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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용고(處容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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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2
안확(安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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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處容考[처용고]
 
 

1. 1. 서

 
3
근래 역사 고찰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 태도는 자못 빛나고 있다. 그 강설(講說)이 많은 동시에 한 사건에 있어서도 견해가 각기 달라서 취송(聚訟)이 왜자한 것이다. 처용(處容)이란 제목에 있어서도 소론이 많이 나와 여론이 서로 다른바 글로 다툼이 분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쟁론을 살피건대, 그 서로 가지고 있는 말끝은 작은 부분의 지엽(枝葉)을 지근대어 아는 것이 적음에 빠지고 혹은 어조의 강약을 서로 나무라고 그릇되게 중심과 대체를 잃음에 이르렀다.
 
4
나는 이에 대하여 누누이 신문 및 잡지 등에 표시한 바가 있으나 전자에 말한 바는 다 연구의 강목(綱目)만을 깨우쳐 오히려 몽롱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에 있어 처용고(處容考)의 근본을 밝히기 위하여 이미 거슬러 올라가 전모를 드러내어 사계(斯界)의 참고를 청하고자 할새 ① 명칭과 유래, ② 그 무악(舞樂), ③ 나(儺)와의 관련 등으로써 조목을 따라 말할까 하는 바이다.
 
 

2. 2. 명칭과 유래

 
6
처용에 관한 글발은『삼국유사』권2 처용랑조(處容郞條)에서 시초가 되고 다른 데서는 그런 문적(文籍)을 조사해내기 어려우니, 이는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기 전 50년경 곧 헌강왕 때에 발생한 전설이다. 이 설화의 내용을 원문에 의하여 간략히 말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7
왕이 개운포에 출유(出遊)하다가 그 환궁할 때를 당하여 운무가 깜깜히 어두워져 도로를 잃었으므로, 일관이 아뢰되, 이는 용의 조화니 불사를 건설하라 하는지라 왕이 즉시 불사 건설의 명을 내린대 운무가 걷히고 밝은 하늘이 되고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임금 수레 앞에 나타나 노래와 춤을 바쳤다. 그 한 아들이 임금 수레를 따라서 서울에 들어오니 이름은 처용이다. 왕이 미녀로 처를 삼게 하고 또 벼슬도 시켰다. 그 처가 매우 아름다우매 역신이 흠모하여 간통하였다. 처용이 귀가하여 그 광경을 보고 아무 저항 없이 창가 작무(作舞)로 물러간 것이다. 역신이 그 무저항함을 보고 감격하여 이에 자복(自服)할새 공의 형상만 볼지라도 그 문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이고 벽사 진경(辟邪進慶)의 부적을 삼은 것이라 하였다.
 
8
이 전설이 고려에 와서는 무악(舞樂)으로 연성(演成)되어 악단에서 풍성히 유행되던 모양이다. 당시 문사들의 이에 대해 영시(詠詩)한 바를 보건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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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포 시(稼亭集[가정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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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좋은 땅에서 은밀히 신선 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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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걷히니 세상 길이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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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신라 때 두 신선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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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그림 속에서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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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춤을 추니 소매자락 희끗희끗
15
비녀와 꽃이 화려하게 붉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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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친 자취 찾으려 하나 아득하기만
17
궁리하기 어려워 가만히 불러대니 돛바람만.
 
18
地勝仙遊密[지승선유밀], 雲開世路通[운개세로통].
19
依俙羅代兩仙翁[의희라대량선옹], 曾見畫圖中[증견화도중].
20
舞月婆娑白[무월파사백], 簮花爛熳紅[잠화란만홍].
21
欲尋遺迹杳[욕심유적묘], 難窮須喚半帆風[난궁수환반범풍].
 
22
악부(樂府) (益齋集[익재집])
 
23
신라 옛적 처용 할아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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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는 푸른 바다 가운데서 왔다고 하지.
25
흰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26
위로 올라간 어깨 붉은 소매로 봄바람에 춤춘다.
 
27
新羅昔日處容翁[신라석일처용옹], 見說來從碧海中[견설래종벽해중].
28
貝齒赬脣歌夜月[패치정순가야월], 鳶肩紫袖舞春風[연견자수무춘풍].
 
29
처용가(陶隱集[도은집])
 
30
밤은 늦는데 신라의 곡조 부르니
31
술잔 멈추고 함께 듣는다.
32
노랫소리 옛곡조 전하니
33
기상은 그때 당시를 생각케 한다.
34
달은 지고 별은 새벽머리 가까운데
35
슬픈 바람 나무 끝을 울린다.
36
끝없는 회포 부끄럽고
37
공은 더하는데 또한 어찌하리요.
 
38
夜久新羅曲[야구신라곡], 停盃共聽之[정배공청지].
39
聲音傅舊譜[성음부구보], 氣像想當時[기상상당시].
40
落月星頭近[락월성두근], 悲風樹杪嘶[비풍수초시].
41
無端懷拘惡[무단회구악], 功益亦何爲[공익역하위].
 
 
42
고려시대에 있어 그의 가무가 성행하던 바를 알 수 있을 것이요, 이조시대에 와서는 12월 그믐날에 당하면 이것을 궁중의 귀신을 쫓는 의식으로 행하여 연중 행사의 항례로 삼았으며, 또 큰 연회를 당해서도 유수한 무극(舞劇)으로 흥행한 일이 있다.
 
43
처용무악은 그렇듯 천여년을 지나오면서 월등한 세력을 짝하여 전래한 예술적 유산물이다. 그러므로 그 가치도 상당하며 그 내용의 실마리도 대단한 것이니, 우리들의 이에 대한 연구는 실로 취미 깊은 것으로 알 것이다. 우선 처용이란 명칭부터 해석하건대, 이의 단서는『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있는 처용가의 1절을 두고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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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성대 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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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태평 나후덕(天下太平羅侯德) 처용(處容)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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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구에 있어 ‘나후덕’ 이란 것은 처용의 한정적 수식어 됨이 알려지니, 곧 나후덕은 처용과 동일 어의로 볼 것이다. 그러면 처용의 어의를 알자면 이 ‘나후’ 의 출처를 살필 필요가 있다. 나후란 것은 옛기록에 따르면 별(星)이 됨이 분명하니,『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상원조(上元條)에“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이 된 자는 짚풀로 인형(人形)을 만드는데 그것을 우리말로 ‘처용’ 라 일컫는다.” 와 같이, 나후직성에 해당하는 자는 처용을 만들어 액운을 예방한다 한즉 이는 오늘날 경성 민속에 정월 15일 밤에 남녀 나이 9세 또는 나후직성이 된 자는 풀인형을 만들어 축액(逐厄)의 도구를 삼아 명칭을 ‘제웅’ 이라 하는 습속을 말함이다. 이로써 보아도 나후와 처용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것이다. 동시에 나후는 곧 직성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직성이란 명사를 연구할진대 불서(佛書)『숙요경(宿曜經)』상권에 “대저 해·달·직성이 인간 운명의 조짐을 지키는 별을 가까이 침범하여 없애면 이 사람은 액운을 만나는 때이다. 이때 마땅히 공덕을 닦아야 하는데 진언을 가지고 도량에서 염송(念誦)함으로써 액회를 물리친다.” “무릇 칠요성은 해·달·5성(五星)이다. 그 정(精)이 위로 하늘에 빛나고 그 신(神)이 아래로 사람에게 이르니, 선악을 맡음으로써 길흉을 다스리는 것을 주관한다”라고 한 설명에 의하면, 직성은 곧 숙명적으로 인간에 붙여진 성신(星神)을 말함이다. 그런즉 나후는 곧 상서롭지 못한 사람에게 내리비치는 별인데 그 별의 본명은 범어(梵語)에 Rahu라 하는 것인바 그 별의 성질은『대일경소(大日經疏)』에“나후란 일식신(日蝕神)과 월식신(月蝕神)이 서로 모이는 것이다.(羅侯是交會蝕神[라후시교회식신])”,『율사경(聿斯經)』에“나후가 모을 계책을 세우면 이 나후직성이 자리를 숨기어 나타나지 않고, 해와 달이 만나면 일식·월식이 되는데 이것을 식신이라고 한다.(羅侯計都[라후계도] 此星在隱位不見[차성재은위불견] 逢日月卽蝕[봉일월즉식] 號曰蝕神[호왈식신])”,『희린음의(希麟音義)』6에“나후는 혹은 나호(攞護)라고도 하고 이것은 어둡게 나호가 막는 것을 일컫는데, 능히 해와 달의 빛을 막으니 곧 어둠과 빛남이다.(羅侯或攞護[라후혹라호] 此云暗攞護障[차운암라호장] 能障日月之光[능장일월지광] 卽暗曜也[즉암요야])” 등의 고증에 의하여 일식신(日蝕神)의 별로서 액회가 있는 사람에게 내비치는 것이다. 이 일식신의 별이란 성질을 보아서는 처용설화의 시작되는 근본의 짐작이 차차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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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이 개운포에서 환궁할 때에 운무가 끼어 어두워져 도로를 잃게 되었던 일은 당시에 나후성이 나타났던바 곧 일식이 되었던 것으로 추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고대의 지식 미개시에 있어 천체의 이상(異狀)인 백홍관일(白虹貫日)이라 태백주현(太白晝現)이라 하던 일이 있으면 그것을 문득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 여기던 것은 역사에 누누이 보이는 바이다. 당시 일식의 현상이 있음에 대해서도 그를 어떤 미신적으로 관찰하였던바 불도(佛道)가 왕성한 지경의 인연으로는 그를 불설(佛說)로 부회(附會)하여 용의소행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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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처용은 용을 위하여 불사(佛寺)를 건설한바 그 은덕을 사례키 위하여 나타난 용의 1인으로서 특히 경사(京師)에 좇아와 세간에 살고 있는 용의 명칭인즉 처용은 곧 처세(處世)한 용으로 알 것인바 ‘용(容)’ 자를 ‘용(龍)’자의 동음이자로 볼 수 있다. 또한『성학정전(星學正傳)』에 처서(處暑)의 ‘처(處)’ 자를 “세상에 은둔하여 숨어 있는 뜻이다.(隱世藏伏之意[은세장복지의])”라고 하였으니,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처용(處容)’은 용자은닉(容姿隱匿)한 의미도 되는바 곧 은위불견(隱位不見)이라 한 나후성신(羅侯星神)을 형용하여서 작명(作名)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초우인(草偶人)을‘제웅’이라 한다 함에 의하면 처용은 초용(草涌)의 동음이자인 듯도 하다. 또한 설화가 부처를 위하여 된 것 같으니, 중(僧) 곧‘중(衆)’이란 어음을 장음으로 하여 처용이라 한 것도 같으니, 고대에는 1음을 연장하여 2음으로 칭함은 이두(吏讀)의 상투(常套)인바『세종실록』11년 6월 유관(柳寬)의 상서조에 궐산(闕山)을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九月山)이라 하였다 한 것처럼‘중(衆)’자음도‘처용’으로 느리게 부름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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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각기 조목별로 연구한바‘처용’은 곧 처룡(處龍)·은룡(隱龍)·초용(草俑)·중(衆) 등의 해석은 모두 추상적이다. 물론 고대의 불분명한 기록의 사단(事端)은 추상적으로 판단할 것이나 그러나 이의 추상적 견해로 할진대 위에 열거한 것보다 좀더 핍근(逼近)한 바가 있으면 그를 취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다른 방면으로 찾아보면『세종실록』25년 정월에 관습도감(慣習都鑑)에 전지(傳旨)한 문구가 있는데,“이제 이후로 처용무(處用舞)는 여기(女妓)를 제외하고 남부(男夫)를 쓰라.(今後處用舞[금후처용무] 除女妓[제여기] 用男夫[용남부])” 여기에는‘용(容)’자를‘용(用)’자라로 기재하고 있다. 이는 사관(史官)의 오서(誤書)인지 알 수 없으나 오서든지 정서(正書)든지 이미 의미 불분명한 군도목(軍都目)으로 써온 흔적은 아무라도 알 것인바 그 의미 있는 유래어의 성질을 보유치 아니한 것은 자연히 고유어를 이두식으로 썼다 하는 것으로 귀정(歸正)할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최후에 이르러서 단언하면, 처용(處容) 2자는 의미를 붙여 곡색(曲塞)하게 풀어볼 것이 아니라 그 어원은 고유어를 이두식으로 기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는 것이니, 곧 고어(古語)에 인형(人形)을 ‘처용’ 이라 한바 용신(龍神)으로 현형(現形)된 자는 허수아비와 같음으로써 인형이란 말로써 이름부른 것이라 하는 바이다.
 
 

3. 3. 그 樂舞[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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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설화가 이미 일종의 무악(舞樂)으로 변화하여 1천년 동안이나 유행되어 온 이상 우리들이 그 내용을 연구함에 있어서 한번 그 예술화한 무악 방면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처용무의 형식 절차는『악학궤범』에 자세히 실려 있는바 그 실상을 조사하면 그 형식은 거의 극적으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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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필요한 배우는 의장동(儀仗童) 10명, 처용(假面[가면]) 5명, 협무(挾舞) 4명, 기생(妓生) 16명, 악공(樂工) 37명, 악사(樂師) 2명 등으로 구성하니, 악사는 지휘, 기생은 창가, 악공은 주악(奏樂), 처용은 무용, 협무는 보조, 의장동은 무대 장식 등으로 된바 그 의식 및 진행은 대체로 당악의 형식으로 되어 그 진행 순서는 악사가 제금을 치며 배우 전대(全隊)를 도솔(導率)하고 등장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로 흥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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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주악 : 처용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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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조래 : 처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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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춤 : 무릅디피춤·도돔춤·발바디춤·인무(人舞)·오방무(五方舞)·작대무(作隊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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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노래 : 봉황음(鳳凰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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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춤 : 대무(對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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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노래 : 진작(眞勺)·봉황음·북전(北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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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회행(回行) : 영산회상가(靈山會相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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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사가 제금을 치며 전장(全場)의 서막을 열어놓으매 일반 배우는 그 가락에 따라서 진행하니, 초두로 말할 것은 이 제금을 사용하는 일이다. 제금은 본시 서역의 악기다. 거기 맞춰 무용하는 절률(節律)은 진양(陳暘) 『악서(樂書)』동판조(銅鈑條)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그 소리는 대체로 처음에는 천천히 느리다가 돌려서 빠르고 급해진다. 대개 그 음악은 원래 서역에서 나왔으므로 그 풍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소리의 느낌이 사치스럽고 음탕하고 급하고 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동은 날래고 가벼운데 혹은 뛰어오르기도 하고 문득 움직이기도 쉬기도 하고 다리를 들어올리고 손가락을 튀기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부릅뜨며 감정을 그 가운데서 드러내면서 스스로 능히 억제하지 못한다.”
 
61
이 율동은 매우 활발하고 표정도 적이 교묘하다. 본래 조선 고악(古樂)은 아악(雅樂)·당악(唐樂)·향악(鄕樂)의 3종으로 구별한 것인데,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은 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처용무의 3곡이다. 육화대는 가극으로서 시가적으로 된 것이고, 곡파는 대곡(大曲)으로서 악절을 구비한 것이요, 처용무는 그 내용 및 형식이 극적으로 된 것인데, 여기는 특히 제금을 사용하며 조선색을 띠고 있는 것인바 조선 고유악으로는 처용무 1곡이라 할 수 있는 음률로 된 것이다.
 
62
(2) 악곡의 선율은 임종치조(林鐘徴調)로 된 것이니, 곧 양악의 경우로 말하면 F조라 할 것이다. 그 전편은 3악절에 14박절 모두 80박(拍)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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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강(前腔) 6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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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附葉) 1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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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음(餘音) 1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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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중엽(中葉) 2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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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엽(附葉) 1박절
68
여음(餘音) 반박절
69
③ 소엽(小葉) 1박절 반
70
여음(餘音) 1박절
 
71
3악절은 3기(機)로 되어 그 보조(步調)가 점차 급속해진다. 제1절은 박자가 천천히 느리니 만기(慢機)라 하고, 제2절은 박자가 조금 빠르니 중기(中機)라 하고, 제3절은 박자가 급하고 빠르니 삭기(數機)라 한다. 이 박자의 진행이 만·중·삭 3기로 된 것은 그 출처가 서역의 가락으로 된 것이니, 백낙천(白樂天)『향산집(香山集)』에 있는 양주곡(凉州曲) 설명에 보면 “관악기 소리는 급하고 현악기 소리는 번거롭고 박자는 점점 골라진다.(管急絃繁拍漸稠[관급현번박점조])”라고 하고 송나라 심괄(沈括)의『벽계만지(碧溪漫志)』에 서역 악조를 말하되“대체로 곡이 바야흐로 끝나려 할 때는 모두 소리와 박자가 빠르고 급하다.(凡曲將終[범곡장종] 皆聲拍促急速[개성박촉급속])”라고 함에 의하면 그 관계를 알 수 있으니, 곧 처용설화가 불설로 된 동시 그 악률도 역시 서역곡으로 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고대 모든 박절 곧 장구 타법은 복잡한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처용곡의 박절은 가장 간단하게 구성되니 이것이 또한 주의할 것이다.
 
72
(3) 노래는 2종이 있다. 하나는 앞에 보인 바 원문에 있는 것이니, 처용이 지은바 그 처와 역신이 같이 잠을 보고 그 감정을 서술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 때 사람의 작으로서 처용의 형모(形貌)를 엮어낸 가운데 원작을 첨가하며 열병신에 대한 발원(發願)을 서술한 것이니, 이는『악학궤범』에 있다.(생략)「봉황음」「진작」「북전」등을 노래부름이 있으나 이는 세종 때에 첨가한 것이다.
 
73
그 밖에 영산회상을 노래부름이 있으니, 이는 세조의 작으로서 그 노래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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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회상의 부처와 보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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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토록 살라는 노래를 대신한다.
76
동해 바다 신인이 붉은 안개를 타고
77
무리를 나누어 비단 발 앞에서 춤춘다.
78
꽃으로 장식한 머리를 거듭거듭 느릿느릿 빙빙 돌리며
79
다같이 임금께서 만년 동안 사시라고 축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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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山會相佛菩蕯[령산회상불보륭], 代壽萬歳歌[대수만세가].
81
碧海神人乘紫烟[벽해신인승자연], 分曹呈舞繡簾前[분조정무수렴전].
82
插花頭重廻旋緩[삽화두중회선완], 共獻君王壽萬年[공헌군왕수만년].
 
83
그 내용은 처용의 설화 및 그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84
근일 이른바 정악(正樂)이라 하여 보통 풍류하는 것도 역시 영산회상이라 하나 이는 당의 인자곡(引子曲)·처용곡·여민락·행진곡·무도곡 등의 일부 선율을 발취하여 조합곡으로 된바 유래가 미상한 것이요, 세조의 원작은 아니다.
 
85
(4) 춤에는 탈 곧 가면을 쓰는데, 이 가면의 계통을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악학궤범』에 있는 도본 및 그 설명을 보면 근대화한 것이 의심 없으나 특히 귓가에 고리를 붙인 것이 있으니, 이는 고대식의 남은 풍속으로서 서역이나 중국의 풍속을 의작(擬作)한 것인 듯하다. 그 가면을 사용한 의사는 그 설화가 신화로 된 것처럼 초인간적인 위력을 떨치는 종교적 의미가 있어 신과 악마의 실재를 인간에게 교시함이라 할 것이다.
 
86
그런데 이 무용은 궁중에서만 쓴 것이 아니라 고려 때부터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는 잡극(雜劇)에도 흥행한 일이 있으니,『목은집』에 있는 산대잡극(山臺雜劇)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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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대도감 엮으니 봉래무 비슷하고
88
신선의 과일 바치려고 바다로부터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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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징소리 섞여 땅을 움직 울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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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의 옷소매 바람을 쫓아 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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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臺結綴似蓬萊[산대결철사봉래], 獻果仙人海上來[헌과선인해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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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類鼓鉦轟地動[잡류고정굉지동], 處容衫袖逐風廻[처용삼수축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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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아도 짐작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경성 지방에서 민속 잡희로 산대도감을 꾸미는 일이 있으니, 우리들은 그를 시찰하여 그 율동의 성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4. 儺[나]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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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기술해 온 내용으로 어지간히 그 유래를 알 만하다. 곧 불교의 유산물로 보인다. 그러나 설화의 내용 맥락과 무악(舞樂)의 형식은 다 불교와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라도 의문점이 없지 아니하니, 신과 역신의 관계, 또는 무용에 있어 내용과 형식을 맞춰 보면 2인의 무극이라야 될 것인데, 위에 보인 대로 그 무용은 5방(方)에 맞추어 5인의 처용이 출연하는 것은 설화와 서로 어긋날뿐더러 불설과도 조금 떠난 색채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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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문점을 가지고 한번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건대, 고래로 동양에 있어 축귀적(逐鬼的) 방법과 음악적 투습(套習)을 겸행한 것은 부처보다 먼저 이른바 샤만적인 일이 있다. 이 풍습에 기대서 보건대『삼국사기』악지(樂志)에 신라에 오기(五伎)가 있던바 최치원(崔致遠)이 그를 한시로 읊은 것이 있으니, 그 가운데 대면(大面)이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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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얼굴빛 그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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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채찍 손에 잡고 귀신을 쫓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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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다가 천천히 걸어 아담하게 춤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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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히 단봉이 요순 세상 춤을 추도다.
 
101
黄金面色是其人[황금면색시기인], 手抱珠鞭役鬼神[수포주편역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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疾步緩趨呈雅舞[질보완추정아무], 宛如丹鳳舞堯天[완여단봉무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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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것이다. 여기 황금 얼굴빛이란 것은 가면 됨이 분명하고 손에 구슬 채찍을 쥐고 귀신을 쫓는다 함은 악귀를 물리치는 것인 듯한바 이것이 처용무와의 연상이 일어난다. 다시 당의 단안절(段安節)의『악부잡록(樂府雜錄)』에 보이는 나희(儺戱)의 내용을 볼진대 손으로 구슬 채찍을 쥐고 귀신을 물리치는 의미와 바로 같다. 당의 나희는 채찍으로써 악신을 축출하는 형용이나 이 나희의 근본을 고찰 조사하면, 중국 고대의 역신을 구축하던 방법은 처용무와 동일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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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중국 고대의 인간은 지력(智力)과 실감이 혼돈하여 명확한 형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기괴한 악마적인 위협을 받아 전율한 정신의 표현이 많으니, 그럼으로써 고인의 사상은 관념의 상징주의를 가졌다. 그 사상으로 나온 전설은 악신을 구축한다는 설화가 많으니, 사람의 전염병 같은 것은 악신의 행위라 하여 선신(善神)의 격퇴를 구함으로써 일종의 치료법을 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나(儺)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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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례라는 것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래하는 것인바 공자(孔子)도 향인(鄕人)이 ‘나’ 를 행할 때는 조복을 입고 계단 위에 나와 서서 그 조상신의 경동(驚動)함을 보호한다 한 일이 있다. 그 ‘나’ 의 조직은 한(漢)나라 때 와서 완성한 것 같으니, 그 방법은『후한서』권15 선납조(先臘條)에 자세히 설명했으니, “납월 초하루에 먼저 대나(大儺)를 행하는데 그것을 일컬어 축역(逐疫)이라 한다.(先臘一日大儺[선납일일대나] 謂之逐疫云云[위지축역운운])" 하고 모든 방식을 설명한 것이 그것이다.
 
106
그 의식을 간략히 말하건대, 120인의 아동에게 소고(小鼓)를 들리고 방상씨(方相氏) 1인은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쓰고 검은 옷 붉은 치마에 창과 방패를 들며 12짐승을 지어서 그 1대(隊)를 조직한다. 1대가 납일에 당하여 궐내에 일제히 모일새 방상씨는 병기로써 역신을 구축하여 120인 아동은 강신(强神)이 12악귀를 쫓는 글을 주창(呪唱)하면서 북을 두드리고 소리지르다가 문밖 물 가운데로 가서 역신을 던져 죽이는 모양을 보이고, 종막(終幕)에는 도경(桃梗)과 울뢰(鬱儡)와 위애(葦艾)를 베푸는 것이다. 울뢰라 하는 것은 신인으로서 흉귀를 축출한다 하여 황제(黃帝) 때부터 그 상(像)을 문 위에 붙였던바 이것을 나례 끝에 겸행하는 것이다.
 
107
고려시대에도 겨울철에 당하여 나례를 상례로 행하고 혹 연회의 여흥으로써 음악과 겸행하여 일대 무극을 개설한 일이 있었다. 그 의식은 한법(漢法)과 같으니,『고려사』권64를 참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의 ‘나’ 가당에 성행하다가 그것이 신라에 유행함이 된 것인 듯하다. 이 나례는 고대에 있어서 각처에 유행된 것이니, 일본 고대에도 이 법을 이용하여 궁내 또는 민간에서 크게 연중 행사로 해온 것이다.
 
108
이‘나’와 처용무를 서로 비교하면, 가면을 쓰고 열병신을 축출하는 것이든지 신상(神像)을 문 위에 붙이고 벽사진경(僻邪進慶)의 부적을 삼는 것이든지 조금도 서로 틀림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처용무의 시초 근원은 불교와의 관계라 함보다‘나’의 성질로 된 것이라 하면 될 것이다. 더욱『목은집』에 있는「구나행(驅儺行)」시를 보면 그 동일한 관념의 확실성이 나타난다.
 
109
천지의 움직임 어찌 그리 은미한지
110
선악과 삼라만상이 어지럽구나.
111
혹은 상서롭고 때로는 재앙도 되니
112
뒤섞는다고 어찌 인심이 편안해지랴.
113
사악한 귀신 쫓는 데는 예부터 방법이 있고
114
열두 귀신은 언제나 드러나 있다.
115
나라에선 병장방(屛障房) 크게 설치해 두고
116
해마다 구나(驅儺) 행사 주관해 궁중을 맑게 한다.
117
내시 아이들의 소리 서로 이어졌고
118
상서롭지 못한 일 쓸어버림이 번개처럼 재빠르고
119
사평부(司平府)의 군사들 번돌며 경계하고
120
늘어선 군사 숲을 이루니 모두들 용사
121
충의를 분발하여 병장방을 대신하여
122
이상스레 벌려서자 모든 악공 종종걸음쳐 들어온다.
 
123
오방귀와 사자무를 춤추고
124
불길을 토해내고 칼날을 물고 있다.
125
서역에서 들어온 저 오랑캐들
126
검고 누른 놈에 푸른 눈 반짝인다.
127
가운데 섞인 저 노인 등이 구부정하고 긴데
128
모두가 함께 남극노인성임을 알고 놀란다.
129
강남의 장사꾼 서역 노래 부르며
130
바람에 날리는 반딧불같이 재빠르고 가볍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131
저 신라 처용 칠보 두르고
132
머리에 얹은 꽃 향기 그윽하고
133
긴 소매 낮게 돌리며 태평무 추는데
134
술기 오른 듯 발그레한 뺨 아직도 그대로다.
135
황견(黃犬)은 방아 찧고 용은 구슬 다투며
136
온갖 짐승들 우쭐우쭐 요순 때와 같구나.
 
137
天地之動何冥冥[천지지동하명명], 有善有惡紛流形[유선유악분류형].
138
或爲禎祥或祆蘖[혹위정상혹천얼], 雜糅豈得人心寧[잡유기득인심녕].
139
辟除邪惡古有禮[벽제사악고유례], 十又二神恒赫靈[십우이신항혁령].
140
國家大置屛障房[국가대치병장방], 歲歲掌行淸内庭[세세장행청내정].
141
黃門侲子聲相連[황문진자성상련], 掃去不祥如迅霆[소거불상여신정].
142
司平有府備巡警[사평유부비순경], 列士成林皆五丁[열사성림개오정].
143
忠義所激代屛障[충의소격대병장], 畢陳怪詭趨群伶[필진괴궤추군령].
144
舞五方鬼踊白澤[무오방귀용백택], 吐出回祿吞靑萍[토출회록탄청평].
145
金天之精有古月[금천지정유고월], 或黑或黄目靑熒[혹흑혹황목청형].
146
其中老者傴而長[기중로자구이장], 衆共驚嗟南極星[중공경차남극성].
147
江南蕒客語侏離[강남고객어주리], 進退輕捷風中螢[진퇴경첩풍중형].
148
新羅處容帶七寶[신라처용대칠보], 花枝壓頭香露零[화지압두향로령].
149
低回長袖舞太平[저회장수무태평], 醉臉爛赤猶未醒[취검란적유미성].
150
黃犬踏碓龍爭珠[황견답대룡쟁주], 蹌蹌百獸如堯庭[창창백수여요정].
 
151
이 시는 가공적 문예품이 아니라 이색(李穡)이 ‘나’ 의 흥행을 목도하고 그 광경을 직사(直寫)하여 사관(史官)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내용은 사실에 비추어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고려 때에 벌써부터‘나’와 처용무를 겸행한바 양자의 분간을 할 수 없이 구성된 것이다. 이로써 볼진대‘나’가 곧 처용인 동시에 그의 연원을 추측하기 용이하다 하는 바이다.
 
 

5. 5. 了定[요정]

 
153
이상 논한 바를 모두 얽어 요정(了定)을 지어 말하면, 전설·나·불교의 3자를 종합하여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초에 말한 바와 같이 이 설화가 『삼국유사』에서 나온 것인데『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요 야사(野史)다. 황희(黃喜)가 세종에게 말한 것처럼, 야사는 유언(流言)을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인데『삼국유사』는 곧 그런 종류로서 사실이 아닌 부어(浮語)가 많으니, 그러므로 우리들은『삼국유사』의 설을 일반으로 의심하는 동시 처용설화도 후일 곧 고려 때의 산물인 줄 알기 쉽다. 그러나『삼국사기』 헌강왕 5년(879)조에 보면“3월에 나라 동쪽 주군(州君)을 순행(巡幸)하니, 어느 곳에서 온지 모르는 사람 4명이 임금 수레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 용모가 이상스럽고 옷과 머리에 두른 두건이 괴이스러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고 말했다. (古記[고기]에는 헌강왕 즉위 원년〔875〕의 일이라고 일렀다. ─ 원주)”
 
154
이런 기사가 있는바 그 주에 고기(古記)에는 왕의 원년 때 일이라고까지 말하였으매, 그 사실은 확실히 고기로부터 사적(史籍)이 있는 것이다. 대저 ‘고기’ 라 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 듯한바『삼국사기』를 편집한 김부식(金富軾)은 어떤 고기를 인용했는지 모르되, 여기『삼국유사』의 말을 합하여 참작하면, 왕이 환궁할 때에 앞에 말한 대로 일식이 있었던바 당시 미신적 사상으로서 어떤 신칙을 행하였더니 일식이 마친 뒤에 이르러 어떤 축하하는 자가 있어 가무를 한 일이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추상(推想)키 용이한 일이다.
 
155
그 근저에 잡혀나온 설화는 당시 치성(熾盛)한 불교의 전설로 윤색하여 당의 유지(流志)가 번역한 『금강광염지풍다라니경(金剛光焰止風咜羅尼經)』에 풍우·뇌정 등에 당해서는 용의 행위라 하여 진언을 외우고 불사(佛寺)를 이룩하면 곧 그친다는 말을 부회한 것이 십분 확실한 것이라 하겠다.
 
156
그 다음에 용신인(龍神人) 곧 처용과 역신과의 관계는 불교 문학자가 일식 사건에 근거하여 거기 주관·객관 곧 감정과 사실을 붙여 상술한 대로의 나희를 부회하여 소설로 만든 것이라 할 것이다. 소설은 오직 사실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작자의 공상(空想)을 합하여 사실이 아니라도 그의 이상경(理想境)을 배설하는 것이 통례다. 더욱 승려는 만사를 연기(緣起)로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당시에 유행하는 유래 미상의 나희를 연기 있게 하기 위하여 그를 처용의 일에 부회한 것은 족히 승려 문학자의 행위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157
처용 곧 ‘제웅’ 인 초용인형(草俑人形)에 대해서도 고대 나희의 장식물을 그대로 취하여 쓴 것으로 볼 것이다.
 
158
태고인의 예술 사상은 결례적(結禮的) 수식법이 먼저 발달하였다. 곧 추상을 구상으로 화하여 공막 몽롱(空漠濛濃) 한 것을 사물의 형상으로 부여하기 잘할새 종교상 우상을 만드는 것이 모두 그런 심사의 발작이다. 그러므로 나희도 그 심사로 나온 바다. 그런데 그 우인(偶人)은 후세 사정에 따라 각종으로 쓴 것이 있으니,『사기(史記)』『풍속통(風俗通)』『산해경(山海經)』등에 보이는 것처럼 화상(畫像)이나 도목(桃木) 또는 흙으로써 인형·우형(牛形)을 만든 일이 있다. 또 혹은 풀로써 인형을 만든 일도 있다. 일본 서적에 취하건대 장중상(掌中上) 세시조(歲時條), 내리식(內裏式) 중 12월 대나조(大儺條), 의식(儀式) 10대나조, 연희식(延喜式) 공사근원(公事根源), 배나세시기(俳儺歲時記) 등에 있는 추나(追儺) 설명을 보고 왜훈간(倭訓栞) 전편 19나조(那條)에 “ ‘나오이(儺追[나추])’ 는 역귀를 쫓는다는 뜻이다. 미장국(尾張國) 국부(國府:首都[수도])의 신사 같은 데도 있었다. 원강국(遠江國) 담해(淡海)의 국옥신사(國玉神社)에도 옛날부터 있었는데 ‘나오이 마쯔리(축제 제사)’라 하였다 한다. 정월 열사흗날 밤에 나그네를 붙잡아 상병(上餠)을 지워 쫓았다. 띠풀로 작은 인형을 만들어 역귀를 치는데 이를 소형(小形)이라 한다. 대형(大形)인 것도 있는데 이것은 역귀에게 입힌다.” 라 하니, 일본 고대에도 나희에서 풀인형을 만들어 쓴 일이 분명한즉 조선의 ‘제웅’ 이란 것도 역시‘나’됨이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159
그런즉 조선의 처용을 ‘나’ 로 보는 동시에 중국의 ‘나’ 와 비교하면 조선의 ‘나’ 곧 처용무는 극히 발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중국의 ‘나’ 는 그 설화의 조직이 조성품(粗成品)으로 되니 곧 방상씨가 역신을 구축함에 있어서 하등의 갈등이 없이 악하기 때문이라 할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나’ 는 처용이 역신을 구축함은 미녀와의 정사(情事)로부터 갈등을 낳아서 완전한 소설적 가치를 이루니, 말하자면 처용무는 ‘나’ 의 완성품이라 할 것이다. 이는 삼국시대에 있어 중국 문물을 수입하여 자국 정신으로 변화시켜 쓰던 방법의 한 산물이라 하겠다.
 
 
160
<朝鮮[조선] 제172호, 1932. 2>
【원문】처용고(處容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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