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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문학(朝鮮文學)의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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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6
안확(安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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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文學[조선문학]의 기원
 
 

1. 1. 聖地[성지]와 祖先[조선]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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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조선이란 땅은 천연적으로 유별나게 생긴 판도(版圖)이다. 옛날부터 성지(聖地)란 일컬음이 자자했으며 세계의 방위로는 제일로 꼽는 첫머리 동방(東方)이요, 기후로는 화창한 양기(陽氣)가 덕택을 펼치는 낙원이며, 그 가운데 자옥한 물색(物色)은 천공(天功)을 뺏었으니,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무궁화는 자연미를 화장하였다. 수림(樹林) 가운데는 동물조차 희한(稀罕)하여 흰깁과 누른털의 봉황과 기묘한 짐승이 무위화(無爲化)로 길들이니, 우주간의 둘도 없는 성지는 참말로 이 조선의 본토라 할 것이다. 아아, 거룩한 성지여, 대견스런 낙원이여, 이 강토가 생길 때는 그 누구를 위하여 드러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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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聖地)가 나타나는 애초에는 부러운 탐욕을 내어 이 땅을 점탈(占奪)코자 들썽대던 족속들이 실없이 많았었다. 당돌한 개장, 악독한 오랑캐가 제각기 흉기를 내두르고 성군작당(成群作黨)하여 팔방으로 침입하니, 그 형세는 몹시도 험악하고, 그 세태는 너무나 위태하였다. 그 당시 그 판국에 대궁장모(大弓長矛)의 특수한 무장(武裝)을 차리고 우레 같은 호령을 외치면서 통쾌하게 내달아 여러 종족을 물리친 자가 있으니, 그 무사의 일대는 알괘라, 누구더냐. 곧 성지의 주인공인 우리 조상 조선족(朝鮮族)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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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들의 출동하던 경상(景狀)은 용사(龍蛇)가 꿈틀대고 천지가 반복(反覆)하였을 것이니, 그것을 글로 쓰면 청천일지(靑天一紙)가 거의 반은 찰 것이요, 말로 하여도 장야삼춘(長夜三春)이 도리어 짧을 것이다. 그러나 묶어진 고사(古史)의 버성긴 간편(簡片)이 그 사적(事蹟)을 숨겼으니, 지금에 그것을 명백히 말하기는 실로 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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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혹간 기록에 보면, 숙신씨(肅愼氏)의 대궁(大弓)은 별종의 무기로 동방인의 특용물이니, 그의 화살은 독약을 칠하여 명중하면 즉사케 하였다. 또한 『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 등에 거푸 써 있는 글발을 보면, 동방인의 여러 종족은 월등히 보전(步戰)을 잘하며, 3장(丈) 되는 긴 창을 가지고 특별히 궁시(弓矢)를 잘 쓰며, 집집마다 활·화살·창·방패를 갖추었고, 그 사람들의 성질은 대체로 강용(强勇)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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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타난 몇줄의 사적(史籍)은 비록 편언척구(片言隻句)로되 없어진 자취가 그 가운데 남아 있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그 단서를 찾게 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런 기록들은 상상만의 덜 익은 소리가 아니며, 풍문으로 떠도는 헛수작이 아니다. 곧 당시 동방인의 모습을 진솔(眞率)로 기록한 것인데, 당시 우리 조선(祖先)이 그런 유별난 무기를 사용한 것은 사실로 알 것이다. 이미 사실이 그렇다 하면 그 무기를 사용한 것은 무슨 필요에서였더냐. 이는 가장의 겉치레가 아니다. 철기축답(銕騎蹴踏)에 진(陣)을 깨치고 적을 찍어내던 실용물이 될 것이니, 흉한 오랑캐가 침입하면 군용(軍容)을 도솔라 혁노일성(赫怒一聲)에 대적을 물리칠 적에 대경략을 도모하거나 부곡(部曲)을 휘몰아 엄포단방(嚴咆單放)에 외번(外藩)을 깨뜨릴 때 막든지 공격하든지 전란에 닥쳐 생명을 다투던 장물(贓物)이 됨을 알 것이다. 더욱 근일에 곳곳의 고총(古塚)에서 발견한 돌도끼·돌칼 등을 볼진대 고대에 강적과 싸우던 자취에 대하여 틀림없는 사적(史蹟)임을 보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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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출중한 병기를 갖추고 지나던 이면에는 격렬한 전쟁을 겪은 일은 물론이요, 그 전쟁은 한두 해의 결말이 아니다. 세세연년으로 연전연투하여 성풍(腥風)을 쐬고 혈우(血雨)에 젖어나니 가위 고대인의 생활은 전쟁의 한 일뿐이던 것이 추상(推想)되니, 보라 고대인의 활과 방패를 잘 썼다는 ‘선용(善用)’ 2자와 보전에 능하다는 ‘능(能)’ 1자는 그 숙달을 가리킴이 아닌가. 또한 집집마다 병장기를 스스로 갖추어 두었다 함은 걸핏하면 나가싸운다는 그 상비적(常備的) 준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 그 전술이 숙달되고 그 군비가 상비되기에 이르러서는 그때의 소식을 알 것인바 악전(惡戰)은 얼마나 치렀으며 고투는 어떻게 겪었느냐. 아아, 시산(尸山)이 솟아있고 검수(劍水)가 넘쳐 흐른대 산전수전(山戰水戰)에 갖은 풍상을 무릅쓴 것은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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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듯 선인들이 용도호척(龍跳虎擲)으로 활동하던 동안은 알지 못하건대 얼마나 세월을 지냈더냐. 그것은 좀먹은 청간(靑簡)이 기주(記註)의 대종을 허락치 아니하나 정치 연표는 삼국시대 이전을 통틀어 고대에 붙였는데 그간의 세월은 이슥하게 2천년 동안을 잡아오던 것이다. 그 장구한 세월에 많은 목숨을 희생하여 한참 동안 싸우던 전쟁은 성지의 전접(奠接)을 돈정(頓定)하기까지 또는 만대의 기업(基業)이 개창되기까지에 한하여 겨우 요정을 지은 모양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렇듯 여러 해포에 혈전을 베푼 본뜻은 과연 어디 있더냐. 이는 다름이 아니다. 측면으로 보면, 그때 당신들은 위대한 영웅되기 좋은 운명을 가지고 절대의 사업을 완성키 좋은 무거운 책임을 메었던 바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보면, 그들의 실정은 성지를 굳게 지켜 자손 만대에 전하고자 한 포부였으니, 그러므로 그때부터 민족 생활의 근거가 잡히고 조선문명의 창설이 준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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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전쟁이 모든 생활의 개막이라 하면 다시 하등의 사목(事目)을 갈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시말을 연구에 비쳐 볼 때는 그 결과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중에는 여러 가지 사단(事端)이 잠재하여 있다. 그것을 한번 두서 있게 차려 보면 알맞게 3항의 사소한 조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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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진(兩陣)이 상대하매 검극(劍戟)이 오고가는 마당에는 주거니받거니 그들과 우리의 문물이 바뀌어 떨어지니, 온갖 비밀과 온갖 술수는 거기서 폭로된다. 그중에 발동되는 호기심은 이상한 물품에 탐욕이 따라나와 채장보단(採長補短)의 이용심을 부추겨낸다. 또한 기필코 승리를 이루는 방략은 전재산·전지능을 한껏 들이니, 성곽의 개량, 군기의 신비(新備) 등 모든 요구는 비밀리에 새록새록 발전이 될 것이다. 이런 필지적(必至的) 현상에 따라 태고의 물질문명은 그 전쟁에 비겨대어 스스로 개진(開進)하여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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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정(奇正)의 임기(臨機), 허실의 응변, 그런 전술은 행군(行軍)의 예사이거니와 별로 교통의 근무(勤務)는 전투의 첫째 정사이다. 더욱 조선의 지세는 산이 많은데다가 송규빈(宋奎斌)의 『풍천유향(楓泉遺響)』에 써있는 말과 같이 수목이 공중을 가리니, 그 천봉만학(千峰萬壑)은 하늘이 준 거참(巨塹)을 지었다. 여기서 행진(行陣)함에는 지리(地理)를 중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로 인하여 태고인의 지혜는 먼저 지리적 상식이 특별히 투득(透得)되었다. 또한 군대 생활이 뇌수에 젖었으매 그 동심합력의 도덕은 만사에 응할 것이며, 평상시의 생활도 군대적임을 연상하게 되니 사회군의 공동생활상 의식도 그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상 군대적 상식과 지리적 상식은 인간 고유한 사회성의 발동과 결합하여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어 부락을 세우게 되었다. 부락이 형성되어서는 원시적인 표류 생활이 종지부를 고하는 동시에 그것이 정치적 통일의 결정적 요소로 되어 점차 국가 조직을 형성하여 나갈새 북에는 옥저(沃沮)·숙신(肅愼)·부여(夫餘)·예맥(濊貊)·조선(朝鮮) 등 다섯 나라를 세우고, 남에는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 세 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조선에는 대통일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없고 초기부터 여덟 나라의 분립정치를 행함이 특색이다. 이는 곧 군대적인 많은 단체의 정신이 각기 정주(定住)한 토착(土着)과 직접 연대(聯帶)함을 취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여덟 나라는 흡연히 자치적 군영(軍營)을 배설함과 같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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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동안 실생활의 발전은 어떤 경로를 지났더냐. 근대의 인류학을 빌리지 아니하여도 원시시대의 살림살이는 원시적임을 추측할 수 있다. 성지 강산의 자연의 물산이 생활의 흡족한 자료를 제공하며 개인이 각기 조그만 힘으로 천연의 식물(食物)을 취하게 되니 최초인의 가뜬한 애과(挨過)는 거기서 능준하였다. 손성연(孫星衍)의 『괄지지(括地志)』에 전하는 숙신씨의 생활은 “말갈국(末鞨國)은 옛날의 숙신이다. 동북쪽 1만리가 그 아래 있다. 동쪽 및 북쪽은 각기 큰바다에 접하고 그 나라 남쪽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가 모두 흰빛이다. 그 사람들이 사는 산림 사이는 기온이 대단히 차가워 굴을 만들어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게 여기며 9제(九梯)에 이른다. 돼지를 길러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서 입으며, 겨울이면 돼지기름을 몸뚱이에 두텁게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아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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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직 일부 사람들의 정상을 적은 것이나 그 기사는 스스로 전토생민의 정도를 엿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혹은 바위굴 혹은 옥려(屋閭)로서 광대한 천지에 임의대로 투숙함은 그들의 거접(居接)이요, 추우면 가죽옷, 더우면 나체로 그 자유스러운 복색은 그들의 치장이다. 심지어 음식물도 익은 과일 날고기에 식전(食前)이 방장(方丈)일새 당시인의 경제 사정은 조금이나 부족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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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복(征服) 사업이 벌어진 후로는 많은 것도 줄어가고 숱한 것도 부족하여졌다. 이에 입고 먹는 일에 일대 변화를 야기하여 바야흐로 생활의 새 방식이 나타나며 아끼는 정조(情調), 부지런한 동작, 그렇게 깨우치는 정신이 공동생활의 의식을 겸하여 목축 생활로부터 농업 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그렇듯 실생활의 변천이 생기는 이면에 그를 짝하여 특별히 이상적(理想的) 천지를 열어 상조(相照)함이 있으니, 이 천지가 무슨 천지더냐. 이것이 곧 정생활(情生活)의 한 세계가 그것일새, 문학(文學)의 기원은 곧 여기서 빚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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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열거하여 온 생활의 변천과 환경의 변화는 문학과 표리의 관계를 지은 것이다. 곧 문학의 발원은 당시 생활의 반영으로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향토에서 경래(經來)한 생활로 도야된 민족의 성정(性情)이 문학의 발원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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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조선문학의 기원은 깊고도 튼튼하며 그 거대한 뿌리는 향토의 지형과 연결되니, 저 반도의 지형, 맹호(猛虎)가 북대륙 바람을 타고 동서에 치달리듯, 또한 비룡(飛龍)이 남양 구름을 토하여 천하에 비를 퍼붓듯 그러한 조화(造化)를 품고 수용산출(水湧山出)로 퍼져나갈 기세는 이때 문학의 기원이라 하겠다.
 
 

2. 2. 神話[신화]와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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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세계는 적지 아니한 전쟁도 겪어났었고 그만한 지혜도 터졌으니, 저간의 사설(辭說)감은 무던히 장만하여졌다. 촌늙은이의 이〔虱[슬]〕 잡는 수작에는 상전벽해(桑田碧海)나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도 지껄여댈 것이며, 아동의 죽마(竹馬)놀음에는 창을 휘둘러 적을 꿰던 사시(史詩)도 노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태고는 태고이니만큼 그 문적에 실린 것이 단순할뿐더러 여간 끼쳐 있던 담설(談屑)도 잔간(殘簡)에 사양해 두거니와 설혹 그 글발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수레에 가득히 실려 있다 하여도 사상(思想)의 활동으로 안 되는 것은 문학의 원천으로 거들어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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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우주 만유(萬有)에는 영기(靈氣)가 있고 인간 심리에는 정기(精氣)가 있다. 이 양자를 아울러 말하되 생명(生命)이라 한다. 이것이 사회에 나타나면 혁명(革命)이라 하고 이것이 개인에 나타나면 자각(自覺)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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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상(萬像)이 여기 의지하여 움직이고 천지가 이 때문에 활동하니, 새가 울고 꽃이 피며, 저 사람은 웃고 이 사람은 우는 것은 또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품수(品數)는 이 생명의 활동에 달렸고, 저 먹줄에는 있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정기와 생명은 온갖 먹줄과 질서를 타파하여 나아가나니, 이에 문학은 이 사상 활동에서 나온 것이매 오늘날 우리들의 태고문학을 말할진대 무사상의 글발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그는 효주(爻周) 될 것이며, 오직 정기 있는 것이면 비록 소품(小品)의 글발이나마 그를 빙자하여 태고문학의 진상(眞狀)을 알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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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당시의 취미가 있는 진정한 문학이 무엇이냐 할진대, 당시의 생존력이 족하고 경쟁력이 남은 뒤를 받쳐 활동된 사상이 우리들의 심사를 말쑥하게 하고 우리들의 사상을 듬직하게 하며, 또한 우리로써 이상경(理想境)에 놀게 한 것이 곧 당시 문학의 초산물(初産物)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 세계를 떠나 따로이 천상의 세계를 주장한 것이 있다는 하느님을 인식함이 그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이 하느님을 신앙하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으냐 하면 『후한서』『삼국지』등에 비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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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12월에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고 연일 술마시고 춤추는데 이름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행인들은 밤낮없이 노래부르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後漢書[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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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언제나 5월에 씨앗을 뿌리고 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모여 노래하고 춤춘다. (『三國志[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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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무천(舞天)이라 한다. 그 음악은 대체로 부여국과 서로 같으나 특히 제사지내는 달이 다를 뿐이다. (『文獻通考[문헌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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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적(文籍)을 보면 족히 고대인의 사상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 천신(天神)의 관념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당시인은 실감을 객관화한 것, 다시 말하면 실감이 돌연 강하게 굳어진 윤곽적 형상에 압도되고 동요되고 풀려날 때 주관·객관의 분별을 안 차린 의식 전체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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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건대, 충충히 들어찬 삼림 속에 불어닥치는 풍우, 한없이 깜깜한 허공에서 진탕치는 천둥·번개 그것이 그때 사람으로 하여금 괴로운 생각도 내게 하며 부실한 중정(中情)도 떨리게 한 것이다. 거기서 시달린 당시인의 감각은 몰밀어 소박한 상징주의에 걸렸다. 그러더니 그것이 내면적 발전으로 인하여 탈투(脫套)의 지경을 얻고자 함에 노력해서는 일종의 추리로 퉁겨진 사색(思索)을 일으키니, 이것이 사상 고동(思想鼓動)이다. 그 사상이 모색 시대, 논의 시대, 선전 시대 등 얼마만큼 세월을 지내고 나서 여러 인상을 마감하여 일종의 정의를 얽어세우니, 이에 천신 곧 하느님이란 명사가 생기었다. 이 하느님은 곧 천지 만물을 주장(主掌)한 자로서 보편적인 성격에 대하여 우월한 세력을 가지고 또한 사람들의 사고를 차지한 대주(大主)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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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실컷 만사를 풀어보는 영력(靈力)을 가지게 되니 자연계의 멀골, 인생관의 무꾸리, 층첩으로 맺힌 의심의 매듭은 천신을 신앙함으로써 차례로 풀려갔다. 그 천신의 권능(權能)이 점점 익어감에 따라 종교적 의식이 숙성하매 그 신앙이 넘치는 여지에 온갖 미담이 흘러나오니 신화와 가요는 곧 여기서 발생한 것이다.
 
 

2.1. (1) 신화(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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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곧 우리 조선(祖先)의 상상으로 나온 바 종교의 기초요 동시에 문학의 실마리다. 그 신화는 수효가 적지 아니하되 이에는 그 몇종을 들어 그 대강을 약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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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의 아들 환웅천왕(桓雄天王)이 3천의 천신(天神)을 거느리고 인간에 하강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때에 한 곰, 한 호랑이가 있어 천왕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천왕이 영약을 주어 재성(齋誠)으로써 자화(自化)케 하였다. 그러나 호랑이의 불성의(不誠意)로 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고 곰은 정성을 다한 결과 여인으로 화하였다. 웅녀(熊女)가 다시 잉태하기를 빌었다. 천왕이 이에 가화(假化)로써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호를 단군천왕(檀君天王)이라 하였다. 단군이 천왕을 대신하여 왕이 되더니 1500년 만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서 산신(山神)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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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촌가에 1남 1녀의 오뉘 아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한 호랑이가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러 말을 하면서 문을 열어달라 하였다. 두 아이가 호랑이인 줄 알고 무서워 도망하나 갈 데가 없어 큰 나무에 올라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늘에서 생동아줄이 내려온지라 두 아이가 타고 올라가 남자는 달이 되고 여자는 해가 되었다. 호랑이가 쫓아가려 하여 또한 올려달라고 빌었다. 마침 삭은 동아줄이 내려오매 호랑이가 타고 올라가다가 수수밭에 떨어져 죽으니 지금까지 수수깡에 적색(赤色) 흔적이 있음은 호랑이의 피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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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화의 성질은 천지 개벽설과 인간 진화설로 된 것이다. 그중에는 태고인의 사상도 서려 있고 철학적 요소도 비쳐 있다. 그들의 이상경은 인간계가 아니요 초자연계의 천상계에 있으니, 천상계에는 천신 즉 하느님이 있다. 하느님은 대덕(大德)·대혜(大慧)·대력(大力)을 가진 자로서 무상 일위에 있어 우주를 총찰한다. 그런데 이 천상계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상함에는 피차에 무관계함이 아니다. 천신은 인간계에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서로 결합 또는 연통함을 얻으니, 이 사상이 인간의 감각과 자연과의 상호 작용으로서의 인감주의(人感主義)에서 나온 것인바 곧 고인의 우주관이다. 이 천상계를 신앙함이 사회의 발달을 아울러 심히 그 힘을 더해서는 드디어 종교적 원형(原形)의 체례를 성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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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 화하여 사람이 되었다 함은 덕화적(德化的) 산물인데 오늘날 인류 진화설과 다름이 없다. 서양 각국의 신화(神話)에도 동물 설화가 많으나 그는 다 지력(智力)의 겨움을 말한바 영웅 설화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충실이 있는 동물을 내세워 도덕적 취미를 붙인바 조선인 특성에 맞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서양의 최초의 여성관은 천신의 분부를 위반한 자로서 지식 사술(詐術)에 기인하였다 하니, 이는 죄악의 인지(人智)에서 나왔으며 죄악이 곧 인문(人文) 진화의 동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여성관은 그와 전연 판이하다. 호랑이는 사나워서 신명(神命)을 행하지 못함으로 사람으로 화하지 못하고 곰은 충실하여 신명을 순종함으로 사람으로 화하였으니 이는 인문 진화가 선미(善美)·충실을 다함에 있다 함이다. 이로 보면 서양은 귀납적(歸納的), 조선은 연역적(演繹的)으로 그 사상 발동의 기초가 초고(初古)부터 상반됨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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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사람의 성적 교섭이 있음은 여러 민족의 신화를 회통(回通)하여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선의 설화(說話)는 종교적 의식을 머금은바 신적 실체가 세계와 함께 합솔 일체(合率一體)됨으로써 입각지를 세운 것이다. 남녀가 일월(日月)이 되었다 함도 타국 몇곳의 설화와 상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화에 서려 있는 의미는 자연의 세계를 벗어나 가치 있는 세계에 유(遊)한바 선이 악을 이긴 결과의 덕화적 용자(容恣)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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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틀어 말하면, 신화의 묘맥(苗脈)은 전혀 도덕력의 권화(權化)로 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 맺혀 있는 정신은 겉다른 깊은 의미가 있으니, 곧 순일(純一)한 미의 형상으로부터 외잡(猥雜)한 형상을 구축(驅逐)하는 기색으로 되었다. 요컨대 곰이 사람으로 화하였다, 호랑이가 사람의 말을 한다. 사람이 일월로 변성하였다 하는 문맥이 정히 그들의 정신을 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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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지적으로 보면 맹랑하다 할지 모르나 예술적으로 보면 문학의 가치가 거기 있는 것이다. 시인이나 예술가나 지속적인 개개의 인상을 생명 있게 유기적으로 종합하여 꽃을 미인에 비하고, 천사(天使)를 날개 달린 여자로 그림은 지금도 상투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이 문맥은 당시인의 물체에 대한 상징적 감흥으로 된 것이니, 그 사상인즉 물질로부터 정신을 구제하는 계단으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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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말하면, 외잡한 기형(畸形)의 세계와 다투어 질서와 조화를 보아내어 순일하고 청랑(淸朗)한 형상의 세계를 배설함이 태고인의 노력이었다. 이 정신이 실지에 발휘해서는 다년의 전쟁으로 악마의 적을 물리치고 신성한 국가를 개창함에 이른 것이다.
 
 

2.2. (2) 가요(歌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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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天神)을 신앙하는 종교가 생긴 이상은 엄숙한 예절로써 치제(致祭)하는 일이 행하여졌다. 그 제식(祭式)을 장설(張設)하는 채비가 세상에 고루 퍼져 백성의 풍속을 이루어 갈 제 개인의 독설(獨設)로는 명수(明水) 한잔의 치성을 드림도 있을 것이나 중인(衆人)의 합심으로 대례(大禮)를 거행함에는 조두은천(俎豆殷薦)에 백례(百禮)의 건사(虔祀)를 차리게 되니, 이는 별로 특정한 시일을 잡아 연중 행사로 진설하매 고사(古史)에 써 있는 바 ‘영고(迎鼓)’라 ‘무천(舞天)’ 이라 한 명절은 곧 그 제삿날의 별명이다. 그런데 이 제삿날에는 반드시 가무를 연장(演張)하여 그로써 신을 을러내어 그 감응을 받고자 함에 미치니, 이로부터 가요(歌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요의 기원은 종교적 절차에서 나온 것이니, 위에 보인 사적에 삼한은 10월, 5월에 제천할 때에 남녀가 한데 모여 음주 가무한다 하고 부여는 12월 또는 정월에 제천대회할 때에 행인이 밤낮 없이 가음(歌吟)하여 음성이 연속이라 함은 실로 이를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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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의 가요는 악무(樂舞)를 겸하여 비로소 생명을 내게 되니, 다시 말하면 가·무·악의 삼자는 서로 갈리지 못한 간연(干緣)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시(歌詩)의 내맥(內脈)은 악무의 형식을 비겨서 추측하기 넉넉하다. 『삼국지』 마한전(馬韓傳)에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낮고 높게 밟으며 손과 발을 서로 응하는데 리듬은 방울소리로 맞춘다.” 고 하고, 또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보면 “삼한의 풍속은 귀신을 믿고 언제나 5월에는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모여 마시고 북과 거문고에 맞춰 노래부르고 춤추는데 땅을 밟는 데는 리듬이 있다.(주 : 거문고는 筑[축]과 같은데 그것을 타면 또한 음곡이 있다)”고 함에 따르면, 음악에는 벌써부터 축(筑) 같은 현악기를 썼으니, 노래는 그 악기에 반주하는 바로서 상당한 선율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춤은 주(周)나라 때 중원(中原)에 넘어가 유행됨이 있었는데 『주례(周禮)』에 있는 매악(靺樂[말악])이 그것이다. 진양(陳暘)의 『악서(樂書)』권173에는 매악사(靺樂師)의 화본(畫本)이 있는데, 그 사람은 긴 창을 가지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춤의 절률(節律)은 느리고 약하고도 음설(淫褻)하다 하였다. 그 설명은 혹시 중국인의 능청스런 오행설(五行說)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으나 『주례』춘관(春官)주에 확실히 동방인의 투습(套習)대로 지켜 하였다 하니 “정씨는 ‘사방 오랑캐의 음악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나라의 풍속을 변경시키지 않았다’ 고 말하고, 황씨는 ‘매(靺[말])는 동이의 음악인데 특별히 한 관서를 설치하고 그 인원은 40명이고 그 음악이 융성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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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악(靺樂)은 곧 조선 태고의 악무(樂舞)됨이 적실하다. 이로써 태고의 무용(舞容)을 추측할진대 그 형식은 율동적·표정적으로서 단체적으로 꾸며있고 그 내용은 무의미의 도약도 있고 흔히는 극적으로 된 것이다. 통틀어 말하면 춤추는 사람이 긴 창을 가진 품이든지 율동이 활발하였던 것이든지 모두 최초의 전쟁 생활하던 무사(武士)의 풍도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에 무녀(巫女)가 군복을 입고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무용함에 비하면 그 모습이 저 화본(畫本)과 서로 같고, 경상도 지방에서 음악회를 ‘매굿’ 이라고 하니, 이 ‘매굿’ 의 ‘굿’ 과 무녀의 춤과 『주례』의 ‘매(靺)’ 악이란 것을 서로 비교하면 정히 같은 뜻임을 알 것이니, 이로써 보면 고대의 가무는 제장(祭場)의 신주적(神呪的)으로 발생됨이 의심 없는 일이다. 그런즉 당시 가요의 성질은 조선(祖先)의 전쟁하던 사시(史詩)도 있었고 신사(神事)에 관한 사설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예술상으로 보건대, 당시의 예술은 일체 감정을 종합적으로 표한바 예술은 동시에 종교요 종교는 또한 그 예술로서 쌍방의 관념을 갈라서는 그를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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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가요의 문구가 오늘날에 이르러 전한 것이 없으니 이게 문학상 서어한 점이라 할 것이다. 이 형지(形止)에 대해서는 근일 학자가 야릇한 구기(口氣)를 발하여 말하되, 고대 고유 문화는 한문화(漢文化)의 숭배로 자멸하였다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는 천만에 도섭스런 소리이다. 고래로 한문화를 쓴 것은 문화상 경략(經略)으로서 유학생이 저 땅에 침입하여 그 문화를 약탈한바 문화적 외정(外征)의 전리품으로 쓴 것이요, 결코 저에게 굴복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근일 학자들이 이의 어엿한 진상을 알지 못하고 한문화의 사용을 노예적이라 하여 숫제 이책(詈責)을 가함은 이는 선조를 능욕하는 반심(叛心)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테면 선조의 일은 있는 과실도 동의적(同意的)으로 감춤이 도리거늘 없는 것을 허물로 트집함은 어찌 그 작죄가 아니냐. 나는 선조를 변호함이 아니다. 사실(史實)이 그러한 것이니, 그 내용은 다시 뒷장에 자세히 보이려니와 어쨌든지 고문학의 없어진 것은 한문학 때문에 일부러 없앤 것이 아닌바 그의 속내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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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가(古歌)는 음악을 겸하여 생명을 붙였다 하는 것은 위에 말한 것이거니와 그 종합적 상상으로 나온 가요는 반드시 음악과 합한 것이니, 그런데 음악은 원래 세밀한 가락을 다시 연주치 못하는 창작성이 있어 변화가 잦을새 그 음악의 선율이 많이 변하는 바람에 가요도 거기 따라서 본색을 부지(扶持)치 못하여 필경 흐지부지된 것이다. 더욱 사상활동의 단계적 정리가 거기 참여해서는 그의 소마력(消磨力)이 자못 강하였을 것이다. 대개 인간의 역사는 건설과 파괴의 역사이다. 브레트의 철학은 아리스토틀의 파망(破亡)한 곳이요, 칸트 철학은 헤겔이 취하지 않은 곳이다. 그와 같이 삼국시대의 문학이 건설됨은 태고 문학의 없어진 터전에 있었으니 이 의미로 보아서는 태고 문학이 후세에 가서 산만하여진 것은 자연의 세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遺傳)치 못한 것은 자연스런 사세로 볼 것이며 그다지 끔찍한 유감이라 할 것은 없다. 물론 역사의 체계를 대는 것에는 유존의 재료가 강령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이미 장성한 자가 자라던 내력을 말할 때에 소년시대에 내버린 소꿉질감을 못 찾아도 알 도리는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고문학의 발생한 원인만 알면 족할 것이며, 저절로 없어진 것을 구태여 한탄할 필요는 없다. 한번 돌려 생각하면 고문학이 없어진 터전에는 강한 활력이 솟아 있으니, 그 활력이 후일 신문학(新文學)의 건설을 부추기고 그 활력이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문학사의 연구력을 강하게 함이라 하겠다.
 
 
 

3. 3. 그 문장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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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인의 사상을 표창(表彰)하는 방법은 문자가 없이 직접 언어로 썼으니, 그러므로 고대 문자 없는 시대의 문장은 곧 언어인데 그 문장의 곡절을 알자면 언어의 본색을 찾아봄이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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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문학은 많이 산문 줄글과 운문 시가의 2종을 치는 것이니, 그 2종으로 분간을 지어 온 것은 원래부터 언어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① 개념의 연쇄를 나타냄에는 어맥(語脈) 및 조사법(措辭法)으로 하며, 사상의 표시법은 여기서 생기니 이것이 곧 산문의 근본이다. ② 산문적 근본은 인위적 조작이라 할 것이나 언어는 오직 논리적 배열 및 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자연적 천생으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자기의 말하는 사물에 적응케 하여 그와 비슷한 심상(心像)을 주고 그 서술을 생기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옳다’하는 말은 ‘可’[가]의 뜻이나 소리의 가락을 변함에 따라 부정·분노 등 여러 가지 의사를 표하게도 되니, 이는 음악의 체재가 갖추어진 기본적 음정으로 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구어(口語) 중에는 소위 묘사음악 되는 요소가 가득하매 시가는 그로부터 된 것이다. 우리들이 이 원리를 인정하면 후일의 수사학·문장술은 언어의 이 두 가지 표현적 요소의 발전이 문자로 옮겨놓은 것이라 함을 깨달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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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어의 최초 발생된 어원으로 보면 사성(寫聲)과 상징의 이원(二源)으로 몰아댐이 언어학상의 통례이다. 그러나 조선어의 시근(始根)을 살펴보면 사성보다 상징적으로 풀린 것이 흔한 모양이다. 가령 형용사의 비교급을 말함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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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요것 그것……고것 금다……감다 더럽다……다랍다 빙긋……뱅긋 등으로서 근모음의 변작으로써 비교의 관념을 상징한 것이다. 이는 어복(語腹)에서 보이는 예이거니와 다시 어미의 제작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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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다(劃[획])……거리다(畫[화]) 낮다(低[저])……나리다(降[강]) 닿다(接[접])……다리다(引[인]) 물(陸[육])……물(水[수]) 벗다(脫[탈])……벌리다(開[개]) 숱하다(多[다])……술술(連動[연동]) 흩(散[산])……흐르(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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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관념의 말은 밀폐음으로 동적 관념의 말은 유동음으로써 대상의 특징을 의작(擬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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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작법의 동기는 최초 혼돈적 인상의 감각법으로 나온 것이다. 그 상징적 감각의 작용이 다시 사상 활동으로 예술적 작용의 어법을 지음에는 두 가지 성질로 되었다. ① 복성적(複性的) 결합 사고로 풀려서 복음어(複音語)를 이루다. 곧 한어(漢語)와 같이 단음 단어(單音單語)로 된 것이 아니요, 조선어는 어의가 변할수록 어형이 변하니 중음(衆音)을 엮어대어 타어를 지은바 1어가 그 어미를 변화하여 타종 어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컨대 ‘크’ 는 ‘大[대]’ 의 말인데 부사로 될 때는 ‘크게’ 명사로 될 때는 ‘큼’ ‘크기’로 되는 것이다. ② 분시적(分示的) 조직이다. 각종의 토(吐)를 써서 어의(語意)의 관계를 보이니, 곧 서양어처럼 어근·어미를 융합하여 내부 변화로써 총시(總示)함이 아니요, 조선어는 사고 재료를 유추 분시(分示)하여 개념의 방식을 동종 어법에 통용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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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합적 일원적인 상징주의가 문장법을 지음에는 연역적으로 풀렸다. 곧 순서적으로 어사(語詞) 배열을 직행하니 서양어 및 한어처럼 어순을 전치(轉置)함이 아니다. 조선어는 문소(文素) 접속의 관계를 순치(順置)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적 관념의 말은 앞머리에 두는 것이 곧 본래의 수사법이다. 만일 지속적 관념의 말이 중간에 있을 때는 그에 관계되는 토를 변하여서 그 뜻의 특징을 내세우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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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갔다’ 를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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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주오’ 를 ‘나를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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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타다’ 를 ‘말을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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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싶다’ 를 ‘밥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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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본능적인 작용으로 나온 수사법은 반복법을 쓴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가 관념을 전하고자 하는 사물의 성질에 응하여 어조(語調)를 합함에는 의지를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으매 그로부터 동음 또는 동어를 첩용하여 그 문구를 수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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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다   감감하다   눅눅하다다   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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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밍하다   비비다   쓸쓸하다   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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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가   물 주오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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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럼으로써 태고 문장은 결합적 유추적으로부터 더욱 연역법·반복법 등을 위주하여 그로써 수식을 가한 줄로 상상하는 바이다. 그의 문장법은 오늘날 우리들의 구비(口碑)에 상존(尙存)하니 우리들의 언어는 실상 조선(祖先)의 유일한 기념물이라 할 것이다. 설혹 오늘날의 말이 고어보다는 다소 변함이 있을지라도 문법의 시근(始根)은 반이라도 남아 있어서 족히 태고의 문식(文式)을 짐작할 수 있으니, 비유컨대 우리들이 옛 전지(戰地)를 둘러보면 천추왕적(千秋往跡)이 씻은 듯 없으나 사초 춘경(沙草春耕)에 쟁기가 거칠때는 잔도 절극(殘刀折戟)이 그중에 묻어나고 황성야반(荒城夜半)에 뇌우(雷雨)가 훤동(喧動)하면 당년의 만노성(萬弩聲)이 그것인가 싶으리라. 그와 같이 또한 현대어의 원형(原形)에서 고문(古文)의 전형을 채방(採訪)할 수 있으며 그윽한 심정도 여기서 하염없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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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 제176호, 1932. 6>
【원문】조선문학(朝鮮文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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