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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주의(寫實主義)의 재인식(再認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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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0.8~
임화(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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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實主義[사실주의]의 再認識[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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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文學的[문학적] 探究[탐구]에 寄[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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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에 긍하는 문학적 혼돈의 과정을 지나 최근의 논책들이 재출발의 방향을 탐색하기 비롯하였다는 것은 의의 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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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혼돈의 전부를 파악함에 있어 소소(少少)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든지, 또는 방향의 설정에 있어 완전한 일치를 발견할 수 없다든지, 혹은 부분적인 과오가 따른다든지,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혼돈으로부터의 재출발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시적 희생이란 것을 각오치 않으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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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독단을 피하여 토론 가운데 노선을 찾으려 하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논의는 피차의 과학적 신중과 높은 협동의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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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물론하고 개개의 언구나 상대자의 부분적 약점에 구애되지 말고 그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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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논쟁이 가졌던 적년(積年)의 악폐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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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출발에 있어 조급히 방향의 지시로 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혼돈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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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살리려는 방향은 사태의 평가 위에 수립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추리의 결과로 떨어지고 말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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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하면 방금 우리가 그것 가운데 재출발의 계기와 노선을 찾으려는 리얼리즘 논의에 있어서도 여태까지의 창작적 비평적 논구의 결론으로서의 타당성이 확인되지 않는 한 실천에서 유리된 공론(空論)으로 끝날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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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리얼리즘이 과학적 이론에 의하여 철저적으로 승인되는 유일의 문학적 경향이라든지, 인식 활동으로서의 문학의 본질이 다시없이 명확하게 표현된 문학적 이즘이라든지, 경향 문학의 기본적 성격이라든지 반복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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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리얼리즘으로 자기를 관철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제창은 이 땅의 경향 문학으로선 결코 처음 듣는 부르짖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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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으로부터 비롯하여 변증법적 사실주의, 소셜리즘적 리얼리즘 등등 여러번째 우리는 리얼리즘론과 해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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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경향 문학이 리얼리즘과 떠날 수 없다는 증좌일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리얼리즘 논의 변천 과정의 각 단계가 문학적 발전의 복잡한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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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와 같이 소셜리즘적 리얼리즘까지에 각 발전 계단은 조선 경향 문학의 사실적 예술로서의 자기 완성의 과정이었을 뿐만 아리라 실로 당파적 문학으로서의 성장 과정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각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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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셜리즘적 리얼리즘의 제창 이래 잡다한 경향의 교류를 통하여 현재의 리얼리즘 논의까지의 과정은 도저히 직선으로 형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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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는 경향 문학의 상승 운동이 아니라, 그 정체·혼돈·후퇴의 와상 운동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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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前述)과 같이 소셜리즘적·리얼리즘은 한 개 자의적인 제창이 아니라 여태까지의 세계 문학의 결론으로서 또는 경향 문학이 도달한 최고의 일반적 방법으로서 수입되어 문학 활동의 통일적 표지로 수립되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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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낡은 계단에 대한 자기 비판의 결론으로서 겸(兼)하여는 새로운 출발의 방향으로서 우리들의 일치된 의사의 반영이라고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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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 활동의 공동 형태와 통일적 방향이 상실된 이후 로맨티시즘 혹은 휴머니즘 기타의 대두는 모두가 일치된 의사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서투른 창의의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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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는 통일된 방향의 소실과 혼돈한 암중 모색의 제 요소가 명백히 반영되어 있었고 그만치 각종의 제창에서 일치된 의사의 반영을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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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 자의와 혼돈의 현상은 비단 로맨티시즘·휴머니즘 논의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실로 금일의 리얼리즘 논의 가운데도 이미 싹트고 있음을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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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는 먼저도 말한 것처럼 각인이 소신을 피력함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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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이 ‘인민의 문학’을 제창하든지‘고발의 문학’을 주장하든지, 또는 무슨 문학을 제안하든지, 그것은 온전히 각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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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러한‘무슨 문학’이 단순히 제창자 한 개인의 방향 선언이 아니라 혼돈 가운데 상실된 일반적 방향을 재건하려는 한, 수모(誰某)의 비판이나 위태로운 독창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문학적 현실의 철저한 인식과 자기의 소론이 일치되는가 여부를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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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론이 보편타당성을 갖는 것은 각인에게 편의하기 때문에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심오한 파악의 결과인 때문이란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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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각이한 관사 밑에 리얼리즘의 문귀가 붙었다고 경솔히 통일적 방향에의 경향이라든지 재출발의 일반적 기초를 찾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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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따라서는 터무니없는 주관, 엉뚱한 관념주의를 리얼리즘 형식 가운데 포장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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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씨의 순수한 심리주의를 리얼리즘의 심화, 박태원 씨의 파노라마적인 트리비얼리즘을 리얼리즘의 확대라, 선양하던 것과 같은 리얼리즘론이 대도를 활보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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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문귀만 있으면 급급히 그 아래 서명해버리는 우거(愚擧)를 감히 할 것이 아니며 또한 리얼리즘에 마음대로 생각나는 문자를 기입하는 경솔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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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상상하는 리얼리즘은 우선 모든 종류의 포복적인 경험론, 그 위에 성장한 소박한 파행적인 리얼리즘으로부터 순결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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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와 같이 사물에 대한 관조적 태도로부터 출발하여 현상의 수포(水泡)만을 추종하는 외면적 리얼리즘은 문학의 깊은 인식적 기능을 멸살할 뿐만 아니라 그 실천적 의의를 불문에 부(付)함으로 현실에 대하여 완전히 타협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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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하는 파행적 리얼리즘이란 것의 타협적 본질은 무엇보다도 소셜리즘적 리얼리즘 논의 과정 가운데 표명된 박영희 씨의 견해에서 전형적 표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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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年前) 《동아일보》 신년호에 발표된 〈최근 문예 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통하여 박영희 씨는 신창작 방법을, 경향 문학으로부터 일체의 경향성을 방축(放逐)하는 이론을 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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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진실이란 것은 박씨에 있어서는 마치 생활적 진실의 부정과 같아서 그 뒤에 온 리얼리즘 비평·창작의 기본 경향이었던 단순한 리얼리즘의 선편(先鞭)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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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본래에 있어서는 그 전의 경향 문학의 발전된 형태의 고양인 소셜리즘적 리얼리즘은 과거의 모든 성과를 부정, 파괴하는 도구로서 ‘소셜리즘적’이란 산 내용을 거세한 채 향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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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리얼리즘은 우리의 현실 생활과 문학에 적응하는 구체적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형해적으로 섭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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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형해로서 사화(死化)한 리얼리즘에 이르러 문학은 현실의 철저한 인식과 생활적 과제의 실천이란 높은 기능으로부터 생활 현상의 단순한 기술의 지위로 떨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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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리얼리즘의 섭취에 있어서 소셜리즘적이란 기본 내용을 거세한 리얼리즘만이 처지게 된 이유로서 당시 경향 문학 자체가 빠졌던 세계관과 내용 편중의 공식에 대한 자기 비판의 불충분이란 사정도 불소(不少)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팔봉의 박씨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불충분의 전형적 표현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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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은 새로운 리얼리즘, 즉 경향 문학의 오류를 자기 비판한 고처에서 박씨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전혀 낡은 입장에서의 비판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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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박씨의 비판에 있어 효과적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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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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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비판의 철저, 신이론의 충분한 섭취가 완성되기 전에 전혀 외적인 조건이 우리들의 작가·비평가들을 내부적으로 붕괴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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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논리적으로는 그러한 리얼리즘론의 오류를 기피하면서도 실천적 심리적으로는 세계관의 퇴거, 포복화한 리얼리즘에로 이끌리고 있었다는 것이 아마 사태의 솔직한 승인인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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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외적 압력에 대한 경향 문학 전반의 대응 태도가 소박 리얼리즘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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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작가들, 디테일의 리얼리티 없이는 문학이 될 수 없는 소설에 종사하고 있던 이들이 이런 경향을 대표했다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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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디테일의 리얼리티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었던 문학 장르, 주로 시인들은 주관주의, 추상적 낭만주의에 기울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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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이 두 경향을 시인과 소설가의 기질의 차이라든가 혹은 단순하게 시인과 작가의 정치적 교양의 차이 등으로 몰기 쉬우나 역시 두 개의 문학 장르가 가진 본질적 산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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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논제이고, 무엇보다 소셜리즘적 리얼리즘이 파행적 리얼리즘화한 본질적 계기가 새 현실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태도의 반영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리얼리즘을 파행하는 리얼리즘으로 전화시키는 속에서 작가들은 문학으로부터 세계관이 퇴거하는 사실의 이론적 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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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그려라! 그럼으로써 작가들은 특별히 작품 가운데서 무슨 사상을 주장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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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가 규수 작가 허크네스에게 보낸 짧은 서간이 우리에게 예상치 않았던 해독을 끼쳤다는 것은 가소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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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왕 작가의 세계관과도 모순하면서 위력을 발휘하는 리얼리즘이란 것은 결코 문학으로부터 세계관을 거세하고 일상 생활의 비속한 표면을 기어다니는 리얼리즘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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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리얼리즘은 작가의 그릇된 세계관을 격파할 만큼 현상의 본질에 투철하고 협소한 자의식과 하등의 관계 없이 현실이 발전해가는 역사적 대도를 조명하려는 작가의 고매한 정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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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발자크적 리얼리즘이란 죽은 현실과 타협하려는 주관에 항(抗)하여 산 현실의 진정한 내용을 잡울(雜鬱)한 현상의 표피를 뚫고서 적출(摘出) 해논 천재적 방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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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복하는 리얼리즘이 어리석게도 세계관과 현실에 대한 비타협 정신의 몰각을 리얼리즘을 통하여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현실이란 것을 일상적·신변적 미소사(些少事)와 혼동하는 데서 원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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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냐 하면 무엇이고 있는 것을 있는 대로 그리면 문학이 아니냐? 는 옹졸한 트리비알리즘을 곧 리얼리즘이라고 고집하는 강한 심장과 소박한 논리를 문학적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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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향은 일찍이 안함광 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소셜리즘적 리얼리즘 수입 후 우리 문단의 기본 색조로서 엄흥섭 씨의 작품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그 뒤의 이기영 씨를 위시로 한 대소의 작가를 풍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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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일찍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주제의 적극성’이란 낡은 표어를 비판(?)한 실천적 결과라고 보기엔 너무도 처참한 도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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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찍이 공식주의에 얽매여 알지도 못하는 영역의 생활을 추상적으로 얽어맨 과거에 비하여, 각자가 자기의 경험을 조직하려고 힘쓰며 숙지하는 세계의 형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많은 결함을 수반하면서도 각 작가들로 하여금 독자의 양식상 탐구를 조장하는 원활한 창조적 분위기를 빚어주었고, 동경 문단 같은 곳에는 불소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히 우리 문단엔 성과라고 이름질 만한 작품은 발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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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일찍이 우리가 부르문학이라고 매도하던 작품들에 비하여 새로운 작품이 과연 어느 점에서 구별되는가를 분간할 수 없을 만치 예술상의 질은 저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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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엔 나의 단안이 가혹한 독단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라라 생각하는 몇 개의 작품을 나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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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함광 씨가 추천한 엄흥섭 씨의 〈번견탈출기(番犬脫出記)나 〈숭어〉, 설야 씨의 몇 편, 이기영 씨의 소설, 특히 이원조 씨가 칭찬한〈산모〉나 김용제(金龍濟) 씨가 리얼리즘의 표본처럼 천거한 〈맥추(麥秋)〉등을 들 수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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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섹트(sect)적 한계나 조그만 자존심이란 것을 떠나 경향 문학의 역사적 발전, 신 리얼리즘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입장에서 씨 등의 작품을 거듭 읽어볼 때 상기한 제씨가 내린 판단에 간단하게 서명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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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차등(此等)의 비평이 문학적 평가의 실제에 있어 비상히 기민치 못하고 역사적 전망에 있어 우매하며 한갓 작품의 뒤를 추수(追隨)하고 있다는 다른 한 개의 사실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엄숙한 사실이 아닌가 한다.〈숭어〉등 엄씨의 최량의 소설을 통하여 우리는 경향 문학의 이전 수준으로부터의 하등의 전진을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사상적 수준에 있어 신경향파 시대의 원시주의로 퇴화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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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퇴화·정체는 설야 씨의 소설 〈태양〉 〈임금(林檎)〉 〈후미끼리〉등 일련의 작품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새로운 관조주의와 아울러 낡은 공식주의의 잔재가 혼합되어 있다. 예하면 소설 〈후미끼리〉 〈임금〉등에선 노동에 대한 무원칙적 찬미라는 낡은 사상과 아울러 명백히 소시민화하고 있는 주인공의, 생활 과정이, 그가 인간적 성실을 다시 찾고 인간의 생활 속에로 들어간다는 외형만이, 전(前)사회 운동자의 전형적 갱생 과정처럼 취급되어 있는 데서 적례(適例)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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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우리의 주관이 양심과 성실과를 잃지 않았다고 자부함에 불구하고 객관적으론 알지 못하게 나락의 구렁으로 이끌려가는 과정이 반대의 관점에서 형상화되어 작품은 전체로 전도된 모티브 위에 구성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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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도 가운데 작자의 양심적 주관은 공식주의로서 나타나고 작품에 그려진 온갖 사실을 표면적으로 긍정하는 데서 작자는 명백히 관조주의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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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식주의의 잔재와 관조주의의 결합은 이북명 씨의 작품에도 독특히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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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민촌의〈산모〉에선 빈곤의 단순한 기술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며,〈맥추〉는 전자의 씨의 가작인〈서화(鼠火)〉 《고향》등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평판(平板)한 리얼리즘과 형해화한 공식주의의 모티브 외의 새로운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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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떠한 근거에서 비평가들은 이 작품들을 추천할 용기를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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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컨대 갈수록 저하해가는 경향 문학 가운데서 이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기분간(幾分間) 과거의 면영을 전하고 있었다는 외 다른 것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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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 자신도 이러한 상대적 우월을 부정하지 않으나, 그러나 이것은 우리 문학의 전진의 표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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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정체·퇴화의 한 음영이 아니었는가? 이러한 작품의 객관적 특징과 역사적 지위를 무시하고 과거의 면영 하나만을 가지고 추천의 이유를 삼는 데는 현하(現下) 문예 비평의 명백한 질적 저하가 반영 되어 있음을 지적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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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비평의 사상적 질의 강화, 역사적 전망의 결여, 작가와 독자에 대한 지도적 임무의 포기, 작품에의 무제한적인 추종으로 나타나는 비평 퇴화의 명확한 표징이 아니냐? 비평의 추종주의는 실로 파행적 리얼리즘의 이론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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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 씨가 일찍이 김용제 씨의 〈맥추〉평을 가리켜 관조주의의 이론적 표현이라고 단정한 것은 비록 극단에 치우쳤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론 그릇됨이 없다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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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틀어 이러한 창작상의 경향은 일반 이론의 영역에도 명백히 자기의 족적을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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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간의 가장 많이 활동한 한식 씨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 문학이 당면한 모든 근본적 문제를 일부러 골라가면서 집요하게 회피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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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감상, 대중화, 혹은 누구누구의 위인을 기념하는 것이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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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어도 감상도 대중화도 역사적 제재(題材)도 우리의 문학이 근본적으로 재건되는 방향이 발견되지 않는 한 무의미한 논의에 끝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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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의 제씨(물론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나)를 가리켜 김용제 씨가 기본적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은 엄숙히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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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1년에 수십 편 논문을 쓰고 매일같이 신문 잡지를 대하는 이론가가, 인간 탐구·휴머니즘론 등 우리 문학의 결정적 이해(利害)를 다루는 논쟁에 관광객과 같이 지나감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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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으로부터의 유리! 아니 실천으로부터의 의식적인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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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론적 사업은 모름지기 비실천주의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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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적 비평, 문학사, 문예학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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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고차의 리얼리즘이 비단 파행주의의 청산으로만 발육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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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주의라는 또 한 개의 강대한 에네미(enem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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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파행적 리얼리즘이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혼돈하고 디테일의 진실성과 전형적 사정 중의 전형적 성격이란 본질의 진실성을 차별하지 않고 현상을 가지고 본질을 대신하였다면, 주관주의는 사물의 본질을 현상으로서 표현되는 객관적 사물 속에 현상을 통하여 찾는 대신 작가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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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주의의 기원은 역시 우리들로 하여금 신창작 이론의 수입 당시로 소급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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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신 리얼리즘의 관조주의적 섭취에 대한 반발에서 주관주의가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지금 주목을 요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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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술에서 팔봉의 박영희 씨 비평이 낡은 공식주의적 입장을 지양치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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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직접으로 논쟁적 형태를 띠지 못했다 하더라도 주관주의의 단초로서의 낭만주의는 심리적으로는 팔봉과 박영희 씨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지양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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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 인식 뿐 아니라 의욕과 창조를, 묘사 뿐 아니라 판타지(fantasy)·감정·사상·주관을 새로운 리얼리즘은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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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키르포틴과 바실레프스키의 로맨티시즘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필자의 〈낭만 정신의 현실적 구조〉란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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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입장을 낡은 공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또는 관조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설정하려고 하였던 일방 나는 시의 리얼리티를 고매한 시대적 로맨티카 가운데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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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작년초까지의 나의 이론상 입장으로 충분한 책임과 아울러 기회를 보아 자기 비판할 과제이나 오류의 출발점은 전기 논문의 제목이 말하듯 시적 리얼리티를 현실적 구조 그곳에서 찾는 대신 정신을 가지고 현실을 규정하려는 역도된 방법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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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재일지라도 나는 김남천 씨와 같이 일체의 로맨티시즘을 부정한다거나 김용제 씨처럼 로맨티시즘 하면 그 개념이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간단한 이유로서 복고주의의 낙인을 찍는 데는 철저하게 반대하나 나의 로맨티시즘론이 의도 여하를 물론하고 신 리얼리즘으로부터의 주관주의적 일탈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은 지적하기에 인색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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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이러한 과오는 당시 유형적 매너리즘(mannerism) 가운데 빠졌던 시의 상태가 대단히 딱했던 사정과, 현상을 통하여, 본질을 적출하는 예술적 인식 과정 중에서, 주관적 추상, 예술적 상상력 등이 연(演)하는 역할에 대하여 명백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 데 인하지 않았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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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우리는 엥겔스의 〈발자크론〉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관과 예술적 사상과 리얼리즘의 관계에 대하여 명백한 이해를 가졌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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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공식주의를 진실로 높은 입장에서 지양할 준비가 우리들에겐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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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과오를 시대의 죄로 돌리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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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방법으로 문학의 경향성을 완강히 옹호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원(本願)이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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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작년에 씌어진 나의 낭만주의론을 반 리얼리즘처럼 오인하는 이가 있는 듯하므로 재언(再言)하거니와 나는 결코 리얼리즘 대신에 로맨티시즘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관조주의로부터 고차적 리얼리즘으로 발전하기 위한 한 계기로서 그것을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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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오는 의연히 과오로서 문학에 있어 주관성의 문제를 낭만주의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 곳에 병인(病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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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경향성 자신이 철저한 리얼리즘 그것의 고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하여 부가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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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리얼리즘과 병행하여 로맨티시즘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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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래로 리볼루쇼날(revolutional) 로맨티시즘은 신 리얼리즘의 한 측면, 한 속성, 한 요소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주관의 토로에서가 아니라 객관적 현실과 우리들의 주체가 실천적으로 교섭하는 데서 일어나는 우리의 고매한 파토스(pathos)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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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주관주의적 본질은 이 제안이 파급한 영향, 예하면 김우철(金友哲) 씨의 〈낭만적 인간의 탐구〉라는 논문 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으며, 더욱이 창조적 실천 위에 일층 구체적으로 결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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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리얼리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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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음의 리얼리즘’은 비평상에 나타날 때 일찍이 백철 씨가 고조한 것과 같은 극단의 감상주의·인상주의·이녕(泥濘)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며, 문예 이론으로선 무이론주의·불가지론(不可知論)을 지나 풍류설(風流說)과 같은 복고주의나 기타 모든 종류의 유해한 경향과 결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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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주관주의적 일탈이란 파행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론 동일한 고차의 리얼리즘으로부터 유리하는 노선의 한 분파라는 것은 객관적 현실 그것과 예술적, 생활적으로 교섭함으로 상실된 자기를 찾고 소시민으로서의 자기를 재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될 자기를 현실 가운데서 애써 유지하려고 노력함으로 어느때까지나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의 비극에 관한 비가를 읊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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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히 신낭만주의가 낳은 몇 편의 시가의 내용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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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우리가 이십대에 그러했듯이 여하히 필자나 윤곤강(尹崑崗) 씨 등의 시편은 의욕이라든지 희망이라든지, 대부분 괴로운 현실 속에서 자꾸만 상실되는 것을 붙잡으려 노력하였음에 불구하고 내성과 양심 등의 영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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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생활적 실천에서 유리하고 광범한 현실 파악에서 격원(隔遠)되어, 마치 관조주의적 소설이 일상 신변사에 구애되고 있듯이 인텔리의 마음의 노래로 퇴화한 것이다.
118
한편 주관주의는 백철 씨 등의 인간 탐구론·휴머니즘론 등을 통하여 경향문학에서 공연히 분리하는 유력한 통로가 된 것이다.
119
다시 말하면 차등의 제설(諸說)에 있어 주관주의는 극단의 명료성을 가지고 자기를 완성했다고 볼 수가 있다.
120
관조적으로 보아진 현실에서만 아니라, 낭만적으로 생각된 경향성으로부터도 떨어져 추상적인 인간 내지 인간성이란 데로 귀착할 것이다.
121
파행 리얼리즘이 외적 자기로 돌아갔다면 주관주의는 내적 자기로 돌아간 것이다.
122
이곳에서 우리는 두 개의 경향이 정반대의 선을 걷고 있음에 불구하고 본질적으론 경향 문학의 소시민성에의 굴복이란 한 점으로 환원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23
5
 
124
일찍이〈경험 비판론〉의 저자가 경제주의의 비판에 있어, 테러리즘(terrorism)이 역립(逆立)된 자연 생장성 아래 굴복하고 있다고 한 다음과 같은 뜻 깊은 한 귀를 기억할 수가 있다.
 
125
경제주의자는 순(純)노동자 운동의 자연 생장성 앞에, 데러리스트는 열정적 사업을 노동 운동에 결부할 줄 모르고 내지는 가능성 조차 못 보는 인텔리겐차적 분격(憤激)의 자연 생장성 앞에.
 
126
한가지로 머리를 숙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문학이 하자를 물론하고 목전(目前)의 사실(外的[외적]·內的[내적]) 위를 포복하고 있다는 단안을 내릴 수가 있지 않을까?
127
예하면 이기영 씨의 소설 《배낭(背囊)》 《도박》 《인정》을 분석하면 작자는 일상적 현실 앞에 고두(叩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리 인정 등 낡은 윤리 위에 작품이 구성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128
바꾸어 말하면 작자는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일상 사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129
뿐만 아니라 두 경향의 혼합으로 된 김남천 씨 작품에서 보는 교묘한 공서(共棲)에도 두 경향의 일치는 표현되어 있다.
130
소설 〈제퇴선(祭退膳)은 인텔리적 양심, 인도적 감정의 허망을 표현하려고 한 작품이나 결과는 의도에 부합치 않았다.
131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폭로해주는 것은 작가의 윤리관도 아니며, 한 기생도 아니며, 정히 엄숙한 생활 그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주인공의 환상을 짓밟는 생활의 본질에 대하여 중요한 발언을 회피하였다.
132
이 경향은 〈남매〉 이후 작자가 빠져 있는 일반적 함정이라고 지적 할 수 있다.
133
김씨의 지론인 고발 문학론도 역설일지 모르나 관조주의와 주관주의와의 접부(接付)가 과도히 교묘한 때문에 딜레마 가운데 고민하지 않는가?
134
분명히 현대는 작가가 대담히 자기를 주장할 시대다. 관조주의에 향하여!
135
또한 현대는 분명히 객관적 현실의 반영 위에 작품에 구성될 시대다. 주관주의에 향하여!
136
그러나 고차의 리얼리즘을 떠나 어떠한 예술적 방법 속에서 양자는 변증법적으로 통일될 수 있는가?
137
고발의 문학인가? 인민의 문학인가?
138
아니다! 만일 여사한 어떤 종류의 중간물로 리얼리즘에의 계기를 삼는다면 그것은 일찍이 낭만주의론이 빠졌던 계기론의 과오를 반복할 것이다.
139
또한 혹종의 안출물로써 리얼리즘에 대신한다면 리얼리즘에 대한 주관주의적 왜곡을 폭로할 것이다.
140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이 객관적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리얼리즘 가운데 표현한 주체성은 한 개인의 국한된 주관이 아니라 현실의 묘사로서의 의식인 때문이다.
141
이러한 주체성만이 비로서 리얼리즘과 모순하지 않는 것이다.
142
그러면 이러한 주체성, 작자의 의식이 어떻게 현실의 반영인지 아닌지를 아는가? 그것은 예술적 생활인 실천을 통해서이다.
143
일찍이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론》의 저자가 실천으로 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는 논쟁은 한 개 스콜라(scholar) 철학적 문제이고 실천만이 차안성(此岸性)을 증명하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44
우리는 생활 그것과 같은 문학을 요구하지 않는가?
145
정히 한 개의 생활적 실천인 문학 그 가운데서 주체성은 자기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객관적 현실과 통일되는 것이다.
146
그것은 오늘날의 문학처럼 현상의 표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심오한 본질을 계시하는 문학이다.
147
문학적 진실이란 세부의 진실 외에 정황과 성격의 진실성을 의미하지 않는가?
148
리얼리즘이란 본래 현상의 표피가 아니라 깊다란 본질을 계시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149
이러한 문학은 과학과 더불어 인간 생활에 있어 깊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150
그러므로 리얼리즘이란 결코 주관주의자의 무고(誣告)처럼 사화한 객관주의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하여 실천에 있어 자기를 증명하고 다시 객관적 현실 그것을 개변해가는 주체화의 대규모적 방법을 완성하는 문학적 경향이다.
151
그러나 이런 리얼리즘은 결코 리얼리즘 일반이 아니다. 마치 19세기에 시민적 리얼리즘이 당시의 구체적 리얼리즘이었던 것처럼 소셜리즘적 리얼리즘 그것이 금일의 유일의 리얼리즘이다.
152
왜 그러냐 하면 이 리얼리즘만이 금일의 현실에 있어 그 주체성이 객관적 현실의 반영과 모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153
이것은 우리들 소시민 작가에 있어 자기의 한계를 떠나 객관적 현실에의 침잠이란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154
이곳에서 우리는 예술적 인식에 있어 추상과, 상상력의 작용에 있어 세계관의 압도적 역할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155
대략 이런 것이 혹종의 작위적 창의나 중간적 리얼리즘을 계기로 해서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재인식을 통하여 신방향 탐구의 기본 노선을 찾자고 제안하는 이유다.
156
이 논문은 실로 한 개 제안에 불과하다.
【원문】사실주의(寫實主義)의 재인식(再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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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저자]
 
  1937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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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