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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2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924년 8월
염상섭
1
반찬 찬합같이 각다구니를 여기저기 함부로 벌여놓고 꼭꼭 끼여 앉았는 틈에서 겨우 잠이랍시고 눈을 붙였다가 깨니까, 아직 동이 트려면 한두 시간이나 있어야 할 모양. 찻간은 야기에 선선하면서도 입김과 담배연기에 흐렸다. 다시 눈을 감아 보았으나 좀처럼 잠이 들 것 같지도 않고, 외툿자락을 걸친 어깨가 으스스하여,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고 나서 선반에 얹힌 정자가 준 보자를 끌어내렸다. 아까 받아 얹을 때에 잠깐 보니까 과자상자 위에 술병 같은 것이 두두룩이 얹혀 있는 것 같아서 긴하게 생각이 든 것이다. 네 귀를 살짝 접어서 싼 보자의 귀를 들치고 보니까 과연 갑에 넣은 위스키병이 얹히어 있다. 어한으로 한잔 할 작정으로 병을 쑥 빼려니까 갸름한 연보랏빛 양봉투가 끌리어 나왔다.
2
‘별안간에 편지는 무슨 편지인구…….’
3
그래서 나중에 펴보라고 한 것이라고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포켓에 집어넣고 술부터 따라서 한숨에 켰다.
4
영리한 계집애요 동정할 만한, 카페의 웨이트리스로는 아까운 계집애다라고 생각은 하였어도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정열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값이면 정자를 찾아가서 술을 먹는 것이요, 만나면 귀여워해 줄 뿐이다. 원래가 이지적, 타산적(打算的)으로 생긴 나는, 일시 손을 대었다가 옴칠 수도 없고 내칠 수도 없게 되는 때에는 그 머릿살 아픈 것을 어떻게 조처를 하나? 하는 생각이 앞을 서는 동시에, 무슨 민족적 감정의 구덩이가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아니라도, 이왕 외국 계집애를 얻어 가지고 아깝게 스러져 가려는 청춘을 향락하려면 자기에게 맞는 타입을 구하겠다는 몽롱한 생각도 없지 않아서 그리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생기가 났다느니보다도 세찬 삼아서 사다 준 숄 한 개가 인연이 되어 편지까지 받게 되고 보니, 막연히 반갑다는 정도를 지나서 좀 실답게 자기 태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귀엽다고는 생각하였지마는 연애를 해보려는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물론 목도리 한 개로 환심을 사려는 더러운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애욕이 타오르면 그런 것을 사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젊은 여자와 어울려 노는 것은 좋으나 그 이상 깊게 끌려 들어갔다가 자기 생활에 파탄을 일으키고 공연한 고생을 사서 할까 보아 경계를 하는 자기다.
5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두어 잔 술을 마신 뒤에 비로소 편지를 꺼내서 피봉을 들여다보았다. 침착하고도 생기 있는 정돈된 필적은 그 애의 모습과 같이 재기가 발리어 보였다. 나는, 앞사람은 졸고 앉았지만 누가 보지나 않을까 하고 좌우를 돌려다보며 그래도 궁금증이 나서 쭉 뜯어보았다.
 
6
지금은 이런 편지를 올릴 기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이 지경이기로 물질로 좌우되는 천착한 계집이라고 생각하실 것이 너무도 창피하고 원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에…….
 
7
이렇게 허두를 내놓고 나의 실답지 않은 태도에 대한 불만과 공격이 있은 다음에, 자기의 지금 처지와 장래에 대한 희망 등을 요령만 간단히 쓴 뒤에, 형편 따라서는 세말쯤, 혹은 경도의 고모 집으로 갈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8
나는 한번 쭉 보고 나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소거나 나에게 대한 이 여자의 신뢰에 대하여 만족한 미소는 아니었다. 애를 써 설명하자면, 그 계집애의 조리가 정연한 이론과 이지적이요 명민한 그 애의 머리에 만족을 느꼈다 할까?
9
나는 곧 답장을 써볼까 하다가, 하나 둘씩 일어나 앉는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아서 그만두어 버렸다.
 
10
……왜 우롱을 하세요? 무슨 까닭에 농락을 하세요? P자와 저를 놓고 희롱하시는 것은 유쾌하시겠지요. 그러나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 말씀과 같이, 사랑은 유희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11
……누가 당신께서 손톱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혹시는 모욕입니다. 당신의 태도가 그밖에는 어떻게 할 수 없으시면 우리는 이 이상 교제를 끊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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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자의 제일 큰 불평이었다. 정자는 자기의 과거를 한만히 이야기하지는 않으나, 흔히 있는 계모시하의 불화와 부친의 몰이해에다가 실연이 한꺼번에 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좀체 거기에 휘어 넘어가지 않고, 앙버티고 현재의 경우에서 제 손으로 헤어나려고 허비적대는 그 심보가 취할 점이요 동정이 가는 것이다. 지금도 책을 보는 모양이지마는 문학에 대한 감상력이 호락호락히 볼 것이 아닌 데에 나는 귀엽고 경애를 느끼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어떻게 붙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공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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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하고 키스를 하면서도 침맛을 아는 놈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부터 틀린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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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며, 아까 M헌 이층의 광경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모욕이란 의식부터 머리에 떠올랐다는 말이나, 제 말마따나 이때껏 한 남자의 입밖에는 몰랐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정자는 그래도 아직은 행복하다. 침맛을 알아내지 않는 것만도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할 제 사람의 행복은 사람다운 정조를 잃지 않는 데 있는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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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는 이때껏 연애다운 연애를 하여 본 일도 없으면서 청춘의 자랑이요 왕일한 생명력인 정열이 말라 버린 것은 웬 까닭인가. 하여간 성격이 기형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이것은 정열을 식히는 첫째 원인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타락이다. 하지만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는 정열을 억제하여야 할 필요도 있으니까, 반드시 성격이 뒤틀렸다거나 인간성이 타락하여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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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를 살린다는 것이 자기의 비열한 쾌락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을 우롱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정열이 없으면 없을 뿐이지, 그렇다고 사람을 우롱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우롱한다는 것은 몰염치한 이야기다. 사람을 우롱하는 것은 인생을 유희함이라는 의미로서 결국에 자기 자신을 우롱하고 유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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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까닭에, 자기는 굳세고 높게 살리겠다면서 가련한, 저 갈 길을 찾겠다고 발버둥질치는 불쌍한 여성을 농락하려는가? 사실 말하자면 오늘까지 나의 정자에게 대한 태도는 실없었다. 저편이 나를 범연히 생각지 않았다면 더욱이 불쾌하고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책망일 것이다. 그러나 정자 자신이 얼마나 실답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는 누가 알 일인가? 사랑이니 무어니 머릿살 아픈 노릇이다마는 세상이 경멸하는 조선 청년에게 그런 호소를 하고 오는 것은 실연을 한 일본 남성에게 대한 반항이라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누웠다가 숨이 괴로워서 벌떡 일어나서 데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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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의 전등은 아직 아니 나갔으나, 젖빛 같은 하늘이 허예져 가며, 인기척 없이 꼭꼭 닫은 촌가가 가끔가끔 눈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동은 벌써 튼 모양이었다. 아침 바람이 너무도 세어서, 나는 무심코 외투깃을 올리며 머리를 식히고 섰다가,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들어와 자기 자리에 드러누웠다.
19
한 두어 시간이나 잤을지, 사람이 너무 붐비는 바람에 잠이 깨어서 눈을 뜨고 내다보니, 기차는 플랫폼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가는 모양. 나는 일어나기가 싫기에 지금 바꾸어 들어와 앉은 앞자리의 사람더러 예가 어디냐고 물어 보니까, 명고옥(名古屋)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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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인제야 나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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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같이 놀란 듯이 반문을 하고, 암만하여도 중도에서 하루 묵어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채 결심도 못 하고 또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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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보니, 기차는 아직도 기내지방(畿內地方) 어귀에서 헤매는 모양. 시간표를 들쳐 보니 경도에서 내리려면 아직도 세 시간, 신호(神戶)에서 묵어 간다면 다섯 시간 가량이나 있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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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乙羅)나 가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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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신학기에는 동경 음학 학교로 전학을 하겠다고 규칙서를 얻어 보내라고 한 을라의 부탁을 이때껏 월여나 되도록 답장도 아니 한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것은 나의 태만도 태만이거니와 만 일 년간이나 음신이 끊였었던 오늘날에 불쑥 편지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또다시 서신을 왕복하는 것은 피차에 머릿살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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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나면 어떤 얼굴로 볼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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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턱에 기대어 앉아서 방울방울 방울을 지어 올라가는 담배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가장 정숙한 듯이, 가장 부끄러운 듯이 꾸미는 을라의 팔초한 하얀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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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히스테리가 좀 낫나? 병화하고는 어떻게 되었누? 그러나 내게 또 불쑥 규칙서를 얻어 보내란 핑계로 편지를 한 것을 보면, 어떠면 별일은 없이 흐지부지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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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별안간에, 이왕 고단해서 내릴 바에는 신호에서 내려서 을라를 찾아보려는 객기가 와락 나서, 또다시 시간표를 뒤적거리며 누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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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개를 틀면서 그럭저럭 또 네 시간 동안을 멀미를 내고, 겨우 감방에서 풀려 나오듯이 삼등 찻간에서 해방이 되어 신호역두에 내려선 것은, 은빛같이 비치는 저녁해가 육갑산(六甲山) 산등성이에 걸리었을 때이었다. 큰 가방은 역에다가 맡겨 두고, 오글오글 끓는 정거장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니 사람이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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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의 반연으로 중학교를 이 지방에서 마친 나는 을라를 만나는 것보다도 이 지방이 반갑기도 한 것이다. 전차에 올라탈까 하다가 저녁이나 먹고 나서 을라에게 찾아가리라 하고 원정통으로 향하였다. 작년 방학에 들렀을 때 놀던 생각을 하고, A카페의 아래층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옹기종기 앉았는 다른 손들을 피하여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세 접시나 다 먹도록 작년에 보던, 두 팔을 옥여쥐고 아기족아기족 돌아다니던 그때의 그 계집애는 보이지 않았다. 차를 가지고 온 계집애더러 물어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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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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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의미 있는 듯이 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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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딜 갔나? 그저 여기 있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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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언제 만나 보셨에요?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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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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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극락 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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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실망이라느니보다도 놀랐다. 작년 여름방학에, 올 적 갈 적 두 번이나 들른 것은 을라 때문도 있고, 고등상업에 있는 중학 동창과 노는 맛에 그랬지마는, 그 계집애가 끄는 힘이 더 많았던 것이다. 별일 있었던 것은 아니요, 그저 만나고 마시고 먹고 노닥거리는 재미로이었지마는 퍽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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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무슨 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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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탄 정사라는 파천황의 죽음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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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계집애는 깔깔 웃다가, 다른 손이 부르니까 뛰어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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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탄 정사라는 말에 귀가 번쩍해서, 그 계집애가 다시 오기만 어느 때까지 기다려도 돌아본 체도 아니 하고 분주히 돌아다닌다. 기다리다 못하여 불러 가지고 셈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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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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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물어 보았으나, 내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알아보는 점이 있었던지 생글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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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너무 좋아 그랬죠! 또 오세요. 이야기를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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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바쁜 듯이 팔딱팔딱 신 소리를 내며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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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것은 알아 무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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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도 그 상냥하고 원만한 성격에 홀딱 반한 놈이, 사업에 실패나 하고 자살하려는 길에, 무리 정사를 하는 것은 일본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자 생각이 났다. 그러나 정자는 현대여성이다. 그런 어리보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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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나온 나는 하여간 갈 데가 없으니 C음악학교로 향하였다. 실상은 완행이 하도 지리해서 내렸을 뿐이지 을라를 꼭 찾아보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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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으나 밤은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저녁 뒤의 연습인지 아래층 저 구석에서 은근하고도 화려하게 울리어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숙사 문간에 섰으려니까, 을라는 기별하러 들어간 여하인의 앞을 서서, 발을 벗은 채 통통거리며 이층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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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웬일예요, 소식두 없이! 어서 올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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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할 말을 미리 생각하였던 사람처럼 이렇게 한마디 한 을라는 미소가 어린 그 옴폭한 눈으로 힐끗 나를 쳐다보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태연히 문설주에 기대어 섰다. 나는 빨간 끈이 달린 발 째진 짚신 위에 가벼이 얹어 놓은 하얀 조그만 발을 들여다보며, 구두끈을 풀고 올라서서 을라의 뒤를 따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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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은 추우니까 내 방으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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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아까 내려오던 층계를 지나서 끌고 들어가다가, 잠깐 섰으라고 하고 사감의 방인지 들어갔다. 방문을 열어 놓은 채 꿇어앉아서 무어라고 한참 재깔재깔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나와서 이층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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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를 함부루 끌어들여도 상관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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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를 한구석으로 뚤뚤 말아서 밀어 놓은 것을 돌려다보며 이렇게 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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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그렇지만, 혹시 이따가 사감이 들어오더라도 서울서 오는 오빠라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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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꾸어다박은 오빠 노릇은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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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없는 소리를 정색으로 하며, 을라가 권하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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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지금 조선 나가시는 길예요? 방학 때두 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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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방 안에 늘어놓인 것을 부산히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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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을 치러 나가는지? 또 한번 사모 쓸 일이 있어 좋아서 나가는 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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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코웃음을 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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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씨가 앓으시는군? 그 안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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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을라는 놀라는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서, 그 윤광 있는 쌍꺼풀진 눈귀를 처뜨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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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급한 길에 여기를 왜 내리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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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좀 나무라는 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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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두 만날 겸, 후보자두 선을 볼 겸……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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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어떠한 태도로 대하게 될지 작년 일을 생각하면 어금니에 무에 끼인 것같이 거북하고 근질근질한 것 같더니, 마주 앉고 보니 의외로 소탈하게 이런 실없는 소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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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혀! 아씨가 운명도 하기 전에 선보러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예요? 그래 선을 보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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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보러 왔더니, 폭발탄 정사를 했다니 기가 막히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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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 양반이 일년 동안에 이렇게두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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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수줍던 내가 이런 실없는 소리를 탕탕 하는 것이 을라의 눈에는 이상히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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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이번 방학에는 나갔다가 들어오려는데, 같이 가셨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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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데 그거 좋지! 그러나 이 밤으루 준비되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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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으룬 좀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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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곧 따라 나서고 싶은 듯이 눈에 영채가 돌며 생긋 웃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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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병환이 급하지 않거든 내일 하루만 더 묵어 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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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양스럽고 의논성스럽게 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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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할 일이 있어야지. 모처럼 만나려던 사람은 정사를 해버렸구! 나도 정사라도 하겠다는 사람이나 있으면 묵을지 모르겠지만, 허허허…….”
80
“참 변한다 변한다 하니 인화 씨같이 변하신 양반이 어디 계세요. 아아, 참…….”
81
을라는 급작스레 무엇에 충격을 받은 듯이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을 직각한 나는, 얄밉기도 하고 일종의 모욕 같은 생각도 나서,
82
“왜 실연한 남자의 타락한 꼴을 보는 듯싶소?”
83
하고 나는 커닿게 웃다가,
84
“나보다는 을라 씨야말로 참 변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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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비꼬아 보았다.
86
“무엇 땜에? 어디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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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이 들어가느라구! 혹은 예술가로 대성하느라구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88
“세속물도 들겠지만, 그렇다면 예술가로 대성하는 것과는 정반대 아닌가요?”
89
“그러게 말씀이죠! 연애도 예술적으로 청고(淸高)하게는 안 되는 것인지?”
90
“매우 로맨틱하시군!”
91
하고 을라는 냉소를 하다가,
92
“어쨌든 참 정말 모레쯤 나하구 같이 가세요. 같이 못 가시더래두 내일 오후부터는 자유니까 이야기할 것도 있고, 구경도 시켜 드릴게…….”
93
외로운 객지에서 단조하고 이성이 그립던 그때의 을라에게는, 나의 불시의 방문이 의외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반가웠던 모양이다.
94
“글쎄 그래두 좋지만, 작년과도 달라서 여기에는 인제는 친구가 없으니…….”
95
나는 을라를 위하여 이틀씩 묵기는 싫었다.
96
“아, 참, 내일은 어차피 대판 공회당 음악회에도 갈까 하는데요. 거기에라도 가시지. 내일은 학생들이 죄다 제 집에 가버릴 텐데…….”
97
을라가 왜 이렇게 지성껏 붙들려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절간에 있을 제 일본 중놈하고라던지, 향기롭지 못한 소문이 퍼졌다는 말이 머리에 떠올라 와서 불쾌한 연상이 일어났다.
98
“그럼 내일 함께 떠나십시다그려…… 한데 요새 병화군 소식 들으슈?”
99
나는 을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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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루 소식 없에요. 내가 그 언니한테 편지를 하면 답장이 올 뿐이지. 사실은 이번에두 그 언니 답장을 기대리구 있는 판인데…….”
101
조금도 거리낌없는 이런 대답을 을라에게서 듣는 것은 좀 의외였다.
102
“왜? 학비라두 대어 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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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이 노골적으로 수작을 붙이기에 나도 직통 대고 쏘아 보았다. 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 그런 말눈치를 귓결에 들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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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비는 무슨 학비! 하두 꿀릴 때면 몇십 원씩 올 일년내 두세 번 꾸어다 쓴 일두 있구, 방학에 나갔다가 들어올 제 노잣냥 언니가 보태 주기에 받아 가지고 왔을 뿐이지! 인화 씨부터두 그런 데에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 밖에야 오해받을 일이라군 손톱만큼도 없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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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하는 을라는 분연한 어조이었다. 내가 오해하는 듯한 것이 불쾌하여 이 사품에 변명을 하려는 말눈치거니와, 이번도 나갈 노자를 변통해 달라고 편지를 해놓고 기다리는 모양 같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혹은 그럴지 모르겠고, 내일이면 방학이라는데 하루를 더 기다려서 같이 가자고 애걸을 하는 것도 노자 때문인 듯싶다. 그렇다면 조금 절약을 해서 서울까지 데려다주고도 싶으나, 병화와의 교제가 그뿐이거나 말거나, 이제는 그런 친절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다고 돌려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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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가 신호로 온 것이, 내가 신호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동경으로 간 뒤이기 때문에 작년 여름방학에 들렀을 때 만난 것이 처음이지마는, 을라의 이야기는 전부터 병화댁에게 들었던 것이다. 을라가 병화댁과의 한반 아래인 동창생이요, 둘이 여학교에서부터 친한 사이인 관계로 병화 집을 제 집같이 드나들고, 학비가 부족한 때면 편지질을 해서 취해 쓰는지도 모르겠으나, 작년 여름방학에 신호에서 만나서 놀다가 함께 서울로 나가서는 의외로 설면하여졌던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퍽 재미있게 지냈었다. 실상은 내가 너무 솔직했던 때문인지도 모르지마는 차차 눈치가 다른 것을 보고는 나는 일체 교제를 끊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내가 지나치게 신경과민한 지레짐작을 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오해이었거나 말거나, 지금 새삼스럽게 구의(舊誼)를 이어 보고자 여기 내린 것은 아니다. 다만 어째 내렸든지 간에 내린 바에는 을라를 안 만나고 간다는 것도 인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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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고단해서 어서 가서 누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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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 이야기가 나오니까 피차에 흥이 빠지는 것 같아서 나는 일어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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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내리셨다가 이렇게 섭섭하게 가셔서 어떻게 해요. 내일 아침에 못 떠나시거든 오정때까지 기다릴 테니 들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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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라는 문간까지 나오면서도, 나를 이대로 놓치는 것을 섭섭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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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서울 가서 만나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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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난 나는 정자나 카페 여자들에게 하던 버릇으로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을라는 얼굴이 살짝 발개지며 생긋 웃으며 주저주저하는 눈치더니 손을 내밀어 꼭 붙든다.
113
장난이 아니라 을라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느니보다도 보통 친구나 같은 뜻으로 악수를 청해 본 것이나, 그래도 컴컴한 거리로 나오도록 내 손바닥에는 여자의 따뜻한 살 김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 】만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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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萬歲前)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2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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