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현대 조선소설(現代 朝鮮小說)의 이념(理念) ◈
카탈로그   본문  
1938.9.10~
김남천
1
現代 朝鮮小說[현대 조선소설]의 理念[이념]
2
──‘로망’改造[개조]에 대한 ─ 作家[작가]의 覺書[각서]
 
3
이 문장은 우리 문단의 최대의 관심사요 또 가장 많이 논의되어오는 문학 위기의 구출 방법과 그것과의 관련 밑에 토론되는 장편 소설의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의 일단을 말해보려는 것인데, 일반론이나 원칙론을 떠나서 ──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걸음 나아가서 ── 창조의 비밀과 제작의 실제에 즉하여 비교적 구체적인 부면에서 하나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중심적인 의도이다.
4
이즈음 내가 각 신문 잡지를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제씨(諸氏)의 의견을 얻어 들은 것이 결코 한둘이 아니어서 여기에 하나하나 그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범연한 대로 두 가지로 다 갈라서보면 편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나는 주로 에스프리나 지성이나 사상이나 이런걸 제시하여 문학의 위기와 문단의 침체를 타개해보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장르사적 고찰에 의하여 문학 형태의 개조를 책(策)하는 가운데서 작가에게 문학의 진로와 방향을 지시해보자는 노력이다. 이 밖에도 비교적 저널리즘의 현상을 기조로 신문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순수 소설)을 분화하자는 의견을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이런 모든 것과는 한 등(等) 떠나서 이즈음 흥행 성적으로 히트를 쳤다는 모 영화까지는 실례로 들어가며, 작가에게 신선한 감각을 요구하는 이조차 없지 않았다.
5
이상과 같은 제씨의 의견이 물론 하나하나 경청함에 족하고, 작가에게 중대한 계시를 준 것에 틀림은 없는데, 간혹 가다는 잔소리만 많고, 하찮은 지식의 무질서한 전람이, 흡사히 싸구려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논설도 적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거짓없는 사실일 것이다.
6
이랬거나 저랬거나 처방전과 타개책과 구출안은 그만했으면 나올대로 나왔다고 생각할 만한데 질색할 노릇은 작가의 손에서 작품이 나오질 않으니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나오는 작품마다가 모두 시원찮아서 평론가와 비평가가 작가를 꾸짖고 격려하고 추키고 내리키고 하는 소리만 소란스러우니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일까. 물론 죄는 작가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낫지 않는 병자만을 탓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고치지 못하는 의사에게도 반분의 죄는 있을까 한다. 이것을 가령 임화 씨의 고백에서 들어보면 전기한 논의에서 가장 많이 유익한 노력을 하였고 내가 알기엔 작가의 창조적 비밀의 열쇠를 잡아보려고 가장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씨(氏)는 최근에 초(草)한〈작가에의 진언장〉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7
나는 최근의 소설이 세태 소설과 내성(內省) 소설로 분열되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그 통일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작가들에게 제시해야 할지, 실로 창황치 아니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소위 본격 소설(本格小說)의 길을 개척함에 있다고 결론하였으나 유감인 것은 그 논리가 작가들로 하여금 창작하는 붓대에 흘러내리는 산(生[생]) 혈액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무래도 부정할 수가 없다.
 
8
그러나 이렇게 술회하는 씨는 다시금 그 글 가운데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개진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는가. 씨는‘지성’과‘사실’에 대한 약간의 분석을 시(試)한 뒤에(독자의 편리를 도웁기 위하여 말해두거니와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으로 임씨 것 외에《조선일보》에 실린 서인식 씨의〈지성의 시대적 성격〉이란 호문장(好文章)이 있다) 결국 사실의 재인식이란 말로 돌아가버리지 않았는가. 이 사실의 재인식이라는 결론도 우견 같아서는 작가에게 이 정도의 논리만 가지고는 하등의 구체적인 통로도 열어주는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임씨의 생각은 어떠한지?
9
다시 최재서 씨는 동일한 제목의 문장에서 조선의 작가에게 지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적 빈곤을 구하는 구체적인 논책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지적 노력, 교양의 배양을 결론으로 가졌을 뿐이었다.
10
이 결론이 작가의 제작상 실제에까지 미치려면 적어도 몇 계단의 층계를 넘어야 할 것임을 씨 자신도 부인치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11
이 밖에 일련의 원칙론 일반론은 그것이 작가의 혈육이 되려면은 아무래도 좀더 구체성을 띠어야 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12
백철(白鐵) 씨는《조광》지 8월호에 방대한 장편 소설론을 발표하였는데 〈종합 문학의 건설과 장편 소설의 현재와 장래〉라는 이 논문 가운데서 장편 소설 개조에 대한 의견이 차지하는 수량은 비교적 적었고, 또 질로 보아도 그다지 구체성을 띤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씨는 제1항 신장편 소설론에서 문학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문학장르로서‘로망’형식에 최대의 희망을 걸면서 장래할 로망이 종합 문학의 형태를 취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다. 그러면 백철 씨의 이른바 종합 문학의 형태란 어떤 것을 말함인가. 씨 자신의 붓으로 기술된 바를 보면 이러하다.
 
13
이때에 임하여 현대의 종합 문학으로서 장편 소설은 먼저 그 내용성에 있어서 과거의 근대적 장편 소설과 같이 단순한 스토리와 단일한 남녀 주인공과 축차적(逐次的)인 발전이 아닐 것이요, 형태에 있어서도 그것은 시와 단편과 수필과 일기와 논문까지가 합류하여 일체를 이룬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4
이리하여 씨는 앙드레 지드의《위폐 제조자》와 종합 예술로서의 영화의 진경(眞境)을 예로 이끌었다.
15
간단한 이상의 논술만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감상을 말하는 것도 미안한 말이지만 세심히 씨의 개조론을 살펴본 끝에 결국 백씨는 아직 씨의 이론에 대하여 명확한 신념이나 또 이론의 정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를 나로 하여금 품게 하였다.
16
가령 씨의 이른바‘종합’이란 말을 나는 발랄, 다시 말하면‘셰익스피어적 발랄성’이라는 의미에서만 장래의 문학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백씨의 종합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와 단편과 수필과 일기와 논문까지가 합류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종합 문학이 여하한 로망이 될는지는 나와 같은 천안자(淺眼者)로서는 족히 상상할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씨는 지드의 작품과 영화를 들었으나 나로서는 모두 온당치 못한 피상적인 인례처럼 생각되었다.
17
한편 전술한 백씨의 글 가운데서 스토리와 남녀 주인공과 축차적 발전을 배격한다는 귀절을 보면 씨의 장편 소설에 대한 이념은 서구의 20세기적 소설 형식에 대한 동경의 사상은 아닌가 하고 해석된다. 고전적 본격적 로망 형식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을 도입하여 로망 형식의 파격(破格)을 시험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준 프루스트, 피란델로(Luigi Pirandello),제임스 조이스의 취한 바 길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일정한 스토리와 단일한 남녀 주인공과 축차적 발전을 배격하여《천변풍경》을 제작한 박태원 씨와 이상 씨의 문학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래할 씨의 대종합 문학을 이러한 길 위에서 진전시킬 수 있다고 백씨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18
그것은 어쨌건 백씨의 장편 소설 개조의 방향이 임화 씨의 것과 정반대의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은 우리들 작가의 흥미를 끌어 마지않는 바이다.
 
19
임화 씨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우리 소설 문학의 현상의 분석을 통하여 그의 구출 방법의 결론으로서‘본격적 고전적 소설’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는데, 백씨는 임씨의 분석으로 세태 ── 백씨에 의하여 사태 ── 소설과 내성 소설의 분열을 시인하면서 그 타개책으로서는 임씨와는 반대로 고전 소설 형태의 파괴에, 그의 도달할 방향을 찾고 있는 것이다. 두 분이 모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간단한 제안을 시하였을 뿐으로 이렇다할 구체적 논책이 없으므로 앞으로 더욱더 토론이나 논쟁을 전개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나, 지금의 씨 등이 가르치는 논리만 가지고는 좀처럼 작가들의 이해를 얻기가 곤란하지 않은가 우려되는 바이다.
20
이 외에 한설야(韓雪野) 씨가 장편 소설이 이야기의 형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설명하여 재미 난 논책을 시하였으나 설화체(說話體)의 비밀에까지 논급되지 못한 것은 격화소양(隔靴搔痒)의 감이 없지 않았다. 인제 일반론이나 원칙론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창조상 실제에 즉하여 주요 작가의 장편 제작의 현상을 적어보기로 하자.
 
21
금일의 우리 소설 문학 가운데 세태 묘사와 심리 내성의 두 경향이 있다손치고 이러한 분열된 두 개의 조류가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사회적 원인를 논자에게 물을라 치면 임화 씨나 백철 씨나가 한가지로 인간 존재 자체의 자기 분열의 반영이라는 데 그 논거를 두고 있다. 작가가 주장하려는 바를 표현하려면 묘사되는 세계가 그것과 부합되지 않고, 묘사되는 세계를 충실하게 살리려면 작가의 생각이 그것과 일치될 수 없는 상태라고 임씨는 말하였다.
22
물론 이상의 분석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서 문학을 구출하는 방책에 이를 때에 백씨는 종합 문학론에 도달했고, 임씨는 본격 소설에로의 귀환과‘사실의 재인식’에 결론을 구하였는데, 그것이 과연‘소여(所與)의 환경 가운데서 자기의 창조와 생존의 확고한 방향, 틀림없는 양식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확답이 될 수 있겠느냐에 이르러서는 아무래도 좀더 치밀한 검찰이 요구되는 것 같다.
23
결국 이즈음 논의되어온 제씨의 논술로써는 상기한 바가 가장 우리 문학의 현상의 분석에 기대(基臺)를 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으로 하여 오히려 도달한 지점이 그 정도밖에는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면 부득이 우리는 일반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작가의 창작상의 실제적인 비밀에까지 손을 뻗쳐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4
그래서 가령 인물 설정이나 성격적 전형의 창조라는 부면을 통하여 이것을 주요 작가의 제작 실제에서 찾아보면은 어떻게 좀더 작가의 내면 생활에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러한 측면적 탐색에서 로망 개조의 어떠한 계시가 나올 수 있을는가는 아직 단언키 힘들는지 몰라도‘전형적 정황 속에서의 전형적 성격의 창조’라는 리얼리즘에 대한 선배의 계시에 찬 명제를 염두에 두고서 어떤 요(料) 외에 성과조차 기대해보는 것이다. 투르게네프든지 누구든지는 먼저 상이한 유별스런 성격 소유자를 2,3인 끌어다놓고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모였으니 반드시 이러한 사실이 벌어지리라 하여, 그 다음에는 작가가 온전히 작중 인물들의 자기 행동에 따라다니면서 작품을 구성하였노라고 자기의 창작 비밀을 토로하였다고 하는데, 물론 이러한 태도는 아무개에게나 추장할 수 없는 것임엔 틀림없으되, 일고의 가치는 충분히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25
사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들이 테마와 한가지로 무엇보다도 먼저 곤란을 느끼는 것은 작중 인물의 배치와 성격 창조와 관련되는 부면은 아닐까. 어떠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을 것인가.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 어떠한 사상 어떠한 행동을 갖는 사람을 설정하여 그에게 시대 정신을 구현시키고 작가의 이념을 살리어볼 것인가. 이러한 장면에서 작가가 느끼는 곤란은‘사상을 가져라!’‘세계관을 가져라!’‘현실에 대한 훌륭한 인식을 가져라!’하는 등의 규환으로써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씨는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을 줄 안다. 발자크가 그의 유명한〈스탕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얼마 전에 읽어보고 재삼 음미하였다.
 
26
사건이나 이데를 쌓아 올리는 데 어딘가 무익이 있는 것 같다. 인물로 된 이데는 보다 높은 예술이다. 플라톤은 그의 심리적 모랄을 대화화하였다.
 
27
인물로 된 이데는 보다 높은 예술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과 세계관이 그대로 인물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와 사실의 누적보다도 인물로 된 이데를 발자크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8
이것이 만약 리얼리즘에 있어 기분(幾分)의 진리라도 품고 있는 말이라 할진대 사회와 개인이 극도로 분열되고 육체와 두뇌가 승려의 시체처럼 분리된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들 작가는 시민 사회의 상향기나 산업자본주의의 상승기의 작가에 비하여 확실히 불행한 것임에 틀림없다. 전체주의를 경계하면서 생기 발랄한 통일된 적극적 성격을 창조하기는 우리들로서 지극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29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을 설정하였느냐, 혹은 못하였느냐가 그 소설을 때로는 긍정적 리얼리즘으로 갖느냐 부정적 리얼리즘으로 갖느냐 하는 것을 판정하는 관건이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다시 통속소설이냐 순수 소설이냐를 구별하는 초점으로도 될 수 있다는 것,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사소설(私小說)과 설화체의 문제에까지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30
채만식 씨는 현대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공공연히 고백하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 속에다 긍정적인 인물, 역사를 추진시키는 적극적인 성격적 전형을 하나도 설정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씨의 최근의 장편《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은 30년의 신문학 있는 이래 그 유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윤장의로부터 그의 아들 윤주사 창식이, 다시 그와는 이복인 태식이, 창식이 아들 종수, 종수의 아들 경손이, 경손이의 대고모, 윤장의 며느리, 전식구가 모두 채씨에게는 풍자나 조소나 민소(憫笑)의 대상이다. 단 하나 윤장의 영감으로 하여금 장차 경부가 되어 서장이 되리라는 환상을 갖게 하던 작은손자 동경 유학의 대학생 종학이가 채씨에 의하여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되었으나 이는 만석꾼이 윤장이네 집안에‘해 저무는 만리장성’을 맞이하여 망조가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계적으로 잠시 빌려온 것이지 엄연한 의미에서 작중 인물이 아니었다. 소셜리스트들의 사건에 관계하여 경시청에 피검되었다는 종학이는 채씨가‘망주자(亡奏者)는 호야(胡也)니라’를 설정하기 위하여 전보문 속에 등장을 시켰을 뿐이다. 종학이는 그러므로 내체나 두뇌를 구비하고 행동을 하면서 작품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러한 식으로 작중에 긍정적인 인물의 그림자만을 끌어오는 수법은 채씨에게 있어 상투적이다. 〈치숙(痴叔)〉에서 그러하고〈이런 처지〉에서 그러하고〈제향날〉에서까지 그러하다.
31
이렇게 보아보면 채씨가 어떤 부류의 인물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체로 명백하여진다. 그러나 씨가 이것을 하나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 원인이 있는 것일까. 채만식 씨를 위하여 먼저 출판 조건을 들어두자. 그러나 씨가 인물로 된 이데를 창조하려 하지 않고, 이데를 인물에다 덮쳐 붙이든지, 이데를 누적하려든지 하는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아니한가. 확실히 씨가 사상가나 사회 운동자에게만 사상과 이데를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긍정적인 인물을 전형에까지 파악치 못하는 태반의 원인이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그러나 발자크의 말을 빌려오면 인물로 된 이데가 중요하였다. 사상을 배운 자나 세계관을 붙인 자나 이데를 지껄이는 자나 그런 것보다도 인물로 된 이데가 보다 높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32
그러나 한번 돌이켜 씨의《탁류》를 생각해보면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는 긍정적인 인물을 성격적 전형으로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 처음 붓을 들기 전에 쓴 씨의 제작노트에는‘승재’와 ‘계봉’이가 아마도‘고태수’‘제호’나 악한 꼽추 등과는 다른 자리에 이름이 적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승재와 계봉이를 전형으로서 높이어보겠다는 노력을 버리기 시작한 것은 소설의 후반에서부터는 아닐런가. 후반에서부터 씨가 명백히 설화체로 옮아갈 징조를 농후히 하면서 작자가 승재를 대하는 태도가 점차로 변하면서, 드디어 작자는 승재에서 떠나서 완전히 제삼자적 관망자로 물러가 앉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승재가 계봉이와 포옹을 하고 처음으로 입술을 나누고 생활 설계를 하고 하는 가장 감격적이고 긴장된 장면을 작자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작자는 가끔 가다 실소(失笑)까지 한다. 씨가 설화체나 일방적 설화체로 간 것은 무리가 아니며《탁류》를 쓰는 도중에서 기필(起筆)한《천하태평춘》에 승재, 계봉이 같은 인물을 아예 설정하지부터 않았다는 것은 전혀 그러한 채씨의 창작 심리 때문이었다. 채씨는 이리하여 현대인의 생활에서‘추(醜)’밖에는 발견할 수 없는 작가로 되었다. 추나 부정적인 것을 잡다하게 그리는 데는 설화체를 취하는 것이 첩경일 것이다. 역설·풍자·조롱이 씨의 수중 완물(手中玩物)인데 작가가 관망자이기를 그만 두지 않는 한, 이야기 조(調)는 버리지 못할 것이다.
33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양심적 인간의 타입이란 것을 대충이라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어느 정도로 창조된 인물을 양심적 타입이라고 사람들이 불러오는가를 명백히 하는 데서 우리의 소설은 확실히 일보 전진할 줄로 생각한다.
34
이태준 씨의《화관》의 주인공‘박인철’이도 일종의 양심적 청년이고 한설야 씨의《청춘기》의 주인공, 이무영 씨《명일의 포도(鋪道)》의 두 청년, 유진오 씨의《수난의 기록》의 대학 조수도 모두 양심적인 지식 청년이라 한다. 속된 비평가들은 이런 때에 곧잘 엉터리 삼단 논법을 사용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양심적이다, 그러므로 작품도 양심적 작품이다, 그러니까 작가도 양심적 작가라고.
35
그러나 이상에 제(諸) 장편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각각이고, 그에 따라 양심적 인간의 전형이란 것도 색색이다.《화관》의 주인공은 경박한 모던 보이와의 대조에서 겨우 양심적이다. 이렇게 저급하게 파악된 양심적 인물의 설정에서 작품의 구성과 묘사를 진행시킨《화관》은 통속 연애 소설로 가게 된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몸맵시를 보고, 색구두를 신고 하는 자, 반드시 경박한 청년이 아닌 것과 한가지로 그런 인물을 싫어하고, 댄스를 아니하고 결혼을 신중히 , 생각하는 청년, 반드시 양심적 청년의 타입은 아닐 것이다. 이무영 씨의《명일의 포도》에 나오는 두 청년은 서로서로 존경하고 사랑을 양도하는 미덕을 갖고 돈만 아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그에게 반기를 들고 허영에 뜬 동생들을 싫어하고 하는 의미에서 양심적 청년이다. 그러나 이런 청년이 시대의 추진력이 될 만한 인물인지 그런 의미에서 양심적인 인물인지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 ── 이것은 작자나 독자나 한가지로 단언키 힘들 것이다.
36
한설야 씨의 작중 주인공과 유진오 씨의 것은 명백한 사상을 가졌다는 지식인이 현대 사회의 기구 속에서 고민하고 허덕이며 결백하려고 애쓴다는 의미에서 투철한 양심적 타입이라고 한다.《청춘기》의 주인공은 신문 기자였으나 기업자와 주주들의 추잡한 간계를 걷어차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모 사건에 관련하였다. 유씨의 것은 장편이 아직 시초에 있기는 하나, 태반 동일한 인물이다. 우리의 상상보다는 좀더 처져서, 혹은〈김강사와 T교수〉나 〈5월의 구직자〉정도의 양심적 지식인인지도 모르겠다.
37
어쨌든 이상의 일별로서 족히 양심적 인간의 타입이 갖는 실제적인 뉘앙스가 어떤 것이라는 것은 알 만하다. 그것은 생기도 없고, 발랄할 데도 없고, 다분히 관념적 조작에 의하여 염색된 기계적인 인물들이었다. 사상을 말하고 계급을 운위하고 세계관을 지껄이고 발자크의 소위 인물로 된 이데는 아니다. 덧붙였든지 빌려왔든지 억지로 떠넘긴 이데다. 통틀어 우리들의 유위한 장편의 챔피언들은 현대 사회에서 시대 정신을 하나의 성격적 전형으로 창조해보려는 노력에서 애석하게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38
예를 이기영(李箕永) 씨에게서 들면 사태는 더욱 명백하다.《고향》의 주인공 김희준은 상기의 어떠한 작가가 창조한 인물보다도 투철한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이라 하겠다. 임화 씨는 춘원의 이형식,《무정》주인공에 대하여 3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써 김희준을 들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김희준의 창조에서 작자가 폭로한 관념성과 도식성(圖式性)은 인물로 하여금 생기도 발랄성도 멸살시키고 말았다. 이씨의《서화(鼠火)》의 주인공‘돌쇠’보다 작중 인물로서 수등의 손색이 있다는 정평은 우리들이 신중히 주목할 점이다.
39
김희준는 사상을 말하고 고민도 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도 한다. 그러나 이 인물 속에 구현된 작자의 사상이란 지극히 안가(安價)한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배운 사상이고 얻어들인 사상이고, 입술만의 사상인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도 지껄이지 않고 도박만 하고 술만 먹고 다니는‘돌쇠’가 인물로서는 생체가 있고 살이 있다. 이것은 인물로 된 이데다. 당해 시대의 시대 정신을 듬뿍 몸과 행동에 지니고 나와 다니는 인물이다.
40
이렇게 보아온다면 양심적 인간 타입이란 것이 예술적으로 결코 높이 평가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적극적인 인물의 창조를 딴 방도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이 작가에게는 초미(焦眉)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41
최재서 씨가 나의 작품 경향의 한 면에 대하여 시니시즘(cynicism) 내지는 자조를 가지고 말하였고 임화 씨가 이상의 문학과를 함께 합쳐서 나를 내성 심리의 문학이라 지적한 데 대하여 인물 창조라는 이상 논술의 관점에서 이를 재삼 음미해본다면 양씨(兩氏)의 이 같은 지적인 이면에서 지식인 소시민의 인물 창조에 있어서 내가 사실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양심적 인간 타입이라는 것을 작자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근접한 지식인 사상 청년이라는 부류 가운데서 무감사나 무심사를 붙여서 찾아내는 것을 경멸 내지 기피하였고, 이것은 그대로 준엄한 자기 고발의 실천이라는 한 계열의 작품을 나로 하여금 가지게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서 자기 분열이 초극된 하나의 발랄한 성격을 잡으려던 노력이 드디어 시니컬한 내성 심리에 시종하고 말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지식인과 소시민의 가운데서 이를 잡아 보기에 실패한 나에게는 다른 또 한 계열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소년을 취급한 작품 ── 〈소년행(少年行)〉〈남매〉〈누나의 사건〉〈무자리〉등 ── 이 이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통일성을 상실하지 않고, 자기 분열을 경과하지 않은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나 소년이리라고 생각해본 것이다. 내가 취급하는 소년이 조숙하다는 것은 이원조 씨가 누차 해온 말이다. 그러나 실상 내게 필요한 것은 소년이나 동화의 세계가 아니었고, 오직 분열을 경과치 않은 생기 발랄한 타입만이 소용되었다는 창작 심리를 토로하면 이러한 점이 또렷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의 나의 작품이 무엇을 결과하였는가는 제씨의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42
지리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성격적 전형의 창조라는 부면을 통하여 우리 작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은 대충 이상과 같다. 물론 인물 창조만을 들어서 소설의 전체를 운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상의 분석을 갖고도 우리 소설 문학이 어떠한 방면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점차 로망의 개조를 꾀하여야 할 것인지는 희미하게나마 생각할 수 있을까 한다.
43
우선 이상의 결론으로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소설성의 상실이다. 소설성이란 과연 무엇을 말함이냐. 이것을 설명하려면 장황을 면할 길이 없으나 그것을 로망 발생의 사적 고찰로 보아서 과학적 합리적 정신에 의한 개(個)와 사회의 모순의 문학적 표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고 하자. 이렇게 본다면 인물과 정황의 창조에 있어서 작가의 관념이나 도식이 현실을 왜곡되게 판단하는 것을 위선 극력으로 배격하여야 할 것이다. 사상이나 작가의 안일한 주관을 작중 인물 위에 덧붙여서 그의 행동이나 사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현실에의 지적 관심과 분석을 문학적 표현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하여 생기 발랄한 작중 인물의 행동에서 명확한 형상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여질 것이다.
44
그러나 이렇게만 말한다면 논술의 추상성은피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원칙보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작 실제의 혈육이 되어야 할 구체적인 제안이기 때문이다.
45
이제 내가 이상의 논술을 거쳐서 로망 개조의 단초적인 출발까지를 합쳐서 생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무엇보다 풍속 개념의 재인식과 가족사와 연대기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가장 적절한 장소일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풍속이라는 개념을 문학적 관념으로서 정착시키고 그것을 들고 가족사로 들어가되 그 가운데 연대기를 현현시켜보자는 것이다.
46
그러면 풍속이란 우선 무엇이냐? 일찍이 나는〈일신상 진리와 모랄〉이란 졸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둔 적이 있다.
 
47
풍속이란 사회적 습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습관·습속은 사회의 생산 기구에 기한 인간 생활의 각종 양식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결정을 본다. 이리하여 이것은 일방으로 제도를 말하는 동시에 타방으론 제도의 습득감을 의미한다. 풍속은 생산 관계의 양식에까지 현현되는 일종의 제도(예컨대 가족 제도)를 말하는 동시에 다시 그 제도 내에서 배양된 인간의 의식인 제도 습득감(예컨대 가족적 감정, 가족적 윤리 의식) 까지를 지칭한다.
 
48
그러므로 습속은 사회의 기본적 기구의 하나의 소산이요 하나의 결론이다. 사회 기구의 본질이 풍속에 이르러서 단적인 표면 현상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49
풍속을 이야기하는 마당에서 명확히 해야 할 것의 하나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ie)이다. 그러나 고현학이 생각하고 있는 풍속이란 대단히 통속적인 것이어서 사회 기구에 있어서 물질적 구조상의 질서를 제일의적인 분석의 기준으로 삼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이것저것을 두루두루 살펴서 일반 공통한 징후나 현상을 잡아, 이것이 마치 사회의 어떠한 본질적인 제요소처럼 생각하는 데서 생겨난 물건이다.
50
그러나 우리가 말하려는 풍속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에 속한다 ── 도덕이 문학의 대상이라는 것은 내가 누차 말해온 바다. 습관·풍속이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사회적 규범인 것은 성 관계나 풍속 괴란이란 사회 현상을 보면 뻔한 일이며 이것이 일상 도덕인 단적 내용이 되는 것도 우리가 한가지로 보는 바다.
51
풍속은 그 다음 사상적인 본질을 갖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국민의 풍속·습관을 항용 국민성이라고 말하여 그곳에 국민의 사상을 관취(觀取)할 수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52
대체로 이상과 같이 대충대충 풍속을 생각해보면은 이에 대한 인식을 이 마당에서 새로이 강조하는 나의 의견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세태 묘사니 사태 소설이니 하는 경향이 논자의 분석대로 우리 문단에 현존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풍속에까지 높이어서 생각할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리고 일방으론 내가 수차의 졸고에서 논급한 바 과학적 개념이나 세계관이 주체화되려면 도덕을 일신상 진리로서 파악하여 그것을 풍속 속으로 들고 들어가야만 비로소 개념은 문학적 표상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53
이렇게 평가된 풍속을 갖고 가족사와 연대기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결과하고자 하는 때문인가.
54
풍속을 가족사로 들고 들어가면 우리 작가가 협착하게밖에 살펴보지 못하던 넓은 전형적 정황의 묘사가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때문이고, 그것을 다시 연대기로서 파악하자는 생각은 우리의 정황의 묘사를 전형화하고 그 묘사의 핵심에 엄밀한 합리성과 과학적 정신을 보장하겠다는 심사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지적 관심을 높이겠다는 심사이다. 한편 우리가 현순간에서 발견하지 못하였던 발랄한 생기 있는 인물로 된 이데를 현세인의 형성 내지는 생성 과정에서 잡아보려는 야심을 일으키어 현세기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지는 않을까, 그것을 희망하는 마음도 실인즉 없지 아니하다.
55
모랄의 확립, 정황의 전형적 묘사, 생기 발랄할 인물의 창조, 지적 관심의 고양, 이것은 족히 로망 개조의 기본적인 내용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상실한 소설성을 족히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6
그러면 이것이 로망의 형태에 미치는 바 변조의 역할이란 어떠한 것일까? 무엇보다 구라파적 20세기적 소설 형태, 다시 말하면 지금의‘시민 사회의 서사시’로서의 로망을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 인물과 정황의 창조는 조이스 등의 방법, 예컨대‘내심의 독백’‘침묵의 독백’‘점대 점(point counter point)’적 프로세스를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른다면 임화 씨의 고전적 본격적 소설에의 귀환과 일치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러면 백철 씨의 소위‘종합 문학’의 형태에로 향할 것인가? 절대적으로 아니다. 이러한 저돌적인 개조는 지금의 우리들 작가로서는 실행할 수도 없거니와 또 하였자 훌륭한 로망은 탄생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57
명확한 규정은 모르되 우선 이런 것만은 생각할 수가 있다. 우리는 위에서 풍속을 들고 가족사의 가운데 현현된 연대기로 간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가 전면에 나설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와 인물을 발생과 생장과 소멸에서, 다시 말하면 전체적 발전에서 묘출하여야 할 것을 추상(推想)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용납하고 구현할 수 있는 로망 장르가 생겨야 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이것이 로망 개조의 단초가 될 것이다.
58
그러나 실인즉 형태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예언하는 것은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소설성을 구출하고 새 세계를 개척하는 데서 로망의 개조는 서서히 행하여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보면 현대의 작가는 공연히 불행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행여 제씨의 비판을 받으면은 만족하겠다.
【원문】현대 조선소설(現代 朝鮮小說)의 이념(理念)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8
- 전체 순위 : 5129 위 (4 등급)
- 분류 순위 : 1069 위 / 1794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김남천(金南天) [저자]
 
  1938년 [발표]
 
  문학(文學) [분류]
 
  평론(評論) [분류]
 
◈ 참조
  # 창작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현대 조선소설(現代 朝鮮小說)의 이념(理念)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