야기하여야 할 위험성은 전환기라는 것을 극히 짧은 시간으로 생각하려는 의견이다. 하기야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본다면 적은 한 토막의 기간임에 틀림은 없으나, 그것은 결코 2, 3년이라든가 4, 5년으로 간주할 만큼 짧다란 순간은 아닌 것이다. 콩트가 전환기라고 이름한 것이 반드시 지금과 같은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 하여도 서양의 지성이 구라파 문화의 황혼에 대해서 운위하여 온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절망적인 신음을 되풀이하여 온 것이 사실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어진다. 우리 자신의 기억으로 하여도, 10년 전에 벌써 우리는 전환기라는 것을 지금과는 다른 각도에서라고 하여도 치성(熾盛)히 불리워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세계를 통일할 하나의 구상이 나타나서 세계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시기까지를 생각해 본다면, 혹은 4, 5년을 가지고 종식될 줄로 믿었던 이 전환기가 한 사람의 생애 같은 것은 게눈 감추듯이 집어삼킬는지도 알 수 없다. 과거의 모든 인류의 역사가, 하나의 전환기를 넘어서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을 결코 공연한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엄벙뚱땅하는 동안에 이 시기를 넘어가면 모든 것이 기대했다던 듯이 대령해 있다가 우리를 얌전히 맞아주리라고 생각하는 의견처럼 전환기의 평가를 그르치는 자는 없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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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위험성은, 전환기를 치르고 부정에서 긍정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역사의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가만히 팔을 걷고 앉아 있어도 그러한 시대에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지극히 태평스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신주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낙관주의의 하나의 면모인데, 이러한 사람은 갸륵한 신주만을 모셔놓고 엄벙뚱땅 이 시기를 넘어만서면 역사의 섭리는 스스로 , 문제를 해결하여 현대인을 차안에서 피안으로 인도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관점을 운위하면서 기실은 역사적 입장을 거부하고 있는 이론임에 틀림없다. 역사는 반드시 동서가 한날 한시에, 그리고 각 나라와 각 민족이 같은 보조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필연성은 실로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능성을 높여서 필연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자에게 한하여, 역사의 섭리는 먼저 피안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필연성을 신주처럼 모시고 있는 불민(不敏)하고 나태(懶怠)한 종족은 가능성을 필연성에까지 높이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에서 후퇴하여 영영 세계사에서 탈락해 버리는 운명을 지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전환기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은 스스로 솟아나려고 애쓰는 자에게만 구원을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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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을 지적하고 경고하고 분석하는 것이 지성의 하는 일이었다면, 피안을 구상하는 것도, 그리고 그 곳까지 이르는 전환기의 극복을 발견하는 것도 또한 지성의 임무라고 생각되어진다. 지성은 안온(安穩)할 때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혼미할 때에 활동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을 타서 비상하기 비롯한다고 한다. 우리 평단에서 지성론이 한참 왕성할 때에, 혹자는 지성의 한계성에 대하여 한탄하였고, 혹자는 사실 앞에 부서지는 지성의 무력에 대해서 술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은 시민사회의 관습 속에서 굳어져버린 지성일 것이다. 중세에서 인간을 구출하여 근대에 인도한 것이 지성이라 하여도, 르네상스의 인간은 현대에 와서는 그의 자동성을 잃어버리고 전혀 부패한 개인주의의 시멘트 속에 굳어져버리고 만 것을 어찌하랴.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지성도 한가지로 시민사회의 관습의 시멘트 속에 꽉 들어서 버리고 만 것이다. 지성은 다시금 개조되어야 한다. 개조된 지성만이 전환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미래를 상망(想望)하여 피안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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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성이 할 수 있고, 또 하는 일은 주장 어떠한 부면일 것일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문화가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란 무엇일까. 간과(干戈)의 소리가 지구 위를 뒤덮을 때에 무슨 하가(何暇)에 문화를 운위할 수 있으랴. 그러나 고요히 돌아보건대 승리를 영속화하는 것은 언제나 문화가 아니었을까. 20여 년 전에 불란서와 영길리(英吉利- 영국, 편자)는 독일에 승리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승리가 영속할 것을 믿었고 베르사이유 체제는 그것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과 20여 년에 그것은 하등 영구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불란서에게 있어서는 좀 더 뼈아픈 패배한 것을 인식치 않으면 아니 되었다. 독일이 만약 금일의 승리를 영속시키려면 전 구라파를 포섭할 수 있는 문화이념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는 한, 금일의 승리가 언제 다시 협위(脅威) 밑에서 경경(競競)하게 될는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나 아닐까. 나치즘은 혈통 이론에 의한 전체주의적 문화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벌써 그것은 체코 합병이래 다른 국가와 민족을 포섭할 수 없음으로써이다. 그는 구라파의 각 민족과 국가를 포섭할 만한 문화이념을 발견하지 않고는 금일의 그들의 승리를 확보할 것이 없을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그러나 만약 어떤 민족이 있어 전세계의 제패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전세계를 한데 포섭할 만한 문화이념을 발견치 않고는 가능치 못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피안을 구상하고 그 곳까지 이르는 길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지성의 임무라고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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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제트의 『현대의 과제』를 읽으면 고단(高端)의 교양에 의하여 연마된 지력들이 새로운 건설적, 조직적인 문화 의욕의 담당자로서 서양을 몰락으로부터 건져내려는 구출 작업을 일으키고 있는 상모를 규지(窺知)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유행한 방자망 크레뮤의 『불안과 재건』과 같이 소극적인 기록만은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여러 가지의 문화 형태의 파노라마를 체관(諦觀)하고, 기록하고, 회의하고, 멸망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 버리려는,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고, 인간의 이해력의 무한한 신전성(伸展性) 속에 생활감정의 신선한 자발성을 결성시키려는 저윽이 적극적인 의도에 의하여 영위되어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해서(該書)의 역자인 지도중신(池島重信) 씨의 서언대로 하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 앞에 서서 근원적인 질문을 개시하고 있다는 자각”에 의하여 관철된 노력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들이 꾀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날의 상대주의와 유리(唯理) 주의를 한가지로 거부하고 생의 평가를 통하여 생의 가치를 설정하자는 이러한 철리가 주장한 것은, 문화와 자발적 생과의 결합이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서양 문화의 지도이념이었던 순수이성이 여지없이 궁경(窮境)에 빠져 버려서 금일의 서양을 몰락에서 구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로 금일의 몰락의 원인의 한 가닥이 순수이성, 그 자체 속에 내재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거니와 오르테가와 , 같이 그것과 생의 입장을 결합시키는 데 의하여 서양 문화의 이념이 갱생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약간의 의문을 품지않을 수 없었다. 가령 오르테가가 생의 평가와 생의 가치를 거쳐서 신시대의 특징을 발견한 뒤 새로운 계단에 도달한 것은 입장의 설이었다. “문화의 제가치는 현재 사멸해버린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전망 가운데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자마자, 그 전체의 계단 순위는 변화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생가치를 현출시키는 것이었으나, 그가 입장의 설에 도달한 것은 하나의 전망주의였음에 지나지 않았다. 에른스트 로버트 쿠르티우스도 이러한 관점에서면, 19세기의 정신상의 많은 현상이 새로운 각광을 쏘일 수 있을 것이지만, 에머슨의 보편주의, 상트 뵈브의 상대주의, 니체의 심리학의 가운데 나타나 있던 이러한 사유태도의 맹아를 관계시켜서, 가능성과 귀결을 전망주의 속에 내포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조차도 받을 수는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었다.(「오르테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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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한 것은 어찌되었건, 서양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인 근세적 이념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오르케가는 의연히 인류 발전의 궤도에 대한 하나의 신앙만은 그대로 남겨 가지고 있었다. 그 신앙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인류 발전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으로, 이 궤도의 선두를 걷고 있는 것은 구라파의 제 민족이라는 신앙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흡사히 위로부터 밑으로 흐르는 한 줄기의 커다란 강물인 것이다. 구라파의 제 민족은 맨 앞에 있고, 그 다음 아세아는 몇 백년 뒤늦어서 그들이 흘러내린 뒤를 쫓아서 흘러내리고 있고, 이 아세아의 뒤에 다시 미개의 제 민족이 따라온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다. 오르테가도 「두 개의 이로니」속에서 문화와 자발적 생의 분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인도나 지나에 있어서는 여하한 시대에도 학문과 도덕이 자주적인 힘을 가지고 수립되어진 때는 없고 생활을 지배한 적도 없다. 동양인의 사유는 여하한 계단에 있어도, 일찍이 주관으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고, 또 예하면 구라파인의 의식에 있는 물리적 법칙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저 명징한 객관성을 획득해 본 적이 없다. 동양의 생이 서양의 그것보다도 완전하다고 보는 견지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동양의 문화는 확실히 우리들의 그것보다 저급한 문화다. 그것은 이 말 위에 우리들이 부여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들 처럼 결정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동양을 서양의 뒤에 놓았다. 다시 그는 “아세아의 역사를 보면 우리들은 흡사히 식물의,즉 운명과 싸우는 데 충분할 만한 탄력을 결하는 자동력(自動力)이 없는 존재의 식물의 성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우리 동양 사람으로서는 저윽이 비위가 거슬리는 소리를 하고 있다. 전환기를 극복할 만한 이념과 새로운 피안의 구상을 실재화하는 민족이 서양에서 생길 것인가, 동양에서 나타날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 하여도, 서양의 지성들이 의연히 세계를 구할 민족으로 스스로를 처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동야의 지성이 명심해 둘 일이라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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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서양의 지성들에 대항하여 동양의 지성들이 반성을 거쳐서 건설과 조직에 자(資)하려는 기도 밑에 비범한 노력을 보인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최근 암파(岩波) 서점 『사상(思想)』지의 ‘동양과 서양’특집호나 ‘구주 문명의 장래’특집호를 일독하여도 그러한 것을 규지할 수가 있었다. 그의 전형적인 것을 우리는 고산암남(高山岩男)씨의 『세계사의 이념』에서도 볼 수 있을까 한다. 씨는 우선 세계사의 기초 이념의 확립에 있어, 구라파 사학이 건설한 일원사관의 거부를 선언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물줄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서양 사학의 문화적 신앙을 깨뜨려버리고, 세계의 역사를 다원사관에 있어서 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씨에 있어서는 동양은 서양의 뒷물을 따라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은 동양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다원사관의 입장에 서서 현대의 세계사의 문화이념을 세워보자는 것이다. 고산 씨의 소책자인 『문화유형학』을 읽어도 이러한 의도는 간취할 수 잇었다. 세계 각 민족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그의 유형을 발견하려는 기도는 확실히, 학문이라면 서양 학문의 관념밖에 모르는 일원사관의 입장에서 떠나서, 세계 각 민족의 역사를 떠나서, 세계 각 민족의 역사를 다원사관에 의하여 성립시키려는 동양적 자각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진다. 서양의 몰락을 서양 문화의 유형 속에서 구명하고 동양 문화의 장래에 새로운 빛을 던지려 한 것은 모두 이러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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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서양이라는 문화적 개념이 가지는 것과 동일한 통일성을 동양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서양은 하나의 통일된 문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중세가 그것이다. 르네상스 이래 중세를 암혹이라고 말하여 오지마는, 그것은 서양을 기독교 문화에 의하여 통일한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사의 한 토막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세와 같은 통일된 서양의 문학적 개념을 동양은 일찍이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고야마 씨 외에 다른 논자들은 모두 이것을 인정하고, 이러한 전제에 서서 동양의 지성이 가져야 할 전환기 사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 문화의 유형을 탐구하는 분들이 일고할 만한 일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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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필자가 빈약한 독서를 통하여 더듬어 볼 수 있는 전환기에 대한 지극히 초라한 성찰의 일단이다. 전환기에 처한 작가의 임무와 태도를 나는 여기서부터 인출해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회에 시험해 본 소설의 장래에 대한 토구도 또한 이러한 각도에서였다. 나는 「소설의 운명」의 졸고 중에서, 장편소설을 시민사회의 서사시라고 보면서, 시민사회의 발생과 발전과 이퇴(裏退)와 상응시켜서 장편소설의 발전의 제 계단을 더듬어 본 뒤에, 시민사회가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한 현대에 있어서는, 소설이 전환기의 극복과 피안의 구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리얼리즘에 의해서만 열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하여 보았다. 생각건대 소설이 전환기의 극복에 참여하여 새로운 피안의 발견에 협력하여야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나, 문학이 이 길을 닦아나가는 걸음걸이는 다른 문화와 스스로 다를 것으로, 그것은 언제나 전환기가 내포하고 있는 가지각색의 생활감정의 관찰 속에서만 발전과 비약의 계기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환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과 생활과 성격을 그리는 길을 피하고, 헛되이 천박한 관념의 세계를 더듬는다든가, 공상의 가운데 날아가 버린다든가 하여서는, 문학은 위대한 창조품을 들고서 새로운 질서 건설에 공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나 사조에 대한 편승심리나 전환기에 대한 피상적인 번역심리야말로 진정한 문학이 삼가야 할 가장 위험한 태도일까 한다. 진지한 리얼리즘에 의하여서만 소설의 새로운 양식은 획득되어질 수 있을 것이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남겨 놓은 부패한 개인의식과 왜곡된 인간성의 소탕을 거쳐서 완미(完美)한 인간성을 다시금 찾는 날도 맞이해 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시일 동안의 과정이 아님은, 전환기가 결코 짧은 시일 내에 극복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소설이 새로운 양식을 획득하는 길은 사상이 피안을 발견하고 구상하는 길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이 만약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천명 청산하여야 할 때이라면, 문학은 그것에 의하여 형성된 사람의 의식 상황과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급무가 될 것이다. 단지 문학은 그것을 논리나 분석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이루어 놓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인물의 행동심리의 관찰을 거쳐서 그것을 형성화해 놓는 데 의하여 동일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 스스로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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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41년 1월호)
【원문】전환기와 작가 - 문단과 신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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