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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3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924년 8월
염상섭
1
그날 밤은 역 앞의 조고만 여관에서 노독을 풀고, 이튿날 아침차로 떠나서 저녁에는 연락선을 타게 되었다.
2
하관(下關)에 도착하니, 방죽이 터져 나오듯 일시에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시꺼먼 사람떼에 섞이어서 나는 연락선 대합실 앞까지 왔다.
3
어디를 가나, 그 머릿살 아픈 형사떼의 승강이를 받기가 싫어서 배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배에는 아직 들이지 않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합실로 들어갔다. 벤또나 살까 하고 매점 앞에 가서 섰으려니까 어느 틈에 벌써 알아차렸는지 인버네스를 입은 낯 서툰 친구가 와서 모자를 벗으며 끄덕 하고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암말 아니 하고 한참 쳐다보다가, 명함을 꺼내서 주고 훌쩍 가게로 돌아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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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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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명함을 받아 들고 내가 흥정을 다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던 인버네스는 또 괴롭게 군다. 나는 그래도 역시 잠자코 그 명함을 도로 빼앗아서 주소를 써서 주고는, 사놓았던 물건을 들고 짐 놓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러나 궐자는 또 쫓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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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학교는? 무슨 일로?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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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짓궂이 승강이를 부린다. 나는 실없이 화가 나서 그까짓 건 물어 무엇에 쓰려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고 간단간단히 응대를 하여 주고 부리나케 짐을 들고 대합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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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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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좀 비웃는 듯이 인사를 하는 궐자의 흘겨뜨는 눈은 부리부리하고 험상궂었으나, 내 뱃속에서도 제게 지지 않게 바지랑대 같은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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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은 북적거리며 배에 걸쳐 놓은 층층다리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나도 틈을 비집고 그 속에 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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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칠(漆)을 담았던 통에 썩은 생선을 담고 석탄산수를 뿌려서 절이는 듯한 고약한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각기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풍경하고 더러운 침대 위에다가 짐을 얹어 놓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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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착이려니 하였더니 벌써 사오 인의 욕객이 목욕탕 속에 들어앉아서 떠들어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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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법 까불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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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이게 해변가니까 그렇지, 그리 세찬 바람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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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서 갓 잡아 올라오는 농군인 듯한 자가 온유하여 보이는 커다란 눈이 쉴새없이 디굴디굴하는 검고 우악한 상을 이사람 저사람에게로 돌리면서 말을 꺼내니까, 상인인지 회사원 같은 앞의 사람이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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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지금쯤 꽤 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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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온돌이 있으니까, 방 안에만 들어엎디었으면 십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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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정에 익은 듯한 상인 비슷한 위인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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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참 온돌이란 게 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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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하고 마주 앉았는 자가 암상스러운 눈으로 그자를 말끔히 쳐다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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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처음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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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말참례를 하기 시작한다. 남을 멸시하고 위압하려는 듯한 어투며 뾰족한 조동아리가 물어 보지 않아도 빚놀이쟁이의 거간이거나 그 따위 종류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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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위에 어째 나섰소? 어딜 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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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형님이 계신데 어머님이 편치 않으셔서 가는 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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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잘 되었소그려. 나도 대구까지 가는 길인데. 그래 백씨께서는 무얼 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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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대에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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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로 대구분대에 계신가요? 네…… 그러면 실례입니다만, 백씨께서는 누구신지? 뭘로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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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자의 형이 헌병대에 있다는 말에, 나하고 마주 앉은 자는 반색을 하면서 금시로 말씨가 달라진다. 나는 그자의 대추씨 같은 얼굴을 또 한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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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우리 형님은 아직 군조(軍曹)예요. 니시무라(西村) 군조, 혹 형공도 아시는지? 그런데 형공은 조선에 오래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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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난 십여 년래로 그저 내 집같이 드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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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궐자는 시골자를 한참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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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대구 헌병대의 그 양반이야 알구말구요. 그 양반은 나를 모르실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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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그 말눈치가 안다는 것보다도 모른다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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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십 년이라면 한밑천 잡으셨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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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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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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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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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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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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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憂國志士)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亡國)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치 좀 낫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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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관념을 굳게 의식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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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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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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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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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처음 간다는 시골자가 또다시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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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데다가 가는 곳마다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걸 보면 데라우치(寺內)상이 참 손아귀 힘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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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감격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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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촌에 들어가서 할 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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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야 많지요. 어딜 가기로 굶어죽을 염려는 없지만, 요새 돈 몰 것이 똑 하나 있지요. 자본 없이 힘 안 들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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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독한 위인이 충동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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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벌이가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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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 쳐다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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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한번 해보시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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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한마디 충동이며, 무슨 의미나 있는 듯이 그 악독하여 보이는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고 한참 마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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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서 죽도록 땅이나 파먹다가 거꾸러지는 것보다는 편하고 재미있습넨다. 게다가 돈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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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뱅글뱅글 웃으면서 이 순실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있는 듯한 촌뜨기를 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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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선반에서 떨어지는 떡 같은 장사가 있으면 하다뿐이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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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는 차차 침이 괴어 오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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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테니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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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딴은 누구를 큰 직업이나 얻어 주는 듯싶이, 더구나 보증금은 특별히 면제하여 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호기만장이다. 일편 촌뜨기는 양복신사가 돼야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속으로 헤에 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좀처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았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리어서 그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좀더 몸이 달아 덤비며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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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디 있단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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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단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 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번 목욕탕 속을 휘 돌아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구석 저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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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누워 떡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 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 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오는 것인데, 그 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넨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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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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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그자의 상판때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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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그래서 이자의 형이 헌병 군조라는 것을 듣고 이용할 작정으로 반색을 한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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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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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자는 벙벙히 듣고 앉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빙긋 웃으며 또다시 말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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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선 지방에 응모자가 많고 북으로 갈수록 적은고 하니, 이 남쪽은 내지인이 제일 많이 들어가서 모든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북으로 쫓겨서 만주로 기어들어가거나 남으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서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누구나 그늘보다는 양지가 좋으니까, 요보들 생각에도 일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주린 배를 채우기는 고사하고 보릿고개〔麥嶺〕에는 시래기죽으로 부증이 나서 뒈질 지경인 바에야, 번화한 동경, 대판에 가서 흥청망청 살아 보겠다는 요량이거든. 그러니 촌의 젊은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집애들까지 나두 나두 하고 나서거든. 뭐 모집이야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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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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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북선 지방은 우리 내지인이 덜 들어갔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히 사니까 응모자가 적지만, 그것도 미구불원에 쪽박을 차고 나설 거라,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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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는 자기 설명에 만족한 듯이 대단히 득의만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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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모집을 해가면 얼마나 생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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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는 구수하다는 듯이 침을 흘리며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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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가 뭐요. 여비가 있지, 일당이 또 있지, 게다가 한 사람 모집하는 데에 일 원서부터 이 원이니까―---그건 회사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령 방적회사의 여직공 같은 것은 임금도 싼데다가 모집원의 수수료도 헐하고, 광부 같은 것은 지금 시세로도 일 원 오십 전으로 이 원 오십 전까지라우. 가령 천 명만 맡아 가지고 와서 보구려. 이삼 삭 동안 여비나 일당에서 남는 것은 그까짓 건 다 그만두고라도 일천오륙백 원, 근 이천 원은 간데없는 것일 게니, 그런 벌이가 이판에 어디 있소? 하하하. 나도 맨 처음에―---그건 제주도에서 모집하여 갔지만―---그때에 오백 명 모아다 주고 실살고로 남긴 것이 천 원이었고, 둘째 번에는 올 가을 팔백 명이나 북해도 족미(足尾)탄광에 보내고 이천 원 돈이 들어왔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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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자는 입의 침이 없이 천 원, 이천 원을 신이 나서 뇌며 목욕탕 속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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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예에, 그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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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일평생에 들어 보지도 못하던 천(千)자가 붙은 돈액수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시골자는, 때를 다 밀었는지 그 장대한 구릿빛 나는 유착한 몸집을 벌떡 일으키어 다시 욕탕 속에 출렁 집어넣으면서 만족한 듯이 또다시 말을 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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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을 잘들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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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구 못 하는 것은 내가 아랑곳 있겠소마는, 하여간 요보는 말을 잘 듣고 쿨리만은 못해도 힘드는 일을 잘 하는데다가 삯전이 헐하니까 안성맞춤이지. 그야 처음 데려갈 때에는 품삯도 많고 일은 드러누워서 떡먹기라고 푹 삶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갈 노자며 처자까지 데리고 가게 하고, 게다가 빚까지 갚아 주는데야 제아무런 놈이기로 아니 따라 나설 놈이 있겠소. 한번 따라 나서기만 하면야 전차(前借)가 있는데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지. 일이 고되거나 품이 헐하긴 고사하고 굶어 뒈진다기루 하는 수 있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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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부하가 되었다는 듯이 득의만면하여 모집방법의 비책까지 도도히 설명을 하여 주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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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더 들으려고 일부러 머뭇머뭇하며 앉았으려니까, 승객이 다 올라탔는지, 별안간에 욕객의 한 떼가 또 왁자하고 들이 밀려오기에 나는 그만 듣고 몸을 훔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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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셋쯤 된 책상도련님인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반년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하는 말을 들을 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치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치 조선의 현실을 몰랐다. 나도 열 살 전까지는 부모의 고향인 충청도 촌 속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도 일년에 한두 번씩은 촌락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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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짓는 것보다는 밭을 갈라고 한다. 그러나 밭을 가〔耕〕는 그것이 벌써 시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에 돌아간다. 흙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흙의 북돋아오르는 생기야말로 너 인간의 끊임없는 새 생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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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따위의 산문시줄이나 쓰던, 자기의 공상과 값싼 로맨티시즘이 도리어 부끄러웠다. 흙의 냄새가 향기롭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자가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胃弱)이라는 고등 유민의 유행병에나 걸릴까 보아서 대팻밥 모자에 연경이나 쓰고, 아침저녁으로 호미자루를 잡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詩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일년 열두 달, 소나 말보다도 죽을 고역을 다 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일까? 그들이 삼복의 끓는 햇볕에 손등을 데면서 호미자루를 놀릴 때,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흙의 노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다만 땀과 피뿐이다. 그리고 주림뿐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어나오기 전에, 벌써 확정된 단 하나의 사실은 그들의 모공이 막히고 혈청이 마르기까지, 흙에 그 땀과 피를 쏟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방울의 땀과 백 방울의 피는 한 톨의 나락을 기른다. 그러나 그 한 톨의 나락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그에게 지불되는 보수는 무엇인가―---주림만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그의 받을 품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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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다 훔치고 옷 입는 터전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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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 드는 사람, 한참 복작대는 틈에서 부리나케 양복바지를 꿰며 섰으려니까, 어떤 보지 못하던 친구가 문을 반쯤 열고 중절모자를 쓴 대가리를 불쑥 디밀며, 황당한 안색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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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올시다만, 여기 이인화란 이가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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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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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나요. 왜 그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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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궐자의 앞으로 두어 발짝 나서며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궐자는 한참 찾아다니다가 겨우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서서 이리 좀 나오라고 명령하듯이 소리를 친다. 학생복에 망토를 두른 체격이며, 제딴은 유창하게 한답시는 일어의 어조가 묻지 않아도 조선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도 짓궂이 일어를 사용하고 도리어 자기의 본색이 탄로될까 보아 염려하는 듯한, 침착지 못한 행색이 나의 눈에는 더욱 수상쩍기도 하고 마음이 근질근질하기도 하였다. 나의 성명과 그 사람의 어조를 듣고, 우리가 조선 사람인 것을 짐작한 여러 일인의 시선은, 나에게서 그자에게, 그자에게서 나에게로 올지 갈지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일본 사람 앞에서 희극을 연작하는 앵무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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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긴지 할 말 있건 예서 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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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기연가미연가하여 역시 일어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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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이리 좀 나오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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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가 벌써 그러한 종류의 위인인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언사의 교만한 것이 첫째 귀에 거슬리어서 다소 불쾌한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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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문을 닫고 나가서 기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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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주섬주섬 옷을 마저 입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어리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아까 노동자를 모집할 의논을 하던 세 사람은,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는 것이 분명하였으나, 나는 도리어 그 시선을 피하였다. 불쾌한 생각이 목구멍 밑까지 치밀어오는 것 같을 뿐 아니라, 어쩐지 기운이 줄고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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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다 입고 문 밖으로 나오니까, 궐자는 맞은편에 기대어 웅숭그리고 서서 기다리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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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만, 나하고 짐을 가지고 저리 좀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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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쫓아오면서 애원하듯이 말을 붙이는 양이, 아까와는 태도가 일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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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이 누구길래, 어딜 가잔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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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에, 참 나는 서(署)에서 왔는데 잠깐 파출소로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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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직무도 명언하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가자고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내심으로 부끄럽고, 또한 나에게 ‘노형이 조선 사람이 아니오?’ 하고, 탄로나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앞이 굽는다는 듯이, 언사와 태도는 점점 풀이 죽고 공손하여졌다. 이것을 본 나는 도리어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서, 층계를 느런히 서서 내려가다가, 궐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 의미 없이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에는 어색하여 하는 빛이 역력히 보였다. 나는 잠자코 자기 자리로 가서 순탄한 말로,
104
“나는 나갈 새도 없고 짐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 혼자 가지고 가서 조사할 게 있건 조사하고 갖다 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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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방 두 개를 들어 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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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그건. 입회를 해줘야 이걸 열죠. 그러지 마시고 잠깐만 나가 주세요. 이건 내가 들고 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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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실 안의 수백의 눈은 모두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하여 더 섰을 수가 없었다.
108
“내가 도적질이나 한 혐의가 있단 말이오?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하라는 데야 또 어쩌란 말이오. 정 그럴 테면 이리로 들어와서 조사를 하라고 하구려. 배는 떠나게 되었는데 나가자는 사람도 염치가 있지.”
109
나는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이렇게 볼멘 소리를 질렀다.
110
“그러지 마시고 오늘 이 배로 꼭 떠나시게 할 테니, 제발 잠깐만 나가 주세요. 자꾸 시간만 갑니다. 여기선 창피하실까 봐 그러는 것 아닙니까?”
111
“창피하다? 흥, 창피? 얼마나 창피하면 예서 더 창피할꾸. 그런 사패 볼 것 없이 마음대로 하슈!”
112
홧김에 이렇게 소리는 질렀으나, 그 애걸하는 양이 밉살스런 중에도 가엾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요, 어느 때까지 승강이만 하다가는 궐자 말마따나 이로울 것도 없고 시간만 바락바락 가겠기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웃저고리를 집어 입고서, 어떻게 될지 사람의 일을 몰라서 아까 사가지고 들어온 벤또그릇까지 가지고, 가방을 들고 앞서 나가는 형사의 뒤를 따라 섰다. 형사가 큰 성공이나 한 듯이 득의만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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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그러시지요. 별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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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웃는 그 얼굴에는 달래는 듯하기도 하고 빈정대는 듯한 빛이 보였다. 나는 무심중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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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으로 나와서 승강구까지 불러다가 조사를 하게 하라 하여 보았으나, 그것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을 참고 결국 잔교(棧橋)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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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 앞까지 오니까, 아까 내 명함을 빼앗아간 인버네스가 양복에 외투를 입은 또 한 사람과 무시무시하게 경계를 하고 섰다가, 우리를 보더니 아무 말 아니 하고 기선 화물을 집더미같이 쌓아 놓은 뒤로 앞서 들어갔다. 가방을 가진 자도 아무 말 아니 하고 따라 섰다. 나는 가슴이 선뜩하는 것을 참고, 아무 반항할 힘도 없이, 관에 들어가는 소처럼 뒤를 대어 섰다. 네 사람이 예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묵묵하고 침중한 가운데에 모든 행동을 경쾌하게 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서 보는 강도단이나 그것을 추격하는 탐정 같았다. 네 사람은 화물에 가리어 행인에게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와서 우뚝우뚝 섰다. 대합실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전광만은, 양복쟁이의 안경테에 소리 없이 반짝 비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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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예서 묵지 못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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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쟁이가 우선 입을 벌리며 가방을 빼앗아 든다. 좁은 골짜기에서 나직하게 내는 거세고도 굵은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 본 목소리 같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놈 모양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안경알이 하얗게 어룽어룽하는 그자의 두툼하고 둥근 상을 쳐다보며 섰었다. 그자도 나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을 악물고 위협하는 태도로 노려보다가 별안간에 은근한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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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어서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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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양이, 마치 정다운 진객을 만류하는 것 같았다. 무슨 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이같이 으슥한 골짜기에서 을러 보았다 달래 보았다 하는 것을 당하는 것은 나의 수명이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부호로서 이런 꼴을 당하였더면, 위불위없이 강도나 맞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을 하려 하였으나, 참 정말 귓구멍이 막혀서 입을 벌릴 기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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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긴 어디서 묵으란 말이오? 유치장에나 가잔 말씀요? 이 배에 떠나게 한다는 약조를 하였기 때문에 나왔으니까 약조대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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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강경히 주장은 하면서도, 마음은 차차 두근거려지고 신경은 극도로 긴장하여졌다. 대체 나 같은 위인은 경찰서의 신세를 지기에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래도 이 배만 놓치면 참 정말 유치장에서 욕을 볼 것은 뻔한 일, 하늘이 두 쪽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배를 놓쳐서는 큰일이라고 결심을 단단히 하고서도 웬일인지 가슴은 여전히 두근두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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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예서 잠깐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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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쟁이가, 나와 인버네스를 반반씩 보며 저희끼리 의논을 한다. 나는 우선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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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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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네스가 찬성을 하니까, 양복쟁이는 나에게로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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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열어 보아도 상관없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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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열쇠를 내라고 한다. 나는 급히 열쇠를 내어 주었다. 가방은 양복쟁이의 손에서 덜컥 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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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관(棺) 같은 긴 모양의 트렁크를 유리창 그림자가 환히 비치는 화물 쌓인 밑에다가 열어 놓고 들쑤시는 동안에, 그 옆에서 인버네스는 조그만 손가방을 조사하고 앉았다. 나는 이편에 느런히 섰는 학생복 입은 자와 함께 두 사람의 네 손길만 내려다보고 섰었다. 큰 트렁크를 맡은 자는 잠깐 쑤석쑤석하여 보더니, 그 위에 얹어 놓은 양복이며 화복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휙휙 집어서 내 옆에 선 형사에게 주섬주섬 던져 주고 나서, 그 밑에 깔리었던 서류뭉텅이와 서적 몇 권을 분주히 들척거리고 앉았다. 조그만 트렁크 속에서 소득이 없었던지 그대로 뚜껑을 닫아서 옆에 놓고 인버네스도 다시 큰 가방으로 달려들어서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의 분부대로 서적을 한 권씩 들어 보아 가며 일일이 책명을 수첩에 기입하며 앉았다. 가방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사의 네 손은 일분 이분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로 움직인다. 나는 이놈들이 또 무슨 망령이나 부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의혹을 가지고 전광에 벌겋게 번쩍이는 양복쟁이의 곁뺨을 노려보고 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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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눈과 네 손길은 앞에 뉘어 놓은 트렁크 한 개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일 분의 빈틈 없이 극도로 긴장하였으면서도 여덟 입술은 풀로 붙인 듯이, 아무도 입을 벌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절대 침묵이 한 간통쯤 되는 컴컴한 골짜기에 숨이 막힐 듯이 가득히 찼다. 비릿한 해기(海氣)를 품은 차디찬 저녁 바람이 귓가로 솔솔 지날 때마다 바삭바삭하는 종잇장 구기는 소리밖에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큰 배에 짐 싣는 인부의 소리도, 잔교 밑에 와서 부딪는 출렁출렁하는 파도 소리도, 아마 이 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겁고 찌뿌드드한 침묵 속에 흐릿한 불빛에 싸여서 서고 앉고 하여 꾸물꾸물하는 양이, 마치 바다에 빠진 시체를 건져 놓고 검시(檢屍)나 하는 것같이 처량하고 비장하며 엄숙히 보였다. 그러나 일 분, 이 분, 삼 분, 오 분, 십 분…… 시간이 갈수록 나의 머릿속은 귀와 반비례로 욱신욱신하여졌다. 그 세 사람들이 일부러 느럭느럭하는 것은 아니건마는 뺏어 가지고 내 손으로 하고 싶으리만치 초초하였다. 나는 참다못하여 시계를 꺼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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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분밖에 안 남았소. 난 갈 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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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재촉을 하였다. 그제야 양복쟁이는 눈에 불이 나게 놀리던 손을 쉬고 서류뭉텅이를 들어 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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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은 잠깐 내가 갖다가 보고, 댁으로 보내 드려도 관계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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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일어선다. 서두른 분수 보아서는 아무 소득이 없어 섭섭하고 열적으니, 서류뭉치나 뺏어 두자는 눈치 같다. 나는 두말없이 쾌락하였다. 사실 그 속에는 집에서 온 최근의 편지 몇 장과 소설 초고와 몇 가지 원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를 써서 기록한 서적이라야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이라는 레자는 물론이려니와, 독립이라는 독자도 없을 것은 나의 전공하는 학과만 보아도 알 것이었다. 아니, 설령 내가 볼셰비키에 관한 서적을 몇백 권 가졌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거나, 그것은 학문의 연구라 물론 자유일 것이요, 비록 독립사상을 가진 나의 뇌 속을 X광선 같은 것으로나 심사법(心寫法)으로 알았다 할지라도, 행동이 없는 다음에야 조사하기로 소용이 무엇인가―---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한 것이지만 그 당장에는 하여간 무사히 방면되어 배에 오르게 된 것만 다행히 여겨 궐자들과 같이 허둥지둥 행구를 수습하여 가지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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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가볍게 하여 준 트렁크를 두 손에 들고, 어서 올라오라는 선원의 꾸지람을 들어 가며 겨우 갑판 위에 올라서자, 기를 쓰는 듯한 경적과 말울음〔馬嘶〕소리 같은 기적 소리가 나며 신경이 자릿자릿한 징〔鉦〕소리가 교향적으로 호젓이 암흑에 싸인 부두 일판에 처량하고도 요란하게 울리었다. 배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 벌써 두어 간통이나 잔교에서 떨어졌다. 전송하러 온 여관 하인들이며 인부들의 그림자가 쓸쓸한 벌판에 성기성기 차차 조그맣게 눈에 띄고 선창 위에서 휘두르며 가는 등불이 쓸쓸한 바람에 불리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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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실로 들어갈 생각도 없이 으스름한 갑판 위에 찬바람을 쐬어 가며 웅숭그리고 섰었다. 격심한 노역과 추위에 피곤하여 깊은 잠에 들어가는 항구는, 소리 없이 암흑 속에 누웠을 뿐이요, 전시의 안식을 지키는 야광주는 벌써부터 졸린 듯이 점점 불빛이 적어 가고 수효가 줄어 가면서 깜박깜박 졸고 있다. 나는 인간계를 떠나서 방랑의 몸이 된 자와 같이 그 불빛의 낱낱이 어떠한 평화로운 가정의 대문을 지키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할 제, 선뜩선뜩하게 반짝이는 별보다도 점점 멀리 흐려 가는 불빛이 따뜻이 보였다. 나의 머릿속은 단지 혼돈하였을 뿐이요, 눈은 화끈화끈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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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포켓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어느 때까지 우두커니 섰는 내 눈에는 어느덧 뜨끈뜨끈한 눈물이 비어져 나와서, 상기가 된 좌우 뺨으로 흘러내렸다. 찬바람에 산뜩산뜩 스며들어 가는 것을 나는 씻으려고도 아니 하고 여전히 섰었다.
【 】만세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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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게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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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萬歲前)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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