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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常綠樹) ◈

◇ 7.불개미와 같이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 7.불개미와 같이

1
청석골서 한 십 리쯤 되는 흑석리(黑石里)라는 동리에, 그 근처에서 제일가는 부명을 듣는 그 한낭청 집에서는 주인 영감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한낭청은 한곡리의 강도사 집보다 몇 곱절이나 큰 부자로(천 석도 넘겨 하리라는 소문이 난 지도 여러 해나 되었다) 근처 동리를 호령하는 지주다.
 
2
'큰 소를 한 마리나 잡아 엎었다더라―---'
 
3
'읍내에서 기생하고 광대를 불러다가 소리를 시키고 줄을 걸린다더라―---'
 
4
인근 각처에 소문이 굉장히 퍼졌다. 청석골서도 그 집의 논을 하는 작인들은 물론, 갓을 빌려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늙은 축들이 십여 명이나 떼를 지어 구경을 갔다. 여편네들도 풀을 세게 먹여서 버석거리는 치마를 빼질러 입고 그 뒤를 따랐다. 소를 통으로 잡아 엎고 기생 광대까지 놀린다는 것은, 이 궁벽한 시골서 구경거리에도 주린 그네들에게 있어서 몇십 년에 한 번 만날지 말지 한 좋은 기회이다.
 
5
'떵기덩 떵더꿍.'
 
6
'닐리리 닐리리 쿵다쿵.'
 
7
한낭청 집 널따란 사랑마당 큰 느티나무 밑에는 차일을 치고 마당 양 귀퉁이에는 작수를 받치고 팔뚝 같은 굵은 참밧줄을 핑핑히 켕겨 놓았는데, 갓을 삐딱하게 쓴 늙은 풍악잡이들이 북, 장구, 피리, 젓대, 깡깡이 같은 제구를 갖추어 풍악을 잡히기 시작한다. 주인 영감이 큰상을 받은 것이다. 덧문을 추녀 끝에 추켜 단 큰사랑 대청에는 군수의 대리로 나온 서무주임 이하 면장, 주재소 주임, 금융조합 이사, 보통학교 교장 같은 양복장이 귀빈들은 물론, 일가친척이 각처서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툇마루 끝까지 그득히 앉았다. 교자상이 몫몫이 나와서, 주전자를 든 아이들은 손님 사이를 간신히 부비고 다닌다. 읍내서 자동차로 사랑놀음에 불려 온 기생들은(기생이래야 요릿집으로 팔려 온 작부지만) 인조견 남치마에 무릎을 세고 앉아서 풍악에 맞추어,
8
만수산 만수봉에 만년장수 있사온데,그 물로 빚은 술을 만년 배에 가득 부어,이삼 배 잡수시오면 만수무강하오리다.
9
하고 권주가를 부른다.
 
10
주인의 오른편에서 노랑 수염을 꼬아 올리고 앉았던 면장은,
 
11
"사, 간상 드시지요. 사, 이케다상."
 
12
하고 커다란 은잔을 들어 주인과 주재소 수석에게 권한다. 십여 년이나 면장 노릇을 하면서도 한 획 가로 긋고 두 획 내려 그은 것이 'サ'자인 줄도 모르건만, 긴상 복상은 곧잘 부를 줄 안다. 달리 부를 수 있는 자리에도 '상'자를 붙이는 것이 고작 가는 존대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13
난흥이라고 부르는 기생은, 잔대를 들고 노란 치잣물 같은 약주가 찰찰 넘치는 잔을 들어 손들이 권하는 대로 주인 영감에게 받들어 올린다. 한낭청은 반백이 된 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어 올리고, 그 술이 정말 불로장생의 선약이나 되는 듯이 높이 들어 쭈욱 들이마시곤 한다.
 
14
깍짓동처럼 뚱뚱해서 두 볼의 군살이 혹처럼 너덜너덜하는 한낭청에게 버드나무 회초리 같은 계집들이 착착 부닐면서 아양을 떠는 것도 한 구경거리다.
 
15
이윽고 풍류 소리와 함께 헌화하는 소리와 웃음 소리가 일어난다. 술 주전자를 들고, 혹은 진 안주 마른 안주를 나르는 사내 하인과 계집 하인이 안 중문으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 동안에 주객이 함께 술이 취하였다.
 
16
아침부터 안 대청에서 자여질들이 헌수하는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나온 한낭청은, 사방 삼십 센티미터나 됨직한 얼굴이 당호박처럼 시뻘겋게 익었다. 그 얼굴에다가 조그만 감투를 동그마니 올려놓은 것이 족두리를 쓴 것 같아서, 기생들은 아까부터 저희끼리 눈짓을 해가며 낄낄대고 웃었다.
 
17
주인과 늙은 손들은 무릎 장단을 치며 시조를 부르다가 서로 수염을 끄두르며 기롱을 하기 시작하고, 체면을 차리고 도사리고 앉았던 면장도 분을 횟박같이 뒤집어쓴 기생들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며 음탕한 소리까지 하게 되었다.
 
18
"여봐라, 큰애 어디 갔느냐?"
 
19
한낭청은 위엄 있게 불렀다. 뒤처져 온 손들의 주안상을 분별하던 큰아들이 올라와 두 손길을 마주 잡았다.
 
20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니, 저 손들두 얼른 내다 먹여라. 취투룩 먹여. 오늘 내 집에 술이야 떨어지겠느냐."
 
21
하고는 뜰 아래에 쭈그리고 앉고 혹은 멀찌감치 돌아서서 담배를 태우는 늙은 작인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분부를 내렸다.
 
22
머슴들은 바깥 마당에다가 멍석을 주욱 폈다. 막걸리가 동이로 나오는데 안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건만, 그네들의 안주는 콩나물에 북어와 두부를 썰어 넣고 멀겋게 끓인 지짐이와, 시루떡 부스러기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매방앗간에, 지난밤부터 진을 치고 있던 장타령꾼들이 수십 명이나 와르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해가며 음식을 집어 들고 달아났다.
 
23
삼현 육각이 자진가락으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아뢰고, 광대가 마악 줄을 타고 올라설 때였다. 구경꾼이 물결치듯 하는데 거진 오륙십 명이나 됨직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여선생의 인솔로 큰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24
그 여선생은 영신이었다. 학원을 지으려는 데만 열중한 그는, 그 전날도 기부금을 거두려고 삼십 리 밖 장거리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그곳 교인의 집에서 묵고 아침에 떠나서 오는 길에 서너 집이나 들르느라고 점심때도 겨워서 흑석리 동구 앞까지 당도하였다.
 
25
청석골서 아직도 담을 넘겨다보며 글을 배우고 땅바닥에 글씨를 익히고 하던 아이들은 점심들을 먹으러 가는 길에 채선생이 오는 것을 신작로에서 먼발치로 보고는,
 
26
"얘, 저어기 우리 선생님 오신다."
 
27
한 아이가 외치자, 여러 아이들은,
 
28
"선생님!"
 
29
"선생님!"
 
30
하고 부르며 앞을 다투어 달려왔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가는 동무들까지 소리쳐 불러서, 어느 틈에 삼사십 명이나 영신을 둘러쌌다. 비록 하루 동안이라도 떠나 있다가 타동에서 만나니까, 피차에 몇 달 만에 얼굴을 대하는 것만치나 반가웠다. 영신이가,
 
31
"너희들은 먼첨들 가거라. 난 저 기와집엘 댕겨갈 테니……."
 
32
하고 떼치려니까, 이이들은,
 
33
"나두 가유."
 
34
"선생님 우리두 갈 테유."
 
35
하고 뒤를 따른다. 영신은 그 집에 오늘 잔치가 벌어진 줄은 까맣게 몰랐건만, 어른들에게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한부잣집 잔치에 청좌를 받고 가는 줄만 여기고, 속심으로는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기를 쓰고 대서는 것이다.
 
36
한낭청은 체면에 못 이겨서, 또는 취중에 자기 손으로 기부금을 오십 원이나 적었었다. 그런 지가 벌써 돌이 돌아오건만 요리조리 핑계를 하고 오늘날까지 한푼도 내지를 않아서 요전번처럼 영신에게 창피까지 당하였었다.
 
37
오십 원짜리가 가장 큰 머리라, 영신은 그 돈으로 우선 재목이라도 잡아 보려고 십여 차나 그 집 문지방을 닳린 것인데, 근자에 와서는 부자가 다 안으로 피하고 만나 주지도 않을 뿐더러, 도의원 후보자로 군내에 세력이 당당한 한낭청의 맏아들은, 채영신이가 기부금을 강청해서 주민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고, 경찰서에 가서 귀를 불었기 때문에 영신이가 주재소까지 불려가서 설유를 톡톡히 받았었고, 강습하는 아동이 제한당한 것만 하더라도 그 여파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수록 영신은,
 
38
'어디 누가 견디나 보자.'
 
39
하고 단단히 별러 오던 터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한낭청의 환갑날 또다시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집에 잔치가 있어서 동네 어른도 많이 갔다는 말을 비로소 아이들에게 들은 영신은,
 
40
'옳다구나, 마침 잘 됐다. 오늘이야 설마 아니 만나진 못허겠지.'
 
41
하고 아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42
'여차직하면 만인좌중에 그 돼지 같은 영감쟁이 고작을 들었다 노리라.'
 
43
하고는 일종의 시위운동도 될 듯해서 조무래기는 쫓아 보내고, 머리 굵은 아이들을 이십 명 가량만 추렸다. 그러나 큰 구경이나 빼어 놓고 가는 줄 알고,
 
44
"나두 나두."
 
45
하고 계집아이들까지 중간에서 행렬에 달라붙고 하여서, 그럭저럭 오륙십 명이나 따라오게 된 것이다. 영신은,
 
46
"그 집에서 음식을 주드래두, 너희들은 받어 먹거나 싸갖구 가선 안 된다."
 
47
하고 단단히 단속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낭청 집에 솟을대문이 바라다보이는 큰 마당터까지 와서는,
 
48
'칩칩허게 음식이나 얻어먹으러 애들까지 데리고 오는 줄이나 알지 않을까.'
 
49
'아무튼 그 집의 경사날인데, 우르르 몰려가는 건 체면상 좀 재미 적은걸.'
 
50
하고 두세 번 돌쳐설까 하고 망설였다.
 
51
'가뜩이나 나를 못 믿겠다는데, 아주 상스런 여자나 흑작질꾼으로 치부를 하면 어떡허나?'
 
52
하고 뒤를 사리려고 하다가,
 
53
'계획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담에야 내친걸음에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서는 것도 비겁하다.'
 
54
하고 용기를 돋아 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55
광대는 꽃부채를 펴들고 몸을 꼬느면서 줄을 타고 앉았다 일어섰다 용춤을 추다가 아래서 어릿광대가,
 
56
"여봐라, 말 들어라."
 
57
하고 먹이면, 줄 위의 광대는,
 
58
"오오냐, 말만 던져라."
 
59
하면서 재담을 주고받는다.
60
높은 산에 눈 날리듯얕은 산에 재 날리듯억수 장마 비 퍼붓듯대천 바다 조수 밀듯
61
하고 이 댁에 돈과 곡식이 쏟아지고 밀려들라고 덕담을 늘어놓으면, 기생들은 대청 위에서,
62
얼씨구 좋다 절씨구지화자 좋다 저리시구
63
하고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장아장 주인의 앞으로 대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64
그 판에 영신의 일행은 사랑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빈객들은,
 
65
"이거 별안간 웬 아이들야?"
 
66
하고 서로 술취한 얼굴을 돌려다보는데, 줄 위에 오른 광대는 아이들이 발바닥 밑으로 우르르 달려드는 사품에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발을 헛딛고 떨어질 뻔하였다.
 
67
영신이도 잠시 어리둥절해서 당상 당하를 둘러보다가, 여러 사람의 눈총을 한몸에 받으면서 댓돌 아래로 다가섰다. 몹시 불쾌한 낯빛으로 '저 딱장대가 또 뭘 허러 왔을까' 하고 영신의 행동을 말없이 보고 섰던 도의원 후보자는 여러 사람 앞이라 주인의 체모를 차리느라고 영신의 앞으로 와서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여 보이며,
 
68
"아, 사이상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온 허두 정신이 쓰라려서 미처 청첩두 못 했는데……."
 
69
하고 작은사랑 편으로 올라가라고 손바닥을 펴대며 인도를 한다. 영신은 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예를 하고는,
 
70
"네, 고맙습니다. 올라가지 않어두 좋습니다."
 
71
하고 마주 굽실거리다가 큰마루 위를 향해서 늙은 주인도 들으라는 듯이,
 
72
"우리는 불청객이올시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 주인 영감께 축하의 말씀 한마디도 아니 드릴 수가 없어서 오는 길에 아이들까지 이렇게 따러 나왔습니다."
 
73
하고 만취가 된 한낭청을 똑바로 쳐다본다. 늙은 주인은 정신이 몽롱한 중에도 영신을 알아본 듯 게게 풀린 눈자위로 마당 그득히 들어선 아이들을 내려다보더니,
 
74
"허어, 귀헌 손님들이로군. 조것들꺼정 내 환갑날을 어떻게 알었든고?"
 
75
하고 수염을 내려 쓰다듬으며 매우 만족한 웃음을 웃고는,
 
76
"큰애 게 있느냐?"
 
77
하고 위엄 있게 큰아들을 불러 세우더니 아이들을 먹일 음식상을 차려 내오라고 명령한다.
 
78
"아니올시다. 우린 음식을 먹으려구 오질 않었습니다."
 
79
하고 영신은 손을 내저었다. 젊은 주인은 어쩐지 형세가 불온해서 속으로는 적지 않이 켕기건만,
 
80
"머처럼 이렇게 오셨는데, 도무지 차린 게 변변치 않어서……."
 
81
하고 어름어름하다가 돌아서며,
 
82
"저 숱한 얘들을 뭘 다 노나 먹인담……."
 
83
하고 군소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84
마루 위의 손들이 파흥이 된 것을 불쾌히 여기는 눈치를 채고 한낭청은 기둥을 붙들고 일어서며,
 
85
"아아니, 광대놈들은 뭘 허는 셈이냐?"
 
86
하고 역정을 낸다. 풍악 소리는 다시 일어나고 광대는 비실거리며 줄을 걷는다. 마당 가장자리에 조옥 둘러앉은 아이들은 광대가 줄을 타고 달리다가 뒷걸음을 쳤다가 하는 것을 정신없이 쳐다본다. 그 중에도 계집애들은 간이 콩만해지는 듯,
 
87
'애그머니!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나.'
 
88
하고 아슬아슬해서 손에 땀을 쥔다. 영신이도 광대가 줄을 타는 것을 처음 보아서 그편을 쳐다보고 섰는데, 이 집의 머슴들은 장타령꾼과 머슴애들이 먹던 그릇을 말끔 몰아 가지고 들어갔다.
 
89
조금 뒤에는 그 사발 대접을 부시지도 않고, 고명도 없는 밀국수에 장국 국물을 찔끔찔끔 쳐가지고 나와서는 그나마 두세 명에 한 그릇씩 안긴다. 그것을 본 영신은 크나큰 모욕을 느끼고 금시 눈에서 불이 나는 듯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90
"여보, 우린 그런 음식 안 먹소!"
 
91
하고 꾸짖듯 하고는 머슴들의 앞을 딱 가로막아 섰다.
 
92
어떤 아이는 일러 준 말을 잊어버리고 국수 그릇에 손을 내밀다가 옴실하고 선생의 눈치를 살핀다.
 
93
"아, 왜 이러시나요? 준비헌 건 없지만 온 주인 된 사람이 무안허군요."
 
94
젊은 주인은 영신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얼더듬는다. 그 태도는 기부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던 때와는 딴판이다.
 
95
한편에서는 배불리 얻어먹은 장타령꾼의 두목인 듯한 푸댓조각을 두른 자가 안 중문으로 들이대고 헛침을 튀튀 뱉더니,
 
96
"얼씨구 들어왔네, 품 품 품바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두 않구 또 왔소―--- 냉수 동이나 마셨느냐, 시원시원 잘두 헌다. 뜨물 동이나, 들이켰나, 걸직걸직 잘두 한다."
 
97
하고 곤댓질을 하니까, 머리를 충충 땋아 늘인 총각 녀석이 뒤를 대어,
 
98
"에― 하늘천자를 들구 봐, 자시에 생천하니 호호탕탕 하늘천, 축시에 생지하니 만물창생 따아지."
 
99
하고 천자 뒤풀이를 청승맞게 한다.
 
100
광대는 줄에서 뛰어내려 땅재주를 훌떡훌떡 넘다가,
 
101
"사부댁 존전에 그저 처분만 바랍니다."
 
102
하고 댓돌 위로 홍선을 펴들고 기생들에게 눈짓을 슬쩍 한다. 기생들은 그 눈치를 약빨리 채고,
 
103
"아이고 영가암, 몇 장 처분해 줍쇼그려어."
 
104
하고 화롯가에 붙인 촛가락처럼 이리 곤드라지고 저리 곤드라지는 양복쟁이들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것을 본 한낭청은,
 
105
"옜다, 그래라. 이런 때 돈을 못 쓰면 저승에 가 쓰겠느냐."
 
106
하고 새빨간 염낭을 끄르더니 지전 한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 광대의 얼굴에다 끼얹듯이 내던진다. 가랑잎처럼 휘돌다가 댓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일 원짜리는 아니다. 어릿광대는 지전을 집어 들고 주인에게 수없이 합장을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그 수없는 사람의 손때가 묻은 지전을 입에다 물고 배운 재주는 다 부리는데, 대청 위에서는 기생들이 손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한다.
 
107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영신의 눈은 점점 이상한 광채가 돌기 시작한다. 한낭청은 첩에게 부축이 되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가, 아이들이 그저 마당에 가 쪼그리고 앉은 것을 보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108
"쟤 쟤들은 왜 여태 저 저러구 앉었느냐?"
 
109
하고 만경이 된 것 같은 두 눈의 흰자위를 굴리며 영신을 내려다본다. 영신은 마당 한복판으로 썩 나섰다.
 
110
"우리들이 댁에 뭘 얻어먹으러 온 줄 아십니까?"
 
111
그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112
"그 그럼 뭐 뭘 허러 왔노?"
 
113
"돈을 하두 흔허게 쓰신다길래 여기 손수 적어 주신 기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114
영신은 주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부금 명부를 싼 책보를 끄른다. 낭청은,
 
115
"기부금? 아 그래 쇠털 같은 날에, 하 하필 오늘날 성군작당(成群作黨)을 허구 와서 내란 말야. 기 기부금에 거 걸신이 들렸군."
 
116
하고 사뭇 호령을 하고는 돌아서려고 든다. 영신은 뚱뚱보의 앞을 떡 가로막아 서며,
 
117
"안 됩니다. 오늘은 만나 뵌 김에 천하 없는 일이 있어두 받어 가지구야 갈 텝니다."
 
118
하고 야무지게 목소리를 높인다. 손들과 구경꾼들이며 기생 광대 할 것 없이 어안이 벙벙해서 여선생을 주목한다. 영신은 마당 가득 찬 여러 사람을 향해서,
 
119
"여러분, 이런 공평치 못한 일이 세상에 있습니까? 어느 누구는 자기 환갑이라구 이렇게 질탕히 노는데, 배우는 데까지 굶주리는 이 어린이들은 비바람을 가릴 집 한 간이 없어서 그나마 길바닥으로 쫓겨났습니다. 원숭이 새끼처럼 담이나 나뭇가지에 가 매달려서 글 배는 입내를 내고요, 조 가느다란 손고락의 손툽이 닳도록 땅바닥에다 글씨를 씁니다!"
 
120
하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목구멍에 피를 끓이는 듯한 어조로,
 
121
"여러분, 이 아이들이 도대체 누구의 자손입니까? 눈에 눈물이 있고 가죽 속에 붉은 피가 도는 사람이면, 그 술이 차마 목구녁으루 넘어갑니까? 기생이나 광대를 불러서 세월 가는 줄 모르구 놀아두, 이 가슴이―--- 양심이 아프지 않습니까?"
 
122
하고 부르짖으며 저의 앙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123
손들은 도가 넘도록 취했던 술이 당장에 깬 듯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데, 한낭청은 어느 틈에 안으로 피해 들어가고 젊은 주인은 영신의 앞을 막아 서며,
 
124
"사이상, 온 이거 어느새 망령이시구려. 오늘 같은 날 참으시지요. 일이 잘못 됐으니 그저 참어 주세요. 그 돈은 저녁 안으루 꼭 보내 드리리다."
 
125
하고 말씨가 명주 고름 같아지며 머리를 수없이 숙여 보인다.
 
126
영신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숨만 가쁘게 쉬고 섰는데, 처음부터 누마루 한구석에 앉아서 영신의 행동을 노리고 내려다보던 주재소 수석의 눈은 점점 날카롭게 빛났다.
 
127
……그날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영신은 경찰서 유치장 마루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본서까지 끌려가서 구류를 당하던 경과며, 그 까닭은 오직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128
동혁은 청석골이 가보고 싶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그가 활동하는 모양이 보고 싶었다. 날마다 이일 저일에 얽매어서 잠자는 시간밖에는 공상할 틈조차 없기는 하지만,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무뜩무뜩 영신의 생각이 나면 손을 쉬고 발을 멈추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머엉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습관이 부지중에 생겼다.
 
129
'그가 꿈결같이 댕겨간 지가 언제이던가.'
 
130
하면 적어도 사오 년은 된 성싶었다. 편지만은 끊임없이 내왕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웬일인지 열흘이 훨씬 넘도록 영신의 소식이 끊어져서 여간 궁금히 지내지를 않았다.
 
131
그러다가 일전에야 기다란 편지가 왔는데 한낭청이란 부잣집에 기부금을 걷으러 가서 창피를 당하고 분풀이를 실컷 하다가, 일주일 동안이나 고초를 겪었다는 것과 앞으로는 기부금 명부에 이름을 적은 사람에게도 자발적으로 주기 전에는 독촉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예배당 문까지 닫으라고 딱딱 얼러메는 것을 간신히 양해를 얻기는 했으나,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청석학원 하나는 기어이 짓고야 말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보인 사연이었다.
 
132
그러면서도 한번 구경이라도 와달라는 말은 비치지도 아니한다. 반드시 청좌를 해야만 갈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와달랄까 하고 동혁은 편지마다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오는 편지마다 판에 박은 듯한 사업보고요, 고생하는 이야기뿐이다. 동혁은 그런 편지를 받을 적마다,
 
133
'나두 어지간히 버티는 패지만, 나버덤두 한술 더 뜨는걸.'
 
134
하고 편지를 동댕이치는 때도 있었다. 가기만 하면야 반가이 맞아 줄 것은 물론이나, 사실 내왕 노자도 어렵고, 별러 별러서 간댔자 급한 볼일 없이 며칠 동안이나 버정거리다가 오기는 싱겁고 멋쩍은 일일 것 같았다. 첫째, 남자 친구를 찾아가는 것과 달라서 하룻밤이나마 묵을 데도 만만치 않을 듯하고, 둘이 함께 얼려 다니고 마주 붙어앉아 이야기라도 하면 노처녀인 영신이가 제가 당한 것보다도 곱절이나 부질없는 놀리움을 받을 것도 상상되었다. 그래서,
 
135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꾹 참자.'
 
136
하고 피차에 일하는 것밖에 다른 생각은 아주 책장을 덮어 두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37
그러나 늙은 총각의 가슴속에 한번 호되게 붙어당긴 사랑의 불길은 의식적으로 참고 억지로 누른다고 쉽사리 꺼질 리가 없었다. 시뻘건 정열이 휘발유를 끼얹은 듯이 확 하고 붙어당길 때는 머리끝까지 까맣게 그슬릴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일이다, 일! 그저 들구 일만 허는 것이 그와 완전히 결합될 시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동안의 최면제도 되고 강심제도 된다.'
 
138
하고 식전부터 오밤중까지도 동네 일과 집안 일로 몸을 얽어매었다. 돈 있는 집 자식들이 몸뚱이가 아편쟁이처럼 비비 틀리도록 무료한 세월을 술과 계집 속에 파묻혀서 보내려고 드는 것처럼.
 
139
그래도 억제하기 어려운 청춘의 본능이 피곤한 육체를 괴롭게 굴 때에는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랫도리까지 발가벗고 냉수를 끼얹고는, 엇 둘 엇 둘 하고 체조를 한바탕 하고 들어와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눈을 딱 감으면 한결 잠이 쉽게 들었다.
 
140
한편으로 그가 영신을 될 수 있는 대로 호의로써 이해하려는 것도 물론이다. 그만한 나이에 다른 여자들 갔으면 몸치장이나 하기에 눈이 벌겋고, 돈 있고 소위 사회에 명망이 있는 신사와 결혼을 못 하면, 첩이라도 되어서 문화생활을 할 공상과, 그렇지 않더라도 도회지에서 땀 아니 흘리는 조촐한 직업도 없지 않건만, 유독 '채영신'에게는 다만 한 가지 허영심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141
'나는 못 속이지.'
 
142
하고 동혁이가 자신 있게 맥을 짚어 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143
'청석학원을 온전히 저 한 사람의 힘으로 번듯하게 지어 놓고, 교장 겸 고쓰가이(小使) 노릇까지 하더라도, 내가 이만헌 사업을 하고 있노라.'
 
144
하고 백현경이나 다른 농촌 운동자들에게 보여 주고, 애인인 저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그 허영심만이 충만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였다. 그러니까 자기의 사업의 기초는 어느 정도까지 잡혔더라도, 외형으로 눈에 번쩍 띄는 것을 만들어서 보여 주기 전에는 저를 청석골로 부르지 않으려는 그 여자다운 심리가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145
한곡리의 안산인 소대갈산 마루터기에, 음력 칠월의 초생달은 명색만 떴다가 구름 속으로 잠겼는데, 동리 한복판인 은행나무가 선 이 언덕 위에는 난데없는 화광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농우회의 열두 회원들은 단체로 일을 할 때면 입는 푸른 노동복 저고리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모여 섰다. 동혁이 형제와 건배는 기다란 장대에 솜방망이를 단 것을 석유를 찍어 가며 넓은 마당을 밝히고 섰는데, 바람결을 따라 석유 그을음 냄새가 근처 인가에까지 훅훅 끼친다.
 
146
"자, 시작허세!"
 
147
동혁의 명령이 한마디 떨어지자, 회원들은 굵다란 동아줄을 벌려 잡았다.
 
148
"에에 에헤라, 지경요―---"
 
149
열두 사람의 목소리가 목구멍 하나를 통해서 나오는 듯 우렁차게 동네 한복판을 울리자, 커다란 지경돌이 반 길이나 솟았다가 쿠웅 하 고 떨어지면, 잔디를 벗겨 놓은 땅바닥이 움푹움푹하게 패어 들어간다. 여러 해 별러 오던 농우회의 회관을 지으려고 오늘 저녁에 그 지경을 닦는 것이다.
 
150
회원들의 마음은 여간 긴장되지 않았다.
 
151
자자손손이 대를 물려 가며 살려는 만년주택을 짓기 시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생각으로, 자기네들이 웅거할 회관을 지으려는 것이다.
 
152
달구질 소리가 들리자, 야학을 다니는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아직도 이 시골에는 누구나 집을 지으면 터 닦는 날과 새를 올리는 날은 품삯을 받지 않고 대동이 풀려서 일을 보아 주는 습관이 있어서 회원들 외에 어른들과 아이들이 벌써 수십 명이나 들러붙었다.
 
153
"에에 헤에라, 지경요―---"
 
154
"에에 헤에라, 지경요―---"
 
155
고요한 바닷가의 저녁 공기를 헤치는 달구질 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데, 큰 마을 편에서 징, 장구,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 온다. 여러 사람은 잠시 팔을 쉬고 그편을 바라본다.
 
156
레인 코트(우장옷)의 허리띠를 졸라맨 기만이가 저의 집 머슴꾼이며 작인들을 말끔 풀어서 술까지 취토록 먹인 뒤에, 두레를 떡벌어지게 차려 가지고 오는 것이다.
 
157
높이 든 깃발은 선들바람에 펄펄 날리는데,
 
158
"깽무깽, 깽깽, 깽무, 깽무, 깨갱깽."
 
159
상쇠잡이가 앞장을 서고,
 
160
"떵떵 떵더꿍 떵기떵기 떵더꿍."
 
161
장구잡이는 뒤를 따른다. 징소리는 점잖이 꽈응, 꽈응 하고 이슬이 흠씬 내린 잔디밭과 들판으로 퍼지다가 사라지는 그 여운이 웅숭깊다.
 
162
마중을 나간 솜방망이 불빛에, 컴컴한 공중으로 우뚝 솟아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것은, 이등 삼등까지 무등을 선 머리 땋은 아이들이 고깔을 쓰고 장삼자락을 펼치면서 나비처럼 춤을 추는 것이었다. 터를 닦는 마당까지 올라오더니, 풍물 소리는 자진가락으로 볶아치기 시작한다.
 
163
조금 있자, 풍물 소리를 듣고 성벽이 난 작은 마을과 구엉 마을에서도, 낮에 두레로 논을 매던 야학의 학부형들이 잡이를 차려 가지고 와서는 큰마을 두레와 어울렸다.
 
164
그럭저럭 언덕 아래는 머슴 설날이라는 이월 초하루나 추석날 저녁보다도 더 풍성풍성해졌다. 각처 두레가 다 모여들어 한데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징 꽹과리를 깨어져라고 두들겨 대는데, 장구잡이도 신이 나서 장구채를 이손 저손 바꾸어 치며 으쓱으쓱 어깨춤을 춘다. 거북이라는 총각 녀석이 어둠침침한 소나무 밑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청승스러이 꺾어 넘기는 새납〔胡笛〕소리는 밤바람을 타고 바다 건너까지도 들릴 듯.
 
165
잡이꾼들은 수구를 들고 장단을 맞추어 가며, 패랭이 위의 긴 상모를 돌리느라고 보는 사람까지 현기증이 나도록 곤댓짓을 한다.
 
166
"얼시구 좋다, 어리시구."
 
167
나중에는 구경꾼까지도 어깻바람이 나서 개구리처럼들 뛰면서 마른 흙이 뽀얗게 일도록 한바탕 북새를 논다.
 
168
그 광경을 바라다보고 섰던 동혁은,
 
169
"야아, 오늘 밤엔 우리가 산 것 같구나!"
 
170
하고 부르짖으며 징을 빼앗아 들고 꽝꽝 치면서 잡이꾼 속으로 뛰어들었다. 키장다리 건배도 깃대를 꼬나들고 섰다가 그 황새 다리로 껑충껑충 춤을 추며 돌아다닌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 틈에 두레꾼 속으로 하나 둘씩 섞여 들어갔다.
 
171
아들이 동네 일만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동혁의 아버지 박첨지도, 늙은 축들과 술이 거나하게 취해 가지고 와서는,
 
172
"아아니, 내가 옛날버텀 맡어 논 좌상님인데, 어떤 놈들이 날 빼놓구 논단 말이냐."
 
173
하고 난쟁이 쇰직하게 키가 작은 석돌이 아버지의 수염을 끄두르며,
 
174
"여보게 꽁배, 어서 따러오게."
 
175
하면서 군중을 헤치고 들어선다. 그는 석돌이 아버지와 술을 먹다가 풍물 소리를 듣고,
 
176
"내 자식놈이 둘씩이나 덤벼들어서 짓는 집인데 아비 된 도리에 안 가볼 수가 있나?"
 
177
하고 기운이 나서 올라온 것이다.
 
178
박첨지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팔을 걷고 곰방대를 내두르며 목청을 뽑아 달구질 소리를 먹인다.
 
179
"산지조종은 백두산이요(山之祖宗 白頭山)."
 
180
하고 내뽑으면, 달구질꾼들은 그 소리를 받아,
 
181
"에에 헤에라, 지경요―---"
 
182
하며 동시에 지경돌을 번쩍 들었다 놓는다.
 
183
"수지조종은 한강수라(水之祖宗 漢江水)."
 
184
"에에 헤에라, 지경요―---"
 
185
땅을 다지는 동네 사람들은 목이 쉬어 가는 줄도 모르는데, 그날 저녁 동혁은 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싱싱하고 씩씩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생후 처음으로 들었다.
 
186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지났다. 그 동안 한곡리 한복판에는 커다란 새 집 한 채가 우뚝하게 솟았다. 커다랗다고 해야 두 간 겹집으로 폭이 열 간쯤 되는 창고 비슷이 엉성한 집이지만, 이 집 한 채를 짓기에 회원들은 칠월 염천에 하루도 쉬지 않고 불개미와 같이 일을 하였다.
 
187
논에는 아시 두 번 호미질과 만물까지 하였고, 이제는 피사리만 하면 힘드는 일은 거진 끝이 난다. 그 동안의 한 달 반쯤은 농군들이 추수를 할 때까지 숨을 돌리는 농한기다. 그 틈을 이용해서 농우회관을 지은 것이다.
 
188
엉부렁하게나마 거진 이십 평이나 되는 집을 얽어 놓는 데 그 건축비가 불과 몇십 원밖에 들지 않았다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회원들끼리 거진 삼 년 동안이나 농사를 지어 모은 것과, 술 담배를 끊은 대신으로 다달이 얼마씩 저금을 한 것과, 또는 도야지를 치고 이용조합에서 남은 것을 저리로 놓은 것을 걷어 모으면 거진 오백 원이나 된다.
 
189
이발부의 수입은 모았다가 동리서 공동으로 쓸 솜틀을 칠십여 원이나 주고 샀고, 포패조합(捕貝組合)을 만들어서(회원은 다 여자인데, 앞바다 건너 안섬에다가 이 년 작정을 하고 굴을 번식시킨 뒤에, 조합원끼리 따먹고 장에 갖다가 파는 권리를 가지는 것) 불가불 소용이 참되는, 조그만 나룻배를 사십 원 가량 들여서 지은 것밖에는, 한푼도 쓰지 않은 채 있었다.
 
190
그들 중에서 이 회관을 짓는 데는 오십 원도 다 들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191
첫째, 기지가 민유지라 땅값이 아니 들었고, 재목은 단단해서 썩지도 않는 밤나무, 참나무, 아카시아나무 같은 것을 회원들의 집 앞이나 멧갓에서 베어 왔고, 수장목은 오동나무와 미루나무를 썼는데, '영치기 영치기' 하고 회원들끼리 목도질까지 해서 운반을 했으니 돈이 들 리 없었다.
 
192
터를 닦고 주춧돌을 박는 것부터 자귀질, 톱질이며, 네 올가미를 짜서 일으켜 세우고 새를 올리고 욋가지를 얽고 토역을 하는 것까지 전부 회원들의 손으로 하였다. 이엉을 엮을 짚도 농우회에서 연전부터 유념해 두었었는데, 여러 사람이 입에 혀같이 봉죽을 들었거니와, 회원 중의 석돌이는 원체 지위(목수)의 아들인데다가 눈썰미가 있어서 수장은 물론 문짝까지 제 손으로 짜서 달았다.
 
193
품삯이라고는 한푼도 아니 들었지만, 다만 화방 밑에 콘크리트를 하는 데 쓰는 양회와, 못이나 문고리며 배목 같은 철문만은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사다가 썼다.
 
194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 거진 두 달 동안이나 열두 사람의 회원들이 땀을 흘린 기념탑이 우뚝하게 서게 된 것이다.
 
195
그러나 서투른 목수와 토역장이들이 얽어 놓은 집이라 장마를 치르고 나니까 지붕이 새고 벽이 허물어져서 곱일을 하느라고 동혁이도 몇 번이나 코피를 쏟았다. 그랬건만 다 지어 놓고 보니 겉눈에 번듯하게 띄지는 않아도 거진 이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수용할 수가 있게 되었고, 엉부렁하게나마 헛간으로 쓸 모채까지 세웠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무실, 도서실까지 오밀조밀하게 꾸며 놓았다. 도서실에는 기만이가 사서 기부한『농업강의록』과 농촌운동에 관한 서책이 오륙십 권이나 되고, 동혁이가 보는 일간 신문과 회원들이 돌려 보는《서울시보》,《농민순보》같은 정기간행물이며 각종 잡지까지 대여섯 가지나 구비되어서, 회원들은 조그만 틈이라도 타면 언제든지 모여 와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형편을 짐작할 수 있도록 차려 놓았다.
 
196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락부를 새로 두었다.
 
197
"사철 일만 하는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빡빡하고 멋이 없다. 좀더 감정을 윤택하게 하고 모두 함께 즐기는 기회도 지어서 활기를 돋우려면 적어도 한 가지 통일된 음악이 필요하다."
 
198
는 견지에서 건배가 주창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빌리면 콩나물 대가리(보표(譜表)라는 뜻)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무슨 관현악대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 농촌에 재래로 있던 징, 꽹과리, 장구, 수구, 호적 같은 악기를 장만한 것이다.
 
199
"그런 건 천천히 장만해두 좋지 않은가. 날마두 뚱땅거리구 뚜들기면, 공청을 지어 놓구 놀려구만 드는 줄루 오해들을 허면 재미 적으이……."
 
200
하고 동혁이가 반대를 하면,
 
201
"온 별소릴 다 허네. 자넨 구데기 무서워서 장두 못 당그겠네그려."
 
202
하고 건배는 기만이를 구슬러서 새로운 풍물 한 벌을 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회원들끼리만 잡이꾼이 되어서 노는 방식을 개량하고 두레를 노는 것까지도 통제를 하게 되었다.
 
203
"자, 우리 인제 낙성연을 해여지."
 
204
"추렴이래두 내서 내일 하루만 실컨 놀아 보는 게 어떤가?"
 
205
"암, 좋구말구. 이새 저새 해두 먹새가 제일이라네."
 
206
"우리가 두 달 동안이나 집의 일은 내버려두구설랑 그 ?볕에서 죽두룩 일을 했는데, 하루쯤 논다구 누가 시빌 허겠나."
 
207
"여보게, 우리끼리만 암만 공론을 허면 소용이 있나? 우리 대장헌테 하루만 술을 트자구 졸라 보세. 건깡깡이루야 신명이 나여지."
 
208
"애당초에 그런 말은 비치지두 말게. 일전엔 동화가 또 몰래 주막엘 갔다가 성님헌테 단단히 혼이 났다네."
 
209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다 못해서 오지그릇처럼 빤들빤들해진 회원들이 회관 한 모퉁이에 모여 앉아서 새로 사온 풍물을 두드려 보다가 낙성연을 할 음모를 한다.
 
210
저녁때였다. 찌는 듯하던 더위가 한 걸음 물러서고 축동 앞 미루나무에 쓰르라미 소리가 제법 서늘하게 들린다. 회원들은 서퇴도 할 겸 하나둘씩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가서 재벽한 흙이 채 마르지도 않은 집을 쳐다보고 앉았다. 그 집을 바라다보는 그들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을 만치나 컸다.
 
211
'힘만 모으면 무슨 일이든지 되는구나! 땀만 흘리면 그 값이 저렇게 나타나고야 만다!'
 
212
그네들은 회관집 한 채를 짓는 데 단결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과, 또는 노력만 하면 그 결과가 작으나 크나 유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동시에 움집 속에서 또는 남의 집 머슴 사랑에서 구차히 모이던 때를 생각하니 실로 무량한 감개가 끓어올랐다.
 
213
'저게 내 손으로 지은 집이거니.'
 
214
하면 무한한 애착심도 느껴졌다. 그 집을 바라다보고 앉았으려면, 끌 구멍을 파다가 손가락을 다쳤거니, 사닥다리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삐고는 동침을 맞느라고 혼이 났거니, 중방과 도리를 잘못 끼다가 석돌이 녀석한테 핀잔을 맞았거니―--- 이러한 추억만 해도 여간 정다운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215
"자네 저 기둥감을 베다가 영감님헌테 몽둥이 찜질을 당했지?"
 
216
"그건 약괄세. 이걸 좀 보게그려. 여태 이 지경이니."
 
217
하고 회원들 중에 제일 다부지고 땅딸보로 유명한 정득이가 헝겊으로 칭칭 감은 발을 끌러 보인다. 그것은 저의 집 산 울안에 선 참죽나무를 밤중에 몰래 베다가, 저의 아버지가 '도둑야!' 소리를 지르며 시퍼런 낫을 들고 쫓아 나오는 바람에 어찌나 급해 맞았던지 담을 뛰어넘다가 탱자나무 가시에 발을 찔렸었다. 누렇게 곪은 것을 그대로 끌고다니며 일을 해서 그저 아물지를 못한 것이다.
 
218
사실 그네들이 부모나 동네 어른들의 반대 속에서 초가집 한 채를 짓기는 대궐 역사만치나 거창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219
"쉬이, 대장 올러오신다."
 
220
하고 정득이가 구렁이 지나가는 소리를 한다. 동혁이는 건배와 기만의 가운데에 서서 올라온다.
 
221
기만이는 여전히 건살포를 짚었는데, 오늘은 헬멧(박통 같은 모자)을 썼다.
 
222
"거기들 모여 앉아서 자네들 역적 모의를 허나?"
 
223
건배도 그 넓적한 얼굴이 눈의 흰자위와 이빨만 남기고는 흑인종의 사촌은 될 만치나 그을렀다.
 
224
"아닌게아니라, 우리끼리 무슨 비밀헌 공론을 했는데요……."
 
225
하고 석돌이가 세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본다.
 
226
"무슨 공론?"
 
227
동혁은 농립을 벗어 던지며 은행나무 뿌리에 가 걸터앉는다. 응달에서만 지낸 기만의 얼굴과 비교해 볼 때 동혁의 얼굴도 더한층 그을은 것 같다. 손바닥이 부르터서 밤콩만큼씩 한 못이 박혔고 손톱은 뭉툭하게 닳았다.
 
228
"저어……."
 
229
하고는 석돌이가 뒤통수만 긁적거리니까,
 
230
"왜 목들이 컬컬헌 게지."
 
231
동혁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232
"그러잖어두……."
 
233
하고 이번에는 칠룡이가 응원을 한다. 건배는 기만의 눈치를 보면서,
 
234
"아닌게아니라, 이 기만 씨가 낙성연을 한번 굉장히 차리구 놀자는데……."
 
235
하는 말이 끝나기 전에, 동혁은 손을 들어 건배의 입을 막는다.
 
236
"안 되네, 낸들 벽창호가 아닌 담에야 그만헌 생각이 없겠나? 허지만 말썽이 많은 판에 동네가 부산허게 떠들구 놀면 되레 오해를 받기가 쉬우이. 지금두 면장이 나와서 나를 보자구 헌대서 큰말로 갔다 오는 길일세."
 
237
하고 반대를 하였다.
 
238
"왜 무슨 말썽이 생겼수?"
 
239
나중에 올라온 동화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묻는다.
 
240
"차차 알지."
 
241
형은 자리가 거북한 듯이 대답하기를 꺼린다.
 
242
"우리 회와 상관이 되는 일이면 회원들두 다 알어야 헐 게 아니유? 면장이 우리 일에 무슨 참견이라우?"
 
243
"글쎄 뒀다 알어."
 
244
동혁은 기만의 등뒤에다 눈짓을 해 보인다. 청년들의 일이라면 한사코 반대를 하는 기만의 형인 기천이가, 면장이 나온 김에 무어라고 음해를 한 것이거니 하고 동화와 다른 회원도 짐작은 하는 눈치다. 그러나 기만이는 형과 달라 이편을 들고, 농우회의 일이라면 금전으로까지 후원을 많이 해오는 터이지만, 아우가 듣는데 형의 욕은 할 수가 없었다.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의 집에 이해관계가 되는 일이면 형에게 무어라고 연통을 할는지도 몰라서, 항상 경계를 하고 있는 터이다.
 
245
동혁은 기천의 집에 다녀오는 길에 건배와 기만이를 만나서 같이 오기는 했어도, 그들에게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건배는 탕탕 대포를 잘 놓는 대신에 말이 헤퍼서 비밀을 지킬 만한 일을 들려 주기를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회원들은,
 
246
'무슨 일이 단단히 생겼나 보다.'
 
247
하고 불안을 느끼면서도 더 재우쳐 묻지를 않고, 낙성하는 날 술 한잔도 못 먹게 하는 동혁이가 원망스러운 듯이 쳐다보다가 애매한 북과 장구만 두드린다.
 
248
기만이도 그 눈치를 챘건만, 이런 경우에 아무 말도 아니 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에게 오해를 살 듯도 해서,
 
249
"그런데 센세이(선생)가 또 뭐래?"
 
250
하고 들띠어놓고 묻는다. 그래도 동혁은,
 
251
"그까짓 건 알어 뭘 허우. 우린 우리가 헐 일이나 눈 딱 감구 허면 고만이니까……."
 
252
하고 역시 자세한 말대답하기를 피한다. 기만이는 자리가 거북하니까 꽁무니에다가 손을 찌르고 간다는 말도 없이 슬금슬금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제가 하는 일을 반대하고 양반을 못 알아보는 발칙한 놈들과 얼려 다니고 돈을 쓰고 한다고, 눈에 띄기만 하면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야단을 치는 저의 형이, 면소나 주재소까지 가서 무어라고 쏘새기질을 하고 온 것만은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53
아무튼 농우회관을 짓게 된 뒤부터 가뜩이나 시기심이 많은 기천이가, 두 눈에 쌍심지가 돋아서 그 태도가 부쩍 악화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254
동혁이가 입을 꽉 다물어 버리니까, 다른 회원들도 어떠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말이 없다.
 
255
건배는 무슨 일인지,
 
256
"저기 좀 다녀옴세."
 
257
하고는 기만의 뒤를 따라서 내려갔다. 조그만 일에도 궁금증이 나면 안절부절을 못 하는 성미라, 동혁이가 말을 하지 않으니까 혹시 기만에게 들을 이야기나 있나 하고 그 속을 떠보려고 따라가는 눈치였다.
 
258
동혁은 한참이나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창호지로 새로 바른 들창이 석양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하는 회관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골독히 하다가 회원들을 돌려다보며,
 
259
"우리 낙성식두 못 해서 피차에 섭섭헌데, 그 대신 기념될 일 하나 해볼까?"
 
260
하고 벌떡 일어선다.
 
261
"무슨 일요?"
 
262
하는 회원들의 얼굴에서는,
 
263
'간신히 오늘 하루나 쉬려는데, 또 무슨 일을 허자누.'
 
264
하는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265
"그저 괭이하구 삽허구만 들구서 나만 따러들 오게나."
 
266
하고 동혁은 회관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이을 때에 쓰던 사닥다리를 둘러메더니 산등성이를 넘는다. 회원들은 멋도 모르고 동혁의 뒤를 따랐다.
 
267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점점 엷어질 무렵에는, 회관 앞마당이 턱 어울리도록 두길 세길이나 되는 나무가 섰다.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같은 겨울에도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는 교목(喬木)만 골라서 '봄이나 가을에 심어야 잘 산다'고 고집을 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다가 옮겨 심은 것이다.
 
268
그것은 동혁이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미리 보아 두었다가, 나무 주인에게 파다 심을 교섭까지 해두었던 싱싱한 나무들이었다.
 
269
새로운 회관에 들게 되는 날 아침에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는 더한층 새되고 씩씩하였다. 조기회원들이,
 
270
"엇둘! 엇둘!"
 
271
하고 체조를 하는 소리도, 애향가의 합창도, 전날보다 곱절이나 우렁찬 것 같았다.
 
272
새 집을 구경도 할 겸 새로 닦아 놓은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는 바람에, 그 동안 게으름을 부리던 조기회원들도 전부 다 오고, 타동에서 온 구경꾼도 오륙십 명이나 되어서 운동장이 삑삑하게 찼다.
 
273
오늘은 영신이가 조직해 주고 간 부인근로회의 회원들도 십여 명이나 건배의 아내를 따라서 참례를 하였다. 아무에게도 낙성식을 한다고 광고를 한 것도 아니요, 건배는 무슨 일이든지 크게 버르집고 뒤떠들려고만 든다고 동혁이와 의견 충돌까지 되었지만, 오늘 아침만은 누구나 은연중에 농우회관의 낙성식을 거행하는 기분으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은 평소와 같이 조기회가 끝난 뒤에도 헤어지기가 섭섭한 듯이 어정버정하며 동혁을 바라다본다. 그 눈치를 챈 건배는,
 
274
"여보게, 회원두 더 모집해야 헐 텐데,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연설 한마디 허게그려."
 
275
하고 동혁의 옆구리를 찌른다.
 
276
"그건 선전부장이 헐 일이지, 왜 나더러 허라나?"
 
277
하고 동혁이가 사양을 하니까, 건배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회관 정문 앞으로 나서더니,
 
278
"여러분,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지금 이 회관을 짓자고 맨 먼저 발설을 했고, 우리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해 주는 박동혁 군이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279
하고 공포를 하고 나서는,
 
280
'인젠 말을 허든지 말든지 나는 모른다.'
 
281
는 듯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선다. 운동장에서는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동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너 어디 두고 보자'는 듯이 건배의 뒤통수를 흘겨보고는 회원들의 앞으로 나섰다.
 
282
엄숙한 태도로 여러 사람의 긴장된 얼굴을 둘러보다가,
 
283
"준비 없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284
하고 한마디 하고 나서 등뒤의 회관을 가리키며,
 
285
"이만한 집 한 채를 얽어 놓은 것이 결코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집을 지으려고 여러 해를 두고 별러 오다가, 오늘에야 낙성을 하게 된 것을 여러분도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 집은 연재 가락 하나, 짚 한 단까지도 회원들이 가져온 것이요, 목수나 미장이 한 사람도 대지 않고 우리가 이 염천에 웃통을 벗어붙이고 불개미처럼, 참 정말 불개미처럼 두 달 동안이나 일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만한 집 한 채나마 우리 한곡리 한복판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농우회원 열두 사람의 집이 아니요, 여러분이 유익하게 이용하시기 위해서 지어 놓은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곡리의 공청, 즉 공회당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286
하고 잠깐 눈을 내리감았다가 얼굴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287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 한마디만 머릿속에 깊이깊이 새겨 두십시오. '여러 사람이 한맘 한뜻으로, 그 힘을 한곳에 모으기만 하면 어떠한 일이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름내 땀을 흘린 그 값으로 이 신념 하나를 얻었습니다. 처음으로 귀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버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은 목적으로 모여서 꾸준히 힘을 써나간다면, 이버덤 더 어려운 일도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믿고저 하는 바입니다."
 
288
하고 부르짖고는 숨을 돌린 뒤에 목소리를 떨어뜨려,
 
289
"우리는 일을 크게 버르집고 겉으로 떠들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낙성식 같은 것도 하지를 않습니다마는, 그 대신 우리는 우리 동리 여러분께 좋은 음악을 들려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를 닦는 달구질 소리, 마치질 자귀질 허는 소리가 온 동리에 울리지 않었습니까? 저 소대갈산까지 찌렁찌렁 울리지 않었습니까? 그 소리가 무엇버덤도 훌륭한 음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을 무너 버리고 깨뜨려 버리는 파괴의 소리가 아니라, 새로 짓고 일으켜 세우는 건설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고 기쁜지 조금도 괴로운 줄을 모르고 일을 했습니다."
 
290
동혁은 그 말에 매우 감격해하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291
"여러분! 이 집이 터지도록 우리의 장래의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아침 저녁으로 글 배우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 집이 꽉차면 우리는 이 집버덤 더 큰 집, 또 그버덤도 더 굉장히 큰 집을 짓겠습니다!"
 
292
그 말에 회원들은 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를 한다.
 
293
그때에 건배는 여러 사람의 앞으로 썩 나서면서,
 
294
"한곡리 만세!"
 
295
하고 두 팔을 번쩍 쳐든다.
 
296
"만세!"
 
297
여러 사람이 고함지르듯 하는 만세 소리에, 새로 심은 동청나무에 앉았던 참새들이 깜짝 놀라 푸르르 날아갔다.
 
298
하루는 동혁이가 회관에서 주학을 마치고 나오는데(새 집으로 옮겨 온 후 아이들이 부쩍 늘어서 주학까지 하게 되었다) 석돌이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299
"저 강도사 댁 작은사랑 나으리가 저녁때 잠깐 만나자구 허시는데요."
 
300
한다.
 
301
"왜?"
 
302
동혁은 불쾌히 대답을 하였다. 석돌이는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대신에 얕은 꾀가 많아서 항상 경계를 하는 회원이다. 더구나 강도사 집 전답에 수다 식구가 목을 매어단 사람이어서, 이 집에 심부름을 다니는 것은 물론, 박쥐 구실이나 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강도사 집 살림살이의 실권을 쥔 맏아들인 기천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까닭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303
"글쎄, 왜 또 오라는 거야?"
 
304
동혁은 거듭 물었다.
 
305
"알 수 있에요. 조용히 꼭 좀 만나자구 일러 달라구 헙시니까요?"
 
306
"누가 왔든가?"
 
307
"아니오, 혼자 계시든걸요."
 
308
"음, 알었네."
 
309
동혁은 확실한 대답을 아니 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310
기천이는 면협 의원이요, 금융조합 감사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 비평 의원이 된 관계로 면장이 나와서 한곡리도 진흥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회장이 되도록 운동을 해보라고 권고를 하고 갔었다. 기천은 명예스러운 직함 하나를 더 얻게 된 것은 기쁘나, 군청이나 면소에서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체해야만 저의 면목이 서겠는데, 제가 수족같이 부릴 만한 청년들은 말끔 동혁의 감화를 받고, 그의 지도 밑에서 한몸뚱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저는 개밥에 도토리 모양으로 따로 베져났다. 저의 집의 논을 하고 돈을 쓴 낫살먹은 작인들 같으면, 마구 내리누르고 우격다짐을 해도 그저 '잡아 잡수' 하고 꿈쩍도 못 하지만, 나이 젊고 혈기 있는 그 자질들은 까실까실해서 당초에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워낙 기천이가 대를 물려 가면서 고리대금과 장릿벼로, 동리 백성의 고혈을 빨아서 치부를 하였고(주독으로 간이 부어서 누운 강도사는 지금도 제 버릇을 놓지 못한다. 당장 망나니의 칼에 목을 베지려고 업혀 가는 도적놈이, 포도 군사의 은동곳을 이빨로 뽑더라는 격으로 여전히 크게는 못 해도 박물 장수나 어리 장수에게 몇 원씩 내주고 오 푼 변으로 갉아모아서는, 기직자리 밑에다 깔고 눕는 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취미다. 몇 해 전까지도 아들만 못지않게 호색을 해서, 주막의 갈보, 행랑 계집 할 것 없이 잔돈푼으로 낚아들여서는, 대낮에 사랑 덧문을 닫기가 일쑤더니, 운신을 못할 병이 든 뒤에야 그 버릇만은 놓을 수밖에 없이 되었다) 저 혼자 사람의 뼈다귀인 것처럼 양반 자세가 대단해서 적실인심을 한 터이라,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들은 기천이만 눈에 띄면 무슨 노린내가 나는 짐승처럼 얼굴을 돌리고 슬금슬금 피한다. 그 중에도 성미가 부푼 동화는,
 
311
'조놈의 발딱 제치구 당기는 대가리는 여부없이 약오른 독사뱀 같드라.'
 
312
하고 먼발치로 눈에 띄기만 해도 외면을 해버린다. 그 아우는 '노새'라고 놀리기는 하면서도, '그래두 기만이는 강가의 중시조지' 하고 간신히 사람 대우를 하지만…….
 
313
'또 무슨 얌치빠진 소릴 헐려누.'
 
314
하고 동혁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기천이를 보러 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315
동화가 자꾸만 묻고, 건배까지,
 
316
"왜 혼자만 꿍꿍이셈을 치나?"
 
317
하고 궁금히 여기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면장이 왔던 날, 기천이는 술상을 차려 놓고 동혁이를 청하였다. 그날은 면장 앞이라 그런지, 평소처럼 점잔을 빼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318
"이 박군이야말로 참 대표적으로 건실헌 우리 동지입니다. 이번 그 회관집만 허두래두 이 사람이 혼자 지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319
하고 새삼스러이 동혁을 소개하였다. 소개가 아니라, 이러한 모범 청년이 제 수하에서 일을 한다는 태도다. 동혁은 '동지'라는 말을, 기만이 입에서 들을 때보다도 구역이 나서, 입에도 대지 않은 술잔을 폭삭 엎어 놓았었다. 그래도 기천이가 연방 '동지'를 찾으면서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320
"면장께서 바쁘신데도 일부러 나오신 건 다름아니라 우리 동네두 진흥회를 실시해야 되겠는데, 내야 어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인가? 허니 자네들이 힘을 좀 빌려 줘야겠네. 자네야 중요한 역원이 돼줄 줄 믿는 자리지만 다른 젊은 사람들두 다 함께 회원이 돼서 일을 해보두룩 허세."
 
321
하고 애가 말라서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동혁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322
"난 헐 수 없에요. 우리 농우회 일만 해두 힘에 벅찬데,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은 도저히 헐 수 없쇠다."
 
323
하고 딱 잡아떼고 일어섰다.
 
324
동혁이가 이번에는 버티고 가지를 않으니까, 기천이는 호출장처럼 명함을 들려 집으로까지 머슴을 보냈다.
 
325
"작은사랑 나으리께서 꼭 좀 건너오래유. 안 오면 이리루 오시겠다구 그러세유."
 
326
하고 머슴애는 어서 일어서기를 재촉한다. 기천이는 면협 의원이 되던 날 아침에 행랑 사람과 머슴들을 불러 세우고,
 
327
"오늘버텀은 서방님이라구 그러지 말구 나으리라구 불러라."
 
328
하고 일장의 훈시를 하였던 것이다.
 
329
동혁은 중문간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입맛을 다시다가,
 
330
"저녁 먹구 건너간다구, 가서 그러게."
 
331
해서 머슴을 보냈다. 가고 싶은 생각은 손톱끝만치도 없지만, 집으로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싫어서 가마고 한 것이다.
 
332
저녁 뒤에 그는 말대답할 것을 생각하면서 큰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대문간에 들어서는데 작은사랑 툇마루에서,
 
333
"아 그래 제깐 녀석이 명색이 뭐길래, 내가 부른다는데 냉큼 오질 못헌다드냐?"
 
334
하고 그 되바라진 목소리로 머슴애를 꾸짖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동혁은 '나 여기 대령했소' 하는 듯이 바로 지척에서 으흠으흠 하고 기침을 하고,
 
335
"저녁 잡수셨에요?"
 
336
하며 들어섰다. 기천은 도적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옴씰해서 반사운동으로 발딱 일어서기까지 하며,
 
337
"아, 자네 오나?"
 
338
하고 반색을 한다. 그 푼푼치 못하게 생긴 얼굴을 횟배 앓는 사람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뜻밖에 동혁이와 마주치는 순간 금시 반가운 낯으로 표변하는 표정 근육의 민첩한 움직임은 여간한 배우로는 흉내를 못 낼 것 같다.
 
339
"아 이 사람아, 난 여태 저녁두 안 먹구 기다렸네."
 
340
하는 것도 허물없는 친구를 대하는 태도다.
 
341
"그럼 시장허시겠군요."
 
342
하고 동혁은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 듯이 툇마루 끝에 가 걸터앉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343
"회관을 지은 뒤에 처음 총회가 있어서 곧 가봐야겠에요."
 
344
하고 한사코 들어가지를 않았다. 방으로 들어만 가면 으레껏으로 술상이 나오고 술을 억지로 권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345
"그럼, 예서래두 한잔 해야겠네, 술을 입에두 안 댄다니 파계(破戒)를 시키군 싶지만, 워낙 자넨 고집이 센 사람이 돼놔서……."
 
346
하고 준비해 놓았던 술상을 내왔다. 술이란 저의 집에서 사철 떨어뜨리지 않고 밀주를 해먹는,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한 막걸리 웃국이요, 안주라고는 언제 보아도 낙지 대가리 말린 것에 마늘장아찌뿐이다. 칠팔 년이나 면서기를 다니는 동안에 연회석 같은 데서는 남이 태우다가 꺼버린 궐련 꼬투리를 주워 피우면서도 단풍 한 갑 아니 사먹던 위인으로는, 근래에 교제가 부쩍 늘어서 면이나 주재소에서 양복쟁이가 나오면 으레 술까지 내는 것이다.
 
347
"하아 이거, 내가 사람을 앉혀 놓구서 인호상이자작(引壺觴而自酌)을 허니 어디 맛이 있나?"
 
348
하고『고문진보』뒷다리나 읽어 본 티를 내지 못해서 애를 쓴다. 그러나 숙습(熟習)이 난당(難當)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수습이 난방이로군' 하는 따위가 예사여서, 정말 글방에서 종아리깨나 맞아 본 사람의 코웃음을 받는 때가 많다.
 
349
기천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술기운을 빌리려는 것이다. 사실 동혁의 앞에서는 무슨 말이고 함부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농우회에도 다른 회원들 같으면 그 반수가 저의 논의 소작인이니까 여차직하면 '논 내놔라' 한마디만 비치면은 설설 기는 터이니 문제가 되지를 않고, 건배만 하더라도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원체 허풍선이가 돼서 술 몇 잔에 속을 뽑히는데 농사 터는 한 마지기도 없이 엉터리로 사는 사람이니까 돈을 미끼로 물려서 낚아 볼 자신도 있다. 그러나 유독 동혁이만은 그야말로 눈의 가시다. 천생으로 사람이 묵중해서 당최 뱃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데, 근처에 없는 고등교육까지 받아서, 마주 앉으면 제가 도리어 인금에 눌리는 것 같다.
 
350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고무신의 때가 고약처럼 묻은 버선 바닥을 쓰다듬던 손으로 술잔을 들고 쭈욱 들이켜고는, 족제비 털 같은 노랑 수염을 배비작거려서 꼬아 올리더니,
 
351
"좀 허기 어려운 말일세만……."
 
352
하고 반쯤 외면을 한 동혁의 눈치를 곁눈으로 훑어본다.
 
353
"말씀허시지요."
 
354
동혁은 '또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하면서도 들으나마나 하다는 듯이 어둑어둑해 가는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 기천이는 실눈을 뜨고 손톱 여물을 썰더니,
 
355
"자네 그 회관 짓기에 얼마나 들었나?"
 
356
하고 다가앉는다.
 
357
"돈이요? 돈이야 얼마 안 들었지요."
 
358
기천은 다리를 도사리고 고쳐 앉으며 용기를 내어,
 
359
"이런 말을 자네가 어떻게 들을는지 모르겠네만 진흥회가 생기면 회관이 시급히 소용이 되겠는데, 당장 지을 수는 없구…… 거기가 동네 한복판이 돼서 자리가 좋아. 그러니 여보게, 거 어떻게 재목값이든지, 품삯꺼정 넉넉히 따져서 내게루 넘길 수가 없겠나? 자네들은 한번 지어 봐서 수단이 났으니까, 딴 데다가 다시 지으면 고만일 테니…… 자네 의향이 어떤가?"
 
360
하고 얼굴을 반짝 쳐든다. 너무나 염치빠진 소리에 동혁은 어이가 없어서,
 
361
'얼굴 가죽이 간지럽지 않느냐.'
 
362
는 듯이 기천을 뻔히 쳐다보다가,
 
363
"왜 돈 만 원이나 내노실 텝니까?"
 
364
하고 껄껄껄 웃었다. 기천은,
 
365
"아아니, 이 사람 웃음엣말이 아닐세."
 
366
하고 금시 정색을 한다.
 
367
"글쎄 웃음엣말씀이 아니니까 웃을 수밖에 없군요."
 
368
동혁은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을 우러러 다시 한번 허청웃음을 웃었다.
 
369
"허어 이 사람, 그래두 웃네그려. 그 집을 이문을 붙여서 팔라는데 실없이 웃을 게 뭐 있나?"
 
370
기천은 동혁이가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눈살을 찌푸린다.
 
371
"글쎄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 집은 돈 아니라 금덩어리를 가지구두 팔거나 사지를 못헙니다.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맘대루 될 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억만 원을 주구두 남의 정신만은 사지를 못헐걸요. 그 회관을 팔려면 단돈 백 원 어치두 못 될는진 모르지만 우리 열두 사람이 흘린 땀으루 터를 닦었구요, 붉은 정성으루 쌓어 논 기념탑이니까요. 우리 손으루 부셔 버린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두 그 집엔 손가락 하나 대지를 못헙니다!"
 
372
"아아니, 글쎄 그런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허구 헌 말일세."
 
373
"혹시나라뇨? 한 단체가 공동으로 합력을 해서 지어 논 집을, 나 한 개인이 팔어먹을 생각을 혹시나 허구 있을 것 같어서, 그런 가당치 않은 말씀을 끄내셨나요?"
 
374
이 한마디에 기천은 고 빳빳하던 모가지가 자라목처럼 옴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375
"……"
 
376
기천은 눈만 깜짝깜짝하고 담배를 붙여 물었다 부벼 껐다 하며 속으로 안간힘만 쓰고 앉았다.
 
377
'돈으로도 굴레를 씌울 수 없는 이 젊은 녀석을 어떡허면 꼼짝 못하게 옭아 넣을까.'
 
378
하고 벼르고 있는 것이다. 한곡리서 대를 물려 가며 왕 노릇을 해오던 터에 역시 대를 물려 가며 '소인 소인' 하고 저의 집 전장을 해먹던 상놈인 박가의 자식 하나 때문에, 위신이 떨어지고 돈놀이 해먹는 세력까지 은연중에 꺾이는 생각을 하면 이가 뽀드득뽀드득 갈렸다. 그러나 자는 호랑이 코침 주기로 동혁이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열두 회원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벌떼처럼 일어날 듯한 데는 겁이 버럭 났다. 더구나 한번 심술만 불끈 하고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동화가 무슨 짓을 할는지 그것도 무서웠다. 동화에게는 두어 번이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양 사나운 꼴을 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자에 와서, 눈이 제자리에 박히고 귀가 바로 뚫린 사람이면 한곡리에서는 박동혁이가 중심이 되어 동리 일을 하고, 인망과 인심이 농우회원에게로 쏠린 줄로 인정을 하는 데는, 눈에서 쌍심지가 돋으리만치 시기심이 났다. 그래서 어떠한 수단이든지 써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헤살을 놓을 계책을 생각하느라고 밤이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장차 발기될 진흥회의 역원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해도 말을 아니 들으니까, 그 회관을 몇백 원이라도 주고 매수를 할 꾀를 낸 것이었다.
 
379
동혁은 갑갑한 듯이,
 
380
"그만 가봐야겠에요."
 
381
하고 뻣뻣하게 한마디를 하고 일어선다. 기천은 놓치면 큰일이나 날 듯이 동혁의 손을 잡고 매달리듯 하며,
 
382
"여보게 동혁이,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라구 너무 빼돌리질 말게. 나두 동네 일이 허구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383
하고 사뭇 애원을 한다. 동혁은, 잡힌 손이 냉혈동물의 몸에나 닿은 듯이 선뜩해서 슬며시 뿌리쳤다.
 
384
기천은 또다시 실눈을 뜨고 무엇을 생각해 보더니,
 
385
"그럼, 자네들 회에 나 같은 사람두 회원 될 자격이 있나?"
 
386
하고 마지막으로 타협안을 제출한다.
 
387
" '만 삼십 세 이하의 남자로 회원 반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입회를 허락한다'는 농우회의 규약이 있으니까요."
 
388
동혁의 대답은 매우 냉정하다.
 
389
"그럼, 사십이 넘은 나 같은 인생은 죽어 버려야 마땅허겠네그려?"
 
390
기천은 간교한 웃음을 짓는다.
 
391
"아, 그래서 어떡허게요. 그렇게 유력허신 분이 돌아돌아가시면 우리 동네의 큰 손실일걸요."
 
392
하고 동혁은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
【 】7.불개미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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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薰) [저자]
 
193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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