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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紀行 落花岩 (기행 낙화암) ◈
해설   본문  
1940. 10.
李秉岐 (이병기)
삼천리 제12권 제9호 (발행일 : 1940년 10월 01일)
1
지새든 안개는 슬어지고 서늘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볕은 아직도 따갑게 비치든 어느 가을날이었다.
 
2
나는 論山서 扶餘를 향하여 가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동차가 다닐만한 길이 아니고 논틀밭틀로 한 두사람쯤 겨우 비껴설만한 굽을굽을한 길이었다. 좌우로 열린 그 넓은 들에 익은 곡식들은 이어 金波를 번득이고 풀섶에 우뚝 우뚝 솟은 히고 붉은 野菊송이는 소매끝를 스치며 상긋한 향기를 피우고 들머리 산기슭에나 언덕에는 조고마한 초가들이 족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다닥다닥 붙었고 그 어느 집웅에는 고추를 따다 빩앟게 널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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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첨 산골짝이로 들었다. 나무 한주, 바위 한덩이 보잘 것 없는 속으로 얼마동안 답답한 걸음을 걸었다. 산도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고 한편 산태바기에는 검웃한 구멍이 빠끔빠끔 뚤렸다. 무슨 굴이나 아닌가하고 올라가 보니 큼즉한 돌을 가지고 판자같이 곱게 다듬어 방처럼 맨들어 놓은 것이 天井은 없어지고 벽만 남기도 하고 아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그건 石槨이었다. 百濟 盖鹵王이 高句題간첩 道琳에게 속아 흙을 쪄 성을 쌓고 누각, 臺榭를 壯麗히 짓고 큰돌을 떠나 外槨을 맨들어 父骨을 葬하다가 國財를 탕진하고 국민이 피폐하여 드디여 高句麗軍에게 漢城도 함락을 당하고 盖鹵王도 포박을 당하여 阿且城 밑에서 죽었고 그 뒤 그 아들 文周王이 熊津(公州)으로 移都하여 4代를 지나, 聖王이 이 扶餘로 또 移都를 하였는 바 이 石槨들은 百濟의 유물이다. 이런 유물이 이 근방에 군데군데 들어나 있다. 나려오다 樵夫을 맞나 물으니 이곳을 릉뫼(陵山)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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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수려한 봉들이 놓이고 회돌아가는 골목이 과히 평탄하고 단조하지는 않다. 200城, 76萬戶나 되는 百濟의 수도이었을 때에는 이 근처 구석구석이 가옥이 즐비하고 冠蓋와 車馬가 連絡不絶하였을 이 길이 이따금 어찌다 오고가는 행인의 발뿌리에 몬지나 날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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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內를 다다르면 鬱密한 숲-이른 바 숲정이같은 것도 흔히 있는 법이었다마는 여기는 겨우 고목 몇 株가 굽으정하게 들어가는 머리에 섰고 허술한 瓦屋, 草屋이 조고마한 산밑으로 나붓나붓이 어분드리고 강은 한옆을 끼고 누었다. 이곳이 과연 扶餘古都인가 할 때 새삼스러이 滄桑의 느낌을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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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으로 2마장쯤 가면 민듯한 벌판에 화강석으로 맨든 5층탑이 서 있다. 이는 益山의 彌勒塔과 아울러 百濟의 대표요 걸작인 예술품이다. 百濟 武王때 맨든 定林塔이라 한다. 이걸 蘇定方碑라 또는 平濟塔이라 하는 건 그 후 唐人이 新羅와 연합하여 百濟를 망하고 이 탑에다 「大唐平百濟國碑」라는 것을 사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숭이 아름다운 百濟의 마음은 그대로 진혀 「예술은 남다」는 箴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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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 길로 도로와 그 뒤 扶蘇山으로 올르다. 힘없이 떠러지는 낙엽을 밟으며 성굿한 잡목사이로 어슬렁어슬렁 오르다. 산이 높다거나 크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겹이 지고 으늑하다. 그 도도록하고 반반한 곳은 무슨 亭閣과 樓臺의 자리나 아닌지. 좀 오르다 보면 잣아진 土臺가 약간 남은 것을 半月城址라고 이르되 半月城은 周回가 13,006尺으로 石築한 성인데 이 부소산을 안고 둘러 두머리가 白馬江에 닿았다하니 이렇게 산허리를 안은 것이 아니라 산밑으로 둘렀을 것이고 이골 東軒이나 客舍 등지가 泗沘宮, 太子宮터이고 그 앞에는 方丈仙과 望海亭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이 산이 百濟 때 宮禁속이었음은 더 말할 것이 없고 이 산을 御苑을 삼고 산앞 기슭으로 金碧이 찬란한 殿閣 등이 첩첩히 솟았을 것은 틀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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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다 올라, 東으로 꺾여 가면 마루태기에 한 우묵한 곳이 있으니 이는 百濟의 창고로 兵火을 맞나 다 타버리고 그 자리만 남은 것이라는데, 지금도 땅을 헤집고 보면 껌언 쌀, 보리 콩알이 나오는 것이다. 워낙 百濟는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한 나라로 高句麗, 新羅보다도 농업을 숭상하여 그 시조 溫祚王 때에 벌서 積穀, 勸農을 하고 그 뒤 仇首王때에도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勸勵하였다 한다. 이것이 그런 업적의 흔적이라하고 보니 더욱 끔찍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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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 더 나아가면 送月臺. 이 반반한 곳을 누가 밭을 맨들어 바야흐로 수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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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西편으로 도로오다 迎月臺를 찾었다.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이다. 좋은 전망대다. 이 산의 강으로 둘르고 峯으로 둘렀다. 그 峯들은 천연 꽃봉오리다. 絢爛한 꽃밭 속이다. 虎岩山, 望月山, 浮山, 鷲靈山, 烏山, 白馬江 할 것 없이 주위에 있는 멀고 가까운 산수들은 오로지 이곳을 두고 옹호하고 있다. 나는 이윽히 바라보다가 폭은폭은한 금잔디를 깔고 앉어 그 놀라운 영화와 향락을 고요히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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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天천천政臺에 落點封函을 두고 宰相을 뽑아 政事를 맡기고 王은 功德을 빌러 매양 王興寺에 行香을 하고 兩岸에 奇怪石이 錯立하고 奇花異草가 그림같은 北浦로 左右臣寮를 더불고 술을 미시고 거믄고를 타고 님금은 노래를 하고 신하들은 춤을 추기도 하고 宮南에는 20여 리 운하를 파고 4岸에 楊柳를 심고 嬪을 다리고 배를 띄우다 自溫臺로 올라 놀기도 하다. 蓮花浴盤에 香을 풀어 등도 밀리다 밤이면 꽃송이같은 궁녀들을 앞뒤에 세우고 迎月臺 送月臺로 오락오락하며 달도 맞고 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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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西으로 이산 一脈을 타고 나리니 길은 끊지고 무서무시한 巨岩絶壁이고 그 밑에는 시퍼런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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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古記에 「扶餘城 北角에 大岸이 있으니 江水를 다달렀다」하고 또 전하는 말에 「羅唐의 연합군이 泗沘城를 처들어올 때 義慈王이 여러 후궁과 함께 그 면치 못할 줄을 알고 서로 이르되-차라리 自盡할지언정 다른 사람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거느리고 이 바위에 이르러 江에 던저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墮死岩이라」하였다 하나 이걸 落花岩이라고 일컷는다. 高麗 忠宣王때 李穀 詩의 「一日金城如解瓦千尺翠岩名落花」라 하는 것을 보면 그전부터 落花岩이라는 이름으로 일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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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岩은 百濟의 史劇을 마즈막 연출하든 곳이오 그걸 영구히 전하는 유일한 기념탑이다. 이에 그 劇의 梗槪를 말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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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와 高句麗와는 한 족속으로 처음에는 화목을 하여보다 점점 세대가 멀어지매 서로 치고 빼았고 하여 百濟가 배기다 못하여 차차 南遷하여 마즈막 이 扶餘로 移都를 한 후 高句麗와는 싸움이 멎었고 新羅와는 더 잦었다. 종래 新羅는 三國 가운대 가장 미약한 나라로 高句麗, 百濟의 침노를 항시 받었는 바 그 중에도 百濟가 심하였다. 義慈王 初年까지도 王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 新羅 40여 城를 함락시키고 또 장군 允忠을 보내어 新羅 大耶城을 쳐 城主 品釋과 그 처자를 잡어 죽이고 남녀 천여 인을 사로잡아 왔었다. 그 뒤 義慈王은 교만이 늘어 新羅같은 건 웃읍게 여기고 찻든 칼은 끌러두고 宮室이나 치장하고 宮人으로 더부터 淫荒耽樂함을 마지아니하였다. 그때 成忠같은 충신이 그리 말라고 極諫하매 義慈王은 노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成忠은 옥중에서 파리하여 죽을 때 「충신은 죽어도 님금은 잊지 않으오니 원컨대 한말슴을 들이고 죽겠습니다. 臣이 항상 時勢를 보고 이 변함을 살피보니 반듯이 兵革이 있으리다. 무릇 用兵을 함에는 반드시 그 地勢를 골라 상류에 처하여 적군을 맞은 후에야 보전함즉 하외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육로로 오거든 況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水軍이 오거든 伎伐浦언덕으로 들이지 말고 그 險隘함을 웅거하여 막으면 되리다」하였다. 그래도 義慈王은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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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新羅는 우로는 聖君을 모시고 아래로는 臣民이 충성하여 우아래 한마음으로 어찌하면 나라를 隆興케 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을가 하고 힘을 쓸대로 써왔다. 사회의 嚮導가 되고 君國의 輔弼이 되든 花郞制度와 같은 것도 그래서 발생이 되고 성행하였으며 인하여 무서운 인재도 배출하였다. 그 대표를 이를진댄 金春秋와 金庾信이었다. 金春秋와 金庾信과는 본래 竹馬의 交舊로 娚妹간이 되고 軍政의 主宰가 되어 지성으로 盡瘁하였다. 그러자 百濟서 金春秋의 따님과 사외 品釋의 父子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金春秋가 더욱 분하여 百濟를 치려고 호랑이같은 高句麗에 請兵하러 가서 죽을 번하다 간신히 살어왔고 또 唐나라에 가서 唐 太宗을 보고 麗濟치기를 꾀하고 돌아와 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登極하여 太宗 武烈王이 되었으며 그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데 租未坤이란 이가 夫山縣令으로 가 있다 百濟군사에게 사로잡혀 가 佐平(大臣) 任子의 家奴가 되어 일을 부지런이 하여 한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매 任子가 신통히 여겨 의심을 않고 저대로 출입를 하게 하여 도망하여 돌아와 百濟일을 金庾信에게 告하였다. 金庾信은 租未坤이 忠正하여 쓰임즉함을 알고 「내 들으니 任子가 百濟國事를 專任한다는 바 더불어 꾀할 일이 있으나 말할 길이 없으니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가 말해보라」하매 租未坤은 「公이 저같이 不肖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부리신다면 죽드라도 뉘우치지 많갖습니다」하고 마츰내 다시 百濟에 들어가 任子를 보고 「小人이 이미 국민이 되었답시고 國俗를 알어야 하갖기로 數十日동안 나가 놀다가 犬馬의 戀主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왔습니다」하였다. 任子는 그 말을 믿고 꾸짖지 않았다. 租未坤은 그 뒤 어느날 틈을 타 任子에게 「요전에는 제가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바른대로 말슴을 여쭈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실상은 新羅을 가, 金庾信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金庾信이 小人더러 大監께 전하는 말이 있습데다.-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으니 만약 大監나라가 망하면 大監이 내 나라에 의탁하시고 내 나라가 망하면 내가 大監나라에 의탁하겠다고 하더이다」하였다. 任子는 듣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租未坤은 惶懼하고 물러나 죄를 기다렸다. 그런 뒤 두어달만에 任子가 租未坤을 불러 「네, 전에 말한 金庾信 말이 어떤 뜻이냐」하고 물으니 租未坤은 놀래어 그전의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任子는 「네가 전하는 바는 내 이미 다 알었으니 둘아가 金庾信에게 告하라」하였다. 租未坤은 新羅로 둘아가 百濟의 안팟사정을 金庾信에게 자상히 다 말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金庾信은 太宗 武烈王에게 그 일을 알외고 百濟치기를 버쩍 더 급히 서들어 太宗 武烈王 7년에 新羅에서는 大軍을 發하고 太子와 兵船을 보내어 唐兵을 맞고 大將軍 金庾信將軍 品目欽春 등이 精兵 5만을 거노려 進軍을 하고 唐에서는 대장군 蘇定方으로 大摠管을 삼고 請兵하러 가 있든 金仁問(太宗 武烈王 第2子)으로 副大摠管을 삼어 水陸軍 13만을 거느리고 百濟國 西 德物島에 이르렀다. 義慈王은 이 소문을 급작이 여러 신하를 모여놓고 戰守의 꾀를 물었다. 佐平 義直은 나아와 「唐兵은 멀리 바다를 건늘새 물에 익지 못한지라 배에 있어 반듯이 피로하여 처음 하륙을 할 때 사기가 不平하리니 급히 치면 되겠고 羅軍은 大國의 구원을 믿고 우리를 넘보는 마음이 있는 바 만일 唐兵이 패함을 보면 감히 銳進치 못하리라. 먼저 唐人을 더불어 決戰함이 可하외다」하고 達率 常永 등은 「그렇지 않으외다. 唐兵은 멀리 왔으니 속히 싸우고저 하므로 그건 당할 수 없고 羅軍은 여러번 우리군사에게 패하였으니 이제 우리 兵勢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오늘날 꾀는 마땅히 唐兵의 길을 막어 그 軍士가 게을러짐을 기다리고 먼저 군사를 보내어 羅軍의 銳氣를 꺾은 뒤에 그 형편을 보아 싸우게드면 이기고 나라를 보전하리라」하였다. 義慈王은 그 어느 말을 쫓을지 모르다가 죄를 짓고 귀양을 가 있는 佐平 興首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일을 물었다. 興首는 「唐兵은 數가 많고 規律이 엄한데 더구나 新羅와 함께 겨르고 있으니 만일 平原광야에서 對陣를 한다면 누가 이길는지 모릅니다. 白江과 炭峴은 우리나라의 要路외다. 一夫單槍을 만인이 당치 못할 것이니 용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여 唐兵을 白江에 들지 못하게 하고 羅軍을 炭峴에 지나지 못하게 하고 城門을 重히 닫고 구지 지켜 그 資粮이 다하고 士卒이 피로함을 기다려 奮擊을 하면 반드시 파하리다」하였다. 大臣들은 그걸 믿지 않고 「興首가 오래 귀양을 가 있으므로 님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치 않으오니 그 말은 쓸 수 없습니다. 만일 唐兵이 白江으로 들어오면 물을 따러 배를 아울러 매지 못할 것이고 羅軍이 炭峴으로 오면 길이 좁아 말을 나란이 타지 못할 것이니 이런 때 군사를 시켜 짓치면 둥우리에 있는 닭과 그물에 있는 고기처럼 죽이리라」하니 義慈王은 그 말이 옳게 여기고 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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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들으니 羅唐兵이 이미 炭峴, 白江을 지났다 한다. 階伯이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명을 뽑아 거느리고 막으러 나갈 때 자기의 처자를 불어내어 군사들 앞에 세워놓고 「한나랏 사람으로 羅唐의 大兵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은 알 수 없다. 우리 처자가 모다 노비가 되어 부끄럼을 당하고 사는 건 조히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고 모다 죽어버리고 黃山땅에 이르러 먼저 험한 데를 차지하고 三營을 排設하고 羅軍을 맞어 싸우려할 때 「옛날 越王 句踐는 5천人으로 70만 吳軍을 파하였으니 오날 마땅히 舊勵決戰하여 國恩을 갚자」하고 마구 대들어 싸우니 하나히 千을 당하는지라 羅軍이 겁을 내고 물러났다. 이와 같이 싸워 진퇴하기를 네 번이나 하였다. 羅軍은 기운이 꺾이고 힘이 다하였다. 장군들도 하는 수 없어 欽春은 그 아들 盤屈더러 「신하노릇은 忠만같지 못하고 아들노릇은 孝만같지 못한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건 忠孝가 다 온전하다」하다 하여 盤屈이 나아가 싸우다 죽었고 品日은 그 아들 官昌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군을 가리치며 「우리 아들이 나히 16에 志氣가 꽤 용명스러우니 오날 싸움에 三軍의 표적이 되겠느냐」하매 官昌은 「그러리다」하고 오직 甲馬草槍으로 적진에 나아가 적군에게 사로잡혀 階伯이 앞으로 가니 階伯은 그 나히 어리고 용맹스러움을 사랑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을 하되 「新羅는 奇士가 많고나 少年도 이러거든 하물며 壯士랴」하고 놓아보냈다. 官昌은 돌아와 그 아버지에게 「내가 적중에 들어가 장군의 목을 베고 旗를 빼았어 오지 못함은 죽기를 무서워함이 아니외다」하고 손으로 우물물을 떠멱고는 다시 적진를 향하여 달겨들어 싸우다 또 사로잡혔다. 階伯은 그 목을 베어 말안장에 달어 도로 보냈다. 品日은 그 머니를 잡어 소매로 흐르는 피를 씻으며 「우리 아들 면목은 살었다. 잘 王事에 죽었으니 다행하다」하였다. 군사들이 이걸 보고 慷慨하여 모다 죽기를 결단코 고함을 치고 격렬이 대들어 쳤다. 百濟軍이 크게 패하고 階伯은 죽고 佐平 忠常, 常永 등 20여 人은 사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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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蘇定方, 金仁問 등은 바다로 하여 伎伐浦해안으로 들어오는데 게가 수렁이라 걸음을 걸을 수 없어 柳席을 펴고 나와 百濟軍을 맞나 逆擊하여 크게 파하고 그리고 金庾信과 맞나 羅唐軍이 밀물이 들 때를 타서 배를 저어 水陸으로 함께 쳐들여 가매 百濟軍은 또 와 막다가 패하여 萬餘 人이 죽었고 羅唐軍은 得勢하여 所夫里 땅에 나아가, 泗沘城을 에워싸았다. 때는 義慈王 20년 7월 12일 이었다. 義慈王은 城門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음식을 豊備히 작만하여 蘇定方에게 보내고 또 왕의 서자의 佐平 등을 보내어 애걸하였으나 다 물리쳤다. 義慈王은 이때야 탄식을 하고 「成忠의 말을 쓰지 안하여 이렇게 되었다」하고 太子와 左右 몇사람을 거느리고 熊津城으로 도망하였고 왕의 次子 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泗沘城을 고수하니 太子의 아들 文思가 왕자 隆더러 「왕이 太子를 더불어 나가시었는데 叔父가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적군이 풀려가는 날이면 우리들이 어찌 온전하리오」하고 드디어 左右을 거느려 줄을 매고 城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도 만히 따르는지라 泰가 禁하지를 못하였다. 왕자 隆은 大佐平 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을 하매 新羅太子 法敏은 그들을 말앞에 꿀어 앉지고 그 얼굴에 침을 배았고 「네 아비가 우리 누의를 죽여 獄中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을 마음을 아프게 하였으나 오날 네 목숨은 내 수중에 달렸다」 꾸짖으매 隆은 땅에 어분드려 아무말도 못하였다. 蘇定方은 士卒을 시켜 城堞 우에 唐의 旗幟를 세우고 泰를 窘迫하였다. 泰는 城門을 열고 내맡겨 버렸다. 義慈王도 太子와 方領軍 등을 거느리고 熊으로서 와 항복하였다. 그 뒤 크게 酒食을 버려 將士을 慰勢할 때 太宗 武烈王와 諸將과 蘇定方은 堂上에 앉고 義慈王과 왕자 隆은 堂下에 앉지고 義慈王을 시켜 술잔을 치게 하였다. 百濟의 群臣은 모다 목이 메이도록 울었다. 그리고도 唐兵은 오히려 틈을 엿보아 新羅마자 삼키려 하고 泗沘언덕에 야영을 하고 묵사기는데 新羅에서는 이걸 알고 王과 群臣이 꾀를 의논하다 마츰내 金庾信의 말로 百濟사람의 옷을 입고 반란을 일으키자 하매 唐兵이 알고 郞將 劉仁願과 군사 1만은 留鎭케 하고 義慈王과 왕족과 臣寮 93人과 백성 1만 2천여 人을 다리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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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史實을 보면 義慈王이 落花岩에서 떠러저 죽었다는 건 한 와전이고 후궁들이 떠러져 죽은 건 그 7월 13일 밤이었다. 義慈王이 熊津城으로 달어나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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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階에 우든 귀또라미도 목이 메이고 送月臺머리로 쉬히 지든 달도 그 밤을 따러 더디 가고 간간 刁斗소리는 처량히 들릴 때 왕과 몇몇 사람은 발자옥소리도 내지 않고 험궂고 호젓한 이 산뒤로 나리어 배에 실려가고 그 많은 후궁들은 등넘어까지 쫓아와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만 씻고 서서 그 배가 虎岩山 모통이로 돌아가는걸 바라보다가 「인자는 만사가 다 글렀다. 인자는 나라도 님금도 또는 榮華와 총애와 모든 희망도 없다.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는건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하고 돌아서 이 바위에 다다러 덧없는 바람에 날리는 꽃처럼 날러 떠러신 것이다. 만일 義慈王도 이 꽃들과 함께 떠러졌드라면 行酒, 포로의 곤욕로 면할뿐더러 이 落花岩도 더욱 빛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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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번 죽는 건 면할 수 없는 일이로되 잘 살기보다 잘 죽기가 더 어렵다. 잘 못사는 이는 살어도 죽었고 잘 죽은 이는 죽어도 살었다. 義慈王은 죽었드라도 成忠과 興首와 階伯과 함께 그 후궁들은 살었다. 이 落花岩을 보라. 그 발자윽, 피 한방울이 흔적도 없지마는 선연히 보이고 들리지 않는가. 펄펄거리는 그 치맛자락, 부드치는 패물소리. 그리고 그 飛火같은 순간과 정열. 그 閃忽한 광경은 한때만 아니라 언제든지 그러리라. 우리의 이 기억과 이 바위가 있을 때까지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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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岩서 북편으로 벼루ㅅ길로 돌아 勾配가 퍽 峻急한 곳으로 나려가면 바루 강ㅅ가요 한편에는 뒤에 석벽을 등지고 조고만 암자가 있으니 이게 高蘭寺. 또는 皐蘭寺라 하여 그 뒤 석벽에 皐蘭이란 풀이 있다 하나 輿地勝覽, 梵宇考같은 책에는 다 高欄寺라 하였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꽤 오래된 고찰이고 서북향을 하여 앞이 툭 터지고 배들은 오고가고 한다. 扶餘 8景에는 曉磬, 暮鍾이라 하였으이나 8景이란건 의례히 瀟湘8景을 모방하여 牽强附會하였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저 碧波우로 하얀 물새 한마리이라도 지칫지칫 날어가는 양이 더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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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한편 물속에서 한 怪石이 내밀어 있다. 감웃한 그 머리는 오목오목 팡졌다. 諺傳하기는 蘇定方이 百濟를 칠 때 이 강을 건느려 하매 급작이 풍우가 크게 일었다. 術者더러 물은즉 術者가 이르되 이 강에 용이 있어 護國을 한다 하였다. 蘇定方이 이 말을 듣고 白馬로 미끼로 삼어 용 한마리를 낚어냈다. 풍우가 바루 그쳤다. 蘇定方의 군사들은 다 건넜다. 그러하여 이 강을 白馬, 이 바위를 釣龍臺라 하고 그 팡긴 자리를 용의 웅킨 자리라 또는 용을 낚을 때 무릅을 끓은 자리라 한다.
 
24
그 팡긴 자리는 水蝕이 된 것이고 白馬江은 그전부터 있든 白江과 어원이 같은 말이겠지마는 그 怪異한 형상을 보고 사실과 공상을 혼동하여 이런 말을 揑造한 것이다. 또 한때 詩名이 喧傳하든 白玉峯을 맞나보고 그 꾀죄한 모양이 명성과는 같지 않음은 嘲弄하여 「白公은 釣龍臺라」하고 일컫든 기생의 일화도 있어 전한다. 이런 전설, 일화도 滋味스러우려니와 딴은 이 세상에 이런 일이 적지 않음을 듣고 볼 때 나는 이 釣龍臺를 그 표적으로 삼고 있을 수 없었다.
 
 
25
(끝)
【원문】기행 낙화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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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기(李秉岐) [저자]
 
  삼천리(三千里) [출처]
 
  1940년 [발표]
 
  기행문(紀行文)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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