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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지는 남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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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노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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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지는 남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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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들판의 경치와 농부의 그림자, 능금의 석양빛과 춘엽씨와의 만남 등, 서울에서 마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리고 마산만의 밤풍경에서 느낀 감상을 엮은 수필이다. 작자가 1924년 5월 7일 탈고한 이 수필은 그의 창작집 「청춘광야」에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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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요한 시선을 저 편 산모퉁이에 던지고 있다. 함지박같이 둥근 산모퉁이에는 밤나무와 참나무가 십여 그루 나란히 섰는데 나무끝에 돋아나는 파릇파릇한 신록은 하얀 일광에 반사가 되어 우쭐우쭐 연한 웃음을 웃고있다. 그리고 산 허리에는 소나무가 우거졌으며 산기슭에는 조그마한 시내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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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요한 곳이로다 하고, 나는 그 산기슭을 자세히 바라본다. 산기슭에는 열 두어살 정도 나이를 먹은 두 세명의 어린애들이 대나무에 어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무 사이를 왕래한다. 알지는 못해도 아마 그들은 나무 사이에서 우는 뻐꾹새나 두견새를 잡으러 다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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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꾹뻐꾹 뻐꾹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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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에 울거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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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살랑 나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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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좋게 기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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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 잡아 놀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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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노래를 부르며 그들은 산을찾고 내(川[천])를 찾아 천진난만한 소년의 왕국에 뛰고 춤추는 어린 친구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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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린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마음껏 놀고 마음껏 뛰라! 인생에 제일좋은 소년시대! 그때에는 천사의 노래가 귀에 들리고 가나안의 샘물이 발앞에 솟지 않던가? 천사의 나라에서 새와함께 뛰고 나비와 함께 춤추어라! 아, 그러면 그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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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말을 나도 알지 못하게 속삭였다. 그러고 본즉 한없이 그리운 소년 시대의 꿈이 아른아른 눈앞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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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천사의 왕국에 살던 그대여! 흰 모래 깔린 시냇가에서 발가벗고 친구들과 장난치던 생각! 9월의 미풍이 산허리에 잠들면 대바구니 들고 밤 주으러 다니던 생각! 들에 할미꽃 피고 산에 뻐꾹새 울면 이웃집 계집애와 싱아를 캐 러다니던 생각 ! 5월이오고, 보름이 오면 고사리같은 손으로 연 날리던 생각! 그리고 밤이오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까만 젖꼭지를 주무르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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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러한 생각은 한없이 그리운 열망의 빛을 가지고 무지개 같이 눈앞에 솟아 오른다. 그러나 나의 몸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하니 모든것은 꿈이었다. 다시 찾을 수 없는 옛날의 행복이었다. 이제는 그 천사의 나라에서 쫓겨나서 설움많은, ‘청춘광야’ 에서 울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고사리 같이 적던 손이 돌맹이 같이 커다랐고, 배(梨)속 같이 단순하던 머리가 벌통같이 복잡해 졌으니, 어머니 조차 없는 이때에 누구와 더불어 응석을 하며 무엇을 즐기며 살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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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을 하니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하고 떨어진다. 아, 님이 간 그때여 한번 가고 영원히 다시 오지 못하는 천사의 왕국이여! 그때는 그렇게 즐겁고 서늘하더니 오늘은 왜 그렇게 외롭고 귀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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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푸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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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나무 푸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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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까지 모두 푸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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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고 그늘진 산속이나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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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새 소리 고요히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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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는 눈물이나 뿌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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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숨을 후! 하고 쉬며 수첩을 꺼내어 즉흥시를 한절 기록하고 다시 창밖을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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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같이 달리는 열차는 벌써 시흥, 안양, 군포장을 모두 지나 수원 서호(西湖)를 옆에 끼고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기운차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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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들은 모두 창을 열고 서호! 서호! 하고 소리친다. 과연 서호는 아름다운 호수이다. 그는 언제던지 구슬 같은 맑은 물결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거룩한 웃음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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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한면에는 실줄기 같은 잔물결이 스르르하고 꼬리를 치는데, 호수 언덕에는 삿갓 쓴 젊은이들이 한가하게 앉아서 낙시질을 하고있다. 그리고 호수 서쪽에는 작은 산이있고 그 산에는 다북다북한 동송(童松)이 빈틈없이 들어섰는데, 그 동송의 그림자는 꿈빛같은 서늘한 그늘을 호수위에 지우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는 구부러진 노송과 벗나무가 드문드문 서있는데, 바람이 불적마다 거문고의 가는 줄을 때리는듯 나무가지는 스르릉하고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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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원 서호! 그는 얼마나 늙은 이름인가? 그는 오는 봄과 가는 가을을 몇 번이나 맞았으며, 피는 꽃과 둥글어 지는 달을 몇 번이나 보냈는가? 꽃이 필때에는 붉은 그늘이 그 물위에 비췄을 것이며, 눈이 올때는 유리같은 어름이 호수 한면을 얼싸 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달밝은 밤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그림자가 호수 한면에 떨어져 금이되고 은이 될때, 그는 거룩한 영원의 생명을 품에안고 무한의 감정에 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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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서호여! 너는 영원의 사람이로다.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길때 분명히 너도 생겼었겠지. 그러면 네가 처음으로 내리는 흰 달을 온몸에 품고 고요한 밤을 보여준 이때가 그 어느때 던가? 그때는 천 만년 전 이었던가? 억만년 전 이었던가? 아, 멀고먼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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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생각을 할때에 갑자기 울고싶은 마음이 가슴에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나는 눈을감고 생각을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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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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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돌리며 서호에 있는 친구 K씨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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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2년전, 수원 여자잠업학교에 다니며 이 서호에서 많이 살았다 한다. 기쁠때에도 서호! 슬플때에도 서호! 서호는 오직 그에게 둘도없는 친구였다 한다. 그리고 그 어느날 밤! 그는 그의 모친이 병들어 누웠다는 편지를 받고 이 서호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어 본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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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서호(西湖)여! 너는 나의 친구를 많이 웃기고 많이 울린 심술궂은 사람이구나. 우리 친구가 흘린 눈물은 몇 방울이나 네 품에 있으며, 우리 친구의 밝은 웃음은 몇 송이나 지금 네 품에 남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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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서호를 떠났읍니다. 그리고 선생님까지 떠났읍니다. 이제는 떨리는 손을쥐고 암흑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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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편지를 남기고 몇 달이 안되어 그만 폐병으로 영원히 떠나간 K씨를 생각하니 수원 서호! 그는 나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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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말없는 서호여! 너는 영원히 살았으나 우리 친구만은 영원히 죽었구나! 네 물결에 비치었던 우리 친구의 그림자는 지금 간곳이 어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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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묵연히 앉았다가 다시 고개를 드니 오산, 서정리도 벌써 지나가고, 이제는 평택의 넓은 벌판이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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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들판의 경치와 농부들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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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껏 터진 벌판위에 (限) 한가하게 움직이는 늦은 봄의 물결, 멀리 꿈줄기같이 보이는 저 쪽 산아래는 면사포 같은 산 안개가 아물아물 흐르는데, 고요히 나부끼는 실바람은 그 안개를 이리 몰고 저리몰아 멀리멀리 하늘 저편으로 무참히 쫓아 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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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룩한 성령의 가슴에 매달려 무슨 훈계나 듣는듯이 겸허한 마음으로써 그 안개를 바라본다. 그 안개는 산허리를 너머 산정(山頂)을 뒤덮고 뭉게뭉게 둘레를 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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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구만리 넓은 하늘로 장차 솟아 오를듯한 장엄한 모양을 보인다. 하늘에서는 실발같은 하얀 물결이 실실이 산위로 흘러 내려 오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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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고요히 섰다. 산은 벌판위에 검은 그림자를 깐다. 벌판에는 어린애의 더벅머리 같은 파릇파릇한 보리가 나붓나붓 물결을 치고, 그 옆에는 늙은 할아버지가 바람에 날리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기쁜듯이 그 보리를 바라보고 있다. 보리밭 너머로는 논들이 있고 둑위에는 뜸북새가 곤한듯이 졸고 있으며, 논과 밭 사이로는 젊은 남자들이 소를끌고 분주히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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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늦은 봄! 그리고 첫 여름. 모든 사람은 살아야 겠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겠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자. 그리고 곱게곱게 북을주고 아름답게 길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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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랑(麥浪)이 춤을추고 산허리에 달이 뜨거던 요(堯)의 일월(日月). 순(舜)의 건곤(乾坤)! 호미쳐 노래하고, 흙덩이 쳐 화답(和答)할까? 아, 한가한 벌판위에 끝없이 유한한 농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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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들은 살기를 힘쓰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풀밭가에는 그들의 사기(邪氣)가 없는 정화가 넘쳐 흐르고, 녹음이 짙은 나무 아래는 그들의 달콤한 잠꼬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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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축복의 신을 등에 진 그대 들이여! 빼앗고, 속이고, 차고, 무는 사악한 감옥에서 해방을 쟁취한 사람들이다. 옥같이 아름다운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사람의 샘속에서 뛰고노는 그대들이다. 자연의 부드러운 향기는 그대들의 머리를 얼마나 지나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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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러나 그대 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은 살찌고, 풍부한 그대들의 얼굴은 파리하구나. 기름기 하나 없고 뼈만 남은 야윈 얼굴에는, 그 무엇을 저주하고 그 무엇을 원망하는 슬픈 빛이 가득히 차 있음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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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주리었구나. 그대들은 헐벗었도다. 아프고 쓰린 빈한(貧寒)의 칼날에 온몸이 찔리고, 온몸이 부어서 피묻은 상처의 설움이 그대들의 향촌에 사무쳐있지 않던가? 오, 불쌍한 그대들이여! 그대들을 구원할 자가 그 누구던가? 새로운 조선의 농촌을 건설하고 그 속에서 우리 형제들의 행복을 찾아줄 자가 그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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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농촌의 정조(政造)! 그들의 생활을 붙잡아 보자. 그리하여 그들을 부유하게 만들자. 이것이 살기를 원하는 첫번째의 노력일 것이다.
 
49
나는 한참 이러한 생각을 하며 현재 조선의 비참한 형편을 돌아보고 패배자(敗北者)의 설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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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뚜우! 하며 정차한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성환역이었다. 직산광산. 월봉산. 무엇무엇하고 그곳에 명승지를 소개한 간판이 있다. 월봉산의 지는 달이 섧다하며, 직산 금광의 흰 모래가 보드랍다는 것은 직산에 있는 희씨로부터 여러번 소식을 들은일이 있다. 언제 한번 월봉산을 찾고 직산 금광을 찾아 덤벙덤벙 뛰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모든것은 그 소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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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밖에 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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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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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달이나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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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나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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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설움에 메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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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나 외우며 표박의 생활을 하였으면하고 몇 번이나 나는 젊은 가슴을 조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그 무형의 줄이 나의 혼을 얽어매여 가지고, 생의 거리에서 이리차고 저리차고 혼이 났었다. 허벙지벙 혼의 거리에서 힘없이 헤맬때 나의 혼은 몇 번이나 울었으며, 나의 마음은 몇번이나 서러워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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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다시 떠난다. 성환역은 기관차가 토한 연기에 싸여 고요한 물속에 잠기는듯 보인다.
 
 
58
고요히 눈을감고 꿈의 세계에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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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떠난다. 산은 오고 산은 가며, 들은 가고 들은 온다. 산으로 들로. 아, 끝없이 달리는 차의 발길! 나는 차창에 기대어 산위에 감도는 구름 덩이와 시내가 널려있는 포플라 숲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숲 뒤에 있는 작은 산아래서 검정 치마를 바람에 나붓끼며 나물케는 소녀들을 바라본다. 하얀 손이 아물아물 풀을 뜯고 , 흙을 떨며 왔다갔다 움직인다. 그들이 캐어놓은 파란 나물은 고운 대바구니 속에서 살랑살랑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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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 꽃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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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을 안고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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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싹은 파릇파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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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혼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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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 웃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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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아 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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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바구니 옆에 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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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캐러 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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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는 앞에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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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곱게 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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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으로 이러한 노래를 부르며 나타났다 없어지며, 없어졌다 나타나는 자연의 활화(活畫)를, 하나하나 바라보기에 아무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넘고, 모든것을 떠난 평화로운 동산에서 나의 생각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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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소정리, 전의, 부강, 대전, 심천, 황간등 여러 정거장을 지나기까지 나는 큰 길 옆에 있는 땅을 바라보며, 노래도 부르고 혹은 몽상도하며 지나간 옛날의 기쁜 생각, 달콤한 생각, 서러웠던 생각, 이러한 추억도 해보며 웃고 울었다. 그리고 차가 황간역을 지날 때에는 벌써 멀리 지나간 그 어느 옛날의 내가 어떤 여자를 전송하여 서울에서 이곳까지 왔던 일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슬픔에 깊이 파묻히고 싶었다. 그의 일이라면 하늘에 가서 달도 따오리다! 그의 소원이라면 남극에 가서 진주라도 캐어 오리다! 이 처럼 사랑하던 그가 영원히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을때, 그와 나는 서로 목을안고 어린 가슴을 한없이 멍들게 하였다. 그러나 필경 나는 그를 위하여 황간역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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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옛날! 동정의 가슴속에 곱게 피던 사랑의 눈물!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니 어찌 울지 않으면 슬프지 않으랴.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과거는 영원한 비밀속에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순정한 두 사람의 마음에 알뜰살뜰 품어 두었던 고운 비밀은 아무도 모르게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무덤속에 섧게 누운 그 여자의 혼속에는 아직도 이 비밀이 남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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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이러한 생각을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니 쓸쓸하고 컴컴한 그림자가 머리위에 엄습한다 . 나는 외로움을 느끼며 이런 때에는 月葉[월엽]군이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공연한 몽상을 해보았다.
 
74
아, 모든것이 시끄럽다. 생각말고 엄벙덤벙 지내어 보자고 객실을 떠나 식당으로 향하였다. 후라이, 치킨로스, 빵 등 몇가지 양식으로서 주린 배를 채운 후,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저것 또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차가 구미역을 지날때 잠을 자게 되었다. 아, 고요히 눈을 감고 꿈의 세계에 들어가자. 꿈을 먹고 산다는 아프리카의 평원에 있는 맥(貘)이라는 짐승과 같이, 나도 꿀이나 먹으며 영원히 꽃피는 미지의 세계로 영원히 흘러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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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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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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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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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모두 먹어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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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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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몸위에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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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다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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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금의 석양빛, 만남의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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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단잠에 빠졌었는지 부시시 일어나 눈을 부비고 바깥을 바라보니 차는 벌써 유천역을 지난다. 능금빛 같은 석양의 해는 발깃발깃 산위에 떠도는데 길가에 어리는 서늘한 그림자는 우물우물 땅위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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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의 저녁! 뉘엇뉘엇 저물어 가는 산봉우리의 그림자! 숲사이의 새들은 왔다갔다 하며 오늘밤의 깃을 찾기에 매우 바쁜 모양이다. 그리고 저물어 가는 오늘을 애처로워 하듯이 싱거운 울음을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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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은 출렁출렁 소리가 높아가고 지게진 농부들은 산 굽이를 돌아 자기 집을 찾아가니 밤 노을이 깊어오는 고요한 산에는 영원한 신비를 감추고 있는 밤의 그늘이 차츰 손을 펴기 시작한다. 저녁 안개에 싸인 큰 길을 바라보는 동안에 차는 벌써 밀양역을 지난다. 시원하게 깔린 모래위로 구슬같은 시내가 저녁 빛을 띠고 늠실늠실 흘러가며, 시내 옆으로는 꿈 그늘같은 버들이 물결을 치며 고개를 기웃기웃 흔든다.
 
86
“오! 밀양역인가? 이 다음이 삼랑진이지.”
 
87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소(洗面所)로 갔다. 얼굴을 곱게 씻고 다시 크림을 바른후에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복을 갈아 입은후에 승강구에 서서 삼랑진을 기다린다. 삼랑진에서 내려 마산선을 타야겠다. 그리하여 마산만에 흐르는 별 물결을 보아야겠다. 그러면 삼랑진에서 차가 연속 되는가?
 
88
‘오늘 저녁에 도착 되겠소. 삼랑진까지 와 주시오.’
 
89
하고 춘엽씨에게 전보 친것을 생각한다. 아, 춘엽씨는 과연 삼랑진까지 마중 나왔을까? 만약 그가 나왔다면 얼마나 좋으리! 다정한 그의 손을 꼭 잡고 달콤한 정담을 나누며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마산으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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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그가 나오지 않았다면…… 쓸쓸이 나혼자 차를 갈아타고 마산으로 가야한다. 그렇다면 어둑한 거리! 타향의 땅에서 어슬렁어슬렁 혼자 헤메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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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가슴을 조리는 동안에 차는 삼랑진에 멈춘다.
 
92
차가 멈추려는 순간! 나의 머리위에는 우뢰같은 실망과 번개같은 행복이 번갈아 나타나고 번갈아 사라진다.
 
93
오! 춘엽씨는 나왔는가? 아니 나왔는가?
 
94
혼란된 눈과 뛰는 가슴으로 정거장을 바로보는 순간에 어떤 여자의 부드러운 그림자는 내 앞에 나타난다.
 
95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이는 나의 손을 반갑게 잡아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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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피곤 하셨어요?”
 
97
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한다. 나는 손목을 그이 손에 쥐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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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읍니다.”
 
99
하고 그의 지시를 따라 저편 출구로 나가게 되었다. 정거장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 두사람의 모양을 유심히 바라본다.
 
100
마산행 기차는 30분을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춘엽씨의 제의를 따라 삼랑진에 있는 ‘마쯔노야’ 에서 일본 국수를 한 그릇씩 먹게 되었다. 국수를 먹으며 우리 두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를 교환 하였다.
 
101
“춘엽씨가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삼랑진에서 다시 상경하려고 했어요.”
 
102
“천만의 말씀이어요. 전보를 보고 안 나올리가 있읍니까?”
 
103
“하기는 춘엽씨가 원래 다정한 사람이니까?”
 
104
“아니오, 나는 원래 무정한 사람이지만……”
 
105
“무정이던, 다정이던 어쨌던 이곳까지 오셨으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106
“감사요! 그러면 감사한 덕으로 이번 마산가셔서 한턱 내십시요!”
 
107
“한턱 낼께요. 왜콩이나 한턱 낼까요!”
 
108
“하필이면 왜콩을……”
 
109
“왜콩이 고소하답니다”
 
110
두사람은 무릎을 치고 웃었다. 부랴부랴 국수를 먹은후에 정거장으로 가서, 차표를 사가지고 마산행 차에 오르게 되었다.
 
 
111
낙동강의 물소리, 마산만의 별 물결
 
112
사방이 고요한 밤에 고개 숙이고 우물우물 파묻쳐 들어가는 오후 일곱시 사십분! 마산행 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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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 이 선로는 몇 번이나 다녀본일이 있지만 이 마산선은 처음이었다. 나는 많은 흥미와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이 차를 타게 되었다. 더우기 사랑하는 K와 이 차를 같이 타게되니 어찌 기쁘지 않으며, 어찌 즐겁지 않으리.
 
114
두사람은 동쪽 창아래 자리를 정하고 다정하게 앉았다. 넓은 이등실에는 우리 두 사람과 어떤 일본 여학생과 또 어떤 경찰 한분이 있었을 뿐이다. 밝은 전등빛이 실내에 흐늘흐늘 소리없이 흐르는데 열차는 움직움직 몸서리친다. 두사람은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웃고, 떠들고, 장난친다. 그때마다 슬금슬금 저 편에 앉은 경찰 양반이 재미있는듯이 이곳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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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 사람이 한없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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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엽씨는 나의 발등을 살며시 밟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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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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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어요!”
 
119
“정말 이지요……”
 
120
“그럼 이 차는 우리 두사람을 싣고 유자나무 우거지고 카나리아 우는 멀고 먼 남국의 나라로 끝없이…… 달아났으면……”
 
121
“그렇습니까? 그러면 가도가도 끝이없는 삼림의 나라로 영원히 달아나 달라고 우리 하나님께 빌어 볼까요.”
 
122
춘엽은 차창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후! 하고 쉰다. 그의 흩어진 검은 머리털이 차가 움직일때마다 너울너울 나부낀다. 고운 불빛은 그의 머리털 사이로 반짝반짝 새어든다.
 
123
나는 그의 숙인 머리를 의미있게 바라보며, 번개같이 그의 상처입은 반생을 생각해 보고 한줌의 동정을 금하지 못하였다. 새하얀 처녀의 가슴에 검은 운명의 화살을 맞고 시커먼 땅에 영원히 쓸어져 누웠다가 다시 재생의 길을 찾아 많이 헤매고 많이 방황한 그의 과거를 생각하여 보았다.
 
124
그대는 얼마나 울었던가? 얼마나 검은 생의 물결에 뒤볶였는가? 곤한 걸음에 눈을감는 어린 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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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창을열고 바깥을 바라본다. 온천지에는 암흑의 빛이 천겹만겹 첩첩 쌓여 산이나 들이나 모두 밤이다. 정말 선로(線路) 넘어에 있는 나무 숲에서 스르릉하고 새어 나오는 바람소리가 한없이 부드럽게 들릴 뿐이다.
 
126
밤! 고요한 밤. 밤만은 자유의 동산이다. 모든것이 자고 모든것이 쉬는 영원의 성전이다. 별이 웃거나, 달이 뜨거나, 밤에는 성열(聖悅)의 숨소리가 우주의 가슴에 넓게 흐르니, 밤이야말로 한 구의 시요, 한 폭의 그림이다. 신비는 잠기고 영원은 오려니 밤이야말로 완전한 신의 나라요, 사랑의 벌판이다. 고요히 눈을감고 밤의 침묵에 들어가자!
 
127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며 춘엽씨를 바라본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무슨 덧없는 비애를 느겼는지 흑흑! 가느다란 목소리로 흐느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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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왠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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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의 머리를 잡아 일으켰다.
 
130
그리고 나도 울고싶은 연민과 동정을 느끼면서 다시 말을 이어
 
131
“그러지 말아요. 오늘만은 유쾌하게 놀아 봅시다.”
 
132
“예, 잘못 했어요. 공연히 쓸데없이 울었어요.”
 
133
춘엽은 머리를 들고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134
아, 덧없는 사회, 무정한 사회! 모든 젊은 사람들을 울리고 섧게하는 과도기에 있는 우리 조선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눈물을 짜고 한숨을 쉬는가? 전 조선을 통하여 몇 만 사람이나 될까? 생각하면 춘엽씨도 그 중에 한사람이다. 그러나 오는 사회! 장차 오려는 사회는 우리 손으로 재미있게 하고 기쁘게 하여, 우리 자손들로 하여금 쓰린 맛을 보지말게 하자. 그리고 축복의 청춘을 누리게 해주자!
 
135
나는 이러한 생각을하며 한참 묵묵하게 앉았다가
 
136
“모든것을 생각하지 맙시다.”
 
137
“제가 잘못이어요. 공연히 울었어요.”
 
138
“그럼 유쾌하게 놀아요.”
 
139
나는 가방에서 네이불(과일이름)을 꺼내어 춘엽씨에게 주며 먹기를 권하였다. 그는 네이불을 곱게 벗겨서 자기도 먹고 나에게도 권한다. 두 사람은 네이불을 먹으면서 다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차는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철교를 건너간다. 춘엽은 창을열고 바깥을 내다보며
 
140
“여기가 낙동강 이어요.”
 
141
한다. 그리고 네이불 벗긴 껍데기를 물위에 던지며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한다.
 
142
나도 창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바깥을 바라본다. 밤빛에 묻혀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 도도한 물결이 출렁출렁 흘러가는 모양만은 볼 수가 있었다. 춘엽은 네이불 껍데기를 던진다. 첨벙!하고 물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 낙동강의 물소리! 네이불 조각은 그 물소리를 타고 끝없이 흐르고 흘러서 영원의 피안까지 찾아가 보렴! 밤은 자고, 별은 우는데 낙동강은 누구를 찾아 소리치며 어디를 가려고 그렇게 흐르는가?
 
143
두 사람은 한참 바깥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실내로 돌리며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춘엽씨의 근래 생활! 덧없는 젊은이의 설움! 그리고 이상(理想)의 번민! 장래의 생각! 이러한 이야기를 서로 교환하는 동안에 차는 진영, 창원등 모든 정거장을 지나 구마산역에 멈추어 섰다.
 
144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구마산역까지 나와주신 R씨의 안내로 오처(吾妻)여관으로 향하였다. 오처여관에서 행구(行具)를 풀고 저녁을 먹은후에 R씨와 춘엽씨는 돌아가고 나 혼자만이 이층 베란다에 서서 멀리 앞을 바라본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산만의 물소리는 출렁출렁 소리치는데, 하늘에서 은실같이 햇금햇금 내려오는 별 줄기가 물위에 떨어져 방울방울 구슬 빛을 던지고 있다. 아, 마산만의 밤 물결! 너는 누구를 위하여 그다지 고운 물결을 던지고 있느냐?
【원문】꽃지는 남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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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영(盧子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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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