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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행(間島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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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1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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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 島 行[간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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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滿洲國) 간도성(間島省) 홍보위원회의 초빙으로 간도지방의 조선인 개척상황 기타를 시찰하기 위하여 문인협회의 우리 일행(李無影[이무영]ㆍ牧洋[목양]ㆍ鄭人澤[정인택]ㆍ鄭飛石[정비석]ㆍ필자) 5인이 경성을 떠나기는 지나간 12월 세말(歲末)이 임박한 26일이었다. 경일(京日)의 사전(寺田) 그외 몇몇 우인의 전송을 받으면서 오후 3시 55분발 목단강(牧丹江)행 급행의 중등차(中等車)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일로(一路) 북으로 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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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정인택 이외에 네 사람은 다같이 간도가 초행이었다. 재래(在來) 지리적으로나 마음으로나 가까우면서도 먼 그 간도를 처음 비로소 보러 가는 우리는 흡사 중학 시절에 수학여행을 가던 것처럼이나 기분이 달뜸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행보가 단순히 사적인 여행이 아니요, 가서 잘 보고 잘 인식하여야 하며 돌아와서는 조선에다 ──아직도 간도에서 온 손님의 명함을 받아들고 ‘아시아 성(省)?’ 하면서 고개를 꺄웃하더라는 관리가 있다는 조선에다 책임있이 소개를 하여야 하는 중대 사명이 있음을 생각하고 어깨가 무긋함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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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車中)에서 목양을 단장으로 옹립……사람 좋은 씨는 여럿의 억지와 우김을 당해내지 못해 할 수 없이 그 성가신 소임을 떠맡지 아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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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는 27일 정오경 상삼봉(上三峰)에서 머무르는 동안 연길(延吉)의 매신(每新) 간도(間島) 특파원 최문국(崔文國) 구우(舊友)가 찻간으로 풀쩍 뛰어들어 불기(不期)의 탄성과 함께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씨는 이번에 간도성 당국과 조선문인협회 사이에 서서 수고로이 이번 거사를 알선한 이로 겸사겸사하여 혹한을 무릅쓰고 우리 일행을 맞이하러 나와 준 것이었다. 오후 1시 남양역(南陽驛)으로 좇아 조그마한 개천(두만강 상류)을 찻간에 앉은 채 건너는 길로 국경을 통과 도문역(圖們驛) 포옴의 세관 검사소에다 만주국에의 제일보를 인(印)쳤다. 차시간이 많이 있어 도문의 거리를 보러 나섰다. 우선 만인(滿人)의 마차가 기물(奇物)이요 참을 지나 살이 아픈 추위도 처음 맛보는 만주 맛이라면 싫지는 아니하였다. 도문시가는 아직 건설도상이라 그렇겠지만 턱없이 넓은 바닥에 가 띄엄띄엄 많은 건물들이 한 무더기씩 들앉아 있어 퍽 어설픈 인상이었다. 판국(版局)은 굉장히 커서 이대로 시가가 짜인다면 우리 경성 따위의 몇벌 형님일 법…… 만주의 건설이 엄청나게 규모 큰 출발을 한다고 들었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늑장만 부리고 섰던 기차가 어찌 생각하고 출발을 하여주어 밤 일곱시에 아무려나 연길현에 내릴 수가 있었다. 추운 마차를 달려 숙사(宿舍) 야마도 호텔로 향하던 도중에서 간도성 홍보고장 모리씨(毛利氏)를 만났다. 이 모리씨의 번안(翻案)과 담당으로 간도성이 우리를 부른 것이요, 따라서 씨가 우리 일행을 영접 안내하여 당지에서의 행동을 인도할 대표격 주인이었다. 열차의 지연(遲延)으로 도문까지 출영하려던 것을 못하고 역과 숙사만 거듭 달려다니며 참던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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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사에 행장을 맡기고 모리씨의 안내로 좌석을 준비하여 뒤미처 당도한 간도성 관방(官房)의 우리를 부른 주인의 하나인 복부(服部) 사무관과도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내일부터의 행을 협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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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성공서(省公署)에 나아가 신길 성장(神吉省長), 중원 차장(中原次長), 미농(美濃) 총무과장 기타에 인사를 마친 후 제 2 반(목양ㆍ정비석)은 죽중(竹中) 성홍보고원, 이(李) 연길현 홍보고원의 안내로 한걸음 앞서 서쪽 경도선(京圖線) 방면으로, 필자는 이무영ㆍ정인택의 제 1 반에 딸려 모리 홍보고장의 안내로 동쪽 도가선(圖佳線) 방면으로 오후 네시에 현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성에서 협화회(協和會) 것을 빌어다 빌려주는 털벙거지와 슈바 등으로 무장(武裝)을 하여 의표(儀表)가 심히 비백작적(非伯爵的)인 것은 상관없다 하더라도(일행이 口險(구험)하여 경성 출발 당시에 벌써 필자를 백작이라 별명하였었다) 십년 불모주의(不帽主義) 끝에 별안간 털벙거지를 써노니 머릿골이 아프고 눈이 충혈이 되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도문까지 길동무하여 주는 송강(松岡) 경일(京日) 간도특파원도 작반(作伴)되어 저물녘에 도문에 당도, 도가선과의 연락이 불여의하여 도문에서 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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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조동(早動)하여 도문을 떠나 왕청(汪淸)으로, 만주는 어디를 가나 끝없는 벌판이요 산은 구경하기 어렵다고 들었더니 간도는 만주기는 일반인데 벌판은 구경할 수가 없고 가도가도 산뿐이었다. 그 산이 우환 중에 나무라곤 한 포기도 없고 풀만 난 민두름한 산들이어서 싱겁기 짝이 없었다. 나무는 산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도 마을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들 없었다. 근 2주일 간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나무라고 본 곳은 연길의 백양목(白楊木) 가로수, 팔도하(八道河)의 역시 백양목, 그리고 용정(龍井)뿐이었다. 간도가 첫인상이 어쩐지 삭막한 것도 원인의 하나는 생활에 수목이 없는 때문 아닌가 싶었다. 오지에는 밀림이 있다고 하고 아람드리 원목이 운반되어 나오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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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은 목재로서의 소용밖에는 아니 된다. 눈앞에 볼 수 있는 산에 거리에 나무가 있는 것은 그림과 주련이 붙은 실내와 같이 마음을 즐겁고 침착케 하는 것이다. 간도는 관(官)과 민(民)이 합력하여 모름지기 ‘나무 있는 간도’를 만드는 데도 한 분발을 함으로써 ‘보다 더 즐거운 간도’를 만들기를 권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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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에서는 전만 유일의 국립이요 장차 간도 전체에 좋은 우유와 개량종의 역우(役牛)의 공급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중이라는 국립 종우목장(種牛牧場)을 찾아가 전전 장장(前田場長)의 설명과 안내로 축사와 착유작업 등을 견학, 선사의 버터를 손에손에 왕청 거리로 돌아와 현공서에 들렀다. 오후는 왕청극장에서 협화회 기타의 중견 지도층 청년들과 만나 좌담, 과거의 여러가지 난관을 싸워 이기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확호한 신념 아래 왕도낙토(王道樂土) 건설에 불타고 있는 기백을 그들의 하는 말 구절구절에서 엿볼 수가 있었다. 징병제 실시에 대한 열렬한 관심은 오히려 조선 내지보다 더할지언정 못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도한 교육열과 더불어 왕청뿐이 아니라 도처가 일반이었다. 좌담회에 이어서 현 주최의 만찬회에 나아가 현 당국의 각 책임자 기타가 설명하여 주는 현내의 개척민 급 개척상황을 비롯하여 일반경제ㆍ교육ㆍ치안상태를 이야기 듣고 우리로부터 질문도 하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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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여덟시 왕청을 떠나 춘화촌공소의 소재지인 대흥구(大興溝)로 가 일박하고 밝는 아침 춘화촌공소에 나가니 촌장은 마침 출장이요 조리원(助理員, 부촌장) 도원봉도(桃源奉道)씨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강덕(康德) 7, 8 양년 전만을 엄습한 상재(霜災)는 이곳도 타격을 면치 못 하여 강덕 5, 6년도의 통계만 보더라도 현지소비 말고 대흥구역에서 반출된 것 중 대두(大豆)의 가지만도 1백 80차량이던 것이 강덕 7, 8년에는 반출은커녕 현지 소비에도 부족하였고, 일일경(一日耕, 2천평) 삼십 석 수확의 수전(水田)이다 폐경될 지경이었다가 금년에야 풍작을 보아 그 동안 벌써 50 차량의 잡곡이 반출되었다고 한다. 농산물 교역장엘 가보니 과연 출하(공출)된 대두(大豆)ㆍ대맥(大麥)ㆍ포미(包米, 강냉이)ㆍ고량(高梁, 수수)ㆍ좁쌀 등의 잡곡이 산같이 쌓여 있고 한편으로 부절히 반출되며 반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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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뭇한 양곡이 이곳에 이주하여 와 비습(匪襲)과 천재(天災) 등과 싸우면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얻은 바 반도 동포의 피땀의 결정이요 총후농민으로서의 지성인 식량공출의 현물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량한 감개와 더불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짐을 금치 못했다. 만주에 있어서는 조선과 달라 춘경기(春耕期)에 농민 자신이 자기의 수확예상 중 종자와 자가용을 제한 잉여량을 계산하여 그 양만큼 공출할 것을 자진신청을 하고 당국에서는 그에 대하여 선금으로 매(每) 백 킬로(약 170근)에 1원씩의 장려금을 교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폐해가 없지는 아니할 것이나 일종의 공출량 명령제요 공출 후에야 장려금이 나오는 조선보다는 일보 앞선 감이 불무(不無)하였다. 또 1톤의 공출에 대하여 15평방마의 면포를 특배(特配)하는 것 같은 것도 좋은 고안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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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대흥구를 떠나 천교령역(天橋嶺驛)에 내려 춘양촌공소와 만척(滿拓) 출장소에 들렀다가 저물게 촌장 야촌(野村) 씨도 동반 그 다음 역인 낙타산(駱駝山)으로. 이 야촌 촌장은 대단히 열심코 부지런한 분이어서 관하의 4인반(四人班) 지구가 벽지인 관계상 지도의 손이 잘 미치지 못하고 방치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곳 개척민들의 생활향상과 각성이 더딤을 지적하며 분촌(分村)의 필요를 역설하는 등 대하는 우리로 하여금 관하의 농민들을 위해 믿음직스런 제일선 지도자로다라는 든든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게 하는 바 있었다. 밤에는 부락민의 집회가 있어 우리도 야촌 촌장을 따라 참석 모리 씨로부터 우리의 온 뜻을 소개하고 무영이 단에 나아가 간곡히 인사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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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산둔은 2백 호 미만의 농업과 목재 운반 등을 겸한 가난한 부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영세한 갹출금과 부역으로써 1만 5천 평의 실습지까지 딸린 훌륭한 국민학교를 지어놓았다. 이 밤의 집합도 그 뒤처리를 협의하기 위함이었다. 전일의 간도는 조선사람 부락 있는 곳에 반드시 비화(匪禍)가 있었다. 그것이 시방의 간도는 조선사람 부락 있는 곳에 반드시 학교가 있을 만큼 초등교육이 보급되었다. 그들은 넉넉치 못한 주머니를 털고 등으로 흙을 지고 하여 덩시런 학교를 지어놓고는 당국에다 유지 경영을 청한다. 끼니는 굶어도 자제의 공부는 아니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저래 하여 조선 같으면 행정단위로 면에 해당하는 춘양촌 한 촌에만도 기설(旣設) 10교, 신년도에 개최될 것이 6교라는 놀라운 수효를 보이고 있다. 전간도의 조선인 아동 국민학교 취학률이 75퍼센트로 조선의 55퍼센트보다 훨씬 높으며 소화 21년 조선 의무교육 실시기의 95퍼센트를 간도는 그전에 달성할 터이라는 기염도 노상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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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아침 도보로 삭풍을 안고 야촌 촌장의 안내로 4킬로 상거에 있는 대이수구(大梨樹溝) 부락을 찾다. 이 대이수구 부락에 대하여는 일부에서는 오지라 부야(否也)라 말이 많았으나 우리가 본 중에서 가장 감명 깊고 관심이 끌리는 부락의 하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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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 년 4 11월 만주 각지에서 부정업자(不正業者) 55호를 몰아다 강제입식(强制入植)한 것이 시초였고 그 뒤 수차에 걸쳐 개척민을 입식하여 그동안 약간의 탈퇴와 분산이 없지 않았으나 현재 93호가 착실히 살고 있었다. 부정업자들은 더러 도주도 하고 남아 있는 사람도 처음 얼마 동안은 개척의 정업생활(正業生活)에 열을 내려고 아니하였으나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그러기를 허락치 아니하였다. 그들은 당장 먹어야 하고 자위(自衛)하여야 하였다. 개척민들과 함께 괭이를 메고 나가 먹을 곡식을 거둘 황무지를 개간하여야 하고 부락 주위에 토벽(土壁)과 목책을 만들어야 하고 자위단을 조직하여 훈련을 받으며 일야(日夜)로 파수를 서야 하고 일목(一目) 비습이 있으면 총을 잡고 접전을 하여야 하고 하였다. 강덕 6, 7, 8년의 2개년 반은 거의 비적과의 싸움의 연속이어서 각반을 풀고 잠잘 여유조차 없었다. 강덕 7년 한 해만에도 5, 6차의 습격을 받았으며 그중 9월에는 대거 3백 명이 내습하여 부락을 점령하고 무장을 해제시킨 후 장정 80명과 소 16두에다 부락에 있는 식량 전부와 이불ㆍ옷 등속을 싹싹 약탈하여 싣고 갔었다. 부락 점령을 당하기도 전후 세 차례였었다. 그러다 이윽고 치안이 확보되기 시작하자 이번엔 천재(天災)였다. 상재(霜災)로 인하여 연 2년 흉작을 보았다. 이와 같이 몇해 동안을 무서운 시련에 닦이어 나는 동안 대이수구 부락은 전의 부정업자고 개척민이고 할 것 없이 굳센 자활정신이 부지불식 깊이깊이 박혀지고 말았다. 현재 그들은 감자와 강냉이와 좁쌀이 주식 물이었다. 술도 오락도 없었다. 영하 30도의 추위에 여자와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색시가 없어서 총각들이 장가를 못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뻐젓이 살며 더 잘 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자기네 손으로 학교를 세웠으며 부녀들은 국어강습이 열심이었다. 만척대교령(滿拓大橋嶺) 출장소 관내에서 금년도 부채상환 성적이 가장 우량 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락 중 대이수구도 그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93호의 부락인데 닭이 암탉만 6백여 머리였다. 생활에의 불타는 투지가 없이는 외부에 나타날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물론 아직도 두 사람인가 아편중독자가 있고 약간의 부동분자(浮動分子)도 없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나 소수 일부로써 전체를 폄함은 책임있는 사람으로는 삼가할 바이다. 대이수구에서 남녀 여러분이 모여 우리더러 조선에다 전해달라는 부탁 세 가지 ①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가면서 잘 살고 있으니 안심하시오. ② 면사무소 어른들 앞으로는 부디 개척민을 조심해 뽑아 보내시오. ③ 위문단으로 오거든 우리 같은 벽지 동포도 더러 찾아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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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조밥의 점심으로 대이수구 동포의 중식을 맛본 후 오후 2시 반 석두하자(石頭河子) 부락을 거쳐 낙타산으로 돌아와 동 여섯시 대흥구로, 역두에서 마침 왕청현 실업과장이요 재만 조선인 작가의 한 사람인 한찬숙(韓贊淑) 씨를 만나 그의 사사로이 베푸는 연석(宴席)에 나아가 망년의 배(杯)를 기울이면서 환담을 나누는 일방 재(在)간도 조선인에 대한 각반(各般) 상황도 두루 이야기 들으면서 대회일(大晦日)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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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구 역전의 여사(旅舍)에서 잠이 깨니 원인(元日)의 해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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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大東亞戰) 뜻깊은 제 2 년과 부끄러운 또 한 살을 불기(不期)히 간도 벽지에서 맞이한 것이요, 오전 10시 정월 초하룻날 하필 만인(滿人)의 태마차(짐 싣는 마차)에 실려 12킬로를 흔들리면서 꽁꽁 얼면서 신흥둔(新興屯) 부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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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둔은 요새 생긴 개척민 부락이 아니라 총독부 이민시대의 이민(移民)과 그 전의 자유도래민(自由渡來民)을 합쳐서 이룬 소위 기주민(旣住民) 부락이요 간도가 자랑하는 자흥촌(自興村)의 하나였다. 현재 조선인 농가 176호 중 60호가 5천 평으로 4천 평의 자작농 창정을 하였으며 물론 학교도 훌륭한 것이 있고 부락 전체가 가옥이랄지 모든 것이 탁신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품이 미상불 개척민 부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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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舊友) 권병우(權丙祐) 씨가 근일 경성서 볼 수가 없더니 뜻밖에 왕청현 공의(公醫)로 이곳서 촌민 진료소를 담당하고 있어 깜짝 서로 반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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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예의 태마차에 실려 대흥구로 돌아와 나자구(羅子溝) 행을 변경 왕청으로 가서 1박. 2일 한찬숙 씨의 전별(餞別)을 받으면서 왕청을 떠나 도문으로, 도문에서는 경일(京日) 국경특파원 봉조(峰肇) 씨의 초연(招宴)에 나아가 당지 실업계의 몇몇 중진 청년과 간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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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회막동 (灰幕洞)이라는 국경 소부락이 경도선의 개통이 전하자 오지밀수(奧地密輸)를 목적하고 와짝 모여든 밀수당과 그 밀수경기로 대발전을 한 것이 곧 도문이라고. 그러나 시방은 전일의 밀수와 밀수졸부는 숙청 퇴산(退散)되고 ‘밀수도시 도문’의 추명(醜名)을 씻으면서 청년층이 들먹들먹한 회사를 세워 실업계를 리드하고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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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아침 도문을 떠나 대안(對岸)인 조선땅 남양으로 좇아 상삼봉(上三峰)으로 돌아 도보로 국경철교를 건너 다시 만주국 땅 개산둔(開山屯)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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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반의 안내로 갔던 이봉남(李鳳南) 씨를 만나 오후 한시 지나서 팔도하역(八道河驛)에 내리니 신정(新井) 덕신촌장(德新村長) 남분주소(南分駐所) 경위보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즉시 남양둔으로 가 촌공소에 들렀다가 숙사로 가서 신정 촌장, 촌민의 의료와 후생에 정신(挺身) 노력하고 있는 정공의(鄭公醫), 그리고 간도 내왕 30여 년이요 전 민회장(前民會長)이던 박경○(朴京○) 노인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박노인의 이야기는 조선인 간도 이주사의 산 기록이어서 참고되는 바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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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소연을 베풀고 신정 촌장이 들려주던 문경(聞慶) 아리랑과 장타령, 정공의의 만인(滿人)춤은 우리로 하여금 장도(長途)의 피로를 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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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촌은 일대가 조선인 간도 이주와 함께 시작된 연구(年久)한 지대로 그런만큼 만주라기보다도 함경도의 어떤 동네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느낌이었다. 물론 산재부락(散在部落)이요 여지껏 왕청현 내에서 보던 토벽과 목책으로 둘린 집단부락은 구경할 수 없으며 주민도 전부가 기주민(旣住民)이었다. 치안도 백 퍼센트 확보, 사람들은 오로지 농사와 자제의 교육에 전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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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전 팔도하 역전의 부락을 잠깐 본 후에 용정행 열차에 오르지 앞선 일행에서 함성이 일기에 보니 용정에서 합류키로 하였던 목양ㆍ정비석의 제 2 반이 그 차에 타고 있지 않는가! 첨으로 만난 것같이 서로 반가왔고 위로가 낭자하는 동안 용정 도착. 출영(出迎)의 용정가공서(龍井街公署) 부가장(副街長) 서하장명(西河長明) 씨의 안내로 가공서(街公署)에 들렀다가 통감부 구지(舊趾)에 있는 가등청정비(加藤淸正碑), 성립의원(省立醫院)의 개척의술 등을 구경하던 중 팔자 혼자 어찌하다 일행과 떨어진 바 되어 두어 시간 용정의 구시가를 두루 거닐었다. 역사가 오랜 만큼 간도의 어떤 도시보다 짜이고 침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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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은 파도 많던 간도사(間島史)가 가장 예민 심각히 반영되어온 면 이었음을 생각하고 감개와 흥미가 새로왔다. 재만조선인 작가의 하나인 안수길(安壽吉) 씨가 숙사로 찾아와주어 반가이 만났고 여류작가 강경애(姜敬愛) 씨를 물었더니 신병으로 조선에 돌아가 요양중이라고 하여 섭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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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은하수’의 윤극영(尹克榮) 씨도 만났고 밤에는 관민(官民) 주최의 간담회에 나아가 여러가지로 의견을 교환. 들으니 연길현은 교육열이 더욱 높아 현내에 17교의 남녀 중등학교가 있고 그중 6교가 용정에 있는데, 그러나 중학 이상의 진학은 내적ㆍ외적 여러가지 불편 불리한 조건 때문에 퍽 제한이 되어 있어 중학 이상에 진학시킬 자녀를 둔 가정이나 당국자들은 불소(不少)한 번민이 있는 모양이었다. 5일 오전 9시 버스로 연길로 돌아와 성공서(省公暑)에 들렀다가 최문국(崔文國)씨 댁에서 비로소 정월 음식을 대접받은 후 오후 3시 성공서에서 신길성장(神吉省長) 이하와 간담. 우리는 보고 느낀 바를 솔직히 말하고 성 당국자는 그에 대한 설명과 대답이 있었다 겨우 건국 . 10년이요, 더우기 그동안은 치안에 전력하느라고 미처 겨를이 미치지 못하였던 방면 특히 개척민의 지도(指導), 복리시설, 교육 등에 주력할 준비가 진행중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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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협화회측과 민간측의 간곡한 만류로 예정을 하루 밀어 도착시 시간 관계로 못하였던 연길가공서 협화회 간도성 본부 동 연길현 본부에 인사를 하고 내처 가(街)본부에서 고사(古思) 성본부 참사(參事), 삼삼(杉森) 현본부 사무장, 조천 연길가 부가장(副街長) 기타 민간측 다수와 간담, 재만 조선 작가의 하나인 신서야(申曙野)도 만났고 또 윤백남(尹白南) 씨가 마침 연길에 당도하여 밤에는 같이 전기 공동주최의 초대연에 나아가 화기로운 자리를 가지었다. 이어서 목양은 연길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하여 인사의 방송을 하였고, 그동안 이무영ㆍ정인택은 중원 차장(中原次長)을 관저로 방문하여 떠나는 수인사를 하고 마지막 실업가 덕산씨의 청하는 좌석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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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사로 돌아와 비로소 오랜 손님 노릇을 마친 안심에 다리를 뻗고 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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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일에 너무도 많은 것을 주마간산격으로 보았다. 따라서 섣불리 결론하기를 피하거니와 간도는 기후가 약간 준(峻)할 뿐 치안은 이미 확보의 역(域)에 달하였고, 아직은 건전(乾田)이 많고 수전(水田)이 적으나 앞으로 개간할 여지가 넉넉하고 한즉 착실 근면한 농민이면 가서 얼마든지 잘하고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보내는 조선측은 과거처럼 책임호수만 채우기에 엿장수 출신이니 게으름뱅이니 심지어 읍(邑) 주가영업(酒家營業) 씨까지 긁어모아 보내던 방법을 삼가고 개척민의 질적 선택에 절대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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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개척민의 질이 좋지 못하단 소리를 귀가 아프도록 들은 것도 기실 일부의 질 나쁜 개척분자가 섞였던 탓일 것이다. 일방 간도를 다스리는 위정당국은 상하가 한가지로 간도 인구의 8할인 63만이 선계(鮮系)요, 다시 그중의 8할이 농민임을 생각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전하(聖戰下) 유위(有爲)한 식량전사로서와, 아들을 낳아서 길러서 가르쳐서 충용(忠勇)한 제국군인을 나라에 바칠 부모로서 안심코 부지런히 일 하도록 하는 것이 간도 통치의 기본정신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새로이 하여 개척민의 입식(入植), 토지, 농우개량, 대만척(對滿拓) 관계, 자제 교육, 복리시설, 그밖에 여러가지 그동안 손이 미치지 못한 것이나 불비하였던 것을 시급히 개선하며 살뜰한 지도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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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떠나기 전 삼 (森) 도서과장한테 인사를 갔더니 과장은 가거든 부디 간도의 조선 사람들에게 반도민중이 얼마나 열심히 황국신민화에 또 총후전사로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전하는 동시에 간도 사람도 간도에서 살건 어디 가서 살건 유일한 길은 황국신민화에 있음을 역설하도록 부탁이 있었는데, 가서 본즉 우리가 그런 권이나 당부를 하는 것이 오히려 범연할 만큼 그들은 조선 내지 이상으로 황국신민화의 열렬한 신념하에 살고 있는 양상이 여러 생활과 활동면에서 뚜렷이 나타나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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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기부 성장(岐部省長), 중원 차장 그리고 미농(美濃), 복부(服部) 이하 성 홍보위원회의 여러분, 특히 우리를 데려다 자신 현지안내의 노(勞)까지 아끼지 아니한 모리 고장, 현지 각지의 지도자 여러분, 협화회의 여러분에 각각 깊은 사의를 표하는 동시 최문국 씨를 비롯하여 초면한 여러 문우(文友)며 기타 민간측 여러분에게 마치 구우 친척을 만난 듯이 우리를 반겨 맞이하고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은 데 대하여 진심한 감사를 아울러 드리며 이 붓을 놓는다.
【원문】간도행(間島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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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3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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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