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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我觀) 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批評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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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4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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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觀[아관] ‘階級文學[계급문학]’ 과 批評家[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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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이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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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문학 시비론(是非論)을 고(告)하는 광고를 보고 나는 뭇쳑 기대햇섯다. 모든 것의 가치가 전환하여 가고 내용이 달너지는 오늘이다. 조선문단에셔 이 계급문학에 대하야 얼마나한 의식과 자각을 가졋나 하고 나는 넘치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개벽』이월호를 손에 들엇다. 읽고 난 뒤에 나는 (고백하면) 조선 문인들의 머리가 아즉 저급하고 의식 기분에셔 배회하고 잇는 것을 늣겻다. (물론 그이들 쟁자(爭者) 외에도 깁은 의식을 가진 이가 잇겟지만) 내가 이 글을 쓰기는 그이들 욕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계급문학이 오늘 우리들의게 얼마나 절실하고 긴장한 문제가 되여야 할 텐데 도모지 지금 갓해서는 계급이란 계급까지도 모르고 잇느니가 대부분이다. 예술가는 목적이 업다, 이론이 업다 허닛가 계급문학론 갓흔 게야 오불상관(吾不相關)이다 하느니가 잇겟지만 그건 십구세기 이전의 예술가의 말이다. 져근 기교와 모방적인 화사려구(華辭麗句)로 작문하려는 이들의 자기 변호에 지내지 못한다. 나는 이 불가피이고 불가항인 이 문제에 대하야 식자(識者), 문인, 지식계급이나 무식계급이나 물론하고 다 한가지로 죰더 생각하고 죰더 살펴 달나 함을 원하는 뜻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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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경에 잇슬 때 프로레타리아문학 대 블죠아문학, 계급예술에 대하야 훤조(喧噪하게 쟁론하든 일본 문단을 목도하엿다. 그이들도 덥허놋코 자본가는 악독, 부정의하고, 프로레타리아는 정의, 정직하다는 개념적 계급의식을 부정하고, 순진한 인류의 혼의 표백에는 계급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는 편과, 또 인간은 개념상의 사람이 아니고 일정한 구체적 정신상 급(及) 육체상의 사람인 이상, 또 일정한 공간, 시간 안에셔 서식하는 사람인 이상, 그 위치, 생장기식(生長氣息)하는 처지가, 즉 계급에셔 버서나지 안는다고 주장하는 편, 이 두 편이 명확, 확실하게 논진(論陳)의 근거를 가졋섯다. 그러나 그이들은 “금수(禽獸)를 쓰면 금수문학이라 하겟느냐.”하거나 “음료수에, 공기에 계급이 잇느냐.”하는 얼토당토 안는 유치하고 혼미함은 업섯다. 수년을 지낸 오늘 우리 문인 중에는 요령도 회득(會得) 못하고 잇는 니가 잇다. 황당무계한 논리와 아실아실한 말세뿐이다. 『개벽』이월호 이후의 다른 잡지에도 이에 관련한 논문이 서너 가 잇섯다. 그러나 계급문학이란 언졔 우리문단에셔 말한 바 잇섯나 하고 다시 아무 소리 업시 사그러진다 이것이 더욱 나로 . 하야곰 계급문학에 관한 이 글을 쓰게 맨든 동기의 하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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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 업는 정신을 밋는 고답파(高踏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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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졔 본론에 드러가기 전에 상기(上記)한 『개벽』이월호 외 다른 간행물에 낫하난 계급문화론, 혹은 관련된 점에 참가하는 이들의 소론을 잠깐 둘너보쟈. 물론 첫 절에 말한 바와 갓히 시인 부인을 물론하고 그 논리와 주장이 아쥬 개념적이고 모호하닛가 다시 말할 필요도 업겟지만 나는 내 주장을 표명하쟈는 전제로 그이들의 소론을 검토하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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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씨(諸氏)의 태도를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잇다. 하나는 계급문학을 부인하는 이들, 하나는 시인하는 이들이다. 또 부인하는 이들 중에도 고답적 태도와 회색적 태도 두 가지가 잇다. 어린 아희가, 어머니는 이 세상에 다만 하나인 나의 신뢰할 사람이라고 맹목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밋는 것과 갓히 그이들은 벌서 그 자신의 과거 수십년간 생활하고 사색해 오든 분위기에 마비된 결과로 맹목적 혹은 본능적으로 인류의 최고한 사명을 가진 문학, “인생의 생활의 저류에 촉(觸)한 문학”, “영원성을 가진 문학”을 밋는다. 그러나 어이하랴. 그 맹목적 본능적이란 것이 실상인 즉 현대 생활의식에 눈뜨지 못하고 젹은 기교와 과도기의 민중의 무식한 약점을 기만하야 꿈구든 혼미 상태에 잇는 경지에 불과하다. 그러닛가 그네들은 소위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派)라든지가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주형(鑄型)이 아니라”는 결론을 엇는다. 사람이 한번 현실적으로 이 시대, 이 민족, 이 토지, 이 처지에 사러잇는 이상 엇지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에 속함 업시 사러갈 수가 잇스랴. 나는 그이들을 혼미자라는 대명사 외에 할 말이 업다. 생물학적 숙명 밋헤서 세포의 영위와 번식생활만 하는 아미 . ― 바보다는 더욱 진화한 인류이다. 인류는 ― 더구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의욕해야 하고 행동해야 할 처지에 잇는 정신적 생활을 하지 아느면 멸망이 여지 업는 생활선에 서 잇다. 그러한 우리들이 져거두 의식적으로 엇더한 생활의 전(全) 의의를 파지하고 (굉장하게 들니겟지만) 창조적 생활을 하랴는 정신적 노동자가 엇지 아미 ― 바와 갓흔 무경향, 무주의, 무파한 생활을 할 수 잇스랴. “다만 예술가 자신의 막지 못할 예술욕”에서 문학자들이 창작한다는 것은 아미 ― 바와의 막지 못할 생리적 숙명 밋헤서 “막지 못할 생식욕(生殖慾)” 의 표현을 희망한다는 것과 다름 업다. 외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옴갓 고통과 번민을 바든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외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떠다니는 원시적 단세포 미물(徵物)의 생활을 버리고 의욕적으로 표현뿐만 아니라 보다 높고 보다 올은 생활을 창조하려고 애쓰는지, 이러한 심경은 그네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업슬 것이다 이러한 . 아미 ― 바갓흔 태도로 설혹 기교가 묘하고 묘사화려(描辭華麗)한 창작이 산적하게 맨든들 우리의게 과연 무슨 관계가 잇스랴. 죰 생각해 봐라. 쥬린 자의 앞에 화려현란(華麗絢爛)한 화류(花柳) 쟝농을 갖다 쥰다 한들 그 화류 쟝농의 화려현란만 가지고 쥬린 자의게 무슨 쟝농의 가치가 잇스랴. 무슨 흥미며 무슨 소용이 잇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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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답적 태도를 가즌 이들은 그러면 대체 “사람이면 누가 보아도 볼 쥴을 모르면 듯기만 해도 문학의 효과를 생(生)할 수 잇는 문학”이란 엇더한 것이냐, 엇더한 내용과 가치를 가즌 것이냐 하는 필연적, 논리적 의문에도 대답함이 업다. 이것이 내가 고답적으로 계급문학을 부인하는 이의게 질문하려는 까닭이다. 톨스토이의게 반박당한 각 미학자의 미로써 대답할 이가 잇슬지도 모르지만, 또는 ‘문예의 영원성’을 말하며 ‘사해동포’의 사랑으로, 형식과 내용이니, 혹은 ‘절대적 윤리’라는 것으로 대답할 지도 모르지만 그건 벌서 지내간 세기의 예술관이엿고 썩어빠저 생명이 업서진 예술관이다. 그런 예술관에서 나온 작품은 오늘 우리들의게는 화려현란한 화류 쟝농 외에 아모 것도 아니다. 그러닛가 “예술가 자신의 막지 못할 예술욕에셔” 창작하는 이는 〈감쟈〉갓흔 스켓치 밧게 못 쓴다. 그만큼 암시 깁고 풍부한 내용을 가진 테 ― 마로도 고만 한번 한숨에 내려 읽고나서는 “고것 묘한 걸, 졔법 썻는 걸.” 하는 잠간기안(暫間氣安)한 감정 밧게 못 쥬게 되고 만다. 만일 〈감쟈〉의 작자가 일정한 주의와 주장이 잇는 이라면 〈감쟈〉보다 더 훌늉한 장편을 맨들 쥴 안다. 또 “경향, 주의, 파라는 것이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주형이 아니라”고 밋기 때문에 그러한 작가는 다만 이웃집 마누라가 놀너 갓다가 이약이하는 것 갓흔 ― 서울 중류 계급 생활의 단편을 묘사함에 불과한 〈전화〉을 내놋케 된다. 설령 대화가 발랄하고 착안이 묘함을 어덧고, 테 ― 마의 발전에 자연스러워 그것만으로 독자를 끈다 하여도, 역사상으로 엇더한 시대의 경성 중류계급 생활을 여실(?)히 그려냈다는 그것뿐이지, 또 그러한 작품은 도서관 깁히 너두엇다가 몃 세기 후에 끄즈버내여 당시의 조선 경성 중류 계급 생활이 이랫구나 하는 고고학자 , 풍속 연구자의 자료가 될 뿐이지 오늘 (기억하라, 오늘) 이때, 이 경우의 우리의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잇스랴. 또 “계급을 초월한 예술” 작가이기 때문에 푸티 블죠아지의 갑싼 눈물이나 호기심이나 끄을 〈무정〉, 〈개척자〉, 안이한 인도주의적인 동시에 평범하기 짝 업는 〈혈서〉밧게 못 내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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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灰色) 문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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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회색 태도를 가즌 이가 잇다. 이것은 말할 것 갓흐면 이것도 그럴듯 져것도 그럴듯 양방(兩方)의 주장을 다 그러히 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의식이 철저치 못하기 때문인지 혹은 스켑프틱한 소질 때문에 배회방황(徘徊彷徨)하면서 회색의 만트를 둘너쓰고 쥬져안는 이들이다. (혹은 계급문학을 “인생 생활에 필연적 발생”인 쥴 알면서도 죠금도 그럴듯한 작품은 못내놋는 이도 잇다.) 즉 계급의 불가피할 존재와 이에 대한 문예의 제이차성을 시인하면서도 끗헤 가서는 “계급만을 위해 쓰호느냐, 전인류 생존을 위해 싸호느냐” 하고 물너안는다. 혹은 꿈결 갓히 “엇더튼 장차 프로문학이 조선문단에도 발흥(勃興)할 것을” 미드면서도 “문인으로는 반드시 이니 프로니를 표방해야 할 것인지를 말 못하는” 이도 잇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거리가 못 된다. 외 그런고니 이미 인류생활에 계급의 불가피할 대립을 시인하면서도, 또 계급의 양자(兩者)중 일방(一方)이 반드시 투쟁(나는 이 투쟁을 다만 물질적뿐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 투쟁에까지 밋는다만)으로써 타계급에 대하여야 할 혁명적 반항심을 가지고도, 오히려 엇던 의혹과 가치업는 도피에 쟘기고 잇다면, 그는 (죰 진부한 비유지만) 의를 보고 행치 안는 겁쟁이거나, 가치와 진리를 목전에 거러두고도 따서 내것을 못 맨드는 하우(下愚)에 지내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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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고찰할 한 문제가 잇다. 왜 사람은 알면서 못하느냐? 하는 문제다. 즉 우에 말한 겁쟁이나 하우가 왜 되느냐, 스스로 뚜러지게 아는 쳬 하며 외 못 밋고 잇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문제는 지(知)와 행(行)의 관계에 떠러진다. 알긴 쉽고 행하긴 어렵다고, 예전붓허 항용 써오는 말이다. 그 대신에 손문(孫文)식의 어려운 것은 지(知)오 행하긴 쉽다는 가르침이 또 잇다. 지이행난(知易行難)이냐 지난행이(知難行易)냐. 이 점에 대하야 나는 다음에 차차 고찰해 보겟다마는, 하여간 알고 못 미드며 못 행하는 회색적 태도가 조선 문인 중에 잇는 것을 여긔에 지적해 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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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문학론자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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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근소한 비평가 중에는 명확한 가치로 계급문학을 시인하느니가 더욱 근소하게 잇다. 그러나 나는 생각컨대, 그이들은 아즉 계급이란 그것붓허 명확, 절실하게 의식 못한 점이 잇는 것 갓다. 맑스의 『공산당 선언』을 이, 삼자 졸독(卒讀)하고 계급의식을 불소화(不消化)한 채로 넘겨 생키지 아넛나 하는 감이 잇다. 불소화한 채로 연하(嚥下)한 뒤라도 병만 안낫스면 고만이지 하는 정도에 끈치지 말고 참으로 그것을 내 장부(臟腑) 속에 소화해야 하겟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인류가 사회적으로 생활하는 동시에 불가항력으로 계급선(階級線)에셔 버서나지 못한다 함을 이미 압헤 암시햇지만 사회는 단순한 게 아니다. 지금 추상론에서 죰 물너안져서 사실의 우리 생활을 생각해 보쟈. 거긔에는 봉건 생활, 가족주의 생활에서 지리멸렬하게 된 생활을 무의식적으로 격거 오다가 청천벽력으로 세계의 변화하는 조류의 파급에 눈 뜨쟈, 자기 주위에는 역시 예전 봉건제도와 가족주의 생활의 공기가 사라지지 안코 그대로 나머 잇는 동시에, 근대적 독연기(毒煙氣)가 다시 밀쳐 오는 중에 잇는 것을 발견햇다. 그것은 즉 소위 근대문명이 산출한 자본주의 제도이다. 우리는 지금 이 예전 남은 독기와 새로 밀쳐 드러오는 독기에 거듭 포위되여 잇는 것을 안다. 그러면 이 이중의 독기를 진실로 보고 잇느니가 몃이나 되느냐 하면 호호(浩浩)의 늣김이 이러남을 금(禁)치 못하겟다. 과도기인 까닭으로 자유, 파괴, 혁명을 부르지지나 엇더한 자유, 엇더한 파괴, 엇더한 혁명을 요구할 것인가는 도모지 모르는 것 갓다. 즉 개념상의 자유, 파괴, 혁명, 반항의 목소리는 들리나 현실을 직시한 구체적인 그것은 도무지 업다. 파괴, 혁명이라는 미구(美句)는 봉건 그 시대에서도 업섯든 것은 아니다. 그이들 역시 ‘인권선언’으로 자유, 평등, 우애를 도금(鍍金)하엿고 평화, 자유, 데모크라시로 개인을 속박하고 민중을 기만햇섯든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아주 가치가 전도된 평등, 자유, 박애를 본다. 물론 어늬 나라 어늬 시대든지 계몽기에 잇서서는 외국에서 드러온 그대로의 혁명사상을 가지고 만족햇섯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벌서 계몽기를 버서낫다. 또 버서나야 하겟다. 특수한 지리적 경우와 특이한 정치적 처지에 안즌 우리닛가 안한(安閑)한 계몽기적 이상주의로만 우물쥬물하다가는 보다 큰 실패와 고민은 피할 길 업슬 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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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 계급문학론자의 태도에는 우에 말한 바와 갓히 형해(形骸)가 갓초이고 의식에 넘치는 점을 못하겟다. 근소하나마 매월 월평에 나오는 평자의 태도를 보아도 알겟다. 계급투쟁을 썻스닛가 그것은 프로문학이라는 맹목적 비평이 젹지 안타. 나는 고백하지만 계급문학을 부인하는 작가 중에 오히려 작품으로서의 가편(佳篇)이 만히 잇다. 나는 이것을 소림낏치게 두려워한다. 이후로 참 계급에 눈 뜬 전형적이고 철저할 새 작가가 아니 나오는 이상 져러한 작가의 져근 기교, 달칙지근한 묘사(描寫)로 의식을 마비식힐 터이니 이 엇지 두렵지 안느냐. 나는 〈전투(戰鬪)〉에 낫하난 계급투쟁의 긍정보다는 몽롱한 설법체(說法體)의 묘사와 개념적인 관찰에 더 실망햇다. 또 〈붉근 쥐〉에 낫하난 미직지근한 상징적 수법에 만히 실망하고 작자의 엿본 테 - 마는 가슴에 힘잇게 밧지를 못햇다. 나는 문학 외 모든 예술에 기교나 형식을 절대시는 아니하나 중대시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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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점에 입각하야 나는 참 계급에 눈뜨고 능히 대오(大誤) 업시 옥석을 선정하는 비평가의 출동(出動)을 열망한다. 비평가의 직분은 이것뿐만 아니라 의식은 모든 인류의 정신을 개종식힐 것이닛가 일대(一代)의 시대의 지도자가 되고 프롬프터가 되여야 한다. 여긔에셔 나는 우에 숙제로 두엇든 행이지난설(行易知難說)을 생각해 보겟다. 계급에 눈뜬 쳬 하면서 능히 가치화를 못하는 작가는 웨 하우(下愚)나 겁쟁이 노릇을 하고 마느냐 하면 실상인즉 그네들의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알기만 하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나 개념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알기만 하기 때문이다. 추상으로나 개념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감촉하는 것(to get through the emotion and feeling with consciousness), 이것이 참의 앎이다. 이럿케 말하면 지(知)라는 말의 유희에 지내지 못한 것 갓흐나 내 본의는 더 중대한 점에 잇다. 과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재료와 사실을 아는 것은 심리학상 단지 기억에 불과하다. 인간의 행동 ― 모든 현실화는 반드시 의식적 감촉에셔 결과된다. 예를 들쟈. B란 노동자가 A라는 자본가의게 대하야 계급적 증오의 감(感)을 가지고 잇다 하쟈. 그러나 이 B라는 지식계급의 노동자는 독서와 견문과 환경에셔 추상한 계급적 의식 ― 즉 더퍼놋코 자본가는 노동자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잇다. 다만 알고만 잇기 때문에 자본가에 대한 실제 행동에 드러가서는 타산과 이해(利害)와 얄미운 교제만 잇슬 뿐이다. 즉 계급의 필연한 적대행위는 나오지 안는다. 이에 반하야 C라는 소작인은 몃 번이나 따구를 어더맞고, 면 번이나 아니꼬운 꼴을 보고 , 몃 마지지기밧게 업는 소작답(小作沓)을 차금이자(借金利子)로 빼앗기고, 몃 번이나 허리와 머리를 굽혓스나 다시 더 사러갈 도리가 업도록 옴갓 원한, 비통, 참고, 기아, 사경을 맛보앗다. 이 C는 지주의게 대하야 자기들이 안즌 처지를 의식적으로 감촉햇다. 해서 그 감촉의 결과로서 소작인과 지주라는 관계와 자기네들의 운명의 길을 알엇다. 이러한 앎에서는 조만간 엇던 행동이 출현하지 안코는 마지 아니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참 앎이라는 뜻이 어데 잇스며 엇지하야 알기 어려우며 행하기 쉬운 것을 이 예에셔 알어두쟈. 그럼으로 어늬 시대든지 압박과 반항은 시간적으로 동일하엿다. 그리고나서 비로소 행동의 윤리화와 논리화가 생겻다. 그러나 압박과 참고(慘苦) 속에 잇스면서도 일반 민중은 쳐음에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잇다. 이것은 전혀 압박자와 지배계급의 순치(馴致) 수단에 원인의 대부분이 잇섯고 또 민중 자신들의 혼미에도 소부분의 원인이 잇섯다. 이런 경우에는 물론 민중 자신이 몬져 눈을 떠야 하겟다. 눈을 뜨기에는 주위에 임의 외여싸고 잇는 상태에 대하야 의식적으로 감촉해야 하겟다. 그러나 민중은 지배계급의 순치에 감촉의 힘이 어둡게 되엿다. 여긔에서 소위 소수의 특별히 주위의 환경에 대하야 감촉이 예민한 자가 민중 가온대서 생긴다. 이것이 즉 지식계급이다. 그러나 그 지식계급 중에서도 진위강약(眞僞强弱)의 여러 종류가 잇기 때문에 계급적 의식이 남보다 예민하고 양심이 남보다 굳센 자가 낫하난다. 이것이 즉 비평가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 , 루터, 기독(예수), 공자, 볼테 ― ㄹ, 루소, 맑스, 간디가 모두 이 종류의 ‘시대의 비평가’들이다. 그네들은 과거의 계급과 사회에 대하야 전투할 뿐 아니라 일반 민중의 이해(利害)와 복리를 위해서 선도자가 되며 프롬프 터가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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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의 인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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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문학은 계급을 시인하는 점에서 출발한다. 계급이란 것은 무엇인가. 맑시스트의 “과거의 모든 기록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나는 그대로 허용해서 생각치 안켓다. 우리는 적어도 일인(一人) 이상의 공동생활 ― 더 넓게 말하면 자연 속에셔 사는 인간은 대립에서 버서나지 안는다. 이 대립은 현실 생활의 본체다. 미와 추, 명과 암, 선과 악, 정의와 부정, 자유와 속박, 피(彼)와 차(此), 타(他)와 아(我), 이런 모든 대립은 현실적 인간 생활의 본상(本相)이고 진리다. 이런 대립을 버서나려 하는 이상주의자는 우리의 참 생활에 아모 관계가 업다. 졔 아모리 그런 대립을 초월한 인생관이나 우주관을 가지고 잇다 하드래도, 먹고, 놀고, 입고, 일하는 생활에서는 이 대립을 버서나지 못한다. 이건 ‘생(生)’이란 것이 잇은 후 ‘생’이란 것이 끗날 때가지 영구히 그리할 것을 추리나 유추가 아니라도 직각(直覺)해야 할 일이다. 그런대 이런한 원시적 대립에셔 한 보 더 나아가 우리는 계급이라는 대립에 당도하여 왓다. 즉 압박자와 피압박자, 약탈자와 피약탈자, 자유를 생활하려는 자와 자유를 빼앗는 자,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우리의 생활은 여긔까지 밋쳐 왓다. 생활상의 원시적 대립은 오늘날 모든 과학의 덕택으로 어느 정도까지 무관심하게 되여 왓으나 그 대신에 그 과학이 쥬는 옴갓 해독(害毒)이 오늘 우리의게 이러한 대립을 쥬게 되엿다. 즉 근대 산업문명이 쥬는 계급적 대립이다. 사람이 원시적으로 사러갈 때에도 대립과 싸워 왓거늘 하물며 오늘의 계급적 대립이랴. 우리의 조상들은 폭풍우와 한서와 싸워서 가옥, 의복, 채난어한설비(採暖禦寒設置)를 해왓다. 선과 악, 진위와 미추를 구별하야 진선미를 구하려고 소위 철학, 종교, 예술을 발달식혀 왓다. 오늘 우리는 계급 대립에서 싸워야 하겟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수단과 능력과 두뇌를 써서도 자연의 폭위를 아쥬 제(除)해 버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 누천년간(累千年間) 진선미니하며 떠들엇서도 아즉까지 엇던 것이 진선미인지 몰으고 잇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급의 대립에서 우리들은 버서나지 못한다. 계급은 영구한 인간 생활의 실상(實相)이다. 엇던 이상주의자들은 오늘의 이 계급선의 피안에 계급과 대립과 쟁투와 피아를 버서난 절대와 영원과 평화 안식이 잇는 나라를 꿈꾼다. 그러나 그는 몽상에 끈칠 뿐이다. 우리는 ‘생’이 끗날 때까지 계급에셔 버서나지 못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기록된 역사’이전, 혹은 원시 공산제도의 사회에서는 이 계급의 대립과 쟁투가 업섯는 것으로 안다. 알기 때문에 그이들은 장래의 계급의 쟁투가 업슬 사회주의의 나라를 꿈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밋지 못한다. 속박에 대한 구실, 즉 자유, 상서(相噬에 대한 구실, 즉 평화는 인류의 정신 생활이 시작된 후 오늘까지 되푸리해 왓다. 그러나 어늬 곳에 영원절대가 잇스며 진선미가 잇느냐. 계급의 대립에서도 그 내용이 변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급 그것은 결코 업서지지 아넛다. 사회생활이 잇슬 때까지는 계급은 인간 생활의 설자(楔子)며 원리다. 그럿타, 사회생활이 잇는 동안은. “사람은 나면서 정치적 동물”이라는 플아톤의 말을 나는 “사람은 나면서 계급적 동물”이라 곳치겟다. 이점에서 크로포트킨일파(一派)의 무정부주의자는 참 큰 몽상주의자이다. 사람은 지배와 압박에서 버서나지 못하는 동시에 그것 업시는 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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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계급의 대립에서 버서나지 못한다고 사람은 그에 만족할 것인가. 그는 네가 한서(寒署)의 자연법칙 속에셔 버서나지 못한다고 그대로 안져서 얼어쥭거나 데여 죽게느냐 함과 갓다. 여긔에서 나는 인간의 운명을 본다. 격랑악파(激浪惡波)는 절벽의 암석을 깨트려 버리려고 밀녀오는 것이 아니다. 암석은 다러지든 안 다러지든, 깨여지든 안 여지든, 파랑(波浪)은 자신의 끗칠 수 업는 힘으로 밀쳐온다. 개인의 생의 역(力)은 영원하다. 그러나 사회의 법칙은 한번 잇게 되면 그대로 존속하야 가려고 한다. 여긔에셔 개인과 사회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이러난다. 우리는 사회주의니 사해동포니 민주주의니 하지만 거긔에셔 개인의 사회에 대한 반항을 보어야 한다. 한 보 더 나가서 갓흔 경우에 잇는 개인의 수량적 집단 중에서 개인의 ― 민중이라는 ― 큰 개인을 볼 수 잇다. 이 점에셔 개인과 민중은 일체이고 불가리(不可離)할 동체(同體)다. 이 원리 때문에 천재나 위인이나 선구자들은 민중의 대언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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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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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치 못할 계급 대립에셔 사러갈녀는 사람은 얼마나 지긋지긋한 일인가. 모든 시대의 이상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참다 못해 소리치며 하눌에 호소햇다. 신을 맨들고 상아탑을 짓고 지혜의 현궁(玄宮)을 궁리햇다. 그네들의 생활의 노력과 실현 못되는 동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슴이 압프고 피를 토하겟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리는 가슴을 피고 피를 토한 후 다시 니러나지 아니하면 못 된다. 그것이 생활이다. 운명이다. 생활이 업시 운명이 업시 인생이 무엇이며 평화와 애(愛)와 도덕이 다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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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대와 시대를 따라서 계급의 처지와 내용이 변천해질 뿐이라면 사람은 이 계급을 불관(不關)하고 사러가지 못할가. 영구히 피할 수 업는 사회 생활의 계급이닛가 수라장(修羅場)의 참화(慘禍)를 피해 가며 사러가 보지 못할가. 이런 길로 생각이 드러가서 소위 평화와 영원과 윤리와 박애라는 이상을 맨드러냇다. 그이들이야말로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리해서 결국 가셔는 “계급을 피할 수 업지 안늬? 그러닛가 너와 나의 계급적 대립이야 말로 운명의 희롱이지. 너와 나라는 다 갓흔 인간 사이에야 무슨 반목 질시할 요 가 잇니 피차의 (要) . 고통이니 다 갓히 사러가쟈. 그 대신에 내가 너를 위해 이만한 이익을 쥬겟다. 응,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우리 사해동포가 되쟈.” 이런 기만이 이상주의자의 입을 통해서 평화박애라는 마비제를 발명햇다. 그리고 져근 이해(利害)로서 달내여 왓다. 이것이 근대 산업문명으로붓허 시원된 경제적 계급적 쟁투를 연화(軟和)키 위하야 모화(貌化)된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생(生)’은 힘이다. 이 힘이 극(極)할 때 까멋든 눈이 떠진다. 챼펙크의 〈인조인간〉이 눈을 뜬 때이다. 여긔서 시대의식이란 것이 낫하난다. 톨스토이의 일은바 ‘종교적 의식’이 이것이고, 우리 비평가의 일은바 ‘심원(心願)의 곡(曲)’이란 것이 이것이다. 이 ‘시대의식’이란 것이 민중 자신 속에셔 사러날 때 이에 대항할 아모 것도 천지에 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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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구나 오늘날쳐럼 정의, 인도, 자유와 생활의 이해(利害)가 상반되는 대립경(對立境)에셔는 이상주의자라는 모르히네가 잇는 것을 봐야 한다. 오늘 이 이상주의자가 설혹 다음날에 가셔 다른 이상주의자로 화생(化生)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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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주의 문예의 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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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들은 엇더한 종류의 경지를 꿈꾸고 잇다. 그 경지의 종류야 평화나, 자유나, 박애나, 상부상조나, 천당낙원이나 아모것이라도 둇켓지. 그러나 공통한 점은 인간의 영원성을 밋는 곳에 잇다. 이것은 특별히 동양류(東洋流)의 사상가나 문예작가에 잇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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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들은 개인 즉 불신(佛神)이라는 경향을 가졋다. 개인은 개인을 초월할 것. 그리하야 영원불변한 신불(神佛)의 경지에 들어갈 것, 이것이 아니면 현실 인간생활은 갑 업고 비통한 것이라는 신조이다. 그이는 다만 그 경지에서 안주하고, 명상하고, 그리하야 만족한다. 탈속과 명상과 직각(直覺)으로 인간의 영원성을 어들 수 잇다고 밋는다. 그리하야 인간생활의 모든 피나는 대립과 불완전을 초월하려고 한다. 또 사실 초월하기 쉽다. 즉 고대식 (古代式)의 고행자나 수업자(修業者)나 로만틱한 시인 모양으로. 그이들 압헤는 사생(死生)의 구별이 업고 대립의 차별이 업다. 즁들이 쟐 말하는 차별상(差別相)이 업다는 말이다. 쥭는 그때에 가서도 사생의 차별이 업기 때문에 그이는 영원한 생, 열반이나 천당에 드러간다. 그러닛가 그이들의 생활은 중간이나 과정 업시 결과만 예상하는 자족자만(自足自滿)이다. 눈 끔적하야 어들 수 잇는 자만(自滿)이다. 일시적 비약을 바라는 자만이다. 중간의 필연적 경로를 생략하고 한번 사색의 섬광으로 왼 우주를 포함하려는 자만이다. 모든 현실이나 과학적 존재를 무관심히도 녁이는 자만이다. 이러한 자만에서 나온 예술품의 호견본(好見本)은 타고 ― 어, 딴테, 노파 ― 리스의 예술품이다. 또 그 납뿐 견본으로는 조선문단의 엇던 종류의 직업적 문학이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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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경지를 가즌 문예품에 필연성이 잇슬가. 나는 못 밋는다. 왜 그런고 하니 이 필연성이 벌서 대립이고 차별상이고 상대적인 까닭이다. 그이들은 됴워 소리치되 “그것 보렴. 영원성을 가진 예술품에 필연적이라는 상대적 말이 얼토당토 아닌 것 아니냐.” 그러나 나는 이에 대답하되 “너희들의 예술품이 영원이라는 현상이 영원한 것이면 너의 자손이나 동류(同類)가 외 쥬림을 못 참느냐. 혹은 쥬림을 면하려고 애쓰느냐. 이건 그이들이 사람이라는 필연성을 가졋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이들의 예술품도 사람과 갓히 필연성이 업다면 우리 인간의게 무슨 소용이 잇겟늬.” 그럿타. 이 필연성 업스면 천지, 산천, 역사, 금은(金銀)이 죄다 우리의게 무의미하다. 설령 일월성신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라도 우리는 필연성에 생활하는 예술품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업다. 필연성이란 즉 예술품의 상대성, 비영원성이다. 이상주의자들이 영원성이 잇다는 예술품이 벌서 그러하거든 기타의 옴곳 인류의 정신적 생활이랴, 물질적 생활이랴. 시대에 따러, 곳에 따러, 혹 순간에 따라서라도 예술품의 내적(內的)가치는 상대적이다. 우리는 개념 우에서 사는 게 아니닛가 예술품의 내적 가치에 따라서 판단하쟈. (로만 로란의 『민중극론』의 서문(序文)에서 예를 챠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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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연성의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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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 · 쟉크 · 로소 ― 가 십팔세기 중반 유명한 디죠 ― ㄴ 대학 논문 중에서 명확히 말햇다. “예술은 한 사치품이다. 인류를 퇴폐로 끄을는 자다.” 그러나 우리는 져 훌늉하고 인간적인 ‘루소 ― 의 작품’ 을 가지고 잇다. 이 모순되는 사실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루소 - 의 시대는 장차 붕괴하려는 구시대의 극(極)한 제도 밋헤셔 새로운 시대의 청신 발랄한 맹아를 장(藏)햇든 때이엿다. 미묘한 이 신고(新古)의 엉크러진 여명(黎明)의 때에, 루소 - 는 참 인생은 과거의 흔 누덕이 속에서 살 수 업다, 완전한 자아 천생(天生)의 소질, 완전한 평등과 자유(自由)러운 생명의 새로운 비약이 아니면 안 되겟다는 것을 촉감(觸感)햇다. 모든 날근 공기(空氣) 속에서 툴툴 떨고 나와 새로운 자아와 자유의 왕국을 건설하라. 즉 자연에 도라가라. 자아의 극치(極致)는 자연 속에셔 발견할 수 잇다. 이럿케 생각한 루소의 주위에는 허위, 허영, 허식, 악덕, 부자연, 불평등의 사회가 잇섯다. 그리해서 그이가 풍속을 괴란(壞亂)식히고 사회를 타락식히는 임부(婬婦)로써 예술에 선고(宣告)를 내릴 때 그이는 새 시대의 경종인 예술품을 맨들고 잇섯다. 이것은 얼는 보면 모순갓기도 하다. 또 루소 - 는 필연적으로 그런 예술품이 나와야 할 것을 밋지 아니햇스나 역사적으로 보아서 루소 ― 의 허식 업는 적나라한 부르지즘이 곳 예술품을 맨드러내게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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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 의 예술품에는 왜 필연성이 잇느냐. 현재 자기의 약점과 결점과 닷토아가면서 보다 완전한 자아를 실현코져 하는 노력이 잇다. 이러한 필연성은 철저하게 인간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 예술품은 절대로 가치를 가지지 못햇다. 대상과 대립하야서 비로소 형해(形骸)를 갖쵸이고 가치를 갓게 된다. 맛치 안구(眼球)가 한 육괴(肉塊)에 지내지 못하지만 시각의 사명을 달(達)하기엔 안구 자신 이외의 대상·물체가 잇서야 하는 것 갓히. 대상이 업시는 시각이 이루지 못하닛가 대상 업는 안구는 단지 한 개의 육괴에 불과(不過)하고 비록 수백만 개가 잇슬지라도 아모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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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성에 입각한 예술은 오로지 자아의 완전한 의식과 노력을 요구한다. 또 자아와 비아(非我)의 관계를 인식하며, 따러서 그 관계 상태의 완전함을 실현코져 한다. 이곳에셔 생명의 연소(燃燒)로서의 예술품의 가치가 잇다. 십팔세기의 신구(新舊) 사상과 제도 밋헤서 이 자아의 실현을 엇기 위해 허덕거리는 것이 루소 ― 의 예술품이다. 거긔에는 이상주의의 놉게 뜬 경지가 업고 다만 행동이 잇스며 현실의 세계가 잇고 인식의 대상이 잇다. 무목적한 이상주의 예술과 정반대로 행동의 목적이 넘처 잇다. 일(一) 섬광의 비약으로 곳 신불의 경지에 드러가려는 이상주의 예술품과 반대로 영원한 신불이 아즉도 영원한 거리(距離)에 안졋다는 것보다도 신불을 쟙은 그 순간 벌서 그 신불은 천만리의 외역(外域)으로 다라나 잇다. 내가 내 거림자를 쟙지 못하는 것쳐럼. 즉 우리는 영원히 일정(一定)치 못하고 고정치 아니한 실재적 이상을 버리지 못한다. (이상주의자의 구문(口吻)으로 말하면 영원윤회) 그러나 그 실재적 이상은 임의 말한 바와 갓히 그 자신이 고립해 잇는 게 아니라 반드시 대립의 경지에서만 실재요 이상이다. 이 대립의 타변(他邊)이란 물론 시대의식의 그것이다. 이 점에 잇서서도 소위 이상이란 것이 독자(獨自)한 영원성이라든지 진리성이 잇는게 아니고 상대적으로 필연성에 지배되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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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가여,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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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를 부르는 요구는 특별히 오늘 조선문단에서, 우리 사회에셔 필요하다. 어늬 시대, 어늬 사회를 물론하고 큰 대립이, 반목과 이해(利害) 상관이 심한 때에는 통트러서 우와 좌의 양전진(兩戰陣)에 나노허진다. 그 중간에서 색채와 주장이 희미한 자도 잇겟지만 그건 조만간 대세의 진행에 따러 소멸될 테이며, 또한 그러한 회색자도 다른 반동사상자와 동일하게 대세의 흘늠의 한 발반(潑返)에 불과함을 지시한다. 해서 이 두 전진(戰陣)에셔 전투가 일어날 때 그네들은 예술이나 사상이나 혁명이나 모든 것에 대해서 민중의 탄탄대로에 쟈갈이나 돌뎅이의 장해(障害)가 된다. 이 장해물이야말로 엇던 때는 사소한 노력상의 손해를 쥴 뿐이오, 또 엇던 때면 위기일발의 큰 실패를 당하게 하는 위험물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비평가의 부담에 잇다. 비평가 업는 사회는 책임 업는 사회, 책임 업는 사회는 불상한 사회, 망하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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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엇더니는 비평가의 출현을 그대지 바라지 안느니가 잇다. 그이의 안심(安心)은 대세의 필연적 진행에 두는 것 갓다. 진실한 비평가가 민중의 대언자가 되며, 프롬프터가 되는 데는 결국 그 사회와 민중의 ‘생(生)의 힘’ 문제에 잇다는 이유다. 그러하나 봉건사회 제도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제도로 변하며 자본주의 사회제도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제도로 변한다고 수수방관할 수 업는 것과 갓히 거긔에는 시대의식과 양심의 강약에 따라 노력과 의욕과 전투의 세계가 잇슬 뿐이다. 한편으로 자연적, 사회상 진화의 경로를 밋는 소극적 태도보다도 프로메토이스의 반발력과 생명력과 의욕력이 더 인생과 사회에 가치가 잇다. 민중은 가만히 잇지 못한다. 자극과 고무를 바랜다. 여기서 힘이 난다. 집과 하눌과 수목과 산천을 태워 버리지 아니하면 못 놋는 기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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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보편적 법칙이다 . 비평가의 시대적 사명은 전에 누누히 말해왓지만 오늘의 문예비평가는 문예나 사상의 감상(鑑賞)에셔만 배회할 것이 아니다. 그런 감상적(鑑賞的) 혹은 인상적 비평은 전(前) 세기식(世紀式)의 제이류 비평가의게 맷겨라. 비평에 창조가 잇고 창작 그것만치 가치가 잇다면 오늘 비평가는 확실히 일대(一代)의 민중의식, 계급투쟁의 지도자가 되며 선봉이 되여야 할 것이다. 무반성하고 무목적하야 가지고 우후죽순 모양으로 족생(簇生)하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이 문단, 이 황무지 벌판에 뽀불 것 뽑고 각굴 것 가궈서 신원야(新原野), 신경작지(新耕作地)를 맨드러 보지 아느려느냐. 비평가여,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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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4.
【원문】아관(我觀) 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批評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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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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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