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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印寺 紀行 (해인사 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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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6.
李箕永 (이기영)
삼천리 제12권 제6호 (발행일: 1940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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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伽倻山은 朝鮮 10勝地 중의 하나로 치는 명산이다. 海印寺는 바로 이 伽倻山 牛頭峯 下에 있는데, 역시 法刹이 大本山인 南道 제일의 名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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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海印寺는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面 緇仁里에 있으나, 옛날의 伽倻山은 伽羅연방의 要部였다 한다. 즉 伽倻는 伽羅의 轉音인데 후에 불교적으로 變稱된 것이라 한다. 이 밖에도 牛頭山, 象王山, 象向山, 只怛山, 雪山이라 칭한 바, 忠淸, 慶尙, 全羅 3도의 交界에 있는 大德山의 일맥이 東走하여, 慶尙道를 남북으르 分한 北은 星州, 高靈, 南은 居昌, 陜川 4郡간에 盤居하니, 높이는 해발 4,719척이다. 면적은 3,328町步다. 此葉의 天然 五間에 松, 赤松, 단풍, 활엽수 등이 査密하다. 그러면 이 산 속에 절은 언제부터 생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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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의 開山 緣日은 新羅 제40대 哀莊王 3년(서기 802년) 壬午 10월 16일이라 하니 距今 1,139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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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記에 按컨대 順應, 利貞 兩大德이 哀莊王의 귀의를 得하여 此寺를 開創하였다는 바 兩師는 이보다 먼저 唐나라에 들어가서 寶誌公和尙의 후예에게 誌公의 「東國踏山記」를 얻어 가지고 귀국하였다 한다. 伽倻山에 到하여 草庵을 세우고 (지금의 堆雪堂 越便에 遺墟가 있다 한다) 禪定에 入하였는데, 그 때 哀莊王后가 등창이 나서 神僧을 사방으로 구하던 차, 使從이 왕명을 받들고 伽倻山 외 10里許에 至하였을 때 홀연 山上 공중에 紫氣 광명이 충천함을 보고 白狐의 인도로 (현재 黃山里 前 여호다리는 그 때 사신이 白狐를 처음 만나던 곳이라 한다) 길을 찾어서 산 안에 들어오니 지금 寺門외 數町許에 있는 자추바위(跡岩) 부근에서 여호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兩師를 만나 보게 되었다. 사신은 來意를 말하고 동행키를 청한 즉, 2師는 불응하며 五色絲 數丈을 援하여 曰, 此線의 한 끗은 왕후의 瘡口에 粘付하고 다른 한 끗은 궁정에 있는 樹枝에 결처 두면, 등창이 곧 낳으리라고. -사신이 돌아가서 그대로 奉命한 즉 과연 그 나무는 말너 죽고, 왕후의 등창은 즉 善하신 지라, 이에 왕과 后가 모다 大喜하사 師를 위하여 海印寺를 창건하시고 왕이 親幸하여 田 2,500結을 寺에 納하는 동시에 慶讚法會를 設하여 回向한 후에 귀국하였다 한다. (지금 極樂殿측에 御水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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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額을 海印寺라함은 開山이래로 便稱한 寺名이다. 혹은 伽倻岬寺, 伽倻山寺, 伽倻寺라고도 칭한 것은 山名과 寺名을 합한 약칭이었다 한다. 그런데 「海印」이라 함은 본시 佛說 華嚴經 중에 있는 『海印三昧』라는 大定의 名이라 한다. 이 大定중에는 3종 世間 - 즉 器世間, 중생 世間, 智正覺世間이 順現하는 것은 마치 비유컨대 천지의 森羅萬象이 海中에 印顯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여, 華嚴經의 所依 三昧의 名을 海印이라 칭하였다는 것인데, 華嚴宗祖 義湘은 唐에 入하여 智儼公의 講下에 住하면서 華嚴經을 연구할 때에 海印三昧의 의미를 따서 『海印圖』를 만들어냈다. 이것을 儼公에게 進呈하였더니 儼公이 보고 大讚하였다 한다. 후에 義湘이 본국에 歸하여 海印圖로써 傳法의 寶를 삼으애, 上首 제자인 相源 大德에게 此를 전한 바, 源은 琳大德에게 전하고, 琳이 다시 順應 大德에게 전하였다. 이리하여 順應大德은 此를 受하고 伽倻山에 寺를 刱하여 寺名을 海印이라 칭하였다 하며, 따라서 海印寺는 華嚴宗의 근본 道場이 되는 까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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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海印寺의 현존 堂宇는 板殿 상하 2棟을 제하고는 擧皆霽月聖岸禪師의 重建에 속한다는 바 其間에 6회의 화재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 후 新羅 敬順王 원년(서기 927년) 丁亥에 希朗祖師가 高麗 太祖의 귀의로 海印寺를 一新 중건한 바 왕은 田 500結를 納寺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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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朗祖師의 始는 朱씨다. 新羅 眞聖女王 3년 己酉에 지금 居昌郡 主上面 聖基村에서 生하고, 孝恭王 7년 癸亥에 伽倻山에 入하여 落髮하였다. 후에 僧統이 되어 此寺에 주지라고 華嚴三昧를 得하였다 한다. 그 때 高麗 太祖가 後百濟王 甄萱과 싸워 美崇山(今 度靈郡)에서 패전하고 海印寺에 入하여 希朗祖師를 師事하였다. 師가 勇敵大軍 祖叉王을 遣하여 神兵을 率하고 麗太祖를 도아서 萱을 破하매 太祖가 朗公을 敬重하여 師로 섬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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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건물을 소개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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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寂光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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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은 開山 당시부터 毘盧殿이란 扁額을 揭하고 華嚴宗의 本尊인 毘盧 遮那 佛像을 本尊으로 모시던 大德堂인 바 成宗時에 榮祖大師가 重創할 때, 大寂光殿으로 개편하였으며 누차 화재에 중건한 터임므로 舊制보다 규모가 적어젓다 한다. 그러나 現今 本殿은 距今 123년 전 戊寅에 化主 霽月聖岸禪師, 都片手 釋德聖의 건축한 바인데 內7包 外5包 20間의 대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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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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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의 건물은 원래 소규모이던 것을 世祖大王 당시에 改構하였으나 未久에 傾頹되어 成宗 戊申에 仁粹, 仁惠 兩大妃께서 榮祖大師를 명하여 都料匠 朴仲石의 手로 재건할 새 普眼堂이라 扁하고 普眼門을 세웠었다. 其後 화재로 普眼門은 全燒되었으나 오직 板殿만은 무사히 災을 면하여 금일에 至하였으니 當寺의 最古 건물이다. 상하 2棟 60間에는 國刊 藏經板本을 수장하였고 좌우 兩棟 4間에는 寺刊藏經板本을 쌓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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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堆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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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堂은 大寂光殿과 同建한 것인데, 光武 3년에 梵雲 就堅公이 修禪社를 增刱하고 翌年에 本堂도 수선하였으나 大定 7년에 修禪社를 폐하여 祖師殿으로 개편하고 開山祖이하 역대 禪社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小香閣, 凝香閣을 幷하여 禪院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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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冥府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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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은 高宗 10년, 距今 68년 전에 雲華普澤公이 金塔殿 舊基에다 刱建하고 越 5년 戊寅에 繡龍等 諸畵員의 手로 丹*하고 十王像을 態川 聖興寺로부터 移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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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應眞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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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은 본래 解行堂으로서 成宗 19년에 親建한 건물이다. 역대 禪師의 영정을 봉안하였더니 大定 7년에 板殿 西齊에 안치하였던 16羅漢像을 옴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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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獨聖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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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閣은 본래 希朗祖師像을 봉안하였다가 大定 7년에 現今 祖師殿으로 옴겨 오고 獨聖像을 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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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九光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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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樓는 大寂光殿보다 6년 후에 건축한 것인데 그 때 本道巡相 金履載가 樓未成함을 와서 보고 도내 僧 40인의 각 10貫義 金과 居昌人 金龍述의 施金 300냥을 得하여 新建한 것이다. 그가 樓題를 手書하여 걸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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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觀音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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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은 大寂光殿과 동시 중건한 僧堂이다. 初에는 尋劒堂의 扁을 揭하였더니 근 100년 전에 寺北에 있던 觀音殿이 被燒된 후에 소속 재산을 此處에 옴긴 고로, 觀音殿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隆熙 2년 戊申에 晦光師濬公이 尙宮 千一淸의 金施을 得하여 개축하니 寮舍와 아울러 3棟 86間의 대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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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窮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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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堂 역시 大寂光殿과 동시 중건한 禪堂이다. 光武 7년 癸酉에 海鵬禪師가 중건하고 隆熙 2년 戊申에 晦光師濬公이 觀音殿과 동시 증건한 것인데 3棟 80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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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景洪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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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은 高宗 29년 距今 49년 壬辰에 梵雲就賢公이 三殿爲祝所로 新建한 것인 바 좌우 翼廊을 합하여 3棟 33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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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四雲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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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堂은 역시 大寂光殿과 동시, 片手釋宇定의 所建인데, 舊來로 僧政을 행하던 令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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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明月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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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堂도 大寂光殿과 동시에, 片手釋德性의 손으로 건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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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鳳凰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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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門은 大寂光殿과 가치 중건되고, 距今 103년 전 戊戌에 淵月 長老가 化主가 되어 伽倻, 那提, 文殊, 普賢 4位幀을 봉안하였더니 昭和 8년 癸酉에 古鏡大師가 化主가 되어 松坡順公의 手로 四天王幀을 新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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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解脫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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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仁霞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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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 2門은 모다 大寂光殿과 가치 중건된 것으로 光武 3년 己亥에 化主 梵雲 就堅 禪師가 重修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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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局司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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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壇은 1棟 3間의 소건물로 局師大神을 봉안하였다. 창건 연대는 미상하나 去 純祖時에 丁丑 화재를 요행히 면하고, 光武 3년 己亥에 梵雲公의 重修로 금일에 至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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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에는 보물이 많다 하나 그 중에도 無價의 寶로는 누구나 팔만대장경을 特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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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藏經은 宋 太祖 開寶 4년(서기 971년)에 始刊한 蜀本으로부터 支那, 朝鮮, 내지를 합하여 전후 수십회의 板刻이 있다 하지만 특히 高麗 板刻을 세계 無比의 걸작품이라 함은 그 체제의 훌륭함과 校正의 엄밀함과 部秩이 완비함이 세계 藏板중에 제1위이기 때문이다. 내용을 구별해 보면 寺刊과 國刊이 있고 國刊중에도 또한 舊本 續本이 있다. 續本은 李朝이후에 만든 것이고, 舊本은 國刊 藏板 移安(國刊은 李太王 7년 戊寅에 옴겨 왔다) 이전에 개간된 것으로써, 國刊보다도 연대가 훨신 이전 것이라 하나, 그러나 國刊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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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刊板은 高麗 高宗 23년 丙申(서기 1236년)에 本司를 江華에 分司를 晋州에 置하고, 38년 辛亥까지 大凡 16년간 조각한 것이라 한다. 이 經板을 海印寺에 두게된 데 대해서는 諸說이 있으나 大正 7년에 包光師의 발견에 의한 華嚴敎 分記 제10권 10장의 欄外에 「丁丑出陸時 此閣失與知識道元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日首座冲玄」 운운이라 음각한 것으로 보아 李太祖 7년 戊寅에 海印寺로 移置한 것이다. 經板을 間口 33間 奧行 5間半의 板殿 2棟에 收藏하여 設架 배열한 바 대저 縱 8寸內, 外橫 2尺 2,3寸, 厚 1寸 2,3分이요, 兩端에 마구리를 부치고 네구통에 銅製장식을 한데다가, 전면에 칠을 薄塗하였는데, 用材는 白樺이다. (朝鮮名으로 자작나무 일명은 巨濟木이라 한다) 한 개의 중량은 700匁 내지 1貫되는 것도 있다. 板面은 보통 縱으로 7寸 4,5分 橫으로 1尺 5寸 6分이요, 상하에 界線이 있을 뿐, 罫線는 없다. 1행 16자 23행인데 1자 方 5, 6分. 양면에 각하고 其 一端에는 經名卷次丁數並千字文에 의하여 函函號를 示하고 그 外側도 간략히 표시를 刻하였다. 그러나 其 中에 板面의 寸法, 行數, 字數, 字의 大少등이 상이한 것도 있으며 輸廓 及 괘선이 있는 것과 一面만 刻한 것과 혹은 一面에 二葉을 刻한 것 등이 있으니, 자못 전부가 原板이었지만 중간의 손상으로 후에 刻한 것이 다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經板을 二座 藏經閣 五層 板架에 층마다 縱으로 2열 배치하고 중앙의 板架 壁際에는 다시 전후 양변으로 배열하였으니 國刊 판본 수는 81,258枚에 經部秩數가 1,512部요 經卷數는 355권이라 하니 麗朝, 李朝 兩代에 결친 이 위대한 사업에는 실로 경탄을 不己할 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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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刊 藏版의 최초 개간된 유래에 대하여는 化主 李居仁의 불교적 전설이 또한 흥미 있으나 지면 관계로 그것은 割愛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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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海印寺의 연혁을 약술함에 불과한 바 (주로 「海印寺 略誌」에 의하여) 章을 달리하여 이제부터는 내가 본 伽倻山을 적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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伽倻山은 자고로 단풍이 유명하다 한다. 그러나 大凡 명산승지는 어느 때 보아도 독특한 풍경을 가지고 있나니, 마치 미인은 아무 때 보아도 미인인 것과 같다. 盛裝을 했을 때는 화려한 美가 좋을 것이오, 수수하게 차렸을 때는 또한 소박한 美가 좋을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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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晩秋에 伽倻山을 가본 것이 조금도 섭섭할 게 없겠다. 그러나 몇일 전에만 갔더라도 滿山 紅濤의 盛裝한 伽倻山을 玩賞할 수 있는 것을 落木 空山에 陰風이 냉냉한 때 찾어간 것은 자못 一步遲의 恨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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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에서 기차를 버리고 역전에서 高麗行의 뻐쓰를 乘換하면, 2시간여에 高靈邑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慶尙南北道의 道界를 넘기까지 平平凡凡한 산천은 어디 하나 명산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嶺上을 넘어서 治爐川을 낭떠러지기를 구버 보며, 멀리 雲表에 솟은 紫色 山容을 眺望할 때는 문득 저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누구나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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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治爐川을 지나서 紀流洞까지 또 30리는 역시 평범한 山谷간을 뚫고 나간 신작로다. 따라서 伽倻山의 승경은 紅流洞에서부터 전개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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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紅流洞門을 들어서기 전에 武陵橋등의 명소가 없지 않다 하나, 지금은 「花飛暮春日, 尋入武陵天 何處神仙會, 遠林生翠煙」이라한 西山大師 시가 남어 있을 뿐, 武陵의 옛날 경치도 변모된 모양이니 더구나 신선의 자최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렇다니 말인데, 海印寺 앞까지 신작로를 내는 바람에 紅流洞도 俗化해서, 지금은 난잡하기 짝이 없다. 治道軍과 목재 운반 인부 등의 등쌀로 주막과 점포가 느러간다. 밤이면 油頭紛面의 酒女가 출몰하고, 장구 소리와 노래 가락이 흘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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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流洞에서 자동차를 내리면, 계곡은 갑자기 좁아지고, 좌우의 靑山이 碧溪水를 둘러쌌다. 그리하여 綠水는 靑山을 끼고 돌고, 靑山은 綠水를 안고 돌아, 소위 紅流 九曲의 절승을 이루었는데, 만일 伽倻山을 小金剛에 비한다면, 紅流洞天의 일대는 마치 內金剛과 같고, 牛頭峯 一境은 外金剛과 같다 할까. 그래서 고산 지대에는 가지만 버러진 잡목림과 풍화작용에 무서린 峯岩이 솟아있고 분지인 계곡간에는 白苔낀 절벽과 격류에 때를 베낀 옥석과 기암이 나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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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流洞 상류에는 崔孤雲의 유적인 籠山亭이 또한 一景을 이루었거니와, 伽倻山은 도처에 孤雲의 유적이 많다 한다. 현재 海印寺의 위치인 緇仁里는 致遠里의 變稱이라는 바, 거기는 孤雲선생이 처자를 인솔하고 伽倻에 入來했던 당시의 주소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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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籠山亭 後麓에는 孤雲의 影堂이 있고 越便 大路傍에는 저 孤雲의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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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奔疊石吼重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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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語難分咫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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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恐是非聲到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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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敎流水盡籠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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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한 題石詩가 있다. 紅流洞의 孤雲에 대한 1, 2 名詩를 소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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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道孤雲入此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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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知靈跡依何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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謾將間眼看尋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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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者流川靜者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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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晦堅大師 詩가 其 1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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逝者流溪立者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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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區仙境落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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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岩不語當時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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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日孤雲入此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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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仁波大師 詩가 其2이다. 석양 山路를 결어 籠山亭을 돌아가면 산남 산북은 除陽이 분명한데 照耀하는 日光은 靑山에 霧霞를 토함이 또한 장관이다. 吹笛峯 下엔 명소가 유명하니 沘筆岩, 吹風瀨, 光風瀨, 完在岩, 噴玉瀑, 霽日潭, 疊石臺, 會仙岩 등이다. 먼저 吹笛峯을 을푼 崔東植의 시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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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山春雨梁靑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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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氣濛涳樹影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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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笛數聲雲不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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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知峯月浴銀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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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지금도 그럴 뜻 髣髴하나, 沘筆岩을 두고 지은 姜孟希 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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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削千尋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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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生萬竇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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頑冥終不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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屹屹但蒼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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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찾어 볼 수 없다. 웨 그러냐 하면, 沘筆岩은 신작로를 내는 바람에 지금은 길 밑에 무처서 뵈이지 않고 겨우 岩名을 刻字한 것이 路傍岩에 자최를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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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천연의 경치를 그내로 가지기는 아마도 落花潭이리라. 落花潭은 寺에 至하는 최후의 절경이니 그 규모의 웅대함이 外金剛의 九龍淵만은 못 하나, 千仞 절벽下에 심연을 일우고, 백옥같은 반석위에서 떠러지는 一條 飛瀑은 그 위의 翠巒의 除影과 더부러 무시무시한 戰慓美를 갖게 한다. 前名을 藝妓潭이라 하였으나 너무 野하기 때문에 落花潭으로 고첬다던가. 옛날에 기생이 빠저 죽은 곳이라 한다. 그 위 山頂에는 老龜 昇天岩이 있다. 흡사히 금방 뛰어 올을 것 같은 龜形으로 된 바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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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海印寺 부근의 유명한 폭포로는 말짱이로 가는, 路傍에 있는 龍門瀑이다. 그것은 朴淵 같은 長山속이 아니라, 瀑長이 그리 길진 못하다. 수년전의 홍수로 瀑臼도 伏沙로 미어저서 웅덩이가 넓지 못하다 하나, 터전은 넓기 때문에, 만일 폭포밑을 인력으로 파내기만 한다면, 웅대한 폭포를 만들 수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공상을 해 보고, 이 산속에 다수한 자기 성명을 대서특서한 遊客중에 혹시 그런 施主는 없는가 염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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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측에 있는 學士臺도 孤雲선생의 置踐地라 한다. 선생의 手植인 老檜木이 두어 아름되게 컸다. 전설에는 지팽이를 꼬진 것이 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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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奉天臺는 牛頭山 제일봉 하에 있으니, 여기에 올르면, 멀리 智異山 連峯이 구름 밖에 둘러섰는 輪廓이 南山넘어로 희미하게 내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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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鼻井은 牛頭上峯 山頂에 있다. 푸른 이끼가 끼었는 天水바지의 옹달샘이다. 따라서 우물로서는 아무 보잘 것이 없으나, 작년같은 大旱에도 이 샘물이 여전하게 고여 있었다니 따는 이상하다. 그러나 물은 이 샘뿐 아니라 伽倻山 계곡은 어디나 물이 흘러서 이 물로 농사를 짓는 부근 주민들은 免凶을 하였다니, 未嘗不 伽倻山이 피난처로 유명한 승지인가 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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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공리적 생각은 그만 두더라도 牛頭山頂에 올라서 바라보면 동서남북이 豁然히 툭 터진 一望無險한 天空이 상쾌하다. 가깝게는 慶北 일대의 群少重巒이 眼下에 굴복하였는데, 그 가운데 洛東江이 白布를 펼친듯이 길게 둘러있다. 急角度가 진 북편, 이 산 밑은 절벽틈에 잡목이 무성하다. 海印寺에 부속된 암자는 擧皆 큰 절 부근에 있으니 三仙庵과 藥水庵은 尼院으로 유명하고, 希朗臺는 希朗公의 修道地라 師名을 취하이라. 白蓮庵은 本寺보다도 高處에 在하여 老松奇岩간에 景槪 자못 絶勝하고, 정적하기 寺 중에 제일이니, 그래서 伽倻山중 제일 승지라는 稱譽를 듣는 福田靈倫이라 한다. 고래로 수도 고승의 住錫한 자가 많었으니, 幻寂, 楓溪, 性峯, 仁坡, 濶海, 信海 등 諸師었다.
 
84
弘濟庵은 四溟大師가 거주하던 곳이다. 지금도 대사의 임종하던 방이 그대로 한 편으로 影堂이 있다. 내가 바로 이 弘濟庵에 있었는데, 거기는 飛鳳山의 一翼이 前溪를 막어 서고, 後峯下에 靑竹이 둘러있는 一望 명당지다. 후원에 四溟堂의 浮屠가 있다. 이 앞산에 봄에는 철죽이 곱게 피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만추에 갔기 때문에 마른나무 가지에 「저으사리」가 시퍼렇게 붙은 잡목림을 또한 기이하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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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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