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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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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7.22~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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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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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수감(隨感)의 이토막 저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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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서의 임화를 이야기한다든가 평론가 내지는 예술 운동의 우수한 운전수로서의 임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면은 그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또한 세심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등의 자료도 문헌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깊은 산골에서 쓰게 되는 이 글은 나의 희미한 기억의 줄에 의지한 한 편의 단편적인 수감(隨感)인 데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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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여태껏 세상에 나서 어떤 개인! 혹은 임화에 대하여 처음 드는 붓을 어찌 무책임한 의의 없는 몰문(沒文)으로서 소비할 수 있을 것이냐! 그래서 나는 한 개의 개인인 동지 임화를 써 나가면서 나와의 관계가 중심이 될 것은 물론이지만 될수록 그를 우리의 운동과 사업과 연결시켜서 써나가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렇게 하여서만 개인의 역할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그릇됨이 적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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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점만을 적발(摘發)하여 그를 정당하게 살펴보기는 퍽이나 힘드는 일이며 더구나 다각적이고 다채적인 동지 임화를 이러한 짧은 수감(隨感)을 통하여 보게될 때에는 그의 중요한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를 천명하여 나가는 데는 지극히 총명하고 훌륭한 수완을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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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글을 이러한 모든 이유와 나의 비범치 못한 재능의 탓에 그리고 또 투철치 못한 나의 안식(眼識)의 탓에 수많은 결함과 또한 불충분을 내포한 것이 될 것을 예상하는 바이다. 생각컨대 양해성(諒解性)이 풍부한 독자와 및 동지 임화가 여기서 다량의 포용성을 발휘하여야 할 시기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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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임화-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보성고보의 학모에 반들반들하게 면도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다니던 어린 시절의 임인식(林仁植)에 대하여 또 다다이스트적 시작(詩作)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비상히 애매한 미술적 이론을 가지고 심모(沈某)와 논쟁을 하던 그 시절에 대하여 하등의 논술을 가지게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유랑(流浪)」, 「혼가(昏街)」속의 미남 임화(林華)에 관하여서도 그리고 또한 윤기정, 한설야 등등과 같이 영화 이론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여 싸우던 그 시대에 대하여서도 풍부한 논술을 가지게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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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술운동의 한 개의 중요한 병사로서의 임화…… 더욱 나아가서는 ‘카프’의 최고의 참모부대의 한사람인 인화를 논술하는 마당에서 그가 사업과 일을 통하여 예술운동을 전진시키고 동시에 여하히 하며 자기 자신을 완성에로 이끌고 갔는가 하는 그 ‘왜글찌글’한 전진이 과정에 대하여 정당한 논술을 갖는 것은 아껴서는 안될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완적(未完的)인 이 수감(隨感)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까지도 생략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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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몸맵시를 내며 소격동(昭格洞)을 넘나들던 그의 중학시대를 모르고 있으며 그가 쓴 다다시 미술론 그리고 스크린 속의 그의 얼굴까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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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임화와 내가 한 대오(隊伍) 속에서 굴러가게 된 1929년으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 가장 적당치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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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임화가 우리의 예술사상에 있어서 없어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게 되는 시대의 첫 보(步)는 이때 - 다시 말하면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등의 시작(詩作)을 하는 일방((一方) 김팔봉(金八峰)의 변증법적 사실주의 속에 숨어 있는 우익적 편향의 암을 적발하던 수차의 논쟁에 비롯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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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가 애매한 회색의식에서 눈뜨고 한 개의 조직 속에 투신하여 그 속에서의 장구한 시일의 사업을 통하여 중앙위원회의 의자에까지 앉게 되던 그때를 예술운동의 한 병사로서의 임화에게서 간과치 못할 한 개의 중요한 결정적인 시기라고 보는 데 반대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과 분리하여 진정한 일꾼을 생각할 수 없으며 예술적 사업과 예술적 조직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진대 임화가 조직 속에 투신하여 자기 자신을 예술부대의 한 대원으로서 바치게 되던 그 시기야말로 운동 전체를 보아서나 또 개인 임화로 보아서나 가장 결정적인 시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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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예』와 『조선지광』등에 수많은 독자에게 귀염을 받은 아름다운 시를 발표하던 1929년 7월 어느 저녁때 경성역 대합실에서 안막(安漠)과 내가 임화를 만난 그 후부터 나와 임화는 항상 여러 가지 일을 중심 두고 한 가지 대오 속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이때로부터 이후의 그의 계급생활과 및 사생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그의 근접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임화를 정당히 보는 데 있어서 한 개의 장애의 안대(眼帶)가 될는지 또는 그 반대의 결과를 낳게 만들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전면적으로 임화를 인식하는 마당에 서서는 내가 누구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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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 - 전기(前記)의 것과 및 「어머니」, 「다 없어졌는가」, 「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등이 김팔봉을 위시하여 당시의 활동적 비평가에 의하여 격칭(激稱)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후 일년을 뒤져서 일어난 문학의 당파성의 확립을 위한 날쌘 준열한 바람에 의하여 이러한 모든 시가 소시민적 ‘이데올로기’에 충만하고 애상적이고 등등의 일률(一律)된 비평 밑에 춤밧긴 데도 불구하고 전기(前記)의 시에는 일찍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시가 가져보지 못하였던 풍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비판의 뒤를 이어 일어난 뼉다귀만의 ‘슬로건’시에 비하여는 몇 배나 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우리들의 심장을 붙드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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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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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의 시를 혁명성이 없고 부드럽고 ‘맛있고’달콤하다고 해서 그것을 일률로 배격하고 그러한 경향과의 투쟁 밑에서 새로 움돋은 ‘뼉다귀’시가 불과 일년이 못되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데도 불구하고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 떠돌고 있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 사실일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시에 대한 그 시대의 비평은 시인 임화에게 있어서 결코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임화의 시에는 비상히 안가(安價)한 애상적 부분이 중요한 요소로서 관통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고 그러므로 임화도 이것을 결코 그대로 버리지는 않았다. 동경에 가서 반년간은 이 과정을 표시하는 고민의 시기였다. 그리하여 그의 생의 고민을 극복하고 나온 시는 「양말 속의 편지」였다. 이 시가 무산자사(無産者社) 예술부 (그때는 이미 카프 동경지부가 해소를 선언하고 재동경 카프맴버는 무산자사(無産者社) 내에 이러한 부서를 두고 그 기관 밑에서 연구회를 가지고 있었다.) 연구회에 제출되었을 때 모든 불량한 부분을 소탕하여 버리고 ××적 정열이 문구의 속에 품어 있는 것을 보면서 격칭을 마지않은 것은 홀로 나뿐이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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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대하여는 나는 누구보다도 말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930년 봄 평양에서 개최된 신간회 강연 막간에 내가 이 시를 낭독하였을 때 신간회 중앙 간부들의 애매한 연설에 불만(不滿)한 군중이 수차의 재청(再請)을 가지고 임화의 「양말 속의 편지」를 환영한 것은 나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장면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 때의 강연회에 모였던 군중이 진실한 노동자만이 아니었다는 억측을 가지고 나의 이 말에 반대할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노동조합 회의석상에서 그리고 고무쟁의의 집회석에서 평양의 노동자들에 의하여 여하(如何)히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데 대하여는 수다한 증거를 여기에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 임화가 ‘단순한 사유(思惟)’를 통하여서 과거의 모든 시를 넘어서 여기에 도달하였다고 보는 것은 하등의 정당한 관찰과도 인연 없는 피상적인 태도일 것이다. 이것은 오직 임화가 그의 실천을 통하여 그의 심장을 점차 노동자 계급의 속에 둠에 의지하여 비로소 가능하였다고 보는 것만이 절대로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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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임화는 동경 가 있는 2년 동안에 전보다 수배(數培)한 정치적 관심 밑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일체의 기준은 입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서 점차 노동자계급의 운동에로 접근하면서 있었던 것이다. 김팔봉(金八峰)과 논쟁하던 시기의 임화는 보다 소박한 임화였다. 그의 「탁류에 항(抗)하여」라는 논문은 정치적으로 보아 비상히 정당한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빈약한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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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완전히 조선의 진정한 예술운동의 지도적인 이론의 대표자가 된 것은 진실로 1930년 여름에 발표된 『중외일보』의 「프로예술운동의 당면한 중심적 과제」이후였다. 이 논문은 당시에 우리들이 당면한 내외정세의 분석에 따라서 조선의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 - 및 ‘카프’앞에 가로놓인 중심적인 과제를 상술한 방대한 논문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소잡(素雜)한 점과 그릇된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당시에 있어서의 이 논문의 의의는 비상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작성한 토론의 기운에 의하여 조선의 예술 운동은 일보 전진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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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경 있는 동안의 활동은 조선의 예술운동에 대하여서보다도 ‘무산자’사원으로서의 것이 중심적이었음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조선의 예술운동은 실천 속에 몸을 안 둔 해외에서 지도한다든가 또는 ‘카프’의 조직적 차륜(車輪)을 사실적으로 운반하지 못하는 분자가 중심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虛構)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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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가 있는 동안의 빈궁한 합숙생활은 공생활과 사생활의 모순을 덜어주는데 퍽이나 커다란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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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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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다 같은 소시민층의 출신이고 강철같은 규율 속에서의 장구한 시일간의 조직 생활을 경과하지 못하였다는 공통된 불행뿐만이 아니라 임화에게는 위경련으로부터 맹장염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우심한 질병의 탓에 이 생활의 고민을 완전한 정도에 있어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의 누구나가 다 이 고민을 유리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931년 봄에 임화와 나는 전후하여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다시금 일신을 던져서 ‘카프’의 일에, 그리고 일반문화사업에 미력을 다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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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월 27일 개최되려던 ‘카프’확대 위원회의 준비적 모임 이후부터 임화는 카프의 지도적 지위에 서서 카프의 핸들을 사실상으로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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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의 신음을 지내고 내가 1931년 9월 중순에 혼자 서울 속에 남아 있어서 임화의 출감을 들었을 때에는 그는 신뢰하는 탓에 ‘카프’의 앞에 안심과 낙관을 가지고 홀로 떨어진 나 자신을 위안하면서 있었다. 그럼으로 작년 여름을 전후 두고 카프 중앙부를 휩싸고 도는 불량한 경향을 풍편에 들을 때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임화의 맹장염의 돌발에 의한 위독의 보(報)를 접할 때마다 나의 머리는 항상 빛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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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면회 오는 처를 붙들고 몇 번인가 임화의 위독의 보(報)에 수심 지었으며 그가 기적으로 쾌도(快度)를 전할 때에는 한종일 눈물을 흘리도록 가슴의 고동을 억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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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창백하지마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동지 임화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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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신년호 『조선일보』에 「당면정세의 특질과 예술운동의 일반적 방향」을 쓴 이후 임화는 수많은 문제의 산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연(依然)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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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침통한 침묵을 여하히 극복하고 예술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위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은 진정한 일꾼만이 할 수 있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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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지금 결단적인 전향의 앞에 도달하고 있다. 이 전향을 위하여는 정책적인 모든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찍이 범한 중요한 정치적 범오(犯誤)에 대한 엄격한 자기 비평도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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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33. 7. 25]
【원문】임화(林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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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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