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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단 측면사(韓國文壇側面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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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0~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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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 측면사(韓國文壇側面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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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4후퇴 때 피난지 제주도에서 ‘합동통신 제주지사’주최로 열렸던 하기대학 강좌에서‘문학강좌’를 더럽혔던 문단 이야기의 메모 보충이다. 그 당시의 제목은‘신문학 30년사’라고 붙였던 것이나 문학사와는 이야기의 성질이 전연 다른 이질적인 것이므로‘40년 문단 회고담’이라고 개제하여 발표하기로 한다.
 
 

1.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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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문학 30년사’라고 걸어 놓았으나, 소요 시간 세 시간 동안에 30년 이야기를 한 시간에 십 년씩 배당이 돌아간 모양이니 이것만 주마간산격이람보다 초특급을 타고 달리며 얼른얼른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격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피난 중인 몸이라, 참고서 한 권 없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희미한 기억과 입만을 가지고 이런 자리에 나서는 몸으로서는 이렇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한 일이 아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다가 연대가 미상하여 이야기의 진전을 시킬 수가 없어서 문단적으로 공적을 남긴 잡지의 발간 경로를 더듬어 가며 이야기의 체계를 세워 볼까 합니다. 하기는 우리나라 문학이란 잡지의 발간과 함께 발전되어 내려온 것이므로 이것 또한 재미있는 시도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만으로는 문학강의가 될 성질은 아니고 문단회고 잡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들어 주기 바랍니다.
 
 

2. 1.《청춘(靑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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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단은 종합잡지《청춘》의 발간(1914)으로 그 토대가 닦이기 시작하였다고 보겠습니다. 당시 조선총독이던 寺內[사내]가 갈리고 齊蕂[제승]이 부임하면서 조선사람에도 언론의 자유를 준다고 하여, 문화의식에 목이 말랐던 유지층에서는 한편으로 학교의 설립과 신문, 잡지의 발간에 부심(腐心)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입을 대변하고 나온 잡지가 《청춘》이었습니다. 이《청춘》은 최두선(육당의 백씨)의 창립인 ‘신문관’ 이라는 출판사에서 육당 최남선의 주재로 창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불모지에 들어가는 첫 삽이었습니다. 그 표지에 입을 잔뜩 벌리고 선 호랑이의 머리를 한 장대한 청년이 한 손으로 쓸어 주고 있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화백의 그림은 우리의 힘의 표시인 청춘의 기백을 상징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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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춘》을 무대로 필봉을 들고 활약한 중심인물은 그 주재자인 육당 이외에 고주(孤舟, 당시의 호) 이광수, 소성(小星, 당시의 호) 현상윤, 홍모 등 세 사람이었습니다. 최남선, 이광수, 홍모 이 세 사람은 당시에 있어 조선의 삼재사(三才士 )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쟁쟁한 인사들이었으므로 이들의 필진을 가진 《청춘》은 신문화의 눈이 띄이기 시작하는 청년층과 일제에 불평을 품은 의식층의 절대한 환영리에서 호를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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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춘》을 들추어 보면 그 편집 면에 있어서나 체재에 있어서나 이렇다고 들어서 이야기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언론 종합잡지라, 약간 취급한다는 문예물 그것도 창가인지 시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무쇠 팔둑 돌주먹 소년남아야’식의 노래가 시라는 명칭으로 발표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때, ‘신문관’에게 발행하던 《청춘》이전의 소년잡지《소년》이나 《아이들 보이》《붉은 저고리》같은 데 발표되는 작품이나 그 수준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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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거나 시를 쓰는 사람이거나 혹은 역사, 지리 그밖의 계몽적인 논문을 쓰는 사람이거나 물론하고 붓을 드는 사람이며는 누구나 다 문사(文士)라는 칭호 하나로 불리우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문관’에서 발행한 최남선 편인 『시문독본』과 스마일스의 『자조론(自助論)』같은 것도 문예서와 혼동이 되어 지식 청년층으로부터의 선전으로 말미암아 학생들 간에서 열애가 되던 것을,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나라 문학 발달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임을 여기 부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도 이들 저서의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을 받은 일이 있거니와, 그 당시 『시문독본』이나 『자조론』같은 책을 읽는 청년은 순사들이 한 점 더 놓고 주목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지도층의 인물들이야 얼마나 눈독을 받으며 지내 왔었을까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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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육당은 시조를 썼으나 시조시인으로서보다는 조선역사가로서 더 이름이 있었습니다. 씨는 이 시기에 된 시조를 모아서 『백팔번뇌』라는 국반절판(菊半截判 )의 시조집을 이쁘게 양장으로 내어 놓았을 뿐 문학적인 활동은 없이 역사 연구로 서재의 인(人)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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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성은 폐질환으로 장년을 향리 정주에서 요양을 하다가 교육계로 아주 기울어졌고, 홍모와 춘원만이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오도답파기(五道踏破記)」로 이미 문명을 날리고 있던 춘원은 단편 「가실(嘉實)」과 장편 「개척자」의 발표로 그 명성은 더한층 올라가며 있는 판인데 뒤이어 발표된 「무정(無情)」으로 말미암아 춘원은 일약 전선적(全鮮的)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설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시골 농부들 사이에서도 춘원은 훌륭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춘원은 재사였던가 봅니다. 오산학교 재학 당시에 한문 선생으로 있던 박기선(朴琪善)씨의 이야기에 의하면, 춘원이 한문을 따로이 배워 달라고 해서 「논어」를 배워 주었는데 「논어」전질을 불과 기일(幾日)에 떼어냈을 뿐 아니라, 한 마디도 틀림없이 앉은 자리에서 내리 암송을 하고 또 그 뜻의 해석에 있어서 배워 준 자기보다도 더 정확하게 하는 데는 놀랐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광수의 눈이 남보다 달러, 눈에 재기가 충일하였거든, 반짝반짝 빛나는 동자가”하고 덧붙여 말하는 것을 내가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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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전에도 열재(悅齋) 이해조의 「자유종」「철세계」「만월대」그리고 국초 이인직의 「귀의 성」「혈의 누」「치악산」등 신소설이 없었던 것이 아니나, 이것을 신문학 작품으로 간주하기는 어렵고 춘원의 「개척자」에 이르러서부터야 우리는 신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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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춘원의 작품이 우리의 감정이나 생활양식을 충분히 반영시키고 표현해 주는 것이기에는 아직도 미약한 점이 많았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 의욕적인 그 어떤 면이 나타났다고 볼 수는 있으나 권선징악의 낡은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데다가 그는 그 주관적인 이상주의를 투입하여 주인공으로 하여금 설교를 시키는 등 작품으로서의 결점이 많았습니다. 씨는 문학을 사회개혁의 무기로 쓰기를 즐겨하였고 이상건설의 도구로 삼기를 즐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신진층으로부터 춘원의 문학은 계몽문학이라는(문장까지도) 소리를 듣게 되거니와 씨는 끝내 이러한 방법을 작품에다 투입시키기를 고집하여 왔습니다. 춘원의 만일,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미결감에 있을 때의 유치장에서의 취재인 단편 「무명(無明)」을 남기지 못하였더라면 춘원은 한 사람의 통속작가로, 그리고 한국문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밖에 그 존재는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문학평론가들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중국 상해로 망명을 갔던 춘원이 다시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입사함으로 연달아 해지(該誌)에 집필 연재하기 시작한 장편 「그 여자의 일생」「흙」「단종애사」「허생전」「마의태자」「이순신」「재생」등으로 수만 독자를 얻고 문단의 왕자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춘원의 역량이 가장 잘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장편 「사랑」은 병환으로 장시일(長時日)의 입원 중 병원에서 탈고한 것인데, 지금은 우리 문단인이 아닌 현모가 문학청년 시대에 춘원의 곁에서 춘원의 뜻을 좇아, 부르는 것을 받아 쓰기도 하고, 나중에는 청서(淸書)까지 하였던 것으로, 그「사랑」이라는 제목은 출판자인 박문서관주(博文書館主)이던 고 노성석(盧聖錫)씨가 판매정책을 위하여 작자의 승낙을 얻어서 원제목을 갈고 붙인 제목입니다.
 
 

3. 2. 《창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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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창간을 보고 5년째 되는 해 즉 1919년에 일본 동경에 유학을 하던 김동인, 전영택, 주요한 이 세 사람이 동인으로 잡지 《창조》를 창간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권위 있는 순문예잡지였습니다. 이 잡지가 탄생하기까지에는 시어딤 김동인의 힘과 미술가 백악(白岳) 김환(金煥)의 힘이 지대하였던 것입니다. 그 비용을 동인이 대고 김환이 대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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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창조》의 창간이 비로소 문단의 틀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지금까지 잊지 않고 평론가들의 붓끝이 문학사에서 예문을 들어오는 주요한의 시「불놀이」와 김동인의 단편「약한 자의 슬픔」을 이 창간호가 들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한참 동경유학생간에서 3·1독립운동이 무르익어 가고 있던 시절로, 2호를 그 이듬해 2월, 즉 기미년 3월 전달에 대어놓고는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주요한은 상해로 건너가고 그밖의 동인들도 피신들을 하게 되어 속간의 여념이 없다가 다시 김동인이 속간 준비를 하였으나 2호 이상 그 비용의 승낙을 집에서 일절 불응하므로 곤경에 처하게 됨에 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창조》를 살려 보려고 현해탄을 거슬러 고국 평양으로 건너왔다 또 건너갔다 몇 차례나 왕래를 거듭하며 애를 썼으나 애는 애대로 쓰고도 성사를 못 하고 결국은 당시 문화인의 한 사람으로 문인들과 좋은 교우이며 광익서관을 경영하고 있던 고경상(高敬相)이 비용은 자기가 댈 테니 편집만 해 넣으라 하여 3호부터는 동인진을 이광수(당시 在[재]상해), 미술가 백암 김환, 유방 김찬영, 동원 이일, 극웅 최승만, 오천석 등 제씨로 넓힘과 동시에 서울 광익서관에서 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씨의 힘으로 계속 발행이 된 《창조》는 신문예운동에 있어서의 일조라기보다 주동 역할을 한 셈으로 당시《창조》와 전후하여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족출하던 난파 홍영후 간행의 음악잡지 《삼광》《여자계》, 최승만 편집의《현대》, 영화잡지《녹성》(이상 동경 발행), 고경상 발행의《수양》, 장응진 편집의《서광》《문우》, 이병조 편집의《삼우》《근화》, 오천석 편집의《개척》, 장두철 주재의《태서문예신문》, 황석우 편집의 시지《장미촌》(이상 서울서 발행)등이 모두 1, 2호로 종간이 되고마는 이런 환경에서 7, 8호를 꾸준히 끌고 나갔다는 것은 실로 고경상 개인의 성의에 있었던 것이므로 신문학 발달사상에 있어 이 숨은 공로자 고경상의 이름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백악 김환이 비용을 대기로 하고 한 호를 더 계속해서 되었으나 그 다음 호부터 형이 불응을 하여 더 계속이 못 되고 《창조》는 폐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조》의 폐간에 뒤이어 김동인은 평양서 순문예지 《영대》를 창간하였으나 역시 계속을 못 하고 3호로서 폐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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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은 이렇게 문학운동과 창작을 겸하여 일도양면의 활약으로 신문학 운동에 준 공헌은 과연 큽니다. 「창조」가 문단의 지반을 굳힌 공도 공이려니와 그 작품이 후대에 끼친 바 영향이란 실로 지대한 것입니다. 종시일관 동인은 60이 장근하도록 타계하는 날까지 문학으로 더불어 늙었거니와, 소설이란 동인 이전에도 이인직, 이해조 등 없었던 것이 아니고 춘원에 있어서도 그 쓰는 용어가 모두 현재사로 맛이 없었던 것을 동인이 비로소 과거사를 쓰기 시작하여 그 후부터 가령 예를 들면 ‘왼통 싸움판으로 변하였다’ 하고 ‘한다’로밖에 쓸 줄 모르던 이 ‘한다’가 ‘왼통 싸움판으로 변하였다’하고 ‘하였다’로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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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영대》, 그 후 《개벽》《조선문단》등에 발표한 그의 작품 「배따라기」를 위시하여「태형」「광염 쏘나타」「광화사」「목숨」「감자」「눈을 겨우 뜰 때」등이 모두 자연주의적인 정신에서 씌어지기는 하였으나「감자」나 그 후의 「발가락이 닮았다」등은 인류애의 여운이 풍기는 작품이요,「태형」「붉은 산」그리고 장편「운현궁의 봄」같은 것은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으라고 보겠고「광화사」같은 작품은 탐미적인 경향을 가진 작품이라고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 문인들 사이에서 찬양도 많이 되는 것을 들어 왔거니와 작자 자신인 동인도 해방 후 어떤 출판사에서 내가 대표작을 무엇으로 들겠냐고 물을 때에「광화사」이야기를 하면서 씩 웃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작자가 대표작이라고 꼬집어서 내세우지는 않으나 작자로서는 애착이 상당히 가는 작품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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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주인공 ‘솔거’는 천하에도 없는 추물이었으나, 그 어머니는 절세의 미인이었습니다. ‘솔거’는 자기가 추물이었기 때문에 미인인 어머니가 한번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으므로 그릴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같은 모델을 구하다가 어떤 장님 처녀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처녀는 소경이기 때문에 그 눈의 광채를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솔거’는 그만 화가 나서 처녀의 멱살을 붙들고 욕을 하고 저주를 하며 흔들어 대다가 실수를 하여 ‘솔거’의 손에서 빠져나간 육중한 처녀의 몸은 힘있게 나가 둥그러져서 죽어 버립니다. 이 통에 그림을 그리던 벼루가 뒤집혀 엎이어서 먹물이 그릴 수 없던 처녀의 눈에 가서 떨어져 눈동자가 생깁니다. 이 눈동자는 이 소경 처녀의 생명인 동시에 곧 미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극도의 추(醜)에서 미를 찾자는 것이 곧 이「광화사」의 테마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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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의 작품으로 엉뚱하게 이런 작품이 생긴 것은 그 당시 한참 성히 얽히던 영국의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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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의 작품 가운데서 모델 문제로 말썽이 많던 「발가락이 닮았다」는 ○○○이 친구 ○○의 가정 내막을 「질투와 밥」이라는 작품 가운데서 폭로시켰다고 하여 이에 의분을 느끼고 너는 약점이 없느냐 하는 식으로 ‘발가락이 닮았다’고 응수를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동안 문단에 옥신각신 말썽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 작품이길래 해방 후 내가 동인의 단편집을 출판하면서 일반의 흥미를 노리고 그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제를 따서 책제를 삼았으나 그 모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관계도 있겠거니와 지금 와서는 그것이 아무런 흥미도 일반 독자로서는 느끼지 못하는 모양으로 하등의 반응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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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은 솔직한 고지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지식’을 그대로 표현하는 일화가 많지만 그 중 한 가지만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해방 후 이었습니다. 하루는 모 출판사에서 오래간만에 원고료를 얼마 받아가지고 들어가는 길에 닭을 한 마리 사들고 전차에 올랐습니다. 생물은 전차에 못 가지고 오르는 법이니 내려 주십시오 하고 차장이 요구하니 사람도 생물인데 사람은 어떻게 타는 것이오 하고 반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차장은 그러기에 사람이야 요금을 내고 타지 않습니까. 그래서 동인의 대답은 또 그럼, 닭도 요금을 내면 되지 않겠소 하니 차장은 이 말대답이 불쾌해서 동인의 등을 떠밀어 차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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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은 뒤쪽 문으로 쫓겨 내려가지고는 앞쪽 문으로 가서 올랐습니다. 이것을 본 운전수는 여보 그걸 감추어 가지고 타시오 하니 동인은 닭을 양복 저고리 안에다 한 절반 가리고 이만했으면 되겠지 해서 차안의 사람들이 한바탕 대소(大笑)를 하는 바람에 뒤쪽 문의 차장이 이 닭이 다시 전차에 올라탄 것을 경위채고 달려와 등어리를 붙들고 강제하차를 시키는 바람에 승강대를 내려서다가 발이 뒤뚝하며 몸이 쏠리는 바람에 닭을 떨어쳤습니다. 동인의 품에서 벗어난 닭은 자유의 몸이 된 것이 반가웠음인지, 전자,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질주를 하는 것이 무서웠음인지 세 다리 네 다리 종로 대로를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동인은 닭을 따라 다니다가 관철동 어느 골목에서 잃어버리고 약이 잔뜩 올라서 동대문 전차과로 달려갔습니다. 차장의 그 부당한 행위를 전차과에 말하여 닭 값을 받아내겠다는 심판이었습니다. 전차과 계원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 차가 좀 있으면 돌아올 테니 돌아오면 차장에게 이야기를 하겠노라하여 동인은 그 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전차과 문 밖에서 기다리었습니다. 그러나 곧 돌아올 것같이 이야기하던 전차는 무려 한 시간 나마를 기다려도 돌아왔다는 보고가 없었습니다. 아직 안 돌아왔소? 안 돌아왔습니다. 조금 또 있다가 아직 안 돌아왔소. 네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조금 또 있다가 이와 같은 문답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동인은 자기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사나인 것을 깨닫고 다시는 더 과원에서 말을 할 용기도 없어서 뒤통수를 털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참 어처구니없어서, 원고료 받아서 닭 한 마리 사다가 관철동 어느 기생집에다 선심을 쓰지 않었나.” 하고 동인은 말끝을 맺으며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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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의 작품집으로는 처녀창작집 『목숨』을 비롯하여, 『감자』『배회』『광화사』『발가락이 닮았다』등이 있고, 장편으로는 처녀장편 「태평기」를 위시하여「아기네들」「수양대군」「견훤」「운현궁의 봄」「백마강」등의 출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40 전후의 한참 필력이 왕성했을 때 집필한 사담류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인사담집』상하 2권에 들어 있는 사담 가운데는 명편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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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은 《창조》창간호의 시 「불놀이」로 그 이름을 알았으나, 그 이전 이미 일어로 시를 써서 일본 시인 川路柳紅[천로류홍]의 칭찬을 받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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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 평양 대동강 관등놀이를 노래한 「불놀이」이후 《창조》제 2호를 편집하여 놓고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춘원과 같이 《창조》에 시를 기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절을 전후해서 발표한 수십 편의 시를 모아 얼마 후 ‘조선문단사’에서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국반절판 백색포의로 내놓았는데, 그때 한참 물산장려운동을 하던 시절이라, 장정조차 그것이 국산 무명이었던 것은 의식 있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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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이 『백팔번뇌』 한 권으로 문단과 별로 인연을 가까이 하지 않고 지나듯이 요한도『아름다운 새벽』이후 별로 작시에 전력을 하지 아니하고 신문사 일을 보면서 침묵을 지켜 오다가 일제가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무렵에 언론종합잡지 《동강》을 창간하여 언론계를 위하여 노력한 일도 있습니다. (동광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말할 항목이 있겠음) 지금 간행이 계속 되고 있는 《새벽》잡지가 바로 그 후신이라기 보다 속간 격일 것입니다. 전영택은 《창조》 제2호에 처녀단편 「천치냐 천재냐」의 발표로 데뷔하여 뒤이어 「생명의 봄」「바람 부는 저녁」「피」등을 내놓았으나, 씨를 문단적 지반이 굳어지기는 그 후 《조선문단》에 연달아 내놓은 단편 「흰닭」「화수분」「사진」등으로였습니다. 그런데 「보릿고개」라는 작품이 불온사상의 고취라는 지목을 받고 경무국 도서과 검열계에서 말썽이 된 일이 있은 후 이 관계로선지 씨는 그후부터 작품 발표를 중지하고 종교계로 들어가 문단과는 인연을 끊은 듯하더니 근자 다시 붓대를 다듬고 있습니다.
 
 

4. 3. 안서와 소월과 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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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도 그랬거니와, 《영대》《폐허》《백조》등 당시의 문예잡지는 모두가 동인제로 창간이 되었고 또 불란서식을 본떠서 도전(刀剪)을 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하이칼라로 만든다는 이런 제첵이 일부 독자층에서는 책의 미를 죽이는 것이라고 불평이어서 《창조》는 독자에게 충실하기 위하여 이런 불평층이 많은 지역에는 그들의 비위대로 따로 도전을 하여 보내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일반독자의 지식 수준에 개탄을 마지않으면서도 당시의 문인들은 그 불란서식인 무도전의 취미를 그대로 고집하여 《영대》위의 《폐허》역시 도전 없이 창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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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으로서는 문인만이 아니었고, 예술동호인으로 안서 김억, 횡보 염상섭, 상아탑 황석우, 우보 민태원, 남궁벽, 오상순, 이병도, 음악가 김영환, 화가로서 김찬영 그리고 역시 여류화가인 정월 나혜석, 일엽 김원주 등으로 멤버는 다채로웠으나 백 페이지 미만의 얇다란 잡지로 그 수명도 짧았습니다. 평론가들이 문학사의 말거리를 꾸미기 위하여 그래도 초창기의 문예잡지라고 이런 잡지들을 내세우고 이야기의 재료를 삼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낱 당시 문청등의 습작 발표의 동인 기관지를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차라리 문단적으로 공적이 컸다고 볼 수 있는 잡지로서는 동경유학생의 기관지 《학지광》이나 선내(鮮內)에서 발행되던 학생잡지《학생계》였다고 봄이 정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팔용, 서춘, 계인상 등 제씨로 편집을 거쳐 가며 꾸준히 발행이 계속되던 《학지광》이 우리 신시의 첫 작품이라고 일컫는 유암 김여제(金與濟)의 「만만파파식적」을 내놓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문단 형성에 끼친 자극이란 《창조》에 못지않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학생계》가 학생란을 두고 문인을 키워낸 공적은 실로 컸던 것입니다. 《학생계》는 황해도 봉산인인 추강 이종준의 힘에 의하여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언론종합잡지《서울》과 같이 발행되던 것입니다. 문학에 뜻을 둔 학생들을 위하여 외국문화사 소개와 문예도의 지도이론을 단편적으로나마 거의 호마다 실음으로 문학지식의 함양에 힘을 쓰는 한편, 학생란의 문예작품 현상모집으로 실로 많은 문인을 양성해 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학생계》 창간호가 김억 씨의 추천으로 소월 김정식의 시 「먼후일」을 들고 나온 것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파인 김동환, 무애 양주동, 월파 김상용, 유도순, 설의식 등 제씨가 모두 여기서 발을 디디고 자라나서 오늘의 대성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더듬어 볼 때에 우리는 이 《학생계》의 공적을 크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나 역시 이 잡지의 학생란에서 글짓기를 연습했던 힘이 지대하였던 것임을 잊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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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이 《학생계》가 창간호에서 안서가 추천한 소월을 그 후 학생란 현상문예에서 시 추천 담당자로서의 그같은 안서가 다시 학생 취급을 하였다는 사실이니, 아무리 소월이 시로 감상문으로 호마다 연달아 1등, 2등의 영관(榮冠)을 차지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에 추천을 받은 시인으로서도 영예로울 이치 없을 게고 추천을 한 추천인으로서도 그렇게 대접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 만일 《학생계》가 폐간의 운명에 직면되지 않았더라면 추천을 받았던 「먼 후일」도 학생란 문예현상 응모의 문청으로 돌아간 소월의 존재와 같이 아주 그 가치는 땅 속에 묻히고 말았을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학생계》가 폐간됨으로 《학생계》학생란 문예 현상에 등급이 붙어 발표 되었을 시 「진달래꽃」이 당시 제 1급 종합잡지 《개벽》의 문예란으로 이동이 되므로 소월의 지위는 다시 회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안서가 지극히 사랑하는 애제자인 소월이었건만 문단적으로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소월의 출세에는 이러한 위험천만한 고비도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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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를 이야기할 자리에서 소월의 이야기가 먼저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불란서의 ‘플로베에르’와 ‘모파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안서를 이야기하자면 소월이 아니 나올 수 없고, 소월의 이야기를 하자면 안서가 아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분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서로 엇바꾸이면서 되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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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안서는 4·6배판 8면의 시잡지 《가면》을 내었습니다. 여기 유력한 필자 한 사람은 물론 소월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월의 발표 부대는 좀더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면》은 자정난(資政難)으로 폐간의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소월은 자기의 발표작 미발작 합하여 우금껏 써 온 시고 전부를 안서에게 내맡기어 판권을 선생에게 양도할 것이니 시집을 출판하여 《가면》을 살리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은 스승 안서의 손으로 가면사에서 초판이 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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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소월은 배재고보의 학생으로 간동 모 하숙에서 변동 고학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런 가난한 생활이 문학을 하는 그로 하여금 중학의 졸업과 같이 상과를 택하게 만들었던 것이니, 동경상대에 입학을 하게 되기까지의 그의 뇌리에는 복잡한 생각이 실로 기막히게 그를 울렸던 것이다. 문학을 버릴 수는 없고, 문학으로는 생계를 도모할 수가 없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다 생존해 계시지마는 당신네들 한 몸도 칠 수가 없는 생활에의 능력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공부를 하면서도 자기가 가족의 부양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중한 책임에다 앞날에의 더한 과중한 책임이 미루워 생각킬 때 그는 상과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월의 아버지는 불구자로 앉아서 일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아들의 불구한 불행에 속이 상하였음인지 소월의 할아버지는 또한 정신에 이상이 생기어 그러지 않아도 빈한한 가정은 실로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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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처지에서 상대에 학적을 두고 고학으로 허덕이던 소월은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하고 환국을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불구인 아버지는 선천적인 불구자라 나으리라고 바라는 생각도 애전에 없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만은 하고 염두에 잊지 못하던 것이었으나 증세는 한층 더하여 돈을 잡아야 한다고 60이 장근한 장대한 노구에 백발을 헛날리며 함마를 메고 산중으로 돌아다니면서 금줄기를 찾는다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음에 이 돈으로 말미암은 할아버지의 정신 이상에 소월의 마음은 이를 데 없이 아팠던 것입니다. 오직 술이 위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위안만으로는 사는 수가 없어 구성(龜城) 남시에다 동아일보 지국을 터가지고 그날그날을 살아가면서 작시와 술로 위안을 삼다 삼다「산수갑산운(山水甲山韻)」이라는 시고를 스승 안서에게 부치고 얼마 아니 있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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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활이었고 또 짧은 일생이었던 소월이었던만큼 문단적으로 별로 지우가 없었습니다만 안서의 힘으로 소월의 추도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소월과는 고면도 없는 유명 무명의 인사가 실로 당시의 그 어느 명사의 추도회에 못지않게 참석이 되었더라는 사실은 오직 소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쌓여진 문단적 지위가 말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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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는 《가면》이후《시신(詩神)》이라는 시지의 창간 계획을 세우고 그 자금 조달을 위하여 채권자에게 빚을 받으러 갔다가 돈을 주지 않아 일대 격투 끝에 안면에 받은 상처와 함께 유산이 된 이후로는 모든 것이 여의한 것이 없다고 본래 좋아하던 술만이 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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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안서, 남궁벽 등은 불란서 시단의 퇴폐파 시인 ‘보들레르’ , ‘베르레느’ 등의 생활을 몹시 흠모하여 술도 그들이 즐기어 마시는 ‘워카’나‘압산’류의 것을 택하여 마시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국내에서는 이런 곳주를 구할 수가 없어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이던 안서는 토요일같은 날은 중국 안동현으로 기차를 타고 밤을 밝히어 가서 일요일을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놀다가 밤차로 돌아오는 적도 있었습니다. 기차로 열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이국 땅에 술추렴을 다닌다는 것은 그야말로 호화판인 향락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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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차림도 역시 놀랄 만한 사치였습니다. 분홍 와이셔츠에다 새까만 보헤미안 넥타이를 목에다 한 아름 늘이고 시곗줄로 그 목에 걸어 좌우 가슴으로 쌍줄로 늘여 가슴을 드러내 놓고 가느단 뿔 손잡이를 한 단장을 휘두르며 거리를 활보할 때 안서의 뒤에는 시인 안서를 숭경(崇敬)하는 학생들의 뭇 손가락질이 따랐습니다. 가장 아름답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습니다. 그가 항상 좋아하는 것이 유미주의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이었고 앞에서 지적한 불란서 데카당 시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도 즐겨 번역 소개하였으나 그의 창작시에는 그런 데카당 냄새가 조금도 풍기지 않고 우리나라 고유한 민요적인 정취가 풍겨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민요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소월의 민요체가 스승 안서를 본땄던 것이 아니요, 제자인 소월의 민요체를 스승 안서가 본땄다고 봄이 옳지 않은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창작 처녀시집 『해파리의 노래』와 데카당파의 역시집 『오뇌의 무도』, 인도 시성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내놓고는 모교인 정주 오산학교 교원의 청촉을 받고 향리 시골로 내려가서 횡보 염상섭과 같이 학생들에게 문학사상을 불어넣다가 토요일이면 밤차로 서울로 올라와 당시 일류 호텔이던 패밀리 호텔에 투숙을 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호화로운 생활이 오백여석이나 추수를 하던 막대한 토지를 탕진하게 되어 가난한 생활이 나중에는 「밥과 질투」라는 그의 가정 내막이 모델 된 소설까지 생기어 친우 사이가 벙으러지는 등 자못 파란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맏아들이 공산주의에 물이 들어 아버지와는 대척적인 원수가 되었으므로 안서는 아들과는 불상대면을 하고 지내다가 영 생이별을 하고 말게 되는 등 가정적 불행이 연달아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작시, 역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가정을 헤치고 청진동 청진여관에 하숙을 하면서 역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타고르의『신월』의 출판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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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 청진여관에는 시인 남궁벽도 안서의 옆방에 하숙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문인들은 그 집회소나처럼 출입이 잦았습니다. 주로 김동인, 염상섭, 황석우 등 제씨가 모여서는 문단 이야기에 밤 가는 줄을 모르다가는 선술집행을 하곤 하였습니다. 이때 중학생의 몸으로 안서를 청진여관으로 찾아 다니던 나는 어느 날 김동인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안서가 오늘까지 써 온 돈을 쌓아 놓으면 안서의 키보다 높을 거야.” 이 말은 키는 작은 것이 돈은 웬 돈을 그리 쓰느냐하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김동인도 돈 잘 쓰는 풍류객이라고 소문이 났었던 것인데 동인이 안서더러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안서는 동인보다도 무척 돈 쓰는 데 취미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곧 안서의 대답이 “돈이란 쓰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거든…….” “세지 않구 쓰면 더 가치 있구…….” 하고 웃는 동인의 말에 나의 머리에는 퍼뜩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전 안서가 술 추렴차 평양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서울서 타다가 장쾌한 활극이 일어나 돈을 세지 않고 썼다가 고경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생각입니다. 당시 2등차의 승객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무척 드물었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한복의 2등 손님은 통 없었던 시절입니다. 이 시절에 안서는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2등칸으로 기어 올랐습니다. 차장은 ‘빠가’소리를 치면서 안서의 앞 가슴패기를 떠다 밀었습니다. 안서는 들고 오르던 손가방으로 차장의 멱살을 힘차게 치받고 오르기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올라서는 양복쟁이의 일인들 틈에 다리를 꼬고 봐라 하는 듯이 앉자 가방 속에서 애송시집인 불어 『악의 꽃』을 펼쳐 들었습니다. 가방 찜찔을 하고 적게 안서의 행동만 엿보던 차장은 이 한복 청년이 자기는 알 수도 없는 양서를 보는 것을 보고 머리가 숙여졌음인지 안서의 앞으로 달려와 기척을 하고 서서 잘못했노라고 허리를 몇 번이나 굽혔다. 안서는 아무 말도 없이 보던 책에서 눈을 떼자 타구가 더러우니 부시어 오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차장은 곧 타구를 부시어 왔습니다. 안서는 포켓에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돈을 들어내보지도 않고 던지었습니다. 찻간 바닥에 떨어진 돈을 그는 주어가지고 고맙다고 다시 허리를 몇 번이나 굽히고 갔습니다. 장쾌라, 이렇게 멋들게 한번 돈을 쓴 것이 지나친 뽐냄이어서 평양을 내려 약속했던 친구들과 같이 술좌석에 둘러앉고 보니 질탕치듯 한잔 먹자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침이 말라서 서울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안서도 동인의 말에 이런 일을 회상하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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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다 안서의 신경질인 단기에서 생긴 일이라고 볼 것이지만 안서는 참으로 신경질이었습니다. 팩 하고 내쏠 때에는 물불을 가리지 못하다가 그 순간이 지나서는 후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경질이 단적으로 나타나 팔팔 뛰며 논전을 하려고 하던 이야기를 한마디 함으로 안서의 항은 끝을 막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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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학예부 담당기자로 있을 때 해지에서 문예현상 모집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시 부류의 고선(考選)은 안서 자신이 담당하고 동요의 1등을 이런 작품으로 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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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곰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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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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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밭 못 가운데 소곰쟁이는 1234567 쓰며 노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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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는 쓰지만두 바람이 불어 지워지긴 하지만 소곰쟁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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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고도 아니하고 뺑뺑 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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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567 쓰며 노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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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동요냐고 유지영이라는 사람이 동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동요 고선을 한다고 욕을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안서는 시 평문이 발표된 《조선문단》을 들어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당장에 반박문을 쓴다고 책상을 대하여 붓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반박문이 끝나기 전에 그 「소곰쟁이」는 창작이 아니요, 일문의 번역이라는 말이 떠돌고 그것이 분명하다는 실례로 일문인 원문까지 일본 소학교 하기과제장 이면에 있는 것을 누가 제시하여 선자인 안서는 선자로서의 그 번역과 창작의 분간도 못하였다는 부끄러움이 앞을 서서 또 신경질이 발작되어 쓰던 반박문을 가리가리 찢어 버리고 혼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망할 자식이라고 약이 올라 부르짖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곰쟁이」가 과연 번역인지 아닌지는 나도 지금껏 모릅니다만 그때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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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의 시집으로는 앞에서 말한 것 외에 『안서서정시집』『금모래』등이 있고 역시집으로 『백낙천시집』『망우초』『꽃다발』『동심초』『역대여류시선』등 한시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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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생계》를 말함에 있어 잊을 수 없는 인물은 춘성 노자영입니다. 춘성은 학생란 문예현상의 감상문 고선자로 있으면서 《학생계》를 중심으로 활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그의 시적인 미문이 붙들어 놓은 독자층은 실로 춘원에 지지 않았습니다. 춘성의 감상문에 대한 가치 고하는 여기서 말하지 않거니와 그의 미문이 많은 남녀 학생으로 하여금 독서에 취미를 기르게 하고 문학으로 끌어넣는 역할이 되었던 것은 문단 건설의 초창기에 있어서 큰 공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만은 밝히고 싶습니다. 『사랑의 불꽃』이라는 서한체 감상문집이 근수만 부를 돌파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출판계로서는 놀라운 부수이었습니다. 신문화가 기성도덕에 반항하는 청년 남녀의 연애를 테마로 한 소설 「반항」도 한동안 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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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청년 학생층의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한 춘성은 기고가 만장하여 창경원 벚꽃 사이로 단장을 휘두르며 활보를 하다가 뒤에서 밀려오던 여학생 떼의 한 사람의 종아리를 밧쪼아서 단장을 조심하라는 훈계를 받고 대잡이를 하던 끝에 그 여학생은 상대자가 자기가 작품을 애독하고 인물을 숭경하는 춘성 노자영인 줄을 알고 도리어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 피하여 갔다는, 그리고 춘성은 여기서 단장이 좀더 힘차게 휘둘러졌다는 일화까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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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의 작품은 무엇이나 출판을 하면 팔리었습니다. 그래서 춘성의 원고라면 거절을 하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이런 인기를 알게 된 춘성은 그 이윤을 출판사에 줄 것이 아니라, 그 이윤까지도 깡그리 한몫 보고 싶어서 ‘청조사’라는 역시 출판사의 이름조차 미문 식으로 붙여 놓고 손수 자비 출판을 하여 성북동에 문화주택을 마련하고 한동안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였으나 지병인 폐환 때문에 집필도 못 하고 병치료에 출판 밑천까지 놓았다가 병세가 떨림에 《신인문학》이라는 문학잡지를 창간하여 발표에 애쓰는 신인들의 심리를 포착하여 꽤 많은 독자를 붙들고 몇 해 동안을 계속하였는데 그때는 또 이렇다는 문학잡지가 없었던 시절이라, 기성문인층의 창작도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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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호전가로 그 《신인문학》에도 가십란을 두고 그 가십으로 책 부수를 많이 내었거니와 지면도 없는 일개 시골 문학청년인 나에게도 싸움을 걸어 한동안은 《중앙일보》문화면에서 3, 4차나 논쟁을 거듭한 일이 있습니다. 내 작품이 아닌 것을 《신인문학》에다 내 이름으로 발표해 놓고 내 것이라고 우겨댔던 심리는 지금도 해석할 수 없거니와 그래서 싸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독한 욕이 피차에 오고가고 하였던 것인데, 어떻게 공교하게도 그와 나는 한 직장인 《조선일보》출판부에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인사 끝에 춘성이 먼저 하는 말이 과거사는 수포로 돌리고 잘 지내자는 인사가 있었을 뿐, 어떻게 되어서 그 문제의 「출견(出犬)」이라는 작품을 내 것으로 내 이름을 내박고 발표를 하였던 것이냐고 물었을 때에는 그때에 그는 그저 한양대로 “그것이야 분명 계형의 투고였는데”하고 웃음으로 때웠습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잡지를 한 부라도 더 팔기 위한 수단이였던 것으로 무명은 무명작가라는 다소 이름이 독자간에 익은 사람으로 목차를 장식하자는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잡지들이 잡지를 팔기 위하여 내용은 싣지도 아니하고 이름이 있는 작가의 이름을 소설란 목차에다 나열하는 예가 비일비재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버릇이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경무국 도서과에 넣었던 검열원고가 불통과가 되면 그 알맹이는 아니 뺄 수 없어서 빼어 놓고는 이미 찍어 놓은 목차라 목차만은 그대로 두어 없는 내용도 있는 것처럼 되는 수가 있었던 데서 이것을 빙자하여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잡지도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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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의 시집으로는 『백공작』이 있고 미문 감상집으로 역시 출판부수를 많이 낸 『영원의 몽상』은 지금도 여학생 간에서 많이 팔리는 측의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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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김동환도 역시 안서의 손에서 출세를 한 시인입니다. 《학생계》의 문예현상에 뽑힌 작품이 모두 안서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거니와, 처녀시집 『국경의 밤』또한 안서의 알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출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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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애 양주동도 이때 파인과 같이, 같은 중동학교 동창으로 (그랬었다고 기억된다) 또 《학생계》학생란에 투고를 하는 같은 투고객으로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지고 등급을 다투던 처지로서 그 후 무애가 창간한 시 중심의 동인잡지(동인-양주동, 유춘섭, 손진태, 백기만)《금성》지상에 무애의 손을 거쳐 파인의 시「적성을 손가락질하며」가 추천되었다는 사실은 적이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동기의 손에 추천을 받는 파인도 대담하다고 하려니와, 동기의 시를 추천하는 무애도 대담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문단행세도 그렇지만, 발표기관을 손수 가지고 임의로 자기의 글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출세를 하였다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단을 아무케고 좌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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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문청시대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서, 일절 투고는 아니 할 것이라고 맹세를 하여 본 일이 있습니다. 서해 최학송과 나와는 《조선문단》의 동시대의 투고 청년으로서 당선의 차이가 불과 8호 사이였습니다. 서해는 창간호에 「고국」이, 그리고 나는 8호에 「상환」이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서해는 곧 ‘조선문단사’기자로 입사를 하여 마음대로 자작을 발표할 권리를 가졌으니 기성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시골서 문단에 지우 한 사람 없이 발표에 급급하여 투고만을 계속하는 문청 그대로 답보하였으므로, 그 후 그 《조선문단》이 방인근씨의 손을 떠났을 때 작품 모집 규정이 달라져서 그 현상문예에 도 응모를 하게 되었던 것이, 서해의 고선을 받게 되었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내 것이 당선은 되었으나, 그 당선이란 것이 서해의 고선임을 그 선후언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짐짓 놀람을 마지 못하였고, 동시에 부끄러움을 마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이 어떻게도 자존심이 허치 않는지 당선도 다 반갑지 않고 공연히 응모를 하였던 것이라고 후회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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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인의 시는 그 웅장한 우렁찬 굵은 선에다 우리나라 고유한 정서가 다분히 풍기는 시였으므로, 일제치하에 있어서 힘에 눌려 오금을 못 쓰고 그저 가슴속에 주름이 져서 구겼던 이 정서에의 호흡은 독자의 마음을 때리는 데가 있어 기성으로서의 지위는 곧 회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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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절에 있어 파인이 지우 간에 말썽이 되었던 것은 주소를 통 알리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처소가 어디냐고 물으면 히죽이 웃는 것으로,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느냐는 뜻인지, 혹은 아르켜 줄 수가 없다는 뜻인지 알 수도 없는 요령불득한 웃음의 응답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처소를 숨기는 원인이 어디 있을까를 캐고 드는 사람이 있었으나 파인의 입에서는 종시일관 웃음의 응답뿐이어서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았던 것입니다. 어느 때 안서는 파인을 급히 좀 만날 일이 있어서 파인의 처소를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았으나 모두 하나같이 알 수 없다고 해서 신경질인 안서는 “에잇!”하고 화가 나서 입을 다시다가 처소를 아니 아르키는 그 이상한 성격을 뒤미처 생각하고는 화가 웃음으로 변하여 혼자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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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파인 하면 우리는 잡지 《삼천리》를 연상하게 되나, 이 잡지를 아마 파인은 근 십 년을 끌고 내려와 6·25 전까지 계속을 하였지마는 문단적으로 남긴 공적은 별로 없고 다만 특색이었던 것이, 여류를 즐겨 등장시켰던 것으로 최정희를 비롯하여 작고한 백신애, 이선희등 제씨를 작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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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중전쟁 바로 직전에 파인은 순문학지로 《삼천리문학》을 창간하였으나, 수지 면의 채산 문제로 불과 수호에 폐간을 하고 말았습니다. 꽤 후중한 페이지를 가진, 우리 문단에서는 이미 가져 보지 못하였던 체재와 내용이 아울러 권위를 지녔던 것으로, 이 《삼천리문학》이 신인 양성에 또한 특징을 가졌던 것은, 무명작가에게 원고를 모집하되, 각자가 좋아하는 작가에게 그 고선을 지적하게 하여, 지적을 받은 작가로 하여금 절대 책임하에서 추천을 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제1회에서 3, 4인의 추천을 일시에 보았을 뿐, 이 발판을 집고 문단으로 드디고 올라선 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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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은 이 《학생계》에서 자라 동경 와세다를 거쳐 돌아와선 전기 시지《금성》의 창간으로 문단에 데뷔를 하였습니다. 한 손에는 시봉을 그리고 또 한 손에는 평봉을 들고서 우로 후리고 좌로 갈기며 고함을 쳤습니다. 이 평봉에 제일착으로 맞은 사람이 안서 김억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문단에 데뷔를 할 때에는 흔히들 이미 문단에 이름이 가장 뚜렷한 한 사람을 갈기어 나오는 것을 보거니와 무애의 평봉이야 말로 어지간히 센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도 시성 타고아(안서는 이렇게 발음하였다)니, 불란서 데 카당파니 하는 시인들의 시 번역에 여념이 없던 안서를 향하여 개똥 번역이라고 갈기었던 것입니다. 여기 주를 달리, 똥 번역은 중역이요, 개똥 번역은 2중역이라는 것으로, 안서는 영역에서 일역된 그 일역을 또 우렸다는 것으로, 이 2중역을 지휘하여 개똥 번역이라고 쏘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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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이 무애의 평문을 보고 안서에게 욕한 사실을 알렸더니 안서는 이미 먼저 다 보고 있었던 모양으로, 별로 분해하는 기색도 없이 웃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런 욕이 흔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면역성이 생기었던 모양이지, 혹은 찔리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지, 그것은 알 바 없었으나, 영어로 불어로 사전을 뒤지면서 보는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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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혈기의 이 시절의 무애는 호전객이었습니다. 무애의 도전에는 끈기가 있어서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 열도가 올라가는 데 독자의 인기를 집중시켰던 것입니다. 시집 『조선의 맥박』이후 고전 방면으로 연구의 방향을 돌린 무애는, 당시에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는 거의 무애 독무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향가니 고려가시니 하는 고전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섣불리 언급을 하다가는 무애의 평봉 세례를 받곤 하였습니다. 그래도 뻗쳐대는 사람이 김모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그와의 고려가사에 대한 논전은 참으로 간열한 데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애는 호전객이면서 호인으로 항상 얼굴에 흐르는 미소에는 신랄한 풍자가 숨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는 그것이 바로 6·25직전입니다. 내가 모 출판사에 있을 때인데, 교과서 검인정위원인 무애는 모 출판사에서 제출한 검인정 국어과 교과서에 오자가 있어 그것을 고치라고 했더니 고쳤는지 모르겠다고, 그 교과서가 나왔으면 좀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 교과서는 나와 있었습니다. 오자가 있다는 그 글은 정인보의 글로, 자간을 떼는 ‘|’이런 한 자 길이의 선이 원고(옛날 신문에서 가위질한)가운데 있었는데, 이 ‘|’선 옆에 파리가 똥을 싸서 ‘卜’이렇게 점 복 자처럼 된 것인데, 이것을 출판사에서는 ‘卜’자로 알고 그냥 교정을 통과시켜 놓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 무애는 부리나케 교과서를 받아 보기가 바쁘게 그 대목을 펴들다가 허리가 끊어지게 웃었습니다. ‘파리똥’은 여전히 그대로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파리똥, 파리똥”하며 웃어대는 무애의 웃음은 그 ‘파리똥’이 그대로 붙어 다니는 것 만이 우스웠던 것이 아니라, 보통 출판도 아니요, 교과서인 이 출판에 이렇게도 무성의한 출판사를 아니, 도대체 출판계라는 것을 웃는 웃음이 반은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교과서, 교과서”하고 쉬었다가 다시 웃는 그 웃음을 이런 의미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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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지〕《현대문학》통권 10, 12, 13호(1955. 10. ~1956. 1.)
【원문】한국문단 측면사(韓國文壇側面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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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용묵(桂鎔默) [저자]
 
  # 현대문학(잡지) [출처]
 
  1955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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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