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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춧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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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7.6~
김동인
1
주춧돌
 
2
한바탕 무리매를 친 뒤에, 이 무리매에 대해서도 아무 저항 없이 잠자코 맞고 있는 한 서방에게 더 칠 흥미는 없는지 젊은이들은 그곳에 쓰러져 있는 한 서방을 그대로 버려두고 모두들 우르르 나가버렸다.
 
3
나감에 임하여 한 젊은이가 여를 향하여,
 
4
“목사님도 가시지요? 저깟 늙은이는 죽으라고 버려두고…….”
 
5
하고 같이 가기를 권하였다.
 
6
“먼저들 가오. 나는 좀 뒤에…….”
 
7
하며 여는 젊은이들만 먼저 돌려보냈다.
 
8
이곳은 국제도시 상해. 오늘 우리 한교(韓僑) 한 서방에 대한 사문회(査問會)가 이 빈 빌딩 3층에서 열렸던 것이다.
 
9
한 서방은 그 근본은 알 수 없지만 이 상해의 중국인 시가의 한 추녀 끝을 빌어서 노동자 상대로 이발을 해먹는 늙은 한교였다.
 
10
그 한 서방이 같은 한교로서 이 상해를 근거로 대규모로 부정 약장사를 하는 사람을 일본 영사관 경찰에 밀고를 하여 그 부정 업자는 일경의 손에 붙들렸다. 이것이 한 서방이 사문받는 죄상이었다.
 
11
이곳을 관할하는 중국 경찰에 밀고한다 할지라도 우리 동포의 수치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것이니 못할 일이거늘, 하필 우리의 불구 대천의 원수 왜경찰에게 알려서 우리의 수치를 왜인에게 폭로하고 우리 동포를 왜인에게 처벌받게 하고 적잖은 가격의 부정 약품을 왜인에게 몰수당하게 했느냐 하는데 대하여 젊은이들의 노염이 폭발되어 한 서방을 법조계(法租界) 어떤 빈 빌딩으로 끌어다가 사문을 하고 응징 수단으로 무리매를 친 것이었다.
 
12
여는 한 서방과 아무런 인연이나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그 늙은 몸이 젊은이들의 억센 주먹과 발길에 맞고 차이고 한 것이 가긍하여 그 매 맞은 자리에 그냥 쓰러져 있는 그에게 한 걸음 발을 뗄 때에 쓰러져 있던 한 서방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리고 거기 그냥 있는 여를 보고 한 서방 특유의 웃음을 얼굴 전면에 나타냈다.
 
13
“허어, 목사…… 그래 목사가 더 좋군. 나 운명할 때 염불이 아니라 기도 올려주려 기다리시우?”
 
14
“한 노인, 어디 다친 데나 없으시우?”
 
15
“다친 데? 위아래 발바닥까지 모조리 맞았으니, 모두 다쳤지. 그러나 이 몸은(차차 노랫조가 되어가며) 하늘이 주신 쇠 몸뚱이. 내 몸뚱이 때리다가는 때린 주먹이 부서지지. 어어 목사, 나 때린 주먹 앓지 않도록 기도나 드려주우.”
 
16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여는, 여의 앞에서 허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춤추는 한 서방의 모양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17
부양하는 자손이나 친척도 없이 늙은 몸을 남의 나라에서 외국노동자를 상대로…… 아아, 기박하고 가긍한 신세가 아닌가.
 
18
“여보, 한 노인. 왜 하필 왜경에게 밀고하고 욕을 보오?”
 
19
한 서방은 춤을 멈추고 여를 향하여 돌아섰다.
 
20
“그럼, 어디다 고발하오? 중국 경찰은 벌써 많이 먹은 판이라 고발해야 쓸데없고…….”
 
21
“우리 사찰 기관.”
 
22
“아까 나를 친 젊은이들도 모두 (목소리를 낮추면서) 먹었어요, 먹었어요. 목사는 못 자셨소?”
 
23
“예끼!”
 
24
“허허! 못 자신 모양이군. 그러니 그런 악질 인생이 우리 한교에 있기 때문에 중국인 사이에는 한교 배척심이 날로 자라는구려. 그러나 모두 먹은 판이라 호소무처구려. 그러니까 우리 상전 대일본 경찰에 호소할밖에.”
 
25
이런 소리를 예사로이 하기 때문에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문초 받은 일도 여러 번 있었지만 밀정의 형적은 없기 때문에 그 문제는 늘 무사하였고, 주책없는 늙은이로 판이 박힌 한 서방이었다.
 
26
“여보 목사, 돈 있소? 한참 매를 맞았더니 허기가 나는군. 뭘 좀 먹여주구려.”
 
27
“시장한데 춤까지 추니 더하지.”
 
28
“아 참, 춤! 잊었다.”
 
29
그는 팔을 벌려 다시 덩실덩실.
 
30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한 가닥 노래가 울려 나왔다.
 
31
“내 몸은 기둥 아래 감추인 주춧돌. 주춧돌 없이는 집이 못돼요.”
 
32
늙은이답지 않은, 더욱이 시장한 이답지 않은, 웅장한 멜로디였다. 음악에 소양이 있는 어떤 교포가 한 서방의 우연한 노래를 한번 듣고 이는 범물이 아니라고 격찬한 일이 있는 그 웅장한 음성은 이 빈방을 더렁더렁 울렸다.
 
33
춤을 추느라고 이편으로 몸을 돌릴 때에 보니 춤추는 그의 늙은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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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한 노인. 점심 먹으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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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고마워, 아이구 허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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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허기가 심한 모양으로 춤을 멈추며 몸의 중심을 잡으려는 듯 비츨비츨하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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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한 서방을 부축해가지고 그 빌딩을 나왔다.
 
 
38
한 서방의 전신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39
그가 이 상해에 온 것은 국내의 삼일운동 직전이었다 한다. 따라서 현재 이곳에 있는 한교는 모두가 거의 이후의 사람이었다.
 
40
국내에 삼일사건이 일어나고 많은 망명객이 이 상해로 몰려들어 뒤끓을 동안 한 서방은 처음은 임시정부에 적을 두고 열심히 조국 광복 운동에 활동했다 한다.
 
41
그러나 일본의 무력 앞에는 열강도 감히 손을 못 대어 대한 광복운동도 유야무야로 되어가고, 이곳에 모였던 젊은 지사들도 맥이 풀려 조국 광복보다도 구복 문제가 앞서서 조국 광복은 부업쯤으로 돌릴 때쯤부터 한 서방의 생활도 차차 영락되었다. 여가 재호(在滬) 한교의 선교사로 상해에 온 것이 꼭 그때였다.
 
42
한 서방은 생활의 근거를 잃은 뒤에는 거의 동냥으로 살아갔다.
 
43
옷은 중국 노동자의 낡은 것을 한 벌 사가지고 춘하추동을 물론하고 단벌옷이었다.
 
44
상해의 한교들은 이 한 서방의 생활 모양이 한교의 체면과 위신을 잃게 하다고 구박하여 한 서방은 잠자코 법조계를 떠나서 중국인 거리로 잠입해버렸다.
 
45
한 서방은 좀하면 일본 영사관에까지 가서 생활비 보조를 구걸하기가 일쑤였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일본 스파이 혐의도 받은 바가 있었다.
 
46
상해의 한교들의 질이 차차 저하되어서 금제품 밀매, 싸움, 절도행위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갔다. 그런데 이런 문제 때문에 시비가 생기면 그것이 한 서방의 눈에 뜨이는 한 한 서방은 그리로 달려가서 그 시비의 틈에 끼여들어 마지막에는 자기가 시비를 대(代) 맡아 두들겨 맞고 혹은 경찰 신세까지도 지고 하였다.
 
47
이렇게 되매 마음보 곱지 못한 한교는 자기가 범한 범죄도 시세 불리하게 되면 애꿎은 한 서방에게 둘러씌워 한 서방은 남의 죄 때문에 경찰 신세를 진 일도 여러 번이었다.
 
48
한 서방은 잠자코 모든 불행한 일을 겪고는 덩실덩실 춤 한번 추고는 잊어 버리지만, 그런 범죄의 장본인은 도리어 한 서방은 여사여사한 일(장본인 자기가 행한 일)을 하여서 한교의 체면을 더럽힌다고 한 서방을 욕하였다.
 
49
합죽선을 펴들고 ‘이내 몸은 기둥 아래 감추인 주춧돌’을 부르며 춤 한가닥 추면 그에게는 온갖 오뇌나 슬픔이나 아픔이 다 사라지는 듯하였다.
 
50
‘미친 늙은이.’
 
51
‘주책없는 늙은이.’
 
52
‘시비 잘 걸고 도적질도 제법 하는 늙은이.’
 
53
‘한교의 체면과 명예를 더럽히는 늙은이.’
 
54
이것이 한 서방에 대한 재호 한교의 대명사였다.
 
55
그러나 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 서방은 재호 한교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도리어 다른 한교들이 행한 협잡이며 사기며 금제품 매매 등 비법 행위를 대 맡아 처벌받은 가련한 희생자였다.
 
 
56
그해 첫여름 우리의 안 박사가 상해에 왔다. 안 박사는 한국이 일본에게 먹힌 이래 30년, 꾸준히 우리 국권 회복 운동에 노력한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57
박사를 맞아 이곳 기구의 개편 개조 등의 분망한 며칠을 지낸 뒤에 여는 어떤 날 안 박사를 박사의 호텔로 찾았다.
 
58
박사께 인사를 여쭌 뒤에 문득 보니, 박사는 한 서방의 부채(춤출 때마다 펴서 펄럭이는)를 들고 딱딱 장난하고 있었다.
 
59
“박사 선생님(우리는 박사의 꾸준한 민족적 사업에 경의를 표하여 반드시 박사 선생님이라 불러 모셨다), 그 부채는 한 서방 한○○의 것이 아니오니까? 그게 어떻게…….”
 
60
“한 서방? 한○○?”
 
61
“네…….”
 
62
“아니오. 이건 내 친구 김○○ 형의 것인데, 김 형이 아마 왔다가 잊어버리고 갔군요.”
 
63
“김○○?”
 
64
“네, 김○○.”
 
65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언뜻 생각나지 않아서 기억 면에서 찾아내려고 애쓰는데 박사는 뜻을 알아본 듯 설명하였다.
 
66
“혹 잊으셨으리다. 한 30년 전 이태리 오페라!”
 
67
여는 박사의 말을 채 듣지 못하고 벌떡 교자에서 일어섰다.
 
68
기억한다. 지금부터 한 30년 전, 이태리 오페라좌에 한국인 김○○라는 천재 성악가요 천재 무용가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전 세계의 악단을 놀라게 하였다.
 
69
그때는 바야흐로 한국의 운명이 일본 때문에 먹혀들어가던 비상시절이었더니만치 우리 한국인의 심정을 크게 두드려놓았다.
 
70
그 천재는 이태리에서 출발의 길을 터서 파리, 런던을 도는 동안에 ‘천재’ 의 위에다 ‘위대한’ 이라는 관사가 더 붙어서 명성(明星)처럼 출발한 그가 태양처럼 빛나려는 무렵에 한국은 일본에게 먹혀버리고, 그러자 그 위대한 천재는 다시 세상 표면에 나타나본 적이 없었다.
 
71
이래 30년, 다시 이름 들은 일이 없으매 잊은 것도 또한 당연하였다.
 
72
“박사 선생님, 그 김○○ 씨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춘추는 어떻습니까?”
 
73
“나이는 나와 동갑, 키 크고, 눈 크고, 그…… 그림에서 본 미국 대통령…….”
 
74
“링컨.”
 
75
“그렇소, 그렇소.”
 
76
“아아, 박사 선생님, 그 김○○ 씨가 이 상해에선 한○○라는 이름으로 지내십니다. 한 서방으로 불립니다.”
 
77
“허어, 역시 한국을 잊지 못하는 뜻이겠지. 조, 부, 손, 3대를 녹(祿)자신 한국을…… 그 김○○ 형은 즉 이조 말의 명신 ○○공의 영손이요, 김○○ 공의 영윤이구려.”
 
78
“그럼 명가의 자제입니까? 아아, 박사 선생님. 그 위대한 천재, 빛나는 가문의 김○○ 씨가 이 상해 한교에서는 미친 늙은이 한 서방, 주책없는 늙은이 한 서방, 정신병자요 절도 상습법 한○○로 영락됐읍니다그려. 한 떨기 들의 백합…….”
 
79
“미친 늙은? 정신병자? 내가 만나본 지가 한 시간이 못 되는데, 미치긴 왜 미치고 정신병자란 무슨 말이오?”
 
80
“박사 선생님,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상해 한교뿐 아니라 중국인 사이에도 유명한 광인입니다.”
 
81
여는 박사께 대하여 김○○ 씨인 한 서방에 관한 여의 지식을 죄 말씀드렸다.
 
82
이야기하는 두 시간 남아 동안 박사는 한 마디의 말도 끼지 않고 눈 꾹 감고 듣고 있었다.
 
83
여가 이야기를 끝내면서 박사를 보니 꾹 감고 있는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눈썹 밖으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84
여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박사는 눈을 뜨며 곁에 놓였던 손가방을 쓸어 열고 거기서 한 개의 앨범을 꺼냈다.
 
85
박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는 구라파의 어느 극장의 무대인 듯한 곳에 서 있는 한 서방 김○○ 씨의 예복 입은 사진이 있었다.
 
86
“한 서방 즉 이이지요, 목사님?”
 
87
“그렇습니다. 김○○ 선생님이십니다.”
 
88
박사는 앨범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진을 좀더 잘 보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눈에서 샘솟듯 솟는 눈물을 여에게 감추기 위해서였다.
 
89
문득 박사는 더 참지 못하겠는지 앨범을 다시 펴놓으며 주먹을 들어 앨범을 내리쳤다.
 
90
“아, 한 서방아, 김○○아! 거룩하고도 황송하고 고마워라. 나는 유랑 30년에 한 개의 일도 치러놓은 것이 없는데, 자네는 이 상해 중국인 거리 한 귀퉁이에서 우리 한인의 명예를 완전히 보호했구나. 자네 보기가 부끄러울세.”
 
91
박사는 여를 돌아보았다.
 
92
“목사님, 한인은 도적질 잘하고 협잡질 잘하고, 싸움 잘하고 불법 행위를 잘한다는…… 우리 동포에게 돌아오는 부끄러운 불명예를 몸소 뒤집어쓰고
 
93
‘한 아무개’라는 한국인은 악질의 파락호라는 인식으로 돌려서 개인 명예를 희생해서 동족 명예를 보호한 김○○ 형의 기특한 마음을 목사님도 몰라보시고 한 광인으로 아셨구려, 민망하고 황송해라.”
 
94
너도 그리 눈이 무디냐는 박사의 질책이었다. 이 질책에 여는 잠자코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로써 복죄하고 사죄하였다.
 
95
“박사 선생님, 얼굴 들기 힘들도록 부끄럽습니다. 전 당장 김○○씨께 가서 사죄할까 합니다.”
 
96
“주춧돌, 주춧돌, 기둥 뒤에 감추인 주춧돌. 대리석이나 화강석의 화려하게 조각한 벽석이 안 되고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는 감추인 주춧돌로 자처하는 김○○ 형의 겸손하고 거룩한 심정을 보아 이미 아는 우리나, 알고도 그냥 모른 체하는 게 김○○ 형께 대한 대접일 게요. 망국인으로 자처해서 망국인이 두드러져 나타나면 무얼하랴는 그 심정, 30년 전 김○○는 이미 죽고, 망국 유민 한○○이가 감추인 주춧돌로 여생을 보내려는 거룩하고 거룩한 심정. 화려한 벽석은 다 떼버려도 집은 서 있지만, 숨은 주춧돌 하나 빼면 그 집은 기울어질 게요. 주춧돌 한 서방. 아아, 거룩하고 황송해라.”
 
97
여는 고요한 소리로 주춧돌 노래를 불러보았다.
 
98
“내 몸은 기둥 아래 감추인 주춧돌, 주춧돌 없이는 집이 못 서요.”
 
99
스스로 부르며 뜻을 생각하니 표면으로는 주책없는 늙은이라고 수모를 받으면서도 자기 혼자서만은 ‘숨은 주춧돌’로 자인하던 한 서방의 긍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며 새삼스럽게 고맙고 황송해지는 것이다.
 
100
박사가 물었다.
 
101
“그게 주춧돌 곡조요?”
 
102
“네, 한두 번 듣는 동안 저절로 기억하게 됐습니다.”
 
103
“나도 목사님 부르는 거 한 번 듣고 인젠 알겠소. 우리 한인이면 한 번 들으면 곧 기억할 수 있을, 우리의 심금의 곡조요…….”
 
104
“박사 선생님, 저는 그 김○○ 선생님의 고마우신 뜻을 그냥 숨은 주춧돌로 감춰두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나타난 주춧돌로 우리 한교들이 감사의 사례 한 번이라도 아니하고야 한교는 인사 모르는 인종이란 욕을 한 가지 더 사는 게 아니오니까?”
 
105
박사는 여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의 늙은 눈을 굽이 흐르는 황포강으로 향하면서 방금 기억한 주춧돌 노래를 속으로 읊고 있었다.
 
106
한 1주일 뒤.
 
107
그날도 여는 호텔로 안 박사를 찾아서 이야기를 하는 때에 웬 한 중국 소년이 박사를 찾아왔다. 초라하고 더러운 소년이었다.
 
108
이발쟁이 한 서방이 급히 좀 만나잔다는 것이었다.
 
109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듯 박사는 일전에 한 서방이 잊고 갔다는 합죽선을 꺼내 들고 중국 소년을 따라 허겁지겁 나갔다. 여도 박사의 뒤를 쫓았다.
 
110
중국 소년의 안내를 따라서 마차를 달려 한 서방의 냄새나고 더러운 방을 찾은 것은 약 한 시간쯤 뒤였다. 마차에서 중국 소년이 한 말에 의지하건대 무슨 독물을 그릇 먹어서 생명이 위독하다, 혹은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던 한 서방은 뜻밖에도 일어나 앉아서 앞에 박사를 기다리는 의자를 놓고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111
“김 형, 무슨 일인가?”
 
112
박사가 들어서면서 이렇게 물으매 한 서방은 몹시 기쁜 듯 박사를 손 쳐서 찾았다.
 
113
“박사, 와주어서 고마우이. 목사님도 동행이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박사! 나는 지금 임종이야. 박사를 못 보고 죽는가 매우 걱정했는데 빨리 와주어서 고마우이.”
 
114
“김 형, 그게 무슨 말이람, 난 자네가 잊어버린 부채를 가지고 왔는데.”
 
115
“박사, 부채는 내 기념품으로 박사께 드리려고 두고 온 건데. 좌우간 임종 전 와주셔서 황송하이. 고마우이. 박사를 보지 못하고 죽으면 난 눈을 못 감을 겔세.”
 
116
“무얼,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좌우간 의사 하나 부르세.”
 
117
“아니! 아니! 의사는 벌써 늦었어. 내 지금 의지의 힘으로 버티고 있지 이미 송장일세. 박사께 마지막 보일 것이 있어서 못 죽고 있지.”
 
118
“보일 게란 무엔가?”
 
119
“음, 나 좀 부축해 일어세워주게. 목사님도 거기 앉으셔요. 박사, 그렇지, 그렇게 나를 일어세워주게. 그리고…….”
 
120
한 서방은 박사의 부축을 받으면서 비츨비츨 일어섰다. 직업상 많은 임종을 본 일이 있는 여의 눈에는, 한 서방의 얼굴에 분명 죽음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121
온 의지의 힘으로써 죽음을 잠깐이라도 연기해보려는 노력을 보았다.
 
122
“박사, 20년 전 우리 조국이 일본에게 먹힐 때 나는 망국인으로 숨어버리며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되, 장차 우리 조국이 광복되는 기꺼운 날이 있을 때 그날 조국 서울 남대문에서 육조 앞 지나 광화문까지 춤추며 들어가서 광화문 앞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자…… 조국 광복 만세를 부르며 춤추며 춤추며, 조국 서울에서, 조국 동포의 앞에서 이내 김○○의 마지막 춤을 보여주고자 그리 꾸민 춤, 꾸민 이래 사람의 앞에서 아직 추어보지 않은 비장의 춤…… 조국 광복의 날, 조국 서울에서 추려던 춤이었지만, 불행 광복도 보지 못하고, 조국은커녕 노예 도시 상하이에서 빈민굴 이발쟁이 한○○로 쓰러지는 이 김○○…… 이 운명, 울어주게. 그러나 조국의 운명을 짊어진 박사의 앞에서 박사께나마 보일 수 있는 게 그래도 약간 만족일세. 또 요행 목사님도 계시니 내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나 넘어지거든 이 죄 없는 불쌍한 영혼 받아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나 드려줍시오. 나는 조국 광복날 조국에서 추려던 춤을 마지막 선사로 나 자신을 위해 추고 그러고서 넘어지겠네…… 자, 박사, 내 하나 둘 셋 부를 테니 그 셋을 부를 때 나를 놓아주게.”
 
123
한 서방의 옷은 이 종족이 가장 강하고 화려하던 시절인 고구려의 무사의 옷을 본뜬 것이었다. 그가 손을 움직여 양 소매에서 꺼낸 것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떨리우는 아름다운 태극기였다. 그 태극기를 양손에 갈라 쥐고 한 서방은 불렀다. 하나, 둘, 셋…….
 
124
이 군호로 박사의 부축에서 벗어난 한 서방은, 양손의 태극기 아름답게 펄럭이며, 임종의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는 홍조를 띠고, 눈은 정열로 빛나며 힘 있게 발을 내짚었다.
 
125
이 가운데서 추어지는 ‘조국광복지무(祖國光復之舞)’ !
 
126
위대한 음악가요, 위대한 무용가 김○○ 씨가 과거 30년간 닦고 갈고 하여서 임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조국 광복의 책임자 앞에서 피력하는 감격의 춤이었다.
 
127
빨갛게 비치는 황혼의 방 안에서 죽음과 싸우며 춤추는 한 서방의 모양은 진실로 숭엄하였다.
 
128
박사와 여의 입에서는 서로 의논한 바 없이 저절로, 이 애처로운 혼을 위로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129
“이 몸은 기둥 아래 감추인 주춧돌, 주춧돌 없이는 집이 못 서요.”
【원문】주춧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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