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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8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924년 8월
염상섭
1
삼사 일은 집구석에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리 분주하신지 매일 아침만 자시면 김의관하고 나가셨다가 어슬어슬해서야 약주가 취하여 들어오시기도 하고 친구를 한 떼씩 몰아 가지고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큰집 형님한테 들으니, 요사이 동우회의 연종 총회가 있어서 그렇다 한다.
2
“그런 데 관계를 마시래도 한사코 왜 다니신단 말요? 모두 반미친놈들이 모여서 협잡질들이나 하고 남한테 시빗거리만 장만하면서…… 공연히 김의관이 들쑤셔 내서 엄벙뗑하고 돈푼이라두 갉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을 그걸 왜 짐작을 못 허셔?”
3
“내가 아나? 평의원이라는 직함 바람에 다니시는 게지, 허허허. 그런데 중추원 부찬의라두 하나 생길 줄 아시는지도 모르지.”
4
큰집 형님은 이런 소리를 하며 웃었다.
5
“중추원 부찬의는 벌써 철겨운 지가 언젠데? 설령 그게 된다기루 그건 왜 하지 못해 애를 쓰신답디까? 참 딱한 일이야.”
6
“그래두 김의관은 무엇이든지 하나 운동해 드리마던데, 하하하.”
7
“미친 소리! 저두 못 하는 것을 누구를 시키구 말구. 흥, 또 유치장에나 들어가구 싶은 게로군?”
8
“그래두 김의관 말은 자기가 총독이나 정무총감하고 제일 긴하다는데, 하하하.”
9
“서가의 집을 뺏겼으니까, 아버지께 알랑알랑하고 집이나 한 채 얻어 들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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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그런 집 있으면 나부터 줍시사 하겠네.”
11
사실 이 큰댁 형님을 집 한 채 주어 세간을 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12
동우회라는 것은 일선인(日鮮人)의 동화(同化)를 표방하고 귀족 떨거지들을 중심으로 하여 파고다공원패보다는 조금 나은 협잡배들이 모여서 바둑, 장기로 세월을 보내고 저녁때면 술추렴이나 다니는 회이다. 회의 유일한 사업은 기생연주회의 후원이나 소위 지명지사(知名之士)가 죽으면 호상차지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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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새 좀 바뻐서 약 쓰는 것도 자세히 볼 수 없고 하니, 낮에는 들어앉아서 잘 살펴보아라.”
14
내가 도착하던 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이르시기도 하였고, 또 나간대야 급히 찾아가 볼 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들어엎드려서 큰집 형님하고 저녁때면 술잔 먹고 사랑구석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지마는, 알고 보니 다니신다는 데라야 고작 동우회뿐이다. 병인은 하루 한 번이고 두어 번 들여다보아야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고 더친 것 같지도 않고, 의사가 와서 맥인가 본 뒤에 방문을 내면 큰집 형님이 쫓아가서 약봉지를 받아다가 끓여 디밀면 먹는지 마는지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만은 여전히 혼자 애를 쓰시나, 인제는 병구완에 지치시고 집안 사람들의 마음도 심상하여져서 일과로 약시중만 하면 그만인 모양이다. 나부터 병구완을 해본 일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 가는지 대중을 모르겠다.
15
“그 망한놈의 횐지 무언지 좀 그만두고 어떻게 다잡아서 약이나 잘 쓸 도리를 하셨으면 아니 좋을까.”
16
하며 어머니께서 부친을 원망을 하시는 소리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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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두 또 나가우? 어젯밤부터는 좀 이상한 모양이던데.”
18
며느리를 들여다보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책망하듯이 물으시니까,
19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를걸! 그리 다를 것은 없군.”
20
하시고 나가시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더하다는 날도 그 모양이요 낫다는 날도 제턱이다. 또 며칠 음산한 날이 계속하였다.
21
‘어서 끝장이나 났으면!’
22
하는 생각이 불쑥 날 때에는, 정자의 생각이 반드시 뒤미처 머리에 떠올라 왔다.
23
‘지금쯤 무얼 하고 있누? 경도로나 가지 않았나?’
24
하고 엽서를 띄운 것은, 서울 온 지 일주일이나 지난 뒤이었다.
25
정자에게 엽서를 부치던 날 저녁때에, 을라는 그 동안 나왔나? 하고 인사 겸 병화(炳華)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병화는 동경 유학시대에는 나의 감독자 행세를 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정답게 지냈지만, 을라의 문제가 있은 후로는 그럭저럭 나하고 데면데면하여지기도 하고, 만나면 어쩐지 이렇다할 표면적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피차에 겸연쩍게 되었다. 더구나 이 사람 역시 지금 집에 있는 큰집 형님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형제간 자별하지도 못하려니와 우리집에는 한 달에 한 번쯤 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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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대문 밑에서 전차를 내려서 아직도 눈에 녹은 땅이 질척거리는 길을 휘더듬어 들어가며, 눈에 익은 거리가 오래간만에 반가운 듯이 여기저기를 휘 돌아보았다. 작년 여름에는 여기를 날마다 대어 섰었다. 그때 을라는 천안(天安) 자기 집에는 가끔 다니러만 가고 서울 와서 이 집에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고 이 집에 와서는, 밤이고 낮이고 을라와 형수를 데리고 문안을 헤매기도 하고, 달밤에 병화 내외와 을라를 따라서 탑골 승방까지 가본 것도 그때였다. 밤이 늦었다고 붙들면 마지못하는 척하고 묵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27
‘그러나 그때는 나도 참 단순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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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자국 난 데를 따라서 마른 곳을 골라 디디며 속으로 그때 재미있게 놀던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김장을 다 뽑아 낸 밭에는 눈이 길길이 쌓이고 길가로 막아 놓은 산울〔生籬〕은 말라빠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고 얽어맨 새끼도 꺼멓게 썩어 문드러졌다.
29
‘그때에는 여기에 퍼런 호박덩굴, 외덩굴이 쫙 깔리고 누런 꽃이 건들거리었것다.’
30
벽돌담을 쌓은 어떤 귀족의 별장인가 하는 것을 지나서 좁은 길을 한 마장쯤 걸어가려니까, 오른편은 낭떠러지가 된다.
31
‘응, 저기가 자던 날 아침이면 나와서 세수도 하고, 달밤에 나와서 을라와 수건을 잠가 놓고 물튀기를 하던 데로군.’
32
하며 바위 밑을 내려다보니까, 물이 말랐는지 얼음눈이 허옇게 뒤집어씌워 있다. 병화 집에는 마침 주인도 돌아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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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나왔나? 나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번 간다면서 자연 바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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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양복을 입은 병화는 방에서 튀어나왔다. 지금 막 들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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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는 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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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형수도 반가운 듯이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서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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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길면 살겠지요. 하나를 낳아 놓으니까 신진대사로 하나는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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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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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 흉한 소리두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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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좀 차도가 있으신 모양인가? 처음부터 양의를 대어 가지고 수술을 한 뒤에 한약을 들이댄다든지 하였더면 좋았을걸.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펄쩍 뛰시는 모양이시기에 시키지 않은 참견은 하기가 싫어서 그만두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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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하시는 대루 내버려두지. 지금 어쩌니어쩌니 한들 쓸데두 없구, 제 계집이니까 어쩐다구 하실까 봐서 되어 가는 대루 내버려두지. 하지만 며칠 못 갈 듯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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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쩝니까?”
43
형수가 웃으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한참 병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생각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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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을라 오지 않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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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형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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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왜, 나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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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형수는 나의 얼굴을 살피듯이 쳐다본다. 병화는 못 들은 체하고 일어나서 양복을 벗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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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글쎄, 나왔는가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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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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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형수는 생글생글 웃다가 끼고 앉은 어린애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는 어쩐지 온 것을 속일 것은 무언구? 하며 불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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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신호에 들렀더니, 부득부득 같이 가자는 것을 떼어 버리고 왔는데, 이삼 일 후에는 떠나겠다 했으니까 벌써 왔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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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숨길 것이 무어냐는 듯이 불쾌한 내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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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하지만 바쁘신 길인데 거기는 어째 들르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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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형수는 책망하듯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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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기에 들렀다가 형님께 소식이라두 전해 드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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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는 슬쩍 웃어 버렸다. 형수도 기가 막힌 듯이 웃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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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소리로군. 내가 을라 소식 알겠다던가?”
58
병화는 옷을 갈아입고 자기 자리로 와서 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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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어 없지? 무얼 좀 사오라구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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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아내와 대접할 의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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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곧 갈 테에요…… 그런데 작년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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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는 짓궂이 종형수에게 을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형수는 얼굴이 발개지며 픽 웃고 말았다. 나도 상기가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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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두 퍽 변하였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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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는 을라가 하던 말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전 같으면 을라하고 아무 까닭은 없어도 누가 을라란 을자만 물어 보아도 얼굴이 발개지던 사람이 되짚어서 을라의 이야기를 태연히 하고 앉았는 것이 병화에게는 다소 불쾌하기도 하고 이상쩍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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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형수는 일년 전에 무슨 실수가 생길까 보아 두 틈바구니에 끼여서 혼자 마음만 졸이고 있던 일을 머리에 그려 보는지 한참 말없이 앉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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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공부는 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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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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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전하더군요. 무어 노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던데 보내 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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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모자를 들고 일어서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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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앉었어. 좋은 술이 한 병 생겼으니 한잔 하구 가란 말이야. 어디 나가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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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웬 거요? 아, 참 올 가을에 한 동 올랐답디다그려? 그러지 않아도 한턱 해야 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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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가 웃으니까, 병화는 매우 유쾌한 듯이 따라 웃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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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앉어요. 누가 양주를 한 병 선사를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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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끌어낸다. 아닌게아니라 한 동 올라간 덕에 그런지 집안 세간도 그전보다는 는 모양이다. 윗목에 양복장도 들여 놓고 조끼에는 금시계줄도 늘이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시던 넉넉지 않은 학비를 가지고, 한 칸 방에 들어엎드려서 구운 감자를 사다 놓고 혼자 몰래 먹던 옛날을 생각하면 여간한 출세가 아니다. 나는 더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늦으면 귀찮기에 병인 핑계를 하고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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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거진 다 떨어진 뒤에 집에 들어와 보니, 사랑에는 벌써 영감님들이 채를 잡고 앉아서 술상이 벌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늦게 들어올걸―--- 하며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저녁밥 때에 술 치다꺼리가 겹쳐서 우환 있는 집 같지도 않게 엉정벙정하고 야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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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누가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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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루로 올라오며 약두구리를 올려 놓은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앉았는 누이더러 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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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우? ‘차지’가 또 왔단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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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깔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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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게 무슨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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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차지도 모르나? 일본 가서 그것도 모르다니, 헷공부했네그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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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얼근하게 취해서 축대 위에 섰던 큰집 형이 놀리듯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여편네들도 깔깔 웃었다.
83
“차지라니 누구 집 택호(宅號)요? 내 차지(次知) 네 차지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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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조선 차지지. 버금차(差)자하고 지탱지(支)자의 차지(差支)를 몰라?”
85
하며 또 웃는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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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일본 차지가 어떡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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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덩달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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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로 붙여 보시구려.”
89
이번에는 누이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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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쓰카에(差支)란 말이지?”
91
“잘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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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또들 웃는다.
93
지금 사랑에 온 손님이 김의관의 ‘봉’인데, 처음에 찾아왔을 때에 방으로 들어오라니까 들어가도 관계없느냐는 말을 가장 일본말이나 할 줄 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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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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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것을 큰집 형이 옆에서 듣고 앉았다가 나중에 김의관더러 물어보니까, 그것이 일본말로 이러저러한 뜻이라고 설명을 하여 준 것을 듣고, 안에 들어와서 흉을 보기 때문에 어느덧 ‘차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 한다. 집안에서들은 코빼기도 못 보고 이름도 모르면서 ‘차지 차지’ 하고 부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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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영감쟁이로군! 무얼 하는 사람인데 그래?”
97
나는 다 듣고 나서 큰집 형더러 물어 보았다.
98
“지금 세상에 오십이 넘어서 하긴 무얼 한단 말인가? 김의관한테 빨리러 다니는 위인이지. 그는 그렇다 하고 한잔 안 하겠나?”
99
하며 큰집 형은 자기가 한잔 내듯이 아내더러 술상을 보라고 분부를 한다.
100
“또 먹어요? 형님이나 자슈.”
101
“자네야 언제 먹었나? 나는 한잔 했지만.”
102
나는 먹고도 싶지만 조선에 돌아오면 술이 금시로 느는 것이 걱정이었다. 조선 와서 보아야 술이나 먹고 흐지부지하는 것밖에는 사실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마는, 생각하면 조선 사람이란 무엇에 써먹을 인종인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한잔, 낮에도 한잔, 저녁에도 한잔, 있는 놈은 있어 한잔, 없는 놈은 없어 한잔이다. 그들이 이렇게 악착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노력이요, 그리하자면 술잔밖에 다른 방도와 수단이 없다.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도 없이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무덤으로 끌려간다고나 할까? 그러나 공동묘지로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요새는 발버둥질을 치는 모양이다. 하여간 지금의 조선 사람에게서 술잔을 뺏는다면 아마 그것은 그들에게 자살의 길을 교사(敎唆)하는 것일 것이다.
103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이것만이 그들의 인생관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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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잔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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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도 끌리고 말았다. 큰집 형을 안방으로 청하여 저녁상을 마주 받고 앉으니까, 어머니께서 다가앉으시면서,
106
“아까 김의관의 친구가 천(薦)이라면서 용한 시골 의원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았는데, 또 약을 갈아 대면 어떻게 될는지?”
107
하며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108
“김의관의 친구가 누구예요?”
109
“차지 말일세.”
110
잔이 나기를 기다리고 앉았던 큰집 형님이 대신 대답을 하였다.
111
“차지라는 소리나 하고 다니는 위인이면, 그까짓 게 무얼 안다구?”
112
하며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까,
113
“글쎄 말일세. 김의관이나 차지가 진권(進勸)한 것이 된 게 있을 리가 있나?”
114
“어떻든 나는 모르니까 아버님께 잘 여쭈어 보구 하십쇼그려.”
115
“난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냐? 아버지는 밤낮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시거나 술로 세월을 보내시고.”
116
어머니는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 매우 귀에 거슬리고 화증이 나시는 모양이다.
117
“글쎄 내야 무얼 알아야죠. 그래 지금 그 의원이란 자를 대접하는 것이에요?”
118
“그건 그런 게 아니란다네. 김의관이 일전에 유치장에 들어갔었다지 않았나?”
119
하며 큰집 형이 대답을 한다.
120
“글쎄 그랬다는군요.”
121
“그런데 잡혀가던 날이 바로 차지가 한턱을 내던 날인데, 그러한 횡액에 걸려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나오던 이튿날 차지가 또 한턱을 내었다나. 그래서 오늘은 김의관이 베르고 베르다가 어디 가서 돈을 만들었는지 일금 오 원야라를 내놓고 지금 한턱 쓰는 모양이라네. 그런데 의원이란 자는 말하자면 곁두리지.”
122
“차진가 무언가 하는 자는 무엇 하는 자길래 두 번씩이나 턱을 내어 가며 그렇게 김의관을 떠받치더람?”
123
“그게 다 김의관의 후림새지. 자세한 것은 몰라두 저희끼리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군수나 하나 얻어 하든지, 하다못해 능참봉(陵參奉)이라도 하나 얻어걸릴까 하구 연해 돈을 쓰며 따라다니나 보데. 그런 놈이 내게두 하나 얻어걸렸으면 실컷 빨아먹구 훅 불어세겠구먼…… 하하하.”
124
큰집 형은 이 따위 소리를 하고 취흥에 겨워 웃었다. 옆에 앉으셨던 어머님은,
125
“그것두 입담이 좋다든지 재주가 있어야지 아무나 되는 줄 아는군.”
126
하며 웃으셨다.
127
“응! 그래서 일본말 하는 체를 하고 차지를 휘두르며 다니는군마는 김의관 주제에…… 군수, 참봉은 땅에 떨어졌던가!”
128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한마디 하고 술잔을 내주며,
129
“그래 그 틈에 아버지께서두 끼셨나요?”
130
하며 물으니까,
131
“아닐세, 천만에. 김의관이 그런 일야 변변히 이야기나 한다던가. 먹을 자국야 혼자 끼구 돌지. 또 그러나 지금 세상에 협잡꾼 아니구 술 한잔이나 입에 들어간다던가? 김의관만 나무라면 뭘 하겠나?”
132
하고 큰집 형은 매우 김의관의 생화가 부럽기도 한 모양이다.
133
술이 취하여 가니까 독한 것이 비위에 당기어서 어머니께서 그만 먹고 어서 밥을 뜨라시는 것도 안 듣고 나는 차 속에서 먹다가 남겨 가지고 온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해서 따랐다.
134
“얘는 병구완하러 오지 않구 술만 먹으러 왔나. 죽어 가는 병인은 뻗어뜨려 놓고 안팎에서 술타령들만 하구, 응!”
135
하며 어머니께서는 한숨을 쉬시고 밥상을 받으셨다.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마는 하는 수 없는 일이다.
136
“참, 아까 병화형한테 갔더니 양주가 생겼다구 붙드는걸.”
137
나는 양주를 보니까 생각이 나서 이런 말을 꺼냈다.
138
“응! 잘들 있던가? 그놈 주임대우(奏任待遇)인지 뭔지 했다면서 돈 한푼 써보란 말도 없구.”
139
얼쩡하여진 큰집 형은 또 아우의 시비를 꺼내려는 모양이기에 나는,
140
“맽겼습디까. 주면 주나 보다 안 주면 안 주나 보다 할 뿐이지, 시비는 왜 하슈. 저도 살아가야지.”
141
하며 말을 막아 버렸다.
142
“그래 아우에게 얻어먹어야 하겠나? 삼촌이나 사촌에게 비럭질을 해야 하겠나?”
143
“형편 되어 가는 대로 하는 거 아니겠소.”
144
“계집은 둘씩이나 데리구, 그래 명색이 형이라면서 모른 체해야 옳단 말인가?”
145
하며 소리를 빽빽 지른다.
146
“계집이 둘이라니요?”
147
“아, 그 을라라던가 하는 미친년의 학비를 대어 주나 보던데! 그저껜가 잠깐 들렀더니 벌써 불러내 왔나 보더군.”
148
“녜, 와 있에요?”
149
나는 놀랄 것도 없으나 아까 병화댁이 웃기만 하고 말을 시원히 안 하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불쾌하다. 그러나 그 집 형수가 나와 을라가 교제하는 것을 은근히 막으려는 것은 작년부터의 일이다. 한때는 오해도 없지 않았지마는 일전 을라의 말을 들으면, 그 집 형수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점이 없지도 않다. 지금 이 형님의 말을 들으면 병화와 벌써 전부터 그렇지 않은 사이 같기도 하지마는, 을라의 말 같아서는 병화댁은 친한 동무지마는 이씨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의미로 막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작년만 해도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으레 그랬을 것이다. 또 이번은 내가 신호에 들러서 만나고 왔다니까 한층 더 경계를 하느라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려는 눈치인 듯도 싶다. 혹은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딴생각을 먹고 신호까지 찾아갔는가 하는 의심이 있어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나의 을라에 대한 향의는 작년에 멋모르고 덤비던 첫 서슬과는 지금은 딴판이다. 문제도 아니 되는 것이다.
150
“그래 정말 학비를 대나요? 박봉 받아 가지고 웬 돈이 자랄라구요?”
151
을라에게 전부터 학비를 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나도 짐작하는 터이기에 채쳐 물었다.
152
“글쎄 자세한 내용야 누가 아나마는, 안에서들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에 말일세!”
153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안에서들 공연히 그러는 것이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만은 을라의 말이 진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54
그 이튿날이던가, 병화댁이 병 위문 오는 길에 을라를 데리고 왔었다.
155
“어제 저기 오셨더라지요. 오늘 아침차에 들어와서 동무 집에 짐을 두고 놀러 갔다가 잠깐 뵈러 왔습니다.”
156
하고 묻기도 전에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157
나는 구태여 변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요, 무슨 흥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병화댁이나 을라나 제각각 그 무엇을 변명하려고 하는 눈치는 나도 잘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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