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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紀行 南漢山城 (기행 남한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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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4.
박종화
삼천리 제12권 제4호 (발행일 : 1940년 04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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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이 영특하고 준수한 남성미를 가진 호방한 산이라면 南漢山은 부드러웁고 평범하면서도 어느 구석 느긋하고 너글너글한 맛을 주는 어머니 젖가슴 같은 모성애를 가진 믿엄성스런 듬직한 산이다. 산 모양은 마치 사깟을 재처 논 것과 같기 때문에 옛 사기에 그 형상이 仰笠과 같다 한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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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북에 萬丈의 氣焰을 배앝으며 우줄거려 소슨 鎭山 北漢山과 띄같은 푸른 물구비 南北漢江 물을 가운데로 두고 동남에 아리잠직 靑黛를 눈섭에 지운 듯 둥두렷이 구름 밖에 누어 바다 같은 蒼穹을 손질해 부르는 南漢山은 한 쌍의 좋은 부부 같은 대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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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과 南漢山은 키가 또한 부부다웁게 걸맞게 차이가 지니 北漢山의 키는 해발 836米突이나 되는 수얼치 않은 높이지만은 南漢山의 키는 453米 밖— 되지 않으니 역시 南漢山이 北漢山에 비하여 여자다운 겸양의 덕을 가젔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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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의 별명을 三角山이라 부르드키 南漢山의 *명을 日長山이라 불은다. 東國輿地勝覽을 찾어 보면 「日長山은 廣州 南 5리에 있으니 일명은 南漢山이라」 하였고 따로이 「日長山城은 新羅시절의 畫長城인 바 文武王의 축조다.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으며 주위가 86,800척이요, 높이가 24척의 石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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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보면 新羅가 百濟를 병합한 뒤에는 南漢山에 산성을 쌓고 畫長山城이라고도 불은 것이다. 다음에 三國史記를 참조해 보면 『溫祚王 13년에 왕도의 늙은 할미化하여 산아히 되고 다섯 호랑이 성에 들어오며 王母가 薨하거늘 왕이 신하에게 일으는 말슴이 「국가의 동편엔 樂浪이 있고 북편엔 靺鞨이 있어 변방을 침노하야 편안한 날이 없는 중, 허물며 이 사이는 요물이 자주 뵈이고 국모조차 돌아가시니 형세- 편안치 못한지라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기려니와 내, 어제 漢水 남편을 순시해 보니 땅이 기름지고 좋은지라 마땅이 그 곳에 도읍하여 써 오래 편안함을 도모하리라 하고」 7월에 漢山에 나아가 柵을 세워 慰禮城의 民戶를 옮기게 하고 9월에 城闕을 세우다』 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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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보면 新羅가 南漢山에 畫長城을 쌓기 이전 675년에 百濟는 河南 慰禮城 곧 지금 稷山에서 漢江 남안인 南漢山城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廣州 古邑에 도읍을 정하였든 것이다. 邇來 近肖古王이 北韓에 도읍을 옮기기까지 근 400년 동안 南漢 廣州는 百濟의 서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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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커나 南漢山은 北漢山과 함께 길고 긴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크나 큰 고적의 터로 저 新羅의 慶州, 高句麗의 平壤城과 어울려 솟발같이 삼국시대를 일우어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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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 2000년, 역사의 책장을 뒤적여 보면 이 곳에 활시위가 울고 말굽 소리가 요란하여 번적어리는 긴칼 날카로운 蛇矛鎗으로 龍驤虎搏 丈夫의 피를 뛰게 하는 크나 큰 전쟁 수효만이 40여 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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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세에 들어와 최후의 잊지 못할 전쟁, 씻지 못할 哀史는 李朝 仁祖王때 丙子胡亂의 구슬픈 전쟁 南漢 籠城이 그것이다. 누구나 南漢山을 찾는 이로 이 구슬픈 이야기를 듣고, 회고의 눈물을 자아내지 아니하고 백일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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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山은 百濟의 古都로도 이름이 높으려니와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丙子胡亂이 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의 가슴을 뛰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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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朝 仁祖大王 14년 丙子에 滿洲 일각에 새로이 불붙듯 일어난 愛親覺羅 누루하치(弩爾哈赤) 金國은 그 아들 홍타시(皇太極, 또는 洪多時) 때에 일으러 국호를 大淸이라 하고 한(汗)은 스스로 황제라 일커르매 崇德이라 年號를 고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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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朝鮮에는 왕비 仁烈王后 韓씨가 승하하신 때라 滿洲에서는 그해 2월에 국상을 吊表한다 표명하고 使者 龍骨大 副將 馬保大는 從卒 190여명을 거느리고 朝鮮에 나왔다. 그들은 한편으로 吊喪을 표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大淸 황제를 또는 신흥 淸國을 국제적으로 승인한 뒤에 朝鮮도 이 淸國에 귀의하여 藩臣 노릇을 하라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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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朝鮮 조정이 淸國을 보는 안목은 극히 오만하였든 것이다. 여태것 淸國은 일개 建州衛野人의 무리 오랑캐로 太祖, 太宗 이래에 여러번 조공을 들어 왔든 허잘 것 없는 눈 아래 보는 무리이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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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야인의 족속으로 세월이 바뀌고 시세가 다르다 할망정 별안간 황제요, 천자라는 것은 기맥히는 소리였다. 더욱이 朝鮮으로 하여금 藩臣 노릇을 하다싶이 하라 하니 될 번이나 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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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조정 의론은 물 끓듯 일어났다. 掌令 洪翼漢은 淸使 龍骨大를 목 베이자 주장하고 弘文館, 司諫院은 모든 학사와 諫官들도 들고 일어나 「홍타시」의 글을 불사른 뒤에 宣戰을 포고하자 날뛰였다. 모도 20과 30 熱血 義氣의 젊은 사람이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앞뒤를 돌아보고 料量해 볼 노숙한 정치적 요량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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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 大王도 마침내 여론에 휩쓸려 *서는 받지 않고 吊祭만은 아니 받을 수 없다 하여 禁橋에 헛장막을 치게 하고 허위로 吊喪을 받게 하였다. 龍骨大의 從者가 하도 많고 하는 수작이 당돌하니 대궐 안에 들였다가는 무슨 사변을 일으킬가 염려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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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骨大도 몇일 묵는 동안에 朝鮮 조정의 물 끓듯 일어나는 여론을 모르지는 아니했다. 좌우간 나온 길이니 국서 전달은 고만 두드라도 吊喪이나 하려 하였든 것이다. 이때만해도 그들은 朝鮮의 실정에 어둡기 때문에 꽤 朝鮮을 두려워 했든 것이다. 급기야 致祭를 들이러 吊祭場에 당도해 보니 吊祭場은 대궐이래야 할 것이 금충교 다리 위요, 祭床 交椅에는 허위다. 三拜 九叩頭 절을 하면서도 잔득 의심을 품고 있는 중에 바람에 펄덕 帳 자락이 움직이매 장막 뒤에는 무기를 가진 刀斧手들이 埋伏하여 있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의 혹시 龍骨大들이 난을 일으킬가 저허하여 미리 감추어 두었든 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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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득 겁을 집어먹고 있든 淸使 龍骨大는 그대로 곧 자기네를 죽이려한 줄 直覺하고 올리는 술잔을 동댕이 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러나기 시작했다. 龍骨大가 달아나니 馬夫大도 뛰였다. 두 장수가 뛰여가니 從者 수백명도 영문을 몰으고 놀래 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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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대가 뛰고 마부대가 뛰고 從卒들이 뛰니 삼지오겹 둘러 섰든 구경군도 놀래 뛰였다. 다러나는 淸使들을 향하여 조물아기 아이들은 돌풀매를 던젔다. 뒤에서 악 소리가 나며 돌 풀매가 비 오듯 쏘다지니 淸使들은 더욱 황급했다. 줄다름질을 주어 무악재 근처에서 말 한필식을 빼서 타고 도망질 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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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丙子胡亂을 일으켜 논 첫 도화선이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仁祖大王도 허는 수 없었다. 八道에 諭文을 노아 「누루하치」와 절교한다는 뜻을 변방 장수들에게 네리였다. 淸使들은 도망하는 도중에서 備邊司에서 平安 監司에게 보내는 斥和하는 諭文 한 장을 증거거리로 빼아서 가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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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시」 滿洲는 朝鮮의 결의를 알자 일거에 朝鮮을 정벌하기로 된 것이다. 「홍타시」는 친히 滿洲, 蒙古, 漢兵 등 1만명을 거느리고 鴨綠江 어름이 얼기를 기다려 朝鮮을 범하니 선봉은 「마부대」 「용골대」요, 中軍은 淸 太宗 「홍타시」요, 후군은 豫親王 등이였다. 丙子年 섯달 12일 義州 府尹 林慶業의 狀啓가 파발 말방울 소리 요란하게 서울에 들어 왔다. 아흐레날 淸軍이 鴨綠江을 지럼길로 건넜다는 것이다. 열 사흣날 都元師 金自點의 馳報가 들어왔다. 물 밀듯한 대군은 벌서 安州 지경에 일으렀다는 것이다. 열나흣날 松都 留守는 또 다시 파발 말을 띠웠다. 적병은 벌서 松都를 지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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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번 막어 보지도 못 하는 적군은 조수 물 밀듯 호호탕탕이 삽시간에 長端, 高陽, 京城을 향하고 몰려 들어왔다. 조정은 낭패하고 성 안은 물 끓듯 뒤엎었다. 백성들은 난리가 처들어 온다는 바람에 아무런 심산도 없이 다투어 통곡하며 성문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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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는 禮房 承旨 韓興一에게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봉안하여 原任 大臣 尹昉金尙容에게 護從하게 하고 金慶徵으로 江華 檢察使 李敏求로 副檢察使를 식히여 嬪宮(세자비 姜씨) 元孫, 鳳林大君麟坪大君과 공주, 옹주, 부마들을 호위하여 江華로 먼저 피난케한 뒤에 京城은 留都 大將 沈器遠에게 방어케 하고 당일 오후에야 仁祖大王은 세자 저하와 함께 빈궁의 뒤를 쫓아 江華로 납시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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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슬프다, 때는 이미 수라장이 된 판이라, 천승의 몸이연만 탈 만한 말 한필 없고 호위할 武藝 別監 한 명도 없었다. 손을 묵거 발을 굴으는 동안에 內乘 李星男이 겨우 말 한필을 얻어 와서 견마 잡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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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한 편으로 淸軍의 선봉은 양철이 벌판(高陽郡 恩平面 大棗里 南)을 지내 벌서 앞잡이는 弘濟院에 일으니 長湍 府使 黃稷이 꼴 사납게 멀이 깍기고 胡服을 입힌 채 嚮導官이 되어 왔고, 一技隊는 어느 틈에 陽川江에 진을 치고 江華로 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仁祖大王은 허는 수 없이 南大門 門樓에 玉駕를 멈으시고 대장 申景禛은 문 밖에 結陣하니 성 중에 부자 형제 부부 죄없는 허다한 백성들은 서로 부터 않고 통곡하여 구슬픈 울음 소리 성 안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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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大王은 급히 몇 사람 안 되는 扈從한 신하에게 대책을 물으섰다. 鐵山 府使 池如海는 칼을 집고 어전에 구부려 나아가 적병이 국경을 넘은 지 겨우 3일에 천리 먼 길을 몰아처 왔사오니 군사와 말들이 모두 다 피로했을지라 포수 500을 가저 모래재(현금 峴底町 부근)에 迫擊하여 선봉을 鏖殺하면 銳氣- 꺽기여질 것이요 이 틈을 타 전하께서는 江華로 향하시면 만전의 책일 듯 하오니 원컨대 신에게 精砲手 500명만 주시옵소서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침묵해 버렸다. 호호탕탕한 적병을 500 군사로 막어 낸다는 것이 믿엄성스럽지 못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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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曺判書 崔鳴吉이 어전에 엎드려 자기는 單騎로 적진에 나아가 출병한 이유를 뭇기도 하고 牛肉과 酒肴로 군사를 犒饋하는체 하여 시간을 허비할 터이니 이 틈을 타 主上은 南漢山城으로 빨리 듭시여 모든 戰備를 준비하라 아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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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大王은 崔鳴吉의 말을 쫓아 기개가 있다는 李景稷을 副使로 하고 禁軍 20명은 주어 崔鳴吉을 호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弘濟院으로 가는 도중에 禁軍 20명은 죽음을 두려하여 뿔뿔이 다 헤여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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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大王은 崔鳴吉이 적진에 나아가 말씨름으로 시간을 지체시키는 동안에 車駕를 돌리켜 南漢으로 향하니 세자 저하의 견마 잡을 從者 한 명도 없었다. 세자는 손수 챗죽을 들어 말을 갈기며 대왕의 뒤를 따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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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개(黃金町 1丁目)를 지내 시구문(光熙門) 밖을 나서니 성 중안 士女는 맨발로 호곡하며 王駕를 따러 뛰여 들어섰다. 申時에 신내와 (新川, 현 高陽郡 *島面 新川里) 松坡江을 건너 戍時가 넘고 亥時가 지난 뒤에야 겨우 南漢山城에 도달했다. 비참하다. 이때 扈從한 신하는 겨우 열명 뿐이다. 이것이 모두 丙子年 섯달 열 나흣날 밤까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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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의 御駕가 확실히 南漢으로 播遷하신 줄을 안 뒤에야 百官들은 둘식 셋식 모여 들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어전 회의가 열렸다. 영의정 金瑬는 南漢이 이로운 땅이 되지 못하니 미복으로 물래 江華로 빠저 나가시기를 주장했다. 상감은 이튼날 첫 새벽에 산성 군졸을 검열하신다 핑계하고 산성 남문 밖을 나서니 눈 녹은 산 길엔 어름이 유리 같이 깔리여 말굽이 떠러지지 아니 하였다. 상감은 허는 수 없이 도보로 바위 길을 기어 나리시니 밋그럽고 발 끝이 시려 寸步를 옮길 수 없는 중에 간밤에 부르튼 발뿌리는 다시 더 꼼작을 하실 수 없었다. 디디여 籠城하기를 결심하시기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 오시니 외로운 孤山 南漢山城을 사수하자는 비장한 결의가 게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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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 돌아온 상감은 친히 將臺에 올라 산성 군사를 격려하는 告諭를 내리시고 술과 안주를 멕여 犒饋한 뒤에 일일이 군사들의 춥고 배곰흔 것을 하문하시니 士卒들은 감읍해 울고 장수는 칼을 뽑아 한번 싸우기를 원치 않는 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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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산성에 딸어온 문무백관은 200여인이요, 종실과 醫局員 등이 200여명이요 노복이 300여인이요 軍兵이 13,800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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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안에 저장 되어 있는 물품은 백미와 皮雜穀 얼러서 겨우 1만 6천여석이요 은이 7,600여냥이요 醬이 200여석에 소금이 90여석, 화약이 18,000근 뿐이다. 1만 3,4천명 사람이 겨우 한 달 남짓 먹을 만한 곡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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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튼 날인 섯달 열 엿새 날에는 벌서 적군의 선봉 「마부대」는 南漢山城에 군사를 대치해 놓았고 京城 성 밖에 멀리 피란하지 못한 士族과 서민의 부녀들은 모도 다 적군 손에 약탈되어 어미는 진 중에 강박하여 멈을러 두고 어린애들은 진 밖에 버리니 嚴冬雪寒 치운 때라 어린이의 사체가 즐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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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에 朝鮮 군사는 몇 번인지 惡戰苦鬪 싸우고 싸웠다. 그러나 시세는 이롭지 못했다. 마침내 主戰 斥和를 부르짖는 洪翼漢, 吳達濟, 尹集 三학사가 나오고, 雍容이 主和함을 주장하는 崔鳴吉이 나서고, 국서를 찢는 천고의 의기 용아 金尙憲이 나오고, 伏劍而死를 못 했다고 배를 찔러 한탄하는 鄭蘊도 나오고 칼을 빼여 主和臣을 목 베자든 申翊聖 부마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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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빈 주먹 의기만으로 무슨 보람이 있을 리 없다. 정월이 썩 넘어서고 보니 산성 안에는 백가지 물건이 점점 군색해 들어갔다. 첫째로 말과 소멕일 꼴이 뚝 떠러젔다. 여름철 같으면 아무리 빨가버슨 산이라 하나 그대로 풀이 무성하여 馬糧草 걱정은 없으련만 嚴冬雪寒 어름과 눈이 케케히 쌓여 얼어 붙은 산골이라 검부 새끼 하나 구할래야 도리가 없다. 열흘씩 보름씩 먹지 못하는 마소들은 배 고프고 주린 것을 참지 못하여 그대로 턱턱 쓰러지고 자빠저 죽는다. 말과 소가 쓰러저 죽는 것을 보면 자기가 일찌기 사랑하여 멕여 기른 정 들여 논 짐승이언만 군사들은 다투어 가며 죽은 소와 말의 고기를 씹어 먹었다. 군사 역시 주리고 솟중이 나니 백여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빼빼 말라 죽은 소와 말이라 먹는대야 질긴 심줄과 봉투라지진 뼉다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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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저 죽지 않고 그래도 아직까지 목숨이 부터있는 牛馬들은 배 고프고 먹을 게 없으니 서로 꼬리와 꼬리를 뜨더 먹으며 으흥거려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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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와 백관들의 먹을 양식도 점점 줄어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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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스므 하로날 마침내 한(汗)은 친이 대군을 거느리고 선봉과 합세하여 南漢山城을 포위해 둘러 쌓었다. 이에 앞서서 一技 대대는 江華를 향하고 처들어갔다. 難攻不落이라고 믿고 믿었든 江華島도 소용이 없다. 얼지 안는 강물이라 배만 없으면 못 드러가리라 하든 江華島도 소용 없었다. 육지에서 배를 맨들어 가지고 어름 언 祖江에는 수레에 배를 실어 끌고들 들어가 江華 앞 바다에 띠웠다. 天府金湯을 믿고 코노래만 부르며 술타령하는 江華 검찰사 金慶徵은 한번 칼 한자루 빼여 보지 못한 채 一瞬 동안에 江華 왼 섬을 적군의 손 속에 넣어 버렸다. 종묘와 사직도 적군의 손에 들고 嬪宮과 元孫도 적군의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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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百士婦女는 다투어 수중의 孤魂이 되었다. 참담한 이 소식이 南漢山城에 들어가니 종묘, 사직을 버리신 상감도 상감이어니와 안해와 아들과 부모들은 江華로 보낸 文武百官이며 士卒들은 그대로 의기가 悄沈되고 맥이 풀여 벌였다. 통곡 一聲에 모두 다 기절된 듯하니 막막한 愁雲은 산성을 둘러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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籠城 격전 45일에 드디여 상감은 藍袍 玉帶(원래 紅袍가 정복이연만 항복하는 죄인이라 하여 藍袍을 입으시게 한 것이다.) 로 萬古 恨을 품으신채 三田渡 胡陣에 나아가 降書를 올리시니 실로 朝鮮史에 처음되는 천고의 屆辱이였다. 이 날 상감은 환궁을 허락하고 三學士는 斥和臣이라 하여 胡陣에 묵껴 가고 鳳林大君, 麟坪大君과, 세자 저하는 볼모로 瀋陽까지 가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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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근세사에 가장 구슬픈 南漢山城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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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볓이 다스럽고 가을 단풍 고을 녁에 短笻을 이끌어 廣津 橋畔에 나아가면 남으로 日長連山이 천공에 孤線을 그어 영기를 배아트며 가로 누었다. 이것이 바로 이 장황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南漢山城이다. 서울서 도보로는 60리요 근자의 간편한 교통기관을 이용한다면 東大門 軌道會社에서 廣壯里로 가는 기동차를 타고 廣津 津橋까지 나아가 風細里 土城이란 百濟의 유적을 구경한 뒤에 上一리 소학교 앞을 거처 新長里 德豐里를 지나 光池院까지 가서 동문(松岩亭)으로 해서 산성에 들어갈 수도 있고 좀 더 걸음을 아낀다면 서울 東大門에서 軌道車를 타고 *島에서 내려서 강가에서 松坡가는 똑닥선을 타고 언덕에 네려 松坡鎭에서 三田渡 한(汗)의 碑를 뜻 깊이 읽은 뒤에 바루 남문으로 들어서 산성에 들 수도 있고 아주 걷지를 아니하랴면 서울서 京電 뻐스나 탁시를 타고 앉으면 바로 산성 안 演武館까지 다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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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동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池水堂, 觀魚亭, 이 있고 오른편에 長慶寺, 顯節祠의 朱欄畵閣이 솔밭 사이 은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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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水堂은 顯宗 때 留守 李世華의 건축한 것으로 당 좌우에 세 곳 연못을 파고 이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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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연못이 둘밖에 남지 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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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魚亭은 池水堂 서편 첫째 연못 섬 속에 지은 六角堂이니 純祖 때 留守 金載瓚이 건설한 것으로 南漢忒에 金載瓚의 「觀魚亭 小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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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방 長慶寺는 일즉이 丙子胡亂 때도 일홈이 높든 長慶寺다. 開運寺, 長慶寺들의 아홉 군데 절이 있어 이 절에는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들이 法悅에 들어 三寶들 받들건만 하루 아침에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검은 長衫에 칼을 빼여 들고 전장터에 나갈 僧兵을 길으든 곳이다. 開運寺에는 중의 總攝이 있고 그 밑에는 승병 370명이 평시에도 칼 쓰고 말 달리고 교련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엔 長慶寺 한아만이 남었다. 사면은 躑躅花와 松林으로 둘러 쌓았다. 鎭南樓에 앉어 봄에 화려하게 터지는 철죽꽃을 바라보는 멋도 좋으려니와 盛夏 불같은 더위에 松風을 받어 드리는 快味 더 좋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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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節祠는 저 유명한 丙子胡亂의 三學士 洪翼漢, 尹集, 吳達濟 세 분 斥和臣을 모신 곳으로 三學士는 당시 胡廷에 붓들려 가서 殺身成仁한 어른들이다. 肅宗大王 때 대왕은 三學士의 충의를 가상이 생각하시여 留守 李時白으로 이 사당을 지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白日을 끠뚤는 충의- 지금까지 혁혁하다. 250여년 전의 건축으로 매년 춘추에 節祀를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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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들어가면 演武館이다. 옛적엔 鍊武堂이라 불렀다 한다. 肅宗 朝때 守禦使 金在好를 시켜 이 집을 修築한 뒤에 「鍊兵館」이란 扁額을 부첬다가, 그 뒤 正祖大王때 「守禦營」이라 고쳤다 한다. 군사를 조련시키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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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걸어 올러 가면 行宮 터가 나온다. 행궁 터 곧 윗 대궐(上闕)은 西將臺가 있는 日長山 아래 지금 면사무소가 있는 후편 일대다. 仁祖 甲子 축성과 동시에 건축한 것으로 守禦使 李曙가 牧使 柳琳에게 명하여 좌우 房軒과 翼廊 등 범 70여채를 건축하여 甲子年 이듬해 乙丑에 가서 준공한 것이요 아랫 대궐(下闕)은 윗 대궐 三門 밖에 있어 역시 한때에 건축한 것으로 곧 宣化堂이 되는 것이다. 윗 대궐 左牆 밖에 坐勝堂이 있다. 이것은 純祖朝 丁丑에 留守 沈象奎가 건설한 것으로 이 세 건물은 官廨 중 중요한 건축이라 하여 李朝중엽 이후엔 留守와 府尹의 衙門으로 사용했다. 이 가운데 특필할 것은 上闕과 下闕은 丙子胡亂때 仁祖大王께서 40여일, 臨御하신 유서 깊은 行在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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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胡亂을 격은 뒷 날 孝宗大王의 만고 恨을 먹음으시고 북벌을 경영하시자 돌연 뜻 아니한 *腫으로 돌아가시여 驪州 英陵에 고요이 잠드시니 뒤 임금 肅宗, 英祖, 正祖는 驪州 陵行 길 回路에 仁祖와 孝宗을 우러러 생각하시여 한번식 이 행궁에 듭시여 주무시고 回駕하섰다. 이것이 肅宗 14년 戊辰, 英祖 6년 庚戌, 正祖 3년 己亥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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坐勝堂은 大正 8년(1919년) 京安里로 옮기여 지금은 경찰서로 사용한다. 행궁 기타 중요한 건물도 군청 이전과 함께 拂下되어 오늘 남은 것은 극히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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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서문 안으로 발을 옮기면 百濟 시조 溫祚王을 모신 사당이 있다. 곧 日長山 서북 中腹에 있다. 丙子胡亂 때 仁祖大王이 이 산에 籠城해 게실 때 지으신 제전이다. 廣州 南漢의 옛 주인을 생각하시여 그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였다. 이 곳에는 당시 守禦使로 있든 李曙도 配享을 하였다. 仁祖께서 溫王廟를 짓고 祭享을 지내신 다음 몇일 안 돼서 이상하게도 仁祖 大王 꿈에는 百濟 溫王이 顯夢을 하였다. 「대왕이 내 사당을 지어 주시니 진실로 감사하오,」 하고 사례를 들인 뒤에 「그러나 나 혼자 있기 몹시 쓸쓸하오, 청컨대 대왕의 신하 李曙를 나에게 보내 주시요」 하였다. 仁祖大王은 꿈 속에 快하게 허락하섰다. 「어렵지 않은 일이오이다」하고, 그러나 깨여보니 南柯一夢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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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뒤에 守禦使 李曙가 벌안간 앓기 시작했다. 싸움에 승부가 결단되지 않은 이 판에 李曙의 병은 적지 않게 낭패를 주었다. 마침내 李曙는 병들어 죽었다. 仁祖大王이 전쟁 중에 명장 하나를 잃은 것도 한이려니와 꿈이 하도 영악하매 마침내 李曙를 溫王廟에 配享시키섰다는 구슬픈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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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숨을 헐덕어려 산성의 최고봉을 올라가면 이것이 곧 453米突이나 되는 日長山의 꼭댁이다. 古色이 창연한 西將臺가 있고 臺上엔 無忘樓 석字를 쓴 현판이 달려 있다. 丙子胡亂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40평이나 되는 넓은 터전을 차지한 집으로 아래 윗 층 장엄한 건물이다. 지금으로부터 英祖朝때 留守 李箕鎭이 건축한 것이니 현존한 산성 속에 가장 그 규모가 큰 집이다. 守禦使가 具軍服 蜜花 貝纓으로 壯臺에 올라 칼을 빼여 수만 군병을 호령하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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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 이 無忘樓 우에 올으면 호방하고 壯快하여 스스로 발을 굴러 豁然한 흉금으로 기-ㄴ 회바람을 불어 보고 싶지 않을 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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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열려진 眼界는 一眸에 京城, 楊州, 楊平, 龍仁, 高陽의 모든 산천이 네려다 보이고 희멀금 仁川 바다엔 夕照가 끓어 올라 시뻙언 불덩이 같다. 다시 눈을 가까이 돌리여 발 아래 漢江을 구버보면 무심한 듯 유심하고 한가로운 듯 바뿐 두어척 漁艇이 돗대에, 바람을 배불리 실고 그림같이 도라든다. 손을 들어 漢江의 상류를 지점하는 동안 아하, 저기가 三田渡 松坡 汗의 비가 선 곳일세 할 제 丙子胡亂이 눈 앞에 역력히 버러진 모양, 三學士가 뵈이는 양 崔鳴吉이 뵈이는 양 淸陰 金尙容이 뵈이는 양, 仁祖大王이 뵈이는 양 사나이면서도 한 줄기 비분 강개한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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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孝宗大王의 손자 되시는 肅宗大王의 西將臺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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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駕直登西將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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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臣說往日昏來.
63
忿然慷慨不能抑
64
惟有善承善繼哉.
 
65
멍에를 돌이켜 西將臺에 올으다.
66
임금과 신하 하소연 수작
67
해가 점은 줄도 아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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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하고 슬퍼라 어찌할게냐
69
도라가 도라가 굳게 지키리.
 
70
라 읊으신 한 首를 노래하고 석양을 짝하여 돌아오면, 하로 동안의 소득이 너무 벅차서 몇 해를 두고라도 南漢의 인상이 머리에 슬어지지 아니할게다.
【원문】기행 남한산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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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