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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紀行 統軍亭 (기행 통군정) ◈
해설   본문  
1940.12.
田榮澤 (전영택)
삼천리 제12권 제10호 (발행 1940년 12월 01일)
1
安州에 百祥樓, 義州에 統軍亭은 關西의 명승지로 朝鮮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다. 그 중에도 統軍亭은 半島八景이 하나로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歷史의 遺蹟으로, 잊지 못할 곳이다. 더욱이 國境의 關門으로 浩*한 遼東平野 南面에 悠悠히 흐르는 鴨綠江邊에 屹立한 偉觀은 胸中에 雄圖를 품은 經世男兒가 한번 오르매 快哉快哉를 부를 만한 자리다.
 
2
이 統軍亭이 언제 建立되었는지 詳考할 바 없으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高麗때에 이미 있었든 것이 분명하고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宣祖께서 亂을 피하야 이 땅에 이르러 明의 授兵을 鴨綠江에 마지하고 還京 後에 記念으로 이를 修築하고 其後 肅宗朝에 府尹 洪處厚가 개축하였다고 한다. 하여간에 그 이름이 統軍亭인 것을 보아서 우리 祖上들이 遼東遠征의 壯擧를 試할때마다 대군을 統御하고 號令하는 軍事上에 극히 중대한 지점이든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麗朝時에 遼兵이 邊地를 侵害하는 것을 防備하기 위하야 設備한 烽火臺라는 민간의 傳說은 너머도 무식하고 소극인 말이다.
 
3
줄기차게, 嚴然이 흐르는 鴨綠江의 푸른 물결을 줌차서 바로 건너 胡地의 大虎山과 멀리 九連城의 疊郭이 바라보이는 大陸의 門어구를 엿보는 義州城 北의 이 樓亭은 匹夫匹婦의 눈에도 尋常치 않게 보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내가 이 統軍亭에 놀아 본 것은 벌써 10년 전 옛일이라 히미한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대로 그때의 感懷를 적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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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마츰 봄날의 석양. 義州城 內에 사는 某友와 한가지로 지팽이를 끌고 徐徐히 邑의 북쪽 언덕을 향하야 걸음을 옴겼다. 이윽고 펀펀한 언덕 가까이 이르며 空中에 우뚝 솟은 듯한, 古色이 蒼然한 樓閣의 처마 한끝이 보인다. 나는, 아직 國境을 넘어 大陸의 한끝에 발을 디려 놓아 본 일이 없는지라, 우리 땅의 한끝에 나서서 渺茫한 遼東大野一瞥之下에 내다 볼 적에 우리 祖上이 크다란 野心을 가지고 雄飛하든 舞臺가 눈앞에 展開되매 내 가슴은 壯快하고 感慨한 나마에 문득 가슴은 뛰놀았다.
 
6
頹落한 담과 군대군대 빠진 마루가 모처럼 멀리서 온 客의 마음에 쓸쓸한 感懷를 주는 것을 도라 볼 새도 없이 나는 마루 한 끝에 앉아 눈을 들어 앞을 내다 보았다. 悠悠히 흐르는 長江의 碧이 우선 눈에 띄우고 건너편에 點點이 앉어있는 大虎山의 奇峯이며 九連城의 雄姿, 가까히는 安東市街와 新義州市街가 빤히 보이고, 저편으로 강 가운데 누어있는 威化島와, 멀리 鴨綠江이 구비구비 흘러간 저 끝에 멀리 雲霧가운데 아득히 보이는 龍岩浦河口의 模樣이 그리고 江上에 한가히 떠나가는 광경을 볼 때에 돌연이 大家의 名作인 풍경화 한폭을 대한 듯한 絶景은 그저 웅대하다. 悠長, 浩蕩하다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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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츰 힌 연기를 토하면서 鴨綠江 물위로 달리는 쇠당나귀의 기운찬 고동소리에 문득 정신차린 나는 비로소 옆에 동무가 서 있는 줄을 깨닫고 그를 도라보고,
 
8
『참 좋은데!』
 
9
한 마듸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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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시언하지! 그래두 우린 그렇게 좋은 줄을 몰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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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는 이는 늘 보니까 그렇게 좋은 줄을 모르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이렇게 시언한 景致는 처음인데!』
 
12
나는 친구로 더브러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樓亭이 남아 있는 터전을 살펴보았다. 주위가 만여평이나 될 듯한 펀펀한 地址臺에는 각색 화초 수목이 무성하야 一大 公園을 지었는데 군대군대 통나무를 꽂고 걸상을 設置하야 近代都市公園의 미와 시설을 가초아 놓은 품이 매우 깨끗하고 情楚하여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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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즉 해마다 사구라꽃 필 때에는 꽃노리하는 손들이 放歌亂舞하야 一場浪藉한 風景을 일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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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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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이 땅이 비록 무심한 취객의 노리터로 化하였지마는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名人志士가 斯亭에 올라서 가슴에 사모친 感懷에 눈물지었으며 詩人墨客이 발을 멈추어 名句絶唱을 吐하고 才子佳人의 가슴을 뛰게 하고 노래가 울어나게 하였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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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이 넓은 이 터가 遊客收童의 한가한 자리가 되였지마는 옛날에는 壯烈肅然한 遠征軍의 望臺와 野營處가 되였을 것이오 近古에 이르러서도 契丹, 金人 等 外賊을 물리치는 防禦使의 關防으로 어마어마한 軍備砲臺이었다. 근대에는 日淸 日露 兩役에 다 我軍의 사령부를 두고 敵軍을 指呼의 間에 몰아 대첩을 期한 곳으로 당시 敵彈이 많이 들어 백혔든 흔적이 亭柱에 歷然이 남어 있어 東洋平和와 大陸經營에 奮鬪하든 戰跡을 黙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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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편에서 滿洲大陸으로 進擊한 일이 여러번 있었으나 그 가장 오랜 史實은 아마 新羅의 金允中(庾信의 孫)이 唐의 要請으로 渤海를 치려고 大軍을 거느리고 義州 近方에 이르렀나가, 積雪이 丈餘로 길을 찾을 수 없고 방향을 알 수 없어서 事勢 不得已 도라온 일이 있었고 其後에 高麗 恭愍王時 西間島征伐과 其後 다시 遼陽을 攻陷한 일이 있었지마는 가장 대규모로 大陸遠征을 圖謀하였든 것은 高麗 말년에 崔瑩將軍의 主張과 지휘로 新興 明나라의 遼陽攻擊을 단행하였든 것이다. 이 실로 千古 이래에 가장 한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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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高麗가 그 건국이상과 지리적 관계로 北進略策을 취할 수밖에 없어 늘 동북과 서북으로 진출을 꾀하였으나 번번이 如意치 못하였는데 마침 元이 쇠약해지고 明이 新興勢力을 떨치는 틈을 타서 恭愍王은 크게 기세를 얻어 국내의 元의 세력을 排擊하고 北方邊境의 地域을 回收하는 등 排蒙政策을 취하는 동시에 일면으로 明과 通和策을 취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恭愍王 23년에 明使 蔡斌 등이 돌아가는 길에 그를 護送하든 金義라는 사람에게 살해를 당한 사건이 이러난 이후 明의 태도가 돌변하야 威壓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자 褐王 13년에 遼東으로부터 도라온 자가 『明帝는 장차 處女, 秀才, 宦官 등 각 1천, 牛馬 각 1천을 요구하려고 한다』고 報하였다. 이 말을 듣고 朝廷에서는 모도 크게 근심하였으나 오직 崔瑩장군은 『明이 이같이 할진대 병을 이르켜 치는 것이 가하다』고 强硬이 주장하였다. 高麗에서는 처음부터 對明國交에 자못 성의를 보여 왔으나 明의 태도가 이렇게 까다라워지니 朝廷에는 崔瑩을 중심으로 排明熱이 날로 높아젔든 것이다. 이러한 즈음에 明의 「通聘拒絶」과 본래 元에 속하였든 鐵嶺以北의 地를 遼東에 부칠랸다는 報를 듣고 王께 勸하야 비밀이 遼東征伐의 계획을 세웠든 崔장군은 마츰내 8도에서 大兵을 徵募하여 우선 東郊에서 閱兵하고 褐王은 遼陽攻擊의 令을 내렸다. 이때에 일즉 北賊 南冠을 擊破하야 大功을 세움으로 당시 崔瑩와 어깨를 견울만한 位勢를 갖었든 李成桂는 여러가지 理由로 屯師의 불가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崔瑩은 王에게 自己의 主張을 끝까지 세워 드디어 遼東攻伐을 斷行하기에 이르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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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明의 遼東兵이 다 北元征伐에 나가고 遼陽의 방비가 虛弱하다는 情報가 있고 兼하야 元으로부터 遼東夾擊을 請해 온 일까지 있으므로 崔瑩은 遼東征伐에 자못 자신을 가지고 擧事를 하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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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褐王이 平壤에 나아가 그곳으로 各道의 兵師를 集中하고 妙香山 등지의 儈徒를 소집하야 군에 充當하고 大護軍 裴短을 시켜서 鴨綠江 上에 浮橋를 架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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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瑩은 8道都統使가 되고 曺敏修로 左軍都統使, 李成桂로 右軍都統使를 삼아 5만 대군을 몰아 국경을 향하야 遼陽進擊의 壯途에 올랐든 것이다. 褐王은 崔瑩으로 더브러 平壤에 留駐하야 전군 지휘에 當하고 있는데 李成桂, 曺敏修는 威化島에까지 이르러서 回軍하기를 奏請하여 보았으나 종내 聽許되지 아니하자 마츰 딴 野心을 품고 있던 李成桂는 一代의 決心과 勇斷으로 回軍을 감행하야 槍머리를 꺽구루 대군을 끌고 도라섰다. 이것이 유명한 威化島回軍이라는 것이니 이 사건은 다만 崔瑩의 千古 遺恨일 뿐만 아니라 對外的으로 보아 朝鮮史上의 一大痛恨事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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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의 세력은 떨어지고 明의 세력은 떨치지 못하는 과도기인 이때에 無主空地같은 遼東(今日의 滿洲)을 처서 東明舊域을 恢復하여 一擧에 歷史的 問題를 끝내려고 하였든이 壯擧가 第3次의 遠征을 최후로 永久히 失敗에 돌아갔으니 眞實로 恨事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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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崔瑩장군은 松京에 앉어 있어도 能히 天下의 大勢를 살피고 曠漠한 大滿洲를 내다보고 一擧에 征伐하야 高麗民의 舞臺를 넓히고저 하든 雄圖를 품어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것도 介意치 아니하고 斷行하였거늘 같은 장군 李成桂는 필시 統軍亭上에 올라서서 눈앞에 展開된 沃野大陸을 몸소 바라보았으련마는, 半島안에 동방과 서북에 進路가 매킨 跼蹐하게 된 좁은 地域에서 王노릇 할 榮譽에 汲하였든고. 혹 契丹 女眞 等 征伐의 經驗으로 너머 눈이 밝음이었든가, 황막한 대륙을 바라보다가 자기의 역량을 살피어 비겁한 마음이 이러났든가, 위인이 崔瑩만큼 크지 못하여 小成에 滿足하려 하였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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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崔장군이 遼東遠征의 大擧를 李成桂 등 丈夫에게만 매껴두고 平壤城 내에 閒悠하게 머물어 있지 말고 親히 軍士를 거느리고 나와서 적어도 義州에까지 와서 日淸戰役 時의 山縣이나 日露戰役에 黑木大將과 같이 統軍亭에다가 사령부를 두고 全軍을 號令 督勵하야 대륙으로 대륙으로 질풍같이 진군케 하였드면!하는 한탄을 뜻있는 사람이 뉘 아니하랴마는 統軍亭도 主人은 만나지 못하였음을 얼마나 한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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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統軍亭上에서 묵묵이 이런 생각을 하고 혼자서 옵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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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軍亭아 말 무러보자 저기 저 威化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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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桂 말머리를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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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軍令을 내릴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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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마나 怨痛하였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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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네가 입이 있었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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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桂야 썩썩 진군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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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서지말고 진군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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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소리 질으지 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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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桂 도라서면 너라도 代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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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갓!」號令을 못했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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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리켜 일즉이 井上圓了博士가 此亭에 來遊할 때에 읊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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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州城畔統軍亭 戰跡風光一望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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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澤潤如春雨晴 十霜洗盡血痕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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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一詩를 음저리고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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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이로 구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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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이 統軍亭에 와서 잊지 못하고 가슴에 떠올는 생각은 天主敎의 최초 순교자인 金大建 神父다. 厦門에 가서 神學을 修하고 이 땅에 매마른 心田을 개발하여 예수의 十字架殉死의 道와 救靈新生의 福音을 전하려고 萬難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을 때에 마츰내 압록강 대안에 이르러 멀리서 고국의 산천을 바라보고 統軍亭의 雄姿를 건너다보고 그는 얼마나 가슴이 뛰놀고 속이 졸였든고. 甚한 監視와 檢査를 幸이 벗어나서 國境 內에 들어선 그가 도리켜 統軍亭을 도라보고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에게 눈물로 감사를 드렸으랴. 이때에도 統軍亭이 말을 한다면 이 靈界의 용사가 도라오는 것을 보고 기뻐 환영하는 말 한마디를 하였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4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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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