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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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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김우진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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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돼지(김우진)
 
2
<등장인물>
3
최원봉(29세) 차혁(28세) 최영순(20세) 최 주사댁(58세) 정숙(25세)
4
장소
5
서울 가까운 어떤 군 읍내
 

 
 

1. 제1막

 
7
주사댁 집 앞마당을 중심으로 오른편으로 건넌방, 그 앞에 뒷마루. 왼편으로 큰 대청, 또 그 왼 편으로 안방 영창문이 있고, 그 앞으로 부엌간이 내밀고 있다. 중류 계급의 견실 순박한 기풍의 세간살이, 장독대, 뒤주, 찬장, 심지어 걸레질 잘 해 놓은 마룻바닥, 잘 쓸어 놓은 마루 밑까지 나타나 있다. 여름날 석양.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움이 서늘하게 열어 젖힌 대청 안에서 도사리고 있다.
8
막이 열리면 대청 중앙에 원봉이와 혁이가 바둑판을 마주 놓고 앉아 있다. 세 번째 승패의 끝판이다.
 
9
차 혁 : (기가 난 듯이 다리를 세우며) 흥, 끝판에 탁 대들어 본다. 오냐, 대들어 봐 라. (바둑을 놓는다.)
10
최원봉 : (냉연하게) 네가 말 안 해도 벌써 이렇게 대들지 않았니? (놓는다.) 이리로 막아 버리면 네 살길이 어디냐?
11
차 혁 : (놓으며) 또 이리로 막아 버리면 네 길은 어디고.
12
최원봉 : (웃으며) 이 넒은 세상에 길이 없을까 봐. (놓는다.)
13
차 혁 : 아, 이놈 보게. (생각한 뒤에 놓는다.)
14
최원봉 : 넒은 세상에 길 없을까 봐, 넒은 세상에 길 없을까 봐. (놓는다.) 넓은 세 상에……
15
차 혁 : (웃으며) 길만 찾지만 하는 수가 있니. 다 죽어 가는 놈이……. (놓는다.)
16
최원봉 :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놓는다.)
17
차 혁 : 이 애가 왜 이 모양이야. (놓는다.) 세 집 다 결딴났는데.
18
최원봉 :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생각한 뒤에 놓는다.)
19
차 혁 : (놓으며) 이러면 이 집도 날아갔다.
20
최원봉 : 날아가는 것은 날아가거라. (놓는다.)
21
차 혁 : (승리의 환희) 그리고 남는 것은 목 베인 항우(項羽)만…….
22
최원봉 : 목 베여도 살 수 있으니까 항우란다. 이놈! (놓는다.)
23
차 혁 : (더 큰 환희) 이러면 영영 죽었지. (놓으며) 자 인제 그만두자. 다 되었는 데 내기 한것이나 얼른 내놔라.
24
최원봉 : 이거 왜 이래. 세기나 다 하고 난 뒤에 조르렴. (센다.)
25
차 혁 : 죽는 놈 마지막 청이구나. 제 송장 꼴 보려고 예순, 일흔, 아흔, 스무집이 나 달리지 않았니? (영순이가 꿀물과 복숭아와 칼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와서 옆에 놓는다.)
26
최영순 : (혁에게 말하듯이) 오빠, 너무 골리지 말아요. 백주에 일년생을 가지고.
27
차 혁 : 자, 인제 마지막 백기를 들어야지.
28
최원봉 : 이것 영영 졌구나. (물러앉으며) 하는 수 없이 또 당하는 수로군.
29
차 혁 : (또한 물러앉으며) 아까 네가 욕심부리다가 여기 있는 것을 거두었기 때문에 탈이었다. 아, 패전한 배상이 겨우 이건가?
30
최원봉 : (바둑을 치우며) 얘, 이래 보여도 이 복숭아가 15전씩이란다. 천진 수밀도(天津水蜜桃)야, 알기나 아니?
31
최영순 : 일부러 오시라고 해 갖고 무얼 대접할 게 있어야지요.
32
차 혁 : (웃으며) 영순 씨는 어찌도 그리 잘 아세요. 오라버니 패전할 것을. 세어 보기도 전에 이런 것을 갖다 놓으니.
33
최영순 : 그러니까 오라버니 동생간이지요. (복숭아를 깎는다.)
34
차 혁 : 이리 줍시오. (받아서 깎으며) 나도 참 영순 씨만한 누이만 있었으면 하지 만 패전 예보만은 쏙 빼놓고 말이지요.
35
최원봉 : (웃으며) 패전이라도 알아주니 그만큼 고맙지 않나? 동시에 자네에게는 승전 예보의 천사가 된 셈일세.
36
차 혁 : 잔 다르크란 말인가?
37
최영순 : (잠깐 얼굴을 붉히며) 저는 싸우지도 않았는데 잔 다르크예요? 그리고 잔 다르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천사 미카엘이었더래요.
38
차 혁 : 하하, 이것 또 무식이 탄로되었군. 하지만 오라버니가 미리 질 줄을 알고 있는 것만은 천사 될 자격이 넉넉히 있습니다.
39
최원봉 : 즉 자네 승전을 미리 알고 있는 천사란 말이지. 똑똑하게 안다.
40
차 혁 : 그 말도 더 똑똑하게 안 말이다. (웃는다.)
41
최영순 : 잡수세요. (바둑판을 치우고 쟁반을 가운데 놓는다.)
42
최원봉 : 이기기는 자네가 이겼어도 결국은 다 내 덕인 줄 알게, 이런 좋은 복숭아 는 물론이고, 영순이가 자네 천사인가 무엇인가 된 것까지.
43
최영순 : 에그, 오빠도.
44
차 혁 : 지고 나서는 그게 변명인가?
45
최원봉 : 자네나 너나 다 내 앞에 절해야 한다. 위대한 개선 장군 앞에 가서 두 애 인이 손잡고 축복을 받으려는 것과 같이……
46
차 혁 : 그런 히니꾸는 빼놓고 해라. 비위 상한다.
47
최원봉 : 비위가 상해? (얼굴이 침울하게 변해지며) 개선 장군이란 실상은 패전 장군이란 말뜻을 모르니? 게다가 목숨 붙은 장군이 아니라 죽어 자빠진 석상(石像) 이란 말이야.
48
차 혁 : 이따금 자네 왜 그런 소리는 자꾸 내놓나?
49
최영순 : 그만 두세요. 다른 이야기나 하세요.
50
차 혁 : 자네 그러다가는 나하고 당초에 바둑 못 두네.
51
최원봉 : 목이 달아난 패전 장군인데 어떻게 또 두어 볼 용기가 나겠는가?
52
최영순 : 아이고 오빠도. (혁에게) 다른 이야기 하세요 좀.
53
차 혁 : 예끼, 사내답지 못한!
54
최영순 : 모처럼 어머니도 안 계신데 오셨으니, 서로 웃어가며 이야기하세요.
55
최원봉 : (먹던 복숭아를 내버리고 길게 호흡한다.) 시끄럽다.
56
최영순 : (꿀물을 주며) 이것 잡수세요. 속 시원하게.
57
최원봉 : (받아 마시고) 너 왜 그 치마는 또 입고 있니?
58
최영순 : 이것밖에는 없는 걸 어떻게 해요. 새로 장만하려면 또 돈 들지 않아요? 있는 것 먼저 입어버려야지요. 고운 것 아낀다고 발가벗고 있을 수 있어요?
59
최원봉 : 흰 모시 치마에다가 집에 있을 때는 행주치마 두르고 있으라니까. 그 치마 아니면 연애 못하니?
60
최영순 : 에그, 오빠도?
61
최원봉 : 얼른 들어가 바꿔 입고 와! 그 동안 혁이가 실컷 보았으니까 괜찮아.
62
최영순 : 어제 잉크 엎질러서 죄다 버렸어요.
63
최원봉 : 방정! 공부할 때에도 행주치마 입고 있을 것이 뭐야.
64
최영순 : 행주치마였기 때문에 괜찮았지요. 흰 모시 치마도 안 아까운 것은 아니지 만
65
최원봉 : 그래 오늘 혁이 보는 데 입을려고 잉크 엎질렀구나.
66
차 혁 : 여보게. 나가 산보나 하세. 집안에 들어앉아서 공연히 이리 뒤척 저리 뒤 척 하지만 말고.
67
최영순 : 저녁때 다 되었는데 잡숫고 나가시지요.
68
차 혁 : (일어서며) 회관에나 가 보세. 상무 간사가 되면 일요일이라도 한 번씩은 휙 둘러봐야 하는 법이야.
69
최원봉 : 법은 무슨 법이야. 저희들이 욕을 하든 말든 내 양심대로만 해 나가면 그 만이지.
70
차 혁 : 또 그따위 소리 내놓는구나. 그러니까 못써.
71
최원봉 : (마루 끝으로 나와 앉으며) 못쓰면 하다 못해 끈이라도 달아 쓰려무나.
72
최영순 : (혁이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왜 또 무슨 말썽이 일어났어요.?
73
차 혁 : 자포 자기는 또 무슨 자포자기야. (원봉이 가만히 앉았다. 영순에게) 일전 총회 때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더랍니다.
74
최영순 : 누구 불신임안?
75
차 혁 : 아직 못 들으셨소? 상무 간사 불신임안이래요.
76
최영순 : 왜? 이번에는 또 무슨 까닭으로요?
77
차 혁 : 까닭은 무슨 까닭이 있겠수. 청년회 간사 욕했다고 그 여독이 안 풀어 진 게지요. 원봉이가 접때 바자 수입금에서 돈 썼다고 탈을 잡는답니다.
78
최영순 : 이제 와서는 별 죄명을 다 붙이는군요. 회계 검사해 보면 알 일 아니예요?
79
차 혁 : 회계에 명백하게 기입이 되어 있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말을 그 친다.)
80
최영순 : (말뜻을 호의로 오해하고) 그런데 왜들 그런답니까? 오빠 하나 못 잡아먹 어서. 바자는 뉘 덕에 열리게 되었는데. 괜히 남의 충동에만 놀고 있는 자기네들이 부끄러운 줄은 모르고. (혁 침묵) 그것도 저희들이 나쁜 짓을 하니까 누가 되든지간에 말해야 옳은 일 아니예요? 왜 이광은이 따위가 떠나는 데 송별연이니 무엇이니 그리 야단을 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남의 여자 꾀어 가지고 일본 좀 간다고 그것이 그리 영광이 되고 명예될 게 무엇 있어요. 그런 데다가 백여 원씩쓰는 돈은 하늘서 떨어진 돈이랍니까? (다 침묵) 글쎄 왜들 그래요. 한 단체로 앉아서 아무 관계없는 이광은이 따위를 위해 돈을 쓴단 말이오. 남의 여자를 빼돌려 가지고 달아나는 그런 더러운 인격자를 무슨 명예가 된다고 그리 찬송을 한답니까. 그렇게 공격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면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지 왜 인신 공격은 해요. 접때도 순희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오빠 화상을 게시판에다가 그려 가지고……. (혁이 눈짓을 한다.) 그게 무슨 되지 못한 야만의 짓들이예요. 글쎄 왜들 그래요?
81
차 혁 : 그만둡시다. 우리끼리만 분하게 여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82
최원봉 : (획 돌아앉으며) 그래 내 화상을 그려 놓고 어쨌더란 말이냐?
83
최영순 : 오빠 화상을 게시판에다 그려 가지고 ‘산돼지 토벌'이라고 써 놓고 야단들 이었드래요. 그 앞에 서서 모두 손뼉을 쳐 가면서……. 〈후략〉
 

 
 

2. 제2막

 
85
원봉이집 건넌방. 정면은 누(樓)마루 위 영창이 앞마당에 향해 있다. 왼편으로 대청을 거쳐서 안방으로 가는 영창, 오른편으로 골방 둑겁창 책상, 책, 약병, 화로 등.
86
가을밤.
87
원봉이가 이불 덮고 누운 옆에 영순이가 앉아 있다. 병인은 잠들고 그 처녀는 잡지를 들고 앉아서 책장을 뒤적뒤적하고 있다. 병인이 움직일 때마다 이불을 손보아 준다.
 
88
최 주사댁 : (들어오며) 너 저녁 먹어라. 그렇게 안 먹기로만 하면 어떡하니? 병인 보다도 간병(看病)하는 이가 더 정신채려야 하지 않니? 어서 가서 먹고 오너라. 잠깨기 전에 어서가 먹고 와, 찌개도 다 졸아진다.
89
최영순 : (정신 없이) 당초에 생각이 없어요. 구미가 돌아야지요.
90
최 주사댁 :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니까 그러는군. 너까지 드러누워 봐라, 나 혼자 감당을 해낼 것 같나.
91
최영순 : (일어나 가며 혼자 말하듯이) 어디 조용한 산중으로나 들어가 버렸으면.
92
최 주사댁 : (머리를 짚어 보고) 아이구, 이 머리 뛰는 것 좀 봐. (대야에 있는 수건을 적시어서 머리 위에 올려 놓는다.)
93
최원봉 : (눈을 떠 보고) 몇 점이예요?
94
최 주사댁 : 인제 곧 아홉 점 쳤다. 정신 좀 났니? (무답) 조용히 자야 한다.
95
최원봉 :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영순이 어디 갔어요? (머리 위 수건을 떼어 버린다.)
96
최 주사댁 : 안방에 있다. 밥 먹으러 갔다.
97
최원봉 : 걔 밥 잘 먹게 해 주어요. 반찬도 좀 낫게 해 주고요. 얼골이 쑥 빠졌더군요. 아마 내 얼골보다 더 빠졌을걸요.
98
최 주사댁 : 빠지기는 뭘 빠져, 밥도 잘 먹는단다.
99
최원봉 : 왜 어머니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자꾸 허시요. 대여섯 살 된 어린애로 밖에 안 뵈이슈.
100
최 주사댁 : 거짓말은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한다고 그러니?
101
최원봉 : 그러구 잠도 잘 잔단 말이지요? (돌아 누우며) 걔 얼굴 쳐다보고 누웠으면 내가 안 볼 때 허는 짓까지 환히 뵈이는데.
102
최 주사댁 : 또 그런 소리 하는구나. 그 애한테 물어보려무나, 내 말이 곧이 안 듣기거던.
103
최원봉 : (한참 있다가) 어제 저녁에 어디 갔다 오셨소? 혁이한테 갔다 왔지요?
104
최 주사댁 : (깜짝 놀라며) 아니, 그것도 내 얼골에 그렇게 쓰여 있니?
105
최원봉 : 쓰여 있기는 고사하고 판으로 박혀 있어요.
106
최 주사댁 : 또 꿈이나 꾼 게로군. 그렇게 헛꿈만 꾸다가는 어떡하니. 의원 말은 잠을 못자니까 그런다고 허드라마는.
107
최원봉 : 걱정마셔요. 요사이만큼 잠자면 넉넉하지요. 밤낮 잠만 자다가는 어떻게 하게. 기면병(嗜眠病) 환자 아닌 담에야. 기면병이란 무슨 병인지 아시요? 눈 뜰 새 없이 잠만 자다가 그대로 고만 잠들어버리는 게야요, 영구히 잠들어버리는 게 야요. 거짓말 잘 하는 어머니 얼골도, 밤낮 우는 상(相)하는 영순이도, 교활한 혁이 얼골도 다시는 안 보고 마는게야요. 엄니는 내가 이런 병으로나 죽어 버리면 속 시원할 듯 싶지요. 약 살 돈 안들이고 어머니 괴롭게 아니 하고 이왕 죽으려 하는 놈에게 돈이나 안 써야 경제가 되지요.
108
최 주사댁 : (목메인 소리로) 그게 또 무슨 소리니? 왜 남의 속을 그렇게도 타게 만드니?
109
최원봉 : 그뿐인가, 내가 속히 죽어 없어져야지. 내 간호하느라고 영순이 얼골 축이 안 나지, 사위 고르는 데 수월하게.
110
최 주사댁 : 아이고 내 가슴이야.
111
최원봉 : 흥, 나 겉은 산돼지가 그런 소리밖에 더 지를라구요. 아―니, 한 마디 물어봅시다. 나 죽으면 영순이를 어떤 데로 시집 보내시려우?
112
최 주사댁 : 잠들기 어렵니? 잠오는 약 맥여 주랴? 〈중략〉
113
최원봉 : (한참 있다가 누운 대로 상반신을 들어 주사댁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머니, 거짓말도 고만하고 눈치 따먹기도 고만 하기로 합시다. 모자간에 서로 숨기고 있으면 그런 서먹서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114
최 주사댁 : 숨기기는 무엇을 숨겨?
115
최원봉 : 영순이와 내가 정말 친남매지간입니까?
116
최 주사댁 : (떨리는 소리로) 아이구, 너 미쳐 가는구나.
117
차 혁 : (밖의 마당에서) 계십니까? 계십니까? 영순씨 계서요?
118
최영순 : (안방에서 문 여는 소리나며) 네, 계십니다.
119
최 주사댁 : 차 선생이서요? 이리로 들어오서요. 여기 있습니다.
120
최원봉 : (돌아 누우며) 미친 놈, 누워 있는 방으로 데리구 오지 말어요.
121
최 주사댁 : 너 왜 그러니?
122
최원봉 : 나 그 자식 얼굴 보기 싫어요. 이리로 들어왔다가는 산돼지 어금니 맛뵈여 줄테니까 그리 아슈.
123
최 주사댁 : 영순아, 선생님 안방으로 들어가 앉으시래라.
124
최원봉 : 영순이는 이리 보내 줘야 해요. (나가는 주사댁에게) 어머니, 철모르는 영순이에게는 아직 아무 말 아니해야 합니다. 꼭 믿습니다. (주사댁이 나간다.)
125
최영순 : (들어오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계서요. 주무시지 않고. (원봉이 돌아 누워서 못들은 척하고 있다.) 벌써 주무실 때가 되었는데. 일찍이 주무서야 한다고 의원이 그러지 않어요? 밤 한 시간의 수면은 아침 두 시간의 수면보다 더 낫다구.
126
최원봉 : 너 요새 잠 잘 자니?
127
최영순 : 잘 자구 말구요. 내 잠을 반만 오빠에게 드릴 수 있다면.
128
최원봉 : 너 잠잘 때 이상한 꿈 꾸지 않니?
129
최영순 : 꿈은 무슨 꿈예요. 오빠, 잠을 잘 주무셔야 합니다. 잠을 못 주무시니까 억지로 잠이 들면 꿈만 꾸시는 게지요.
130
최원봉 : 바른대로 말해라. 내가 요새 꿈꾸는 것이 병이 아니다. 그만큼 요새 내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바뀌어 오는데 너도 그런 눈치를 알아차렸으면 왜 꿈을 안 꿀 리가 있니?
131
최영순 : 나는 오빠 잠 못 주무시는 것이 무서울 뿐예요. 오빠 머릿속에서 무엇이 요새 뒤끓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132
최원봉 : 정말이니?
133
최영순 : 아이구, 거짓말을 왜 해요. 무슨 속시원한 일이 있겠다구, 오빠를 속인단 말예요. 설령 속시원한 일이 있다기로 오빠에게다 거짓말을 한단 말예요. 너무 생각하십니다. 병중에 생각만 하시면 해로워요. 병만 나으시면 무슨 생각이든지 맘대로 하실 것 아니예요. 주무셔요. 벌써 열한시가 가까워 가는데요. 그리고 내일 일찍 눈뜨시지요. 그러면 열도 빠질게고.
134
최원봉 : 에잇, 듣기 싫다. (양인 침묵)
135
최영순 : (다시) 고만 주무서야 합니다. 이것 잡숴 보서요. (산약봉(散藥封)을 집어 오며) 오늘은 한 봉 반 드리겠습니다. 오늘 밤은 적어도 일곱 시간은 주무서야 해요.
136
최원봉 : (이불을 열고 몸을 일으키려 온 그녀의 손을 내뿌리치며) 고만 둬.
137
최영순 : 그렇게 열이 있는데 주무시지 않으면 점점 더해지지 않어요.
138
최원봉 : 에잇 고만두라니까! 열 있을 때 그런 약은 위장을 나쁘게 한대도 그러는군.
139
최영순 : 에그, 이 머리좀 봐! 불덩어리 겉은 머리를 해 가지고 안 주무서서 어떻게 해요. 그럼 해열제를 잡수서요. 주무시게.
140
최원봉 : 너 왜 그 모양이니? 해열제는 더 위장을 나쁘게 만든대도, 너나 너 어머니나 그저 날 잠만 재우려고 애를 쓰는구나. 옆에서 무슨 짓을 해도 모르게.
141
최영순 : (아무 말 없이 대야에서 수건을 짜서 머리에 얹으려 한다.) 찬수건예요.
142
최원봉 : 고만두라니까. 거기 가만히 앉었기만 해.
143
최영순 : (한참 동안 외로운 얼굴로 등만 보고 앉았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만 흐느끼기 시작한다.)
144
최원봉 : 울긴 왜 울어! 에잇 못난 것. (영순이 더 운다) 나흐다질 죄인 노래나 불러다오.
145
최영순 : (얼굴을 들어) 불러드릴 테니 이것 잡수서요. 수면제는 위장 과히 상하게 만드는 것 아니래요. (산약봉을 들며) 내 말도 좀 들어 줘요. 이것만 꼭 잡숴줘요.
146
최원봉 : 너 왜 병인의 비위를 건드리려고 드니? 네 고집 부릴려고 내 옆에 와 앉었니? 나가! 나가거라! 나가라니까! 저 방으로 가! 안 갈테냐?
147
최영순 : (눈물 섞인 소리로) 가라면 갈 테야요. 그렇지만 그런? 뜨거운 머리를 해 가지고 주무시지도 않고.
148
최원봉 : (일어나려고 하며) 그래도 안 갈 테니? 얼마나 고집이 센가 해보자.
149
최영순 : (일어나며) 갈 테니까 가만히 누워 계서요. 갈 테야요. (나간다 그러나 안방으로 안 가고 마루 끝에 앉은 모양이다.)
150
최원봉 : (혼자 누워 있다. 긴 동안의 침묵. 졸지에) 영순아! 영순아.
151
최영순 : (쫓아 들어 오며) 왜 그래요? 왜 그러서요?
152
최원봉 : (얼굴을 골방 쪽으로 돌리며) 나흐다질 노래를 들려다우. 바스로는 고만 두고 테놀로만.
 
153
노래가 이어가는 동안 원봉이는 잠들고 무대는 어두워진다. 그리고 몽롱한 달빛같은 창백색이 나타난다. 그러나 다만 여름철 그믐달밤의 하늘과 같이 아무것도 안 뵈인다. 노래는 다시 누구의 소린지 바스와 합장이 되어 가지고 되풀이해 나가는 동안 무대에는 무한한 공간만 채여 있는 것 같다.
154
몇 번 노래가 되풀이해 가다가 제1절이 끝나기 전부터 창백색이 좀 밝아 온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은 병실 대신에 동한(冬寒) 중의 벌판이 나타난다. 완경사의 야산이 나지막해져 온 곳 중복(中腹)에 무대가 놓인 셈이다. 왼편으로 숲, 잡목, 오른편으로 언덕, 여기저기 석총(石叢). 회색 겨울 하늘이 낮게 걸려 있어서 전경을 금시라도 와 누를 것 같다. 지상과 언덕 위에는 약간 흰눈이 덮여 있고 시시로 회오리 바람과 눈싸라기.
155
이하의 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갑자년 동학당 전군 행렬의 판토마임이 지나간다. 오만년 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 글자를 쓴 오색의 기폭을 선두로 도중(道衆)의 어깨에는 ‘궁기(弓己)’, 등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이라 박은 삼삼오오의 일대(一隊), 환희와 서계(誓戒)와 격려와 혹은 혼란을 표시하는 판토마임. 천천히 그러나 무거운 수천 리 걸어 온 피로된 보조로 지나간다. 무대 한참 동안 공허.
 
156
병 정 : (산발한 원봉이네[원봉 생모]의 손목을 끌어 잡고 들어 온다.) 이년, 씩씩 걸어라. 너하고 같이 가다가는 얼어 죽겠다.
157
원봉이네 : (비틀비틀하며) 제발 살려줍시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더 못 나가겠습니다. (목메인, 그나마 목세인 소리로) 제발 적선 좀 해 주시오. 저는 동학 역적놈을 남편으로 둔 죄로 이 자리에서 참형(斬刑)을 당해도 원통할 것은 없습니다마는 이 뱃속에 든 어린 애기를 위해서 살려줍시오. 이 뱃속 애기가 불상허지 않어요?
158
병 정 : (따구를 붙치며) 웬 잔소리야 잔소리가. 그따윗 소리는 관찰사(觀察使)님 앞에 가서 네 멋대로 지껄이라니까 못 들었니! 썩 걸어. 걷지 않겠니?
159
원봉이네 : (두손으로 합장하며) 이 애기를 위해 이 뱃속에 든 어린 애기를 위해 제발 살려줍시오. 이 애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160
병 정 : 에잇, 귀찮아! 그러니까 누가 네 새끼를 찔러 죽인다니? 관가로 가기만 가잔 말이야.
161
원봉이네 : 더 걸어 가다가는 정말 둘이 다 죽겠습니다.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못하겠어요. 만삭된 이 무거운 몸을 해가지고 삼십리나 걸어왔으니 아무리 몸이 튼튼한 년이기로 당할 수가 있습니까?
162
병 정 : 아이구, 이 경을 칠 년아! 너 왜 말을 안 듣니? 아니, 작작 잡아 찢어 버릴까 부다. 너 그러면 그 뱃속에 든 새끼는 쏙 빼 놓고 가자꾸나.
163
원봉이네 :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시고 그저 이 애기 하나만을 위해 살려줍시오. 이 애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애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시오! 오오오. 〈후략〉
【원문】산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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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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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진(金祐鎭) [저자]
 
  192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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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